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야나가르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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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세 남인도의 마지막 힌두 왕국[2] 으로 1336년 하리하라 1세와 동생들의 협력에 의해 건국 되었고, 1565년 1월에 이슬람 연합군에게 패할 때까지 남인도를 지배했다. 인도의 이슬람화를 저지하여 힌두 문화의 수호국으로 알려져 있다. 수도였던 비자야나가라(함피)는 지금도 거대한 유적으로 남아있다.
2. 역사
2.1. 배경
13세기부터 할지 왕조가 남인도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고 14세기 중엽에는 델리의 투글루크 왕조가 인도 최남단을 제외한 대부분의 남인도 지역들을 정복하였다. 이에 이 지역을 다스리는 지방의 토후들은 모두 이슬람화된 관리들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투글라크 왕조의 무함마드 술탄에 의해 쫓긴 힌두교도들이 남쪽으로 도망치면서 그곳에 존재하던 이슬람세력들을 축출하고 이미 멸망했던 촐라 제국의 잔존세력들과 힘을 합치게 된다. 이 남부 지역은 역사적으로 이민족의 침입에서 비교적 수비하기 용이한 곳이었고 힌두교 문화를 지키기에 적절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2.2. 초창기
비자야나가르 왕국의 건국자는 하리하라와 부카 형제이다. 이들 형제는 원래 와랑갈의 카카티야 왕조의 영주였었다. 그러다 캄필리 왕국의 재상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투글루크 왕조의 무함마드 술탄이 군대를 이끌어 와랑갈 지역으로 쳐들어오게 된다. 이때 이 형제들은 포로로 잡혀 델리에 강제로 끌려가게 된다. 그곳에서 그들은 이슬람으로의 개종 강요를 받게 되었고 결국 이슬람으로 개종한다. 후에 이들은 조용히 순종하는척하며 술탄의 신임을 얻게 된다.
당시 투글라크 왕조는 남인도를 정벌했지만 여전히 반란세력들이 끊임없이 일어났었다. 1330년경 옛 판디아 왕국의 수도 마두라이 지역에서 자랄 우딘 아산 칸이 독립을 선언했고 마이소르의 호이살라 왕조도 이에 호응하자 형제들은 술탄의 명으로 이들을 진압하러 가게 된다. 그러나 그 지역 무슬림들에게 심한 배척을 받아 오히려 이들은 델리 술탄 왕조에 대한 불만을 품게 되었고 기회다 싶어 스승인 비다야란야를 찾아가게 된다. 스승의 도움으로 그들은 다시 힌두교로 개종하게 되며 자신들만의 세력을 구축하기 시작한다. 주로 촐라 제국의 옛 주민들이 이 형제들을 도와주었으며, 북쪽에서 도망쳐온 힌두교세력들도 형제들을 지원하게 된다. 1336년 드디어 이들은 일곱 겹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단단한 도시 비자야나가라를 수도로 정했고 형 하리하라 1세를 왕으로 옹립하여 독립을 선언하게 된다. 이것이 남인도 마지막 최대 힌두교 국가 비자야나가르 왕국의 시작이다.
비자야나가르 왕국은 초창기부터 마이소르 지역의 호이살라 왕국이랑 마두라이 술탄국과 대립하게 된다. 마두라이의 기야스 우딘 샤 술탄이 호이살라 왕국의 발라라 3세를 살해하는 사건이 터지자 하리하라 1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호이살라 왕국을 공격하여 그들의 영토를 차지하여 아예 멸망시켜 버린다. 물론 잔존세력들이 존재하였으나 1346년 하리하라 1세는 부카 라야를 포함한 다섯 형제들과 친족들의 도움으로 호이살라의 전 영토를 안정화 시켜나간다.
호이살라를 멸망시키면서 최대난적은 남쪽의 마두라이 술탄국과 북쪽 데칸에 델리 술탄 왕조로부터 갓 독립한 신생 왕국 바흐마니 술탄국이 된다. 이중 남쪽에 존재한 마두라이 술탄국과는 14세기 중반을 기점으로 약 40년 동안 끊임없이 다투게 된다. 그동안에 하리하라 1세는 사망하고 동생 부카 라야 1세가 즉위한다. 부카 라야 1세는 마두라이 술탄국을 압박하였고 결국 멸망시키기 까지 하여 비자야나가르 왕국은 남인도 최강국으로 완벽하게 성장하게 된다.
2.3. 바흐마니와의 경쟁
한편 북쪽으로 비자야나가르 왕국은 데칸의 강국 바흐마니 술탄국과 퉁가바드라 강 유역, 크리슈나 강과 고다바리 강 사이의 델타 지역, 그리고 마라트와다 지역을 놓고 충돌하였다. 퉁가바르드 지역은 부와 경제의 원천이 이루는 곳이었고 델타의 경우 땅이 비옥하고, 해외 무역이 성행되는 항구가 많던 지역이다. 그리고 마라트와다의 경우는 남부 고아를 중심으로 비옥한 도시들이 즐비하거나 전략적 요충지로써 큰 가치가 있었다.[3] 이미 고대 중세 때부터 찰루키아 왕조, 촐라 제국, 야다바 왕조, 호이살라 왕국 등이 이곳들을 차지하기 위해 혈투를 벌였었고 비자야나가르와 바흐마니 또한 자신들의 국가를 성장시키기 위해 서로 엄청나게 치고박고 싸우게 된다.
이들의 전쟁은 단순히 치열했을 뿐만 아니라 매우 잔혹한 일들이 벌어지기도 했었다. 대표적으로 1367년 비자야나가르의 부카 라야 1세는 퉁가바드라 유역의 무드칼 요새를 점령했을 때 딱 1명을 제외하고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다 몰살 시켰었다. 이 소식을 들은 바흐마니의 무함마드 샤 1세는 당연히 엄청나게 대노하였고 십만 명의 힌두교도들을 죽이기 전까지는 절대로 칼을 칼집에 넣지 않겠다고 다짐까지 할 정도였었다.
결국 복수를 위한 전투가 일어나게 되고 비자야나가르 군대는 이 분노에 찬 바흐마니의 군대에 의해 패배하고 만다. 이에 부카 라야 1세는 정글 속에 숨어버리고 무함마드 샤 1세는 이를 찾기 위해 7개월 동안 정글을 뒤지고 다녔으나 수색으로 실패하였고, 수도 비자야나가라 공략 또한 실패한다. 결국 바흐마니 술탄국은 적당히 협정을 맺어 비자야나가르 왕국과 종전하게 된다. 이때 바흐마니의 군대 역시 비자야나가르의 많은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다녔는데, 이 충격으로 남인도에서는 전쟁이 벌어져도 무기를 지니지 않은 사람은 공격하지 않는 묵계가 성립하게 된다.
물론 바흐마니 술탄국과의 싸움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퉁가바드라 지역을 둘러싼 전쟁은 다시 일어나게 되는데 때는 비자야나가르의 데바라야 1세 그리고 바흐마니의 피루즈 샤 시기였다. 이 시기의 전쟁으로 비자야나가르는 패배하여 수많은 재물들은 물론이고 데바라야 1세의 딸마저 바흐마니의 술탄에게 억지로 시집보내게 된다. 하지만 이와 같은 패배는 다시 되갚게 되며 이로 인해 피루즈 샤는 동생에게 왕위를 빼앗기기도 하였다.
이후 데바라야 2세는 바흐마니 군대에 대한 세밀한 분석을 하기 시작했고 이들의 군대는 궁병과 기병이 상당히 막강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에 데바라야 2세는 궁술에 능한 무슬림 군인들을 스카우트 해오고 이들로 하여 자신들의 군인들을 교육시키게 하였다. 이런식으로 전열을 가다듬은 데바라야 2세는 1443년 바흐마니에게 전쟁 선포를 한다. 그러나 바흐마니의 군대는 여전히 강력했기에 막상막하의 상태가 이어지게 되었고 양측은 다시 휴전에 들어가게 된다. 이후로는 바흐마니 술탄국 내부의 문제가 커져 데칸 술탄국으로 여러갈래 나뉘어지게 되고 이들과의 경쟁은 여기서 마무리된다.
2.4. 후기
비자야나가르 왕국은 16세기 크리슈나 데바 라야왕 시절 절정에 이르는데 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퉁가바드라 지역의 지배권을 되찾시 위해 전쟁을 벌였으며, 그 과정에서 굴바가와 오릿사를 침공하고 수많은 요새를 빼앗을 뿐만 아니라 데칸 술탄국들 중 가장 남쪽에 위치하던 비자푸르 술탄국의 영토 일부를 챙기기도 한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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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 시대는 서양에서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에 의해 인도로 향한 신항로가 개척되는 시기였었다. 이로 인해 포르투갈인들은 인도로 진출하게 되고 크리슈나왕은 이들에게 우호적이었으며 보다 활발하고 안전한 무역을 위해 해군력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된다. 또한 그는 나라의 부강을 위해 군대의 힘을 강화하는 한편 당시 어지러운 법과 질서를 개편하여 국가의 안정을 꾀한다.
하지만 크리슈나왕이 사망하면서 비자야나가르 왕국은 혼란 속에 빠지는데 뒤를 이은 아츄타 데바 라야의 나이가 너무 어렸던 것이다. 왕이 어리자 주변의 친족들은 왕위를 노리게 되고 이에 대한 계승권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싸우기 시작한다. 아츄타왕이 1542년 사망한 뒤 아들 벤카타 1세가 즉위한다. 하지만 벤카타 1세는 즉위한지 6개월 만에 암살당하며 아츄타의 조카 시다시바 라야왕이 즉위하게 된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1565년 데칸 술탄국들이 서로 연합하여 탈리코타 근처에 있는 락샤사탕가디로 쳐들어온다. 이 전쟁으로 비자야나가르 왕국은 대패하였고 수도 비자야나가라까지 함락 당한다. 결국 수도는 페누콘다로 옮기고 이들에 대한 투쟁을 계속하게 된다. 벤카타 2세때 잠시나마 예전의 영광을 찾은 적도 있었지만 그가 죽은 뒤에 왕국은 마이소르 왕국을 비롯한 수많은 나야크 국가들이 독립하게 된다.
1646년 비자푸르 술탄국의 공격을 받게 된다. 이때 마이소르 왕국의 나라사 라자 1세가 비자야나가르 왕국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미 약해질대로 약해진 비자야나가르 왕국은 이 공격을 막아낼 수 없었고 결국 마지막 왕 스리랑가 3세가 마이소르 왕국으로 망명하여 완전히 멸망하고 만다.
3. 사회문화
비자야나가르 왕국은 바흐마니 술탄국을 비롯한 북쪽의 이슬람 왕국들과 자주 다툼을 벌였는데 그로 인하여 군사제도를 정비하고 힘을 키워나가면서 한때 100만의 병력을 거느릴 정도로[6] 군사적 대국으로 성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질 좋은 면직물과 향신료를 다른나라에 팔아 많은 돈을 벌었기 때문이다. 왕국의 여러 항구는 향신료, 면화 등을 사기 위해 각지에서 몰려온 상인들로 북적했다. 수도 비자야나가르는 명나라와 페르시아의 상인들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상인들도 찾는 무역도시로 이름을 날린다. 이 도시는 일곱겹의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왕궁 주변에는 커다란 시장들이 4개 있었는데, 이는 고대 로마 제국의 규모보다 컸다고 한다.
1498년에는 바스코 다 가마가 배 3척을 이끌고 중서부 해안의 캘리컷에 나타나는데, 그는 6개월 가량 여기저기 돌아다닌 끝에 후추를 비롯한 향신료들을 가득 싣고 돌아간다. 이후 포르투갈 상인들이 몰려와 고아에 무역 기지를 만들고, 인도와의 향신료 무역을 이끌었다.
16세기 초에 크리슈나 데바 라야 왕 시절에는 남인도내에 대대적인 수로 개편 작업을 실시한다. 왕은 곳곳에 물길을 뚫고 물을 저장하는 저수 시설들을 만들어 백성들이 가뭄 걱정 없이 면화와 곡물을 재배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그는 시와 학문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졌었는데, 특히 언어에 관심이 많아 텔루구어, 산스크리트어 문학을 지원하는 한편 스스로 텔루구어 서사시를 씀으로써 텔루구 문학을 크게 부흥시켰으며, 타밀어 저술가들도 보호하였다.
또한 비자야나가르 왕국은 힌두교 국가로써 힌두 문화를 바탕으로한 문학작품들과 건축물, 사원들이 많이 제작되기도 하였다. 사원의 경우 이전 팔라바 왕국이나 촐라 제국의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기도 하였는데, 이를 바탕으로 만든 것 중 유명한 사원이 바라다라자 사원이다. 바라다라자 사원은 비자야나가르 왕국 시대에 건축된 사원으로 비슈누를 바탕으로한 3대 사원 가운데 하나로 거론된다. 또한 예캄바라나타 사원은 칸치푸람에서 가장 큰 사원으로 높이 60미터의 흰 고푸라는 칸치푸람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이 사원자체는 팔라바 왕조 시대에 건축되었지만 당시에는 매우 작은 사당수준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비자야나가르 왕국 시기에 이르러 거대한 고푸라를 지닌 오늘날의 규모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7] 이처럼 바자야나가르 왕국은 16 ~ 17세기 걸쳐 힌두교 사원 제작에 많은 후원을 하였고 덕분에 고푸라가 가득한 도시가 형성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비자야나가르 왕국 시대에는 남인도의 힌두 문화가 매우 성행하였고 번성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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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다라자 사원
4. 기타
- 비자야나가르 왕국은 델리 술탄 왕조와 같이 하나의 왕조로만 이루어진 국가가 아니다. 즉, 국가명은 그대로둔채 지배층 가문만 바뀐 것이다. 총 4개의 가문들이 비자야나가르를 다스렸는데 상가마 왕조(1336~1485), 살루바 왕조(1485~1505), 툴루바 왕조(1491~1570), 아라비두 왕조(1542~1646)이다.
- 패러독스에서 제작한 Europa Universalis IV 게임에서는 초반 시나리오에서 인도 내 탑 수준에 속하는 강국이다. 여기서도 바흐마니 술탄국이 초반의 난적이지만 실제 역사랑 달리 생각보다 쉽게 제압할만하다. 물론 이후 동서북으로 초강대국들이 기다리지만...[8]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해당문서를 참조.
5. 역대 국왕
- 상가마 왕조
- 하리하라 1세 (1336 ~1356)
- 부카 라야 1세 (1356 ~1377)
- 하리하라 라야 2세 (1377 ~1404)
- 비루파크샤 라야 (1404 ~1405)
- 부카 라야 2세 (1405 ~1406)
- 데바 라야 1세 (1406 ~1422)
- 라마찬드라 라야 (1422)
- 비라 비자야 부카 라야 (1422 ~1424)
- 데바 라야 2세 (1424 ~1445)
- 바크한주 라야 (1445 ~ 1446)
- 말리카주나 라야 (1446 ~1465)
- 비루파크샤 라야 2세 (1465 ~1485)
- 프라우다 라야 (1485)
- 살루바 왕조
- 살루바 나라시마 데바 라야 (1485 ~1491)
- 팀마 부팔라 (1491)
- 나라시마 라야 2세 (1491 ~1505)
- 툴루바 왕조
- 툴루바 나라사 나야카 (1491 ~1503)
- 비라 나라시마 라야 (1503 ~1509)
- 크리슈나 데바 라야 (1509 ~1529)
- 아츄타 데바 라야 (1529 ~1542)
- 벤카타 1세 (1542)
- 사다시바 라야 (1542 ~1570)
- 아라비두 왕조
- 알리야 라마 라야 (1542 ~1565)
- 티루말라 데바 라야 (1565 ~1572)
- 스리랑가 1세 (1572 ~1586)
- 벤카타 2세 (1586 ~1614)
- 스리랑가 2세 (1614)
- 라마 데바 라야 (1617 ~1632)
- 벤카타 3세 (1632 ~1642)
- 스리랑가 3세 (1642 ~1646)
[1] 칸나다어로 비자야나가르 왕국의 공용어.[2] 이후에 마이소르 왕국이 힌두 왕국을 자처하지만 이는 하이다르 알리가 즉위하면서 이슬람 왕국으로 뒤바껴 온전한 힌두교 왕국이라고 보기는 어렵다.[3] 참고로 고아는 이란, 이라크 등 아랍 및 페르시아 세력들로부터 말을 수입하는 등 무역 거점지 및 군사적 요충지로서 정말 중요한 항구도시였다.[4] 이로 인해 비자푸르 술탄국과는 끝까지 앙숙관계가 되며 이들은 멸망의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기까지 한다.[5] 16세기 비자야나가르 왕국과 주변국들의 세력권[6] 아무리 비자야나가라 왕국이 강하기로서니 인도 전체가 아니라 남부만을 지배했던 나라가 100만의 대군을 거느렸다는 것은 과장의 여지가 있다. 인도아 대륙의 대부분을 지배했던 무굴 제국도 아우랑제브 때 50만 대군을 동원하느라 나라가 휘청거릴 정도였다.[7] 이러한 힌두 사원에 관한 자세한 내용들은 <이거룡의 인도사원순례>에서 보다 자세히 확인할 수가 있다.[8] 오스만, 티무르, 명나라, 러시아, 서양열강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