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제국

 





1. 개요
2. 명칭
3. 영토
4. 역사
5. 관련 문서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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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합스부르크 제국의 영토
합스부르크 제국(Habsburgerreich, Habsburg Empire) 또는 합스부르크 군주국(Habsburgermonarchie, Habsburg Monarchy)은 일반적으로 1526년부터 1918년까지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가문이 통치한 영토
시대에 따라서 지속적으로 영토 변화가 있었지만, 제국이 성립된 1526년부터 멸망한 1918년까지 계속 유지된 주요 구성국으로는 오스트리아(니더외스터라이히 대공국, 오버외스터라이히 대공국, 케른텐 공국, , 슈타이어마르크 공국, 티롤 제후백국, 포어아를베르크 백국), 크라인 공국(현재의 슬로베니아), 보헤미아 왕국(현재의 체코), 모라비아 변경백국, 크로아티아 왕국, 서헝가리 왕국 등이 있다.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통해 발칸의 여러 국가를 지속적으로 병합해 나갔고, 이탈리아 북부의 여러 국가들이 합스부르크 제국에 병합되었다가 떨어져 나가기를 반복했다. 또 현재의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지역을 지배하기도 했다. 원래 독일 남부의 슈바벤 지역에 여러 월경지를 갖고 있었지만, 나폴레옹 전쟁 이후 열린 빈 회의에서 독일의 다른 왕국들에게 대거 양보했다.[1]

2. 명칭


1526년, 당시 오스트리아 대공이자 훗날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는 페르디난트 1세가 그의 아내인 안나(Anna von Böhmen und Ungarn)의 야기에우워 가문이 보유한 서부 헝가리 왕국, 보헤미아 왕국, 크로아티아 일대를 물려받으면서 많은 영토들이 합스부르크 가문에 귀속되었다. 오스트리아가 대공국이 되었을 시기의 인구는 2,000,000명 정도였지만 영토를 확장하면서 인구가 수천만 명에 달하는 국가를 형성하게 된다. 이후 1556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가 퇴위할 때 펠리페 2세가 스페인, 네덜란드, 아메리카의 식민지를 물려받고, 페르디난트 1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물려받으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이 오스트리아와 스페인으로 분리되었다. 이때부터 합스부르크의 영토를 통칭하여 합스부르크 제국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합스부르크의 각 영지는 서로 독립적으로 상속된 일종의 동군연합 상태로, 1804년 오스트리아 제국이 선포될 때까지 하나의 제국으로 통합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합스부르크 제국은 공식적인 국명은 아니다. 오스트리아 제국이 탄생하기 전까지 개별 영지들은 지역의 독자적인 전통을 상당 부분 유지하며 비교적 폭넓은 자치권을 누렸다. 하지만 대외적으로 이들 합스부르크 세습령들은 하나의 단일한 공동체로 작용했고 인구는 수천만 명이나 되어서 엄청난 영향력을 가졌다. 그래서 합스부르크 제국이라는 명칭은 당대부터 편의상 널리 쓰였다. 수도는 현재와 같이 이었는데 오스트리아가 대공국으로 승격되었을 때는 인구가 이미 수만 명이었던 주요 도시였고 1683년에는 인구 110,000명, 1804년에는 인구 230,000명으로 급격하게 성장해 당시까지도 여전히 인구 수만 명에 머물렀던 다른 주요 도시에 비해 독보적이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이 다른 왕국들에 비해 느슨한 동군 연합 체제였던 주된 원인은 근본적으로 제국의 규모에 비해서 본토라 할 수 있는 오스트리아의 규모가 작았기 때문이다. 합스부르크 제국 내에서 독일인[2]은 19세기 후반에는 전체 인구의 약 24%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오스트리아 지역의 인구는 1867년에는 4,500,000명에 불과해서 수천만 명에 달하는 전체 인구의 일부만을 차지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헝가리인이 차지했던 인구인 약 20%를 합쳐도 절반에 미달했기 때문에 행정적으로 영향력이 집중되기 어려웠고 군사적으로도 각 지역에서 징집된 군대 사이의 대화도 쉽지 않았다. 그래도 산업적으로 스코다로 대표되는 체코 지역은 동유럽 최대의 중공업 지대였고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영역 내에서도 자동차로 대표되는 기업들이 존재하는 강력한 국가였다.
일반적으로 오스트리아 제국(1804년 ~ 1867년)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1867년 ~ 1918년)도 합스부르크 제국에 포함된 것으로 본다. 합스부르크 제국이라는 용어는 1526년부터 1804년 오스트리아 제국이 성립되기 이전까지의 시기를 지칭할 때 더욱 빈번하게 사용된다. 애초에 합스부르크 제국이라는 용어가 생긴 것이 이 시기 합스부르크의 영토 전체를 아우르는 정식 국명이 없었기 때문에 생긴 국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1804년 오스트리아 제국이 성립되면서 정식 국명이 생겨났지만 여전히 합스부르크 제국이라는 표현은 여전히 적지 않게 사용되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이라는 표현을 많이 쓴 것은 합스부르크 가문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를 독점적으로 세습했기 때문에 직접 지배하는 영토가 제국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 신성 로마 제국과 합스부르크 제국은 비록 겹치는 영토가 있지만 서로 별개였다.[3] 1526년부터 1804년까지 합스부르크 제국의 통치자의 직위는 오스트리아 대공국, 헝가리 왕국, 보헤미아 왕국, 크로아티아 왕국 등의 국왕 또는 대공이었으며,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는 따로 보유했다. 그래서 합스부르크 제국을 합스부르크 군주국이라고도 부른다. 그래도 합스부르크 제국의 통치자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동일인이었고, 합스부르크의 영토 산하에 여러 왕국과 공국을 거느리고 있기 때문에 제국이라는 의미에도 부합해서 합스부르크 제국이라는 명칭도 틀린 것은 아니다.

3. 영토


현재의 오스트리아, 체코,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헝가리 전체와 루마니아의 서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북부, 이탈리아 북부, 폴란드의 남부, 우크라이나의 서부 등이 포함된다.
1526년 출범 당시 영토는 현재의 오스트리아, 체코,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헝가리 서부(로열 헝가리), 폴란드 남부(슐레지엔) 등이다. 이후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동부 헝가리와 서부 루마니아를 획득했다. 18세 중반 폴란드 남서부 슐레지엔을 상실했으나, 18세기 후반 폴란드 남동부를 획득했다. 일시적으로 획득했다가 다시 상실한 영토는 현재의 벨기에룩셈부르크, 밀라노베네치아를 포함한 북동부 이탈리아, 시칠리아를 포함한 남부 이탈리아, 이탈리아의 사르데냐 섬 등이 있다.

4. 역사


1526년 러요시 2세가 죽고 그의 왕국들은 페르디난트 1세가 물려받게 되었으나 그중 헝가리 왕국의 지배권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헝가리 귀족 회의가 그를 헝가리 국왕으로 선출했지만 일부 귀족들은 페르디난트에 반발하여 야노슈 1세를 옹립했다. 페르디난트 1세는 오스트리아군을 이끌고 헝가리로 진격했고, 수세에 몰린 야노슈 1세는 오스만 제국쉴레이만 1세에게 그의 신하가 되는 대가로 도움을 청했다. 1529년 쉴레이만 1세는 오스만 군대를 이끌고 오스트리아를 침공하여 빈을 포위(1차 빈 포위)했으나 실패하고 물러났다. 이후에도 합스부르크와 오스만 제국 사이에 몇차례 전투가 벌어졌고 결국 헝가리는 3개로 분할되어서 합스부르크는 헝가리의 서쪽(로얄 헝가리)만을 차지하게 되었고, 헝가리의 중부 지방은 오스만 제국의 직할 통치를 받는 오스만 헝가리가 되었으며, 동헝가리는 야노슈 2세가 통치하는 동헝가리 왕국이 되었으나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 되었다.
1618년 새로 즉위한 페르디난트 2세가 전임 황제들과 달리 개신교를 적극적으로 탄압하자 보헤미아 지역의 신교도들이 반발하여 30년 전쟁이 일어났다. 1648년 맺어진 베스트팔렌 조약의 결과 합스부르크 가는 영토를 상실하지는 않았으나 전쟁으로 영토의 상당 부분이 크게 타격을 입었다. 또 신성 로마 제국의 각 영방국들의 주권이 인정되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의 권력이 축소되었다.
1683년 오스만 제국의 침공을 받아 2차 빈 포위가 벌어졌으나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레오폴트 1세는 독일 각국과 폴란드 왕국 등으로 구성된 신성 동맹군을 결성하여 격퇴했다. 합스부르크가 주도하는 신성 동맹군은 여세를 몰아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던 동유럽의 영토를 침공하여 대투르크 전쟁(신성 동맹 전쟁, 1683년~1698년)을 일으켰다. 오랜 전투 끝에 1697년 젠타 전투에서 신성 동맹군이 결정적인 대승을 거두어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Treaty of Karlowitz)이 체결되고 합스부르크 제국은 오스만 헝가리트란실바니아 공국을 합병하면서 헝가리 전 지역을 지배하게 된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인 1705년 벨기에(과거 스페인 합스부르크의 영토)를 차지하여 지배하기 시작했으며, 1714년 종전 후 맺어진 위트레흐트 조약과 라슈타트 조약(Treaty of Rastatt)으로 합스부르크의 벨기에 지배권이 공인되었고 나폴리 왕국, 밀라노 공국, 사르데냐 섬을 획득했다.
대튀르크 전쟁의 결과에 불복한 오스만 제국에 의해 제6차 오스트리아-튀르크 전쟁(1716년 ~ 1718년)이 일어났다. 전쟁 결과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북부 등을 획득했다. 전쟁 중인 1717년 합스부르크 제국이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하고 있는 틈을 타 스페인의 펠리페 5세위트레흐트 조약에 불복하고 프랑스의 왕위 계승권과 남부 이탈리아의 지배권을 주장하며 사국 동맹 전쟁(1717년 ~ 1720년)을 일으켰다. 펠리페 5세가 합스부르크 제국이 전쟁 중인 사이를 노린 것을 저지하기 위해 영국, 프랑스 왕국, 네덜란드 공화국이 합스부르크 제국 편에 참여하여 동맹이 형성된 것이었다. 후에 사보이 공국도 참전했다. 종전 후 맺어진 헤이그 조약(1720년)에서 카를 6세사보이 공국에게 사르데냐를 넘겨주는 대신 시칠리아를 획득했다.
1734년 일어난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의 결과 체결된 빈 조약(1738년)으로 나폴리 왕국시칠리아 왕국을 상실하고 대신 토스카나 대공국과 파르마를 획득했다. 빈 조약 체결 과정에서 카를 6세는 딸 마리아 테레지아합스부르크 가문을 계승하는 것을 인정받기 위해 프랑스 등 주변국들에게 많은 양보를 했다.
1735년부터 1739년까지 이어진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러시아의 동맹국으로 참가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바냐 루카 전투, 그로카 전투, 베오그라드 전투 등을 모조리 패배하고 만다. 전쟁 결과 세르비아, 바나크 남부, 보스니아 북부 등 획득했던 영토 중 상당수를 다시 오스만 제국에 빼앗겼다.
1741년 마리아 테레지아의 왕위 계승을 두고 프로이센 왕국프리드리히 2세가 이의를 제기하여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의 결과 1748년 마리아 테레지아의 계승을 공인받았으나 보헤미아의 일부였던 슐레지엔을 상실하게 되었다.
1772년부터 1795년까지 3차례에 걸쳐 러시아, 프로이센과 함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분할했다. 오스트리아가 차지한 영토의 크기는 가장 작았으나 가장 많은 인구가 사는 지역을 차지했다.
프랑스 혁명 전쟁이 진행 중이던 1795년 프랑스가 벨기에(합스부르크령 네덜란드)를 점령하게 되면서 이 지역을 상실하게 되었다. 1796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합스부르크의 영향권 아래에 있던 북이탈리아를 침공했다. 나폴레옹과의 이탈리아 전쟁 후 맺어진 캄포포르미오 조약에 의해 벨기에의 프랑스 합병이 인정되었고, 이후 빈 회의에서도 벨기에를 회복하지 못한다. 같은 조약에 의해 합스부르크가 다스리던 밀라노 공국과 만토바 공국을 상실했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방계가 다스리던 토스카나 대공국과 모데나 공국의 군주도 쫒겨났다. 대신 베네치아달마티아(현재의 크로아티아 남부)를 획득했다. 합스부르크는 베네치아를 제외하고 북이탈리아에 일체의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게 되었고, 또한 프랑스가 합스부르크로부터 획득한 영토를 중심으로 북이탈리아에 치살피나 공화국을 세우는 것을 인정했다.
1804년 프란츠 2세는 합스부르크 세습령을 통합하여 오스트리아 제국을 선포하였다.[4]

5. 관련 문서


[1] 슈바벤의 월경지를 양보한 대가로 이탈리아 북부를 병합했다.[2] 주로 니더외스터라이히 대공국, 오버외스터라이히 대공국, 케른텐 공국, 잘츠부르크 공국, 슈타이어마르크 공국, 티롤 제후백국, 포어아를베르크 백국 등에 있었다.[3] 특히 30년 전쟁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의 영역과 합스부르크 직할령의 괴리가 점점 커져서, 17세기 이후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의 강역 변화를 요약하면 '서쪽에서 영토를 잃고 동쪽으로 확장'하는 패턴이 반복된다고 볼 수 있다. 30년 전쟁으로 신성 로마 제국 내 영방국가에 대한 영향력을 잃은 뒤 헝가리 회복, 슐레지엔 잃고 폴란드 분할, 롬바르디아-베네토를 잃고 발칸 영향력 확대 등. 문제는 동쪽으로 갈수록 민족, 종교가 다양해지면서 민족주의가 도래한 이후에는 제국의 폭탄이 되어버리지만 말이다.[4] 이렇게 프란츠 2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오스트리아 제국 황제를 겸하는 이중 황제가 되었지만 신성 로마 제국은 금방 해체되어 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