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일(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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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김선일(金鮮一)
출생
1970년 9월 13일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사망
2004년 6월 22일(향년 33세)
이라크 팔루자
학력
성심외국어대학 영어과 전문학사
한국외국어대학교 용인캠퍼스 아랍어과 학사

직업
(주)가나무역 통역사
가족
父 김종규[1], 母 신명자[2], 누나 김정숙
종교
개신교(예장합동)
신체
170cm[3]
1. 개요
2. 사건 경위
3. 여러 진상
4. 사후
5. 유언
6. 범인
7. 가해자 처벌
8. 정부 잘못 vs 본인 잘못
9. 그 외


1. 개요


'''"한국군은 제발 이라크에서 철군하라. 나는 죽고 싶지 않다. 당신들의 목숨도 소중하지만 내 목숨도 소중하다."'''[4]

2004년 이라크전이 끝난 직후 '''IS의 전신'''인 유일신과 성전에 붙잡혀 참살(斬殺)[5]당한 한국인 희생자. 유일신과 성전의 공식 참살 영상 기준으로 3번째 희생자이며 2004년 닉 버그의 참살사건 이후 가장 큰 논란이 된 사건이다.
1970년 9월 13일 ~ 2004년 6월 22일, 향년 33세.

2. 사건 경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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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졸업 당시 김선일의 사진
2004년 5월 31일 이라크에서 피랍되었다.
그를 붙잡고 협박하는 동영상이 1차로 배포되었다. 물론 "이 사람을 살리고 싶으면 가나 무역과 한국군은 철수해라"라고 요구했으나 정부는 거부했고 그에 따라 살해되었다.
정부의 이와 같은 결정에 대해선 당시 논란이 많았다. 정부 결정을 찬성하는 측에서는 고작 한 사람 때문에 해외파병과 같은 국가 중대사를 철회하기는 무리라는 의견이었고, 반대 측에선 단 한 사람의 국민이라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정부가 아무 죄 없이 붙잡힌 사람을 고작 남의 나라(미국)의 전쟁을 위한 파병 때문에 죽게 내버려두어야 하냐는 의견이었다.
그러나 김선일이 납치되어 살해 당한 것은 전형적인 테러이다. 테러와 인질극에 대해선 국가의, 타협 없는 강경한 대응이 일반적으로 요구되는데 그 이유는 만일 국가가 테러에 협상을 하기 시작하면 테러 단체가 '테러는 나보다 강한 상대에 대한 효과적인 협상 수단이다.'라고 인식하여 계속해서 테러를 저지르고 인질극을 벌이는 악순환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고인과 가족들에게는 매우 미안하고 안쓰러운 말이지만, 만일 대한민국 정부가 인질 한 명 때문에 파병 문제 같이 중요한 군사적, 경제적 사안을 철회했다면 테러가 더 빈번하게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짐은 물론이고 테러 조직과 협상했다 하여 미국과 다른 국가들의 국제적 비난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알다시피 한국군은 전투병력이 아닌 치안유지 및 재건지원 명목으로 파병되었다. 평화 유지군이 아니다. 애초에 이라크에는 평화 유지군이 파병된 적이 없다. 미군이 원하던 전투병 파병은 일본이나 다른 친미국가들도 상당수 거부해 한국처럼 비전투 치안 유지군 파병을 하는 정도였고, 스페인은 대대적인 테러로 보복받으면서 전투병을 전면 철군하고, 파병을 결의한 여당이 다음 선거에 참패한 경우 같이 결국 전쟁은 누구도 이득을 보지 못했다. 몽골은 전투병을 파병했지만 소수병력을 보낸 수준이라 전투에 그리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나마 이득을 본 거라면 다에쉬라는 막장들일 것이다.)
당시 협박하는 동영상 이전에 무장단체에 잡힌 뒤 그의 인적사항이나 전쟁에 대한 생각을 인터뷰하는 영상이 있었는데 여기서는 긴장해도 살벌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처음에 납치한 단체에서 돈을 받고 파병 철회를 요구하려던 유일신과 성전에 그를 판 것이 아니냐는 말이 있다.
협상이 결렬된 후 유일신과 성전은 '알라후 아크바르'를 외치며 김선일의 절규를 무시하고 그를 참수하는 동영상을 공개해 전국을 충격에 빠뜨렸다.
6월 22일 팔루자 인근 도로변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3. 여러 진상


공식적으로 확인된 바에 의하면 김선일은 대학원 학비 마련을 위해 미군의 군납업체 직원으로 이라크에 취업을 했는데 납치를 당했다. 단, 위험할 줄 모르고 중동으로 갔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중동에서 미군의 군납업체 직원이라는 타이틀은 개신교 선교자와 별 다를 것 없이 위험'''하며 실제 그의 미군 군납 업체 기업 입사에는 개신교 적 가치관이 동기로서 크게 영향을 준 듯하다.
한때 김선일이 선교 목적으로는 비자가 안 나와 가나무역의 취업을 편법으로 사용했다, 즉 선교가 동기였다는 주장을 '개신교에 책임을 분산시키는 헛소문'이라며 사실이 아니라 부정하는 주장이 있었으나 아래 내용과 김선일 본인이 쓴 가나무역 입사 자기 소개서를 보면 동기에 개신교 선교가 있었음은 명명백백하다.
김선일은 1990년 부산 성심외국어대학교[6]에 입학했고 그 뒤 영어과를 졸업하고 목회자의 꿈을 이루기 위해 현재 경성대학교로 통합된 부산신학교에 편입해 신학을 공부했다. 졸업 후에도 한세대학교 영산신학대학원, 침례신학대학교 대학원, 한국외국어대학교 등 모두 4군데 대학에서 영어, 신학, 선교학, 아랍어 등을 독학으로 전공하며 선교사역을 꿈꿔왔다. 최종 학력은 한국외국어대학교 용인캠퍼스 아랍어과(現 글로벌캠퍼스 아랍어통번역학과)를 학사 편입학하여 졸업. 동시통역대학원 학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미군의 군납업체인 가나무역에 1년 계약직으로 일하게 되었다.
아래의 자기 소개서를 보면 입사 후 선교 활동을 하고자 하는 의지가 나타나 있음을 분명 확인할 수 있다.
아래는 김선일의 가나무역 입사 당시 자기소개서 전문이다.

저는 남들과 다름없이 1남 3녀의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무난하게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조금씩 불안정한 심리를 가지고 살게 되었고 얼마 있지 않아 약 6개월 후 아버지께서는 새어머니를 맞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새어머니와 잘 융화되지 못하여서 갈등이 참 많았습니다. 괜히 비뚤어진 마음에 반항심을 가져 말을 듣지 않았고, 자라갈수록 점점 더 심하게 비뚤어져 갔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도 역시 비뚤어진 마음들을 품게 되었고, 고등학교 시험에 합격을 하여 입학을 앞둔 무렵 그 당시에 아버지께서 가정을 잘 돌보지 않아 등록을 하지 못하게 되어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급기야 저는 그 이후로 아버지를 더욱더 미워하게 되었으며, 다음 해 재수를 하여 고등학교에 입학을 하였을 때는 큰 누나, 작은 누나, 여동생 그리고 저 이렇게 4명이서 살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에 진학을 한 후 3학년이 되었을 무렵, 같은 반의 한 급우(김OO)로부터 복음을 전해듣게 되었고, 평소에 그 친구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던 터에 그 친구가 다니는 교회를 따라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같은해 여름방학 즈음에 심OO 라는 또다른 친구를 통하여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성령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조금씩 깨우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대학교에 진학을 하고 나서는 졸업을 하고 직장 생활을 하며 평범한 삶을 살고자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저의 마음은 왠지 모르게 그렇게 하는 것보다는 내 앞길을 의탁하는 기도를 한 번 해 보자라는 생각에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게 되었고, 작정해 놓고 기도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약 5개월 간 꾸준히 기도를 한 끝에, 선교사에 대한 마음의 소원을 하나님께서 주셨고, 좀더 구체적인 비전을 위해서 계속 간구를 하고 묵상을 하던 중 중 동선교에 대한 비전을 품게 되었습니다.

간략하게 나마 연유를 말씀드리자면,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누구일까 생각을 하던 중 예수 그리스도가 그 마음 속에 없는 이들(영적인 고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 중에서도 가장 복음에서 소외된 지역이 중동 지역이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또한 제가 성장해온 배경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 중동 지역 선교사에 대한 마음을 품게 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가정에서 저 혼자 신앙생활을 하게 되어 힘든 점도 없지는 않았으나(장손이라서 친척들의 반대까지 심하게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 생활을 계속 할 수 있게 되었으며 감사하게도 지금은 큰 누나와 작은 누나가 예수님을 영접한 상태이고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도 계속적으로 기도하며 복음을 전하는 중에 있어 지금은 마음의 문이 많이 열리신 상태입니다.

또한 계획 중에 있는 단계지만, 아랍 지역에서 본격적으로 사역을 하게 되면 영어와 아랍어와 미용 기술을 통하여 그들에게 복음으로 다가가고자 합니다. (미용은 군복무 시절 이발병군종병이라는 좋은 경험이 저의 밑거름이 되어, 미용 기술을 좀 더 배우고자 하고 있습니다.)

아직 아랍 지역은 가본 경험이 없기에 이번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갈 수 있게 된다면 복음을 좀더 구체적이고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 또한 그 영혼들을 좀 더 온전히 섬기고 사랑하기 위한 좋은 훈련의 시간들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어 이렇게 지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원문.

이렇게 김선일 본인이 직접 작성한 글로 보아서는 '''선교 목적'''이 맞으며 실제로 이라크 현지에서 외국인 선교사들과 몇차례 선교활동을 했다. 링크
사건과 직접 관련은 없는 일이지만, 김선일은 이라크 여인과 결혼을 추진 중이었다. 링크 문제는 김선일은 이미 서울에 임신한 약혼자가 있었다는 것....이 문제 도덕적으로 비판받기도 한다.

4. 사후


그의 시신은 수습되어 고향으로 보내졌으며, 장례식은 6월 30일 사직실내체육관에서 많은 추모객들이 보는 앞에 거행되었다.
김선일의 아버지와 누나 등 유가족 측근 4명은 2004년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으나, 2007년 '김선일의 피살 과정에서 국가의 과실 또는 불법 행위는 없었다'는 원고 패소 판결이 내려졌다. 기사
이 때 사건 6개월 전인 2003년 12월에 남극 세종 기지에서 비상 상륙한 사람들을 구조하기 위해 나섰다가 사망한 전재규와 처우가 달라도 너무나 다르다고 개신교 측과 유족 측에서 반발했다. 전재규는 훈장이 추서되었고, 국립묘지에 안장되었으며 특별 위로금까지 지급된 데 반해서 김선일은 그런 것이 없다는 이유였다. 그렇지만 전재규는 '국가에서 연구하라고 보낸 대원'이었고 다른 대원을 구출하러 갔다가 안타깝게 순직했으며, 김선일은 이라크에 '''개인적 목적으로 방문'''했다가 참살 당했으니 같은 선상에서 바라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니 되려 여론적으로 반격을 맞아 욕만 먹었다. 결국 김선일의 유족도 그 점을 인정하여 국립묘지 안장은 포기했다. 전술했듯이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도 패소했다.
테러 단체는 김선일의 참수 장면을 비디오로 촬영하였다. 일부 이슬람 웹사이트가 이 영상을 공개하여 닉 버그 때처럼 오그리쉬 닷컴 등 미국 일부 사이트를 통해 참수 장면이 담긴 무삭제 영상이 전 세계에 통신망으로 유포돼 문제거리가 됐다. 이에 정보통신부는 해당 영상에 대해 모니터링을 풀가동시켜 사이트 접속 차단조치를 내렸고, 포털사이트 업체들도 게시판을 단속하며 '참수'나 '피살', 'beheading' 같은 단어까지 금칙어로 지정했다. 경찰 역시 해당 영상을 유포하거나 게시할 시 정보통신망법 위반으로 사법처리하겠다고 했다.(참고 기사) 심지어 해당 영상을 입수한 지상파 방송사들도 살해 장면을 편집했다. 하지만 다른 경로로 참수 영상을 본 사람들이 꽤 있었고, 네이버 6월 21일자 인기검색어에 '이라크참수동영상'이 7위로 뜨자 파문이 일었다.
반면 인터넷 상에선 추모와 성토 분위기 일색이었다. 사망 전 전 세계에 김선일 무사귀환을 호소하던 네티즌들이 긴급 추모 촛불집회를 계획했고, 인터넷 게시글이나 메신저 등지에선 추모글이 넘쳐났으며 추모 카페들도 속속 개설됐다. 반면 청와대 등 정부기관 사이트에선 피랍 당시 정부의 안일한 대처에 항의하는 네티즌들 때문에 접속이 마비됐다. 프리챌은 사이트 로고까지 검은 리본 및 흑백으로 칠했고, 하나로드림도 흑백으로 된 추모사이트를 열었다. 싸이월드에선 커버스토리 답글 달기 등으로 애도 분위기와 이라크 국군파병 찬반논쟁을 확산시켰으며, 팝플 역시 유저들이 검은리본을 달았다. 사건 이틀 뒤에 엔아트박스닷컴[7][8]도 김선일을 토대로 플래시를 제작하였다. 플래시
온라인 게임상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정치/경제 MMORPG게임 '군주 온라인'은 피살 후 검은 리본과 국화꽃이 그려진 꼼지[9] 스킨을 만들고, 유저들이 가상으로 추모 집회를 열어 각 서버의 군주(운영자)들이 회의를 열어 애도 및 전쟁 중단을 결의했다. 씰 온라인도 자유게시판과 포럼에 추모글이 쏟아졌으며, 게임 내에 추모비를 세우고 추모아이템 '검은 리본'을 추가했다.(참고1, 참고2)
죽고 나서 개신교 측에선 매년 추모도 하고 이후 꽤 오랫동안 대중 매체에 그를 노출시켰다. 어떤 교회에선 '''"이왕 죽을 거면 마지막까지 전도하는 모습을 보이고 죽어야지 왜 공포로 벌벌 떨며 죽었냐"'''고 고인을 비하하기도 했다. 그의 마지막 유언은 순교[10]의 모습이라기 보단 '''살고자 하는 비명'''으로 들리는 것이 사실이니까. 하지만 결국 그를 순교자로 인정하는 분위기인 듯. 그가 이라크로 간 것이 궁극적으로 선교사로서의 뜻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점이 주된 이유이다. 순교자의 의미를 확장했다고 보면 된다. 지금 그의 묘비에는 '김선일 순교자의 묘'라고 적혀있다. 자세한 것은 링크된 의견들과 사후 공개된 이력서, 김우현 감독의 <팔복> 中 애통하는 자를 참고.
그의 순교를 헛되게 할 수 없다며 이라크로 더 가야 한다고 하는 선교사들도 있었다(...). 아랍 정보통 목사 김동문은 2004년 초반에 이라크 선교사 파견을 촉구하는 국민일보 기사를 비난하며 "지금 여긴 현지 기독교인들도 마구잡이로 죽어나가는데 죽으려고 오는 거냐, 그러다가 한국인 끔살당한다"라는 글을 썼는데, 몇 달 안 가 이런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한국에선 충격일지 몰라도, 당시 이라크에선 여러 종파 기독교인은 물론, 무슬림도 별의별 이유로 참수하는 일이 자주 벌어져서 이라크인들은 이 사건을 신경도 쓰지 않는다고 한다. 이 사건이 벌어지자 김동문은 "결국, 내가 우려하던 일이 터졌다. 그런데도, 뭐? 김선일 희생을 잊지 말자? 한국 개신교계는 여전히 묻지마 아랍 선교를 외친다. 한심한 짓이며 그건 헛된 죽음이자, 나아가 현지에서 개신교에 대한 반감만 가져올 뿐이다. 그냥 다 같이 김선일 씨 명복부터 빌자."라고 쓰며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참고로 2010년 11월에도 이라크 내 시리아 정교회까지 테러 공격을 받고 지금도 이라크는 기독교인들의 헬게이트가 열려있다. 그나마 아랍 토속 기독교라고 다른 기독교보단 훨씬 인식이 좋은 시리아 정교회도 저 모양인데 한국 개신교가 가면 비극들만 똑같이 재현될 뿐이다.
당시 민주노총 소속이던 LG정유 노조는 조선대에서 파업 도중 그의 사망 당시 모습을 패러디하는 퍼포먼스(일명 허동수 사건)를 했다가 욕을 먹었다.기사 서울 강동구의 모 중학교에서도 김선일 참수 모습을 패러디한 사진이 나왔다고.
사건 발생 당시에는 확인되지 않은 별별 소문이 있었다.
하지만 이 와중에 김선일 사망만 부각된다고 여러 말도 많았다. 이를테면 이 사건보다 먼저 일어난 이라크 파견 오무전기 직원 피살사건[11]으로 희생된 한국인 직원들 보상 및 언론의 관심이 너무나도 조용하던 것과 비교된다는 비난이 터져나왔고, 심지어 '''2002년 제2연평해전''' 당시 전사한 참수리 357호 참전장병 유족들도 이 사건을 거론하면서 전사 장병보다도 김선일만 부각된다고 한탄한 적도 있다.
유일신과 성전에선 그가 선교사임을 이용하여 그의 죽음을 정당화시키진 않았는데 괜히 종교간 대전으로 몰고 갔다간 이래저래 여론이 복잡하게 꼬일 것임을 예상해 그가 미군 군납 업체 직원임을 인용해서 그를 타겟으로 잡았을 거라고 주장한다.
'''테러범들은 고인의 사체에 부비트랩을 장착하여 이를 수습하는 관계자를 대상으로 한 2차 폭탄 테러를 기도하였다.'''[12] 다만 사후 부검 결과에 의하면 고문이나 외상 흔적은 없었다고 한다.
한국 내 이슬람 관련 단체들은 일제히 성명을 내면서 '''"무슬림들은 평화를 사랑하며 폭력과 살인에는 절대적으로 반대한다!", "저들은 알라의 가르침을 제대로 어기고 있다, 왜 애꿎은 민간인을 죽이는 것이냐?!"'''라고 반발했으며[13] 이태원동에 있는 이슬람 사원은 혹시라도 있을 폭력 사태를 우려하여 경찰이 배치되기도 했지만[14],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더불어 한국에선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같은 해 일본인미국인도 이라크에서 참살당했다. 자세한 내용은 코다 쇼세이 이라크 피살 사건닉 버그 문서 참고 바람.
당시 민주노동당 당원이었던 논객 진중권은 김선일 대신 노무현 정권유시민 장관 등이 대신 납치되었어야 한다고 규탄하며, 결론적으로 이라크 파병과 참여 정부 옹호 세력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 기사 이런 글도 있다
영화 평론가 정성일은 이 사건을 영화 평론하듯이 해설하기도 했다. 씨네21
2007년 김선일의 시신 수습과 운구를 도왔던 국방무관 출신의 예비역 장교가 우울증 등을 이유로 국가유공자로 등록 해 달라며 소송을 냈지만 인정되지 않았다. 기사

5. 유언



'''그의 유언 장면.''' [참고]

To president Roh Moo-hyun!

노무현 대통령에게!

I want to live!

나는 살고 싶습니다!

I want to go to Korea!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Please! Don't send to Iraq Korean soldiers!

제발 이라크에 한국 군인들을 보내지 말아 주십시오!

Please! This is your mistake! This is your mistake!

제발, 이건 당신의 실수입니다, 이건 당신의 실수입니다!

Many Korean people don't like that to send Iraq!

많은 한국인들은 그들의 자식을 이라크에 보내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All Korean soldiers must out of Iraq!

모든 한국 군인들은 이라크에서 나가야 합니다!

Please! Please! This is your mistake!

제발, 제발. 이건 당신의 실수입니다!

Why do you send, Why do you send Korean soldiers to Iraq!

왜, 왜 당신은 한국 군인들을 이라크에 보냈나요!

To my all people! All Korean people! Please support me!

고국에 계신 한국 동포들, 제발 저를 도와주십시오!

Please president! Please Bush! To president Roh Moo-Hyun!

제발, 대통령님! 제발 부시 대통령님! 제발, 노무현 대통령님!

Please!! I want to live! I want to go to Korea!

제발, 나는 살고 싶습니다! 나는 한국에 가고 싶습니다!

2004년 6월 22일

June 22nd 2004

이 말을 끝내고 장면이 바뀌어 테러 단체의 성명이 나온 뒤 김선일은 살해되었다.

6. 범인


고인을 살해한 유일신과 성전의 지도자는 아부 무사브 알 자르카위이며, 그는 2년 뒤 미군에게 사살되었다.
이들은 김선일을 납치했을 때 동영상을 통해서 대한민국 정부에 대해 강한 비방을 쏟아내며 성명을 발표하였다.
  • 납치했었을 때의 성명(아랍어로 발표하였다)
우리는 한국 정부와 그 인간들에게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한다.
우리는 이 신성한 이슬람의 성지(聖地)에서 멋대로 이교도 활동을 부추기는 한국 놈을 잡아 여기 이 자리에 앉혀놓았다. 이 한국 놈은 지금 우리의 손아귀에 붙잡혀 인질로 잡혀있는 상태이며, 우리는 한국 정부와 한국의 인간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항을 요구한다. 우리의 신성한 땅에 무단으로 침입하여 무장주둔한 한국 군대는 즉각 이라크에서 나가라. 또한 침략자 미국의 개노릇을 하고 있는 당신들이 우리의 이같은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경우, 우리는 알라의 이름으로 이 한국 놈을 즉시 죽여버릴 것이다. 침략자 미국의 개노릇을 해대며 우리의 신성한 땅을 감히 침범하고 무장공격을 하려는 한국 정부는 즉시 우리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한국군을 모두 철수시켜야 하며, 한국 정부가 우리의 요구를 거절할 경우 알라의 이름과 계시로써 여기있는 이 한국 놈은 물론 지금 이라크 땅에 있는 한국군을 비롯해 모든 한국 놈들을 전부 죽여버려 대가를 치르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 참수 직전의 성명(역시 동영상을 통해 아랍어로 발표하였다)
침략자 미국의 개노릇을 해대며 우리의 신성한 이슬람 땅을 멋대로 침략하여 드는 한국 정부는 끝내 우리의 요구를 거절하고 묵살하였다. 또한 한국 정부 당신들은 더러운 거짓말로 미국 놈의 개노릇을 해대며 우리의 땅을 감히 무력으로 침략하려는 만행을 저지르려고 했다. 약속대로 우리는 여기있는 이 한국 놈을 참수할 것이며, 그 대가의 책임은 모두 한국 정부와 그 인간들에게 있음을 알린다.
한국 정부의 이러한 태도는 결국 침략자 미국의 개 노릇을 함과 동시에 미국을 기쁘게 해주려는 아부에 불과할 뿐이며 우리는 약속한대로 이 한국놈을 참수하여 우리의 뜻을 알릴 것이다.
이 한국 놈의 모든 책임있는 대가는 한국 정부와 그 인간들에게 있으며 앞으로 미국과 이교도의 개 노릇을 하며 신성한 우리의 땅을 침공할 경우 언제든지 우리는 한국 놈은 물론 우리의 신성한 땅을 침공하려는 모든 외국 놈들과 이교도 놈들을 하나님[15]의 이름으로 처형하여 똑같은 대가를 받게 될 것이다.
[16] 어쨌거나 김선일이 살해된 이후 한국인들도 격앙되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군대를 보내 저 테러집단의 뿌리를 뽑아버려야 한다'는 여론이 강해졌다. 어차피 한국군이 전투하러 간 건 아니었지만.

7. 가해자 처벌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 한국인에게 정당한 이유 없이 위해를 가한 데다 이 경우는 그냥 범죄도 아니고 테러집단의 계획적인 납치 살인으로 죄질이 매우 나쁘며, 소말리아 해적 출신으로 아덴만 여명 작전 당시 선장 석해균에게 총격을 가했다가 뒤늦게 밝혀져 살인 미수로 기소된 모하메드 아라이가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다'''는 이유로 사형 대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음을 고려하면 이 사건의 범인들은 일반 가담자건 주동자건 관계없이[17] 사형을 받을 가능성이 크고, 설사 선처할 소지가 있다고 쳐도 사회 복귀는 불가능할 것이다.
다만 실제 처벌이 가능한지는 미지수. 법적으로 이 사건은 공소시효가 없기에 잡으면 바로 기소 가능하지만 이들이 이라크 알 카에다 조직원이라는 사실과 육성만 확인될 뿐 정확한 신원을 알 수가 없다는 것이 문제다. 팔루자 주민 전체를 기준으로 하면 암묵적인 동조자가 대부분이라 이들 모두가 살인에 간접적으로 가담했다고 할 수 있지만 동조자는 살인 혐의자가 아닌 만큼 비난할 수는 있어도 기소할 수는 없다.
그나마 리더인 아부 무사브 알자르카위 정도가 외부에 드러났는데 체포되지 않다가 2006년 미군 폭격으로 죽었다. 때문에 역시 기소가 불가능하다. 이라크 정부도 수 차례에 걸쳐 외국인 납치 살해범을 체포, 사형 시켰지만 그 중 김선일을 살해한 범인이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일단 검찰은 살인 등의 혐의를 적용한 뒤 이들의 정체를 알 수 없다는 이유로 기소 중지 처분한 상태이다. 물론 2015년 살인 사건에 대해서 공소시효를 폐지하는 법안인 태완이법이 시행되면서 김선일을 살해한 범인에 대한 공소시효도 사라졌다. 다만 범인들의 목소리와 소속을 제외하고는 알려진 것이 전혀 없고, 이라크 정부가 많은 알 카에다 조직원들을 붙잡아 심문했지만 살인범을 잡기는커녕 실체조차 밝혀내지 못했으며, 또한 10년 이상이 지났기에 외모와 목소리 모두 바뀔 수도 있으므로 영구미제 사건으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당시 유일신과 성전은 미군과 계속해서 교전 중이였고[18] 미군이 유일신과 성전의 본거지인 팔루자에 대규모 공습을 여러 차례 가하면서 다수의 조직원이 사망했는데 그 과정에서 김선일 살해와 납치를 "직접 지시"했던 오마르 하디드라는 이름의 지휘관도 2004년 11월 미군 공격으로 사망했으며 알 자르카위, 아유브 알 마스리 등 다른 지휘관급 인물도 모두 사망했기에 김선일의 살해범들도 미군의 공격으로 이미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8. 정부 잘못 vs 본인 잘못


정부가 납치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책임과 가지 말았어야 하는 데를 왜 갔냐는 의견이 나뉜다. 일단은 후자 쪽 의견이 훨씬 많다.
사건이 일어난 당시에는 무장단체와의 교섭에 실패한 정부 잘못이라는 여론이 지배적이였으나 이후 샘물교회 사건이 터지고 시간이 흐른 현재에는 위험지역에 선교를 간 본인의 책임이라는 의견이 더 많다.

9. 그 외


2004년, 네이버 지식인에 한 이용자가 김선일 관련된 꿈을 꿨다는 질문을 올렸는데, 여기서 '''67'''이라는 숫자를 봤다고 한다. # 앞서 말했다시피 김선일을 살해한 주범이 알 자르카위이고 그가 죽은 날짜가 '''6월 7일'''임을 감안하면, 김선일이 알 자르카위의 사망일을 2년 정도 앞서서 예언했다고도 해석할 수 있어서 한 때 화제가 되었었다. # 지식인에 글을 올린 날짜는 9월 13일인데, 이 날은 김선일의 생일이다.
2010년 방송된 SBS 드라마 스페셜 대물 1~2화 내용이 김선일 살해 사건이 연상된다는 얘기도 있다.


[1] 2016년 12월 사망[2] 친모는 아니고 계모이다[3] 추정[4] 2004년 6월 21일 공개된 영상에서 울부짖은 절규. 이때는 영어로 외쳤다.[5] 불법으로 저질러진 참수형, 아니 살인 행위이기 때문에 처형 등의 용어보다는 참살(斬殺)이라는 표현이 더욱 정확하다.[6]영산대학교 해운대캠퍼스.[7] 아트박스에서 분사된 회사이다.[8] 2004년 6월에 제작된 것이며, 현재는 사이트가 폐쇄돼서 원링크는 사라졌지만 Wayback Machine 탐색 결과로 겨우 찾아낸 것이다.[9] 게임 내 미니홈피와 같은 역할. 현재는 서비스 종료.[10] 그를 순교자로 봐야 하는지에 대해선 그 당시 교계 내부에서도 의견으로 갈리곤 했다.[11] 2003년 11월 30일에 이라크 전기 관련 공사 파견 업체 오무전기 직원 김만수·곽경해가 총에 맞아 숨진 참극이다. 하지만 오무전기는 영세기업이라 보상금도 제대로 못 주었고 고용 업체인 미국 웨스팅하우스, 워싱턴 인터내셔널 사는 외면하고 산재 보험도 거절 당했고 유족들도 법정 투쟁을 벌여 2006년에 와서야 미 법원 승소를 거두면서 미국 고용 업체들에게 보상금을 받았다. 이 당시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직원 이상민은 이후 인터뷰를 통하여 김선일 사건을 거론하면서 "일부 교회들의 보상 관련 시위도 있던 김선일과 달리 오무전기 두 사람 이름은 잊혀지고 누구도 신경쓰지 않는다!"며 분노했다. 참고로 오무전기는 그 뒤로 모든 비난을 다 뒤집어썼고(여기도 잘못은 없는 건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영세기업으로 용역된 것이었고 법정 소송 중에 밝혀진 조사에 의하면 회사 사정이 어려워서 보상금을 줄 여력이 아예 되지 못했다) 결국 사장은 홧병으로 쓰러져 몇 해 못 가 '''사망했다.''' 결국 사장의 부인이 사업을 이어나가게 되었다.#[12] 국가정보원 최근 테러의 대상·수법·수단 분석, 2005. 9.[13] 이슬람 사원 부근에서 인터뷰에 응한 무슬림들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이집트 출신의 한 무슬림은 '''"미국인을 죽인 줄 알았는데(.....) 한국인이었다고? 무슨 이유로 한국인을 (죽이느냐)?"'''라면서 어이없어했다고. 당시 보도 내용[14] 이때 당시의 국내 거주 아랍인들이 자주 다니던 이태원 일대에서는 아랍인들의 발길이 한시적으로 뚝 끊어지기도 했다. 레바논에서 유학을 온 어느 아랍인의 증언을 들어보면 흉흉한 분위기가 걱정되어 학교나 가게를 갈 때 말고는 외부 출입을 절대적으로 삼갔다고 한다.[참고] 살해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15] 이슬람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알라의 번역어가 바로 하나님이다.[16] 사실 유일신과 성전은 바로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의 전신이다.[17] 청부 살인의 경우 살인 가담자에 대한 처벌은 교사범과 동일하거나 더 가혹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당장 사모님 청부 살해 사건에서 '사모님' 윤길자의 명령을 받아 여대생을 살해한 두 범인은 교사범과 같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중이다.[18] 2004년 4월과 11월, 팔루자에서 이라크 무장단체와 미군과의 대규모 교전이 두 차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