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팔로 조약
'''Rapallo Treaty''' (영어)
'''Vertrag von Rapallo''' (독일어)
'''Рапалльский договор''' (러시아어)
1. 개요
1922년 4월 16일 이탈리아 왕국의 라팔로[1] 에서 바이마르 공화국과 소비에트 러시아 사이에서 체결된 조약. 당시 전범국과 공산국가라는 점 때문에 국제사회에서 왕따였던 양국이 외교적 활로를 모색하고자 체결한 조약으로, 이를 통해 독일과 러시아는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근 10년 만에 처음으로 외교관계를 정상화하게 된다.
2. 과정
개요 항목에도 등장하듯이 1차대전의 종결 이후 독일과 러시아는 모두 외교적으로 왕따였다. 독일은 전범국이라는 이미지와 더불어서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한 막대한 보상금과 영토 상실 및 군비 축소를 감당해야 했으며, 공산국가였던 소련 역시 모든 국가들로부터 기피받는 대상이었다.[2]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는 신생 소련에게 '너네가 제국이었던 시절에 우리가 빌려줬던 차관도 갚아'라면서 압박을 가했고 이에 소련은 비밀리에 독일과 외교적 교섭을 진행한다. 독일 역시 소련의 제안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프랑스는 소련이 채무 문제에서 배째라 모드로 나오자 '그러면 니네 배상금으로 러시아의 채무 문제를 해결하지 뭐'하면서 독일을 협박(...)했던데다가 어쨌든 외교적으로 고립무원인 상황에서 상대가 누구이던 간에 우호적인 관계를 지닌 국가를 하나쯤은 만들 필요가 절실하기도 했고 이 시기 막 경제발전계획을 추진중이었던 소련의 막대한 시장은 패전 이후 엉망진창이었던 독일의 산업계를 다시 부흥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재군비를 꿈꾸고 있던 한스 폰 젝트 휘하의 독일 군부 역시 정계가 소련과의 외교 교섭을 진행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소련에서 각종 신무기를 비밀리에 테스트하면서 재무장을 진행할 수도 있는데다가, 독일과 소련이 제휴해서 과거 독일과 러시아가 점령했던 지역에서 새로 독립한 폴란드를 군사적으로 찍어누를 수도 있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 [3][4]
1921년 5월 무렵부터 양국 지도자[5] 들의 지시하에 물밑교섭이 이루어졌고 1922년 4월 16일 전적으로 조약이 체결된다. 조약의 핵심 내용으로는 다음과 같다.
1. 바이마르 공화국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따른 배상권을 완전히 포기한다.
2. 그 대신 소비에트 연방은 해당 조약으로 상실한 영토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지 않는다.
3. 양국의 외교 관계는 정상화될것이며 쌍방간에는, 최혜국 통상대우가 적용될 것이다.
독일과 소련의 전격적인 조약은 전 유럽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고, 양측은 모두 원하던 대로 외교적 고립 단계에서 어느 정도 탈피해 국제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지위에 오르는데 성공한다.
이후 독일은 전 외무장관 파울 폰 힌체를 중심으로 소련, 중국 국민당과 3각 동맹을 체결하여 국제적 고립을 탈피하려는 시도를 하였으나 국민당의 영수 쑨원의 지위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1922년 6월 천중밍의 영풍함 사건으로 쑨원의 2차 광동정부가 붕괴되고 1922년 9월,독일이 쑨원, 소련과 3각 동맹을 체결하려 시도했다는 문서가 공개되자 독일은 쑨원과의 모든 관계를 부정하면서 독중소 3각 동맹은 백지화되었다.
여담으로 라팔로 조약이 체결되기 직전 낌새를 맡은 영국이 다급하게 바이마르 공화국의 외무장관 라테나우에게 회담을 제의했는데, 이 때 라테나우가 장고를 거듭하다가 라팔로 조약의 체결을 강행하면서 되뇌인 말은 지금도 외교가에서 아주 유명하다. '''"Le vin est tiré. Il faut le boire.(포도주 병을 땄으면 잔에 따르는 수 밖에.)"'''[6] 정작 라테나우 본인은 독일 내 극우파의 반발로 얼마못가 암살당한다.
[1] 제노바 근처에 있다.[2] 게다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통해 독일이 러시아에게서 뜯어낸 영토는 독일의 패배 이후 온전히 반환된 것이 아니라 일부 영토가 폴란드 제2공화국을 비롯한 중부 유럽의 신생 국가들에게 돌아갔기 때문에 소련 역시 베르사유 체제에 대한 불만이 강했다.[3] 다만 군부의 찬성이 정부의 외교정책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는지를 놓고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엇갈리는 편이다. 현재의 정설은 '영향이 있기는 했지만 그리 크지는 않았다' 정도.[4] 여담이지만 라팔로 조약을 통해 독일과 소련은 양측의 젊은 장교들을 교환학생 형식으로 파견했었는데 그 리스트가 흠좀무하다. 에리히 폰 만슈타인, 게오르기 주코프, 발터 모델 등 독소전쟁 시기 굵직굵직한 활약을 한 각국의 장성들이 대거 포진되어 있다.[5] 독일의 경우 요제프 비르트, 소련의 경우 블라디미르 레닌.[6] 라테나우 본인이 만든 격언은 아니고 프랑스의 유명한 속담이다. 동아시아권으로 치면 기호지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