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링겐
[clearfix]
1. 개요
'''Freistaat Thüringen, 튀링겐 자유주 '''[1]
독일 중부의 주(州). 주도는 에어푸르트이다.
현지 발음으로는 "튀링엔"이 적절하다. 독일어의 ng는 영어와 달리 /g/가 덧나지 않기 때문. 그러나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튀링겐이 올바른 표기이고 독일 관광청도 이 두 가지 용어를 섞어서 쓴다.
현재 독일의 정중앙인 니더도얼라(Niederdorla)가 바로 이 주에 있다.[2]
2. 역사
지금의 튀링겐 지방은 고대부터 게르만족의 왕국 투링기(Thuringii)가 있던 곳이다. 투링기는 게르만족의 일파인 헤르문두리(Hermunduri)의 후손들이란 뜻으로, 헤르문두리의 어미인 'duri'에서 시간이 지나 변형된 'thuri'와 후손을 뜻하는 '-ing'가 합쳐져 만들어진 단어로 추정된다. 6세기 프랑크 왕국에게 복속된 후 프랑크 왕국은 그 지방을 그대로 이어 튀링겐 변경백령을 만든다. 튀링겐 변경백은 동프랑크에 속하게 되면서 공작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공작의 대우를 받게 되었으나, 엄밀히 말해 온전한 공작령은 아니였기 때문에 독일의 5대 공국(부족 공국)(작센, 바이에른, 슈바벤, 프랑켄, 로트링겐)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908년 튀링겐의 마지막 공작이 마자르족과의 전투에서 죽으면서 작센 공작령으로 흡수된다. 이후 튀링겐은 후작들의 분할 통치를 받게 된다.
이후 4백년간 수많은 후작과 다른 지역에서 옮겨운 귀족들에 의해 각축장을 벌이게 된다. 초기에는 마이센 변경백이 이 지역의 강호로 군림하다 1002년 부터는 바이마르 백작이 권력의 중심을 차지한다. 12세기부터는 슈바벤의 호엔슈타우펜 가문이 이 지역에 손을 뻗치게 된다. 이때 튀링겐 지역 서부 일부는 헤센변경백의 영토로 넘어간다. 13세기에는 베틴 가문이 튀링겐의 패권을 장악한다. 이 와중에 작센 공작령은 엘베강을 넘어 슬라브족을 밀어내며 동부로 영토를 확장해나갔고, 튀링겐 북부와 동부까지 점령하고 개발에 나선다. 황제에게 대들던 작센의 하인리히 사자공이 토사구팽당한 후 1235년 작센 공작령이 분할될 때 엘베강 서편은 베스트팔렌 공작령과 뤼네베르크-브라운슈바이크 공작령으로 분할되었고, 엘베강 동편과 중류 지방은 아슈카니아 가문에게 넘어가 작센-비텐베르크와 작센-라우엔베르크로 분열된다. 그리고 둘은 누가 작센의 선제후인지를 두고 다툼을 벌이게 된다. 결국 1356년의 금인칙서를 통해 작센-비텐베르크가 선제후를 상속하는 걸로 결론이 나며 작센-비텐베르크는 공식적으로 작센 공작령으로 작위 명칭을 바꾸고 작센 선제후란 작위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1422년 작센의 공작 알베르트 3세가 자녀 없이 죽으면서 아슈카니아 가문은 단절되고, 마이센 변경백인 베틴 가문의 프리드리히 2세가 작센의 공작위를 상속받는다. 1428년 프리드리히 2세가 사망하면서 두아들인 에른스트와 알브레히트의 재산 문제로 인해 결국 영토가 동서로 갈라졌다. 장남인 에른스트가 작센 선제후와 작센 서부인 비텐베르크와 남부 튀링겐을 상속받고, 알브레히트가 작센 공작위와 작센 동부인 마이센 변경백령과 북부 튀링겐를 상속받는다.
16세기 종교혁명이 일어나며 에른스트 쪽 베틴 가문 방계는 개신교로 개종하고 신교도들을 보호하기 시작한다. 1547년 슈말칼덴 전쟁에서 신교도인 작센 선제후가 가톨릭과의 전쟁에서 카를 5세에 사로잡히자 폐위당하고 베틴 본가인 에른스트 계열의 선제후직이 방계인 알브레히트 계열로 이전되고 작센 공작위는 훗날 1806년 작센 왕국이 된 후 지금의 작센 주가 된다.
에른스트가 상속받은 남부 튀링겐은 4대를 거친 1554년, 요한 프리드리히의 세 아들이 분할 상속하여 '''에른스트 대공국들'''(Ernestine duchies) 또는 '''작센 공작령들'''의 시초가 되었다. 이들 영토의 경계는 1572년에 에어푸르트 분할로 재조정되었고, 그 이후의 변화상은 한 공작령의 제후의 대가 끊기면 그 영토를 다른 공작령들이 나눠먹는 과정이 되풀이되면서 영토가 이합집산을 거듭하는고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1826년에 작센-고타-알텐부르크 공작령의 대가 끊기면서 영토 재조정을 한 것을 마지막으로 1개 대공국, 3개 공국으로 확정되었다.
작센 공작령들 말고도 튀링겐 지역에는 슈바르츠부르크 가문의 영토들, 로이스 가문의 영토들이 분립해 있었다. 슈바르츠부르크 가문의 영토들은 1599년에 2개로 나뉘어진 영토가 20세기까지 이어졌고, 로이스 후작령들은 1678년경에는 9개로 분립되다가, 1806년에 2개로 정리되었다.
이상의 '''튀링겐 제국(諸國)'''이라는 이들 소공국들은 1826년에 8개로 정리되었다. 북독일 연방을 거쳐 1871년 독일 제국의 일부가 되었고, 1910년 당시 총면적 12,325 km2에 159만 명의 인구가 있었다.
- 1개 대공국 :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1903년 이후 작센 대공국)
- 3개 공국 : 작센-코부르크-고타, 작센-마이닝겐, 작센-알텐부르크
- 4개 후국 : 로이스게라 공령, 로이스그라이츠 공령, 슈바르츠부르크루돌슈타트 공령, 슈바르츠부르크존더샤우젠 공령
1945년 미군이 점령했으나 종전 이후 소련군 관할 지역이 되었고, 오늘날의 주도인 에어푸르트[5] 를 비롯한 노르트하우젠, 뮐하우젠 근교 지방을 흡수하면서 튀링겐 주 경계가 이때 대략 확정되었다. 동독 치하에서 1952년 에어푸르트, 게라, 줄 지구으로 나뉘어 소멸되었으나, 통일 직전인 1990년에 부활하였다.
3. 사회
3.1. 인구
통일 직전이었던 1987년에는 인구수가 270만명에 달했지만 통일 이후 경제적으로 부유한 서독 지역으로의 이주가 급증하면서 인구수가 빠르게 감소하고 있다. 2012년 현재 210만으로 20년 사이에 무려 60만이 줄었다.[6] 다행히 출산율은 1.8명 수준이어서[7] 고령화+인구이탈 콤보로 골치를 앓는 다른 구 동독지역에 비하면 한 시름 놓은 상황. 그렇지만 당분간 인구감소는 계속될 것으로 여겨져 2020년쯤에는 200만 선도 위태위태할 것으로 예측된다. 특히나 삶의 질이 상대적으로 열악한 농촌 지역의 인구감소가 심각하다.
3.2. 종교
작센과 함께 중세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의 중심지로 루터회의 본산과 같은 곳이었지만 공산정권을 거치면서 그런 거는 다 없어졌다. 인구의 70%가 무교인 상황. 그나마 개신교가 25% 정도를 차지하는 것이 한 때 나마 이 곳이 루터회의 성지였음을 알려주고 있기는 하다.
3.3. 정치
통일 이후로 기민당이 계속해서 주 정부를 장악하고 있기는 하지만 다른 구 동독 지역과 마찬가지로 구 동독 공산당을 계승한 좌파당이 통일 부작용으로 생긴 주민들의 불만을 등에 업고 사민당까지 제치면서 매섭게 성장하고 있다. 2011년 선거 기준으로 기민당이 33%, 좌파당이 28%, 사민당이 12% 득표. 이들 좌파당이 마르크스주의를 공식이념으로 내세우고 있어서 헌법수호청의 감시[8] 를 받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골치가 꽤나 아플 듯.
기어이 2014년에 좌파당-녹색당-사회민주당의 적-녹-적 연정이 결성되었다. 적-녹-적 연정이 성사된 것은 메르켈 총리가 공식 석상에서 비판할 정도로 파급력이 큰 사건이다. 2013년 총선에서 좌파 정당들이 과반 의석을 차지[9] 한 상태에서 사회민주당과 좌파당이 서로 배척하여 기민/기사연합과 사회민주당의 대연정을 구성하였는데, 지방의회에서 적-녹-적 연정을 구성한 이상 연방의회에서도 사회민주당이 마음 만 먹으면 얼마든지 기민/기사연합을 배제한 적-녹-적 연정을 구성할 수 있기 때문.
2020년 2월 5일에 있었던 튀링겐주 총선에서는 기민련의 득표율이 AfD로 대거 유입되면서 통일 후 최초로 좌파당이 '''원내 1당''' 자리를 차지했다. 한편 총선 이후 주의회에서 진행된 총리 선출 선거에서 독일을 위한 대안이 킹메이커 역할을 한 것이 아니냐는 논란이 일고 있다. 이 논란은 소수당인 자유민주당 소속 토마스 켐메리히가 예상을 뒤엎고 당선되면서 시작되었는데 토마스 켐메리히 튀링겐 총리는 당선 하루만에 사퇴했다. 또한 기민당이 이를 알고도 묵인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어 크람프-카렌바우어 대표의 리더십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말도 나오고 있다.# 이러한 정치 논란 끝에 좌파당의 보도 라멜로프 전 주총리가 다시금 주총리가 되었다.#
2020년 2월 10일 결국 크람프-카렌바우어 대표가 사임의사를 표했다.
4. 행정구역
[image]
현이 없고 바로 군으로 이루어져있다.
군급시
5. 출신 인물
신기하리만치 이 지역에서는 독일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들이 많이 등장했다.
- 막스 베버
- 카를 마르크스
- 프리드리히 니체
-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 카를 차이스
- 요하네스 브람스
-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 고틀로프 프레게
- 바실리 칸딘스키[10]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 발터 그로피우스 - 바우하우스로 유명한 건축가.
- 요한 파헬벨
6. 관련 문서
[1] 영어로는 Free State of Thuringia [2] 1945년까지 독일의 정중앙은 브란덴부르크 슈프렘베르크(Spremberg)였다.[3] 거기다가 작센왕국이 나폴레옹 전쟁 패배 후에 프로이센왕국에게 영토를 할양하는 바람에 튀링겐 지역엔 프로이센왕국의 영토도 있었다.[4] 1909년 슈바르츠부르크-존더샤우젠의 대가 끊기면서, 슈바르츠부르크-루돌슈타트와 동군연합 상태가 되었다.[5] 2차 대전 이전에는 프로이센의 작센 주에 속함[6] 여담으로 1910년에 인구수가 210만이었다. 80년 걸려서 60만 늘렸더니 20년만에 원상복귀...[7] 그나마 90년대 중반 통일 부작용으로 경제상황이 최악이었을 시기에는 0.8명 선까지도 떨어졌었다.[8] 독일은 나치라는 역사적 경험으로 인해 방어적 민주주의를 실행하고 있다. 1950년대 나치당을 사상적으로 계승한 극우정당이 등장하자 곧바로 해산시켜버린 것이 실례.[9] 630석 중 319석[10] 물론 러시아 출신이다. 독일 국적을 얻었을 시기 튀링겐에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