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프 버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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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클리퍼드 리 버튼
(Clifford Lee Burton)
'''생년월일'''
1962년 2월 10일
'''사망'''
1986년 9월 27일
'''국적'''
미국 [image]
'''출신지'''
캘리포니아
'''포지션'''
베이스, 백업 보컬
1. 개요
2. 커리어
2.1. 메탈리카 이전
3. 사망
4. 연주 스타일
5. 여담


1. 개요


기타리스트 데이브 머스테인과 더불어 초기 메탈리카의 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혁신적인 베이시스트. 13세 때 형을 잃고 그를 위해 최고의 뮤지션이 되기로 마음먹으며 베이스를 처음 잡았고, 꿈을 이루기 위해 이 때부터 죽는 날까지 하루 여섯 시간동안 베이스 연습을 한 노력파 음악인이었다. 1978년 스쿨 밴드 EZ Street, 1981년 대학 밴드 Agents of Misfortune, 1982년 스래시 메탈 밴드 트라우마를 거쳐 1983년 메탈리카에 가입하였고, 1986년 9월 27일 투어 이동 중 버스 사고로 사망하며 커리어를 마감한다.
메탈리카 초기 멤버 중 유일하게 음악을 제대로 배운 멤버이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주유소 알바를 하던 제임스[1], 그냥 감으로 명곡을 쓰던 천재 데이브 머스테인[2],아예 프로로서 생각하지도 않았고 테니스를 치던 라스와 달리 시를 읽고 클래식을 들으며 음악적으로 탄탄한 기초를 쌓은 멤버였다. 그는 제임스 헷필드데이브 머스테인에게 화성학과 악곡의 구조 등 작곡가로서 알아야 할 기본들을 가르쳤으며, 당시 오로지 메탈만 듣던 다른 멤버들에게 바흐, 모차르트 같은 클래식이나 밥 딜런, R.E.M. 등을 처음 들려주었다고 한다. 어렵사리 모셔왔지만 아무튼 신입이었음에도 튼튼한 음악적 소양과 기량을 바탕으로 밴드 내에서 그의 입지는 압도적이었으며, 어지간한 실력의 뮤지션들을 곧잘 무시하던 어린 날의 데이브 머스테인[3]마저도 그와 팽팽히 맞설만한 천재인 클리프 앞에서 만큼은 한 수 접었다.
클리프는 메탈 베이시스트였음에도 자신이 속한 스래시 씬의 음악은 거의 듣지 않았다. 그는 바흐 광이었으며, 즐겨듣는 음악은 R.E.M., 블루 오이스터 컬트, 블랙 사바스, 모터헤드, 미스피츠 등 올드 하드 록과 브리티시 헤비 메탈 및 펑크[4] 였다. 괴물 같은 속주와 페달 연주를 구사하는 모습과 달리 클리프는 언젠가 메탈리카가 좀 더 느린 템포의 음악을 하며 약간 더 부드러운 모습을 보여주는 하드 록 밴드가 되지 않을까 전망하기도 했다. 이는 그의 취향이었다고 한다.[5]
Fight Fire with Fire 도입부의 어쿠스틱 기타의 선율과 Orion[6] 연주에서 그의 이러한 고전적 성향과 탄탄한 기초가 잘 나타나며, 라이브와 레코딩을 불문하고 여러 이펙터를 사용하여 기타로 착각할만한 놀라운 사운드를 내는 것으로 유명했다.[7] For Whom the Bell Tolls의 인트로[8]와 Orion의 클라이막스[9]가 대표적으로, 이후 들어오게 되는 제이슨의 여러 탈퇴 이유 중 하나가 클리프 버튼이라는 천재의 그늘에 가려져 비교 당한 것이었다는 쪽에 설득력을 더해줄 정도로 클리프 버튼의 영향력은 컸다.

2. 커리어



2.1. 메탈리카 이전


클리프 버튼은 13세 때 처음 베이스를 잡았으며, 고등학생이었던 1978년 그의 동창인 드러머 마이크 보딘과 함께 스쿨밴드 EZ Street를 차렸다. 클리프와 마이크는 기타리스트 한 명을 모집하였고, 동창인 짐 마틴[10]이 가입하여 밴드가 구성된다.

우리는 5년 정도 함께 음악을 했다. 버클리에 있는 인터내셔널 카페라 불리는 곳에서 주로 연주를 하곤 했다. (중략) 자작곡을 쓰는 카피 밴드였다. 롤링 스톤즈, 레드 제플린, 블랙 사바스의 곡들을 커버하였고, 자작곡 역시 썼다.

- 기타리스트 짐 마틴, 1990년 Kerrang!과의 인터뷰


Hayward Area Recreation Department's Battle of the Bands contest (1981)
그가 20세가 되던 1981년 내분으로 마이크 보딘이 탈퇴하면서 밴드가 해체된다. 1981년 채벗 대학에 진학한 클리프는 짐 마틴과 함께 새 밴드 Agents of Misfortune을 차려 콘테스트에 나가는 등 음악활동을 이어갔다. 위의 영상은 콘테스트 중 촬영된 영상으로, 그의 시그니처 곡인 Pulling Teeth와 For Whom the Bell Tolls의 인트로의 원형이 담겨 있다.
독특한 그루브와 페달 연주, 작곡 능력 등 클리프의 역량은 베이 에어리어 메탈 씬에서 입소문을 탔고, 그는 1980년 결성되어 인디 씬의 차세대 거물로 촉망받는 신예 밴드 트라우마의 베이시스트로 가입하게 된다. 클리프는 트라우마 소속으로 써낸 그의 자작곡 <Such a Shame>을 기여하였고, 이 곡은 메탈 블레이드 레코드의 인디 컴필레이션 시리즈 <Metal Messacre II>(1982)에 실린다.

2.2. 메탈리카


클리프 버튼은 트라우마 소속으로 할리우드의 유명 클럽 'Whiskey a Go Go'에서 공연하던 중 관객으로 와 있던 제임스 헷필드와 라스 울리히의 영입 제안을 받고 1982년 겨울 메탈리카에 가입해 1983년부터 멤버로서 활동한다.
당시 메탈리카는 멤버간의 갈등 격화로 베이시스트 론 맥고브니가 탈퇴해 새 베이시스트를 찾아야 하는 입장이었고, 그에 따라 자신들이 공연한 바 있던 클럽을 방문해 베이시스트를 물색하기로 하였다. 그들은 트라우마 소속으로 솔로 연주를 하고 있던 클리프 버튼을 보고 정말 대단한 기타리스트라고 여겼는데, 다루는 악기가 뭔가 기타가 아닌 것 같아 줄을 세어보니 '''네 줄'''. 그 길로 제임스와 라스는 클리프 버튼에게 가입을 제안했다.
클리프는 "(내가 소속된) 트라우마가 다소 상업적이게 된 것 같다"며 그들의 제안에 응했으며 가입에 대해 전제조건을 달았다. 당시 메탈리카의 근거지는 로스앤젤레스로, 'LA는 메탈, 베이 에어리어는 스래시'라는 세간의 평가대로 스래시 메탈이 메이저인 동네는 아니었다. 클리프는 메탈리카가 스래시 메탈이 흥하고 있는 샌프란시스코 베이 에어리어로 근거지를 옮겨온다면 가입하겠다는 전제조건을 달았고, 메탈리카는 흔쾌히 그리 하겠다 하였다. 메탈리카 멤버들은 1983년 2월 경 로스엔젤레스를 떠나 전원이 500Km를 날아가 샌프란시스코로 이사한다.
1983년 3월 5일, 샌프란시스코로 갓 넘어온 메탈리카의 세 멤버(제임스, 데이브, 라스)와 합류해 샌프란시스코의 클럽 Stone에서 기념비적인 첫 공연을 치렀으며, 3월 16일에는 인디 레이블 메가포스 레코드에 보낼 데모 테이프를 함께 녹음했다. 4월 11일에는 데이브 머스테인의 방출에 동의하였고, 5월은 정규 1집 <Kill 'Em All> 녹음으로 보낸다.
1집은 베이스 솔로 한 곡을 제외한 모든 곡은 클리프의 가입 이전에 완성되어 있었다. 3월에 합류하여 5월에 녹음하기까지 여유시간이 부족하여 곡은 대부분 그대로 갔고 크레딧에 이름을 올린 곡은 베이스 솔로 연주곡인 Pulling Teeth(Anesthesia) 한 곡뿐이다.
2집 제작과정에서 클리프의 기량이 빛나기 시작한다. 1번 트랙 'Fight Fire with Fire' 도입부의 어쿠스틱 기타 선율, For Whom the Bell Tolls와 The Call of Ktulu 도입부의 베이스 솔로 등이 그의 작품이다. 크레딧에 이름을 올린 곡은 Fight Fire with Fire, Ride the Lightning, For Whom the Bell Tolls, Fade to Black, Creeping Death, The Call of Ktulu로 총 8곡 중 6곡.
3집에서는 연주곡 Orion을 혼자 써내다시피[11] 했으며, 제임스는 곡이 빈 틈 없이 완벽하다며 가사 달기를 포기했다. 본래 Welcome Home(Sanitarium)의 후반부에 붙은 연주 파트로서 Only Thing이라는 제목의 데모로 녹음되었는데, 최종적으로는 따로 분리되어 하나의 연주곡이 되었다. 크레딧에 이름을 올린 곡은 세 곡으로, Master of Puppets, Orion, Damage Inc.이다.
3집 투어 도중 사망하여 4집부터는 참여할 수 없었으나, 멤버들이 그의 유품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수습한 리프와 녹음 테이프들을 바탕으로 짠 메들리인 To Live is to Die의 크레딧에 그의 이름이 올랐다.
클리프는 메탈리카 베이시스트로 활동하면서 1983년 54회, 1984년 60회, 1985년 58회, 1986년 56회의 공연을 함께했고, 4장의 정규앨범, 4장의 싱글(Whiplash, Jump in the Fire, Creeping Death, Master of Puppets)에 이름을 올렸다. 마지막 공연은 1986년 9월 26일 스웨덴 스톡홀름 Solnahallen 농구 경기장 공연.

3. 사망


1986년 9월 27일 3집의 유럽 투어 중 스웨덴 스톡홀름에서의 공연을 마치고 이동하다 버스 전복 사고를 당해 24살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평소 커크 해밋의 침대를[12] 무척 탐내던 클리프는 사고 당일 제임스와 포커 내기를 하게 되고 내기에서 스페이드 에이스를 뽑아[13] 제임스를 이기고 커크의 침대에서 잠이 드는데, 그 직후 버스가 미끄러져 뒤집어지는 사고가 난다. 커크의 자리에 있던 클리프는 멤버 중 유일하게 창문 밖으로 튕겨져 나가 버스에 깔려 어떻게 조치해볼 새도 없이 현장에서 사망하며 사고의 유일한 희생자가 되었다. 당시 잠자리가 불편했던 제임스 또한 커크의 침대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14] 클리프의 사망 후 한동안 제대로 먹고 마시지도 못하고 반 폐인처럼 지냈다고 한다.
버스가 엎어진 이후 상황을 간단히 기록하면 이렇다. 버스가 한바탕 구르고 멤버들이 부리나케 팬티바람으로 버스를 탈출하는데, 제임스는 사람 수를 세다 한 사람이 모자라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시 후 버튼은 창문 밖으로 튕겨져 나가 굴러오는 버스에 그대로 깔린 채 발견되었다. 버스 기사는 이미 가망이 없는 버튼의 몸을 두르고 있는 담요를 잡아당기며 알 수 없는 행동을 했고, 버스 기사에 대한 분노와 이 행동에 자극받은 밴드 멤버들은 지금 뭘 하는 거냐며 버스 기사를 제지했다. 이어 제임스는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도하고 광분해 마구 소리를 지르며 버스기사에게 사고 원인을 추궁했다. 버스 기사는 검은 얼음[15]을 밟고 미끄러진 것 같다고 했으며, 분을 삭이지 못한 제임스는 속옷바람으로 버스가 미끄러져온 길을 수백 미터 되돌아 걸어갔으나 어디에도 '검은 얼음'은 없었고, 버스기사에게서는 술 냄새가 났다고 한다. 이후 음주운전으로 인한 인명사고의 책임을 물고 실형을 살게 되었다.
사고 이후 멤버들 모두 쇼크 증세를 보였고 드러머 라스는 발목에 골절상을 입어 전원이 입원하게 된다. 3일쯤 후 모두 퇴원했고, 아직 충격이 가시지 않은 세 멤버는 호텔 방에서 끝없이 술만 마셔댔다고 한다. 커크 해밋이 회고하기를, 퇴원 후 묵은 호텔에서 며칠 지나지 않아 새벽 네 시에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잠을 깼는데, 제임스가 만취해 길바닥에서 '클리프, 어딨어!' 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장례식에서는 공연에서 한 번도 연주되지 못했던 그의 마스터피스 Orion이 재생되었으며, 이 곡은 그대로 클리프의 추도곡으로 남아 2005년까지 20년간 한 번도 완곡으로 연주되지 못했다. 오직 89~92 라이브투어 중 잼 형식을 빌어 후반부 리프가 1분 남짓 연주되고 다음 곡으로 넘어가는 식으로 조금 연주되었을 뿐이었다. 후일 제임스가 회고한 바에 따르면 이 곡을 연주할 때면 클리프와 함께했던 행복한 기억들이 떠올라 눈물이 나기 때문에 아무래도 라이브로 연주하기 많이 꺼려졌었다고. 실제로 2006년 내한공연에서 연주된 영상이나 2012년 <Through the Never> 엔딩 크레딧으로 쓰인 Orion 연주 영상을 보면 내한공연에서는 제임스가 거의 카메라에 비춰지지 않고. 영화 엔딩 크레딧에서는 멤버 중 혼자서만 어두운 무대에서 짙은 스포츠 고글을 쓰고 연주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의 사망 이후 방과 연습실에서 나온 그의 연습노트와 테이프에 실린 베이스 리프를 모아 남은 멤버들이 재구성한 곡이 있는데, 이 곡이 4집에 실린 연주곡 To Live is to Die이다. 이 곡 역시 완곡으로 연주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가 2011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메탈리카 30주년 기념 파티에서 딱 한 번 연주되었다.[16] 클리프의 사망 이후 50여 명의 뮤지션들이 경합한 신규 베이시스트 채용 오디션에서 제이슨 뉴스테드가 낙점되었으며, 그의 환영식에 클리프 버튼의 양친이 참석해 제이슨을 격려했다.
그의 주검은 화장되어 샌프란시스코 만의 어느 곳에 뿌려졌으며, 사고가 일어난 현장에는 그를 기리는 비석이 세워졌고, 캘리포니아 카스트로 밸리의 고향에도 그를 기리는 작은 표지석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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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현장에 세워진 클리프 버튼의 추모비. 새겨진 글은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곡인 To Live Is to Die의 가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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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브 머스테인은 자신과 함께 했던 메탈리카 멤버들(제임스, 라스)이 자신에게 클리프의 부고도 전하지 않았다고 크게 상심하였다. 다른 멤버들과 달리 클리프는 데이브 머스테인의 방출 이후에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 간혹 교류를 가지기도 했다고 한다. 사진은 1986년 9월 메가데스의 Peace Sells 투어 현장에서 찍혔다.
정규음반 기준 원년멤버로서 고생만 죽도록 하고 돈이나 명예, 인기 같은 것은 누려보지도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망 5년 후 메탈리카 멤버들은 5집의 성공으로 억만장자가 되었는데, 3집 당시 메탈리카는 이제 막 오버그라운드에서 뜨기 시작한 밴드로서 형편이 넉넉하지는 않았다. 클리프의 사망 직전까지 메탈리카는 번 돈으로 장비를 사고 투어를 돌 자금을 대기도 빠듯하여 멤버들의 생활비나 조금 남기면 다행인 밴드였으며, 그의 생전에 메탈리카는 번듯한 수익분배 한 번 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사망 당시까지 클리프는 부모와 함께 살았고, 언젠가 성공하면 집을 사 독립을 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사망 후 수십년이 지난 후까지도 메탈리카는 Orion 뿐 아니라 Fade to Black 등을 연주할 때도 “클리프, 우리 연주하는 거 듣고 있어?”라고 외칠 정도로 그를 여전히 기리고 있다.

4. 연주 스타일


익스트림 메탈 베이시스트로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인물이다. 핑거링과 속주 실력도 괴물 수준이었지만, 상술했듯이 다양한 이펙터를 이용한 사운드메이킹에 재능을 보였다. 콘의 필디 등이 자주 사용하는 철컥거리는듯한 메탈 베이스 사운드의 원류는 클리프 버튼으로 꼽힌다.

5. 여담


  • 메가데스의 곡인 In My Darkest Hour는 데이브 머스테인이 그의 사망소식을 듣고 만든 곡이다.
  • 2009년 메탈리카가 명예의 전당에 헌액 되었을 때 부모님이 대신 참석을 해서 수상을 하였다. 아들이 사고로 죽은지 몇십년이 지났지만 팬들이 자신의 아들을 잊지않고 기억을 해준 것에대해 매우 감사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이때 클리프의 아버지가 대신 수상을 하는데, 메탈리카 역대 최장신(188cm)이었던 클리프와 달리 최단신 라스(166cm)보다 키가 작다.[여담으로]
  • 개조한 리켄베커 4001[17]과 아리아 SB 베이스를[18] 이용했다. 알렘빅 스포일러도 한 대 가지고 있었으나 도둑놈이 훔쳐갔다. 1983년까지 사용한 Morley Power Fuzz Wah 페달도 잘 알려져 있다. 1983년 이후로는 Morley Power Wah Boost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페달은 제이슨 뉴스테드가 이어받았다고 한다. 현재 Morley에서 그의 와우를 복각해서 만든 트리뷰트 제품인 Power Fuzz Wah를 생산 중이다.
  • 단명한 뮤지션인 탓에 클리프를 과도하게 우상화하거나 그처럼 연주하는 것이 아니면 제대로 된 베이시스트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악질 추종자들도 상당히 많다. 그들은 로저 글로버, 크리스 스콰이어같은 뮤지션도 피크 피킹한다는 이유로 무시한다. 이들의 가장 큰 피해자 중 한 명이 바로 제이슨 뉴스테드였다. 라이벌 밴드 메가데스의 베이시스트인 데이빗 엘렙슨의 안티 중 다수가 바로 이들이기도 하지만 Aria에서 클리프 버튼 시그네쳐를 2013년에 재발매 되었을 때 NAMM에서 적극적으로 홍보해줬던 인물이 데이빗 엘렙슨이기도 하다.

[1] 참고로 제임스의 엄마는 오페라 가수였다고 한다.[2] 메가데스가 수많은 명곡과 명반을 쏟아내고도 한참 지난 후인 2000년대에 팔목부상으로 요양을 하면서 스케일을 비롯한 음악이론을 제대로 배웠다고 한다. ㅎㄷㄷ[3] 자기가 인정하는 사람 앞에서는 접고 들어간다. 마티 프리드먼을 대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4] 다만 이 중 R.E.M.은 뉴욕 펑크에 영감을 받은 쟁글 팝이나 포크 록에 가깝다. 밥 딜런 팬인걸 보면 포크 록도 좋아했던걸로 보인다.[5] Load, Reload 같은 스래쉬 메탈 성향을 버렸던 앨범과 Hardwired... to Self-Destruct 앨범이 아마 클리프 버튼이 원햇던 방향의 음악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제임스 헷필드는 후기 메탈리카 음악에 대해 클리프 버튼이 어떻게 생각할 것 같느냐는 질문에 상업적으로 변했다고 sell out 할 거라 답변한 적도 있다.[6] 잔잔한 베이스 연주로 시작하는 중간 부분이 유명한데, 이 부분은 클리프가 직접 편곡했다고 한다. 12/8 박자 리프 자체는 제임스 헷필드가 쓴 것이다, 무려 초킹을 구사하는 베이스 솔로는 당연히 클리프 버튼의 작품.[7] 특히 Wah 페달, 드라이브, 퍼즈 이펙터를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사운드를 만들어냈다.[8] 와와 페달을 사용한 것으로, 모르는 사람들은 흔히 기타 소리로 착각한다.[9] 대략 6분 30초쯤부터 베이스 두 대에 이펙터를 먹여 하이프렛에서 3도 화음을 쌓는 절절한 연주가 시작되는데, 베이스 볼륨이 작은 편이고 워낙 톤이 높아 기타 솔로로 착각하기 쉽다.[10] Faith No More의 원년 멤버로, 메탈리카와도 친분이 있어 후일 Low Man's Lyric, Tuesday's Gone(리메이크) 등의 곡에 도움을 준다. 이러한 인연으로 메탈리카의 30주년 기념 공연에서 함께 무대에 올라 Tuesday's Gone을 연주하기도 했다.[11] 100% 자작은 아니고, 후반부 슬로우 파트 등 일부는 제임스가 만들어 둔 리프를 가져다 쓴 것이다.[12] 미국은 버스안에 침대가 설치된 투어버스를 타고 공연하러 다니는 경우가 흔하다.[13] 여담으로 스페이드는 무덤을 팔 때 쓰는 삽을 상징.[14] 사실 짬 순서대로 하면 제임스가 커크의 침낭을 차지했어야 했으나 클리프가 이에 반대하며 카드내기를 제안했다고 한다.[15] 아스팔트 도로에 얕게 언 빙판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한국의 2019년 12월 14일의 고속도로 연속 추돌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16] 이 곡 역시 그동안 잼 형식으로 불려졌다. 레전드 라이브로 꼽히는 1989년 시애틀 라이브 Master Of Puppets를 연주하기 전에 베이스, 기타 멤버들이 모여 연주하는 것이 To Live is to Die이다. 그 외에 93년 라이브 등에선 그동안 메탈리카가 발매한 음반 중 연주곡들을 섞어 연주하기도 했다. Orion - To live Is To Die - The Call Of Kutulu 이런 식으로.[여담으로] 이 둘 외에 역대 메탈리카 멤버들의 신장(cm)은 제임스가 185, 데이브가 182, 론이 177, 제이슨과 로버트가 175, 커크가 172이다.[17] 넥 픽업을 뜯어내고 그 자리에 깁슨 EB 베이스에 들어가는 우퍼픽업을 달고 브릿지 픽업은 Seymour Duncan 싱글코일로 교체했다.[18] 아리아에서 시그네쳐 250대 한정생산해서 판매했는데 가격은 450만원이라는 어마어마한 가격을 자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