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헤미아 왕국

 


'''보헤미아 왕국
České království
'''
[image]
[image]
'''국기'''
'''국장'''
'''국가 정보'''
'''1198년 ~ 1918년'''
'''위치'''
중동부 유럽 보헤미아
'''수도'''
프라하
'''공용어'''
체코어, 독일어
'''정치 체제'''
군주제[1]
'''주요 국왕'''
오타카르 1세(1155년~1230년)
언어별 명칭
체코어
České království
독일어
Königreich Böhmen
라틴어
Regnum Bohemiae
1. 보헤미아의 성립
2. 룩셈부르크 왕조의 시작
3. 야기에우워 왕조의 시작
4. 합스부르크 왕조의 시작
5.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기
6. 독립 이후의 보헤미아

[clearfix]

1. 보헤미아의 성립


보헤미아 지역은 게르만족 대이동 후 슬라브인들이 들어와 살던 지역이었다. 623년 아바르인이 침입을 하자 프랑크족 상인이었던 사모가 슬라브인들을 규합해서 국가를 세우고 아바르인을 물리치나 사모가 죽은 후 왕국은 해체되었고, 이후 대 모라비아 왕국이 들어섰다.
체코의 가장 오래된 역사 문헌인 프라하의 사제 코스마스가 기록한 보헤미아 연대기에 적힌 전설에 따르면, 8세기경 보헤미아 사람들 사이에 서로 다툼이 일어나자 크록이라는 사람이 중재를 맡았고 그가 죽자 그의 세 딸들 중 막내인 리부셰가 아버지의 역할을 이어받았다. 리부셰는 사려깊고 현명했으며 미래를 예언하는 능력까지 있었다고 여겨지나 여자였기 때문에 그녀의 결정을 따르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그래서 리부셰는 농부 프르셰미슬을 자기 남편으로 삼았다. 리부셰의 예언에 따라 보헤미아인들이 프라하 성을 세우면서 프르셰미슬과 리부셰의 후손들이 프라하와 그 주변을 통치한 프르셰미슬 왕조가 되었다.
대 모라비아 왕국 시기인 9세기 이후 보헤미아는 기독교 지역이 되었다. 867년 성 치릴로와 성 메토디오가 보헤미아에 기독교를 전파할 당시 프르셰미슬과 리부셰의 8대손인 보르지보이 1세가 기독교로 개종한다. 하지만 대 모라비아 왕국은 마자르(지금의 헝가리인들)인의 침입으로 멸망하고, 보헤미아 일대는 이후 프르셰미슬 왕조에 의해 통합되어 보헤미아 공국이 건립된다.
이후 보헤미아 공국은 신성 로마 제국의 휘하로 들어가 봉신이 되었고 1198년 왕국으로 승격되었다.

2. 룩셈부르크 왕조의 시작


1310년 보헤미아 왕국은 룩셈부르크 가문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이후 룩셈부르크 가문이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차지하면서 룩셈부르크 가문과 보헤미아 왕국의 위상은 올라간다. 특히 금인칙서로 유명한 황제 카를 4세(1355-1378)는 보헤미아를 자신의 근거지로 여겼고 보헤미아의 중심 도시인 프라하에 거주했을 정도였다. 카를 4세는 금인칙서에 보헤미아 국왕을 선제후로 확정해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보헤미아의 지위를 확고하게 했다.
카를 4세의 통치기인 14세기 중후반 보헤미아는 금융, 무역, 학문의 중심지였다. 프라하 대학이 이때 세워졌다. 보헤미아 왕국은 30년 전쟁 시절까지 신성 로마 제국의 구성국 중에 최강 수준의 국력을 가진 국가였다.

3. 야기에우워 왕조의 시작


지기스문트 황제(1368-1437)를 마지막으로 룩셈부르크 왕가가 단절되면서 왕조도, 헝가리와의 동군 연합 관계도 수시로 변화했다. 일단은 보헤미아, 헝가리 두 왕국 모두 지기스문트의 유언에 따라 사위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알브레히트(1397-1439)에게 넘어갔으나, 실질적인 권력은 현지 귀족들에게 넘어갔고, 곧 명목상 섭정이지만 실제로는 왕위나 다름없던 자리를 놓고 보헤미아와 헝가리 사이에서 귀족 간의 전쟁이 벌어졌다. 알브레히트가 죽자, 헝가리는 알브레히트의 아들 라디슬라브(1440-1457)를 불신임하고 폴란드의 왕 브와디스와프(1424-1444)를 선출한 반면 보헤미아는 아예 왕을 선출하지 않아 동군 연합은 해소되고 왕위는 비어 있었다. 1453년에야 당시 헝가리의 왕이 되어 있던 라디슬라브를 추대해 동군 연합은 재결성됐으나 왕의 실권은 없었다. 그도 후사 없이 사망하자 앞선 1419년 지기스문트 통치 당시 반란을 일으켰다가 신앙을 인정받았던 후스파의 우두머리 이르지 스 포데브라드가 왕위에 올라(재위 1457-1471) 보헤미아의 왕, 폴란드의 왕, 헝가리의 왕, 부르고뉴의 공작과 바이에른의 공작이 모두 참여하는 대연방을 구상하기도 했으나 무산되었고 그의 치세는 후스파와 가톨릭파의 갈등으로 채워졌다. 교황이 보헤미아에 간섭하여 후스파의 개종을 요구하자 자신이 후스파였던 이르지 왕은 거부했고 끝내 파문당했다.
[image]
이르지를 파문한 교황은 보헤미아 내의 가톨릭파 귀족들과 헝가리를 끌여들여 보헤미아에서 전쟁을 일으켰다. 이르지는 군사적으로 헝가리군에 맞서는 한편 폴란드를 끌어들이기 위해 자신의 아들들을 제치고 라디슬라브의 누나 엘리자베스와 당시 폴란드의 왕 카지미에슈의 아들인 브와디스와프 왕자를 계승자로 선언하였는데, 이후 이르지 왕이 갑자기 죽어버리면서 장성한 이르지의 아들들 대신 15세의 외국 출신의 어린 왕이 보헤미아의 왕위에 오르고 말았다.
전쟁 중이었고 폴란드의 도움이 절실하였으므로 왕으로 모시기는 하였으나, 경험없는 소년 왕은 귀족들 사이에서 별 인기가 없었다. 여기에 브와디스와프는 독실한 가톨릭이었으므로 후스파 귀족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1478년 오스트리아가 헝가리를 침공한 것을 틈타 보헤미아가 헝가리와 종전 조약을 맺으면서 전쟁이 끝나자 보헤미아 귀족들은 브와디스와프와 충돌하기 시작하였다. 가톨릭 귀족들은 후스파에 의해 추대된 왕을 좋지 않게 여겼으며, 후스파는 왕이 가톨릭 인사들을 요직에 임명하는 것에 반발했다. 폴란드 출신이었던 브와디스와프는 보헤미아 안에 아무런 세력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가톨릭을 끌어들이는 정책은 왕권을 약화시켰고, 귀족들은 무력해진 왕을 무시하고 원래 보헤미아에는 없었던 농노제를 도입하는 등 자신들의 힘을 늘려나갔다.
1490년 브와디스와프가 헝가리 국왕으로 선출되면서 헝가리-보헤미아의 동군연합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 연합과 함께 리투아니아계 왕가인 야기에우워 왕가(Jagiellonowie)가 다스리는 지역이 되어서 엄청난 영토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왕에게는 이런 영토에 대한 아무런 힘도 없었고, 귀족들이 브와디스와프를 선출한 이유도 무력하기 때문이었다.
야기에우워 왕가는 1526년 브와디스와프 2세의 아들 러요시 2세(루드비히 2세)가 헝가리에서 오스만 제국과의 모하치 전투에서 전사하자 2대 만에 단절되었고, 1차 빈 포위가 오스만의 패배로 끝난 뒤 보헤미아의 의회는 러요시 2세의 매부인 오스트리아의 대공 페르디난트 1세[2]를 국왕으로 선출하였다. 이렇게 수십 년 만에 보헤미아의 왕위를 다시 얻은 합스부르크 가문은 이후 사실상 왕위를 독점하게 된다.

4. 합스부르크 왕조의 시작


1526년 페르디난트 1세가 국왕으로 선출된 후 보헤미아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의 일원이 되어 지배하에 있게 된다. 보헤미아는 헝가리와 함께 합스부르크의 핵심 지역이 되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처음에 바이에른 공국에서 독립하여 변경백국이 된 이후, 병합한 국가들을 통합하지 않고 유지했다. 합스부르크의 가장 주된 영지인 오스트리아 지역도 오스트리아 대공국, 슈타이어마르크 공국, 케른텐 공국, 크라인 공국, 티롤 제후백국, 이후 새로 잘츠부르크 대주교의 영토가 오스트리아로 흡수되면서 생긴 잘츠부르크 공국 등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들 중 가장 큰 오스트리아 대공국도 인구가 적지는 않았지만 그 규모는 작은 편이어서 끝내 왕국이 되지 못했고, 선제후국 역시 되지 못했다. 역시 인구가 적지는 않았지만, 도시의 엄청난 정치적 위상에 비해서는 그 규모가 크지 않았다. 종교 전쟁이 일어났던 시절에는 슈타이어마르크나 티롤 같은 지방에는 개신교들의 영향력이 강해 합스부르크 가문의 고민이 되기도 했다.
반면에 보헤미아는 왕국을 구성할 만한 인구와 영향력을 갖추었으며,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전체 영토에서 징수되는 세입의 상당수를 차지했을 정도였다. 게다가 보헤미아의 왕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선거권을 가진 선제후기도 했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도자들이 제국 내 제위 선출 과정 등의 영향력과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자격은 어디까지나 보헤미아의 왕으로서였지 오스트리아 대공으로서가 아니었다. 그런 만큼 보헤미아는 정치적으로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에게 엄청나게 중요한 땅이었다.
보헤미아는 합스부르크로부터 충분한 자치권을 누렸을 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에 압력을 행사하는 위치에까지 있었다. 보헤미아의 왕 역시 선출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헤미아 왕으로 뽑히기 위해서 합스부르크의 군주들은 보헤미아 귀족들에게 잘 보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오스만 제국의 강력한 힘을 상대하기 위해 루돌프 2세는 개신교 출신 보헤미아 제후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인정해야 했고, 루돌프 2세를 밀어내고 추대된 동생 마티아스(마티아슈) 황제[3] 역시 유화책으로 일관하였다.
수많은 민족의 국가를 경영하던 합스부르크는 다른 민족의 문화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데 거부감이 매우 적었다. 합스부르크는 각 영지의 자치권과 문화를 상당 부분 인정해 주는 관용적인 통치를 펼쳤다. 합스부르크의 이같은 관용적인 통치에 대해 현지 사람들도 큰 불만 없이 합스부르크의 지배 안에서 지냈다. 합스부르크의 지배 하에 프라하도 다시 번영하기 시작했고,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루돌프 2세(재위 1576-1611)는 궁정을 에서 프라하로 다시 옮길 정도였다. 화가 주세페 아르침볼도와 천문학자 튀코 브라헤요하네스 케플러를 중용했다.
보헤미아와 합스부르크가 밀월 관계에 빠지게 된 것은 지속되는 오스만 제국의 위협과 인접한 헝가리의 처지도 큰 영향을 미쳤다. 1526년 러요시 2세가 전사하고 합스부르크의 페르디난트 1세가 그의 왕위를 물려받았을 때, 보헤미아와 크로아티아 왕국은 오스만 제국의 침공을 보호해줄 합스부르크의 지배를 환영했다. 그러나 헝가리에서는 의견이 양분되었고, 일부 귀족들이 페르디난트 1세의 왕위 계승에 반대하여 오스만 제국에 도움을 청했다. 결국 오스트리아와 오스만 제국 간의 소모전 끝에 헝가리는 합스부르크의 영토과 오스만의 영토로 양분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헝가리는 기나긴 전쟁으로 황폐화되었으며, 분할 이후에 오스만 헝가리는 오스만 제국의 가혹한 통치를 받았다. 이런 처참한 모습을 보면서 보헤미아인들은 합스부르크의 지배에 안도하게 되었다. 1683년 오스만 제국의 침공 때도 빈이 방어를 해준 덕분에 보헤미아는 오스만에 휩쓸리지 않았다.
그런데 보헤미아가 한 차례 크게 합스부르크에 저항을 하고, 결과적으로 중유럽을 폐허로 만드는 세계대전을 한번 일으키게 되는데, 바로 30년 전쟁이다. 16세기 종교 개혁의 물결을 타고 보헤미아에도 개신교가 전파되어 널리 퍼지게 되자, 한동안 합스부르크는 종교 문제에 유연하게 대처했으나 페르디난트 2세가 즉위한 후 강경한 정책을 펼치며 개신교를 탄압했다. 그래서 개신교 지역인 보헤미아가 반발하여 30년 전쟁(1618-1648)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전쟁으로 보헤미아는 스웨덴군을 포함한 각종 외국군에게 유린당하며 엄청난 타격을 입었고, 보헤미아에 대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력이 결정적으로 공고해졌다.

5.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기




'''보헤미아 왕국'''
'''뵈멘 왕국, Königreich Böhmen'''(독일어)
'''체스코 왕국, České království'''(체코어)

[image]
[image]
'''국기'''
'''국장'''
[image]
'''1867년 ~ 1918년'''
'''위치'''
중동부 유럽 보헤미아
'''수도'''
프라크
'''정치 체제'''
군주제
'''국가 원수'''

'''주요 국왕'''
프란티셰크 요세프 1세(1867-1916)
카렐 3세(1916-1918)
'''공용어'''
체코어, 독일어, 라틴어
'''민족'''
체코인, 독일인
'''종교'''
가톨릭, 개신교,[4] 정교회[5]
'''역사'''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편입
1918년 해체
'''통화'''
그로센, 굴덴, 크로네
'''성립 이전'''
보헤미아 공국
'''해체 이후'''
체코슬로바키아
[image]
19세기에 혁명이 유럽을 휩쓸면서 보헤미아에서도 서서히 민족 세력의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 비해서 보헤미아의 민족 세력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1848년 혁명(3월 혁명) 당시 슬라브-체코 민족 세력의 혁명이 일어났으나 실패했다. 19세기 후반 체코의 민족 정체성은 서서히 성장했지만 민중들의 지지를 받는 본격적인 분리 운동에 이르지는 못했다. 간헐적으로 일어난 대부분의 분리 시도는 일부 지식인들의 운동에 가까웠다. 수백 년에 달하는 합스부르크의 긴 지배 기간을 거치는 동안 체코인들의 사상도 오스트리아(독일계)에 가까워졌으며 오스트리아의 문화 분산 정책에 힘입어 많은 독일인이 보헤미아에 이주하기도 했다.[6] 게다가 오스트리아는 자유주의적인 분위기가 있어 체코인이라고 해서 차별하거나 박대하는 일도 다른 국가에 비하면 훨씬 적었다. 그래서 보헤미아에서는 헝가리에서와 같은 본격적인 분리 주장은 거의 없었다. 따라서 오스트리아 제국의 통치 파트너로는 헝가리가 선택되었다.
보헤미아 지역은 오래전부터 슐레지엔 지역과 함께 중부 유럽에서 독보적으로 상공업이 발달한 지역이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이러한 보헤미아의 산업을 잘 발전시켰다. 보헤미아 지역은 전반적으로 다른 선진적인 국가에 비해 산업화가 늦었던 이중 제국의 영토 중에 그나마 가장 도시화와 산업화가 잘 된 지역이었고, 소득과 삶의 수준도 높은 편이었다. 때문에 대다수의 체코인들은 독립하여 나가는 것보다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안정적인 지배 아래에서 남기를 원했다. 덕분에 제국 내의 체코인들의 입지도 독일인과 헝가리인에 이은 3순위 위치였기 때문에 다른 소수민족들과는 다르게 확연히 대접받는 것이 많았다.[7] 대표적으로 축구 국가대표팀 창설인데, 오스트리아, 헝가리, 보헤미아 이 3개국이 올림픽에 참가했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엄연한 주권 국가인만큼 그럴 수 있다쳐도, 보헤미아는 오스트리아에 귀속된 국가 중 하나였기 때문에 주권 국가가 아님에도 유일하게 참가했다는것이 이들의 입지를 나타낼 수 있다. 체코인 말고도 헝가리 내에서 자치를 누리던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크로아티아인들 역시 3인자에 올라설 만한 위치였긴 했지만 헝가리인들의 방해가 있었기 때문에 체코인들만큼의 위치로는 올라설 수 없었다.
체코의 분리 운동이 본격화된 것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트리아가 수세에 몰리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체코슬로바키아 건국의 아버지인 토마시 마사리크만 해도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고 이중 제국이 패배하려고 하기 전까지는 여전히 합스부르크 군주를 모시는 연방 내 자치 국가를 추구했다. 오스트리아에서의 분리를 요구하는 수준의 강성 민족 세력들은 제1차 세계 대전 후반에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이 몰락할 분위기가 되어서야 대중적인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

6. 독립 이후의 보헤미아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패전하자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일부로 분리되었다.

[1] 1620년 11월 8일 보헤미아 빌라호라(백산) 전투에서 당시 국왕이던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가 패배하여 페르디난트 2세가 복위하고 세습군주제로 전환하기 전까진 선거군주제였다.[2] 이전의 마지막 합스부르크 왕인 라디슬라브의 팔촌 동생의 손자이자 누나의 손녀 사위다.[3] 모라바(모라비아)의 변경백작, 헝가리의 왕 등에 우선 오른 뒤에 다시 루돌프 2세를 협박하여 나머지 보헤미아의 왕 등에도 올랐다.[4] 마르틴 루터가 활동하기 수십 년 전부터 얀 후스의 교회가 있었고, 이후 독일계, 헝가리계 사람들의 유입으로 루터파와 칼뱅주의 개신교도들도 생겼다.[5] 오래전부터 보헤미아 일대가 가톨릭 세력으로 넘어갔지만 모라비아 지역과 현재의 슬로바키아 지역에 정교회 신자들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들 중 상당수는 17세기에 동방 가톨릭 교회 형식으로 정교회식 전례를 유지하되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가톨릭으로 넘어갔다.[6] 그 영향으로 현대 체코어도 독일어 차용어가 많은 편이다.[7] 독일계, 헝가리계, 체코계는 다른 민족들과 달리 우수한 교육을 바탕으로 양질의 인재들을 배출했다. 대표적으로 제국군의 장교들은 대부분이 이 세 민족의 구성이었다. 이 세 민족을 제외한 나머지 민족 출신 장교의 비중은 극소수였다. 그나마 유명한 장교 스베토자르 보로에비치와 로타르 렌둘릭이 있지만 이들 역시 다른 민족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대우가 나았던 크로아티아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