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소르 왕국
[clearfix]
1. 개요
현재의 카르나타카에 존재하던 근현세 왕국. 비자야나가르 왕국이 망하면서 남인도의 최강국 중 하나로 부상하게 되나 서서히 밀고 들어오던 영국에게 패배하고 번왕국으로 존재하게 된다. 그러다 1947년에 인도가 영국의 자치령으로 독립하면서 그 역사도 같이 끝나게 된다.
2. 역사
마이소르에 위치한 왕궁
2.1. 초기 역사
본디 마이소르 왕국은 비자야나가르 왕국시절 마이소르를 중심으로 했던 조그마한 번왕국이었다. 그러나 비자야나가르 왕국이 데칸 술탄국 연합에게 패배하면서 차츰 쇠퇴하게 된다. 이전부터 마이소르 왕국은 눈치보며 팀마라자 워디야르 2세 때부터 은근슬쩍 독립국 형태로 지내기 시작했는데 비자야나가르 왕국이 더더욱 힘이 약해지자 1610년 라자 워디야르 1세는 아예 대놓고 독립선언을 하며 수도를 스리랑가파트나로 옮긴다.
이후 마이소르 왕국은 비슷한 시기 독립한 마두라이 나야크와 같은 왕국들 그리고 북쪽의 데칸 술탄국 세력들과 영토 다툼을 하게 된다. 이 다툼 와중에 한때 북쪽 데칸지역에 위치해있던 비자푸르 술탄국에 의해 수도가 함락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나라사라자 워디야르 1세때 이르러 이런 라이벌 국가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하여 영토 확장에 성공하게 되고 명실상부 남인도 최강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하지만 그 와중에 서쪽에서는 먼치킨 최강 세력이 인도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으니...
2.2. 영국과의 전쟁
18세기 영국의 인도 식민지화 계획은 계속되고 있었다. 한편 마이소르 왕국에서는 1761년 무슬림 장군이었던 하이다르 알리가 크리슈나라자 워디야르 2세를 몰아내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면서 본래 힌두교계열의 왕국이던 마이소르 왕국은 이슬람계열 술탄국으로 변신한다. 하이다르 알리는 농업을 장려하고 선정을 베풀어 나라의 힘을 강화시키는 동시에 서양식 군사제도와 무기를 받아들여 군대를 강화하여 세력 확장을 꾀하는 영국에게 끈질기게 대항한다.
그러다 1766년 영국이 타밀나두의 마드라스[2] 를 점령하면서 위기를 느낀 하이다르 알리가 다른 세력들과 동맹을 꾀해 영국에 대한 견제를 시도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 사실을 영국은 알아채버리고 스미스 대령에게 5만의 병력들을 보내어 공격하게끔 하였다. 드디어 제 1차 마이소르 전쟁(1766 ~ 1769)이 벌어진 것이다. 쳉암에서 마이소르 왕국을 비롯한 반영 연합군들은 대영제국군들과 전투를 벌였는데 여기서 마이소르 연합군이 승리하게 된다. 1769년 4월 영국과의 첫 번째 전투이후 조약을 맺게 된다. 이로서 대영제국과의 첫 전쟁에서 마이소르 왕국은 승리를 이뤄낸다.
이후 마이소르 왕국은 보다 확실히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주변의 마라타 동맹과 하이데라바드 왕국 등에 동맹을 호소하게 된다. 그러다 1775년 마이소르는 미국 독립 전쟁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서로 대립하는 앙숙관계인 것을 알게 되고 그들과 외교를 시도하게 된다. 결국 마이소르 왕국은 프랑스를 끌어들였고 동맹관계를 맺는데 성공하게 된다.
1778년 프랑스는 영국을 대상으로 선전포고를 하였고 영국은 이 선전포고에 응답하며 프랑스세력들을 인도에서 완전히 쫒아내 버릴 것을 다짐하였고 1780년 제 2차 마이소르 전쟁(1780 ~ 1784)이 벌어진다. 1782년 하이다르 알리가 병으로 사망하고 그의 아들 티푸 술탄이 알리의 뒤를 이어 영국과의 전쟁을 이어나간다. 이 전쟁에서 마이소르 왕국이 카르나타 태수령의 대부분을 점령하면서 영국의 남인도 세력을 크게 위협했는데, 당시 영국군의 총독 워렌 헤이스팅스가 군사력과 외교력을 동시에 발휘한다. 그는 하이데라바드 왕국의 니잠 정권을 매수하는 한편 1781~1782년에는 마라타 동맹과 평화조약을 체결하여 마이소르 왕국을 점점 고립하게 만들었다.
영국군은 1781년 포르토 노보에서 마이소르 왕국의 군대를 무찌르고 마드라스를 수복하기도 했다. 하지만 티푸 술탄이 지속적으로 압박해오고 1782년 2월 전투에서 영국은 대패하고 만다. 거기다 중요한 장군들도 포로로 사로잡히게 되었고 1784년 영국은 어쩔 수 없이 망갈로 조약(Treaty of Mangalore)을 맺고 한동안 마이소르 왕국과 평화를 유지하게 된다. 영국은 이 평화조약을 맺긴 했으나 여전히 마이소르를 정복하고자 하는 마음은 가지고 있었다. 이를 알고 있는 티푸 술탄 또한 마이소르 왕국의 독립을 위해서 영국을 반드시 몰아내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2차 마이소르 전쟁 이후 남인도는 휴전상태라고 하지만 둘중 어느 하나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완전한 평화와 안전은 보장될 수 없었다.
결국 1789년 제 3차 마이소르 전쟁(1789 ~ 1792)이 일어나게 된다. 이때 티푸 술탄은 프랑스와 힘을 합쳐 대영제국군을 막아보려 했었다. 그런데 하필 개전당시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엄청난 대사건이 터지면서 물러나게 되고 강력한 영국 함대에 의해 마이소르 왕국군은 대패하게 되어 3차 전쟁은 마이소르의 패배로 끝나게 된다. 1792년 세링가파탐 조약(Treaty of Seringapatam)을 맺게 되어 남인도의 영토들을 영국에게 할양하고 엄청난 배상금을 영국에 지불하였으며 티푸 술탄의 두 아들들 또한 인질로 잡히게 된다.
하지만 티푸 술탄의 저항은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전 생애의 목적은 오직 자국을 보호하는 한편 영국세력을 완전히 인도에서 추방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3차 전쟁에서 패배한 후 인도 아대륙 내 다른 국가들은 물론이고 프랑스, 아프가니스탄, 터키 등 여러 국가들에게 외교사절단을 보내 도움을 청하였다. 영국은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때마침 1798년 프랑스에서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점령하자 이에 위기감을 느낀다. 영국은 프랑스의 원군이 마이소르에 오는 것이 걱정되었고 그 전에 해결하고자 선전포고도 없이 전쟁을 벌인다.[3] 이것이 제 4차 마이소르 전쟁(1798 ~ 1799)이다.[4]
4차 마이소르 전쟁은 이전의 전투들과 비교했을 때 상당히 빨리 끝나게 된다. 그건 바로 내부분란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티푸 술탄은 전쟁이 시작되면서 '''“갇혀진 비참한 삶을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군인으로 죽는 길을 택하겠다.”'''라며 용감하게 영국군과 싸웠지만 한 장수가 영국의 꼬드김에 넘어가 티푸 술탄을 암살하면서 전쟁은 끝이 나게 된다. 이 전쟁으로 마이소르 왕국은 워디야르 왕조가 다시 들어서게 되고 이후 1947년까지 영국의 간접 통치하에 번왕국으로 전락하게 된다.[5]
3. 여담
마이소르 왕국은 1947년 인도의 전신인 영연방 입헌군주국 인도 자치령에 흡수되었고 지금도 인도 공화국의 일부가 된 채 재건되지 못하고 있지만, 왕가 자체는 아직도 남아있다. 현재 형식적으로 마이소르 왕가를 이어가는 사람은 2015년 계승받은 야두비르 크리쉬나다타 차마라자 워디야르(1992 ~ )이다.
[image]
야두비르 크리쉬나다타 차마라자 워디야르(Yaduveer Krishnadatta Chamaraja Wadiyar, 칸나다어 - ಯದುವೀರ ಕೃಷ್ಣದತ್ತ ಚಾಮರಾಜ ಒಡೆಯ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