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 드골

 




'''샤를 드골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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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제18대 대통령
샤를 앙드레 조제프 마리 드골
Charles André Joseph Marie de Gaulle'''
'''출생'''
1890년 11월 22일
프랑스 제3공화국
'''사망'''
1970년 11월 9일 (79년 352일)
프랑스 그랑테스트 오른마트 주 콜롱베레되제글리즈
'''국적'''
[image] 프랑스
'''직업'''
정치인, 군인, 작가
'''정당'''
'''공화국민주동맹''']] (1968년-1970년)
'''최종 계급'''
육군 준장
'''약력'''
프랑스 알제리부 장관
프랑스 국방장관
'''자유 프랑스 대통령'''
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 주석
프랑스 제59대 총리
(1944년 - 1946년, 1958년 - 1959년)
'''프랑스 제18대 대통령'''
'''대통령
재임
'''
1959년 1월 8일 – 1969년 4월 28일
'''서명'''
[image]
[ 정보 더 보기 ]
<colbgcolor=#292c5b> '''학력'''
스타니슬라스 컬리지 프레파 과정 (학사) (-1908년)
생시르 육군사관학교 (M.A.) (1908-1912년)
'''신체'''
'''196cm'''[47]
'''종교'''
가톨릭
'''가족'''
父: 앙리 드골 (1848년-1932년)
母: 잔 마요 (1860년-1940년)
형제: 4남 1녀 중 3째
배우자: 이본 드골 (1900년-1979년)
슬하 1남 2녀
필리프 드골 (1921년생)
엘리자베트 드골 (1924년-2013년)
안 드골(1928년-1948년)

1. 개요
2. 생애
2.1. 성장기
2.2. 야전 군인 시절
2.4. 정계 복귀와 제5공화국 출범
2.4.1. 집권 1기
2.4.2. 집권 2기와 위기 그리고 사임
2.5. 사망
3. 평가
3.1. 긍정적인 평가
3.2. 부정적인 평가
3.3. 한국에서 평가
4. 일화
5. 어록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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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image]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런던 BBC 방송국에서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모습.'''
프랑스의 군인, 정치가, 문필가.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자유 프랑스의 지도자로서 저항 운동을 지휘했으며, 전후 프랑스 총리대통령을 역임했다.

2. 생애



2.1. 성장기


드골은 프랑스 북부 공업지대의 중심도시인 의 가톨릭계 고등학교 교사 앙리 드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드골의 출생지인 릴은 벨기에와 프랑스의 접경 도시로 다른 지역들과는 달리 벨기에-네덜란드개신교 문화의 세가 커 다소 금욕적이고 노동 중시적인 도시였다. 이 탓에 드골은 다수 프랑스인들과의 문화적 거리감이 있었지만, 1870년 보불전쟁의 패배의 굴욕을 되갚기 위해 군인의 길을 선택하는 등 강경 프랑스 민족주의자로 성장했다.

2.2. 야전 군인 시절


고등학교를 졸업한 드골은 1909년 생시르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1] 그러나, 자부심이 강한 성격과 큰 키 때문에 동기들에게 '꺽다리 황제', '아스파라거스' 등으로 불리며 놀림받았다. 이런 동기들 중에서 가장 친했던 이들이 훗날 자유 프랑스의 주요 지휘관이 되는 앙투안 베투아르(Antoine Béthouart)와 알퐁스 쥐앵(Alphonse Juin)이다.
1912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보병 소위로 임관한 드골은 훗날 제1차 세계대전의 영웅으로 부상하는 필리프 페탱 보병 대령의 지휘하의 아라스 제33보병연대에 배치된다. 이후 제1차 세계대전대위베르됭 전투에 참가했으나, 부상을 입고 32개월 동안 독일군의 포로로 잡혀 있었다. 이때 5번의 탈출을 시도했으나, 196cm의 장신[2] 탓에 변장할 옷을 구할 수 없는 등 잡다한 문제로 모두 실패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포로에 대한 대우는 신사적이어서, 잦은 탈출 시도에도 불구하고 독방형으로 끝났다.
또한 이때 제정 러시아 육군 장교로 참전했다가 포로로 잡힌 미하일 투하쳅스키와 친구가 되었다.[3] 또 다른 인물로는 조르주 카트루(Georges Catroux)가 있는데, 당시 육군 중령이던 카트루는 드골의 군사적 식견과 사상에 감명을 받았고, 훗날 자유 프랑스에 가담해 드골보다 상급자임에도 드골을 충실히 따랐다.
종전 직후 육군 원수가 된 페탱의 부관으로 복무했고, 후에는 사관학교와 육군대학의 교관을 맡았다. 그러나, 자부심이 강하다 못해 오만하다고도 평가받는 성격 탓에 근무고과가 나빠 10년 이상을 대위에 머물러 퇴역 위기에 몰렸었으나, 페탱의 천거로 소령으로 진급하게 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페탱과 드골의 관계는 우호적이였으나, 1938년 드골이 페탱의 원고를 무단 수정해 자신의 이름으로 저서를 발간한 일로 관계는 단절된다.
그럼에도 미운 정은 남아있는지 훗날 페탱이 나치의 괴뢰정부 비시 정부 수립의 주동자로서 재판을 받을 때 페탱에게 '''"한때 저의 상관이자 모범이었던 각하. 그런 각하는 어디로 사라지셨습니까?"'''라며 한탄하고, 구명운동을 벌여 사형이 아닌 무기징역으로 낮춰 페탱의 목숨을 구했다.
여하튼 이런 드골의 행동에 페탱 원수를 숭상하던 당시 프랑스 육군의 상층부에 미움을 사 대령 진급이 2번이나 누락되거나, 드골이 맡은 기갑부대인 507 부대를 당시 메츠 군관구 사령관인 앙리 지로 훈련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뛰어난 성적에도 불구하고 부대를 해체시켜 버리는 등 전방위 견제를 받게된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 드골은 전차를 집단운용하는 기갑사단 4개, 기계화보병으로 구성된 정찰여단 그리고 이들을 지원하는 포병근접항공지원의 원활화를 위해 통신/보급 능력을 갖춘 독자적 활동이 가능한 최대 10만 명 규모의 기동군을 최고사령부 직할 전략예비대로 활용해야 한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4] 그러나, 마지노 선을 맹신하던 군 보수파들은 물론 기동전에 대한 이해가 전무하다시피 한[5] 군 수뇌부에 의해 무시된다. 결국 기갑사단은 드골과 소수의 소장파 장교들의 발악에 가까운 노력으로 프랑스 침공 직전 간신히 창설된다.

2.3.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과 자유 프랑스 수반


[image]
1940년 5월 프랑스 침공이 시작되자 약식으로 준장으로 진급한 드골은 '''편성시작 단계'''의 제4기갑사단을 지휘해 분투했다. 대표적 활약상으로는 다음의 사례가 있다. 드골의 제4기갑사단은 종심 깊숙이 진격 하느라 측방이 위험해진 하인츠 구데리안 장군의 제19기갑군단의 후방으로 기동했고, 구데리안의 사령부에서 '''2km''' 앞까지 파고드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를 알아챈 19군단 군수참모 요한 폰 킬만스에크 육군대위의 대처[6]로 드골의 공세는 좌절된다. 훗날 독일 연방군의 육군 대장겸 NATO 중부유럽군 사령관이 된 킬만스에크 장군은 당시 드골의 공세를 "시간적, 공간적으로 완벽한 역습."이라 극찬했다.[7]
그러나, 이런 분투에도 불구하고 1940년 6월 프랑스 정부는 나치 독일에게 항복을 선언했다. 이에 드골은 불복하여 몇몇 동지들과 함께 영국으로 망명, 이후 에밀 뮈즐리에 제독 등이 합류하여 망명 정부 자유 프랑스를 조직했다.[8] 하지만 1940년 프랑스군 주력은 페탱이 이끄는 비시 정부에게 장악되었었고, 식민지 역시 다수가 비시 프랑스를 지지해 드골의 자유 프랑스는 실질적 영향력은 거의 없다시피했다. 오로지 윈스턴 처칠 총리가 이끄는 영국 정부만이 자유 프랑스를 지원했을 뿐이다. 게다가 1941년 처칠의 지원으로 드골이 주도한 다카르 상륙작전의 실패와 전황 악화로 인해 드골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졌고, 여기에 드골 특유의 오만한 성격 탓에 같은 연합국 지도자들인 처칠과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과 전쟁 내내 심각한 갈등을 겪었다.[9] 그나마 처칠과는 상호 존중 관계였지만, 루스벨트의 경우에는 1945년까지 드골을 프랑스 지도자로 인정하길 꺼리다 마지못해 드골을 워싱턴 D.C.에 초청하며 공식적으로 인정했다.[10]
1942년 카사블랑카 회담에서 루스벨트는 프랑스군의 영웅이자 프랑스령 북아프리카와 서아프리카의 민간, 군사분야 총사령관인 앙리 지로 장군을 드골과 동석시켜 지로를 자유 프랑스의 지도자로 옹립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런 미국측의 뻔한 드골 견제로 인한 반대 감정과 지로의 정치능력 부재로 인해 지로는 드골에게 밀려났다. 거기다 프랑스령 북서아프리카의 최고 선임자였던 해군 원수 프랑수아 다를랑 제독이 암살[11]되어 더 이상 자유 프랑스에 드골을 대체할 만한 인물은 없었고, 1943년 이후 북아프리카의 식민지들이 차례로 드골의 자유 프랑스 지지로 선회하면서 드골의 입지는 확고해져갔다. 그리고 1943년 6월 드골은 프랑스령 알제리의 수도 알제에서 프랑스 국가자유위원회(CFLN)를 출범시켜 자유 프랑스를 연합국의 일원으로 공식적으로 편입시켰다.
[image]
파리를 행진하는 [12] 드골과 조르주 비도[좌측], 필리프 르클레르[우측]

'''"파리는 상처 받았습니다. 파리는 파괴되었습니다. 파리는 고문받았습니다. 그러나 파리는 해방되었습니다."'''

-파리 해방 후의 연설에서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하고 파리 해방이 목전으로 다가오자 전후 프랑스 주도권을 위해 미군, 비 드골계 우익 레지스탕스, 공산당과 파리 해방을 놓고 경쟁을 벌였다. 결국 드골의 자유 프랑스 육군 2개 사단이 파리 내의 레지스탕스와 시민들의 협조를 받아 파리를 해방시키고, 드골과 자유 프랑스군이 수십만 파리 시민의 열렬한 환호 속에 개선 행진을 하며 '''해방자 드골'''의 신화가 만들어진다. 당시 파리 해방에 대한 표현 중 하나가 이를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제 드골은 프랑스 전체를 손에 쥐었다."''' 이때부터 비로소 프랑스의 통치자로 다른 연합국에게 인정받고 평생 그의 정치적 자산이 된다. 이 과정을 그린 영화가 1966년 르네 클레망이 감독한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13]
이렇게 써놓으면 다된 밥에 숟가락 올리려고 달려든 병림픽처럼 보일 수 있으나, 실제로는 그보다는 좀 더 깊은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 미국은 원래 자유 프랑스를 제대로 된 강대국으로 보지 않아서 얄타 회담을 비롯한 전후 세계질서 재편을 위한 중요 회담에서 결국 프랑스를 제외했다. 그러나 이 사건 덕분에 마지막에는 프랑스 정국을 장악한 드골을 인정하고 프랑스를 연합국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으니 프랑스 전체를 위해서도 자유 프랑스가 파리를 선점한 것은 득이 된 셈이다.
1945년 11월 헌법제정의회에 의해 내각 수반으로 임명된 드골은 대(對)독일 저항운동의 주역이었던 프랑스 공산당(PCF)을 내각에서 제외[14]시키고 우파만의 정부를 세웠으나, 국민 다수의 지지를 얻는 좌파와 중도파[15]를 권력에서 배제하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으며 1946년 6월 총선에서 드골의 정당인 대중공화운동이 원내 제1당에 등극하긴 했지만 개헌저지선조차 넘기지 못한 상태였고 결국 다시 치러진 1946년 11월 총선에서 공산당이 제 1당으로 올라서면서 그해 말 정계에서 은퇴를 선언한다.

2.4. 정계 복귀와 제5공화국 출범


[image]
1961년 존 F. 케네디와 그의 부인 재클린 케네디와의 정상회담에서. 당시 70을 넘은 나이에도 저 정도 덩치였다. 케네디의 키는 185cm.[16]

2.4.1. 집권 1기


1950년대 중반까지 전쟁 회고록 집필 등으로 소일하며 칩거하던 드골은 1956년 수에즈 전쟁에서의 패퇴. 1958년 알제리 전쟁과 이로 인한 군부 쿠데타위협으로 사회당 정권이 붕괴될 위기에 몰리자 "프랑스의 알제리"를 주장하며 우파와 중도파의 압도적 지지속에 제4공화정을 무너뜨리고 제5공화정을 수립, 프랑스의 대통령이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영국이 전후 대부분의 식민지를 독립시킨 것과는 달리 프랑스는 좌우파 가릴것 없이 식민지 유지에 강한 집착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남아에선 막대한 군사비를 쓰고도 1954년 베트남 디엔비엔푸 전투로 개털리면서 강제로 쫓겨났다. 아프리카 전체의 1/4인 광대한 프랑스 식민지 전역에서 독립요구가 분출했고, 특히 알제리는 알제리 민족 해방 전선의 독립전쟁, 일명 알제리 전쟁으로 엉망진창이었다.[17]
결국 현실과 타협해서 알제리 독립을 시사하는 중도파 내각에 반발해서 극우세력과 군부는 공공연히 쿠데타 위협을 가하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알제리 주둔군이 파리 공항에 공수부대를 투입하고 기갑부대를 동원 의회를 점령한다는 식의 구체적인 쿠데타 시나리오가 공공연히 거론될 정도였다. 2차대전의 피해와 베트남, 알제리 독립전쟁에 따른 막대한 군사비로 경제는 엉망진창이었고, 외환보유고는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결국 정부의 알제리 독립 세력과의 협상 시도에 분노한 프랑스 극우파들이 총궐기하여 알제리에서 대대적인 폭동을 일으키고 공수사단 등을 동원하여 코르시카 섬을 점령하고 남프랑스를 통해 파리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드골이 자신들의 편이라 생각하여 드골에게 권좌에 앉을 것을 촉구했다.
궁지에 몰린 제4공화국은 사실상 와해되었고 중도우파 플림맹 정부를 수립하여 드골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지만 드골은 거부하고 오히려 4공과의 협력 없이 독자적으로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육군 정복을 입고 한 지상파 TV연설 한 번으로 정권을 무너뜨리고 의회 해산과 헌법 개정, 그리고 임시정부 수반 자리를 쟁취했다. 이에 프랑스의 좌파들은 총궐기하여 드골은 박물관에나 들어가라고 반(反)드골 시위를 벌였지만 만약 드골의 집권이 저지된다면 프랑스 공산당이 정권을 장악할 것이란 예상을 한 프랑스 사회당이나 급진공화당을 비롯한 여타 제도권 좌파와 중도세력들은 동요하였다. 이들은 결국 '드골의 집권은 작은 불행이나 공산당의 집권은 큰 불행'이란 결론을 내리고 드골의 정권 장악을 용인하였다.
그리고 권력을 쟁취한 드골은 우파와 중도파의 기대를 무너뜨리고 알제리 독립을 승인, 긴 전쟁의 끝을 맺는다. 이외에도 집권 후 현실을 직시하고 식민지 독립을 승인했으며 1960년에 모든 아프리카 식민지가 독립하고 대신 프랑스연합이라는 국제기구를 결성했다. 이로 인해 격노한 군부와 정면으로 대치하였고, 1962년 8월 공군 중령 장마리 바스티앵티리(Jean-Marie Bastien-Thiry)의 드골 암살 시도 등 군부는 쿠데타와 드골 살해 음모를 벌였지만 샤를 드골은 이를 헤쳐나가며 정권을 강고히 한다. 프레더릭 포사이드의 소설과 영화로 유명한 《자칼의 날(The Day of the Jackal)》이 바로 알제리 독립 직후 군내 극우파 결사인 OAS(비밀군사조직. Organisation de l'armée secrète)와 드골 정권 간의 암투를 다룬 것이다.
1963년 단체 내 자국 대표단의 발언권 보호를 위하여 영국의 유럽 경제 공동체(EEC)가맹에 두 차례 거부권을 발동했으며, 독자적인 핵무장, 사실상 미국의 지휘 아래에 있는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에서의 탈퇴 등 '위대한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민족주의의 부흥을 위한 주체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 프랑스와 독일의 관계를 크게 개선하도록 노력했다. 이 유럽 민족주의의 부흥을 위해서 프랑스 혼자서는 한계가 있음을 드골도 알고 있었고, 프랑스와 협력할 만한 국가가 필요했다. 하지만 양차 대전의 동맹국이던 영국은 이 부분에선 명백히 프랑스와 거리를 두었고, 남은 국가는 서독 뿐이었다. 마침 서독 또한 프랑스와 협력해서 기존의 프로이센식 독자 노선이 아닌 서유럽 세계로의 완전한 편입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양국이 협력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63년에는 서독콘라트 아데나워 총리와 회담하여 프랑스와 독일의 오랜 갈등관계를 종식하고 경제와 외교분야에서 협력하는 '독일·프랑스 화해협력조약'을 맺었고 이는 뒷날 유럽연합(EU)로 발전되는 유럽 경제 공동체(EEC)의 창설로 연결되었다.
[image]
1961년 본에서 열린 서독의 아데나워 총리와의 정상회담. 유럽 연합의 시발점은 이 두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1964년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을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1965년에는 대선이 치뤄졌는데 당시 드골의 인기가 워낙 대단했기 때문에 좌파진영에선 반포기 상태였지만 이때 상대후보가 좌파의 단일화를 주장하며 2차 결선투표까지 진출했다. 비록 드골의 연임을 막지는 못했지만 나름 45% 정도로 득표하며 나름 의미있는 성적을 거두었는데, 그 상대가 바로 훗날 프랑스 사회당이 배출한 첫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이다.

2.4.2. 집권 2기와 위기 그리고 사임


1967년에는 당시 분리독립 문제로 내부 갈등이 심각하던 캐나다 퀘벡을 방문하여 공식 연설 중에 외교적 관례를 무시하고 "자유 퀘백 만세"를 외치면서 분리독립에 반대하는 캐나다인들을 격분시키기도 했다. 덕분에 영국 및 캐나다 정부는 스팀을 좀 받았다. 아이러니한 건 세계대전 도중 대다수의 퀘벡인은 드골이 아니라 비시 정부를 지원했다는 것이다.

1967년 몬트리올 국제박람회. 시청 광장 앞에 모인 군중에게 당시 프랑스 대통령 샤를 드 골은 발코니에 나서서 연설을 시작한다. 그리고 세인트로렌스 강을 내려오면서 맞이한 수많은 환호 군중을 보면서 그는 독일에게서 해방된 파리에 당당히 재입성했을 때를 상기했다며 짧은 연설을 이런 말로 마무리했다. 위의 영상 5분 55초부터 보면 된다.

몽레알 만세!(Vive Montréal !) 퀘벡 만세!(Vive le Québec !) (환호)

자유... 퀘벡 만세!(Vive le Québec... libre !) (길고 열광적인 환호)

프랑스계 캐나다 만세! 그리고 프랑스 만세!(Vive le Canada français ! Et vive la France !) (환호)

드골의 통치는 상당히 권위주의적이었으나, 유럽 국가답게 신 대통령제가 행해진 다른 국가들보다는 유연한 면도 많았다. 이는 언론 통제 정책만 봐도 알 수 있다. 신문, 잡지 등 활자 언론에 꽤 관대했으나[18] 방송은 친정부 논조로 철저하게 통제했다. 그래서 68운동 와중에는 공영방송국(당시 명칭은 ORTF)[19] 직원들이 편집의 독립성을 요구하며 대대적으로 파업을 벌이기도 했다. 신문과 다르게 방송은 당연히 정부의 목소리를 전달해야 한다는 당시 정부 관리들의 구태의연한 인식[20]과 함께 신문에 불신감을 가진 샤를 드골이 방송에 적극적으로 통제를 가했기 때문이다.
드골 시절에도 제5공화정의 대통령 권력집중은 유럽 현대 정치사에서 유례가 없는 것이었고 후일 한국의 10월 유신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21] 뢰벤슈타인은 이러한 드골의 통치를 38년간 계엄령을 유지한 장제스 치하의 대만, 한국의 이승만 정부, 박정희 정부처럼 대통령이 의회와 법원을 압도하는 '''신 대통령제'''로 분류하였다. 드골은 현재의 프랑스 대통령의 권한과 달리 지자체의 권한을 제한하는 여러차례의 국민투표를 통해서 사실상 독재적 권한을 행사했다. 드골의 정치방식은 강력한 경찰력과 정보기관에 의존하는 비민주적 독재는 아니지만 개인적인 인기에 의존하여 정국이 난관에 부딪칠때마다 국민투표를 통해 강력한 권력을 확인받는다는 점에서 정치학적으로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에 해당한다.
당시 브레튼우즈 체제의 해체를 시도하던 미국에 반대하면서 금본위제의 강화를 주장한 드골의 대외 금융정책은 미국과 주변국의 강력한 견제를 받았다. 결국 1971년 당시 미국 대통령인 리처드 닉슨이 달러의 금태환 정지를 선언하면서 1944년 이후 지속된 브레튼 우즈 체제가 붕괴되었다. 이것은 전후 케인스주의의 종말과 통화주의 체제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결국 1967년 총선에서 드골계 우파는 부진을 거두며 겨우 과반수를 확보하면서 싸늘해진 민심을 확인하였고 이어 1968년 프랑스의 경제성장률이 집권 이후 최저인 4.4%로 하락하면서 경기가 악화되었고, 드골 체제의 경직된 권위주의에 반발하는 전후세대와 이에 합세한 노동자들이 주도한 68운동(이른바 '5월 위기')이 발생한다. 이 당시 드골 정권이 직면했던 위기 자체는 '정권이 붕괴 직전이었다'라는 평가까지 받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전후세대 학생과 이에 합세한 노동자들의 시위는 대략 5월 초부터 시작되어 점차 격화되면서 5월 22일 무렵부터는 전국 각지에서 경찰과 전투라고 불릴 정도의 대규모 충돌이 산발적으로 일어났고, 그 결과 25일 무렵에 이르면 (영국의 언론인이자 역사가인 로널드 프레이저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부는 몇몇 주요 도시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다'''.
프랑스 남부의 주요 도시 리옹의 경우를 보더라도, 22일~25일 사이 격화된 시위대가 사실상 도시 전체를 장악한 상태에서 지방 경찰 병력 전부가 정부의 마지막 거점인 도청을 방어하기 위해 집결했을 정도였으며, 수도 파리에서도 시위대가 프랑스 경찰의 시위 진압 전문 기동대인 CRS와 충돌하면서 도시 곳곳을 점거할 정도였다. 결국 25일~27일 사이, 정부는 당시 총리였던 조르주 퐁피두를 내세워 시위대와의 협상을 시도하지만 이 역시 결렬되었고, 시위는 더욱 격화되면서 당시 내각회의에서는 시위대가 대통령궁이나 의회를 점거하는 상황까지 우려하게 되었을 정도.[22] 그리고 29일, 반 드골 구호를 외치는 시위대가 대통령궁 앞을 행진했을 때... 드골은 대통령궁을 비운 상태였다. 시위대는 이 상황을 '''드골이 도망쳤다!''' 고 받아들이고 승리감에 젖었다고 하나... 드골은 도망친 게 아니고, 당시 서독에 주둔해 있던 프랑스 육군 정예부대의 지지를 확인하기 위해 독일에 간 것이었다. 시위대의 정치적 오판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전시 군사 지도자 출신으로써 군대의 위력과 위험성을 잘 알수밖에 없는 드골 같은 인물이 심각한 위기 상황에서 군대에 대한 통제력 확보를 우선시해야 한다고 판단할 만큼 심각한 위기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정치적 위기를 맞고 총리직을 야당에게 내줄 위기에 처하지만 이 직후(6월 셋째주)에 치뤄진 총선에서는 예상과는 전혀 달리 드골파가 압승, 그것도 '''개헌선'''(394/485)을 넘어가는 초압승을 거두면서(득표율은 58.1%) 국면이 전환되었다. 이런 결과가 나온 이유를 따져보면, 당시 드골 정권을 붕괴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68운동 세력의 주축은 학생들이었고, 당연히 이들은 '''투표권이 없었다.'''
그리고 운동의 격화로 정권 붕괴는 둘째치더라도 정부의 국가 장악력 자체가 위험한 상황이 되자(즉, 프랑스 대혁명 이후 계속 일어났던 몇번의 혁명 혹은 파리 코뮌에 근접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보수파가 결집하였다. 즉, 기존의 드골 지지자뿐 아니라 운동의 급진성과 과격성에 위협을 느낀 보수파 및 중도파 전반, 그리고 일부 온건 진보세력까지 (68운동의 반대항인) 드골 지지로 집결한 것.
반면, 반 드골 노선의 운동세력에게는 선거에서 승리할만한 정치적 조직과 구심력이 없었다. 즉, 운동세력 자체는 거대했지만 이들을 대변할 정치조직이 없고, 이들을 대표할 후보자도 없었다. 이건 어떻게 해결할 방법도 없는 문제인 것이, '대의제 민주주의적 제도 자체가 일부 정치 기득권층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형태로 변질되었다고 여기고, 이에 대한 대책으로써 대중의 직접적 정치 참여를 요구하는 목소리'와 '기존의 경직된 정치 조직에 대한 반감으로 조직화되지 않은 대중의 정치적 참여를 요구하는 목소리' 자체가 운동의 중요한 원동력이었던 것. 즉, 선거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고 여긴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온 것이니 당연히 선거를 위한 정치적 조직이 갖춰질 리 없고, 어디에 속한 사람이라도 좋고, 아무데도 속하지 않은 사람도 좋으니 누구든지 다 오라고 사람을 모았으니 모인 사람들 전체를 아우를 조직이 없는 것 역시 당연하다는 것.
결국, 이러한 정치적 상황 덕분에 드골 정권은 총선에서 압승,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드골을 반대하는 대중운동이 정권 전복 위협 직전까지 격화되었을 정도로 드골의 통치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은 상황 자체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고, 그에 더해 5월 위기 자체가 (일단 극복에 성공했다고는 하지만)드골의 리더십에 입힌 타격 역시 상당했다. 결국 드골은 1969년 4월 '지방행정과 상원의회 개편을 위한 국민투표'에서 47%대 53%로 부결되자 4월 28일 대통령직을 사임했다[23].

2.5. 사망


이후 콜롱베의 사저에 칩거하다가 회고록을 출판한 직후인 1970년 11월 9일 급성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드골은 “내 장례식은 콜롱베에서 치르고, 가족과 마을 주민만이 참석하도록 해 달라. 정치인과 정부 관리는 오지 않았으면 한다.[24] 내 묘비에는 단지 내 이름과 출생 연도와 사망 연도만 기록하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에 따라 드골의 묘비엔 그의 생애처럼 명료하게 "샤를 드골 (1890~1970)"만 새겨졌다. 이 묘지는 자신보다 앞서 죽은 둘째 딸이 묻힌 장소였으며, 7년 후에 타계한 아내 이본 여사도 같은 장소에 묻혔다.

3. 평가



3.1. 긍정적인 평가


많은 프랑스인들은 2차 세계 대전 당시 그를 '나치의 압제에서 프랑스를 해방시킨 영웅'이자 전후 프랑스의 재건을 주도한 인물로 높이 평가하며, 그가 프랑스 제5공화국을 설립시키는 과정에서 나치 세력을 철저히 배제했다는 점에서 존경을 받는다. '''20세기 프랑스에서 가장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라는 데는 이의가 없는 듯. 현재 프랑스 해군은 최신예 항공모함에 그의 이름을 붙여서 샤를 드골급 항공모함으로 명명하고 파리 샤를 드골 국제공항은 현재 프랑스 최대 규모의 공항이자 유럽의 대표 관문으로 활약하고 있다.
드골이 정치적인 야심가였고 독선적인 기질의 소유자이긴 했으나 그가 최선을 다해 나치에 항전했던 애국자임은 분명하다. 물론 전후의 부역자 처리나 레지스탕스의 신격화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은 명백하다. 2차대전 당시 드골과 자유프랑스가 국내의 레지스탕스 운동을 지도했다는 건 명백한 허구이다. [25] 레지스탕스의 역할이 과장되었다는 것이 해외 역사학계의 주류이다. 레지스탕스 조직은 해방구를 꿈꾸던 좌익 공산주의 계열 조직과 기존 체제 복원에 주안점을 둔 우익 민족주의 계열 조직간에 끊임없이 반목하다 1943년 5월에야 겨우 통일된 체계(Conseil National de la Résistance, CNR)를 갖춘다. 그나마도 지도자 장 물랭이 6월에 체포, 처형되면서 활동이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레지스탕스들은 연합군이 프랑스 북부 및 남부에 상륙하고 독일군의 통제가 지리멸렬해지자 뛰쳐나왔다.[26]
아무튼 그가 1958년 집권하면서 탄생한 제5공화국 역시 기존 민주정에 비해 상당히 독재적인 성격이 강한 것은 분명하지만 제1세계로부터 이익을 취하면서 동시에 비동맹 노선을 확립한 그의 외교는 프랑스의 국익에 비추어 볼 때 매우 성공적이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전후 베트남과 알제리 등에서 무리한 식민주의 정책으로 몸살을 앓던 프랑스가 본격적으로 탈식민주의 노선으로 전환한 것도 드골 정권부터이다.
그리고 그가 권위주의적 독재자의 면모를 보인 것은 사실이지만 국민들의 인권을 탄압할 정도로 막 나가지는 않았다. 낙후되어 있던 사회보장제도가 정비된 것이 바로 드골 집권 시기이다. 그의 집권 동안 전 국민을 대상으로 투표권이 확대되었고, 1962년에는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대체복무를 인정했다.[27] 아울러 내각과 대통령의 권력 분점이 가능한 이원정부제를 채택하면서 국회를 단순히 거수기 역할로 만들지 않았다. 비례대표제를 폐지해 제 3, 4 공화국의 군소정당 난립을 끝내면서도 결선투표제로 양당제의 한계를 보완했다. 전체적으로 전시 재상의 성격이 강했던 윈스턴 처칠과 달리 드골은 전쟁 당시보다는 전후의 혼란기에 능력을 발휘했다는 면에서 정치인으로서는 더 뛰어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드골 시기는 '''30년의 영광(Les Trente Glorieuses)'''으로 대표되는 경제적 고도성장기였다. 전후 복구를 넘어 독일 못지 않은 경제적 기적을 이뤘던 시기라 지금도 드골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3.2. 부정적인 평가


프랑스 내에서 드골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에서는 그를 독재자로 평한다. 그에게는 권위적인 자세가 있어 미 대통령인 루즈벨트가 매우 경계했다. 그는 수세에 몰릴 때마다 재신임 투표[28]를 통해서 실질적인 독재를 펼쳤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자신이 주장하는 법안과 자신의 재신임을 결합시키면서 정책에 대한 비판을 피해간다는 것은 곧 민주주의의 대원칙을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재신임투표에 대한 반성으로 법학계에서는 대부분의 국민투표에서 대통령의 재신임을 결부시키는 것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다.[29] 대중이나 반목하는 정치 세력에게 결과뿐만 아니라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신뢰를 얻고 끊임없이 소통하는 것 자체가 민주 국가의 현대 정치인에 대한 필수 덕목인데 드골의 리더십은 이를 무시했다. 프랑스 역사에 없었던 것도 아닌데, 루이 나폴레옹이 독재정치를 펴고 황제가 된 기반이 바로 재신임 투표, 국민투표에 의한 포퓰리즘이었기 때문.
또한 식민지였던 아프리카의 나라에서는 악명 높은 신식민주의 체제인 프랑사프리크(Françafrique) 정책을 이 사람이 시작하여 정치, 경제, 외교를 옛 식민지 국가를 독립 후에도 예속시켰다는 비난을 받는다. 그중에서도 식민 지배를 당한 알제리에선 히틀러에 맞먹을 정도로 미움을 받는다. 드골이 4공화국을 무너뜨리고 현실을 직시해 알제리를 독립시키기는 했다. 드골은 '''에비앙 협약을 끌어내고 FLN과 프랑스 정부의 정치적 협약을 물리적으로 분쇄하려한 OAS의 쿠데타를 막아 알제리 독립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 드골도 2차대전 당시 드골이 미국과 영국 측에게 '알제리는 우리 프랑스의 영원한 영토이자 안방과 같은 곳'이라고 말했고, 현역 정치인역일 때 말로나마 대프랑스 식민주의적 관점을 유지하며 진짜 막판에가서 군 내 극우파를 숙청하기 전까진 오히려 이들과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그 역시 진정으로 알제리의 독립을 정말 바란 것은 아니었다. 알제리 여행을 하던 고려대학교 불어불문학과 김화영 교수가 현지인에게 프랑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그 사람이 김 교수에게 드골 이름을 듣더니 "그 새낀 알제리에선 히틀러요!"라며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김 교수가 높이 평가한 것도 아니고 단순히 과거 이야기를 하며 언급한 수준임에도 이랬던 반응을 보였던 걸 봐도 알제리에서 평가는 아주 극악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이처럼 2차대전 당시 드골은 '알제리는 프랑스 땅으로 다른 아프리카와 다르다'고 처칠에게 거듭 강조했던 인물이며 알제리 전쟁 당시 수백만 알제리인의 사망을 초래했으므로 알제리에선 히틀러급으로 증오를 받기도 했다. 레지스탕스영웅 장 물랭을 죽인 전직 나치친위대원인 클라우스 바르비의 변호를 담당했던 변호사 자크 베르제는 클라우스 바르비의 범행에 대해 "프랑스가 알제리한테 한 것처럼 한 것 뿐이다"라고 반박하기도 했다. 프랑스인들과 똑같은 잘못을 한것뿐인데 왜 프랑스인들처럼 당당하지 못하냐는 뜻이다.[30]
1960년 콩고 내전#s-2 때 촘베 장군의 쿠데타로 유엔군이 파견될 당시, 드골은 콩고 카탕가 반군 지역의 우라늄 광산 등을 노리고 용병 부대를 파견했다. 용병들은 대규모 부대를 조직해 반군 지역으로 쳐들어갔으며, 촘베 장군의 사주를 받고 각종 사보타쥬 및 광산 점령에 나섰다. 많은 민간인들이 죽거나 다쳤으며, 고전을 면치 못하던 유엔군의 위상을 떨어뜨려 국제 질서를 문란케 하였다.

3.3. 한국에서 평가


한국에선 친미 성향의 일부 밀덕후 사이에서 국가로서의 프랑스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널리 퍼져 있고, 이들은 대표적인 정치인이었던 드골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경향이 있다. 그런 정책 때문에 프랑스는 나토와 공산권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면서도[31] 양쪽으로부터 여러가지 이권은 있는 대로 다 챙기고 제3세계에도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대표적인 것이 무기 수출이다. 미국과 소련 양쪽 모두로부터 자유롭고자 했던 비동맹국가들에게 적당한 가격에 괜찮은 성능의 현대식 무기를 공급할 수 있는 나라는 프랑스뿐이었다. 미라지엑조세등. 그의 대외 정책은 현재 프랑스 대외정책의 기본이 되고 있으며, 훗날 드골과 상극인 좌파 사회당의 미테랑 정부도 드골의 대외정책 기조는 이어나갔다.
반면 중도우파 보수성향 가운데 친미 성향이 덜한, 보다 구체적으로는 한미동맹보다 자주국방을 더 선호하는 측에게는 일종의 롤모델로 평가받는다.
국내 좌익민족주의 계열에서는 사람들에겐 레지스탕스를 이끌었던 지도자였던 점과 전후 나치협력자 청산 관련한 부분에서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특히 그들은 친일파 청산 관련해서 프랑스의 예시를 들어 비교하며 아쉬워하기도 한다.[32]
그러나 이에 대해 독일이 프랑스 비시 정부를 해산하고 프랑스를 완전 지배한 기간은 반 년 정도에 지나지 않으며(비시 정부를 나치의 괴뢰로 간주해도 5년) 그 시기 내내 자유 프랑스가 연합군과 같이 독일에 대항해 전쟁중이었음을 무시했다는 비판이 있다. 프랑스는 나치 독일에 점령되었지만 그 동안 프랑스인들이 정부 내지 정부의 후신인 구심점을 잃은 적은 없다. 그러나 한국은 아예 국가가 사라졌고, 일제는 35년이나 한반도를 지배했으머 그동안 형성된 사회 질서 역시 나치 치하 프랑스의 그것보다는 강력했다. 친일 세력도 마찬가지이다. 프랑스가 그대로 나치 독일의 지배 하에 들어가 1980년까지 세월을 보냈다면 그들 역시 완전한 청산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프랑스는 비록 전쟁을 겪으면서 국토의 인프라가 파괴당했을지언정 프랑스 자체의 기술력이나 인재등은 나치 점령 이전부터 우수했기에, 나치부역자 몇명을 처벌한다고 해서 프랑스 입장에서는 크게 아쉬울것도 없다. 그에 비하여 한국은 기초 기술력이나 인재등의 대다수가 친일파들뿐이다. 이러한 친일파들을 대거 배제할 경우, 한 명의 기술자도 아쉬운 건국 초의 한국 입장에서는 아까운 인력을 버리는 셈이다. 그래서 친일청산에 아쉬움을 못 버리는 사람들중에서도 위의 의견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는 일부에서는 정말 악질 친일파만 프랑스 식으로 처벌하고 그 외에는 면죄부를 주자는 논리를 펼치기도 하지만 이런 식의 해법도 상당히 곤란하다고 봐야한다. 일단 악질적 친일파의 기준이 불명확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런 식의 어중간한 친일청산은 오히려 자신이 언제 청산당할지 모르는 두려움을 지니고 있는 친일파들로부터 고도의 협력을 받을리 만무하다. 또한 한국은 건국 초에 태생적으로 미군정의 영향을 벗어나기 힘들다는 환경을 고려하면 프랑스와 같은 친일청산을 한반도에서 일으키려고 할때 미국이 이를 좌시하지 않을것이 뻔하다. 왜냐하면 미국의 입장에서는 한국의 정치적 안정을 유지하는게 더 이익이기 때문이다.[33]그러므로 프랑스 스타일의 친일청산은 롤모델이 되기에는 부족하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34]
다른 나라처럼 한국의 좌익 민족주의 계열에서도 드골의 나치 청산이 프랑스의 시대착오적 민족주의 및 베트남이나 알제리에 대한 횡포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비판하기도 한다.
한편으로 우익 쪽에서도[35] 드골이 군인 출신 대통령이면서 강한 민족주의 성향, 그리고 서유럽에서 드물게 강력한 대통령제의 전형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평가가 좋았다.

4. 일화


드골은 키가 매우 커서 '''196cm'''나 되었으며[36] 덕분에 루저의 난 당시 연합군 승리에 결정적 공헌[37][38]을 한 지도자라는 농담이 나돈 적이 있다. 2차 대전 갤러리 "핼구"의 작품 여기에 더해서 윈스턴 처칠에게 가려서 알려지지 않았을 뿐 하루 두 갑을 태우는 애연가였다고 한다. 다만 1950년에 금연을 선언했는데 금단 증상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엄청나게 신경질을 내고 다녔다고...
'프랑스인 치고는' 지독할 정도로 시간 관념에 철저해서 식사 시간이 30분을 넘기지 않았다고 한다. 가족들조차도 원칙과 권위를 내세우는 인물로 집에서도 침실 밖에서는 계절에 관계없이 정장을 입었으며 식사 시간에는 정치 등의 공적인 이야기를 금지했다고 한다. 술은 잘 못했지만 식욕은 왕성해서 대식가였다고 하는데, 그래서 노년에 당뇨로 식단 조절을 할때 왕성한 식욕을 조절 못하는 게 가장 힘들었다고 한다.
결국 자유의 투사와 독재자라는 평가를 동시에 받고 있는 이 사람의 일생을 관통할 수 있는 말은 독단성일 것이다. 이러한 그의 성향이 주위에 많은 반감을 샀지만 프랑스의 독자적 정부수립과 독자적인 대외노선을 관철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었음은 분명하고, 가끔은 이러한 독단성이 하나의 인간적인 매력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처칠은 그의 영국에 대한 불신과 독단성에 대해 넌더리를 내며 그를 혐오했지만 동시에 그 독단성에서 나오는 그의 비타협적인 태도와 대담함에 경의를 가지고 있었고, 그를 지지했다.[39] 이렇게 보면 그냥 정치인의 수사 아닌가 하지만, 2차대전 당시에 둘은 엄청나게 사이가 나빠서 만나기만 하면 프랑스어나 영어로 고성에 막말을 하며 개와 고양이처럼 싸웠고, 처칠의 경호원들은 처칠이 드골의 총에 맞아 죽는 게 아닌가 걱정할 지경이었다.
이러한 둘의 대립은 전후 프랑스의 권력구도에서 드골을 떼어내기 위해 루즈벨트가 처칠에게 압력을 가하면서 점점 심각해진다. 드골에 대해 혐오를 느끼던 처칠은 드골과의 관계를 정리하려고 했지만 영국 내각에서는 프랑스 식민지에서 영향력을 갖추어가던 드골을 버릴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그 둘의 성격도 보통이 아니었으니.[40]
자칫 잘못하면 연합군을 파멸로 몰고 갈 수도 있었던 삼각관계는 드골의 승리로 끝을 맺었지만 그도 당시의 고난을 잊지 못했는지 D-day 전날 처칠이 했던 말[41]을 두고두고 회고하곤 했다고 한다. 전후에도 처칠에 대해 이런 뒷담화를 까는 것과 동시에 고마움을 표시하고 그의 장례에도 그들이 함께했던 때처럼 군복 차림으로 마지막 길을 지켰던 걸 보면 드골에게 있어서 처칠은 말 그대로 애증의 대상이었던 듯하다.
다운 증후군 환자인 딸과 함께 찍은 사진
대체로 가족들도 상대하기 힘든 완고한 인물이었지만, 가족들에게 애정을 표현하는 편지를 굉장히 자주 보내곤 했으며 편지 속의 문장은 평소의 드골의 이미지와 다르게 따뜻하고 부드러운 분위기라고... 다운 증후군 환자로 태어난 둘째 딸을 평생 아끼고 사랑했으며 딸이 스스로를 비정상으로 여기지 않도록 주변 분위기를 만들어주기 위해 애썼다고 한다. 이 부분은 2017년 11월 26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뤄졌다.
아끼던 후배 장교가 병으로 일찍 죽었을 때 슬퍼하면서 6개월간 상복을 입고 다닌 것도 유명한 일화. 프랑스 정치인들은 19세기부터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사생활은 화려하기 이를데 없지만, 드골은 예외적으로 자기 와이프에 충실했으며, 매우 가정적인 남자였다. 사생아는 물론이거니와 그 흔한 애인 한명 두지 않았으니... 프랑스 정치인들의 사생활은 가히 화려한데 지스카르 데스탱부터 현 에마뉘엘 마크롱까지 모든 대통령들은 꼭 성 스캔들이 있었으며 드골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프랑수아 미테랑은 사생아까지 낳았으니. 과연 드골이 특이할 수 밖에 없다. 역대 프랑스 공화정의 지도자 중에서도 드골보다 사생활이 더 검소한 사람은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 정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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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중 아들(左)과 함께.
아들 필리프 드골 제독(1921 ~ )은 해군 장교로 입대해 2차대전 중엔 아버지를 따라 자유 프랑스 해군에서 복무했으며, 프랑스 해방 이후에도 복무하다가 해군 감찰감 (Inspecteur général de la marine) 보직을 마지막으로 해군 대장 계급으로 예편했다. 그후 정계에 진출하여 국회의원을 역임했다가 은퇴하였다. 현재(2017년)도 90을 넘긴 나이로 생존해 있다. 위 사진에 나온 사람. 역시 유전자는 속일 수 없는지 이 사람도 아버지와 같은 '''196cm'''의 장신이다.
사임 후 시골에서 부인과 함께 지내다가 갑자기 바닥에 쓰러지면서 엄청난 고통을 호소했는데 이 때가 드골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내에게 불평을 한 때였다고. 마지막으로 한 말도 (을 가리키며)'여기가 아프다'였다고 한다. 그 말을 한 후 의식을 잃고 몇 분 후에 숨졌다.
드골이 사망하자 영국의 극작가 노엘 카워드 경은 '드골이 하느님과 무슨 대화를 나눌 것 같냐'는 질문을 받았고, 그는 "그야 하느님의 프랑스어 실력에 달렸겠지요."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남아있다. 이는 드골의 고집에 대한 비아냥인데 영어를 못하는 건 아니지만 프랑스어를 쓰는 것을 고집했으므로, 조물주와의 면담에서도 그 고집을 부릴거라는 소리.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히틀러와 혼동되기도 한다. 물론 문제는 그 콧수염.
영 인디아나 존스에서 1차 대전 당시 포로 수용소에서 인디와 만나는 걸로 설정된다. 역시 몇번 탈출하다 잡히고 마지막 순간에 국경 지대에서 인디와 헤어져서 생포되는 것으로 처리했다. 극에서는 이렇게 끝나지만 원래 시놉시스에 따르면 인디는 흘러 흘러 베를린으로 가서 1차 대전의 주역을 만난다는 설정이었다.
히치콕 감독의 동일명 영화의 원작인 레온 유리스의 토파즈에서는 약간 치매끼가 있고 극도의 미국비판론자로서 결국 소련의 첩보조직에 자신도 모르게 휘둘리는 프랑스 대통령으로 묘사된다. 작중에서 미국 및 나토에게 악몽과 같던 프랑스의 나토 탈퇴도 이 첩보조직의 공작행위의 결과라고. 물론 이름은 다르지만 작중 묘사되는 북아프리카의 행각이나 알제리 사건 등에 대한 묘사, 결정적으로 '2차대전 당시 레지스탕스 출신', '반미 민족주의자 정치인'이란 표현을 보면 드골이 맞다.
굽시니스트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에서는 키를 더욱 과장해서 아예 얼굴이 나오지 않는 캐릭터로 나온다.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땡땡주의자이기도 하다. "나의 유일한 라이벌은 땡땡이다. 그는 거인에 맞서는 소인이라는 점에서 나와 같다."라는 연설을 대통령 취임식 때 대놓고 한 것으로 유명.
입냄새가 무척 심각해서 사람들과 가까이에서 대화하지 않고 멀찍이 떨어져서 대화하곤 했다고 한다.
2차대전 종전 후 제5공화정을 수립하기 전까지 정계에서 은퇴해서 칩거생활을 할 때,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었다. 전쟁통에 자택을 비롯한 부동산은 쑥대밭이 되었고 그 외의 재산도 마땅치 않은데다 수입이라곤 준장 계급의 연금 뿐이었기 때문. 그런데, 프랑스 의회에서 드골의 계급을 진급시키는 안건을 발의하자 정작 드골은 이에 대해 강하게 반대했다. 진급을 한다면 연급 또한 인상되어서 경제적으로 넉넉하겠지만, 전쟁도 끝났는데 이제 와서 진급한다는 건 자신의 품위를 해칠 수 있다는게 드골의 주장이었다. 그래서 드골의 공식 계급은 준장으로 고정되어 있다.
드골은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어머니와 영원히 이별해야 했다. 드골의 어머니인 잔 마리 드골은 전쟁이 발발했을 때 병으로 건강이 많이 나빠진 상태였다. 프랑스가 항복하고 영국으로 탈출하기로 결정했으나, 드골 혼자서도 망명하기 힘든 판에 환자인 어머니까지 모시고 가기엔 무리였다. 결국 드골은 망명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만난 뒤 혼자 영국으로 떠나야 했다. 드골의 어머니는 드골이 망명한 직후인 1940년 7월 16일에 사망했고, 드골은 임종은 커녕 어머니의 장례식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

5. 어록


'''제 정신을 잃고 우왕좌왕하는 국민들과 패배하고 흩어져 달아나는 군대를 목격하고, 더욱이 우리를 경멸하고 있는 적의 무례한 태도에 대해 전해듣고, 나는 끝없는 분노가 복받쳐 오른다. 아, 너무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이 전쟁은 처음부터 대단히 잘못 시작된 전쟁이다. 그러므로 전쟁은 계속되어야 한다. 이 세상에 희망이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나는 싸움이 필요한 곳을 보면 어디든 달려가 싸울 것이다. 싸움이 필요한 곳에서, 싸움이 필요한 만큼, 적이 패배할 때까지, 국가의 임무가 깨끗이 청산될때까지 나는 싸울 것이다. 그래서 나는 바로 그날,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다.'''

바로 그 날이란 파리가 함락당한 날을 의미한다고 한다.

La France a perdu une bataille, mais la France n'a pas perdu la guerre.

프랑스는 전투에서 졌습니다. 하지만 프랑스는 전쟁에서 지진 않았습니다.

- 샤를 드골 À tous les Français 1940년 8월 판의 인터뷰 중


à mon sens, la France ne peut être la France sans grandeur.

'''내 생각에, 위대하지 않은 프랑스는 프랑스가 아니다.'''

1954년 전쟁 비망록 1권에서.


'''나 드골 장군이오!''' - 1940년 6월 18일,

BBC방송을 통해 프랑스에 전파한 호소문의 문구. 드골이 누군지 모르던 프랑스인들에게 자유 프랑스의 존재와 결사항전에 대한 주장을 통해 자신을 처음으로 부각한 연설이다.

Je suis la France.

'''내가 곧 프랑스다.'''

- 1940년 11월, 영국의 외무 장관 앤서니 이든에게.

일견 보기엔 루이 14세를 떠올리게 하는 병맛같은 발언이지만, 그 당시 영국과 미국에서 비시 프랑스를 회유해보려는 시도에 대해 비난하고 프랑스의 정통성이 자신에게 있음을 강경하게 주장하는 발언이다. 이러한 상징성 때문에 현재 프랑스 정치인들의 선거유세용 단골 표어 중 하나라고. 유럽연합 결성 이후에는 "내가 곧 유럽이다"로 업그레이드 되었다. 물론 유럽의 중심, 아니 세계의 중심이 프랑스라고 생각하는 프랑스인들은 이런 표어를 기꺼워한다고.

Paris outragé ! Paris brisé ! Paris martyrisé ! mais Paris libéré !

파리는 상처입었습니다. 파리는 파괴되었습니다. 파리는 고문받았습니다. 하지만 파리는 해방되었습니다.

''1944년 파리 해방 직후 연설에서.''


'''Je vous ai compris!'''

'''나는 여러분들을 이해했습니다!'''

1958년, 알제리에서의 연설.

알제리 독립을 인정한 연설이라고 한국에선 잘못 알려져 있지만 이것은 드골의 초창기 지지자들이었던 알제리 거주 프랑스인들과 프랑스 극우파들을 위한 발언이다. 이들은 드골의 집권을 초창기에 매우 환영했는데 드골이 알제리를 사수할 강경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고 드골도 이런 발언을 하면서 이들의 뜻에 부합하나 했지만... 결국 알제리 독립의 길로 가버렸다. 드골 개인적으로는 알제리 독립에 매우 부정적이었다. 알제리에 프랑스의 자치령, 프랑스의 동등한 주, 독립 중에 선택할 수 있는 투표를 실시하며 "난 알제리인들이 독립이라는 파멸의 길로 가지 않으리라 확신한다"는 발언을 할 정도였다. 드골의 원래 구상은 알제리를 자치령으로 만드는 것이었는데... 그 동안 알제리에서 학살을 해놓고 알제리가 프랑스 밑에 잔류한다면 그게 웃긴 일이었다.

그 친구, 사격실력이 형편없구만.

여섯 번째 암살 시도 당시 여러 번의 총격을 가하고도 하나도 맞추지 못한 암살범을 두고 한 농담.


Vive la France ! La France accède au statut de grande puissance.

위대한 프랑스 만세! 오늘 아침 이후로 프랑스는 더욱 강력하고 자랑스런 국가가 되었다.

- 1960년 프랑스의 첫 핵실험 직후 성공 소식을 발표하며 던진 첫마디.

이 문장을 모티브로 한 유로트럭 DLC가 발매되었다. 항목 참조.

Vive Montréal ! Vive le Québec ! Vive le Québec libre ! Vive, vive, vive le Canada français ! Et vive la France !

몬트리올 만세! 퀘벡 만세! 자유 퀘벡 만세! 프랑스계 캐나다 만세! 프랑스 만세!

- 1962년 캐나다 퀘벡 몬트리올에서 연설 도중에 한 말.

당시 퀘벡 분리독립 문제가 한창이던 상황이라 그의 발언은 사실상의 내정간섭이였고, 대단한 물의를 일으켰다.

Es lebe Bonn! Es lebe Deutschland! Es lebe die deutsch-französische Freundschaft! Es lebe ein großes Volk!

만세! 독일 만세! 독불 친선관계 만세! 위대한 민족 만세!

- 1962년 서독 국빈 방문 중 자신들에게 환호하는 독일 청중들을 향해 행한 연설.

정작 연설 직후 드골은 측근과의 사적인 대화에서 "저 친구들이 정말 위대한 민족이라면 날 향해 환호하지는 않았겠지."라고 냉소했다고 전해진다.

'''그럼 친구를 바꿔보세요'''. - 드골과 정치성향이 반대인 의원이 “각하, 제 친구들은 각하의 정책을 매우 마음에 들어 하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자


'''영국은 미국의 유럽 내 영향력 확보를 위한 ‘트로이의 목마’다.'''

1967년 11월 27일 영국의 유럽경제공동체(EEC) 가입 신청에 대해 거부권(veto)을 행사하며 남긴 말

자유프랑스를 후원했던 영국 입장에서야 배신감을 느낀 말이지만, 드골에게 있어서 영국은 프랑스에게 못 믿을 존재였다. 역사적인 것이야 차치하고, 1951년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 창설에도, 1957년 EEC 출범에도 영국은 동참하지 않았다. 그러다 영국 경제가 침체에 빠진 반면, 다른 서유럽 국가들은 번영하기 시작하자 EEC 가입을 추진한 것은 드골 입장에서 가당치 않았을 것이다.

'''내버려 둬. 그도 프랑스인이야.'''

68운동 당시 장폴 사르트르 체포를 건의한 측근에게.

골수 좌파 철학자이자 소설가인 사르트르는 평생동안 드골에 대해 살벌한 비판을 가했다. 하지만 드골은 표현의 자유와 (좌파도) 애국심에 행하는 발언이라는 이유로 해를 가하지 못하게 하였다.

미국은 파리를 지키기 위해 뉴욕을 포기할 수 있는가?

어느 나라든지 다른 나라를 도와줄 수는 있어도, 다른 나라와 운명을 함께 해주지는 못한다.

프랑스의 핵무기 개발 선언시에 미국,영국이 핵우산을 보장한다는 말을 비슷하게 하자 샤를 드 골은 위와 같은 말을 하며 결국엔 미국이든 영국이든 자신의 나라를 우선시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강대국의 핵우산 제공을 불신하며 독자적 핵무장을 주장하는 측에서 자주 내세우는 명분으로 인용되고 있다.

Je cesse d’exercer mes fonctions de président de la République. Cette décision prend effet aujourd’hui à midi.

저는 공화국 대통령직 정무를 중단합니다. 이 결정은 오늘 정오부터 유효합니다.

1969년 대통령 사임 당시의 연설.

이게 대통령 사임 연설의 전부다. 이 때문에 드골을 높게 평가하지 않는 사람들 중에도 그의 사퇴만은 '쓸데없는 미사여구나 변명도 없고, 꼼수도 부리지 않고 깔끔하게 물러났다.'라고 높게 평가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아파!''' - 유언

정확히는 목을 가리키며 아프다고 했다. 유언이라기 보다는 급작스러운 단말마에 가까운 발언.

6. 기타


  • 성씨에 있는 de라는 전치사[42]에서 알 수 있듯이 본디 노르망디부르고뉴 지역을 연고로 한 하급 귀족 가문 출신이다.
  • 샤를리 엡도의 'Charlie'가 샤를 드골을 뜻하기도 한다. 샤를리 엡도의 전신격인 Hara-Kiri Hebdo[43]라는 주간지가 있었다. 그런데 샤를 드골이 사망했을 때 같은 해에 있었던 클럽 화재사고와 비교해 "한명 죽은거 가지고 뭔난리임?"이라는 고인드립을 쳐서 프랑스 정부의 어그로를 끌었고, 결국 폐간해야 했기 때문. 그래서 Hara-Kiri Hebdo를 출판하던 사람들 거의 전부가 샤를리 엡도란 이름으로 새로 주간지를 출판했다.
  • 스타크래프트 UED 1차 원장 함대 총사령관인 제라드 듀갈의 모티브로 추정된다. 일단 이름부터 비슷하고, 길쭉한 얼굴과 커다란 콧대의 외모, 권위주의적이면서도 명예를 중시하는 성격도 닮았으며, 유언의 마지막 부분도 프랑스어인 Au Revoir(다시 보자).
  • 강철의 왈츠의 특수임무에 등장하는 여자 소대장 앨리스 드골의 모티브로 추정된다.
  • 2017년에 그의 무덤이 괴한에게 훼손되어 물의를 빚기도 했다. 정확히는 묘비의 십자가를 떼어 버린 것. 재빨리 복구되기는 했지만, 마크롱 대통령을 비롯한 프랑스 정계의 주요 인사들이 이를 일제히 비판했다.
  • 2020년 그의 타계 50주기를 기리기 위해, 프랑스는 드골의 초상을 새긴 2유로 동전을 발행했다.[44]
  • 어록 중 드골이 '나는 독일을 사랑한다. 그래서 독일이 개였으면 좋겠다.'[45]라고 말했다는 루머가 유명하다. 드골의 경력과 연관해서 드골이 독일을 대단히 증오했음을 돌려서 표현한 것이라는 해석을 내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실제로는 드골은 이런 발언을 한 적이 없고, 작가 프랑수아 모리아크가 한 말이다.[46]
  • 국산 SF모바일게임 엘라의 2048에서는 샤를 드 골의 DNA로 탄생시킨 클론소녀 카렌이 등장한다. 자유분방하지만 임무 성공율도 높다는 전투요원.
[1] 제5공화국 유일의 비 국립행정학교, 비 그랑제콜 출신인 대통령이다.[2] 당시만 하더라도 드골은 거인 수준으로 보일 정도의 큰 키였다. 사실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196cm이면 독일 남성 기준 상위 1%로 눈에 띄는 건 당연하다. 꽤 자주 보인다고 인식하는 이유는 도시의 중심가는 유동인구가 많으니 일어나는 일종의 착시다.[3] 훗날 투하쳅스키는 소련군의 총참모장이 되었지만, 스탈린에게 숙청당했다.[4] 당시 기동전에 대한 이해가 가장 높았다던 독일 국방군조차도 보수파들의 반발로 기갑군 창설 대신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이란 애매한 형태로 임시 편성했었다. 자세한 내용은 프랑스 침공 문서에 있다.[5] 당시 프랑스군 수뇌부는 '전차란 보병 부대의 진격을 따라 이동하며 장애물을 제거하는 이동 포대' 수준의 사고가 지배적이였다.[6] 후퇴 병력들을 재편성하고, 공병들에게 대전차 지뢰를 설치하게 했으며, 가용 가능한 대전차포와 전차 몇 대를 긴급 배치했다.[7] 기갑사단의 역습을 일개 대위가 임시로 긁어모은 부대로 좌절시킨 것을 보고 드골의 공세가 대단치 않은 것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이는 프랑스군의 본질적인 한계 때문이었다. 프랑스군은 공군을 후방에 아껴두고 있었고 육군과 공군의 연계도 고려하지 않았다. 따라서 수많은 부대의 동시다발적 공격이 아닌 드골부대 단독의 역습이라면, 독일군은 소수의 부대라도 동원해서 지연시키면서 공군을 불러서 폭격하는 방식으로 물리칠 수 있었다.[8] 자유 프랑스 조직 이전에 프랑스 제3 공화정의 내무부 장관이었던 조르주 망델을 비롯한 정치인들이 모로코에서 망명 정부를 수립하려 했으나 모로코 통감인 샤를 누게 대장이 그들을 체포하여 나치 독일에 넘겨버렸다.[9] 이는 드골과 영, 미 연합국 지도자들의 관점차에서 기원한 문제로, 드골은 프랑스가 독일의 전쟁의 부역자로 취급받아 군정이 실시될 것을 두려워했다.[10] 루스벨트는 전후 드골이 독재자가 될 것이라 의심했다.[11] 이로 인해 다를랑 제독 암살 배후에 드골이 있다는 음모론이 당대 유행했었다.[12] 사진상으로 보면 키가 워낙 크다 보니 딱히 누구라고 찍어 말하지 않아도 드골을 찾아낼 정도다. 혼자만 키가 엄청 큰 사람이 드골이다.[좌측] 레지스탕스 지도자 장 물랭 사후 레지스트랑스를 이끌었다. 전후 여타 프랑스인과 마찬가지로 식민지 유지에 강경한 입장을 펼쳤고, 결국 정계에서 퇴출되었다. 드골과 사이가 매우 나빴으며, 이를 소재로 자칼의 날에서 드골과 대립하고 암살을 사주하는 비밀군사조직 OAS의 창설자로 등장한다.[우측] 자유 프랑스 육군 제2기갑사단장으로 복무했으며, 파리 해방의 최선봉으로 나섰다. 드골과 유사 사제 관계로 사이 좋았다고 한다.[13] 당시 히틀러는 연합군이 진격해 오자 파리를 완벽하게 파괴해서 잿더미만을 남겨주고 철수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파리 해방을 두고 경쟁하던 자유 프랑스군, 미군, 좌익 레지스탕스 등 여러 그룹이 "조용히 항복하면 독일군의 안전을 보장하겠다"면서 밀사를 파견해오자 파리 주둔 독일군 사령관 디트리히 폰 콜티츠(Dietrich von Choltitz, 1894 - 1966) 중장은 명령을 받고도 차일피일 계속 미루다가, 파리 외곽까지 도달한 자유 프랑스군에 항복한다. 이 순간까지도 히틀러는 계속 독일군 사령관한테 파리를 불태우라고 닥달하고 있었다. 그래서 영화 제목이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Is Paris Burning?). 뭔가 병림픽스러운 이야기지만 실화이다.[14] 2차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국내 레지스탕스의 70%가 프랑스 공산당 지하조직이었다.[15] 1945년과 1946년의 두차례 총선결과를 보면 급진당(중도파)과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프랑스 사회당의 전신)를 제하면, 드골파는 과반수는 커녕 개헌저지선을 넘기지조차 못했고 나머지 우파를 합해도 의석의 40%를 넘기지 못했다.[16] 185cm라는 케네디가 작게 보인다. 물론 185는 현대 기준으로도 상당히 큰 키이다. 단지 드골이 너무 커서 그런 것일 뿐이다.[17] 한국전쟁 때 유엔군으로써 참전한 프랑스 부대들은 종전 이후 인도차이나 전쟁에 참전하여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많은 죽음을 맞이하였고 이후 알제리 전쟁에 옮겨져 여기서도 많은 죽음을 맞게된 실로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다행히 51년에 연령 제한으로 라울 마그랭 베르느레 장군은 프랑스에 귀국하였으며 이 부대는 프랑스에 복귀한 1962년에 해체했다.[18] 드골 본인이 르몽드 설립에 관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뤼마니테(L'Humanité)같은 기존의 좌파 성향 신문 역시 존속을 허락받았다.[19] 드골 시절에는 방송국이 오지 하나 뿐이었고, RdF→RTF→ORTF로 국명이 3번 바뀌었다. 나중에 지스카르데스탱이 방송법을 대대적으로 개정하면서 독점체제가 붕괴됐다.[20] 그래서 알제리 전쟁 때 TV방송에선 현장상황을 제때 볼 수 없었다고 한다.[21] 7년이라는 대통령 임기는 대한민국 제5공화국의 임기 기준이 되었다. 원래는 대한민국 제4공화국처럼 6년을 하려고 했다고.[22] 당시 내각회의에서 중요하게 다뤄진 안건 중에는 "만약 시위대가 '''핵무기 발사 통제 설비'''가 있는 엘리제궁(대통령궁)을 점거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가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시위대가 대통령궁을 점거한다는 것은 단순히 건물 하나가 점거당한다는 의미나, 심지어 '국가 권력의 상징인 대통령 관저'가 점거당한다는 의미를 넘어 정부가 핵무기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하고, 시위대가 핵무장(...)할 가능성이 열린다는 의미였던 것. 물론 정말 가능성을 따진다면야 시위대가 "아싸~ 핵무기 스위치 얻었당! 쏴봐야즹~" 할 리도 없고, 메모지에 핵 발사 암호를 써놓고 방치한 게 아닌 이상 쏘려고 든다 쳐도 핵무기 발사 절차에 따르는 보안절차들을 뚫을 수도 없을 것이며, 정 위험하다 싶으면 발사 설비를 파괴하거나 발사 지령을 내리기 위한 연결을 끊을수도 있고, 68년 당시에는 아직 프랑스의 핵 무기화가 완성된 단계가 아니었기에 버튼 하나 누른다고 막 "핵 미사일 날아가요~" 하는 것이 아니라 지령을 받은 공군 부대등에서 "정상적인 정부의 명령이 아니므로 핵폭격을 수행하지 않는다" 식으로 커트해버릴 수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기는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관저가 점거당한다는 것이 가지는 엄청난 정치적 의미가 바로 "핵 발사 통제실을 빼앗길수도 있다"는 한마디로 설명되었고, 이런 위기 상황에서 <정치적 후폭풍을 감수하고라도 군대등을 동원하여 시위대를 강제로 진압할 것인가>, 아니면 <시위대의 요구를 들어주고 해산을 유도할 것인가>, 하다못해 <주요 설비와 문건등을 당장 파기할 것인가>까지 뭔가 당장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큰일난다는 인식이 형성된 것.[23] 드골은 임기 내내 수세에 몰릴때마다 자신이 제안한 정책에 대한 국민투표와 자신의 재신임을 결부하는 방식으로 돌파하는 방법을 즐겨 사용했다. 즉, "제가 제안한 이 정책에 국민 여러분께서 동의하지 않으신다면, 국민 여러분께서 저를 신임하지 않으시는 줄 알고 사임하겠습니다" 라고 승부수를 여러 번 던진 것. 이 경우 대통령을 사임까지 하도록 만드는 것은 지나치다거나, 대통령이 사임할 경우 발생할 혼란등에 대한 우려로 그 정책 자체에는 그리 동의하지 않더라도 할 수 없이 찬성표를 던지는 사람들이 많아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드골은 임기 내내 이 방법을 이용하여 자신이 원하는 정책을 추진할 동력을 얻고,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릴때마다 분위기를 일신해왔으며 이 때문에 "독재자라고 할 수는 없으나 권위주의적 포퓰리스트였다" 는 비판을 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통령 신임과 결부된 국민투표>에 익숙한 상태였던 프랑스인들이 드골의 제안을 부결시켰다는 것이 가지는 의미는 명백하다. 68운동이 정부를 붕괴시키기 직전까지 몰아간 상황에서 일단 정부가 붕괴되기를 원치 않기에 68운동의 반대항인 드골파에게 투표했지만, 드골 자신을 신임한 것은 아니라는 것. 말하자면 68년 5월 위기의 결과로써 '''드골 반대파는 패배했지만, 그렇다고 드골이 승리한 것은 아니다'''.[24] 대신 드골의 사망 직후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닉슨 당시 미국 대통령 등의 국내외 주요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 미사가 거행되었고, 파리 시민들도 개선문을 행진하며 드골을 추모했다.[25] 영문 위키나 불문 위키만 보더라도 드골의 레지스탕스에 대한 영향력이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26] 보다 자세한 사항은 Gildea, Robert. ''Fighters in the Shadows: A New History of the French Resistance''. 2015를 참고[27] 1962년으로 유럽에서는 상당히 늦은 편이다. 영국은 1922년, 독일은 1955년, 네덜란드는 1948년에 각각 병역거부자의 권리를 법적으로 인정했다.[28] 자신이 내걸었던 법안이 부결되면 사임하겠다는 조건을 건 투표.[29] 박정희 대통령은 1975년 유신헌법의 찬반투표를 재신임투표로 하면서 압도적인 찬성표를 얻어내며 장기집권. 심지어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사유 중 하나가 재신임 투표 제안 발언(청구도 아니었다. 대한민국은 플레비사이트를 인정하지 않는다.)이 역시 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반발과 비판에 올바르게 대처하지 못하는 태도로 보인 것이 큰 이유였다. 헌법에 규정된 국민투표에 레퍼랜덤의 성격만 있느냐 플레비사이트의 성격만 있느냐에 대한 법리적 논쟁은 현재까지 지속 중이기는 하나 헌재에서 인정한 것은 레퍼랜덤뿐이다.[30] 자크 베르제는 크메르 루쥬 정권의 키우 삼판, 국제 테러리스트 카를로스 '자칼' 같은 유명인사들을 대변했던 변호사이다. 이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든 감독 마르셀 오퓔스는 '''마치 바르비가 알제리의 민간인들과 똑같은 수동적인 피해자였나보군''' 이라하며 서구 열강이 유럽 외에서 저지른 제국주의의 기만성에 대한 비판이 엉뚱하게 '''그냥 대놓고 대량학살'''을 주장했던 파시스트 정권에 대한 옹호로 변질되는 것에 일갈한 바가 있다.[31] 실제로는 NATO의 일부로 남았다. 파리가 핵폭격당하면 도와줄 거냐! 며 겉으로는 뛰쳐나갔지만 당연히 혼자 살 수는 없기 때문에, 속으로는 밀약을 맺었다.[32]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제작한 다큐인 백년전쟁 이승만 편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프랑스의 나치 청산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지 알 수 있다. 영상 0:39~1:10과 21:42~22:40를 참고 [33] 예나 지금이나 어떤 조직이든 실무 경험이 풍부한 경력직을 좋아하는데, 일제 강점기가 35년이나 되므로 제대로 된 실무 경험을 쌓은 조선인은 친일파들 밖에 없었다. 전방에서는 북한과의 국지적인 무력충돌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나라의 기틀을 최대한 빨리 바로잡으려면 친일파라도 기용해서 행정 처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독일에게 점령당하기 이전에도 영국과 전세계를 양분했던 프랑스와는 달리 한국은 조선 말기가 너무나도 막장이었다. 그러니 더더욱 선택지가 없었다.[34] 특히 프랑스가 해방된 직후에 벌어진 대독 부역자 청산 재판은 감정적인 부분이 많았는데 무려 '''독일인과 연애'''를 해도 기소되어 잡혀갔다. 물론 이후 그 프랑스조차도 이러한 과잉 반응에 반감을 느끼고 기준을 대폭 완화, 적극적인 부역자들을 청산하는데 집중하였고 그 외 기소된 자들은 풀려났다. 출처 : 미완의 프랑스 역사[35] 특히 상도동계 등의 민주 보수 내지는 친이 등의 시장 보수와 대비되는, 전통적 권위주의 보수 지지층에서. 민정계-친박 등.[36] 위의 사진들을 보면 알겠지만 현재 기준으로도 키가 큰 편인 존 F. 케네디(185cm), 콘라트 아데나워(187cm)를 압도한다. 드골의 고향인 네덜란드를 비롯한 게르만 국가들과 가까워 프랑스 내에서 평균 신장이 큰 편이다.[37] 연합국 지도자들의 평균 키가 180.5인데 드골이 196이니 위너가 되게 만들었다는 개드립이다. 사실 루즈벨트도 188cm으로 한 기럭지 했었지만 처칠(167cm)과 스탈린(168cm)이 당대 기준으로도 작았던지라.. 추축국 지도자들은 히틀러가 175cm, 무솔리니가 169cm, 도조 히데키가 164cm이였다.[38] 역대 프랑스 대통령 최단신인 나폴레옹 3세(160cm)보다 '''36cm''' 더 크다.[39] 전후에도 처칠에 대한 드골의 마치 나쁜 남자를 연상케 하는 태도는 어디 간게 아니라서 전쟁 후 드골이 가장 먼저한 행동은 처칠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이었지만, 드골과의 만남에 대한 "나는 강인하고 무표정하게 서있는 드골을 보았다. 그와 인사를 나누며 나는 불어로 속삭였다. L'homme de destin!(운명의 사람)"라는 처칠의 오버섞인 기록에 대해 드골은 "그런 적 없다"라고 심드렁하게 까버린 적도 있다.[40] 이 둘의 관계를 어떻게든 중재하려고 했던 영국 내각의 회고들이 골 때린다. "모두들 수상이 없는 자리에서는 매우 용감하게 반대 의견을 표시했다."(앤서니 이든), "우리는 언제나 그렇듯이 드골을 헐뜯는 수상의 열변을 들어야했다, 루즈벨트와 수상, 그리고 솔직히 말해 드골까지도 사춘기 소년들마냥 행동한다. 이럴 땐 어쩔 도리가 없다.", "이로서 모든 계획은 망했다. 우리는 항상 잘못된 곳으로 발을 들여놓고 그 때 드골이 나타나 더 잘못된 쪽으로 발을 들여놓는다. 그는 이성을 잃었다."(알렉산더 캐도건)[41] 유럽과 대양을 놓고 선택을 해야한다면 우리는 늘 대양을 선택할 것이며 마찬가지로 당신과 루즈벨트를 놓고 선택을 해야한다면 루즈벨트를 선택할 것이라는 처칠의 말에 드골은 프랑스와 미국간의 불화가 있을 경우 영국이 미국의 편을 드는 것으로 알겠다고 답했다고 한다. [42] 영어를 제외한 게르만어와 로망스어 인명의 전치사/관사는 붙여쓰는 것이 원칙이다. 다만 관습적으로 빈센트 반 고흐와 같이 띄어쓰는데, 간혹 이때의 '반' 따위를 미들네임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43] Hara-kiri는 일본어의 腹切り로, <주간 할복>이라는 이름이 된다.[44] 이보다 4년 앞선 2016년에는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서 역시 그의 초상이 새겨진 2유로 동전이 프랑스에서 발행된 바 있다.[45] 원문은 J’aime tellement l’Allemagne que je suis heureux qu’il y en ait deux.[46] 위에도 나왔지만 드골은 아데나워와 손잡고 유럽연합의 전신을 주도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