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도베쿠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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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프랑크어: ᚺᛚᛟᛞᛟᚹᛁᚷ (Hlōdowig, 흘로도위그)
라틴어: Chlodovechus I (클로도베쿠스 1세)
독일어: Chlodwig I (흘로트비히 1세)
프랑스어: Clovis I (클로비 1세)
네덜란드어: Clovis I (클로비스 1세)
1. 개요
생몰년도 466-511
프랑크 왕국의 초대 왕으로 메로베우스 왕조의 실질적인 창시자로 잘리어(Salian)[1] 프랑크족[2] 의 부족장. 전형적인 정복 군주이자 군인형 군주였다. 서로마 제국 멸망 직후의 혼란기를 잘 활용하여 여러 프랑크 부족들을 통합하고 서고트 왕국과 알레만족, 부르군트 왕국 등을 공격하여 영토를 확장했다. 또 다른 게르만 군주들과 달리 아리우스파 기독교가 아닌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로마 교황에게 카톨릭의 수호자라는 지위를 얻기도 했다.나는 프랑스라는 이름의 기원이 되는 프랑크 민족에 의해 프랑스의 왕으로 선택된 클로비스야말로 프랑스 역사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 샤를 드골, 클로비스의 세례 1500주년 기념식에서
서로마 멸망 직후 권력 공백기를 잘 이용하여 여러 군소 프랑크족들을 통합하여 안정된 왕국을 세운 것은 업적이나, 권력을 획득하고 다른 부족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잔혹하고 비열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고, 그 때문인지 동시대에 활약했던 고트족 지도자 테오도리크 대왕과 달리 대왕(Magnus)으로 불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훗날 테오도리크의 동고트 왕국보다 프랑크 왕국이 (비록 왕조가 교체되었지만) 더 오래 존속하면서 유럽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기에 오늘날 대중에게는 클로비스가 테오도리크보다 더 많이 알려져 있다.
2. 생애
프랑크족의 한 지파인 잘리어 프랑크족의 부족장 힐데리히 1세와 튀링겐의 왕녀 바신느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아버지를 따라 여러 전투에 참여했으며 481년 아버지가 죽자 부족장 자리를 이어받아 잘리어 프랑크족을 이끌게 된다. 481년 클로비스는 남하하여 갈리아 북부 지방을 정복하였다. 이어 486년 수아송 전투에서 로마의 갈리아 총독이었다가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독자적인 세력을 이루게 된 로마인 시아그리우스를 격파하고 솜 강에서 루아르 강에 이르는 영토를 획득한다.
이후 클로비스는 꾸준히 프랑크족 통합에 나서는데 그 과정에서 클로비스는 자신의 정치력을 여과없이 보여주게 된다. 친척이자 잘리어 프랑크의 다른 세력 지도자 지게베르트 부자를 살해했고 경쟁 상대였던 카라리크의 아들들을 보물로 매수해 카라리크를 살해하게 한 다음 카라리크의 아들들을 제거하고 카라리크의 신민들에게 자신은 카라리크의 죽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자신이 죽은 왕의 원수를 갚았다고 맹세했다. 또 캉브레족을 이끌던 라그나카르의 전사들을 금팔찌로 매수한 뒤 앞서와 비슷한 방식으로 라그나카르를 제거했다. 그러나 이 금팔찌는 사실 청동을 도금한 가짜였고 배반자들이 이에 대해 항의하자 주군을 배신한 자는 금팔찌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뻔뻔함을 보여준다. 그 외에도 온갖 방법을 동원해 차후 경쟁자가 될지 모를 친척들을 전부 제거해 놓고서는 "도와줄 친척도 없이 낯선 사람들 틈에 홀로 남았네. 외로워요ㅠㅠ"라고 한탄하며 남은 친척들이 있다면 만나고 싶다며 큰 잔치를 여는데, 사실 그의 본심은 '''혹시라도 못 죽인 친척이 남아 있는지 떠보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또한 수틀리는 사람이 있으면 도끼로 박살낸 것으로도 유명한데, 한번은 부하가 약탈물을 공평하게 배분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그 자리에선 알겠다고 해놓고, 다 잊은 척 행동하다 몇 달이 지난 뒤 그 부하의 칼을 점검하다가 더럽다며 땅에 떨어뜨리는데 부하가 주우려 고개를 숙이자 도끼를 꺼내 그 자리에서 참수한 적도 있다. 클로비스의 이런 행동은 당시가 서로마 제국 직후의 혼란기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만약 중세 이후 이런 행동을 했다면 교황에게 파문당하거나 연합한 적대 세력들에게 두들겨 맞았을 것이다.
클로비스의 아내는 열렬한 가톨릭 신자로 클로비스에게 예전부터 개종을 권했지만 거절하고 있었는데, 알레만족과 전쟁을 하는 도중 전멸의 위기에 놓였다가 기적적으로 승리를 거두게되는 일이 생긴다. 이것이 아내가 믿는 신의 가호라 믿은 클로비스는 랭스에서 부하 3000명과 함께 가톨릭 세례를 받아 개종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클로비스는 로마 교회와 갈리아 현지민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고 일부 가톨릭 주교들로부터 아우구스투스(로마 황제)의 칭호를 받게되는 일도 생기게 됐다. 다만 형식적으로는 동로마 제국에 복종하면서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집정관과 로마 특별 시민의 지위를 얻게된다.
세례 후에도 클로비스는 꾸준히 군사적 원정을 나서 자치를 요구하는 알레만족의 반란을 진압하거나 부르군트 왕국 일부를 공략해 프랑크 왕국의 우위를 인식시켰고 서고트 왕국의 군대를 푸아티에 부근의 부이예(Vouillé)에서 크게 격파하고 알라릭 2세를 살해하였다. 내친 김에 서고트 왕국 전체를 정복하려고 하였으나 동고트 왕국의 테오도리크 대왕의 제지로 인해 아키텐만 얻는 선에서 마무리짓게 된다.
클로비스는 511년 파리에서 죽었으며 프랑크 왕국은 살리카 법에 따라 아들들에게 4개로 분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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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경의 유럽. 클로비스가 한참 영토확장을 하던 시기였다.
3. 내치
클로비스는 군사적 업적뿐만 아니라 내치에서도 훌륭한 성과를 보였다. 프랑크 왕국의 파리로 천도하여 왕성을 옮겼고, 파리는 오늘날까지도 유럽의 중심지 역할을 이어가게 된다. 종교면에서 오를레앙 종교회의를 개최해 교회법을 제정했으며 국내에 가톨릭의 전교를 장려하고 주교들로부터 충성서약을 받아내는 업적을 쌓았다. 그 외에 성직자를 위시한 현지의 갈리아-로마계(Gallo-Roman) 엘리트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해 프랑크 왕국 내에 로마의 행정조직을 도입하여 프랑크 왕국의 기초를 마련하였으며 향후 근대까지 왕위계승에 관여하게 되는 살리카법도 이 시기에 편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