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켓 가든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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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유럽전선에서 있었던 연합군의 네덜란드 수복 작전이다. 전쟁을 크리스마스 이전에 끝내겠다던 연합군의 '''오만이 낳은 참극'''이다. 이전에 디에프 상륙작전과 크레타 섬 전투의 교훈을 까먹은 대가를 크게 치렀다.[1]
공수부대가 투입된 마켓 작전과, 지상 부대의 진격 작전인 가든 작전이 동시에 진행됐기 때문에 두 작전 명칭을 합쳐 '''마켓 가든 작전(Operation Market Garden)'''이라 부른다. 독일군은 1944년 크리스마스 전에는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이라 낙관하고 있던 연합군 수뇌부의 예측을 무산시키며 휘르트겐 숲 전투와 함께 '''서부전선의 기적(Miracle In The West)'''이라 전사에 기록된 독일군 방어전의 서막이 되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연합군은 파리를 비롯한 프랑스 각지를 나치의 손아귀에서 해방시켜나가고 있었다. 독일군이 프랑스에서 물러나게 되자 나치 독일 사령부는 명령을 내려 프랑스 북부의 주요 항구들을 끈질기게 사수[2] 하거나 개박살내버렸고, 그 결과 마켓 가든 작전이 시행되기 직전 시점에서 연합군이 대규모 물자를 하역할 수 있는 지역은 노르망디만이 유일했다.
물론 프랑스 전역에선 독일군의 그 짓거리가 연합군에게 크게 문제가 되진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벨기에를 넘어 네덜란드 영토를 향해 진격하면서부터 생기기 시작했다. '''보급선이 너무 길어지고 있었던 것'''이다.[3] 특히 1944년 늦여름에 접어들자 노르망디에서 하역한 석유를 전선으로 수송하는 동안 보급부대가 훨씬 더 많은 석유를 소모해버리는 기막힌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노르망디에는 분명히 미국 본토에서 실어 온 석유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지만 전방에서는 석유가 부족해 진격이 정체되어 버렸다. 이는 탱크뿐만이 아니라 보급차량도 일단은 석유로 굴러가니 당연히 생길 수밖에 없었던 문제이긴 하다. 그래서 탄약이나 식료품은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으나 보급차량이 소모하는 연료는 연합군 수뇌부에게도 큰 골치거리였다. 결국 보급 능력이 한계에 부딪히자 연합군의 진격은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에 영국의 버나드 로 몽고메리 원수는 휴식과 재정비를 마친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네덜란드 지역의 주요 교량들을 점거하고, 이에 호응하여 대기 중인 지상군이 진격을 시작하여 독일군의 라인강 방어선을 돌파하는 작전을 제안했다. 당시 프랑스에서 개박살난 독일군이 상당히 약체화되었다고 판단하고 있었기에 연합군은 이 작전안을 수용하고, 1944년 9월 17일 일요일을 작전 개시일로 설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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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하하는 연합군 공수부대
9월 17일이 되자 이른바 "마켓 작전"에 따라 연합군은 대규모 공수부대를 투입하기 시작했다. 미합중국 육군의 제101공수사단 "울부짖는 독수리(Screaming Eagles)"가 먼저 에인트호번에 투입되었고, 이어서 미 육군의 제82공수사단 "올 아메리칸"이 네이메헌, 영국 육군의 제1공수사단 "레드 데블스"가 아른험에 투입되었다.
문제는 이 지역에 있던 독일군이 혼란을 수습한 후 점점 강화되면서 연합군의 생각만큼 약체는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전차를 비롯한 중장비를 보유하여 아무리 정예병력이더라도 고작 소총, 바주카, 수류탄 정도로 무장한 공수부대 따위는 상대하고도 남을 화력을 갖추고 있었으며, 팔레즈 포위망에서 겨우 빠져나온 빌헬름 비트리히 SS대장의 '''제2SS 기갑군단'''과 독일 공군 공수부대 지휘관 쿠르트 슈투덴트 상급대장이 B집단군 사령관 발터 모델 원수의 명령으로 아른험 방면에 주둔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모델 본인이 '총통의 소방수', '방어의 사자'로 불리며 동부전선에서 이름을 날린 '''최고의 방어전 지휘관'''으로 네덜란드 방면에서의 연합군 공세를 예측하고 B집단군 사령부를 아른험 근교로 이전해 있는 상황이었으나 연합군은 사전에 전혀 알지 못했다. 그리하여 작전 당일, B집단군 사령부 2km 내에 영국군 공수부대가 강하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코넬리우스 라이언의 논픽션에서는 당시의 모델 원수가 허둥지둥하며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것으로 묘사되었지만, 실제 영국군 공수부대 출신의 저자가 당시 참전 용사들을 인터뷰한 <It Never Snows in September>에 의하면 영국군이 B집단군 사령부를 점거하였을 때 군사용 지도 한 장 남아 있지 않을 만큼 철두철미하게 비상 상황에 대처하여 사령부를 이전시켰다고 한다.
에인트호번에 강하한 101공수사단은 가장 근접한 교량은 성공적으로 확보하였지만, 에인트호번 북쪽의 손(son) 교량은 독일군이 먼저 점령하고 폭파시키는 바람에 초장부터 삐걱거리고 있었다. 네이메헌 남쪽에 강하한 82공수사단은 아른헴에서 신속하게 파견된 독일군 부대가 선수치는 바람에 네이메헌 남쪽의 그레이브 교량[4] 을 제외한 그 어느 것 하나도 탈취하지 못하고 대치상태에 돌입했다.
게다가 아른험에 강하한 영국의 제1공수사단은 선발대인 존 프로스트 중령의 제2대대가 일단 아른험 대교의 북쪽 입구를 장악하면서 아른험 남쪽에서 올라오는 독일군의 추가병력 투입은 저지하는 데 성공했지만 교량을 완전히 점거하지는 못했으며 무엇보다 주변에는 제2 SS기갑군단 소속 SS 9기갑사단 호엔슈타우펜이 아른험 남쪽, SS 10기갑사단 프룬츠베르크가 아른험 북동쪽에 배치되어 있었다.
사실 당시 배치된 독일군 중에 SS 9기갑사단은 SS 10기갑사단에다가 장비를 넘기고 재편성하러 후방으로 가던 중이라서 긁어모아도 연대 규모밖에 되지 않았고 SS 10기갑사단도 장비를 받았어도 팔레즈 포위망에서 워낙 박살이 나서 일반 보병사단 수준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경무장 보병인 공수부대로서는 전차를 가진 독일군을 이길 수 없는 상황이었고 무엇보다 그들은 동부전선에서 온갖 전투를 치른 노련한 군인들이었던 만큼 당황하지 않고 전투 태세를 갖출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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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른험 대교이다. 마켓 가든 작전 이후 폭격으로 다리는 파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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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아른험 대교
한편 이에 호응하여 진격 중이던 영국 30군단의 "가든 작전"도 초창부터 삐끗거리고 있었는데, 예정대로라면 첫날 101공수부대가 있는 에인트호번까지 몇 시간 안에 도착하기로 되어 있었다. 연합군 상층부의 말대로 독일군이 정말 소년병에 자전거 뿐이라면, 거기서 나오는 빈약한 화력 따위 후속부대에게 전투를 맡기고 무시하면서 진격할 수 있었겠지만, 문제는 우회로도 없는 도로 하나였는데다 매복한 독일군들은 대전차포를 가지고 있었다. 만약 진격로가 여러 갈래였다면 다른 길로 진격하는 부대가 있기에 걱정할 것 없지만, 문제는 30군단의 진격로가 69번 국도 단 하나였다는 점이다.[5] 예정보다 늦은 9월 18일이 되어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그나마도 독일군이 앞서 교량 하나(son 교량)을 날려버린 까닭에 임시교량을 준비하느라 발목이 잡혔다. 결국 약 36시간 정도가 지체되어 9월 18일에 도착할 예정이었던 네이메헌에는 9월 19일이 되어서야 도착할 수 있었고 여기는 독일군이 네이메헌 대교를 점령하고 버티고 있었던 까닭에 또 발목이 잡혔다. 결국 82공수사단이 30군단의 지원을 등에 업고 보트로 반대쪽에 상륙하여 독일군을 몰아붙인 끝에 교량을 탈취하였지만 독일군 역시 맹렬하게 반격한 까닭에 엄청난 피해를 입은 후였다.
설상가상으로 독일군 잔당이 30군단 보병부대를 네이메헌 시가지에서 묶어버리는 바람에 보병부대가 전투를 끝내고 합류한 다음에 진격하라는 작전 사령부의 명령으로 선봉 기갑부대는 다리를 건넜는데도 진격하지 못하고 아른험에서 아군 공수부대가 쓸려나가는 걸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기갑부대 단독으로 아른험까지 갈 수도 있었지만 이 부분은 사령부의 판단이 옳았던 것이, 네이메헌에서 아른험까지의 약 18km정도의 구간은, 지금까지 진격해온 구간과는 다른 완전한 제방 둑길로 도로 주변에 나무 한 그루 없는 탁 트인 습지에다가 도로부분이 주변보다 높아 일명 '아일랜드'라고 불리는 구간으로 이런 곳을 보병의 엄호 없이 진격하다간 적의 매복에 걸려, 아른험에 도착하기는커녕 선봉 기갑부대가 전멸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기갑부대는 울며 겨자먹기로 보병이 빨리 전투를 끝내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영국군 장교 중 한 명은 이상황을 보고 "독일군 놈들이 좋아서 손을 싹싹 비비면서 우리를 죽일 거다"라고 투덜 댔다. 특히, 9월 20일까지 가든 작전을 마치기로 했는데 이 시점에서 작전은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나버렸다.
한편, 영국 제1공수사단은 아른험에서 12km나 떨어진 곳에 강하하는 바람에[6] 남쪽의 다른 두 공수부대에 비해 다리에 도착하는 시간이 지체되었는데, 이를 타개하기 위해 휘하의 지프 대대를 글라이더로 수송, 다리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을 단축하려 하였으나, 지프 대대를 실은 글라이더가 착륙한 지점을 독일군이 급습, 전멸당하고 만다. 기동력을 잃은 영국 제1공수사단 본대는 할 수 없이 다리까지 걸어가야 했는데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제2 SS기갑군단 휘하 독일군 부대들이 아른험으로 가는 길을 점령, 선발대와의 연결을 차단해버려 본대는 아른험에 도착한 9월 17일에서 4일이나 지났는데도 아른험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아른험 외곽 '오스테르베크'에서 독일군과 분투하며, 계속해서 밀고 들어오는 모델 원수의 증원부대에 오히려 점점 포위되고 있었다. 그나마 초기에 강하한 선발대 중, 존 프로스트 중령의 1개 대대 병력 750여 명 만이 다리 북쪽에 도착해 목숨을 걸고 다리 남쪽에서 오는 제9 SS 기갑사단과 아른험 북쪽에서 오는 제10 SS기갑사단의 장갑차량&모델 원수의 증원부대들을 무력화시키면서 아른험 대교 입구를 사수하고 있었으나 작전 계획이 제대로 틀어진 데다가 지속적인 독일군의 포격에 대부분의 전투부대가 박살이 나버려서 매우 비관적인 상황이었다.[7] 연합군은 교두보를 강화하기 위하여 9월 21일 자유 폴란드군 제1독립공수여단을 투입하였지만 투입시기도 늦고, 착륙지점도 전투를 벌이며 격전지로 가기에는 거리가 있었고 전황을 뒤엎을 수 있는 전력은 아니었기 때문에 영국군과 똑같이 따로 포위당해 비관적인 상황에 빠졌다. 심지어 강하지점마저 독일군에게 점령된 상태였다. 결국 9월 25일 더이상 버텨봤자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연합군은 작전을 중지, 네이메헌을 넘어 아른험을 수 km 앞두고 진격하던 30군단은 그 자리에 멈추고, 영국 공수부대와 폴란드 공수부대의 얼마 남지 않은 잔존병력은 라인강 너머로 간신히 철수하였다.
영국군 공수사단의 피해가 커서 1만 명이 넘는 강하병력 중 약 2,000명의 탈출 부대원만 남고 전멸했다. 전사자는 2000명 조금 못 미치고 포로는 무려 7000여 명에 달했는데, 9월 27일에 이러한 피해 상황 집계를 독일군 최고 사령부가 발표하자, 영미연합군의 우월한 전력을 익히 알고 있던 영국 국민들은 믿겨지지 않는 참패에 패닉에 빠졌고, 급기야 수상인 처칠은 라디오 연설을 통해 '적이 숫자를 부풀려 발표했다'고 호소할 정도였다. 결국 독일군 최고사령부는 '피해 상황을 재집계할 것'을 명령했는데, 현장에서 집계한 결과 '''기존에 발표한 수치보다 더 많은 영국군 피해가 집계됐다고 한다.'''(Obersturmbannführer Walter Harzer Interview)
이로써 영국 제1공수사단은 실질적으로 전멸을 면치 못하게 됐다.
이 작전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독일군을 몰아붙이고 있던 연합군에게는 뼈아픈 작전 실패였으며 그 결과 연합군의 라인강 돌파는 훨씬 더 뒤인 1945년 봄으로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전쟁이 예상보다 길어질 것 같아 전선에서 활약한 병사들을 잠시 후방으로 돌려 휴식을 취하도록 했다. 하지만 연내 종전은 물건너 갔어도 독일군은 이미 졌고 전의나 사기도 떨어진 상황이라 도발을 하더라도 큰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 오판한 결과 아르덴 지역에 휴양하던 부대까지 합쳐서 4개 사단, 실제 가용병력으로 따지자면 겨우 1개 사단에게 수비를 맡기는 바람에 아르덴 대공세가 시작되자 초반에 줄줄이 털리는 불상사가 빚어지기도 했다.
9월에 서부전선의 독일군 G집단군 참모장으로 임명된 프리드리히 폰 멜렌틴 소장은 회고록에서 '아른험 전투에서의 승리로 많은 혼란이 종식될 수 있었다.'라며 독일군의 승리가 준 거대한 전략적 효과를 언급했다. 이는 스티븐 앰브로스의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도 '가을부터 독일군은 매우 짜임새 있는 반격을 주도하며 각급부대를 후방으로 집결시켜 재무장, 재조정한 후 밀착방어선을 형성하였다'며 간접적으로 나타나 있고, 아이젠하워가 가족에게 쓴 편지에도 이러한 독일군의 조직적으로 정비된 저항에 대하여 불만을 토로하는 내용이 있다.
다만 국내에서는 전술적 부분에서 이 작전의 실패를 다소 확대 해석하는 경향이 있어 연합군이 심각한 피해를 입고 독일군에게 패배하여 퇴각한 전투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은데 정확히는 "'''큰 희생을 치러가며 거의 목표지점까지 진격하긴 했으나[8] 가장 중요한 작전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서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된 전투'''"이고, 연합군은 일부 돌출지역을 제외하고는 퇴각하지는 않았다. 이 작전 직후 얻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80km의 도로와 북해 사이의 스헬데 강 삼각주 지역을 확보하여 안트베르펀 항구를 주요 보급로로 사용하기 위한[9] 스헬데 강 하구 전투가 있었다. 다만 이 전투는 네덜란드 빼고는 2차 세계대전 전사에서 잘 알려지지 않다.
몽고메리가 자기 변호를 위해 90% 성공한 작전이라고 발언하자 이에 네덜란드 율리아나 여왕의 남편 베른하르트 공이 '''"우리나라는 당신네들이 한 번 더 성공해도 될 만큼 부유한 나라가 아니다."'''라고 비꼰 일화가 유명하다. 후에 몽고메리는 어느 정도 책임을 인정하는 발언을 하는 듯 했지만, 그러면서도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를 비판하는 배은망덕한 짓을 저질렀다. 사실, 아이젠하워도 최종 결정자로서 작전을 승인하고 자신의 입으로 마켓 가든 작전이 현재 가장 뛰어난 작전이라고 평가하며 종전 후에도 "당시엔 마켓 가든 작전이 필요했으며 최선의 선택이었다."라고 변호하는 등 비판을 받을 여지는 있다. 하지만 적어도 아이젠하워는 패전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인정했지만 몽고메리는 그렇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몽고메리의 지휘관으로서의 자질과 인성에 대한 평가가 동시에 하락하게 된다. 밑에 서술된 것처럼 책임을 엉뚱한 이에게 떠넘긴 시점에서 이미 인성면에서의 비판은 받아 마땅하다.
이후, 아른험은 1945년 4월 캐나다 육군 제1군단에 의해 해방되었다.
자유 폴란드군 제1독립공수여단장 스타니스와프 소사보프스키(Stanisław Sosabowski) 소장만은 처음부터 그 작전을 무모한 자살행위라 생각하며 반대했다. 그는 자신의 참모들에게 “영국놈들은 독일군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거야.”라고 공공연하게 말했다. 하지만 결국 폴란드 공수부대는 독일군의 살인적인 포화를 뚫고 라인강 건너편 드릴에 낙하하였고 퇴각 명령이 내려진 이후 치열한 전투를 거듭하여, 포위당한 영국군의 탈출로를 열어주는 데 성공하였다. 격전을 치르면서 아른험에서 폴란드 제1독립공수여단은 작전 실패 이후 1,000여 명에 이르는 투입병력의 60%(590명)가 증발해야만 했다.[10] '''이러한 공적을 세웠음에도 마켓 가든 작전의 패배에 대한 책임은 정작 브라우닝과 몽고메리를 대신하여 소사보프스키가 뒤집어썼다.'''
1944년 10월 17일, 몽고메리는 영국군 참모본부에 보낸 서한에서 폴란드 공수부대를 비판하며 소사보프스키를 전출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이어서 브라우닝 또한 참모차장인 로널드 윅스 중장에게 폴란드 공수부대의 역량에 의구심을 표현하며 '이 장교(소사보프스키)는 위기 상황에서 무력한 대처능력을 보여주었고 논란을 일으키며 맡은 바 임무들을 능동적으로 수행하지 않았다'라고 주장하였는데 현재 35년째 영국군 공수부대에서 근무 중인 마이크 러셀 대령은 2012년, <Polski Bohater(Polish Hero)>에서 이러한 몽고메리와 브라우닝의 행적에 대하여 패전의 비난을 소사보프스키에게 뒤집어 씌운 것이라 평가하였다.
결국 1944년 12월 26일, 소사보프스키 장군은 폴란드 공수여단장에서 물러났으나 모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이후 소장 계급에 어울리지 않는 한직에만 머무르다 33년의 군 경력을 마감했으며, 1948년 퇴역할 당시에는 300파운드의 퇴직금뿐 연금조차 받지 못하였다. 소사보프스키 장군은 75살까지 영국의 한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였고 76세의 일기로 삶을 마감하였다. 그리고 그가 죽자 그의 유해는 폴란드 공산 정권(폴란드 인민 공화국)의 요구로 즉각 폴란드에 송환되어 공동묘지에 묻혀버렸다.[11] 이후에도 폴란드 정권에서는 그를 껄끄럽게 생각하여 아무런 기념물도 세우지 않다가 2017년에서야 겨우, 그것도 네덜란드의 지원으로 동상을 세웠다.
폴란드 공수부대의 구출을 받아 생환한 영국군 공수부대원들과 네덜란드인들은 소사보프스키의 희생을 결코 잊지 않았다.2006년 5월 31일 베아트릭스 여왕이 소사보프스키에게 청동사자장(Bronze Lion)을 추서하였고, 같은 해에 폴란드 공수부대가 착륙한 지점에 기념비를 제막하여 그들의 공적을 기렸다. 2012년, Polish Heritage Society UK[12] 의 지원을 받아 영화 <Arnhem - A Debt of Dishonour>가 제작되었고 영국군 공수부대 장교들 또한 이에 협조하였다.
2006년 5월에는 폴란드 공수 1여단이 아른헴에서의 분투를 인정받아 네덜란드 왕실로부터 빌럼 군사 훈장(Military William Order)을 수여받았다.[13] 이 훈장은 네덜란드 군사 훈장 중에서 가장 등급이 높은 훈장으로 현재까지 11개 부대만 수여받았다. 폴란드 공수부대는 미 육군 제82공수사단과 함께 이 훈장을 수여받은 유이한 외국인 부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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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크프리트 선을 넘어 진격하는 연합군이다.
사실 아른험까지의 100km는 우회로도 없고 주변에 엄폐물도 없는 '''단 하나의 도로, 그것도 운하를 따라 형성된 국도'''로만 가야 했으므로 독일군의 필사적인 저항에 느린 속도는 필연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연합군 수뇌부가 독일군이 이미 졌고 싸울 마음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다. 실제 방공포병들이 연합군 폭격기가 나타나자 싸우지도 않고 도망친 경우도 있으므로 연합군의 분석이 틀렸다고 평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아른험에서 쉬고 있었던 부대는 정예 무장친위대(Waffen-SS) 소속 기갑부대였다. 지휘관인 빌헬름 비트리히 장군은 동부전선에서 그 실력이 입증된 유능한 기갑 지휘관일 뿐 아니라, 독일군 전투 지역 경계에 영국군 야전병원 설치를 용인하여 연합군과 독일군의 피해를 모두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인성도 갖춘 인물이었다. 후일 비트리히는 마켓 가든 작전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이유로 히틀러의 노여움을 사서 게슈타포에 연행될 위기에 처하나, 발터 모델 육군 원수가 자신의 모든 권한을 동원하여 막아낸다.
독일 공군은 연합군의 패인으로 공수강하를 3일에 걸쳐서 계획한 점응 꼽았다. 실제로 작전 2일째부터는 안개가 끼는 바람에 타임라인에 엄청난 차질이 빚어졌다. 2일째 도착하기로 했던 폴란드 1공수여단이 수일이 지나서야 도착했던 것이다. 상황은 다른 공수부대들도 마찬가지였으나 예비 전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영국 1공수사단이 더욱 급박해질 수밖에 없었다.
제1연합공수군의 부사령관이자 마켓 가든 작전에서 공수부대를 야전에서 지휘한 프레데릭 브라우닝 중장은 패인을 통신체계의 미흡함과 날씨로 꼽았다. 실제로 영국 1공수사단은 통신이 먹통이었는데 브라우닝 중장은 강건너 82공수사단과 있었기 때문에 큰 문제를 야기했다. 이 문제는 무전기의 전파발진 수정판을 잘못된 것으로 챙겨오는 바람에 빚어진 사태였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영국 본토와의 연결은 성공시켜서 결국 영국 본토를 경유하여 상급제대와 연락을 할 수 있었다고.''' 이 문제로 1공수사단 내에서는 물론이고 작전 첫 24시간 동안 브라우닝 중장은 1공수사단이 안전하게 도착했는지도 확인할 수 없었다. 이러한 연락 체계는 브라우닝 중장 자신의 잘못이 큰데, 작전 전에 1연합공수군이 창설되고 휘하에 자신의 1영국공수군단이 창설되자 원래의 자신의 영국 공수군 사령부를 1영국공수군단 사령부로 바꾸면서 다른 부대와 연락체계를 제대로 설치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수뇌부도 마찬가지여서 아이젠하워의 SHAEF 총사령부는 아직도 노르망디의 그랑빌에 있어서 몽고메리나 브래들리와의 교신엔 3일이 걸리는 처지였다. 이 연락 병크는 거의 다 죽었던 독일 공군이 마켓 가든 전역에서는 우위를 차지하게 만든다. 이유는 공군과의 연락 부족으로 공군은 스케줄대로 출격한 뒤 그대로 독일 폭격으로 돌려버렸기 때문이다. 이 병크 때문에 공수부대에 보급품을 투하하는 수송기들은 거의 전투기들의 호위를 받지 못해서 수많은 보급물자를 다른곳에 떨어뜨리거나 격추되어 손실된다 예로 1공수사단의 보급품 회수율은 잘해봐야 10%를 넘지 못한 반면, 독일군은 상당수의 군수 물자를 노획하였다는 만족스러운 보고를 올리게 된다.
그럼에도 영국 공수부대가 고립된 상황에서도 워낙 결사적으로 항전한 탓에 독일군도 9일이 지나기까지 확실하게 밀어버리지는 못했다. 당시 독일군 지휘관 발터 모델은 이러한 영국군의 용전에 나름 감명받아 참모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개인적으로 항복 의사를 타전하나 프로스트 중령이 '''"미안하군, 귀관들을 전범으로 수용할 공간이 부족해서 받아들일 수 없다."'''라는 명대사를 전했다는 것이 유명하다. 다리 옆에 마련한 영국군 전투 지휘소가 폭격을 당해 부상병으로 넘쳐나자 양측의 위생병들이 전투를 잠시 중지하기로 합의하고, 독일군도 영국군을 도와 화염에 휩싸인 사령부 건물에서 부상병들을 구출한 뒤 전투를 재개했다는 것 또한 실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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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9월 18일, 제2 SS기갑군단 사령부에서의 발터 모델.
일반적으로 기갑 부대가 존재한다는 징후를 무시하고, 이를 지적하는 정보장교를 다른 곳으로 '''전출'''시키는 등 정보 분석을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는데, 일례를 들자면 연합군은 이미 마켓 가든 전역의 독일군을 최대 15,000명의 보병과 250대의 전차로 추산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공수부대를 투입한 것은 제일 깊숙히 있는 1공수사단이 길어야 5일만 버티면 된다고 생각했었고, 또 전차 자체도 특히 시가전에서는 무적이 아니다. 프로스트 중령의 대대가 압도적인 독일군에 의해 고립되어서도 4일간이나 죽을 힘을 다해 버텼던 것을 생각하면 완전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아른험 주둔 독일군은 3,000여 명의 보병과 몇대의 전차로 브라우닝의 추산과 일치했다.[15]
몽고메리 원수와 연합군 수뇌부는 오랜만에 펼치는 ''''회심의 진격을 막아서는 안 된다''''는 안일한 생각을 했지만, 문제는 영국군을 맞을 B집단군의 사령관이 ''''동부전선의 수호자', '총통의 소방수', '방어의 사자', 발터 모델 원수였다'''는 것이다.
14시에 영국군의 강하를 육안으로 목격한 발터 모델이 B집단군 사령부를 이동시켜 제2 SS기갑군단의 빌헬름 비트리히 사령부에 도착한 시간이 15시, 연합군의 작전 목표를 파악하여 최초의 방어 작전이 개시된 시각이 17시 30분이다. 모델은 네덜란드의 모든 부대와 준군사조직, SS보급대대, SS하사관학교, 네덜란드 SS경찰대대, 헤르만 괴링사단 보충대대, 루프트바페 고사포 부대, 해군까지 동원하여 방어 작전을 수립하였고 이러한 엷은 방어선은 효과적으로 영국군 공수부대의 아른험 다리로의 접근을 차단할 수 있었다.[16] 당시 영국군에게 포로가 된 독일군 47명은 무려 27개의 다른 부대 소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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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5일, 독일군 포로를 수용하는 임시 수용소가 된, 네덜란드 안트베르펀 동물원의 사자 우리 안에 갇힌 독일군들. 두 명의 독일 수병의 모습을 볼 수 있다.
32세의 젊은 나이로[17] 제9 SS기갑사단의 사단장 대리를 역임했던 발터 하르처 SS중령은 '''"마켓가든 작전에서의 독일군의 승리가 자랑스러운 이유는 정규군이 아닌 철도 노동자, 근로봉사자, 공군 등 제대로 된 지상전 훈련 경험조차 없는 사람들이 공수부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이라고 회고하였다. 즉 한마디로 말해 '''오합지졸들로 최정예부대를 격파한 것이었다'''. 물론 살짝 과장이 있긴 하지만 당시 동원된 독일군의 경우 무장친위대 부대를 제외한 쓸모없는 취급을 받던 공군 야전사단, 공군 보조원들, 인근의 후반기교육장에서 동원된 크릭스마리네 장병들, 심지어 전투와는 연이 없던 조리병과 군우병, 헌병과 경찰조직들도 전투에 동원되었기에 저런 말이 나온 것이다. 하르처의 기록에 따르면 자신은 1944년 4월, 동부전선에서 이미 모델의 지휘를 받아서 그의 지휘 방침을 잘 알고 있었고, 모델은 항상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 두었기 때문에 급박하게 변해가는 전황에도 빠른 대처와 작전 지휘가 가능했다고 한다. 또한 모델은 제9 SS 기갑사단 사령부를 매일 찾아와서 전황을 직접 확인했는데 이때 하르처 SS중령이 "부상자가 너무 많아서[18] 병력 수가 충분하지 못합니다."라고 보고하자,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 이후 무장친위대와 국방군의 대립이 극심했던 상황에서도 '''지속적으로 병력을 증원해 주었음은 물론 6호 전차 B형(티거 2)과 화염방사기까지 배치해 주었다.''' 이러한 공훈을 인정받아 발터 하르처 SS중령은 기사철십자훈장을 받게 된다.
무장친위대에서 가장 뛰어난 기갑 지휘관으로 손꼽히는 빌헬름 비트리히 SS대장 역시 동부전선에서부터 모델과 함께한 작전이 많았고, 특히 모델은 제1차 르제프 전투 당시 3면이 포위된 독일군 9군을 완전 포위하기 위해 후방에 투입된 소련군 공수부대를 오히려 역으로 포위하여 섬멸해버린 경험이 있었다는 것, 그에 더하여 2차대전 최고의 공수부대 지휘관으로 손꼽히는 쿠르트 슈투덴트의 존재도 독일군에게 실로 행운의 인사였다. 그야말로 '''對 공수부대 전문가들이 한 자리에 모인 셈'''이다.
더군다나 작전기간 동안 네덜란드와 벨기에 북부에 주둔하던 독일군은 기본적으로 북동프랑스 연안과 베네룩스 3국의 연안을 방어하던 제15군으로 이 야전군은 독일군이 연합군의 프랑스 상륙지로 유력시하던 칼레 등이 관할지였다. 당연히 야전군의 후퇴 및 고립 등으로 전투력이 줄긴 했어도 작전 개시 시점까지 전투력을 상당부분 온존한 편이었다.
폰 멜렌틴 소장은 '모델 원수는 노르망디 작전 이후 피투성이가 된 부대를 잘 수습하여 아른험을 방어해냈다.'고 회고록 <Panzer Battles>에 기록하였다. Osprey 시리즈 또한 발터 모델을 승리자로 정의하였다. 9월 초에 이미 네덜란드 방면 공세를 예측하고 부대를 효과적으로 주둔시킨 전략적 시야와 기습 작전 3시간 만에 반격 작전을 수립하여 '강하 작전이 주는 기습적 효과'를 무산시킨 전술적 임기응변 능력, 작전 기간 내내 최전선에 직접 임하여 전투 상황을 파악하고 공군 폭격을 위시한 적절한 증원 부대 운용을 가능하게 한 지휘 능력이 '노르망디 작전 이후 최초의 독일군 승리'를 이룩한 것이다.
또한 베어 소령은 전투 경험이 많은 미국 공수부대원들이 상대적으로 안전한 위치에 낙하했지만, 오히려 전투 경험이 일천한 영국 1공수사단이 작전 최대 목표 지역에 가깝게 투입된 것 또한 실패의 요인이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마켓 가든 작전이 사전에 누설되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며, 독일군 사령부는 그런 정보는 전혀 받지 않았다고 한다.
아른험 전투와 동시기의 아헨 전투에서 서방 연합군과 독일 B집단군이 혈투를 벌이는 동안, 프랑스에 남아 있던 요하네스 블라스코비츠 상급대장의 G군집단은 무사히 탈출하여 B집단군과의 합류에 성공한다. 이렇듯 아른험 방면에 집중된 영미연합군의 패배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제대로 된 방어선조차 형성하지 못했던 독일군으로 하여금 지크프리트 라인을 기반으로 한 서부전선을 견고하게 형성하도록 협조한 셈이다.[19]
그러나 히틀러는 SS의 민간인 학살을 고발한 블라스코비츠를 탐탁치 여기지 않아 5년 동안이나 한직에만 머물게 했던 만큼, 블라스코비츠의 전과를 인정하지 않았고 도리어 그를 해임한다. 새로이 서부전선 총사령관에 취임한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는 G군집단을 G집단군으로 확대 개편한 뒤 대공세를 실행하려 했다. 아르덴 대공세가 전후 '룬트슈테트 대공세'로 불리었던 것과 달리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룬트슈테트 대공세로 불리운다. 하지만 이 작전은 폐기되었고, 히틀러와 알프레트 요들이 7월부터 준비 중이던 아르덴 대공세가 시작된다.[20]
이렇듯 독일군은 아른험 전투의 승리로 서방 연합군과 교착 상태에 이르며 나름 주도적인 전략을 구사할 수 있었다. 상대적으로 여유로워진 서부전선에 비해 보다 직접적인 위험인 동부전선으로의 증원 계획까지 수립되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르덴 대공세는 서부전선 총사령부는 물론, B집단군 사령부조차 10월 말이 되기 전까지 알지 못했던 작전이었고 결국 독일군 수뇌부는 스스로 원치 않았음에도 아르덴 대공세에 총력을 기울이게 된다. 이후 자세한 경과는 아르덴 대공세 참조.
그리고 마켓 가든 작전을 돕기 위해서 네덜란드의 철도공들이 파업을 일으켰는데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뒤, 히틀러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네덜란드로 들어가는 식료품을 막아버렸다. 이 때문에 44년 겨울 네덜란드인들은 심각한 기근에 시달렸고, 이를 돕기 위하여 연합군은 "만나 작전"을 실시, 수송기와 폭격기를 동원해 식료품과 각종 생필품들을 네덜란드에 투하했다. 참고로 만나 작전 당시 요하네스 블리스코비츠가 이끄는 독일군은 사전에 연합군과 협정을 맺어서 생필품을 투하하는 연합군 항공기들을 일체 공격하지 않았다.
상영시간 176분 대작인 머나먼 다리 <A Bridge Too Far>는 바로 이 작전을 영화한 것이다. 코넬리우스 라이언의 논픽션 원작 <A Bridge Too Far>는 특히 독일군 관점에서 보면 픽션에 가까울 만큼 오류가 많은데 이러한 내용 또한 그대로 시나리오에 반영되면서 전사학자들이 비판하기도 했지만, 영화 자체로서는 지상 최대의 작전, 벌지 대전투 등, 전쟁 대서사시 영화 장르의 정수이자 거의 마지막 작품인 만큼 훌륭한 완성도를 자랑하며 당대 명배우들이 집결하여 연합군 중요 인물들을 연기하면서 관객들의 몰입갑을 한껏 높여주고 있는 것이 큰 특징이다.[21]
드라마 초반부에 마켓 가든 작전에 대해 브리핑을 할 때 독일군의 전력을 '소년병과 노병'뿐이라고 파악했었지만 막상 조우한 독일군은 티거 전차, 야크트 판터 전차 등을 대동한 기갑사단이다. 나중에 아인트호벤이 폭격당하는 것을 지켜보는 윈터스가 "노병뿐이라며?"라고 하자 브리핑을 했었던 닉슨이 "그러게..."라고 답한다.
브라더스 인 암즈 헬즈 하이웨이의 주 배경이기도 하다.
메달 오브 아너 에어본 4번째 미션의 이름이 마켓 가든이다.
콜 오브 듀티: 로드 투 빅토리의 미군 미션의 후반 2~3개의 미션이 마켓 가든 작전이다.
세계정복자 4의 후반 작전 이름이 마켓가든작전이다.
팀 포트리스 2에서 솔저가 사용하는 무기중 마켓가든 모종삽이 있는데 이름에 맞게 로켓점프후 공중에 체공중에 때리면 100% 확률로 치명타가 뜬다. 원문은 Market Gardener.
포스트 스크립텀은 마켓가든 작전을 다루는 멀티 대전 FPS으로, 영미연합군과 독일군이 주로 격전을 벌였던 도시를 주 무대로 다룬다.[22][23]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의 전차군단 진영의 모든 미션이 마켓 가든을 다룬 미션이다
마켓 가든 작전 당시 한 영국 제1공수사단 병사는 정찰하던 비무장 독일 장교를 생포했지만 독일 장교가 자기를 풀어주면 여동생과 중매해주겠다고 말하자 그를 '''풀어줬다'''(...). 이후 둘은 전쟁 종결 후 독일 퓌센에서 정말로 재회하여 처남과 매부 사이가 됐고(!?), 이 영국 병사와 독일 장교의 여동생은 오래오래 잘 살았다고 한다.
영국 출신의 명배우 오드리 헵번과도 관계가 있다. 헵번의 외가는 네덜란드 귀족 가문으로, 외할아버지 아르나우트 판 헤임스트라(Aarnoud van Heemstra) 남작은 1910년부터 1920년까지 아른험 시장을 역임한 바 있다. 이 때문에 헵번의 부모가 1938년에 이혼하자, 양육을 맡은 그녀의 어머니는 헵번을 데리고 친정이 있는 아른험으로 돌아온다. 독일군 점령 치하에서는 영국 친가 성으로 인해 불이익을 받을까봐 외가쪽 성(판 헤임스트라)을 쓰고 발레 수업을 받으며 은거했다. 저명한 귀족 가문이지만 친척들이 독일로 강제징용당하고 비명횡사하는 등의 사고를 겪었고, 이에 외할아버지는 헵번과 가족들을 데리고 아른험 북동쪽 외곽에 있는 소도시 펠프(Velp)로 거처를 옮겨 이곳에서 종전까지 은거하였다. 때문에 아른험 중심가 및 서쪽 오스테르베크 일대에서 격렬하게 전개된 전투에 직접적으로 휘말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마켓 가든 작전이 실패한 뒤 1944~45년 겨울에 벌어진 네덜란드 대기근 사태[24] 로 인해 부유한 외가까지 굶주림에 고통받았다. 오드리 헵번도 튤립 구근을 먹으며 근근히 버텼고, 영양실조로 빈혈과 부종에 시달려야 했다. 결정적으로 그녀의 외가는 마켓 가든 작전 과정에서 아른험 일대의 영지가 쑥대밭이 되었고, 상당수 자산이 소실되면서 재정적으로 파탄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로 인해 오드리 헵번은 전쟁 뒤에도 유명해질 때까지 상당 기간 쪼들리는 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이런 전쟁으로 인한 고통스러운 기억 때문에 헵번은 전쟁 영화에도 잘 출연하지 않았고, 전투씬은 절대 찍지 않았다고 한다.
일설에는 마켓 가든 작전 중에 오드리 헵번이 부상병 치료에 자원해 간호사로 활동하다가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이야기, 당시에 공수부대원으로 활약하던 007 시리즈의 감독 테렌스 영과 만났다는 이야기가 있다.[25] 그러나, 위에서 보듯 오드리 헵번은 귀족 집안 자제로 아른험 외곽으로 피난을 가 있었서 직접 전투에 휘말리지는 않았다. 또한 테렌스 영은 마켓 가든 작전 당시에 공수부대원으로 참전한 게 아니라, 영국군 제30 군단의 주력부대인 근위 기갑사단(Guards Armoured Division) 소속 전차병으로 참전했다. 따라서 이들이 대전 중에 만날 일은 없었다.
마켓 가든 작전 당시 참전 연합군 및 민간인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1978년 네덜란드 아른험 시 외곽 오스테르베크(Oosterbeek)에 공수부대 기념 박물관이 건립되었다. 이 기념관 건물은 바로 영국군 제1 공수사단이 지휘소로 사용했던 하르텐스테인(Hartenstein) 호텔이었다. 마켓 가든 작전 개시 당시에는 오스테르베크에 위치하던 발터 모델의 B집단군 사령부 요원들 숙소로 쓰이고 있었다.[26] 영화 머나먼 다리에서 묘사된 대로 발터 모델은 작전 개시 당일 이곳에서 점심식사를 하다가 연합군 공수부대 침투 소식을 듣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 현재는 마켓 가든 작전 당시의 기록물과 당시 전황을 재현해놓은 것을 볼 수 있다.하르텐스테인 공수박물관 방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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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른험 시 외곽에 있는 하르텐스테인 공수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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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유럽전선에서 있었던 연합군의 네덜란드 수복 작전이다. 전쟁을 크리스마스 이전에 끝내겠다던 연합군의 '''오만이 낳은 참극'''이다. 이전에 디에프 상륙작전과 크레타 섬 전투의 교훈을 까먹은 대가를 크게 치렀다.[1]
공수부대가 투입된 마켓 작전과, 지상 부대의 진격 작전인 가든 작전이 동시에 진행됐기 때문에 두 작전 명칭을 합쳐 '''마켓 가든 작전(Operation Market Garden)'''이라 부른다. 독일군은 1944년 크리스마스 전에는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이라 낙관하고 있던 연합군 수뇌부의 예측을 무산시키며 휘르트겐 숲 전투와 함께 '''서부전선의 기적(Miracle In The West)'''이라 전사에 기록된 독일군 방어전의 서막이 되었다.
2. 작전의 배경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연합군은 파리를 비롯한 프랑스 각지를 나치의 손아귀에서 해방시켜나가고 있었다. 독일군이 프랑스에서 물러나게 되자 나치 독일 사령부는 명령을 내려 프랑스 북부의 주요 항구들을 끈질기게 사수[2] 하거나 개박살내버렸고, 그 결과 마켓 가든 작전이 시행되기 직전 시점에서 연합군이 대규모 물자를 하역할 수 있는 지역은 노르망디만이 유일했다.
물론 프랑스 전역에선 독일군의 그 짓거리가 연합군에게 크게 문제가 되진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벨기에를 넘어 네덜란드 영토를 향해 진격하면서부터 생기기 시작했다. '''보급선이 너무 길어지고 있었던 것'''이다.[3] 특히 1944년 늦여름에 접어들자 노르망디에서 하역한 석유를 전선으로 수송하는 동안 보급부대가 훨씬 더 많은 석유를 소모해버리는 기막힌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노르망디에는 분명히 미국 본토에서 실어 온 석유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지만 전방에서는 석유가 부족해 진격이 정체되어 버렸다. 이는 탱크뿐만이 아니라 보급차량도 일단은 석유로 굴러가니 당연히 생길 수밖에 없었던 문제이긴 하다. 그래서 탄약이나 식료품은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으나 보급차량이 소모하는 연료는 연합군 수뇌부에게도 큰 골치거리였다. 결국 보급 능력이 한계에 부딪히자 연합군의 진격은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에 영국의 버나드 로 몽고메리 원수는 휴식과 재정비를 마친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네덜란드 지역의 주요 교량들을 점거하고, 이에 호응하여 대기 중인 지상군이 진격을 시작하여 독일군의 라인강 방어선을 돌파하는 작전을 제안했다. 당시 프랑스에서 개박살난 독일군이 상당히 약체화되었다고 판단하고 있었기에 연합군은 이 작전안을 수용하고, 1944년 9월 17일 일요일을 작전 개시일로 설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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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하하는 연합군 공수부대
3. 공세 초기
9월 17일이 되자 이른바 "마켓 작전"에 따라 연합군은 대규모 공수부대를 투입하기 시작했다. 미합중국 육군의 제101공수사단 "울부짖는 독수리(Screaming Eagles)"가 먼저 에인트호번에 투입되었고, 이어서 미 육군의 제82공수사단 "올 아메리칸"이 네이메헌, 영국 육군의 제1공수사단 "레드 데블스"가 아른험에 투입되었다.
문제는 이 지역에 있던 독일군이 혼란을 수습한 후 점점 강화되면서 연합군의 생각만큼 약체는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전차를 비롯한 중장비를 보유하여 아무리 정예병력이더라도 고작 소총, 바주카, 수류탄 정도로 무장한 공수부대 따위는 상대하고도 남을 화력을 갖추고 있었으며, 팔레즈 포위망에서 겨우 빠져나온 빌헬름 비트리히 SS대장의 '''제2SS 기갑군단'''과 독일 공군 공수부대 지휘관 쿠르트 슈투덴트 상급대장이 B집단군 사령관 발터 모델 원수의 명령으로 아른험 방면에 주둔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모델 본인이 '총통의 소방수', '방어의 사자'로 불리며 동부전선에서 이름을 날린 '''최고의 방어전 지휘관'''으로 네덜란드 방면에서의 연합군 공세를 예측하고 B집단군 사령부를 아른험 근교로 이전해 있는 상황이었으나 연합군은 사전에 전혀 알지 못했다. 그리하여 작전 당일, B집단군 사령부 2km 내에 영국군 공수부대가 강하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코넬리우스 라이언의 논픽션에서는 당시의 모델 원수가 허둥지둥하며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것으로 묘사되었지만, 실제 영국군 공수부대 출신의 저자가 당시 참전 용사들을 인터뷰한 <It Never Snows in September>에 의하면 영국군이 B집단군 사령부를 점거하였을 때 군사용 지도 한 장 남아 있지 않을 만큼 철두철미하게 비상 상황에 대처하여 사령부를 이전시켰다고 한다.
에인트호번에 강하한 101공수사단은 가장 근접한 교량은 성공적으로 확보하였지만, 에인트호번 북쪽의 손(son) 교량은 독일군이 먼저 점령하고 폭파시키는 바람에 초장부터 삐걱거리고 있었다. 네이메헌 남쪽에 강하한 82공수사단은 아른헴에서 신속하게 파견된 독일군 부대가 선수치는 바람에 네이메헌 남쪽의 그레이브 교량[4] 을 제외한 그 어느 것 하나도 탈취하지 못하고 대치상태에 돌입했다.
게다가 아른험에 강하한 영국의 제1공수사단은 선발대인 존 프로스트 중령의 제2대대가 일단 아른험 대교의 북쪽 입구를 장악하면서 아른험 남쪽에서 올라오는 독일군의 추가병력 투입은 저지하는 데 성공했지만 교량을 완전히 점거하지는 못했으며 무엇보다 주변에는 제2 SS기갑군단 소속 SS 9기갑사단 호엔슈타우펜이 아른험 남쪽, SS 10기갑사단 프룬츠베르크가 아른험 북동쪽에 배치되어 있었다.
사실 당시 배치된 독일군 중에 SS 9기갑사단은 SS 10기갑사단에다가 장비를 넘기고 재편성하러 후방으로 가던 중이라서 긁어모아도 연대 규모밖에 되지 않았고 SS 10기갑사단도 장비를 받았어도 팔레즈 포위망에서 워낙 박살이 나서 일반 보병사단 수준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경무장 보병인 공수부대로서는 전차를 가진 독일군을 이길 수 없는 상황이었고 무엇보다 그들은 동부전선에서 온갖 전투를 치른 노련한 군인들이었던 만큼 당황하지 않고 전투 태세를 갖출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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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른험 대교이다. 마켓 가든 작전 이후 폭격으로 다리는 파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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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아른험 대교
4. 머나먼 다리
한편 이에 호응하여 진격 중이던 영국 30군단의 "가든 작전"도 초창부터 삐끗거리고 있었는데, 예정대로라면 첫날 101공수부대가 있는 에인트호번까지 몇 시간 안에 도착하기로 되어 있었다. 연합군 상층부의 말대로 독일군이 정말 소년병에 자전거 뿐이라면, 거기서 나오는 빈약한 화력 따위 후속부대에게 전투를 맡기고 무시하면서 진격할 수 있었겠지만, 문제는 우회로도 없는 도로 하나였는데다 매복한 독일군들은 대전차포를 가지고 있었다. 만약 진격로가 여러 갈래였다면 다른 길로 진격하는 부대가 있기에 걱정할 것 없지만, 문제는 30군단의 진격로가 69번 국도 단 하나였다는 점이다.[5] 예정보다 늦은 9월 18일이 되어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그나마도 독일군이 앞서 교량 하나(son 교량)을 날려버린 까닭에 임시교량을 준비하느라 발목이 잡혔다. 결국 약 36시간 정도가 지체되어 9월 18일에 도착할 예정이었던 네이메헌에는 9월 19일이 되어서야 도착할 수 있었고 여기는 독일군이 네이메헌 대교를 점령하고 버티고 있었던 까닭에 또 발목이 잡혔다. 결국 82공수사단이 30군단의 지원을 등에 업고 보트로 반대쪽에 상륙하여 독일군을 몰아붙인 끝에 교량을 탈취하였지만 독일군 역시 맹렬하게 반격한 까닭에 엄청난 피해를 입은 후였다.
설상가상으로 독일군 잔당이 30군단 보병부대를 네이메헌 시가지에서 묶어버리는 바람에 보병부대가 전투를 끝내고 합류한 다음에 진격하라는 작전 사령부의 명령으로 선봉 기갑부대는 다리를 건넜는데도 진격하지 못하고 아른험에서 아군 공수부대가 쓸려나가는 걸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기갑부대 단독으로 아른험까지 갈 수도 있었지만 이 부분은 사령부의 판단이 옳았던 것이, 네이메헌에서 아른험까지의 약 18km정도의 구간은, 지금까지 진격해온 구간과는 다른 완전한 제방 둑길로 도로 주변에 나무 한 그루 없는 탁 트인 습지에다가 도로부분이 주변보다 높아 일명 '아일랜드'라고 불리는 구간으로 이런 곳을 보병의 엄호 없이 진격하다간 적의 매복에 걸려, 아른험에 도착하기는커녕 선봉 기갑부대가 전멸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기갑부대는 울며 겨자먹기로 보병이 빨리 전투를 끝내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영국군 장교 중 한 명은 이상황을 보고 "독일군 놈들이 좋아서 손을 싹싹 비비면서 우리를 죽일 거다"라고 투덜 댔다. 특히, 9월 20일까지 가든 작전을 마치기로 했는데 이 시점에서 작전은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나버렸다.
한편, 영국 제1공수사단은 아른험에서 12km나 떨어진 곳에 강하하는 바람에[6] 남쪽의 다른 두 공수부대에 비해 다리에 도착하는 시간이 지체되었는데, 이를 타개하기 위해 휘하의 지프 대대를 글라이더로 수송, 다리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을 단축하려 하였으나, 지프 대대를 실은 글라이더가 착륙한 지점을 독일군이 급습, 전멸당하고 만다. 기동력을 잃은 영국 제1공수사단 본대는 할 수 없이 다리까지 걸어가야 했는데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제2 SS기갑군단 휘하 독일군 부대들이 아른험으로 가는 길을 점령, 선발대와의 연결을 차단해버려 본대는 아른험에 도착한 9월 17일에서 4일이나 지났는데도 아른험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아른험 외곽 '오스테르베크'에서 독일군과 분투하며, 계속해서 밀고 들어오는 모델 원수의 증원부대에 오히려 점점 포위되고 있었다. 그나마 초기에 강하한 선발대 중, 존 프로스트 중령의 1개 대대 병력 750여 명 만이 다리 북쪽에 도착해 목숨을 걸고 다리 남쪽에서 오는 제9 SS 기갑사단과 아른험 북쪽에서 오는 제10 SS기갑사단의 장갑차량&모델 원수의 증원부대들을 무력화시키면서 아른험 대교 입구를 사수하고 있었으나 작전 계획이 제대로 틀어진 데다가 지속적인 독일군의 포격에 대부분의 전투부대가 박살이 나버려서 매우 비관적인 상황이었다.[7] 연합군은 교두보를 강화하기 위하여 9월 21일 자유 폴란드군 제1독립공수여단을 투입하였지만 투입시기도 늦고, 착륙지점도 전투를 벌이며 격전지로 가기에는 거리가 있었고 전황을 뒤엎을 수 있는 전력은 아니었기 때문에 영국군과 똑같이 따로 포위당해 비관적인 상황에 빠졌다. 심지어 강하지점마저 독일군에게 점령된 상태였다. 결국 9월 25일 더이상 버텨봤자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연합군은 작전을 중지, 네이메헌을 넘어 아른험을 수 km 앞두고 진격하던 30군단은 그 자리에 멈추고, 영국 공수부대와 폴란드 공수부대의 얼마 남지 않은 잔존병력은 라인강 너머로 간신히 철수하였다.
영국군 공수사단의 피해가 커서 1만 명이 넘는 강하병력 중 약 2,000명의 탈출 부대원만 남고 전멸했다. 전사자는 2000명 조금 못 미치고 포로는 무려 7000여 명에 달했는데, 9월 27일에 이러한 피해 상황 집계를 독일군 최고 사령부가 발표하자, 영미연합군의 우월한 전력을 익히 알고 있던 영국 국민들은 믿겨지지 않는 참패에 패닉에 빠졌고, 급기야 수상인 처칠은 라디오 연설을 통해 '적이 숫자를 부풀려 발표했다'고 호소할 정도였다. 결국 독일군 최고사령부는 '피해 상황을 재집계할 것'을 명령했는데, 현장에서 집계한 결과 '''기존에 발표한 수치보다 더 많은 영국군 피해가 집계됐다고 한다.'''(Obersturmbannführer Walter Harzer Interview)
이로써 영국 제1공수사단은 실질적으로 전멸을 면치 못하게 됐다.
5. 결과
"이 전투에서 용전을 펼친 모든 장교와 사병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한다."
-1944년 9월 27일, 발터 모델 원수가 서부전선 총사령부를 통해 휘하 장병들에게 전달한 메시지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마켓 가든 작전에서 독일군은 8,000여명이 사상, 또는 포로로 잡힌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연합군은 17,000명가량이 전사, 부상, 또는 포로로 잡힌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지금 적군은 비교적 안정적이고 응집력 있는 전선을 형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1944년 9월 29일, 아이젠하워 사령관이 연합군 참모진들에게 보낸 서한
이 작전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독일군을 몰아붙이고 있던 연합군에게는 뼈아픈 작전 실패였으며 그 결과 연합군의 라인강 돌파는 훨씬 더 뒤인 1945년 봄으로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전쟁이 예상보다 길어질 것 같아 전선에서 활약한 병사들을 잠시 후방으로 돌려 휴식을 취하도록 했다. 하지만 연내 종전은 물건너 갔어도 독일군은 이미 졌고 전의나 사기도 떨어진 상황이라 도발을 하더라도 큰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 오판한 결과 아르덴 지역에 휴양하던 부대까지 합쳐서 4개 사단, 실제 가용병력으로 따지자면 겨우 1개 사단에게 수비를 맡기는 바람에 아르덴 대공세가 시작되자 초반에 줄줄이 털리는 불상사가 빚어지기도 했다.
9월에 서부전선의 독일군 G집단군 참모장으로 임명된 프리드리히 폰 멜렌틴 소장은 회고록에서 '아른험 전투에서의 승리로 많은 혼란이 종식될 수 있었다.'라며 독일군의 승리가 준 거대한 전략적 효과를 언급했다. 이는 스티븐 앰브로스의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도 '가을부터 독일군은 매우 짜임새 있는 반격을 주도하며 각급부대를 후방으로 집결시켜 재무장, 재조정한 후 밀착방어선을 형성하였다'며 간접적으로 나타나 있고, 아이젠하워가 가족에게 쓴 편지에도 이러한 독일군의 조직적으로 정비된 저항에 대하여 불만을 토로하는 내용이 있다.
다만 국내에서는 전술적 부분에서 이 작전의 실패를 다소 확대 해석하는 경향이 있어 연합군이 심각한 피해를 입고 독일군에게 패배하여 퇴각한 전투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은데 정확히는 "'''큰 희생을 치러가며 거의 목표지점까지 진격하긴 했으나[8] 가장 중요한 작전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서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된 전투'''"이고, 연합군은 일부 돌출지역을 제외하고는 퇴각하지는 않았다. 이 작전 직후 얻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80km의 도로와 북해 사이의 스헬데 강 삼각주 지역을 확보하여 안트베르펀 항구를 주요 보급로로 사용하기 위한[9] 스헬데 강 하구 전투가 있었다. 다만 이 전투는 네덜란드 빼고는 2차 세계대전 전사에서 잘 알려지지 않다.
몽고메리가 자기 변호를 위해 90% 성공한 작전이라고 발언하자 이에 네덜란드 율리아나 여왕의 남편 베른하르트 공이 '''"우리나라는 당신네들이 한 번 더 성공해도 될 만큼 부유한 나라가 아니다."'''라고 비꼰 일화가 유명하다. 후에 몽고메리는 어느 정도 책임을 인정하는 발언을 하는 듯 했지만, 그러면서도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를 비판하는 배은망덕한 짓을 저질렀다. 사실, 아이젠하워도 최종 결정자로서 작전을 승인하고 자신의 입으로 마켓 가든 작전이 현재 가장 뛰어난 작전이라고 평가하며 종전 후에도 "당시엔 마켓 가든 작전이 필요했으며 최선의 선택이었다."라고 변호하는 등 비판을 받을 여지는 있다. 하지만 적어도 아이젠하워는 패전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인정했지만 몽고메리는 그렇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몽고메리의 지휘관으로서의 자질과 인성에 대한 평가가 동시에 하락하게 된다. 밑에 서술된 것처럼 책임을 엉뚱한 이에게 떠넘긴 시점에서 이미 인성면에서의 비판은 받아 마땅하다.
이후, 아른험은 1945년 4월 캐나다 육군 제1군단에 의해 해방되었다.
6. 패배의 희생양
자유 폴란드군 제1독립공수여단장 스타니스와프 소사보프스키(Stanisław Sosabowski) 소장만은 처음부터 그 작전을 무모한 자살행위라 생각하며 반대했다. 그는 자신의 참모들에게 “영국놈들은 독일군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거야.”라고 공공연하게 말했다. 하지만 결국 폴란드 공수부대는 독일군의 살인적인 포화를 뚫고 라인강 건너편 드릴에 낙하하였고 퇴각 명령이 내려진 이후 치열한 전투를 거듭하여, 포위당한 영국군의 탈출로를 열어주는 데 성공하였다. 격전을 치르면서 아른험에서 폴란드 제1독립공수여단은 작전 실패 이후 1,000여 명에 이르는 투입병력의 60%(590명)가 증발해야만 했다.[10] '''이러한 공적을 세웠음에도 마켓 가든 작전의 패배에 대한 책임은 정작 브라우닝과 몽고메리를 대신하여 소사보프스키가 뒤집어썼다.'''
1944년 10월 17일, 몽고메리는 영국군 참모본부에 보낸 서한에서 폴란드 공수부대를 비판하며 소사보프스키를 전출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이어서 브라우닝 또한 참모차장인 로널드 윅스 중장에게 폴란드 공수부대의 역량에 의구심을 표현하며 '이 장교(소사보프스키)는 위기 상황에서 무력한 대처능력을 보여주었고 논란을 일으키며 맡은 바 임무들을 능동적으로 수행하지 않았다'라고 주장하였는데 현재 35년째 영국군 공수부대에서 근무 중인 마이크 러셀 대령은 2012년, <Polski Bohater(Polish Hero)>에서 이러한 몽고메리와 브라우닝의 행적에 대하여 패전의 비난을 소사보프스키에게 뒤집어 씌운 것이라 평가하였다.
결국 1944년 12월 26일, 소사보프스키 장군은 폴란드 공수여단장에서 물러났으나 모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이후 소장 계급에 어울리지 않는 한직에만 머무르다 33년의 군 경력을 마감했으며, 1948년 퇴역할 당시에는 300파운드의 퇴직금뿐 연금조차 받지 못하였다. 소사보프스키 장군은 75살까지 영국의 한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였고 76세의 일기로 삶을 마감하였다. 그리고 그가 죽자 그의 유해는 폴란드 공산 정권(폴란드 인민 공화국)의 요구로 즉각 폴란드에 송환되어 공동묘지에 묻혀버렸다.[11] 이후에도 폴란드 정권에서는 그를 껄끄럽게 생각하여 아무런 기념물도 세우지 않다가 2017년에서야 겨우, 그것도 네덜란드의 지원으로 동상을 세웠다.
폴란드 공수부대의 구출을 받아 생환한 영국군 공수부대원들과 네덜란드인들은 소사보프스키의 희생을 결코 잊지 않았다.2006년 5월 31일 베아트릭스 여왕이 소사보프스키에게 청동사자장(Bronze Lion)을 추서하였고, 같은 해에 폴란드 공수부대가 착륙한 지점에 기념비를 제막하여 그들의 공적을 기렸다. 2012년, Polish Heritage Society UK[12] 의 지원을 받아 영화 <Arnhem - A Debt of Dishonour>가 제작되었고 영국군 공수부대 장교들 또한 이에 협조하였다.
2006년 5월에는 폴란드 공수 1여단이 아른헴에서의 분투를 인정받아 네덜란드 왕실로부터 빌럼 군사 훈장(Military William Order)을 수여받았다.[13] 이 훈장은 네덜란드 군사 훈장 중에서 가장 등급이 높은 훈장으로 현재까지 11개 부대만 수여받았다. 폴란드 공수부대는 미 육군 제82공수사단과 함께 이 훈장을 수여받은 유이한 외국인 부대이다.
7. 패배 원인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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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크프리트 선을 넘어 진격하는 연합군이다.
7.1. 느린 속도
작전 이후 여러 보고서가 만들어졌으며 그중 연합군을 성공적으로 방해한 독일군 제1공수군(급은 야전군이지만 실제 전력은 훨씬 낮았다)의 지휘관 쿠르트 슈투덴트는 공수작전인 마켓 작전의 내용 자체는 뛰어났다고 평가했지만 영국 30군단의 느린 진군 속도가 자멸을 자초했다고 비판했다. 그에 반해 당시 82공수사단장 제임스 개빈 준장은 30군단장 호록스 중장을 이제껏 봐왔던 지휘관들 중에 제일 현명했다고 평했다.'Like threading seven needles with one piece of cotton, and we only have to miss one to be in trouble.'
(이건 실 한가닥으로 바늘귀 7개를 단번에 꿰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 개만 실패해도 모든 것이 실패한다.)
당시 영국군 근위 기갑사단의 작전 장교(operation officer)인 프레디 해네시(Freddie Hennessy)가 한 발언으로 알려져 있다. 마켓 가든 작전의 위험성을 매우 적절하게 표현한 문장이라 여러 곳에서 인용하는 편이다. [14]
사실 아른험까지의 100km는 우회로도 없고 주변에 엄폐물도 없는 '''단 하나의 도로, 그것도 운하를 따라 형성된 국도'''로만 가야 했으므로 독일군의 필사적인 저항에 느린 속도는 필연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연합군 수뇌부가 독일군이 이미 졌고 싸울 마음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다. 실제 방공포병들이 연합군 폭격기가 나타나자 싸우지도 않고 도망친 경우도 있으므로 연합군의 분석이 틀렸다고 평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아른험에서 쉬고 있었던 부대는 정예 무장친위대(Waffen-SS) 소속 기갑부대였다. 지휘관인 빌헬름 비트리히 장군은 동부전선에서 그 실력이 입증된 유능한 기갑 지휘관일 뿐 아니라, 독일군 전투 지역 경계에 영국군 야전병원 설치를 용인하여 연합군과 독일군의 피해를 모두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인성도 갖춘 인물이었다. 후일 비트리히는 마켓 가든 작전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이유로 히틀러의 노여움을 사서 게슈타포에 연행될 위기에 처하나, 발터 모델 육군 원수가 자신의 모든 권한을 동원하여 막아낸다.
독일 공군은 연합군의 패인으로 공수강하를 3일에 걸쳐서 계획한 점응 꼽았다. 실제로 작전 2일째부터는 안개가 끼는 바람에 타임라인에 엄청난 차질이 빚어졌다. 2일째 도착하기로 했던 폴란드 1공수여단이 수일이 지나서야 도착했던 것이다. 상황은 다른 공수부대들도 마찬가지였으나 예비 전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영국 1공수사단이 더욱 급박해질 수밖에 없었다.
7.2. 빈약한 통신망
제1연합공수군의 부사령관이자 마켓 가든 작전에서 공수부대를 야전에서 지휘한 프레데릭 브라우닝 중장은 패인을 통신체계의 미흡함과 날씨로 꼽았다. 실제로 영국 1공수사단은 통신이 먹통이었는데 브라우닝 중장은 강건너 82공수사단과 있었기 때문에 큰 문제를 야기했다. 이 문제는 무전기의 전파발진 수정판을 잘못된 것으로 챙겨오는 바람에 빚어진 사태였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영국 본토와의 연결은 성공시켜서 결국 영국 본토를 경유하여 상급제대와 연락을 할 수 있었다고.''' 이 문제로 1공수사단 내에서는 물론이고 작전 첫 24시간 동안 브라우닝 중장은 1공수사단이 안전하게 도착했는지도 확인할 수 없었다. 이러한 연락 체계는 브라우닝 중장 자신의 잘못이 큰데, 작전 전에 1연합공수군이 창설되고 휘하에 자신의 1영국공수군단이 창설되자 원래의 자신의 영국 공수군 사령부를 1영국공수군단 사령부로 바꾸면서 다른 부대와 연락체계를 제대로 설치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수뇌부도 마찬가지여서 아이젠하워의 SHAEF 총사령부는 아직도 노르망디의 그랑빌에 있어서 몽고메리나 브래들리와의 교신엔 3일이 걸리는 처지였다. 이 연락 병크는 거의 다 죽었던 독일 공군이 마켓 가든 전역에서는 우위를 차지하게 만든다. 이유는 공군과의 연락 부족으로 공군은 스케줄대로 출격한 뒤 그대로 독일 폭격으로 돌려버렸기 때문이다. 이 병크 때문에 공수부대에 보급품을 투하하는 수송기들은 거의 전투기들의 호위를 받지 못해서 수많은 보급물자를 다른곳에 떨어뜨리거나 격추되어 손실된다 예로 1공수사단의 보급품 회수율은 잘해봐야 10%를 넘지 못한 반면, 독일군은 상당수의 군수 물자를 노획하였다는 만족스러운 보고를 올리게 된다.
그럼에도 영국 공수부대가 고립된 상황에서도 워낙 결사적으로 항전한 탓에 독일군도 9일이 지나기까지 확실하게 밀어버리지는 못했다. 당시 독일군 지휘관 발터 모델은 이러한 영국군의 용전에 나름 감명받아 참모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개인적으로 항복 의사를 타전하나 프로스트 중령이 '''"미안하군, 귀관들을 전범으로 수용할 공간이 부족해서 받아들일 수 없다."'''라는 명대사를 전했다는 것이 유명하다. 다리 옆에 마련한 영국군 전투 지휘소가 폭격을 당해 부상병으로 넘쳐나자 양측의 위생병들이 전투를 잠시 중지하기로 합의하고, 독일군도 영국군을 도와 화염에 휩싸인 사령부 건물에서 부상병들을 구출한 뒤 전투를 재개했다는 것 또한 실화이다.
7.3. 적정 무시와 독일군 지휘관들의 역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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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9월 18일, 제2 SS기갑군단 사령부에서의 발터 모델.
일반적으로 기갑 부대가 존재한다는 징후를 무시하고, 이를 지적하는 정보장교를 다른 곳으로 '''전출'''시키는 등 정보 분석을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는데, 일례를 들자면 연합군은 이미 마켓 가든 전역의 독일군을 최대 15,000명의 보병과 250대의 전차로 추산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공수부대를 투입한 것은 제일 깊숙히 있는 1공수사단이 길어야 5일만 버티면 된다고 생각했었고, 또 전차 자체도 특히 시가전에서는 무적이 아니다. 프로스트 중령의 대대가 압도적인 독일군에 의해 고립되어서도 4일간이나 죽을 힘을 다해 버텼던 것을 생각하면 완전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아른험 주둔 독일군은 3,000여 명의 보병과 몇대의 전차로 브라우닝의 추산과 일치했다.[15]
몽고메리 원수와 연합군 수뇌부는 오랜만에 펼치는 ''''회심의 진격을 막아서는 안 된다''''는 안일한 생각을 했지만, 문제는 영국군을 맞을 B집단군의 사령관이 ''''동부전선의 수호자', '총통의 소방수', '방어의 사자', 발터 모델 원수였다'''는 것이다.
14시에 영국군의 강하를 육안으로 목격한 발터 모델이 B집단군 사령부를 이동시켜 제2 SS기갑군단의 빌헬름 비트리히 사령부에 도착한 시간이 15시, 연합군의 작전 목표를 파악하여 최초의 방어 작전이 개시된 시각이 17시 30분이다. 모델은 네덜란드의 모든 부대와 준군사조직, SS보급대대, SS하사관학교, 네덜란드 SS경찰대대, 헤르만 괴링사단 보충대대, 루프트바페 고사포 부대, 해군까지 동원하여 방어 작전을 수립하였고 이러한 엷은 방어선은 효과적으로 영국군 공수부대의 아른험 다리로의 접근을 차단할 수 있었다.[16] 당시 영국군에게 포로가 된 독일군 47명은 무려 27개의 다른 부대 소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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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5일, 독일군 포로를 수용하는 임시 수용소가 된, 네덜란드 안트베르펀 동물원의 사자 우리 안에 갇힌 독일군들. 두 명의 독일 수병의 모습을 볼 수 있다.
32세의 젊은 나이로[17] 제9 SS기갑사단의 사단장 대리를 역임했던 발터 하르처 SS중령은 '''"마켓가든 작전에서의 독일군의 승리가 자랑스러운 이유는 정규군이 아닌 철도 노동자, 근로봉사자, 공군 등 제대로 된 지상전 훈련 경험조차 없는 사람들이 공수부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이라고 회고하였다. 즉 한마디로 말해 '''오합지졸들로 최정예부대를 격파한 것이었다'''. 물론 살짝 과장이 있긴 하지만 당시 동원된 독일군의 경우 무장친위대 부대를 제외한 쓸모없는 취급을 받던 공군 야전사단, 공군 보조원들, 인근의 후반기교육장에서 동원된 크릭스마리네 장병들, 심지어 전투와는 연이 없던 조리병과 군우병, 헌병과 경찰조직들도 전투에 동원되었기에 저런 말이 나온 것이다. 하르처의 기록에 따르면 자신은 1944년 4월, 동부전선에서 이미 모델의 지휘를 받아서 그의 지휘 방침을 잘 알고 있었고, 모델은 항상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 두었기 때문에 급박하게 변해가는 전황에도 빠른 대처와 작전 지휘가 가능했다고 한다. 또한 모델은 제9 SS 기갑사단 사령부를 매일 찾아와서 전황을 직접 확인했는데 이때 하르처 SS중령이 "부상자가 너무 많아서[18] 병력 수가 충분하지 못합니다."라고 보고하자,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 이후 무장친위대와 국방군의 대립이 극심했던 상황에서도 '''지속적으로 병력을 증원해 주었음은 물론 6호 전차 B형(티거 2)과 화염방사기까지 배치해 주었다.''' 이러한 공훈을 인정받아 발터 하르처 SS중령은 기사철십자훈장을 받게 된다.
무장친위대에서 가장 뛰어난 기갑 지휘관으로 손꼽히는 빌헬름 비트리히 SS대장 역시 동부전선에서부터 모델과 함께한 작전이 많았고, 특히 모델은 제1차 르제프 전투 당시 3면이 포위된 독일군 9군을 완전 포위하기 위해 후방에 투입된 소련군 공수부대를 오히려 역으로 포위하여 섬멸해버린 경험이 있었다는 것, 그에 더하여 2차대전 최고의 공수부대 지휘관으로 손꼽히는 쿠르트 슈투덴트의 존재도 독일군에게 실로 행운의 인사였다. 그야말로 '''對 공수부대 전문가들이 한 자리에 모인 셈'''이다.
더군다나 작전기간 동안 네덜란드와 벨기에 북부에 주둔하던 독일군은 기본적으로 북동프랑스 연안과 베네룩스 3국의 연안을 방어하던 제15군으로 이 야전군은 독일군이 연합군의 프랑스 상륙지로 유력시하던 칼레 등이 관할지였다. 당연히 야전군의 후퇴 및 고립 등으로 전투력이 줄긴 했어도 작전 개시 시점까지 전투력을 상당부분 온존한 편이었다.
폰 멜렌틴 소장은 '모델 원수는 노르망디 작전 이후 피투성이가 된 부대를 잘 수습하여 아른험을 방어해냈다.'고 회고록 <Panzer Battles>에 기록하였다. Osprey 시리즈 또한 발터 모델을 승리자로 정의하였다. 9월 초에 이미 네덜란드 방면 공세를 예측하고 부대를 효과적으로 주둔시킨 전략적 시야와 기습 작전 3시간 만에 반격 작전을 수립하여 '강하 작전이 주는 기습적 효과'를 무산시킨 전술적 임기응변 능력, 작전 기간 내내 최전선에 직접 임하여 전투 상황을 파악하고 공군 폭격을 위시한 적절한 증원 부대 운용을 가능하게 한 지휘 능력이 '노르망디 작전 이후 최초의 독일군 승리'를 이룩한 것이다.
7.4. 연합군의 안일한 인사
모델, 비트리히, 슈투덴트를 위시한 역전의 독일군 지휘관들에 비교하면 연합군 지휘관들은 실전 경험이 너무 부족했다. 영국 1공수사단장 로이 어커트는 전에 전혀 공수부대를 지휘해본 경험이 없었다. 부하들은 이 사단장을 상당히 신뢰했고 실제로도 괜찮은 지휘관이었지만 공수부대의 전술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특히 초기의 계획인 10km 쯤 진격해서 아른험 다리를 점령한다는 계획은 독일군이 아예 없을 때 가능한 얘기였고 실제로 독일군에 막혀서 본대는 아른험 다리를 볼 수 있는 거리까지 가보지도 못했다. 또한 다른 지휘관을 찾으러 간다고 했다가 독일군에게 포위를 당해서 수시간 동안 1공수사단은 지휘관 공백 상태에 놓였다. 사실 야전 지휘의 책임을 맡았던 제1연합공수군 부사령관 프레데릭 브라우닝 중장 역시도 공수부대를 지휘한 경력은 부족했기에 휘하의 미 82공수사단장 제임스 개빈 준장에게 비판받았다.“영국군이 그곳에 낙하했습니다. 하지만 우왕좌왕했습니다. 무전기는 작동하지 않았고 계획도 틀어졌으니까요. 영국군은 임기응변 능력도 없었습니다. 용감하게 싸우긴 했습니다. 그건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다지 노련한 군인들로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 빈리히 베어 소령, 당시 B집단군 사령부 정찰장교
또한 베어 소령은 전투 경험이 많은 미국 공수부대원들이 상대적으로 안전한 위치에 낙하했지만, 오히려 전투 경험이 일천한 영국 1공수사단이 작전 최대 목표 지역에 가깝게 투입된 것 또한 실패의 요인이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마켓 가든 작전이 사전에 누설되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며, 독일군 사령부는 그런 정보는 전혀 받지 않았다고 한다.
8. 여파
아른험 전투와 동시기의 아헨 전투에서 서방 연합군과 독일 B집단군이 혈투를 벌이는 동안, 프랑스에 남아 있던 요하네스 블라스코비츠 상급대장의 G군집단은 무사히 탈출하여 B집단군과의 합류에 성공한다. 이렇듯 아른험 방면에 집중된 영미연합군의 패배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제대로 된 방어선조차 형성하지 못했던 독일군으로 하여금 지크프리트 라인을 기반으로 한 서부전선을 견고하게 형성하도록 협조한 셈이다.[19]
그러나 히틀러는 SS의 민간인 학살을 고발한 블라스코비츠를 탐탁치 여기지 않아 5년 동안이나 한직에만 머물게 했던 만큼, 블라스코비츠의 전과를 인정하지 않았고 도리어 그를 해임한다. 새로이 서부전선 총사령관에 취임한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는 G군집단을 G집단군으로 확대 개편한 뒤 대공세를 실행하려 했다. 아르덴 대공세가 전후 '룬트슈테트 대공세'로 불리었던 것과 달리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룬트슈테트 대공세로 불리운다. 하지만 이 작전은 폐기되었고, 히틀러와 알프레트 요들이 7월부터 준비 중이던 아르덴 대공세가 시작된다.[20]
이렇듯 독일군은 아른험 전투의 승리로 서방 연합군과 교착 상태에 이르며 나름 주도적인 전략을 구사할 수 있었다. 상대적으로 여유로워진 서부전선에 비해 보다 직접적인 위험인 동부전선으로의 증원 계획까지 수립되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르덴 대공세는 서부전선 총사령부는 물론, B집단군 사령부조차 10월 말이 되기 전까지 알지 못했던 작전이었고 결국 독일군 수뇌부는 스스로 원치 않았음에도 아르덴 대공세에 총력을 기울이게 된다. 이후 자세한 경과는 아르덴 대공세 참조.
그리고 마켓 가든 작전을 돕기 위해서 네덜란드의 철도공들이 파업을 일으켰는데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뒤, 히틀러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네덜란드로 들어가는 식료품을 막아버렸다. 이 때문에 44년 겨울 네덜란드인들은 심각한 기근에 시달렸고, 이를 돕기 위하여 연합군은 "만나 작전"을 실시, 수송기와 폭격기를 동원해 식료품과 각종 생필품들을 네덜란드에 투하했다. 참고로 만나 작전 당시 요하네스 블리스코비츠가 이끄는 독일군은 사전에 연합군과 협정을 맺어서 생필품을 투하하는 연합군 항공기들을 일체 공격하지 않았다.
9. 대중문화
상영시간 176분 대작인 머나먼 다리 <A Bridge Too Far>는 바로 이 작전을 영화한 것이다. 코넬리우스 라이언의 논픽션 원작 <A Bridge Too Far>는 특히 독일군 관점에서 보면 픽션에 가까울 만큼 오류가 많은데 이러한 내용 또한 그대로 시나리오에 반영되면서 전사학자들이 비판하기도 했지만, 영화 자체로서는 지상 최대의 작전, 벌지 대전투 등, 전쟁 대서사시 영화 장르의 정수이자 거의 마지막 작품인 만큼 훌륭한 완성도를 자랑하며 당대 명배우들이 집결하여 연합군 중요 인물들을 연기하면서 관객들의 몰입갑을 한껏 높여주고 있는 것이 큰 특징이다.[21]
- 제임스 칸(에디 도헌) - 미 101공수사단 상사
- 숀 코네리(로이 어커트) - 영국 1공수사단 사단장
- 마이클 케인(조 반델러) - 영국 30군단 휘하 아일랜드 근위기갑대대장
- 안소니 홉킨스(존 프로스트)- 영국 1공수사단 2대대장
- 에드워드 폭스(브라이언 호록스) - 영국 30군단장
- 엘리엇 굴드(존 스타우트) - 미 101공수사단 연대장
- 라이언 오닐(제임스 개빈) - 미 82공수사단장
- 로버트 레드포드 (줄리언 쿡) - 미 82공수사단 3대대장
- 진 해크먼(스타니스와프 소사보프스키) - 폴란드 제1독립공수여단장
드라마 초반부에 마켓 가든 작전에 대해 브리핑을 할 때 독일군의 전력을 '소년병과 노병'뿐이라고 파악했었지만 막상 조우한 독일군은 티거 전차, 야크트 판터 전차 등을 대동한 기갑사단이다. 나중에 아인트호벤이 폭격당하는 것을 지켜보는 윈터스가 "노병뿐이라며?"라고 하자 브리핑을 했었던 닉슨이 "그러게..."라고 답한다.
9.1. 게임
브라더스 인 암즈 헬즈 하이웨이의 주 배경이기도 하다.
메달 오브 아너 에어본 4번째 미션의 이름이 마켓 가든이다.
콜 오브 듀티: 로드 투 빅토리의 미군 미션의 후반 2~3개의 미션이 마켓 가든 작전이다.
세계정복자 4의 후반 작전 이름이 마켓가든작전이다.
팀 포트리스 2에서 솔저가 사용하는 무기중 마켓가든 모종삽이 있는데 이름에 맞게 로켓점프후 공중에 체공중에 때리면 100% 확률로 치명타가 뜬다. 원문은 Market Gardener.
포스트 스크립텀은 마켓가든 작전을 다루는 멀티 대전 FPS으로, 영미연합군과 독일군이 주로 격전을 벌였던 도시를 주 무대로 다룬다.[22][23]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의 전차군단 진영의 모든 미션이 마켓 가든을 다룬 미션이다
10. 기타
마켓 가든 작전 당시 한 영국 제1공수사단 병사는 정찰하던 비무장 독일 장교를 생포했지만 독일 장교가 자기를 풀어주면 여동생과 중매해주겠다고 말하자 그를 '''풀어줬다'''(...). 이후 둘은 전쟁 종결 후 독일 퓌센에서 정말로 재회하여 처남과 매부 사이가 됐고(!?), 이 영국 병사와 독일 장교의 여동생은 오래오래 잘 살았다고 한다.
영국 출신의 명배우 오드리 헵번과도 관계가 있다. 헵번의 외가는 네덜란드 귀족 가문으로, 외할아버지 아르나우트 판 헤임스트라(Aarnoud van Heemstra) 남작은 1910년부터 1920년까지 아른험 시장을 역임한 바 있다. 이 때문에 헵번의 부모가 1938년에 이혼하자, 양육을 맡은 그녀의 어머니는 헵번을 데리고 친정이 있는 아른험으로 돌아온다. 독일군 점령 치하에서는 영국 친가 성으로 인해 불이익을 받을까봐 외가쪽 성(판 헤임스트라)을 쓰고 발레 수업을 받으며 은거했다. 저명한 귀족 가문이지만 친척들이 독일로 강제징용당하고 비명횡사하는 등의 사고를 겪었고, 이에 외할아버지는 헵번과 가족들을 데리고 아른험 북동쪽 외곽에 있는 소도시 펠프(Velp)로 거처를 옮겨 이곳에서 종전까지 은거하였다. 때문에 아른험 중심가 및 서쪽 오스테르베크 일대에서 격렬하게 전개된 전투에 직접적으로 휘말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마켓 가든 작전이 실패한 뒤 1944~45년 겨울에 벌어진 네덜란드 대기근 사태[24] 로 인해 부유한 외가까지 굶주림에 고통받았다. 오드리 헵번도 튤립 구근을 먹으며 근근히 버텼고, 영양실조로 빈혈과 부종에 시달려야 했다. 결정적으로 그녀의 외가는 마켓 가든 작전 과정에서 아른험 일대의 영지가 쑥대밭이 되었고, 상당수 자산이 소실되면서 재정적으로 파탄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로 인해 오드리 헵번은 전쟁 뒤에도 유명해질 때까지 상당 기간 쪼들리는 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이런 전쟁으로 인한 고통스러운 기억 때문에 헵번은 전쟁 영화에도 잘 출연하지 않았고, 전투씬은 절대 찍지 않았다고 한다.
일설에는 마켓 가든 작전 중에 오드리 헵번이 부상병 치료에 자원해 간호사로 활동하다가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이야기, 당시에 공수부대원으로 활약하던 007 시리즈의 감독 테렌스 영과 만났다는 이야기가 있다.[25] 그러나, 위에서 보듯 오드리 헵번은 귀족 집안 자제로 아른험 외곽으로 피난을 가 있었서 직접 전투에 휘말리지는 않았다. 또한 테렌스 영은 마켓 가든 작전 당시에 공수부대원으로 참전한 게 아니라, 영국군 제30 군단의 주력부대인 근위 기갑사단(Guards Armoured Division) 소속 전차병으로 참전했다. 따라서 이들이 대전 중에 만날 일은 없었다.
마켓 가든 작전 당시 참전 연합군 및 민간인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1978년 네덜란드 아른험 시 외곽 오스테르베크(Oosterbeek)에 공수부대 기념 박물관이 건립되었다. 이 기념관 건물은 바로 영국군 제1 공수사단이 지휘소로 사용했던 하르텐스테인(Hartenstein) 호텔이었다. 마켓 가든 작전 개시 당시에는 오스테르베크에 위치하던 발터 모델의 B집단군 사령부 요원들 숙소로 쓰이고 있었다.[26] 영화 머나먼 다리에서 묘사된 대로 발터 모델은 작전 개시 당일 이곳에서 점심식사를 하다가 연합군 공수부대 침투 소식을 듣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 현재는 마켓 가든 작전 당시의 기록물과 당시 전황을 재현해놓은 것을 볼 수 있다.하르텐스테인 공수박물관 방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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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른험 시 외곽에 있는 하르텐스테인 공수박물관.
11. 관련 문서
[1] 상륙전이냐 공수전이냐 차이는 있지만. 무리한 적진에 병력을 투입하고 부실한 장비, 제대로된 정보 파악도 없었다는 점 등등[2] 그래서 일부 항구가 1945년 5월 독일군이 항복할 때까지 미수복 지구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3] 당시 노르망디 오마하 해변에서 벨기에-네덜란드 국경까지의 거리는 약 400마일, 대략 600km 이상이었다.[4] 82공수사단 휘하 A연대가 그레이브 다리 에서 '''불과 500m 떨어진 들판'''에 강하한 덕분에 단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다리를 무혈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5] 이로 인해 전차 한개를 격파하는 순간 격파된 차량 뒤에 따라오는 모든 병력이 멈춰서버리게 되어 진격이 훨씬 지체되었다. 이는 30군단이 영국 공수부대가 아직 버티고 있을 때 아른험에 도착하는데 실패하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6] 아른험 자체가 공수부대로 공략하기엔 꽤 난점이 많았던 것도 있었다. 당시 연합군 공수부대는 수송기에서 보병이 바로 강하하는 것 외에도 각종 공수부대용 중화기나 마찬가지로 공수부대원, 보급물자, 그리고 지프 등의 이동수단을 별도의 공수용 글라이더에 탑재해 공수하는 식으로 운용했는데, 아무리 글라이더가 가볍다 하더라도 안에 이것저것 집어넣다 보면 일반 수송기와 도찐개찐이 되버린다. 즉, 글라이더가 착륙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단단한 땅을 골라야 했는데, 네덜란드는 대부분이 습지에 물렁한 땅 투성이다. 그래서 단단하면서 제일 가까운 지형인 아른험 북쪽이 후보가 되었는데, 막상 살펴보니 그곳은 아른헴 북쪽 '델런'에 위치한 비행장에 주둔하고 있는 루프트바페의 사정권에 들어가는 지역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다시 둘러보니 그나마 가장 적합한 곳이 아른험에서 서쪽으로 12km 떨어진 지점이었다.[7] 여기에 깨알 같은 일화가 하나 있다. 4일째 버티고 있던 프로스트 중령의 선발대에게 제 2 SS 기갑군단 사령관 빌헬름 비트리히 SS대장이 그 용맹함을 존중해, 전령으로 항복을 권유하였다. 하지만 오해였는지 패기였는지 선발대는 오히려 독일군 측이 항복하러 온 줄로 착각, “우린 포로를 잡아 둘 만큼 여유롭지 않다”며 비트리히의 항복 권유를 동문서답으로 거절해버린다. 그리고 비트리히는 다음 날 씁쓸한 기분으로 선발대를 포함한 아른험 대교 주변부를 총공세로 쓸어버린다(...). 사실 이건 이 작전을 다룬 영화 ‘머나먼 다리’에서 사실을 조금 각색한 이야기이다. 실제론 모델 원수가 항복을 권유했다고 한다.[8] 당시, 30군단 본대는 아른험에서 8km남은 '엘스트(Elst)'까지, 선봉 기갑부대는 무려 아른험 대교에서 '''1500m 남은 지점까지 진격했다.'''[9] 앞서 언급한 대규모 물자를 하역할 수 있는 항구로서 안트베르펀 항구를 연합군이 이전에 점령했지만 스헬데 강 삼각주 지역에 아직 독일군이 남아 있어 당시까지는 사용할 수가 없었다.[10] 원래 영국으로 망명한 폴란드 망명정부는 이들을 바르샤바 봉기 직전에 바르샤바 교외에 투입시키고 싶어했지만 영국은 상큼하게 씹었고 대신에 이들을 서부전선에 투입했다. 대전 후 대부분의 여단 구성원들이 영국에 남는다.[11] 공산 정권 몰락 이후 이곳은 군인묘지로 다시 지정되었고 무덤도 단장 되었지만, 1989년 이전엔 그냥 공동묘지였다. 다만 공산 정권 이전 군인묘지였기 때문에 다시 군인묘지로 재지정되었을 뿐으로, 아직도 거기에는 묻혀 있어서는 안 되는 일반인들의 무덤들이 많다.[12] 즉 전쟁 이후 영국에 망명한 폴란드 군인들의 자손들이 만든 단체이다.[13] https://web.archive.org/web/20110716063500/http://www.lintjes.nl/_en/militaire_willemsorde/mwo_polen.html[14] 출처: Lloyd Clark, Arnhem: Jumping the Rhine 1944 & 1945[15] 실제로 아른험에 주둔하고 있던 제2 SS기갑군단 중, 제대로 된 전력을 유지하고 있던 부대는 9SS기갑사단 소속의 기갑수색대대 하나뿐이었고, 그나마도 아른험 전투 2일째 되는 날에 다리를 돌파하려다 PIAT와 브렌 경기관총을 위시한 프로스트 대대의 완강한 저항으로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리타이어 한다. 때문에 명색이 기갑군단임에도 독일군은 대부분의 화력을 야포의 포격에 의존해야 했다.[16] 이렇게 파편처럼 흩어진 부대를 모아서 체계화하고 그 부대를 이용해 유동적인 방어선을 형성해서 공격자의 진격을 차단하거나, 공세를 둔화시키는 것은 발터 모델의 특기였다. 실제로 그가 서부전선으로 오기 직전 동부전선에서 소련군이 바그라티온 작전을 개시하자 동부전선 전역의 방어선이 무너지고 지휘체계마저 붕괴되는 독일군 입장에서 지옥같은 상황이 벌어졌는데, 그 와중에도 모델은 사방팔방 흩어진 패잔병들을 긁어모아 거미줄 같은 방어선을 형성해 소련군의 공세를 효과적으로 둔화시켰다.[17] 9월 29일이 생일이라서 휴가를 이미 받아두었는데, 마켓 가든 전투 때문에 10월에 가족들의 생일 축하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18] 상술했다시피 팔레즈 포위망에서 사단이 이미 큰 피해를 입은 후였기 때문이다.[19] Joachim Ludewig <Rückzug: The German Retreat from France, 1944>[20] <Panzers in Winter: Hitler's Army and the Battle of the Bulge>[21] 특히 아른험 시가전 씬은 이후에 나오는 모든 전쟁영화의 시가전 연출에 훌륭한 교보재로 쓰일 만큼 지금봐도 전혀 위화감 없는 연출을 선보인다.[22] 드릴(Driel), 베젤(veghel), 베스트(Best), 오스테르베크(Oosterbeek), 아른험(Arnhem), 벨몰런(Velmolen), 그라브(Grave), 도르베르트(Doorwerth)가 주요 맵으로 나온다.[23] 옥의 티라면 가장 큰 목표중 하나였던 나이메겐(Nijmegen)은 없단 것(마켓 가든 작전의 목표인 교량들 중 가장 큰 다리였다. 거기에 전투도 치열했던 곳.)...게다가 사실 그라브(Grave) 쪽은 전투가 없었다. 모든 다리 중 제일 가깝게 내려서 사상자 한 명 없이 다리를 먹는 데 성공했기 때문.[24] 1944년 9월에 네덜란드 국철이 연합군의 진격에 호응해 벌인 파업이 실패로 돌아간 뒤, 독일군은 보복으로 네덜란드 내의 식료품 철도수송을 전면 금지했다. 이 때문에 서부 네덜란드 도시들에서는 농촌으로부터의 식량 공급이 끊기면서 이 지역 인구 450만 명이 이듬해 봄까지 심각한 기근에 시달렸다. 이 시기에 최소 22,000명이 기근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25] 나무위키 이전 판에는 이런 설들이 사실인 양 수록되어 있었다.[26] 발터 모델은 이곳이 아닌 다른 호텔(타펠베르흐 호텔)에 숙박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