톱카프 궁전
"신의 은총과 허락으로 두 대륙의 술탄이자 두 바다의 지배자, 현세와 내세에서의 신의 그림자, 동방과 서방에서 신의 총애를 받는 자, 육지와 바다의 통치자, 콘스탄티노폴리스 성의 정복자인 술탄 메흐메트 한의 아들인 술탄 무라트 한의 아들이신 술탄 메흐메트 한께서 신의 부를 영원히 간직하기를, 그리고 그 권좌가 천상의 가장 빛나는 별보다 더 위에 하기를, 정복자들의 아버지인 술탄 메흐메트 한의 명령으로 883년의 신성한 라마잔 달에[1]
이 신성한 성의 기초를 닦고, 평화와 안정을 도모하기 위하여 이 건축을 매우 튼튼하게 세웠도다."(톱카프 궁전 제1정문인 황제의 문 - Bâb-ı Hümâyûn에 새겨진 글귀)
[image]"Hakan-ı sahib kudretin (위엄을 지닌 왕이시여)
Devrinde âlem-ber-murad (그 분의 치세가 세상에 녹아들어)
Dergâh-ı vâlâ şevket-i (장엄하고 위대한 문들이)
Yâ Rabb! ola dâim küşâd (주여! 항상 열려있게 하소서)"
(톱카프 궁전 제2중정과 제3중정을 잇는 행복의 문 - Bâb-üs saâdet에 새겨진 시)
하늘에서 본 모습. 함께 아야 소피아 성당과 블루 모스크가 보인다.
오스만 터키어: کاخ توپقاپی (Kâh-ı Topkapı) 또는 صرای توپقاپی (Saray-ı Topkapı) [2]
터키어: Topkapı Sarayı (톱카프 사라이으)
영어: Topkapi Palace 혹은 The Seraglio [3]
1. 개요
터키 이스탄불 구성곽 동쪽에 위치한 궁전. 메흐메트 2세 시기인 1478년에 세워져 1856년, 술탄 압뒬메지트가 돌마바흐체 궁전으로 이궁하기까지 약 300여 년간 오스만 제국의 정궁이자 디완 회의의 의사당이었으며 제국의 인재들을 길러내는 고등교육기관이었다. 또한 궁전 제1정원에는 조폐소(Darphane)가 있어서 제국의 화폐를 찍어내기도 했으며, 재무부 건물에는 보물관이 있어 황실의 보물과 기록을 보존했다. 이후 1922년에 오스만 제국이 멸망하고 나서 수립된 터키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케말 아타튀르크가 1924년 4월 3일에 톱카프 궁전을 박물관으로 공개해 오늘날에 이른다.
전체 부지면적은 약 70만㎡[4] 로 도중에 여러 차례 증축과 개축이 이루어졌지만 오스만 제국시기에 세워진 각종 모스크, 학교, 목욕탕, 상가, 대상들의 숙소 등의 공공건축에 비하면 정말로 소박한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유럽 각국의 궁전들과 비교해 보아도 전성기 오스만 제국의 위용에 비해 터무니 없을 정도로 작고 단촐하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궁의 면적을 단순 비교하기 위해 사례를 들자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의 궁궐인 빈의 쇤브룬 궁의 전체 면적이 약 186 헥타르(186만 제곱미터)이다.
2. 설립 이전
톱카프 궁전이 위치한 사라이부르누(Sarayburnu) 지역은 고대 그리스시기의 아크로폴리스가 위치했던 지역이었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1세 시기에 로마 제국이 비잔티움으로 천도하자 이곳에는 바실리카와 지하 저수조가 들어섰고 지금의 궁전 위치에서 서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위치에 부콜레온 궁전(Βουκολέων)[5] 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톱카프 궁전 자리에는 지금까지 남아있는 성 이리니 성당(Aya İrini)을 제외하고는 군사상의 이유로 공터로 남아 있었으며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3. 설립과 확장
원래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거주하던 정궁은 현재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부지에 존재하던 콘스탄티노플 대궁전(Μέγα Παλάτιον/Büyük Saray)으로 330년 콘스탄티노플 천도부터 1081년 콤니노스 왕조 설립까지 종종 다른 궁전을 이용한 기간을 제외하면 690년 넘게 정궁으로 이용되었다. 하지만 콤니노스 왕조 이후 동로마 황제는 거처를 별궁으로 쓰던 블라헤르네 궁전(Βλαχέρναις Παλάτιον)으로 완전히 옮겼다. 그 후 대궁전은 버려졌고 1204년 제4차 십자군 이후 도시를 장악한 라틴 제국은 황제의 거처로 부콜레온 궁전을 쓰면서 블라헤르네 궁전도 버려지게 된다.
1261년 팔레올로고스 왕조가 콘스탄티노플을 수복하면서 라틴 제국을 통치하던 십자군은 달아날 수밖에 없었는데 이때 대궁전과 블라헤르네 궁전의 보물들을 털어가면서 크게 훼손되었지만 팔레올로고스 왕조는 블라헤르네 궁전은 수리해 정궁으로 썼으나 대궁전은 여전히 버려져 감옥으로 쓰는 신세가 되었고 라틴 제국이 쓰던 부콜레온 궁전 또한 버려지면서 훼손 상태가 심해진다.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때 블라헤르네 궁전마저 전란과 약탈과 방화로 파괴되어버리자[6][7] 도시를 장악한 메흐메트 2세는 지금의 이스탄불 대학 자리에 임시 거처로 목조 궁전을 세우고 그곳에서 거주했는데, 일화에 따르면 톱카프 궁전 자리를 둘러본 메흐메트 2세가 북쪽으로는 갈라타 탑이 보이고, 동쪽으로는 보스포로스 해협 건너 위스퀴다르가 보이고, 서북쪽으로는 금각만이 보이는 경치에 반해 이곳에 궁전을 세우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동로마 제국 시절에는 공터였던 부지에 궁전이 들어섰다. 처음에는 이전에 세운 목조궁전은 구 궁전(Eski Saray), 새로 세운 이 궁전은 신 궁전(Yeni Saray)이라고 부르다가, 궁전의 정문에 대포 두 문을 배치한 것을 보고 대포 문(Topkapı)이라는 이름을 창안해 오늘날까지 이어졌다고 전한다.
4. 구조
크게 4개의 중정(Avlu)으로 구분되는데, 예니체리 마당(Yeniçeri Meydanı)이라는 별칭이 붙어있는 제1중정은 황제의 문(Bâb-ı Hümâyun)을 통해 입장하며, 내부에는 예니체리들의 주거지와 훈련장, 무기고[8] , 제국 조폐소, 병원, 황실이 사용할 일상용구들을 제조하는 공방 등이 들어서 있었다. 이곳은 일반 백성들도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었는데, 특히 매주 금요일 아야 소피아 사원으로 행진하는 황제를 만나기 위해 군중들이 대기하곤 했다. 이때 백성들은 자유롭게 황제에게 청원할 수 있었으며, 황제는 백성들과 직접 접촉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한편 이곳에 위치한 성 이리니 성당은 1846년 궁중 보물 박물관으로 일반인에게 공개되기도 했다. 박물관이 다른 곳으로 이전된 1978년부터 각종 콘서트나 축제를 위한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제2중정은 평화의 문(Bâb-üs Selâm)을 통해 입장하며, 이곳부터는 평민들의 출입이 금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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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문의 모습
평화의 문은 톱카프 궁전의 상징이기도 한데, 메흐메트 2세가 문을 세우고, 쉴레이만 대제가 두 개의 탑을 세워 오늘날의 모습으로 만들었다. 사신이나 외국에서 온 손님이나 국내 귀빈이 이곳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황제의 허락을 받아야만 했는데, 그때까지 이 탑에 마련된 응접실에서 대기했었다. 한편 이곳에는 제2중정 마당에서 처형된 죄인의 목을 걸기도 했으며, 이 문 안쪽에는 사형집행인이 칼에 묻은 피를 씻었다는 우물이 남아있다. 제2중정은 오스만 제국의 대신들의 국정회의인 디완(Divan)을 주관하던 건물이 있으며, 사형집행당시 황제가 올라 윤허여부를 알렸다는 정의의 탑, 그리고 보물창고와 부엌이 남아있다. 현재 보물창고들은 오스만 제국 황실의 컬랙션들을 전시하고 있으며, 부엌에도 황실의 도자기그릇들을 전시하고있다.
제3중정은 행복의 문(Bâb-üs saâdet)으로 이어지는데 이곳은 황제 및 황제의 남자친척들만 통과할 수 있었으며, 내부에는 튤립 시대의 술탄 아흐메트 3세가 세운 도서관, 역대 황제들이 거주했던 공간, 황제 전용 모스크 등이 위치해 있었다. 현재는 보물관 및 이슬람 성유물을 모아놓은 박물관[9] 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아무래도 황제의 개인 공간이다 보니 건물 외벽과 내벽에 보다 화려한 장식이 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참고로 하렘은 제2중정에 입구가 있으며, 제3중정에 출구가 있는데, 현재는 그렇게 관람하게 되어있지만 당시에는 제2중정의 하렘입구는 하렘에 들어갈 물자나 새로 하렘에 들어온 여인들을 반입하기 위해 사용되었으며, 제3중정으로 통하는 출구는 황제가 하렘을 방문하거나, 하렘의 여인들이 산책이나 기타 용무를 위해 바깥으로 나올 때 사용되었다. 제3중정은 오로지 황제 및 직계가족만 출입이 가능했기 때문에 이곳만큼은 하렘의 여인들도 얼굴을 가리지 않고 돌아다닐 수 있었다.
제4중정은 들어가기 조금 까다로운데, 계단 밑으로 내려가야 입장할 수 있다. 톱카프 궁전에서 가장 깊숙한 공간으로 이곳에는 의외로 예니체리와 고급 관료들을 육성했던 학교인 엔데룬(Enderun)이 있었다.
5. 주요 포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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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다드를 수복한 기념으로 세워진 바그다드 정자. 갈라타 방면을 조망할 수 있다. 사실 사진속의 황금색 돔 건물은 극히 일부이고 바로 오른쪽에 진짜 바그다드 정자 건물이 있다. 과거 황자들의 할례식이 있을때 손님들을 대접하기 위해 쓰던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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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카프 궁전의 주방(Matbah-ı Âmire)
하루에 2만 명이나 되는 궁정 식구들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음식들을 만들 수 있었으며, 크게 10개의 공간으로 구분되어 각각 셰르베트(여름에 시원하게 마시는 터키의 전통 음료수), 잼, 헬와(밀가루와 우유, 버터, 설탕으로 만드는 터키의 전통과자), 고기요리, 야채요리 등등 전문적인 요리사들이 각자 담당한 요리들을 만들었다. 터키 요리의 다양화에 크게 기여했는데, 이유인즉 황제에게 똑같은 밥을 먹이면 손모가지가 날아가는 형벌(...)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 때문에 요리사들은 정말로 창의력을 총동원해 온갖 요리들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한편 이곳에서는 오스만 제국의 친위부대인 예니체리(Yeniçeri)에게 3개월에 한 번씩 봉급을 지급할 때 함께 베푸는 연회나 각종 명절, 경사가 있는 날에 베풀었던 연회를 위한 음식들도 만들고, 빈민들을 위해 베푸는 음식들도 만들었다. 현재는 톱카프 궁전 박물관이 보유하고 있는 황실 도자기 컬랙션을 전시하고 있는데, 그 수가 거의 2만여점에 달하는지라 중요 유물 외에는 1년에 몇차례 전시물을 바꿔가며 전시한다. 원, 명, 청시절의 중국 도자기가 대부분이며 일본 도자기 일부와 터키에서 자체생산한 이즈닉 도자기가 포함되어 있으며 오스만 제국 황실이 중국 징더전에다가 직접 주문생산한 쿠란 구절이 쓰여진 청화백자같은 것들도 볼 수 있다. 실제로 역대 황제들과 궁중 내 사람들이 사용하던 물건들로 망가지면 금은으로 때워서 수리한 것들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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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 제국 시절에는 성당으로 사용되다가 오스만 제국 시절에는 무기고, 박물관 등으로 쓰인 아야 이리니 성당의 모습. 성상 파괴 운동 시절에 지어진 건물이라 안에는 십자가만 덜렁 그려져 있다. 때문에 성 소피아 성당과는 달리 회칠도 칠해지지 않았고 그냥 그 상태 그대로 이어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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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의 관료들이 디완 회의를 했던 건물 내부의 모습. 사진 우측 중앙을 보면 황금 창살로 막혀 있는 창문이 보이는데 이곳을 통해 황제가 직접 회의를 관찰하거나 대리인을 보내 관찰하게 했다. 한편 황제는 회의 자체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디완 회의 이후 대재상(Vezir-i âzam)을 불러 접견을 통해 자신의 의중을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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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탑, 디완 회의장 건물에 바로 붙어 있으며 궁궐 내에서 집행된 모든 처형, 처벌들은 이 사진이 찍힌 제2중정 마당에서 이루어졌다. 황제는 저 탑 위에 올라가서 시행유무를 전달하고 집행을 지켜보았는데, 터키 드라마 무흐테솀 유즈이을을 보면 꽤 자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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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문의 모습. 과거 이곳에서는 황제의 대관식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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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중정에 위치한 정복자의 정자(Fatih Köşkü)의 모습. 이 건물은 톱카프 궁전에서도 가장 오래된 것으로 1460-1462년 사이에 세워졌다. 현재는 보물관 1,2,3,4로 쓰이고 있는데 여름 한정으로 바다가 훤히 보이는 베란다를 개방하고 있으니 한번 보기 바란다. 전망이 정말로 탁 트여서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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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중정에 위치한 하렘 입구. 원래 물자를 수송하거나 하렘의 여인들을 태운 마차가 드나들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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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렘 내부에서 메인 로드 역할을 한 황금의 길(Altın yol)의 모습. 이 길을 중심으로 좌우로 하렘내 직급에 따라 여인들의 방이 배치되었으며, 하렘의 입구에는 환관장의 방이 있었다.
6. 이야기거리
하렘은 입장료를 따로 받는다. 본 입장권이 2016년 현재 30 터키 리라, 하렘 입장권은 15리라, 아야 이리니 입장권이 20리라이다. 참고로 이스탄불 패스는 궁전 본관과 하렘 모두 입장이 가능하지만 아야 이리니는 돈을 따로 내야 하며, 터키에서 유학 중인 학생이나 터키 국적자만 발급받을 수 있는 뮈제카르트는 본관만 뚫린다. 물론 단체할인 같은 거 없다.
터키 내 다른 박물관, 궁전과는 달리 특이하게 화요일에 쉰다. 입장시간은 09시부터 동절기에는 16시 45분까지, 하절기에는 18시 45분까지이다.
플래쉬를 터뜨리지 않는 한 건물 사진촬영은 자유이지만, 시계 박물관, 도자기관, 보물관, 무기관, 황실 의복관, 이슬람 유물전시관 등등 모든 전시실에서 사진 촬영이 금지된다.
제4중정에는 오스만 궁중요리를 만드는 레스토랑이 있고, 제2중정의 디완 회의실 옆에는 카페가 있는데, 바깥 물가에 비해 상당히 비싸다. 다만 제4중정의 레스토랑은 창가 쪽 경치가 좋아서 잠시 차 한 잔 마시면서 쉬기에는 괜찮을지도.
7.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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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게가 86캐럿인 다이아아몬드로 숟가락 장수(카시윽츠)의 다이아몬드라고도 불린다. 이걸 발견한 사람이 한 숟가락 만드는 사람한테 숟가락 한개를 받고 이걸 내줬다고 해서 붙은 별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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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카프의 단검이라고 불리는 물건이다. 원래 오스만 제국의 마흐무트 1세가 이란의 나디르 샤에게 선물한 단검인데 나디르 샤가 암살당하자 어찌어찌 도로 회수해와서(...) 톱카프 궁전에서 가장 귀중한 전시물이 되었다. 한편 나디르 샤는 보답으로 황금옥좌를 선물해줬는데, 이 옥좌는 한동안 백양왕조의 샤 이스마일의 옥좌로 알려져 있었는데, 20세기 초 연구결과 제작방식이 무굴 제국의 특유한 기법이 적용되었다는 것이 밝혀져 사실 이 옥좌는 무굴 제국에서 만들어졌으며, 나디르 샤가 델리를 갈아버릴 때 가져왔다가 오스만 제국에 선물한 걸로 여겨지고 있다. 즉 장물(...)이다.
[1] 이슬람력에서는 헤지라가 일어난 서기 622년을 원년으로 잡지만 1년의 길이가 그레고리력에 비해 10일 정도 짧으므로 단순히 서력-622로 계산하면 틀리게 된다. 이슬람력 883년 라마단은 그레고리력으로 1478년이다.[2] 위키백과 터키어판에는 طوپقپو سرايى 라고 쓰여있지만 현대어 Topkapı sarayı를 그대로 옮긴 틀린 표기이다. 심지어 톱카프의 철자도 '톱카푸'라고 틀리게 썼다. کاخ (kâh)는 궁전을 의미하는 페르시아어 단어이며 صرای (saray)는 튀르크어 단어인데, 오스만 제국 시절에는 둘 다 쓰였으며, 현대 페르시아어로는 전자와 같이 표기하고 '커헤 톱카피' (kâh-e Topkapi)라고 읽는다.[3] 본래 하렘부분만을 의미하는 단어였지만 역사적으로 궁전 전체를 의미하는 고유명사로 쓰이기도 했다.[4] 자금성 72만㎡이니 자금성보다 조금 작다.[5] 5세기에 건설된 궁전으로 콘스탄티노플을 턴 제4차 십자군이 옛 동로마 영토에 라틴 제국을 세우면서 정궁으로 사용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 당시에는 폐허가 되어이었고 그 유적은 1873년 기차역을 건설하면서 철거되었다.[6]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당시 제일 먼저 뚫린 문은 현재는 에디르네 카프(Edirne Kapı)라고 불리는 '아드리아노폴리스 문'이었는데, 블라헤르네 궁전은 이 문 바로 북쪽에 위치해있으며 심지어 일부가 삼중벽에 딱 붙어있다. 오스만군이 대포를 쏘아댈 때 당연히 궁전의 피해도 컸다.[7] 이 블라헤르네 궁전중 일부가 여전히 유적으로 남아있다. 비교적 멀쩡한 건물로 오스만 제국 시절에는 '이교도 왕의 궁전'이란 뜻의 테크푸르 사라이(Tekfur Sarayı)라고 불렸는데, 오스만 제국 시기에는 술탄의 별장 겸 동물원, 후기에는 매춘굴, 병원, 유리병 제조공장 등으로 쓰이다 공화국 시기 들어서 문화유적으로 지정되고 한동안 옛모습 그대로 보존하는데 치중하다가 2010년대 들어와 복원되었다.[8] 동로마 시절의 성 이리니 성당을 무기고로 사용했다. 2016년 현재 입장료를 받고 내부를 공개하고 있는데 톱카프 궁전 통합티켓이나 뮈제카르트와는 별도로 입장권을 끊어야하니 참고할것.[9] 무함마드가 입었다는 옷, 무함마드의 턱수염, 모세의 지팡이(...) 등 다양한 유물들이 소장되어있으며, 이곳에 입장할 때는 모스크에 입장할 때와 마찬가지로 복장에 신경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