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키 타메요시
'''쿠로키 타메요시(黒木 為義 : 1918년 9월 17일~?)'''
다이쇼 7년에 해당되는 1918년 9월 17일에 미야자키현에서 태어난 쿠로키 타메요시는 18살이 되던 1936년 2월에 육군 소년비행병 제3기생으로 쿠마가야 육군비행학교(熊谷陸軍飛行学校)에 입학했다. 이듬해인 1937년 11월에 기초 조종 교육을 수료한 그는 아케노 육군비행학교(明野陸軍飛行学校)로 옮겨가 본격적으로 전투기 조종 훈련을 받았다.
모든 훈련을 마친 쿠로키는 1938년 3월에 만주의 목단강시(牡丹江市)에서 새롭게 편성된 비행 제16연대(飛行第16連隊 / 隼魁第九一四二部隊)에 배속되었으나, 같은 해 9월에 16연대를 모체로 삼아 재편성된 비행 제33전대(飛行第33戦隊)로 소속이 바뀌었다. 1939년 5월에 일본이 할힌골 전투를 고의로 일으켜 전쟁을 도발했을 때, 33전대는 중국 다롄 부근의 행수(杏樹)에 전개해 있었다. 그렇지만 쿠로키는 95식 전투기를 수령하기 위해 소환된 탓에 첫 실전에 참가할 기회를 놓쳤다. 기재를 보충하느라 이들에게는 전투 명령이 떨어지지 않아서 33전대가 출동 명령을 받은 것은 항공전이 말기로 접어든 8월 26일로, 그 다음날 전대원들은 몽골 국경으로 전진했다. 약관 20세의 쿠로키 군조는 이시가와 카즈마사(石川正) 대위가 이끄는 제1중대원으로 출격했다. 그는 9월 5일에 하르하강 상공에서 중폭격기 편대를 엄호하던 소련제 전투기와 조우해 난생 처음 공중전을 치르게 된다. 수적 열세에 빠진 중대는 상공에서 포위되었다. 쿠로키는 비록 신참이었지만 이 교전에서 3대나 격추시키는 기염을 토했으나, 자신도 총탄을 맞고 부상을 당했다.
따라서 할힌골 전투에서 쿠로키 군조는 이 교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고, 9월 15일에 휴전을 맞자 9월 말에는 본토로 돌아와 소우마가하라 기지에 머무르게 된다. 1942년 9월에 비행 제33전대는 남방 전선으로 파견되었으나 이때는 비행 병조가 되어 있던 쿠로키 타메요시는 또다시 본국으로 돌아와 장교 코스를 밟기 위해 일본육군항공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이듬해인 1943년 8월에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한 그는 후베이성(湖北省)의 수도 무창(武昌)에 주둔하고 있던 원대로 복귀했다.
9월에 일본 육군항공대는 하계 공세를 개시했고, 3단계 작전에서 광둥을 거쳐 하노이 지역으로 이동해 방공 전투에 임하며 접전을 벌였다. 그 후 제33전대는 중국 전선을 떠나고 수마트라의 팔렘방 상공에서 방공 임무를 맡으며 11월까지 버마를 전전했었다. 12월 5일에는 육군과 해군 합동으로 인도 동부의 캘커타에 첫 공세를 펼쳤는데 이 전투에 출격한 쿠로키 소위는 돌아오는 길에 마주친 영국 공군 전투기 1대를 격추했다. 그런데, 곧바로 역습을 당한 그가 타고 있던 1식 전투기의 연료 탱크가 벌집이 되었고, 랜딩기어가 떨어져 나가는 큰 피해를 입게 된다. 피보다 귀중한 연료가 새기 시작한 것을 본 쿠로키 소위는 자폭하기로 마음을 먹고 적당한 목표를 찾았지만 눈에 뜨이는 것이 없었다. 결국 연료가 다 떨어진 하야부사 전투기는 불시착했지만, 쿠로키 타메요시는 가벼운 부상만 입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1944년 2월에 전대는 뉴기니 전선으로 향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쿠로키는 자야푸라(당시는 Hollandia로 불렸다) 지역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항공전에 참가해 차례차례 적기를 격추시키며 전과를 더해 나갔다. 그러나, 3월 30일에 홀란디아 비행장에 미군의 B-25 폭격기가 몰려와 맹폭격을 퍼부었고, 이 공습으로 인해 일본군 비행기는 대부분 파괴되어 필리핀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4월 17일에는 끝까지 살아남은 조종사 7명이 남은 기체에 나누어 탔다. 이때 쿠로키는 여기저기 부서진 자신의 탑승기에다 야마노보(山登) 군조를 구겨 태우고 적 상륙부대가 도착하기 직전에 자야푸라를 탈출해 서쪽으로 날아갔다. 비악 섬(Biak Island)과 셀레베스 섬을 지나며 연료를 다시 채운 그들은 진로를 북쪽으로 틀어 필리핀의 마닐라 비행장에 간신히 착륙할 수 있었다. 6월 들어 33전대는 팔렘방에 남겨진 부대원과 편대장 7명을 중심으로 재건되었고, 수마트라 남부에 있는 겔룸방(Gelumbang)에 활주로를 닦고 기지를 세우는 작업을 진행했다. 10월 26일에 제33전대는 첩1호 작전(捷一号作戦 : 육해군 합동 필리핀 방어작전)에 참가하라는 지령을 받고 다시 필리핀으로 향했으나 쿠로키는 풍토병에 걸려 입원하느라 남게 되었다.
1945년 봄에 쿠로키 소위는 중위로 승진했지만 나쁜 소식도 따라왔다. 바로 육군의 가미카제 특공대인 칠생상현대(七生翔顕隊)에 배속된 것이다. 그로서는 참으로 다행히, 적함에 돌입하기 위해 출격을 기다리고 있을 때 일본에 두 발의 원폭이 떨어졌고 패전을 맞이하게 된다. 쿠로키 중위의 전투조종사 경력은 6년에 단독 격추수는 16대로 비행 제33전대를 대표하는 에이스였다.
1. 육군 입대
다이쇼 7년에 해당되는 1918년 9월 17일에 미야자키현에서 태어난 쿠로키 타메요시는 18살이 되던 1936년 2월에 육군 소년비행병 제3기생으로 쿠마가야 육군비행학교(熊谷陸軍飛行学校)에 입학했다. 이듬해인 1937년 11월에 기초 조종 교육을 수료한 그는 아케노 육군비행학교(明野陸軍飛行学校)로 옮겨가 본격적으로 전투기 조종 훈련을 받았다.
2. 할힌골 전투에서
모든 훈련을 마친 쿠로키는 1938년 3월에 만주의 목단강시(牡丹江市)에서 새롭게 편성된 비행 제16연대(飛行第16連隊 / 隼魁第九一四二部隊)에 배속되었으나, 같은 해 9월에 16연대를 모체로 삼아 재편성된 비행 제33전대(飛行第33戦隊)로 소속이 바뀌었다. 1939년 5월에 일본이 할힌골 전투를 고의로 일으켜 전쟁을 도발했을 때, 33전대는 중국 다롄 부근의 행수(杏樹)에 전개해 있었다. 그렇지만 쿠로키는 95식 전투기를 수령하기 위해 소환된 탓에 첫 실전에 참가할 기회를 놓쳤다. 기재를 보충하느라 이들에게는 전투 명령이 떨어지지 않아서 33전대가 출동 명령을 받은 것은 항공전이 말기로 접어든 8월 26일로, 그 다음날 전대원들은 몽골 국경으로 전진했다. 약관 20세의 쿠로키 군조는 이시가와 카즈마사(石川正) 대위가 이끄는 제1중대원으로 출격했다. 그는 9월 5일에 하르하강 상공에서 중폭격기 편대를 엄호하던 소련제 전투기와 조우해 난생 처음 공중전을 치르게 된다. 수적 열세에 빠진 중대는 상공에서 포위되었다. 쿠로키는 비록 신참이었지만 이 교전에서 3대나 격추시키는 기염을 토했으나, 자신도 총탄을 맞고 부상을 당했다.
3. 장교 진급
따라서 할힌골 전투에서 쿠로키 군조는 이 교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고, 9월 15일에 휴전을 맞자 9월 말에는 본토로 돌아와 소우마가하라 기지에 머무르게 된다. 1942년 9월에 비행 제33전대는 남방 전선으로 파견되었으나 이때는 비행 병조가 되어 있던 쿠로키 타메요시는 또다시 본국으로 돌아와 장교 코스를 밟기 위해 일본육군항공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이듬해인 1943년 8월에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한 그는 후베이성(湖北省)의 수도 무창(武昌)에 주둔하고 있던 원대로 복귀했다.
9월에 일본 육군항공대는 하계 공세를 개시했고, 3단계 작전에서 광둥을 거쳐 하노이 지역으로 이동해 방공 전투에 임하며 접전을 벌였다. 그 후 제33전대는 중국 전선을 떠나고 수마트라의 팔렘방 상공에서 방공 임무를 맡으며 11월까지 버마를 전전했었다. 12월 5일에는 육군과 해군 합동으로 인도 동부의 캘커타에 첫 공세를 펼쳤는데 이 전투에 출격한 쿠로키 소위는 돌아오는 길에 마주친 영국 공군 전투기 1대를 격추했다. 그런데, 곧바로 역습을 당한 그가 타고 있던 1식 전투기의 연료 탱크가 벌집이 되었고, 랜딩기어가 떨어져 나가는 큰 피해를 입게 된다. 피보다 귀중한 연료가 새기 시작한 것을 본 쿠로키 소위는 자폭하기로 마음을 먹고 적당한 목표를 찾았지만 눈에 뜨이는 것이 없었다. 결국 연료가 다 떨어진 하야부사 전투기는 불시착했지만, 쿠로키 타메요시는 가벼운 부상만 입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4. 뉴기니 전선
1944년 2월에 전대는 뉴기니 전선으로 향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쿠로키는 자야푸라(당시는 Hollandia로 불렸다) 지역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항공전에 참가해 차례차례 적기를 격추시키며 전과를 더해 나갔다. 그러나, 3월 30일에 홀란디아 비행장에 미군의 B-25 폭격기가 몰려와 맹폭격을 퍼부었고, 이 공습으로 인해 일본군 비행기는 대부분 파괴되어 필리핀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4월 17일에는 끝까지 살아남은 조종사 7명이 남은 기체에 나누어 탔다. 이때 쿠로키는 여기저기 부서진 자신의 탑승기에다 야마노보(山登) 군조를 구겨 태우고 적 상륙부대가 도착하기 직전에 자야푸라를 탈출해 서쪽으로 날아갔다. 비악 섬(Biak Island)과 셀레베스 섬을 지나며 연료를 다시 채운 그들은 진로를 북쪽으로 틀어 필리핀의 마닐라 비행장에 간신히 착륙할 수 있었다. 6월 들어 33전대는 팔렘방에 남겨진 부대원과 편대장 7명을 중심으로 재건되었고, 수마트라 남부에 있는 겔룸방(Gelumbang)에 활주로를 닦고 기지를 세우는 작업을 진행했다. 10월 26일에 제33전대는 첩1호 작전(捷一号作戦 : 육해군 합동 필리핀 방어작전)에 참가하라는 지령을 받고 다시 필리핀으로 향했으나 쿠로키는 풍토병에 걸려 입원하느라 남게 되었다.
5. 패전
1945년 봄에 쿠로키 소위는 중위로 승진했지만 나쁜 소식도 따라왔다. 바로 육군의 가미카제 특공대인 칠생상현대(七生翔顕隊)에 배속된 것이다. 그로서는 참으로 다행히, 적함에 돌입하기 위해 출격을 기다리고 있을 때 일본에 두 발의 원폭이 떨어졌고 패전을 맞이하게 된다. 쿠로키 중위의 전투조종사 경력은 6년에 단독 격추수는 16대로 비행 제33전대를 대표하는 에이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