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

 


1. 개요
2. 사건의 경위
3. 논란과 비판
4. 영향
4.1. 개신교의 평판 저하 가속화
4.2. 태상호 기자의 증언
4.3. 국외 반응
4.3.1. 아리프 아쉬츠, 이스탄불에서 온 장미도둑
4.3.2. 국외 인터넷에서의 반응
4.3.3. 종교계 반응
4.4. 이 사건의 보도에 대한 논란
4.4.1. 보수 언론의 과장 왜곡 보도
5. 기타
5.1. 다시 간다?
5.2. 후일담... 그리고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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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 당일 찍은 사진으로, 이 사람들이 얼마나 위험성을 간과했는지를 보여준다. 참고로 저 사진과 관련하여 10년 넘게 게시 중단/블라인드 처리가 진행되고 있다. 블라인드 당한 사람의 포스팅, 아카이브. 이 이글루스 댓글에도 언급되어 있듯이 반성은커녕 지금도 개신교 측은 이러고 있다. 우측의 푸른색 옷을 입은 사람은 배목사에 이어 2번째로 사망한 심성민이다.
한국의 개신교인들이 정부의 엄중 경고를 무시하고 이슬람교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겠다는 이유로 분쟁 지역인 아프가니스탄에 무단으로 입국했다가 결국 현지 과격단체 탈레반에게 인질로 붙잡힌 사건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위험 지역에 뛰어드는 국민들을 법으로라도 막기 위해, 기존의 여행유의-여행자제-여행제한[1] 제도를 고쳐 여행금지 제도라는 것을 만들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해당 문서에 자세히 설명했다.
이 사건이 인터콥과 관련이 있다는 논란이 있는데, 그 이유는 2006년에 일으킨 아프가니스탄 평화 축제 사건 탓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표면적으로 큰 상관은 없다.''' 단, 선교를 간 인원 중 일부가 인터콥 소속이라는 말은 있고,[2] 간 이유 중 하나가 그 자의 설득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있다. 하지만 확실한 사실이 아닌 만큼 확언하진 말 것. 우선은 없을 가능성이 더 크기도 하다.

2. 사건의 경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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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7월 13일 분당샘물교회 배형규 목사 외 분당샘물교회 남녀 교인 19명이 아프가니스탄 단기선교 목적으로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출국, 베이징두바이를 거쳐 14일에 카불에 도착했다. 출국 인원은 (배 목사 포함) 20명이었지만, 현지에서 활동하던 한국인 선교사 3명이 통역 및 안내 목적으로 합류해서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동안 총 23명이 움직였다. 이들은 7월 22일에 아프가니스탄에서 출국하여 23일에 인천공항으로 입국할 예정이었다. 7월 19일 오후 이들이 카불에서 칸다하르로 버스를 타고 이동하던 중 카불에서 170여 km 거리에 있는 가즈니 주 카라바그 지역에서 탈레반이 이들을 납치했다. 참고로 당시 월간 군사잡지 플래툰의 기사에서는 이들이 지나갔던 길을 촬영했는데, 해당 지역을 호위 차량들 없이 버스 1대만으로 움직이는 것은 자살행위라고 평가했다.
7월 20일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에 파견한 한국군을 21일 정오까지 전원 철군할 것"과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수감한 탈레반 인원을 전원 석방할 것"을 요구했다. 7월 20일부터 22일까지 계룡대의 별장에서 군 관계자들과 골프 모임 등을 할 예정이었던 노무현 대통령은 21일 새벽, 급히 상경하여 대책 마련에 나섰다. 이후 탈레반은 협상 시간을 하루하루 연장했다. 25일 탈레반은 협상이 결렬되었음을 선언하고 인질 중 남자 1명을 살해했음을 밝혔다. 또한, 26일까지 대한민국 정부가 아무 반응이 없을 경우 남은 인질들을 살해하겠다고 협박했다. 26일 정부는 피살자가 배형규 목사(42)임을 확인했다. 탈레반은 이후로도 협상 시간을 하루씩 연장하다가 30일 심성민(29)도 살해했다.
8월 7일 외교통상부는 아프가니스탄을 여행금지국으로 지정했다. 10일에 처음으로 한국 정부와 탈레반이 대면 협상을 시작했으며, 13일에 탈레반은 건강이 악화되던 여성 인질 2명을 석방했다. 이후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중재하여 8월 29일 인질 12명이 석방되었고, 30일에는 남은 7명이 석방되었다. 피랍된 지 42일 만이었다. 먼저 석방된 2명을 제외한 나머지 생존 인원 19명은 9월 2일에 한국에 도착했다.
한국 정부는 대한민국 육군 특전사를 투입하여 구출해 오는 방법과 협상 중에서 고민을 많이 한 모양이고, 미군 역시 구출을 위해 특수부대를 준비시켰다. 하지만 현지의 미군과 신생 아프간군도 함부로 못 들어가는 첩첩산중의 땅굴 속으로 병력을 투입하면 말 그대로 대규모 대 게릴라전이 되어 인질은 인질대로 죽고 특수부대는 특수부대대로 피해를 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성공한다고 해도 상당한 피해를 각오해야 했으므로 결국 협상을 통해 인질들을 빼오는 길을 택했다. 그나마 이라크에서 날뛰면서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고는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인질의 목을 자르는 유일신과 성전이라는 이라크 무장단체와는 다르게 당시의 탈레반은 최소한의 협상의 여지는 있었던 것이 불행 중 다행이다.

실제로 특전사 대테러요원들이 아프가니스탄 현지에 급파되어서 인질 구출 작전 준비를 했었다는 것이 훗날 밝혀졌다. # 아카이브 결국 협상 타결로 인질들이 석방되어서 실작전 투입은 되지 않았지만 구출 계획 구상을 위한 억류 지역의 지형 정보 조사, 탈레반 무장세력의 이동 경로 및 은거지, 동향 등의 첩보 수집과 무기 분석 등의 임무를 수행했던 것이 인질이 무사히 풀려나는 데 일정부분 기여한 공로로 인정받아 그 특전사 대원들 중 일부가 훈장 및 표창을 받았다. # 정부의 인질 석방 노력을 적극 지원하도록 카불로 파견된 군사협조단 또한 공로를 인정받아 카불 군사협조단장을 맡은 육군 준장 전인범 장군 등은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그리고 아예 특전사 1~2개 여단을 투입해서 현지에 있는 미군, 아프가니스탄 정부군, 국제안보지원군의 협력을 받으며 가즈니 주의 탈레반을 소탕하려는 작전도 합참이 구상했었고, 청와대에서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까지 이런 방안이 보고되었다는 것이 밝혀지기도 했다. # 아카이브
한국 정부 대표단과 탈레반의 협상이 성공적으로 타결되어 아프가니스탄 파견 한국군의 연내 철수와 아프가니스탄에 개신교 선교단 파견을 중지한다는 등의 5개 항에 합의한 뒤 남은 한국인 인질 19명을 전원 석방하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이 공표되었다.
납치주체인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을 1996년부터 2001년까지 실제로 통치한 엘리트 무장 세력으로서 협상 전술이나 언론 관계, 대중 심리전 등에 능숙했다. 또한, 납치된 2007년 7월 19일부터 풀려난 후 한국에 입국하는(사건이 완전히 종료되는) 9월 2일까지 기간이 44일이나 되었던 점, 인원이 23명이나 되었던 점, 한국의 개신교계가 엄청난 관심을 가졌던 점 등이 고려되어 언론사에서는 국내 단일 사건 사고로는 사상 최대로 추정되는 엄청난 물량의 보도들을 쏟아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수많은 각종 의혹 및 해명이 있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07년 9월 당시 포스팅 및 기사 모음을 참고하면 된다.

3. 논란과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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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태의 근원지였던 분당샘물교회. 이로 인해 '똥물교회', '좆물교회'라고 비꼬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 교회가 있는 건물인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 한솔프라자는 두 동으로 지어졌다. 샘물교회가 한 층을 쓰던 건물은 샘물교회와 1층의 식당 등 몇 업체 덕분에 죽은 건물을 근근이 면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를 계기로 샘물교회가 오히려 세력을 불려 건물 전체를 접수했다. 그래서 지금은 건물 간판 자체가 샘물교회다. 나머지 한 동은 일종의 폐건물 비스무리하게 된 건물이다. 리모델링 공사를 하다가 중지된 지 오래되었고, 2009년에는 건물 자재에서 석면이 검출되어 한바탕 홍역을 치른 바가 있다. 결국 교회 이외에는 텅텅 빈 건물이 되어버렸다. 2015년에 리모델링한 후 분양을 시작했는데, 여기에 샤오미 공식 스토어가 들어온다는 점을 주요 홍보 포인트로 삼았다.
대한민국 정부의 중동 외교의 실패의 결과라는 의견도 있는데, 일반인들이 정부 경고에도 불구하고 현지인과 현지 정부조차도 오지 못하게 하는데도 '무법천지' 아프가니스탄에 닥돌해서 극성 테러 단체에 납치된 이상 정부로서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정부가 이들을 구하려고 군대 수만 깔아서 선전포고할 수도 없는''' 일이고 군대를 보내서 구출하는 것이 확실하면 모를까, 그렇게 해서 살아 돌아온다는 보장도 없다. 물론 탈레반을 다수 사살하고 납치 주도한 급의 간부들은 잡아다 국내 재판에 세워 교도소 평생 수용을 명하는 식으로 보복을 할 수는 있겠지만 탈레반 100명, 1000명을 죽인들, 몇만 명을 잡아다 가둔들, '''우리 국민이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다.''' 그렇다고 '스스로 순교하겠다며 갔으니 그냥 죽어라'고 방치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고,[3] 애초에 탈레반(넓은 범위의)이 그리 쉽게 소탕할 수 있었다면 이미 털리고 물러난 소련군이나 천조국 군대라고 불리는 미군이 지금까지 아프가니스탄에서 저러고 있을까?
이 일이 있기 전에 이라크에서 일하다 한국군의 이라크 철수를 요구한 무장 세력에 의해 납치되어 결국 참수당한 김선일의 경우와 비교해 볼 만하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결국 '근처에서 알짱거리던 한국인'이라는 사실은 다르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여론도, 정부의 대응도 크게 달랐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다를 수밖에 없다. 근처에서 알짱거리던 한국인이니 마찬가지라고 할 수 없는 것이 김씨는 선교 목적이 있긴 했었어도 기본적으로 일하러 간 것이다. 무역상사의 직원으로서 합법적으로 출국 및 취직했다가 변을 당했다. 편법으로 몰래 입국해서 위험 지역에서 나 잡아가라는 거나 다름없이 최소한의 안전 조치도 안 갖추고 돌아다닌 사람들과 다르다. 김선일도 내심 선교할 생각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가 무슬림들에게 성경 들이밀고 찬송가 불러서 잡혀갔다는 증거는 전혀 없고, 그는 (위험하긴 하지만) 합법적인 직장생활을 하다가 납치당한, 이견의 여지가 없는 불쌍하고 무고한 피해자다.
반면, 샘물교회 사람들은 무단으로 위험국가에 들어가 스스로 보호하려는 조치도 없이 대놓고 선교한다고 다니다가 잡혔다. 당연히 반응이 다를 수밖에 없다. 심지어 김선일 사건 이후의 일이다. 선례가 있으니 당연히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대놓고 무시했다. 즉, 김선일이 갈 때만 해도 중동 선교는 '위험한 행동' 수준이었다면, 샘물교회 교인들이 갈 때는 '''하다가 죽을 수도 있는 행동'''이 된 상황이었다. 오히려 김선일 사건 이전까지는 중동 파병을 "병역도 마무리하고 돈도 벌 수 있다"고 반기는 병사들도 있었다. 사고 당시 괜히 국가에서 이들의 출국을 막은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불법적으로 몰래 간 것도 모자라 여행제한국가 표지 앞에서 비웃듯이 기념사진을 찍은 것만 봐도, 이들이 위험에 얼마나 무감각하고 한없이 가벼운 태도로 갔는지 알 수 있다.
이글루스의 정치, 역사 관련 파워 블로거였던 Sonnet은 이 사건과 아프가니스탄 침공 당시 CIA의 요원 중 1명이 남긴 회고록을 비교하며 다음과 같은 분석을 내놓았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재미있는 물가를 하나 발견할 수 있다. 다년간의 전투 경험을 가진 무자헤딘 1만 5,000명을 거느린 아프가니스탄 최대 계파 보스를 동원해 탈레반을 치게 만들고 그 정권을 붕괴시켰을 때, 작전 대가로 치른 금액이 현찰박치기 500만 달러라는 것이다.

'''2007년 여름 벌어졌던 한국 단기선교단 납치 사건 당시 인질의 몸값으로 치렀을 것으로 추정되는 비용이 100만에서 4,000만 달러까지 다양한데, 어느 것이 진실에 가까운 것으로 밝혀지든 간에, 이 500만 달러와 비교해서 감을 잡으면 좋을 거라고 본다.'''

원문, 아카이브.

다시 말해서, 만약 이들을 빼내오려고 돈을 준 것이 사실이라면, 당시 이들의 몸값으로 탈레반에게 건넨 돈은 미군이 1만 5천 명 규모인 아프가니스탄 최대 군벌 하나를 통째로 매수하는 데 든 돈에 거의 근접하거나 그 이상이 될 수도 있는 엄청난 액수라는 말이 된다.
사족을 달자면, 이 사건에서의 탈레반 무장 단체는 땅굴에서 숨어 지내거나 점조직 같이 움직이는 게릴라성의 무장 집단이지 정권을 지키고 있는 그 당시의 탈레반이 아니다. 어느 한 곳을 지키고 있는 세력은 뛰어난 방어 요새라도 갖고 있지 않는 한 토벌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게다가 김만복 국정원장의 지나치게 잦은 언론 등장, '썬글라스 맨' 으로 통칭된 국가정보원 요원 협상자의 귀중한 인력 정보 노출 등 국가정보원 자체도 대단한 손실과 비판을 면치 못했다. 김만복 국정원장은 그 외에 여러 것으로도 까였다.
또한, 기본적으로 해외선교 활동에 긍정적인 열성적 개신교 신자들의 경우도 이 사건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인 경우가 많다. 해외선교 활동을 지지하는 사람들이라도 아프가니스탄처럼 극도로 위험한 지역에 어리고 미숙한 학생들 중심으로 이루어져 신학적 지식과 전문 지식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선교단을 1주일 정도 단기로 보내는 것은, 선교활동이 아니라 '''그냥 쇼'''나 '''미친 짓'''으로 치부한다. 아프가니스탄처럼 극단적인 위험이 상존하는 지역에는[4] 선교단 파송을 포기해야 한다거나, 파견할 것이라면 장기간에 걸쳐 철저한 교육과 준비를 거친 전문적인 선교사 중심으로 정예 팀을 꾸려서 보내야 한다는 것이 이 사람들의 입장이다.
개중에는 이 문제를 일종의 세대론과 권력관계 문제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샘물교회 내에서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나이 든 사람들이 위험 지역 아프가니스탄에 선교단을 보냈다는 명예는 갖고 싶은데, 자신들이 진짜 가기는 무서우니 철 없는 젊은 사람들을 충동질해서 사지로 내몬 것이 아니냐고 하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는 '노인들이 젊은이를 희생양으로 삼는다.'는 세대 갈등론에 기반한 주장이지만, 이런 주장을 하거나 동의하는 사람 중에는 나이 지긋한 사람의 비율이 높다는 것이다.

4.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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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개신교의 평판 저하 가속화


2007년 당시 개신교는 대내외적인 불신과 이미지 추락 가운데, 한국의 개신교 초기의 부흥운동을 본받은 의욕적인 부흥운동[5]을 펼쳤지만 '''되려 이 사태가 찬물을 제대로 끼얹어 버렸다.''' 이 사건을 계기로 개신교 내부에서도 '일방주의적인 선교를 반성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늘 그렇듯 개혁적 목소리는 비주류인 탓에 묵살당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리처드 도킨스만들어진 신이 이 사건이 일어나기 바로 얼마 전에 출판되었는데, 이 사건으로 반기독교무신론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면서 덩달아 <만들어진 신>도 꽤 잘 팔리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1980년대 초에 시작해서 2000년대에 단군상 절단인증 사건에 의한 반발여론 이후 PC통신을 시작으로 서서히 관심을 모으고 있던 반기독교 운동은 이 사건을 계기로 2007년 전후에 급격히 팽창하였다. 요새 반기독교 세력들이 이렇게도 늘어난 계기가 바로 요 사건이라 봐도 무방하긴 하다. 뭐, 그 전에도 여러 가지 사건사고들로 이미지가 매우 나빠지긴 했지만 말이다.
사실 이들을 보낸 특정 교회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 한국 선교사들 상당수가 해외 극빈 지역으로 가서는 현지 사정이나 반감을 눈곱만큼도 배려 않고 막무가내로 개신교 선교를 시도하여 도리어 개신교에 반감을 키운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2007년 피랍사건 당시에도 샘물교회 봉사단이 들어오기 몇 년 전부터 이미 아프가니스탄은 아프가니스탄 평화 축제 사건을 비롯한 온갖 병크 때문에 '''한국이라면 치를 떠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더욱이 이슬람교는 비신자를 멸시하고 '''배교자라면 죽여도 된다고 본다.''' 이 때문에 배교자는 사람으로 안 여기고 망명 뒤에도 온갖 테러를 가할 정도다. 국가적으로도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물론 이렇게 개종자를 잔혹하게 대하는 행태는 (개신교를 비판하는 것과는 별도로) 이슬람 근본주의 문서에 나와있듯이 무슬림들을 경멸의 대상으로 분류하게 하는 데 아주 큰 몫을 한다. 상황이 이런데 이슬람을 대상으로 한 선교를 쉽게 보면 아주 큰일나는 것이다.
비개신교인인 한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선교도 별 재미를 보지 못하는 것이 현재 한국의 개신교인데, 배교=피살인 이슬람교도들을 대상으로 선교를 하겠다는 것이 웃기는 소리다. 이 자들은 쿠란을 제멋대로 해석해서 테러를 일삼는 ISIL과 크게 다를 것도 없다.[6]

4.2. 태상호 기자의 증언


호비스트 출판사의 플래툰의 태상호 기자가 아프가니스탄에 종군 취재 목적으로 갔을 때였다.[7] 그가 50 km 거리를 이동하는데 미군이 장갑 험비 5대로 에스코트해줘야 했다. 본인도 "만약 죽더라도 아무런 보상과 보호를 받을 수 없다"는 각서를 쓰고, 자비로 구매한[8] 방탄복과 방탄모를 착용한 후 인적이 드문 새벽을 이용해 이동했다.
카불 시내에 도착했는데, 아프가니스탄 호텔에서 한국인이라고 하자 주변 분위기가 싸해지면서 호텔에서 내쫓았다고 했다. 결국 독일 기자단 숙소에 얹혀 살아야 했는데, 독일인 기자가 그 이유를 설명하길, "한국에서 온 개신교 단체들의 선교를 목적으로 한 행사로 인해 한국에 대한 현지인들의 반감이 극히 심해졌다."라고 했다고 한다. 현지 공무원에게는 '운동축제'로 신고했다고 한다. 더군다나 그 설명을 하며 보여준 아프가니스탄 국내 신문에 그 이야기가 1면으로 나와있었다.
그 때문에 태상호 기자를 포함한 한국 국적의 자원봉사자 혹은 왕진 가방 하나와 성경을 들고 봉사활동과 선교 활동을 하던 [9] 선교사들은 현지인들에게 자신의 국적을 그나마 상대적으로 평판이 나았던 중국인이라고 해야 했다.[10]
그런데 이런 곳에 가겠다고 하니 여행 계획을 알게 된 정부에서는 당연히 못하게 말렸다. 이들의 비행권을 강제로 취소하여 출국을 분명히 막았는데, 위에 나와 있듯이 베이징두바이를 거쳐 '''기어이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갔다. '''심지어 이들은 위험 지역임을 알리는 간판 앞에서 웃으면서 기념 사진까지 찍었다. 그래놓고선 납치되자 뒤늦게 "엄마 보고 싶어요, 밥이 먹고 싶어요." 이러면서 후회하면서 애걸복걸한 것은 안전불감증이 빚어낸, 웃기는 상황이다. 결국 이들을 구하려고 고생한 건 한국 정부였고, 인질들 몸 값은 국민 세금이었다.
여담으로 이 사태를 해결하는 데 활약한 강성주 아프가니스탄 특명 전권대사는 얼마 뒤 도미니카 공화국 특명 전권대사로 갔는데, 거기서 옆나라인 (관할지역) 아이티에 벌어진 2010년 아이티 지진을 맞게 된다. 한술 더 떠서 아이티 지진 구조대 보도 논란까지 겪어야 했으니 그야말로 멘붕이다.

4.3. 국외 반응



4.3.1. 아리프 아쉬츠, 이스탄불에서 온 장미도둑


터키인 사진 작가인 아리프 아쉬츠가 한국을 1년 동안 여행하고 지내면서 쓴 책인 '''<이스탄불에서 온 장미도둑>'''을 보면, 이 사건이 터키에서도 화제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터키에서의 반응도 역시나 '쟤들 왜 저러냐?' 비웃기 일쑤였다고. 터키의 철저한 '''정교분리''' 정책 때문에[11] 무슬림도 터키 길거리에서 저 모양으로 이슬람교를 선교한답시고 한국인 개신교 선교사들처럼 굴면 졸지에 이슬람 과격파로 몰려 정치범수용소에 갇힌다고 글로 쓰면서 비아냥거렸다.
아랍, 그 가운데에서도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천하의 근본주의 이슬람 국가조차도 길거리에서 이슬람만 천국, 다른 종교 죄다 지옥 이 따위 짓하면 순식간에 잡혀들어간다. 그것도 그냥 정치범수용소가 아니라 테러리스트와 진배 없게 여겨진다는 것이다. '믿으려면 조용히 믿자.'는 어디서나 진리다.
더불어 터키 곳곳에서 성지순례를 온 한국인들이 허구한 날 터키인들에게 자기들 교회 믿어라 그런다는 소리도 첨가했다. 그리고 이 책자에서 이걸 다룬 부분에 마지막으로 다룬 것이 '이 샘물교회가 듣자하니 네팔 쪽으로 갔다는데, 거기라고 그런 광신적 선교를 좋아하겠느냐?'라고 한다. 국제망신 인증이다.

4.3.2. 국외 인터넷에서의 반응


피랍 소식은 국외 인터넷에서도 화제가 되었는데, 대부분은 조롱조였다. 미국인들은 "'''우리네 일부 먹사들보다도 더한 자들이 있어서 한 시름 놓았다.'''"는 의견이 꽤 있었고, 나머지 나라들에서도 '''너무 미개한 종교관'''이라며 비웃음 일색이었다. 졸지에 한국예수쟁이들이 넘쳐나는 전근대적 개신교 국가로 찍히고 말았다. 일본 혐한들은 쾌재를 불렀다. 심지어 예수쟁이들은 칭찬으로 여긴다.
어떤 교회들은 예수의 고난에 빗대어 전도, 선교 과정에서 듣는 비난을 자랑스러워하라고 가르친다. 예수쟁이들이 끼치는 민폐의 근원이 되는 것도 이런 마인드다. 하지만 이런 사건은 우리가 흔히 겪는 사소한(?) 민폐와는 차원이 다르다.

4.3.3. 종교계 반응


한편 이번 사건과 관련하여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피랍자들의 신변 안전 및 무사 귀환을 바란다"는 내용의 메시지를 발표했고, 세계 각국의 이슬람 지도자들 역시 탈레반 측에 피랍자들의 안전 보장 및 조속한 석방을 촉구하고 나서기도 했다.

4.4. 이 사건의 보도에 대한 논란



4.4.1. 보수 언론의 과장 왜곡 보도


2009년 3월과 6월 예멘에서 역시 '''무개념 개신교 선교 활동에 대한 현지의 격앙된 감정'''[12]이 원인이 되어 한국인을 노린 자살 폭탄 테러 사건과 간호사로 일하던 독일인과 한국인이 납치당해 피살된 사건이 벌어졌다. 하지만 이 사건은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와 다르게 아주 묻혔다.
때문에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 아프가니스탄 일을 더 깊게 파고들어 확대했다는 비난이나 분석도 있었다. 모든 신문사에서 이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를 두고 '노무현 정부 외교 실패'라 보도하고, 월간조선은 2년이 지나서도 이 사건을 심심하면 재방송하며 노무현을 질리도록 깠다. 하지만 예멘 테러로 죽은 한국 여성 엄영선에 대하여는 몇 번 보도하고 철저하게 파묻었으며, 이 예멘 사태가 터지자 이후로 아프가니스탄 관련 보도도 덮어버렸다. 오죽하면 엄영선의 유족조차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 때는 언론이 그리도 많이 보도하고 관심을 가져다주더니만, 한국의 개신교 단체들도 교회들도 엄영선에 대해선 언급을 피하더라." 하면서 당시 울분을 토했을 정도였다.
헌데, 독일에서조차 마찬가지라서 예멘에 가서 지나가는 현지인들에게 '야만 종교 이슬람 믿지 말고 우리 교회 믿으라능~!' 이런 말한 독일인 목사가 독일에서 더 욕을 처먹고 자업자득이라며 묻혔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노무현 지지자들이 왜 노무현만 욕하냐며 정치적인 의도로 논란을 만들었다는 지적도 있었다. 왜냐하면 피랍과 테러 사망은 전혀 비교할 수 없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라크에서 노동자 1명이 테러 공격으로 사망했다면 기사에 단신으로 보도되고 묻혔을 만한 사안이나, 김선일을 납치하여 인질극을 벌이며 협상을 제시하자 모든 지상파 방송에서 대서특필로 실시간으로 다루지 않았던가? 김선일 1명으로도 그 정도였을 정도인데, 하물며 수십 명이 단체로 납치당해서 인질극 협상을 벌이는 상황이니 전혀 비교할 수 없는 사안이며, 어느 정도였냐 하면 당시 이렇게 많은 인질이 한꺼번에 잡힌 건 워낙 드물어서 다른 나라에서도 관심을 가졌다는 주장이다.
인질극 협상이니까(그것도 유례없는 수십 명 인질) 정부의 외교 사안도 시험대에 올랐던 것이고 정부에 대한 비판도 나왔던 것인데, 그냥 외국에 머물던 한국인이 테러로 사망한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사안이다. 원한을 가진 사람이 우발적으로 살해하면 기사에 단신으로 보도되거나 아예 보도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만약 인질로 잡아서 수십 명의 사람을 다 죽이겠다며 협상을 벌이면 언론에 생중계로 보도되고 정부의 대처 능력이 시험대에 오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여기서 보도를 축소하라는 말이냐며 선동과 왜곡질를 하는 일파가 있었는데, 말도 안 되는 허수아비식 오류일 뿐이다. 상술 및 하술되어 있듯이 당시 정부는 인질 석방을 위해 다방면으로 안보 작전을 펼쳤고, 중동의 다국어가 가능한 특수 요원을 통해 적지 한가운데에 들어가 협상을 하는 한편, 특전사 여단을 파견해 다국적군 연합 작전으로 해당 지역 탈레반을 아예 소탕하는 작전까지도 준비하는 등 많은 노력을 가했고, 결국 결과는 초반에 으름장 놓으려고 죽인 2명 빼고는 모두 무사귀환이라는 작전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당시의 보수 언론들은 이 사건이 공개되자마자 협상이나 구출 작전이 어떻게 진행되는가보다는 논설, 사설까지 동원해 정부가 무능하며 아무 대처도 하지 않고 있다며 비난하고 왜곡하는 보도만 쏟아냈다는 것이 문제다. 해당 사건은 국제적 이목을 끌 수밖에 없으니 보도 자료가 많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언론에 대한 비판이 이는 것은 그것을 보도한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 목적 때문에 사실 관계와는 상관 없이 비난과 모욕 일색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5. 기타


  • 이 사건 당시 발생한 사망자 2명 중 심성민 선교사는 학군 39기로 2001년에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장교 신분으로 병역을 이행하고 2003년에 중위로 만기 전역한 지 4년 만에 변을 당했다. 그가 개신교 신자가 아니었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교회에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참 신자였던 것이 더 사실에 부합하는 듯하다. 그 후로 그의 아버지가 교회를 상대로 고소한 적이 있었다. 관련 자료
  • 당시 지구 반대편에서는 소말리아에서 납치된 어선(마부노 호)의 한국인 선원들이 거의 6개월째 피랍 상태였는데, 언론은커녕 가족들 외엔 아무도 관심조차 없고, 심지어 배의 소유주조차 이들을 무시했던 게 뒤늦게 알려졌다. 이에 '정부는 개신교 관계자들이 납치되니까 구하러 다니고 6개월째 갇혀 지낸 사람들은 버린 거냐?' 하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사실, 이전에도 2006년 동원 호가 117일동안 소말리아 해적들에게 잡혀 인질이 되었던 일에도 이랬다. 그러다가, 2011년 삼호 주얼리 호가 또 잡혀가면서 이젠 놔두면 안되겠다며 아덴만 여명 작전으로 구출하면서 한국 선박 피랍 사건이 사라졌다.
  • 모 사이트에서는 당시 초기 탈레반의 행동을 오인하고 츤데레와 결합시켜 츤데반이라는 개드립을 탄생시켜 사람들을 충격과 공포에 빠뜨린 바가 있다. 아카이브 물론 그 뒤에 탈레반이 피랍자들의 머리에 총알을 박으면서 이 말은 그야말로 망언이 되어버렸다.
  • 당시 피랍자의 가족 중에는 교회를 돌며 '기대가 크며 신나고 재미난다.' 하는 간증을 한 인간도 있었다. # 심지어 구조 후에도 열심히 하나님만 찾으면서 이후에도 이때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간증하러 다녔으니 그야말로 광 신이다.
  • 당시 싸이월드나 블로그 등에 단기 개신교 선교 여행을 가서 이슬람 모스크에 몰래 올라가서 찬송가를 부르고서 자뻑한 글들이나, 고아원에 가서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한국어 찬송가를 애들에게 가르치면서 하나님의 은총을 깃들게 했다는 병크 글들이 발굴되면서 많은 개신교 단기 선교 여행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
  • 다음 아고라에서 활동하는 네티즌들이 '샘물교회 자성 촉구 국민운동(샘자국)' 이라는 시민단체를 결성하고 카페를 개설하였다. 샘자국은 2007년 9월 9일 샘물교회 및 개신교계의 자성 촉구, 사죄를 요구하는 집회를 2008년 5월 25일까지 10회에 걸쳐 개최하였다. 샘자국은 후일 웹사이트를 개설하고 '한국 종교개혁 시민연대'로 이름을 변경했다.
  • 샘물교회 단체 역시 피랍 당시 웃지도 못할 거짓말을 해서 개신교에 대한 호감을 더 떨어뜨렸는데, 바로 "아프가니스탄은 우리들의 친구입니다" 와 "봉사하러 간 사람들입니다"이다. 무엇보다 선교를 봉사로 바꿔서 언론플레이를 했다는 점은 개신교의 안티를 더 많이 만드는 데 기여했다. 그리고 언론에게 선교를 봉사로 바꿔달라는 부분에서 로비가 오가는 것도 포착돼서 더더욱 욕을 먹었다. 또 웃긴 것이 샘물교회에서는 아프가니스탄 피랍자들은 선교 활동이 아닌 봉사활동 간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정작 샘물교회의 현수막에는 아프가니스탄 선교팀 구명을 위한 기도회로 되어있어 그 사진이 떡하니 봉사 활동이라고 주장하는 중앙일보 기사에 같이 올려져 말과 사진이 다름으로써 화제가 되었다.

[image]
기사는 이곳 참조. 아카이브 현재 이 기사는 대부분 삭제 처리되었고 이곳에 남은 것이 유일하다.
거기다가 유서를 쓰고 아프가니스탄에 선교를 갔다는 것이 루머라며 소송을 한다 난리를 쳤지만, 결국 모든 것이 사실임이 밝혀져버리는 황당한 일도 있었다. 이곳 참조.[13]
  • 인질들이 무사귀환한 뒤 샘물교회 박은조 목사는 설교를 통해 '탈레반 납치범들이 여자 성도들을 성폭행하려고 시도했으나, 남자 성도들이 목숨을 걸고 이들을 막아서 여자 성도들이 무사할 수 있었다.'는 발언을 했다. 비록 국가적으로 초대형 사고를 치긴 했지만 그래도 우리 성도들이 이렇게 정의롭고 용감한 사람들이라고 추켜세워보려는 의도였던 것 같다. 하지만 아무리 남자라 한들, 모두 AK 소총으로 무장한 테러범들에게 맨몸으로 맞서 동료 여성을 지킨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이었을까? 테러범들이 들고 있는 총은 장난감이 아니었고, 배형규 목사와 심성민이 살해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탈레반은 필요할 경우 실제로 총을 발사하여 사람을 죽이는 데에도 익숙한 자들이었다. 안 그래도 여론이 좋지 않아 이들의 석방 관련 뉴스에 "여자 교인들이 성폭행을 당했을 것"이라는 댓글이 난무하고, 국내 언론만 보도하지 않았을 뿐, 외신을 통해서는 이미 "여자 교인들이 강간을 당했다"는 뉴스가 보도되고 있는 상황에서 박은조 목사의 이러한 발언은 오히려 여신도들이 강간을 당했음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는 발언으로 해석되어 큰 파장을 일으켰다. 후에 피랍자들을 진료(산부인과 진료 포함)한 병원에서 '성폭행 흔적은 전혀 없었다.'고 확인해 주어 외신들의 오보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 국가가 이들에게 피해 금액의 일부에 대한 반환을 하라고 했을 때 이들이 한 말이, 그 유명한 "불 꺼줬다고 소방관한테 돈 내냐" 이다. 이에 대해 네티즌들은 "화재 피해자들이 정부가 불 지르지 말라고 했는데 질렀냐" 라고 반응했다. 물론 소방관이 불 꺼줬다고 돈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방화는 범죄 행위에다 민폐다. 이들이 이 사건을 진화된 화재 사건에 빗대겠다고 하면 주의사항을 명백히 무시하고 어떻게든 불을 지르려고 하고, 그 때문에 예방까지 해줬는데 무슨 본인이 화형 당하러 가는 잔 다르크인 것마냥 오만 비장한 척은 다 하며 불 싸지르고 꺼달라고 난리치는 격이며, 이 사건의 원인인 그들은 방화범이나 다름없다.
  • 납치된 당시 교회 관계자들은 이들의 선교를 '순교' 내지 '영적전쟁'으로 포장하는 책을 냈다가 비난 여론의 몰빵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아프간의 밀알\'이라는 책을 은근슬쩍 발간했다고 한다.
  • 이 당시 정부에서 최악의 경우 구출 작전을 해야 한다고 판단하여 707 특수임무대대 대원들을 국가정보원 요원들과 함께 아프가니스탄 현지로 급파시켜서 구체적인 인질 구출 작전 준비를 했다. 기사 결국 한국 정부와 탈레반의 협상이 타결돼서 인질들이 석방되어 무력충돌 없이 마무리되었다. 이는 이후 레인보우 식스 시즈에서 제707특수임무대대 오퍼레이터인 비질의 아프가니스탄 파견 경력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추정된다.
  • 여담으로 당시 김만복 국정원장을 수행한 일명 '선글라스맨'이 직접 탈레반 요원과의 협상에 나선 국정원 요원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보통은 절대로 얼굴이 노출되어서는 안 되지만 이 경우는 탈레반 쪽 협상 대표가 "아프간 정부에 쫓기고 있는 우리가 카메라 앞에 노출될 것이니, 당신들(국가정보원)도 공개적으로 나와라."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외교가에서는 한국외대 이란어과 출신이고, 아프가니스탄의 언어인 파슈툰어와 이란의 페르시아어 등에 능통한 중동 전문가이며, 이스라엘에서 대테러 협상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국가정보원의 대테러 요원이며, 협상 타결 후의 언론 인터뷰 때는 탈레반 쪽 협상 대표가 어깨동무까지 하면서 친근감을 표시했을 정도로 협상을 잘 이끌었다고 한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 인물이 국군기무사령부 요원이라는 추측을 내놓기도 했는데, 앞서 언급했듯 인질 구출작전 때문에 군이 개입되기 직전 상황까지도 갔었던 데다 기무사의 경우 국정원에 비해서는 어느 정도 소속 인물의 공개 여부에 대한 민감도가 다르기 때문.
  • 유엔 평화유지군 소속으로 아프가니스탄에서 1년 넘게 주둔한 채수문 중령(대령으로 예편)은 이 사건이 터지자 아프가니스탄 경험담을 다룬 책자에서 은근히 깠다. 바로 불교 측도 아프가니스탄에서 의료 봉사를 하며 선교했지만, 아무 문제가 없었던 경험을 이야기하며 왜 개신교는 문제를 일으키냐면서 비난했다. 불교 측에선 탈레반 구역도 가서 사람들을 돕고 싶다고 일부 비구니가 고집을 부렸으나 한국군 평화유지군에서 너무 위험하다고 경고하자, 고위 승단 연락을 하더니만 한국군 측을 걱정끼쳐 죄송하다는 사과를 하며 물러났던 경험을 이야기를 하면서 "불교 측은 한국 정부나 평화유지군 측 말을 고분고분 듣고 이후 위험지역에 얼씬도 안 하더라. 그런데, 개신교는 위험 지역에 가서 순교하면 자랑인지 아는가 보다. 그러면서 한국 정부나 평화유지군 말을 무시한다"면서 매섭게 비판했다.

5.1. 다시 간다?


2010년 8월 샘물교회에서 또 정부 몰래 선교사를 파견할 예정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2011년 2월에도 또 아프가니스탄에 간다고 한다. 게다가 선교를 위하여 아프가니스탄을 여행금지국가에서 해제해달라는 요청까지 해버렸다. 당연하지만 이 요청은 기각되었다.
사실 교회 입장에서는 참 구미가 당기는 아이템일 것이다. 교회도 일종의 장사라고 보면 목숨의 위험을 무릅쓰고 이교도들의 본진에 가서 포교를 하는 것은 가장 돈이 되는 고객(=광신도)들에게 가장 어필할 수 있는 황금 콘텐츠이기 때문. 보내는 윗대가리들 입장에서는 무사히 다녀오면 그걸로도 '위험한 곳에 선교하러 다녀왔다.'는 일종의 업적이 되고, 이 피랍 사태처럼 일이 터지면 죽은 사람은 순교자라고 치켜 세워주고, 무사히 돌아온 사람은 "하나님의 가호(?)를 받아서 그런 것"이라고 하면 그만, 즉 잃을 게 없는 장사다. 실제로 샘물교회는 이 피랍사태 이후로 언론과 국민의 폭풍 같은 비난에도 불구하고 세를 크게 불렸다.
사실 아프가니스탄 피랍 당시에도 "'''자기들 멋대로 간 걸 왜 우리가 돈을 주고 빼와야 하나? 협상 불가!'''" 라는 의견과 "'''간 건 충분히 괘씸하지만 그래도 우리 국민인데 어떻게 내버려 두나. 미워도 자식 새끼인데, 살려놓고 두들겨 패든지 해야 할 것 아닌가'''" 측으로 여론이 갈렸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이들을 괘씸하게 생각한 것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또 이런 일이 났다가는 '''구출은 해준다고 해도 이후 대가는 철저하게 치르게 할 것이 분명하다'''. 덕분에 2014년 2월 시나이 반도 버스 폭탄테러 사건이 터지자 여론에서 '또냐?' 라며 아주 싸늘한 반응을 얻었다.
한편, 이와 별도로 이슬람교에 대한 감정도 엄청나게 나빠졌다. 이미 9.11 테러김선일 피살 사건으로 이슬람권에 대한 감정이 이전보다 훨씬 나빠진 상태였는데,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를 계기로 피랍자들도 비난을 받았지만 동시에 이슬람교에 대한 평판이 매우 나빠졌다. 심지어 '과격한 종교', '테러를 옹호하고 인질을 잡아 살해하는 게 당연한 종교' 라는 극단적인 주장까지도 자리잡게 된 것이다. 결국 개신교뿐만 아니라 이슬람교의 평판도 이 사건으로 땅에 떨어져 버렸으며, 이런 상황은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5.2. 후일담... 그리고


  • 사태가 종료된 후 돌아온 여성 신자들 모두 산부인과 검진을 받았다. 당시 여성 신자들이 성폭행을 당해 낙태까지 했다는 루머가 있었다. 이러한 루머는 미국 abc의 뉴스 보도를 시작으로 퍼졌는데, 일단 석방자들을 치료한 경기도 샘안양병원에 의해 부인되었다. 관련 자료 #1, #2
  • 사태 와중에 차인표의 글이 수많은 네티즌들을 분노하게 했다. 차인표는 '아프가니스탄 피랍자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외국인을 도와주는 것에 아니꼬워하는 사람들'이라는 식으로 비판하며 '배형규 목사가 예수님을 닮아간다.'는 경악스러운 말을 했다. 비슷한 시기 신해철의 "사람의 목숨이 어떤 것보다 최우선. 그러나 피랍자 분들은 돌아오면 고개를 숙이고 반성해야 한다." 라는 말이 대조되기도 했다. 이 당시 그동안 쌓아왔던 명성이 크게 망가졌던 차인표는 이 사건에 관련되는 것을 최대한 피하더니, 1년 후에는 이러한 인터뷰에서 피랍 사건을 계기로 많은 비판을 받은 한국 개신교의 선교방식에 대해 질문을 받자 "누군가를 대표해서 말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다만 개신교의 선교 방식이 전부 옳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잘못된 것은 고쳐야 한다. 현재 자신이 후원 중인 양육기구는 선교가 금지된 무슬림 국가에 몰래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종교의 자유가 허용된 국가에서 교회를 기점으로 하는 방식이다."라고 말했다. 슬쩍 반대되는 뉘앙스로 말한 것이다.
  • 원래 샘물교회는 상가 건물의 한 층을 쓰고 있었으나, 이 사건을 초래한 이후 점점 세가 커지더니 결국 건물을 모두 차지하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해당 건물 한 동이 그대로 샘물교회이다.
  • 예장통합 총회는 2010년 95회 총회에서 배형규 목사를 순교자로 추서했고, 용인시에 있는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에 영정이 모셔진 것은 물론이고 배형규 목사 순교기념비가 세워졌다. 장로회 예장통합에서 순교자를 공식 배출한 것은 일제강점기6.25 전쟁 이후 처음이라고 한다(...). 종교 나름의 논리라는 것이 있지만, 참 외부인들에게 황당한 처사로 비칠 뿐이었다. 희생자에 대한 추모비가 아니라 기념비라고 한 이유는 종교적인 색채 때문이다. 즉, 죽어서 천국을 갔으니 기념할 일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위에 언급된 일제강점기 이후 두 아들들을 여순사건 때 잃고 장례 때 감사 기도를 올리면서 아들을 죽인 사람을 양아들로 삼아 보살피겠다고 한 손양원 목사의 기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문제는 신사참배 반대와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고, 6.25 전쟁 때 환자들을 지키다가 총살당한 손양원 목사와 배형규를 비교해 보면 참 어이상실할 지경이다. 예장통합 총회에서 순교자로 지정하게 된 것도 제주노회[14]의 요청으로 된 것이다. 샘물교회는 고신 계열이다. 그러나 고신도 신사참배를 반대한 목사들이 일제에 굴복한 목사들과 함께 할 수 없다고 해서 세운 교단이다. 어딜 가나 사이비는 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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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형규 목사 순교 기념비.
  • 2010년 7월 23일, 생존자 21명 중 14명이 '피랍 당시 소회와 고백' 을 실은 책을 25일자로 출간한다고 보도되었다. 1명은 8월에 낸다고 한다. 아프간 봉사단 피살 3년-오해와 진실... 가족들 엄청난 몸값 지불 호화여행 사실무근. 아카이브. 기사 제목만 봐도 감이 오겠지만, 저 기사는 개신교 관련 내용을 전문으로 하는 기자가 썼다. 같은 기자의 다른 기사를 한 번 감상해 보자. 물론 이런 기사와 같이 등장하는 것을 보니[15](아카이브) 당연히 불쏘시개겠지만. 같은 날 피랍자의 가족들이 엄청난 돈을 마련해서 그 돈으로 피랍자들을 구출했다는 개드립이 나돌았다. #
  • 그리고 2010년 7월 27일, 희생자의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은 전쟁과 내란 등으로 위험 지역이었다."하며 "정부는 왜 그곳에 갔냐고 묻기 전에 여권 사용을 제한해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하는 것을 막았어야 했다."라고 주장했다. 참고로 소송을 제기한 사람은 위에서도 언급한 개신교 신자도 아닌데 사망해서 분당샘물교회에도 소송을 걸었던 사망자의 아버지이시다. #아카이브. 이 때문에 교회가 '돈이 없다'[16]며 보상을 안 해주니까[17] 안될 것을 알면서도 정부에 소송을 걸어서 이 사건을 다시 이슈화해 교회 측을 압박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2011년 4월 25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6부(정일영 부장판사)는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관련 기사, 아카이브.
  • 2011년 7월 31일에는 샘물교회 안에 '아프간 순교자 기념관'을 만들고 개관식을 가졌다. 관련 기사 2007년 당시 전 국민적 민폐 행각을 기념관까지 만들고 그 피랍자들이 나와 신앙간증까지 하는 광경에 사람들은 한 마디로 '한심하다. 아직도 정신 못 차렸나' 라고 반응했다. 어떤 이는 '아예 성인으로 시성하고 순교자 축일(기념일) 날짜까지 지정해달라고 가톨릭 교황청한테 요청하지 그러냐??'며 비아냥거렸다.[18]
  • 아프가니스탄 순교자 기념관을 개관하는 동시에 분당샘물교회는 순교 5주기를 기념해 <별, 순례의 길을 가다>라는 추모집 도 발간했다.
  • 2012년 9월 5일에는 배형규 목사의 고향인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와흘리 이기풍 선교기념관에도 순교 기념비가 세워졌다.
  • 이 사건을 미화하는 것으로 보이는 영화가 2014년 4월 17일 개봉되었다. 제목은 시선. 참조, 아카이브[19]. 이 소식이 전해지자 서로 으르렁대는 웹 커뮤니티들 모두가 하나 되어 까고 있는 중이다. 게다가 이 영화 촬영 중[20] 풍토병에 감염되어 베테랑 배우 박용식이 2013년 8월 사망하는 사건까지 생겼다. 평점이 폭풍 상승했지만 이런 알바 풀기와 다르게 흥행은 전국 1만 수준으로 망했다.
  • 2013년 12월 한국위기관리재단이라는 개신교 연관단체의 본 사건에 대한 종합보고서를 발간하며 보도자료를 발표했는데, 이 내용이 또 가관이다. 참조, 아카이브. '언론의 부정확한 보도', '일부 네티즌의 악의적 정보 조작으로 부정적 여론이 확산되었다'를 시작으로 '위기 상황 인식과 위기관리 역량이 결여된 현장 코디와 동행한 점'이 최악의 조건을 구성하는 한 요인으로 규정했다.
  • 2014년에도 인터넷 블로그에서 이 사건과 관련해서 상습적인 신고를 한 것이 확인되었다. 네티즌 게시물 관련해서 신고를 때려서 포스팅을 블라인드를 시키게 하는 듯하다. 바로 위 사진의 건만으로도 알 수 있다.
  • 이 사건이 벌어진 지 16년이 지난 지금도 샘물교회는 자신들의 치부를 숨기려는 듯, 자신들과 이 사건에 대한 부정적 의견이 담겨있는 블로그/게시물, 심지어는 샘물교회에 대한 비판 없이 단순히 사건을 서술한 글, 관련 방송을 캡쳐한 글(아카이브)까지도 명예훼손을 이유로 들며 무차별로 게시물 중단 요청을 하고 있다. 덕분에 잊고 있던 사건을 새삼 되돌아보게 되는 사람들도 많다. 분노하여 게시물을 재게시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경우에도 깨알같이 게시물 중단 신청을 올리고 있다. 그런데 해당 사건에 대한 게시글은 블로거에선 아무런 영향이 없는 듯하며,[21] 2007년에 나온 조선일보 관련 사설을 소개한 게시물마저도 모조리 신고하는 반면, 정작 그 링크된 조선일보 사설은 아직도 멀쩡한 것을 보면, 다국적 기업과 대형 언론사를 상대로는 아무 짓도 못 하는 모양이다. 이런 정성으로 차라리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했으면 어땠을까.
  • 2021년 2월 9일 MBC PD수첩에서 인터콥의 병크들을 방송하는 <목숨을 건 선교사들> 편을 방송했는데, 후반부에 이 사건을 다뤘다. 위에도 나와있듯이 인터콥은 "자기들과 관련이 없다"는 입장을 지금도 고수하고 있지만, 샘물교회 관계자와 당시 박은조 담임목사는 "현지안내를 맡았던 선교사가 인터콥에서 훈련을 받았다"며 "해외 파송을 교회에서 직접 보낼 수 없어, 중간 단체가 껴야 한다"며 인터콥의 개입을 인정했다. 심지어 피랍인원 중에도 인터콥 훈련생 소속이 몇몇 있었는데, 잡혀서 순교자가 될 수도 있는 걸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인터뷰에 응한 양국주 선교사는 "최바울은 해외선교에서의 핍박, 어러움을 극복하는 게 신앙이라 여긴다"며 "그것을 즐기는 것 같다"고 힐난했다. 끝부분엔 이 사태의 두 번째 희생자인 심성민의 아버지[22]가 인터뷰에 응했다. 사건 이후 5년간 부부가 죽은 듯이 살아가야만 했고, 아내는 후각, 청각 등에도 어려움을 느꼈다고 한다. 그래도 "내 자식이라도 나라에서 나가지 말라고 한 걸 나간 거니까 잘했다고는 못한다"며 사건 이후 매일 일기를 쓰며 슬픔을 달랜다고 한다. 아래는 그 일기의 일부.
> 교회는 어찌하여 안전이 검증되지 않은 전쟁터에 그 많은 꽃다운 청춘의 인생들을 선교와 봉사의 미명 아래 보내에서 하나 밖에 없는 생명을 죽음으로 돌아오게 하여 그 후에 따르는 수많은 문제점과 부조화 등을 어떻게 치유, 보상할 것인가 엄히 묻노니 교회와 그 책임자는 여기에서 파생된 모든 일들에 대하여 응분의 책임을 지고 보상토록 해야 한다.
보내어진 그네들은 약간의 그곳 언어들이나 풍습에 대한 교육을 받았을진 모르나 안전에 대비한 필요한 교육들은 없어 제일 중요한 과제를 빠뜨렸다.

[1] 이후 '철수 권고'로 변경되었다.[2] 뉴스앤조이의 기사에 의하면 분명히 분당 샘물교회의 홈페이지에 아프간 인솔자들 중에서 선교사 이은주가 인터콥 소속이라고 표기되었다. #[3] 실제로 잡혀간 작자들의 정신나간 행동 때문에 분개한 많은 사람들이 순교한다고 한 말 그대로 죽게 놔두라고 했지만 진짜 그렇게 한다면 국가는 '국민의 보호'라는 주요 임무 중 하나를 저버리는 셈이 된다. 국민이 국방의 의무, 납세의 의무 등을 다해서 국가를 지원하듯이 국가는 기본적으로 자국민을 보호할 임무가 있는 양방향의 관계다. 아무리 개념 없는 자국민이라고 해도 말이다.[4] 할레드 호세이니연을 쫓는 아이천 개의 찬란한 태양만 봐도, 탈레반들이 어떻게 아프가니스탄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온갖 반인륜적인 짓거리를 저질렀는지 견적이 나온다.[5] 1907년 평양 대부흥을 벌인 것을 100주년이라며 기념했다.[6] 하지만 기독교 입장에서 보면 이슬람 교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다. 당장 윤석전 목사의 해외 사역만 보아도 수많은 무슬림들이 개종을 한다. 단지 이 사건에서는 선교 준비가 너무 부실했고, 안전성 확보도 못 했을 뿐더러 신앙심, 성경적 지식, 그 외의 카리스마와 대처 능력이 떨어지는 마음의 준비가 안 된 사람들이 파송되었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다.[7] 아프가니스탄 피랍이 일어나기 몇 년 전이다.[8] 만약 미군이 방탄복이나 방탄모를 빌려준다면 해당 장비가 적절한 방호력을 제공해 주지 못할 경우 문제가 커지기 때문이다. 종군기자들 역시 방탄 장비는 스스로 갖춘다.[9] 의료 선교사들의 경우, 의료 기술이 제대로 보급되지 않은 곳에서 엄청난 기여를 하는 사람들이다. 의료 선교사들은 다소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 활동 지역의 지역 사회에서도 환영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모든 의료 선교사들이 그렇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사실 의료 선교도 선교가 목적이라고 하지만, 처음부터 포교를 하지 않고 의료봉사 등으로 현지인들과 교류하는 환경을 만든 뒤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나눈다. 절대 안하무인하고 무지몽매한 활동이 아니다.[10] 그런데 사실 중국인들도 현지에서 매춘이나 금지품 밀수에 돼지고기 판매, 재건사업 관련 일자리 독점으로 미움을 받고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아 그렇지 종교 선교가 아니라 철저하게 돈벌이가 목적임에도 중국인들도 미움을 많이 받고 아프가니스탄에서 꽤 많이 죽었다. 2004년 유엔평화유지군 소속으로 간 채수문 중령의 글을 보면, 중국인 노동자 숙소에 폭탄이 터져 25명이 그 자리에서 살해당했던 일이 거론된 바가 있다.[11] 종교적 광신 자체를 국가에 해악이 된다고 치를 떨던 아타튀르크의 영향이 크다. 아타튀르크는 정교분리 원칙을 확고히 한 인물로도 유명하다.[12] 예멘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는데, 무턱대고 "우리 종교 믿으라"던 선교사들이 자초했다.[13] 그래서 베댓도 없다던 유서가 왜 생겨나냐고 비판하는 댓글들이다.[14] 배형규 목사는 제주 출신[15] 미션라이프 기자. 앞 기사를 쓴 바로 그 기자이다. 이 기사를 보면 피랍된 개신교인들이 무슨 순교자처럼 보인다.[16] 분당샘물교회 정도 되는 규모의 교회가 돈이 없다는 것이 더 말이 되지 않는다. 통상 그 정도 규모의 교회라면 1년 예산이 수십억 단위는 그냥 넘어설 것이다.[17] 정작 같이 피랍당하고 살해된 목사의 유족들은 교회의 배상을 받았다. 단, 보상액수에 대한 양측의 의견차 때문일 수 있긴 하다.[18] 가톨릭 교황청에서는 복자 혹은 성인으로 시복, 시성할 경우 곧바로 복자, 성인 축일 날짜까지 지정해준다.[19] 참고로 이 영화의 연출자는 원로 영화 감독인 이장호 감독이다. 물론 이장호 감독은 이전에도 <낮은 데로 임하소서> 등 여러 편의 개신교 관련 영화를 제작한 바가 있지만 그가 이런 개신교계의 흑역사를 미화하는 것으로 의심되는 영화의 연출을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의 대표작이자 70년대 한국 영화의 명작으로 꼽히는 <별들의 고향>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여러 모로 씁쓸할 노릇이다.[20] 장소는 동남아로 각색한 듯하다. 캄보디아에서 촬영했다고 한다.[21] 블로거는 구글이 운영하며, 게시중단 요청은 해외 업체 상대로는 소용이 없다. 해외 업체는 국내법을 따를 의무가 없기 때문이다.[22] 방송에서는 심OO씨로 언급되며, 아버지도 실명이 나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