코다 쇼세이 이라크 피살 사건
イラク日本人青年殺害事件
2004년 10월 유일신과 성전에 의해 일본인 여행객이 피살된 사건.
1. 희생자의 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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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다 쇼세이(香田 証生). 1979~2004. 일본의 평범한 기독교 집안 출신으로[1] 재학 중 취업을 전전하기 위해 고등학교를 중퇴한 신분이었다. 이후 유학 및 취업을 목적으로 뉴질랜드로 떠나게 되고, 얼마 안 가 비슷한 목적으로 이스라엘에 정착했다.
여기까지는 미래를 찾아 세계를 떠도는 평범한 청년처럼 보이지만...
2. 당시 국제 정세
2003년에 이라크 전쟁이 종결되었지만, 후세인의 잔당과 알 카에다 같은 테러리스트가 이라크 내부에서 말썽을 부리면서 혼란은 계속된 상태였다. 이에 고이즈미 총리는 이라크 특조법을 정하여 자위대를 파견하는 등 이라크 부흥 지원 정책을 실시하였지만, 얼마 뒤 이라크에서 일본인 외교관 피살 사건[2] 이라는 통수를 맞으면서 일본 국민은 충격에 빠지며 중동에 대한 경계심까지 생겨나기 시작했다. 더욱이 일전에 유일신과 성전에 의해 닉 버그에다 이웃나라 국적인 김선일 또한 이라크에서 살해당해 희생자가 추가될지도 모르는 판국이기도 했다.
3. 사건의 경위
3.1. 피랍과 인질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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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수 직전의 코다 쇼세이'''
한편, 이스라엘에서 멀쩡히 머무르고 있던 코다 쇼세이는 위험한 상황을 지켜보고도 돌발적으로 이라크로 향하겠다는 선언을 하였고,[3] 결국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요르단을 거쳐 이라크로 향했다.[4]
요르단에서 버스를 통해 바그다드로 도착한 코다 쇼세이는 100달러(10만원)밖에 없었다. 당시 테러리스트+외국인에 대해 겁이 있던 이라크의 숙소들은 100달러밖에 안 들고 온 그를 받아주지 않았고, 그는 노숙을 단행하다가 납치당하고 만다(...) 하필 납치된 곳이 유일신과 성전.
코다 쇼세이를 잡은 유일신과 성전은 지난번에도 그랬듯이, 협박 영상을 보내며 인질극을 벌이기 시작했다. 요구 내용은 48시간 이내로 자위대를 철수시킬 것. 이는 일전에 김선일 납치 후 요구한 내용과 비슷했다. 협박 영상에는 코다 쇼세이 본인이 요구 내용을 들어줄 것을 요청하는 장면도 있었는데, 절규를 지르던 김선일과는 달리 충격에 빠진 국민들과 총리에게 사과를 시작으로 담담한 말투로 요청하는 태도였다. [내용] 이러한 배경은 아랫 부분을 참고할 것.
3.2. 본국의 반응
결론부터 말하자면 일본 정부의 대응 역시 '''거절'''이었다. 고이즈미 총리는 "본국 소환은 없다" 라는 말로 단언했으며, "'''협상은 없다'''" 라는 자세로 일관하였다. 이에 대해 일본 여론은 정부를 욕하기는 커녕 오히려, 무모한 행위를 벌여 일본에 혼란을 초래한 코다 쇼세이와 이를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은 그의 가족들을 비난하는 반응이었다. 일본 여론은 인질과 그의 가족 때리기를 시전하여 가족은 욕과 비난 섞인 문자와 팩스에 시달렸으며, 급기야 죄인 같은 모습으로 기자회견에 나타나 총리와 국민에게 사과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그렇게까지 국민 대다수는 인질 구출에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물론 적극적으로 나서봐야 자위대 피해만 커질 게 뻔했던 점도 있긴 하지만.
3.3. 참수와 그 이후
결국엔 48시간이 만료되어 협상은 결렬되었고, 유일신과 성전은 경고대로 코다 쇼세이를 참살했다. 당시 그의 나이 만 24세. 2004년 10월 31일 새벽에 동양인으로 추정되는 목 없는 시신이 먼저 발견되었고, 다음날 코다 쇼세이의 참수를 집행하는 영상이 공개되었다. 영상에서 유일신과 성전은 일본정부를 비난하며 일본정부의 몸값제의가 있었으나 거절했다고 밝혔다. 특이하게도 다른 인질들과는 다르게 주황색 죄수복을 입지 않고 눈도 가려지지 않은 채 사복을 입은 상태에서 참수되었는데, 사후 부검 결과에서 머리에 총상이 발견되고 여러 고문 흔적이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코다 쇼세이의 저항이 매우 격렬했음을 알 수 있다.[5] 참수된 시신은 집행 당시 깔아놓은 성조기에 싸인 채 시신에는 총상의 흔적이 있었다고 한다. 발견된 시신은 일본으로 송환되어 유가족에게 전달되었고, 기독교 집안의 영향으로 기독교 형식으로 장례가 치러졌다고 한다.
한편 여론의 반응과 별도로 일본 정부는 이 사건을 살인죄로 분류하여 검찰에 송치한 상태이며, 현재 공소시효가 영구 중단되었다. 그러나 김선일 사건과는 다르게 범인 중 한 명은 신원이 밝혀졌으며, 범인의 이름은 후세인 파미 바드르로 2006년 초에 체포되어 그 해 11월 사형 선고를 받았다. 당시 사형 판결 뉴스로, 영문으로 되어있다. # 현재는 사형이 집행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참수를 집행한 인물로, 위의 참수 직전사진에서 맨 왼쪽의 인물이다.
쇼세이를 참수한 범인이 김선일을 참수한 유일신과 성전 소속이고, 체포 직후 심문에서 불교 신자를 포함해 무려 자신이 116명이나 참수했다고 자백한 바 있기에, 이 자가 김선일을 참수했던 자일 가능성도 존재한다.
죽은 이후로도 국민들의 반감은 계속되었는지, 네티즌 사이에서는 카섹하다 걸린 사진이 돌아다니고 중딩들이 참수 장면을 패러디해 찍어올리는 등 조롱거리가 되어버렸다.
10년 뒤 일본의 유카와 하루나도 비슷한 최후를 맞게 된다. 이 사건의 범인인 IS는 멸망했다.
4. 김선일 사건과의 유사점
흥미로운 점은 요구내용 부터 피살까지 김선일 피살사건과 판박이었지만, 파헤쳐보면 한국과 대조적인 부분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피해자에 대한 질타가 심했던 일본과는 달리 한국은 정부의 태도를 불가피하다고 보며, 피해자 역시 조롱하는 목소리가 많았으나 불쌍히도 여겼으며, 피살 뒤에도 응징의 뜻을 보였다. 또한, 협박 영상을 통한 피해자의 태도와 유가족의 입장 등에서도 한국과 대조되는 점을 보였다.[6]
일본에서는 '와(和)'라고 하는 개인이 전체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정신 문화가 있는데, 이것에서 기인된 행동으로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샘물교회 사태를 봐도 한국은 불필요한 목적으로 떠났다가 피랍당한 인질도 일단 구출하고 나서 욕을 하고 구출 비용을 받자고 했던 반면,[7] 일본은 "멋대로 간 사람이 잘못한 것", "죽든 말든" 라는 반응으로 책임은 전적으로 피랍자에게 물어버리며, 구출은 대개 포기해 버린다.[8] 따지고 보면 한국과 일본의 문화와 국민성 차이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사실 '''개인주의 문화'''가 원래 그런 것이라 서양도 마찬가지다. 이기주의와 다른 것이, 이기주의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타인에게도 피해를 끼치는 것을 서슴치 않는다면, 개인주의 문화권에선 개인의 자유를 보장해주고 터치를 하지 않되 타인에게 피해를 끼쳐선 안되고, '''본인의 행동에 따른 결과도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 비슷한 시기에 피살된 미국인 닉 버그 역시 본인이 간 거였고, 본인의 선택으로 그렇게 된 거니 본인도 담담하게 받아들였으며, 심지어 유가족 인터뷰에선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며 '아들이 선택한 길이니 존중한다'라는 식으로 담담하게 인터뷰하여 한국의 문화와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왜냐하면 당시만 해도 한국의 정서상 유가족은 '''이건 다 정부 탓'''이라며 정부를 욕하며 소송을 걸거나, 피해자는 협상 인터뷰에서 눈물을 흘리며 살려달라며 빨리 군대 철수하라고 주장하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정서가 컸기 때문이다.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는 개인주의와는 달리, '''전체주의는 한 명이 잘못하면 전체가 다 책임을 지는 방식'''이다. 비록 내가 잘못해서 벌어진 일이라도 다같이 책임을 져야 하므로 본인의 책임은 덜어진다는 장점은 있으나, 대신 정부와 시민들이 서로를 매의 눈으로 감시하고 통제하기에 개인의 자유가 위축될 수 있다는 부작용이 있다.
실제로 샘물교회 사건 때도 정부가 분명 테러첩보 경고를 고지했음에도 오히려 피해자들은 그 경고판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는데(아마 무사히 다녀왔으면 나 이런 데 위험 무릅쓰고 봉사활동 다녀왔다는 인증샷이 되었을 수도), 피해자 유족들 중 일부는 출국을 막지 않은 정부가 잘못이라며 정부에 소송을 걸었다가 패소하기도 했다. '''본인의 선택으로 갔음에도 행동의 결과를 본인이 책임져야 하는 게 아니라 정부나 우리 사회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중국이나 한국에선 정부의 통제가 서양보다 심한 편인데, 입산 규제만 봐도 그렇다. 일본의 알프스에 간 한국인 산악인들이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한국 여론은 ''''일본 정부는 그때 뭐했나''''라며 일본 정부를 질타하는 분위기가 있었고, 방송에서도 진행자가 '저런 안 좋은 상황에 입산 규제하지 않은 일본 정부가 잘못 아닌가'라고 했으나, 패널로 참가한 산악인 전문가가 말하길 '서양 등 산악이 발달한 선진국에선 통제하지 않는다'고 한다. 물론 위험하다고 경고는 해주나, 못 가게 막는 것은 개인의 자유 침해로 오히려 정부가 소송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샘물교회 피랍사건 이후에도 정부가 출국 허가를 내주지 않자 개인의 자유를 침해했다며 정부에 소송을 거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는데, 이런 경우는 국익에 심각한 피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에 여타의 선진국들도 마찬가지로 규제한다.
[1] 평범한 기독교 집안이라고 하지만, 사실 일본에서는 기독교 신자의 비율이 7~80년대에 비해 비중이 많이 낮은 편이라, 기독교 집안만 해도 특별하게 여겼다. 참고로 코다 쇼세이가 가톨릭, 개신교, 혹은 정교회 중 어느 교파에 속해 있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2] 이라크로 파견된 일본인 외교관 2명이 차량으로 이동하던 중 현지인 운전자 1명과 함께 총격으로 사살된 사건이다. 이라크 전쟁 종전 이후 최초의 일본인 피살 사건. 현재까지도 범인은 체포되지 않았으며, 후세인 잔당 주동설이니 미군 오발설이니 진상도 아직 밝혀지지 않은 듯.[3] 연락한 지인의 증언으로는 전시 상황을 직접 보고 싶어 하는 호기심 때문이라고 했다지만 정확한 진상은 알 수 없다.[4] 당시 이라크로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요르단을 거치는 것이었다. 안전 문제였는지 이스라엘에서 이라크로 직행하는 교통 수단은 없었고, 이스라엘과 육로로 국경을 넘나들 수 있는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가 요르단이었기 때문.[내용] 김선일과 마찬가지로 주위의 테러범들이 모두 물러간 채 혼자서 발언했는데 무릎을 꿇고 고개를 푹 숙이고 죄인처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이즈미씨, 그들은 자위대가 이라크에서 철수하기를 원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 목을 베겠다고 합니다. 죄송합니다.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5] 위의 협박 영상과 비슷하게 끝까지 담담한 태도로 고개를 숙이고 카메라를 보지도 않은 채 칼에 목이 찔렸을때 잠깐 신음을 내다가 그후로는 잠잠해졌다.[6] 그렇다고 김선일 유가족이 진상을 부렸다는 것은 아니지만, 김선일 아버지와 누나 등 유가족 측근 4명은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으나, 2007년 김선일씨의 피살 과정에서 정부의 과실 또는 불법 행위는 없었다는 원고 패소 판결이 내려졌다. 더 정확히는 교회 측이 진상을 부렸다. 국가유공자로 해달라느니, 순교자라고 난리쳤으니.[7] 몰론 구출된 뒤 욕을 미친 듯이 먹었고, 그들 때문에 여행금지 제도가 만들어졌다.[8] 이런 태도는 10년 뒤 IS 일본인 인질극에서도 보였다. 고토 겐지는 그나마 동정을 받지만, 그건 지인을 구출하려는 올바른 일을 하다가 죽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