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공군(나치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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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프트바페
Luftwaf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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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2.1. 제1차 세계 대전 독일 제국 육군항공대
2.2. 전간기의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2.3. 제2차 세계 대전 독일 공군
2.3.1. 편제
2.3.2. 운용
2.3.3. 조종사
2.3.4. 보유 항공기 목록
2.3.5. 지상전
3. 출신 인물


1. 개요


나치 독일, 독일 국방군공군이다. '''역사상 가장 많은 항공기를 격추시킨 군대'''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3,400,000명
병력
119,871기
항공기

2. 역사



2.1. 제1차 세계 대전 독일 제국 육군항공대


1차 대전 당시에는 공군이 실험 단계였기 때문에 당시의 일반적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독일 제국도 독립된 공군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에는 독일 제국 공군은 없었고, 독일 제국 육군 항공대(Luftstreitkräfte, 루프트슈트라이트크레프테)가 공군의 임무를 수행했다. 해군 역시 독자적인 항공대를 보유했었으나 육군 항공대에 비해 규모에서 열세였고, 후에 공군의 주축이 된 건 육군 항공대였다.[1] 물론 공군 창설 시 해군 출신들도 여럿 들어오긴 했으나 수는 적은 편이었다. 독일 제국 해군 항공대는 전투기나 폭격기 대신 체펠린 비행선을 보다 많이 운용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뵐케의 금언을 만든 최초의 에이스 오스발트 뵐케, 1차대전 톱 에이스 붉은 남작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 그의 동생인 로타 폰 리히트호펜, 1:7의 전설 베르너 포스, 몰핀 중독이 아니던 헤르만 괴링[2] 등 공중전 역사 초창기부터 체계적으로 훈련된 군사조직이었다.

2.2. 전간기의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독일군은 약화되었고, 공군은 특히 심각해서 공중 전력 보유가 금지되고 육군 항공대와 해군 항공대는 아예 해체되었다. 그러나 전후의 회복을 위해서 비행클럽 등을 조직하여 조종사의 자질을 가진 청소년 층을 키워놓았던 독일군은 이후 재무장 기간에 급격히 세를 불릴 수 있었다.(다만 개전 직전애 새로 창설할 때는 군 경험이 있는 인원이 부족해 육군과 해군에서 인력을 일부 끌어왔다. 공수부대 장군으로 유명한 헤르만 람케가 해군 출신인 것이 대표적이다.) 또한 스페인 내전에서 실전 경험을 쌓아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초반에 제공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2.3. 제2차 세계 대전 독일 공군


'''세계 1위(격추수 352기) 에리히 하르트만''', '''세계 2위(격추수 301기) 게르하르트 바르크호른''', '''세계 3위(격추수 275기) 귄터 랄''' 등 '''전 세계 격추수 100여기 이상 명단 = 독일군 격추수 순위 명단'''이다. 공군 에이스 목록을 보면 '''공인 100기 이상 격추 명단에는 전부 독일군 밖에 없다.''' 숫자는 대략 100여명에 이르며 그 아래로도 거의 50대 격추 기록까지는 '''대부분 독일 공군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현대의 전술기들은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와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격이 비싸지고 대수도 적어졌으며 대규모 분쟁도 없으니 깨질 가망이 없다.[3]
겨울전쟁계속전쟁 당시의 핀란드에이노 일마리 유틸라이넨이 소련(러시아)과 나치 독일 94기 격추를 기록하여 비독일군 중 최고 기록이라는 각주를 달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의 독일 공군이 이런 대기록이 가능했던 것은 1920년대부터 공군을 양성하기 위해 노력을 한 것과 더불어 이오시프 스탈린대숙청으로 처형되거나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되거나 좌천으로 인한 군부 인력 쇠퇴와 함께 '독일군에 비해 질적으로 떨어지는 대규모 병력의 독소전쟁 초기 소련 공군'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독일 공군 에이스들은 소련 공군을 학살하던 42년 중반까지 100대를 넘었지만 대부분 200대에 근접하거나 넘은 기록들은 전부 경험이 쌓여서 만만찮은 전력으로 소련 공군이 성장한 43년 이후에 이루어 진 것과 전쟁이 끝날때 까지 공중전에서는 독일 공군이 소련 공군에 결코 밀리지 않았던 것을 고려하면 소련 공군을 초기에 대규모로 양학 하면서 독일 공군이 얼마나 베테랑 집단으로 성장했는지 알 수 있다. 또한 독일 공군은 그 적은 병력으로 동서부 전선을 모두 틀어 막았으며 44년 10월 까진 특히 사실상 보충 인력을 지원받지 못하고 있던 독일 공군 조종사들이 그럭저럭 독일 본토 항공전에서 연합군을 상대로 수만기를 격추시키며 활약했던 것을 고려하면 독일 공군의 기록이 단순히 소련 공군의 도움으로 이루어 졌다고 폄하할 순 없다. 핀란드 에이노 일마리 유틸라이넨보다 더 짧은 기간 동안 개개인이 엄청난 수의 무능한 소련공군을 잡았다는 것을 고려하면 그 만큼 독일 공군의 조종사 양성 프로그램이 효과적이었다는 것과 Bf109가 얼마나 무서운 살인기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초기 독일 공군이 아주 순탄치만은 않았다. 제2차 세계 대전 때의 루프트바페는 수장인 헤르만 괴링 장군을 포함한 구성원 상당수가 구 제국 육군 항공대 출신들이었는데 포병 출신인 알베르트 케셀링 장군 등 비 항공병과에서 전군한 이들이 유달리 많아 공군의 역할이 지상군의 지원에만 집중하는 전술공군으로 고착화되어버렸다.[4] 이는 전선에서는 독일 육군에게 든든한 지원군으로 작용했지만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독일 공군이 혼란에 빠지게 되어 신나는 뇌조 사냥을 당하게 되는 악재로 거듭나게 되고 중후반기 동부 전선에서도 전술 폭격을 제외하고는 오히려 소련 공군에 비해서 폭격 성과가 밀리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게다가 괴링은 특유의 권력욕으로 수송기를 사용하는 공수부대를 넘어서[5] 공군기갑사단, 공군 야전사단 같은 지상군 부대를 대규모로 만드는, 병력을 낭비하는 일도 했다. 물론 공군 기갑사단은 굉장히 잘 싸워서 육군의 불만을 피할 수 있었지만 공군 야전사단은 그렇지 못해 육군에게 소련군에게 최신 무기를 배달하는 셔틀이라고 비아냥만 들었다. 해군 출신은 그 수가 적은 편으로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13대의 격추 기록을 보유한 해군 항공대의 격추 기록 4위인 에이스 출신의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센(Friedrich Christiansen, 1879~1972) 장군[6], 해군 육전대 출신인 헤르만 람케 장군 정도가 유명하다.
전쟁 후반에는 특히 훌륭한 전투기 조종사 양성프로그램을 통해 조종사를 양성하고 하루에만 1000소티의 폭격기와 700소티의 호위기를 이륙시켰던 미군과 영국 본토 항공전을 거치며 성장한 영국 공군의 조종사는 압도적이었다. 동부전선에서는 소련 공군은 질적으로 떨어지기는 하나 수는 많았고, 42년 후반부터는 소련군 비행기의 성능과 조종사들의 숙련도 역시 이전 처럼 일방적으로 학살당하지 않고 충분히 맞서 싸울수 있는 정도로 성장했다. 독일 공군의 조종사 양성 프로그램은 39년 개전 이래로 쭈욱 인력난에 시달렸다. 태평양 전쟁기 미 해병 항공대가 엄청난 수의 전투기 조종사들을 생산해 낸 것을 보면 전투기 조종사 양성이 쉬워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공중전에서 제대로 싸울 수 있을 정도의 전투기 조종사를 양성해 내려면 상당히 많은 시간의 훈련이 요구된다. 하지만 계속된 공중전에 전사한 조종사들을 대체할 조종사들을 양성하는 속도는 느렸고 43년 후반 부터는 대충 어느정도 비행기를 날 줄 아는 히틀러 청년단원들을 선발하여 땜빵 질을 하였으나 통할 리가 없었고 이들은 공중전이 벌어지면 제일 먼저 격추되어 버리고 숙련된 고참 조종사들은 이러한 악조건에서 악전고투를 벌이면서 조금씩 소멸할 수 밖에 없었다.
전 세계 공군 역사상 전무후무할 전설적인 슈퍼 에이스 부대인 JV-44가 있었다.

2.3.1. 편제


'''대전 전간기, Bf109 기준'''
1. 로테(Rotte, -n) - 2대
: 선제공격을 담당하는 '장기(Leader. '선도기'라고도 부른다.)'와 장기의 엄호·장기가 놓친 적기의 추적 및 마무리를 담당하는 '요기(Wingman, Wingmate)'로 구성된다. 지금의 비행 분대와 같다. (타치 위브 문서 및 편대 문서 참조)
2. 슈밤(Schwarm, Schwärme) - 4대
: 2개의 로테로 구성, 지금의 비행 편대와 같다.
3. 슈타펠(Staffel, -n) - 12대
: 3개의 슈밤으로 구성, 연합군 전투비행대대(squadron)의 절반정도 규모를 가지고있다. 미군(25~28기),영국(20기) 대위가 지휘.
4. 그루페(Gruppe, -n) - 36대 ~ 50대
: 3~4개의 슈타펠로 구성되며 영국군 전투비행단(Wing 40~60기)에 비해 규모는 작거나 비슷하며 지휘하는 계급이 중령으로 비슷하다. 지휘관부족으로 대위나 소령이 지휘하는 경우는 매우 흔했다. 1개 그루페 산하의 슈타펠들은 같은 비행장과 기지를 사용한다. 기지에는 승무원, 정비병, 행정병, 헌병등 다양한 인력이 배치된다. 독일공군에서 전투비행대와 지원부대가 통합되어 독자적인 임무 수행이 가능한 가장 소규모 제대이다.
5. 게슈바더(Geschwader) - 100대 ~ 150대
: 항공단. 3~4개의 그루페로 구성된다. 미국의 전투비행단(Group 75~100기)에 대응한다. 기체수는 미군의 비행단이 많아야 약100대 정도이기 때문에 규모에서는 게슈바더가 많이 앞서나 지휘하는 계급이 비슷하다. 게슈바더 지휘부는 휘하의 그루페 기지 중 하나에 설치된다. 원래는 대령보직이지만 전쟁초반에는 지휘관부족으로 능력있는 대위가 맡은 경우도 있었으며 전쟁이 격화되면서 소령이나 중령이 지휘하는 경우가 가장 많았다. 게슈바더라는 용어 자체는 원래 해군 용어로 동종의 군함으로 편성되는 전대를 지칭했다 대게 루프트바페에는 여러 종류의 게슈바더가 존재했다. (슈투카게슈바더(Stukageschwader; 급강하 폭격기), 캄프게슈바더(Kampfgeschwader; 폭격기), 야크트게슈바더(Jagdgeschwader; 단발 전투기), 체어슈퇴러게슈바더(Zerstörergeschwader; 쌍발 전투기))
6. 플리거코어(Fliegerkorps) - 450대 ~ 500대
: 항공군단. 3개 이상의 게슈바더로 구성된다. 미국의 Fighter command 나 Bomber corps, 영국공군의 전술공군에 대응한다.
7. 루프트플로테(Luftflotte, -n) - 1000 ~ 1500대
: 항공군 내지는 항공함대. 가장 큰 단위로 2개 이상의 플리거코어로 구성된다. 보통 대장-상급대장이 항공군 사령관이다.

2.3.2. 운용


프랑스 침공 당시 지헬슈니트 작전에서 연합군은 전쟁이 장기전을 갈 것이라 생각하여 공군력의 일부만을 전선에 배치해두었지만 독일군은 공격 하나에 자신의 국가가 사라질지도 모르는 위기였고 만일 실패했다간 거의 모든 기갑 부대를 소모하고 역공격 기회를 주었을 것이므로 '''가용 공군력의 대부분을 배치했기 때문'''이다. 이는 연합군 공군에게 마치 독일군이 압도적인 공군력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착시현상을 느끼도록 할 수 있었다. 독일 공군은 전 공군력의 2/3인 2,589대를 투입한 반면, 프랑스군은 1/3 수준인 879대만 투입했다. 본트 밖에 전개된 기체를 제외해도 나머지 1,528대의 전투기와 690대의 폭격기는 후방에 배치되어 있었다.[7]
여기에 스페인 내전에서 얻었던 경험들도 한 몫했다. 스페인 내전 당시 소련, 독일, 이탈리아를 제외한 강대국들은 의용군을 조금 보내거나 소련의 해양 수송을 조금 눈감아주는 등의 지원밖에 하지 않았지만 독일과 이탈리아는 달랐다. 이들은 그야말로 전폭적인 지원을 하여 스페인 내전을 신기술과 전술의 시험장으로 만들어버렸고 독일의 콘돌 군단이 내전종료 후 귀국할 때 들고온 엄청난 양의 실전 데이터는 독일 공군에게 전술 교정의 기회를 주어 양/질적 수준에서 열세라도 전술의 우세함으로 이길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게 해준 것이다. 모든 전투기에 무전기를 설치하여 편대간의 대화를 원할히 하는 것이 매우 효율적인 공중전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줬다. 똑같은 훈련 시간을 가진 공중전을 한번 경험한 전투기 조종사와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전투기 조종사간의 실제 실력차가 엄청나다는 것을 보면 분명 스페인 내전에서의 경험들이 독일 공군의 조종사들을 매우 강화시켜줬다는 것은 절대 부정 할 수 없다. 반면 소련은 내전 당시부터 공화파의 금고 보유량을 비롯한 받을건 다 받아 갔으면서도 막상 지원은 생색내며 도와줬으며, 그나마 얻은 T26 편대를 비롯한 전차전이나 항공전 경험은 단점을 교정하기보다는 잘한 점만을 부풀려 전력을 강화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날렸다. 물론 이후 이오시프 스탈린의 대숙청도 한 몫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공군 조종사의 훈련 시간은 점점 짧아졌는데 미군 육군 항공대 조종사는 적절한 경험을 쌓은 에이스들이 배출되면서 조종사 훈련이 잘 이루어졌다. 대전 후반이 될수록 연합군의 물량 공세(물량이라고 하지만 에이스들을 제외한 일반 파일럿, 특히 신참 조종사의 평균 실력은 미군 조종사가 압도하는 상황이 되어갔다. 질적으로도 우수해졌는데 양까지 압도하는 상황이니 버틸 수가 없다.)에 100기 격추수가 넘는 넘는 슈퍼 에이스들은 점차 전사하고 신참 조종사만이 남아서, 상대하는 미국 육군 항공대에선 1일 에이스도 여럿 나올 정도로 굴욕을 당해야 했다. 2년 전만 해도 유럽 동부 전선에서 처참한 수준의 소련군을 상대로 학살을 하며 1일 에이스를 양산하던 독일 공군의 몰락이라 참으로 비참한 지경, 아르덴 대공세 당시 프랑스 침공 때와 마찬가지로 가용 공군력을 투자한 보텐플라테 공세를 감행했다가 괴멸당했고 이후 로켓 전투기 Me163 코메트, 제트 전투기 Me262 등을 비롯한 신무기에 목을 맬 수밖에 없는 안습한 상황에 허덕이다 종전에 이르게 된다.
한편 공군의 지상 지원 임무라는 측면에서 여타 연합군에 비해 비교적 훌륭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슈투카로 대표되는 루프트바페의 지상 지원 임무는 전투 곳곳에서 엄청난 충격을 주며 독일 육군의 기갑 부대가 진격하기 용이하게 해주었다.
흥미로운 점은 그 당시 참전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슈투카의 물리적인 피해는 예상외로 적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물리적인 피해가 크지 않음에도 엄청난 전과를 세우는데에는 심리적인 효과가 컸다. 슈투카는 낙하시 특유의 굉음을 냈는데 이 소리만 들어도 보병 부대가 전의를 상실했다고 한다. 전쟁 초중반에는 이 점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공압 사이렌[8]을 일부러 달아서 더더욱 악랄하게 연합군을 괴롭혔다. 그러나 대전 후반기에 가선 연합군이 사이렌 소리에 익숙해져 되려 셀프 공습경보로 전락해버렸다.

2.3.3. 조종사


전쟁 중반기인 1942년 여름부터 독일 공군은 지중해 방면, 영국 방면, 소련방면의 제공권을 지켜내야 한다는 어마무시한 임무를 수행하면서 차차 과부하가 걸리기 시작했다. 특히 서부전선을 보면 독일 공군 파일럿들은 그야말로 혹사당했고 연합군보다 1인당 평균 출격 횟수가 무려 5배에서 10배까지 많았다. 서부 전선이 이정도이니 정말 격렬했던 동부전선의 독일 공군의 출격량이 얼마나 살인적이었을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100기 이상 격추 수를 기록한 에이스 조종사가 많다고 하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독일 공군이 얼마나 몰려있었는지 보여주는 자료기도 하다. 다 대 다 식의 세력구도에서 그랬다면 괜찮다. 그러나 독일 공군은 압도적으로 수가 밀리고 있던 상황이었다.[9][10] 이를 해소하기 위해선 계속해서 잘 훈련받은 공군 조종사들을 양성해야 했는데 공군 조종사들을 절때 뚝딱 만들어지는게 아니다. 독일의 조종사 양성 프로그램은 공군 자원병과 징병 인원 그리고 신체 조건을 충족하는 히틀러 소년단원들에게 공군 학교에서 조종사 교육을 받게 하는 시스템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전쟁 중반부터는 엄청난 출격량에 독일 공군의 꾸준한 출혈은 계속되었고 양성된 조종사 숫자보다 잃은 조종사 숫자가 더 많아지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독일 본토 항공전이 벌어지고 소련공군도 만만치 않아진 1943년 후반부터는 비행기 조종 교육을 받고 있는 히틀러 소년단원들을 정확하게 말하면 전투기를 띄울 줄 만 알면 바로 차출해서 전선에 투입하였다.
물론 독일 공군도 연합군 비슷하게 일정 이상의 기간동안 싸운 파일럿은 뒤로 돌릴려고 했었고 상황이 악화될 때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연합군 항공기는 훨씬 많았고 독일군은 가용자원에 비해 훨씬 큰 전투 영역과 물량, 질을 가진 상대와 싸워야 했으며 가면 갈수록 공격의 주도권을 넘겨줘버려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리는 상황에 처함으로서 혹사에 가까운 출격으로 가까스로 패망을 늦추는 것 밖에는 할 수 없었으며 가혹한 전장은 신참 파일럿들이 살아서 귀환하거나 휴가나 재배치를 받을 수 있을 정도의 기간 동안 싸우기에는 너무나 힘든 곳이었다. 특히 전쟁후반 비행기만 띄울줄 안다고 바로 전선에 투입된 소년단원들은 공중전에서는 그저 연합군과 소련군의 먹잇감이 되었고 경험이 있는 파일럿들은 결국 아무 지원도 못 받는 상태에서 전투를 치루어야 하는 실정이 되어버렸고 전쟁 말기 아르덴 숲 공세를 끝으로 서부 전선의 독일 공군은 사실상 소멸해 버렸고 동부전선 조종사들은 최후의 순간까지 독일을 기지로 저항하다 전부 연합군에 투항하였다.

2.3.4. 보유 항공기 목록




2.3.5. 지상전


루프트바페는 전쟁 기간동안 공수부대(팔시름예거)를 휘하에 두었고 크레타 섬 전투에서 지나치게 많은 공수부대원들을 잃어 공수 작전이 완전히 금지된 뒤에는 공수부대는 루프트바페 치하의 육군이 되었다.
그리고 헤르만 괴링의 욕심으로 공군 내에 '''기갑 사단'''뿐 아니라 일종의 보병 사단인 공군 야전사단도 두었다. (더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조.)

3. 출신 인물



[1]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의 국가인민군 공군(Luftstreitkräfte der nationalen Volksarmee)과 오스트리아 육군 항공대(Österreichische Luftstreitkräfte)의 명칭도 원어로는 루프트슈트라이트크레프테(Luftstreitkräfte)다. 다만 편제상의 차이(국가인민군 공군은 독립 공군)와 번역 문제 때문에 한국어로 옮기면서 명칭이 달라졌다.[2] 맥주홀 폭동 당시 도주 중 진통제로 쓴 모르핀에 중독되었다. 이후 휘하의 귄터 뤼초가 "각하는 강력한 루프트바페를 창설한 이후 낮잠만 주무셨습니다."라고 했다.[3] 당시에는 레이더도 야간 중전투기에나 겨우 달리고 제트엔진도 대전 후기에 와서야 등장했고 각종 항공전자장비도 없거나 매우 빈약하다 보니까 비행기의 가격이 현대에 비해 매우 저렴했다. 우편도 대부분 비행기편으로 할 정도였고 대공황이 오기 전까진 경비행기를 가지고 있는 가정도 훨씬 많았다. 이는 각국의 군대에서도 마찬가지. 물론 독일의 Ta 152나 일본의 M6A 세이란같은 최근 기준으로 환산해도 굉장히 비싼 예외 사례도 있었다.[4] 이것은 나치 정권이 군의 재무장을 급속도로 추진하면서 당장 급한 전투기와 급강하 폭격기에 우선 순위를 둔 것도 하나의 이유이다. 빠른 시간에 몸집을 불리다 보니 개발이 오래 걸리는 장거리 폭격기는 후 순위로 밀린 것이다. 거기에 열정적으로 4발 중폭격기(일명 우랄 폭격기) 사업을 추진하던 베버 장군이 사망하고 곧바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당장 급해 보이지 않던 전략폭격기 개발은 취소된다.[5] 항공기에서 낙하산을 타고 강하한다는 이유로 공수부대가 공군 소속인 국가들도 여럿 있었다. 전 세계에서 공수부대를 가장 대규모로 운영하는 소련/러시아도 초창기에는 공군 소속이었다.[6] 최종 계급은 공군 비행대장(General der Flieger), 해군에선 대령까지 진급 후 공군으로 전군했다.[7] 출처 전격전의 전설 p-96[8] 나팔 2개를 이어놓은 것처럼 생긴 사이렌인데 전방에서 들어오는 공기를 압축하여 후방으로 뿜을때 소리가 나도록 만든 사이렌이다.[9] 조종사가 매 출격시마다 적기를 5대씩 격추한다고 해도 최소 20번을 연속으로 격추해야 격추수 100기를 채울 수 있고 매 전투마다 5대씩 격추하는 에이스니 전투중 격추되는 확률을 20%로 봐도 격추수 100기를 채울때까지 생존율이 1x(0.8^20)x100 = 1.152921504%가 나온다.[10] 독일 공군이 행한 전투는 대부분 자군이 확보한 지역에서 벌어진 방어 전투였기 때문에 격추되어도 낙하산으로 탈출한 경우 다시 전투에 투입 가능한 반면에 연합군은 독일 영내를 지속적으로 공습했기에 낙하산으로 탈출해도 대부분 포로로 잡히는 차이가 있다. 물론 대부분 격추수는 독일 밖인 소련에서 그로기 상태인 붉은 공군을 대상으로 얻은거지만 격추된 독일기의 대부분은 영국 공군과 미국 육군 항공대의 전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