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지코드
영어 Kozhikode
말라얄람어 കോഴിക്കോട്
1. 개요
인도 서남부 케랄라 주의 항구 도시. 위치는 망갈로르와 코친의 중간 정도이고 각각 백여km씩 떨어져 있다. 방갈로르에서는 서남쪽으로 275km 떨어져 있다.일자로 뻗은 해변에 자리하여 항구로 발달하기 좋은 조건은 아니었으나 위치가 좋아 각광받았다. 과거에는 '''캘리컷'''(Calicut)이라 불렸으며, 1498년에 바스쿠 다 가마의 선단이 등장한 것으로 유명하다. 캘리컷은 다른 말라바르 해안의 도시들과는 달리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과 대등히 교역'''하며 1793년까지 식민화 되지 않고 자주독립을 유지하였다. 현재 도시의 인구는 60만여 명이나 광역권은 무려 220만명에 이르는 규모를 자랑한다.
2. 역사
''' 대항해시대 유럽 향료 상인들의 최종 목적지 '''
캘리컷의 별명이 '향신료의 도시'였을 만큼 중세 향료 무역의 중심지였다. 도시는 1034년에 지어졌고 1102년에 체라 왕국에서 독립하였다. 다만 처음부터 큰 항구는 아니었는지 동방견문록에 등장하지 않는다.[1] 1420년 정화의 원정대가 정박하여 조공을 요구하던 당시의 캘리컷은 튀니지, 오만 등에서 온 이슬람 상인들이 향신료를 얻기 위해 방문하던 국제 항구였다.
2.1. 포르투갈과의 악연
1498년 5월 20일, 바스쿠 다 가마가 이끈 포르투갈 선단이 캘리컷에 상륙하였다. 그는 동아프리카 스와힐리 해안의 도시인 멜린다의 술탄으로부터 포르투갈어를 구사하는 아랍 항해사를 고용하여 인도까지 항해한 것이다. 가마는 왕이던 자모린과의 접견에서 산호, 설탕, 외투(스칼렛), 기름, 모자, 꿀 등을 진상하였으나 왕을 감동시키지 못 하였다. 자모린은 무역을 하고 싶으면 아랍인들처럼 금을 바치라고 하였으나 가마는 금이 없었으므로 인도인 수십 명을 납치..해서 본국으로 돌아갔다.[2] 1500년, 페드로 알바레스 카브랄은 브라질에 표류했다가 9월 13일 가까스로 캘리컷에 도착하였다. 그는 적절한 협상을 통해 자모린의 허락을 얻었으며, 공장과 창고를 지었다. 하지만 두 차례의 포르투갈 선단의 왕래로 중간에 그들과 마주친 아랍 선박들이 공격을 받는 일이 일어났고, 이에 대한 복수로 아랍인들은 캘리컷의 포르투갈인들을 공격하여 40명을 전사시켰다. 같은 해 12월, 카브랄은 남은 배들과 함께 남쪽의 코친으로 가서 재차 무역을 허가받았고, 이후 코친은 포르투갈의 굳건한 거점이 되었다.
1501년 말, 주앙 다 노바가 이끄는 3번째 포르투갈 선단이 인근의 칸나노어에 도착했을 때에 자모린은 작년의 참사에 대해 사과하고 도시로 초대하였다. 하지만 도시의 기독교도[3] 가 함정이라고 밀고하였고, 이에 노바는 항구의 인도 선박들을 약탈하여 수많은 은제품을 가지고 코친으로 떠났다. 1502년 2월, 바스쿠 다 가마는 캘리컷으로 15척의 전함과 8백명의 군대와 함께 돌아왔고 도중에 만난 수 척의 아랍 선박을 침몰시켰다. 그는 자모린에게 도시의 이슬람 상인을 추방할 것을 요구하였고, 거절당하자 도시를 이틀 간 포격하였다. 이후 가마는 인도 선박들을 나포하고 승무원들의 손, 코, 귀를 잘라 자모린에게 보냈다. 그럼에도 자모린은 포르투갈에 저항하였다. 가마가 떠난 직후인 1503년 3월, 자모린의 5만 대군은 남진하여 친 포르투갈 도시인 코친을 포위하였다. 코친의 왕자는 용맹히 싸워 두 번의 공세를 이겨냈으나 도시는 결국 함락되었다. 다만 그가 시간을 벌어 준 사이, 시민들과 포르투갈인들은 강 하구의 섬으로 피신하였다.
섬을 포위공격 하던 자모린은 프란시스쿠 드 알부케르크가 이끄는 포르투갈의 5번째 인도양 선단이 접근한다는 소식을 듣고 캘리컷으로 귀환하였다. 1503년 9월, 포르투갈은 코친에 요새를 세웠고, 이에 놀란 자모린은 같은 해 12월에 포르투갈과 평화 조약을 맺었다. 내용은 공장 파괴의 대가로 1200 바하르의 후추를 납부하며, 포르투갈 선박의 정박시 아랍인의 출입을 금하고 코친과 화해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평화는 양측의 선원 간의 불화로 인해 곧 깨졌고, 알부케르크는 캘리컷 봉쇄로 맞섰다. 1504년 3월부터 7월까지 자모린은 무려 5만 7천의 군대와 베네치아산 대포로 코친의 포르투갈 요새를 공격하였으나 150명의 수비대에 막혀 회군하는 수모를 겪었다.
1504년 9월 4일, 6번째 포르투갈 선단이 캘리컷에 나타나 포르투갈인 포로 석방과 베네치아 기술자를 넘겨줄 것을 요구하였다. 캘리컷 수뇌부는 전자는 동의하였으나 후자는 거부하였고 이에 포르투갈 전함들은 2일간 도시를 포격하였다. 이후 그들은 코친으로 떠났고 자모린은 이집트 함대에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이듬해 1월에 포르투갈 함대에게 손쉽게 격파당하였다. 이후 알메이다의 7차 포르투갈 선단은 캘리컷의 2백척 함대를 칸나오르 해전에서 패배시켰다. 1509년 2월 3일, 구자라트 해안에서 벌어진 디우 해전에서 베네치아의 지원을 받던 맘루크 왕조 - 캘리컷 - 구자라트 함대는 포르투갈 함대에게 패하였다. 그리고 캘리컷을 박살내기로 마음먹은 포르투갈령 인도의 두 번째 총독 아폰수 지 알부케르케는 1509년 여름[4] 에 캘리컷을 침공, 자모린의 궁전을 점령하였다. 다만 요새에 있던 캘리컷군의 완강한 저항[5] 없이 으로 포르투갈군 해군사령관이 전사, 알부케르크 총독이 부상을 입기도 하였다. 1513년, 양측은 평화에 합의하였다. 한편, 1510년에 포르투갈인들은 비자푸르 술탄국을 격파하고 고아를 점령하였다.
2.2. 평화의 시기
이번에도 평화는 오래가지 못 했는데, 1515년에 포르투갈 측이 자모린을 암살하려 했던 것이 밝혀진 것이다. 1518년부터 캘리컷 함대는 포르투갈 요새들을 습격하여 피해를 입혔다. 1565년, 포르투갈의 동맹이던 비자야나가르 왕국이 탈리코타 전투에서 패하며 쇠퇴하자 용기를 얻은 캘리컷은 1571년에 1503년부터 포르투갈의 항구이던 찰리얌을 점령했다. 이에 포르투갈은 저자세로 화해를 요구하였고 1578년에 드디어 캘리컷은 포르투갈 상인과 교역하게 되었다. 1591년에 성당을 지을 때는 자모린이 직접 초석을 놓기도 하였다. 하지만 양국과의 교류는 오래가지 못 하였고, 포르투갈은 이베리아 연합을 거치며 약화되었다. 1604년 11월 11일에 네덜란드 선박이 입항한 후 그들에게 창고가 주어졌다. 1615년에 잉글랜드 선단이 무역을 요구하자 허락하였다. 1663년에는 잉글랜드에게 공장 설립권을 주었는데, 대신 다른 요구와 공장 확장은 금하였다.
2.3. 마이소르 전쟁
18세기 중반, 마이소르 왕국과 대영제국 간의 전쟁에 휘말려 캘리컷은 사실상 독립을 잃었고, 1792년에는 영국령이 되었다. 이에 반란이 일어났지만 이듬해에 진압되었다.
[1] 이븐 바투타의 기록에는 등장한다.[2] 다만 중간에 아프리카 등 많은 곳을 들린 덕에 투자한 금액의 60배가 넘는 이득을 얻었다고 한다.[3] 시리아 정교회의 분파가 고대로부터 인도 남부에 존속해오고 있었다. 이들 중에서 적지않은 수가 포르투갈과의 교류를 시작한 후에 시리아 정교회와의 단절을 선언하고 가톨릭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4] 혹은 1510년 1월[5] 과욕에 찬 부관 쿠티뉴가 알부케르크의 만류에도 자모린의 궁전을 공격했다가 매복에 당해 후퇴하던 중 전사, 알부케르크도 중상 입고 간신히 배로 도주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