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슨 뉴스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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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제이슨 커티스 뉴스테드
Jason Curtis Newsted
'''출생'''
1963년 3월 4일 미국 미시간
'''국적'''
미국 [image]
'''직업'''
음악가
'''악기'''
'''베이스 기타''', 기타, 보컬
1. 개요
2. 역량
3. 커리어
3.1. 플롯섬 앤 젯섬
3.2.1. 가입
3.2.2. 탈퇴
3.3. 메탈리카 이후 활동
3.4. 사용 장비
4. 기타


1. 개요


미국 미시간 출신의 음악인. 1981년부터 2014년까지 메탈 베이시스트로 활동하였으며, 2016년부터 포크/컨트리 뮤지션으로 활동 중이다.

2. 역량


쇼맨으로서의 화려한 퍼포먼스, 백업 보컬리스트로서의 우렁찬 성량, 베이시스트로서 기타만큼 빠르고 강력하면서도 정확한 연주와 그루브 있는 솔로 등 어디 하나 빠지지 않는 1980~90년대 최고의 테크니션 중 하나이다.
퍼포먼스 측면에서 당대의 모든 베이시스트를 꼽아 보아도 뒤지지 않는 화려한 무대 액션이 장기였다. 전성기 시절 풍차돌리기는 기본이었고, 베이스를 연주하며 무대를 전력질주하는 것은 예사였다. 가입 초창기인 1986년 연주 중 계단을 오르다 넘어진 일이 있었는데, 넘어진 후에 마치 원래 그러기로 되어있었다는 듯이 누워서 연주하는 등 돌발상황에 대처하는 리액션 역시 뛰어났다.[1]
제이슨의 보컬은 웬만한 하드코어 펑크 밴드의 리드 보컬을 맡아도 손색이 없는 우렁찬 성량과 카리스마를 자랑했다. 메탈리카 재직 당시 스래시 넘버인 Creeping Death, Whiplash, The Four Horsemen 등 몇 곡에 한해 간혹 리드 보컬을 맡기도 했으며,[2] 백업 보컬로도 제임스와 자웅을 겨루는 멋진 음색으로 무대를 장악했다 . 제임스가 화상으로 부상 당했을 때에는 콘서트중 대부분의 리드 보컬을 맡았다. 메탈리카 탈퇴 이후 2014년 자신의 프로젝트 밴드인 뉴스테드 1집에서 리드 보컬을 맡았으며, 여전히 카리스마 있는 보컬을 선보여 메탈리카 팬들에게 큰 아쉬움과 그리움을 안겼다.
박력있는 사운드와 속주에 강점을 가진 타입의 연주자이다. 메탈리카의 작곡 스타일상 베이스와 기타 라인이 많이 겹치는 탓에 유니즌으로 인한 주파수 간섭이 문제가 되었으며, 이로 인해 레코딩에서의 볼륨이 낮게 책정되어 있어 음반에서의 존재감은 크지 않았다. 한편 라이브에서는 항상 베이스 솔로 시간을 할당받아 존재감을 드러냈고, 아르페지오를 이용한 아름다운 라인의 솔로와 헤비한 이펙터, 딜레이를 이용한 기괴한 사운드를 내는 솔로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한편 피크 연주 특유의 강렬한 음색은 부드럽고 기교있는 연주를 하던 핑거 피킹 연주자인 전임 베이시스트 클리프 버튼을 그리워하는 팬들에게 호불호가 갈렸다. 재적하는 내내 '왜 손가락으로 연주하지 않느냐'는 질문이 그를 따라다녔으며 심하게는 '픽으로 연주하는 한 클리프 버튼을 넘어설 수 없는 2류다'라는 비난도 숱하게 들어야만 했다.[3]
본래 손가락으로 연주하는 베이시스트였으나, 후천적인 심각한 부상으로 인해 피크 연주자로 스타일을 바꾸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제이슨은 모터헤드의 리더인 레미 킬미스터를 더욱 열렬히 영웅으로 모시며 자신의 구세주로 여겼다고 한다.[4] 다만 슬랩이 아애 불가능할 정도의 손 상태는 아닌듯하며 1992년 라이브에서 잠깐 보여주었다. 프렛리스를 사용하기도 하고 로우템포 음악에서는 가끔 핑거피킹도 한다.

3. 커리어



3.1. 플롯섬 앤 젯섬


제이슨은 미국의 메탈 밴드 플롯섬 앤 젯섬의 원년 베이시스트이다. 1981년 제이슨은 드러머 켈리가 내건 구인광고에 응해 그들의 베이시스트로 합류하게 되었으며, 거의 모든 곡의 작사와 작곡에 참여하며 그들의 데뷔 앨범인 <Doomsday for the Deceiver>(1986)에 기여하였다.

3.2. 메탈리카


제이슨은 베이시스트로서 백업 보컬리스트를 겸하였다. 메탈리카에 재적하면서 총 네 장(4~7집)의 정규앨범에 이름을 올렸다. 작곡과 작사는 제임스 헷필드라스 울리히 위주로 돌아간 탓에 재직기간동안 크레딧에 이름을 올린 곡은 3곡(<Blackened>, <My Friend of Misery>, <Where the Wild Things Are>)에 그쳤다. 재직기간은 1986년 10월~2001년 1월로, 햇수로 총 16년이며 만으로 14년이다.

3.2.1. 가입


1986년 9월 27일 클리프 버튼이 투어 중 교통사고로 사망하였고, 곧 메탈리카의 차기 베이시스트를 선발하기 위한 오디션이 열렸다. 제이슨은 이 투어의 셋리스트를 입수해 집중적으로 연습하여 오디션을 치렀으며, 레스 클레이풀, 조이 베라[5] 등 쟁쟁한 뮤지션들[6][7] 을 뚫고 합격의 기쁨을 누리게 된다. 합격자 고려 과정에서 최후의 2인으로 남은 후보는 제이슨과 레스 클레이풀[8]이었다. 그의 환영식에는 작고한 전임자 클리프 버튼의 양친이 참석하여 "건강하게 아들의 횃불을 넘겨받아달라"는 격려사를 전했다.
환영식을 끝내고 네 멤버는 따로 식사를 하러 나섰는데, 거하게 차려먹고 제이슨이 잠시 화장실을 간 사이 남은 셋이 도망을 가며 밥값은 제이슨이 전부 계산하는 혹독한 신고식을 치렀다고 한다. 제이슨이 합류하여 밴드 구성을 재정비한 메탈리카는 1986년 11월부터 투어를 재개하였는데, 이는 제이슨이 Flotsam and Jetsam에서 마지막 공연을 끝내고 자기 장비를 바리바리 챙긴 후 고작 '''11일'''만에 월드 투어를 시작했다.[9] (당시 상황을 회고한 영상)
뛰어난 테크니션임과 동시에 훌륭한 작곡·작사 역량을 지녔음에도 밴드에 재적하는 내내 대우가 '''매우''' 좋지 않았다. 제이슨은 전임자 클리프 버튼의 대체재로 여겨졌고, 커리어 내내 나머지 셋과 동등한 멤버로서의 대우를 받지 못하였다. 첫 몇 주간 제이슨은 수습 세션 맨 정도로 여겨지며 돈도 거의 받지 못했고, 멤버들은 이후 클리프 버튼을 잃은 충격과 분노를 제이슨에게 풀었다고 한다.

모두가 클리프 버튼을 잃은 고통과 분노를 제이슨에게 풀었다고 생각한다. (중략) 애초부터 우리는 그를 별개로 치며 항상 '새로 온 멤버'로 여겼다. 우린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아마 우린 제이슨을 우리처럼 강하게 키우고 싶었던 모양이다. 우린 제이슨을 난폭하게 대했고, 정말 마지막까지도 그랬다.

- 제임스 헷필드의 회고#

한편 제이슨은 이에 대해 "우리는 젊을 때 항상 서로가 서로를 놀려먹는 것을 즐겼다. 그건 별로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라고 일축하는 군자다운 모습을 보였다.

3.2.2. 탈퇴


'''"The person who I respected the most, disrespected me the most."'''

'''"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나를 가장 무시했다."'''

제이슨은 1986년 이래로 멤버들에게 험한 대우를 받아 오면서도 언제나 가장 먼저 출근해 마지막에 퇴근하는 성실한 태도로 밴드를 위해 희생해 왔다. 앨범 제작의 대부분의 과정에서 배제되어 창작에 대한 열망이 강했던 제이슨은 혼자 조용히 얼터너티브 록 프로젝트인 에코브레인(Echobrain)을 준비하였고, 이 프로젝트가 제임스 헷필드의 완강한 반대로 무산됨에 따라 메탈리카로부터 완전히 마음이 떠나게 된다.
제이슨의 결과물을 처음 접한 메탈리카 매니지먼트 파트에서는 "메탈리카의 활동 영역과 전혀 겹치지 않으면서도 아주 훌륭한 결과물을 낸 프로젝트"라고 칭찬하며 함께 추진해 보자고 그의 의욕을 북돋웠으나, 제임스 헷필드는 그의 면전에서 '''"아냐.. 이건 좋지 않아. 그래서, 이 활동으로 티셔츠라도 팔 거야?"'''라고 면박을 주며 완강하게 반대했다. 제이슨은 상급자로부터 하대당하는 듯한 심각한 불평등을 느꼈다고 한다. 이 날짜는 2000년 9월 27일이었으며, 제이슨 뉴스테드의 워딩에 따르면 "두 베이시스트(클리프와 제이슨)가 같은 날짜에 밴드를 떠났다"고 한다.#
결국 그는 자신이 '그래. 이 공연이 마지막이다'라고 미리 마음먹은 공연을 마치고 멤버들과 더이상 함께하지 않았다. 그의 잠적에 놀란 라스 울리히는 제이슨에게 전화하였고, 제이슨은 "난 더이상 메탈리카 멤버가 아냐. 혼자 있게 내버려 둬. 다신 전화하지 마. 안녕.(I'm not in Metallica anymore, leave me alone and don't call me again. Bye.)"이라는 통보를 끝으로 더이상 연락을 받지 않았다. 그렇게 2001년 1월 17일 제이슨 뉴스테드의 탈퇴가 발표되었다. 공식적으로 표명한 탈퇴사유는 "사적이고 개인적인 이유, 그리고 수 년간 내가 사랑하는 음악을 하며 나 자신에게 입힌 물리적 상처들"이었다. 이후 제이슨의 인터뷰를 보면 제임스와 라스가 가정을 꾸리면서 메탈리카의 창작활동이 사실상 멈춰버린 데 반해, 자신은 음악과 결혼했고 자신의 곡이 자신의 아이들이므로 계속 음악을 만들고 싶어서 밴드를 나갈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도 한다.
제이슨은 메탈리카 멤버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퍼포먼스로 유명했는데 제이슨도 사람인지라 이런 퍼포먼스는 몸에 많은 무리를 주었다. 1986년 메탈리카에 가입한 이래 연간 200회의 공연을 소화하며 '미친 사이코'수준의 헤드뱅잉, 자해적 퍼포먼스[10] 등으로 목이며 허리며 멀쩡한 데가 없었다. 활동 5년차인 1990년 제이슨을 진단한 의사는 활동을 그만 두라고 할 정도로 몸 상태는 좋지 않았다. 그리고 제이슨은 탈퇴 이후 인터뷰에서 '이전까지 보여 왔던 퍼포먼스를 하는 연주자로서는 더이상 무대를 선보이기 어려운 몸 상태였다'는 회고를 한 바 있다.#

(커크 해밋: "제이슨이 상처받았대. 스스로 마음을 다잡을 시간이 필요할 거야. 우린 제이슨에게 기회를...")

'''제이슨이 씨발 밴드를 나갔어! 제이슨이 씨발 밴드를 나갔어! 내가 어디 이해 못한 부분이 있는 건가? 봐, 뭔 말인지 알아? 제이슨이 씨발 밴드를 나갔대! 마침표! 느낌표! 알아듣겠어? 내가 빼먹은 게 있나? 등식(equation)에서 어느 부분이 빠진 거지?우리가 대체 언제 이렇게 나쁜 놈들이 된 거야? 그 부분이 이해가 안돼. 씨발 제이슨이 씨발 밴드를 나갔다고. 이런 세상에.'''

- 제이슨의 탈퇴 소식을 접한 라스 울리히

제이슨의 탈퇴 소식에 라스 울리히는 "밴드를 버리고 자기 자신을 희생양으로 포장하려 한다.", "(메탈리카의 현재 모습이 자신이 원하는 모습이 아니라는 제이슨의 말에 대하여)지금의 메탈리카의 모습이 제이슨이 원하는 메탈리카의 모습일 것이다."라고 직설적인 비아냥을 일삼는 등 프로의 언동이라고 보기 한심한 추태를 보였다. 제이슨의 탈퇴의 원인이 된 제임스 역시 제이슨 탈퇴 직후에는 별반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였다.
한편 커크 해밋은 제이슨의 프로젝트 밴드에 참여하는 등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재활원에서 통렬한 자기 반성을 하고 나온 제임스는 멤버들(제임스와 라스)이 제이슨에게 가해 온 부당한 일들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성하는 모습을 계속 보였다. 이후 2009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식에 함께하고 2011년 밴드 결성 30주년 행사에 게스트로 초청받아 함께 공연하는 등 관계는 다시 원만해진 것으로 보인다.

3.3. 메탈리카 이후 활동


이후 에코브레인, 캐나다의 메탈 밴드 보이보드, 오지 오스본[11] 등 몇몇 밴드를 전전하다가 마침내 2013년 9월, 자신의 밴드 '뉴스테드'를 만들고 정규 앨범을 발표했다. 기량 저하로 상대적으로 루즈해진 메탈리카에 비해 타이트하고 묵직한 사운드를 선보이며 메탈리카 팬들에게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12] 직접 리드 보컬과 베이스, 작사, 작곡 등 앨범 작업 전반을 주도하며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뽐냈다. 2011년에는 토니 아이오미이안 길런의 프로젝트 밴드인 WhoCares에서 베이스를 연주하였다.유튜브 뮤비 링크
상기한 대로 2013년 9월 자신의 밴드 'Newsted'를 런칭하고 EP를 내고 투어를 하며, 오피셜 홈페이지를 꾸리고 왕성한 SNS 활동을 하는 등 자신이 주도하는 헤비메탈 음악에 매우 의욕적인 모습을 보였다. 여기에 더해 제임스 헷필드가 왕년의 목소리를 잃어버리고 일찍이 소프라노(...)가 되어버린 반면 제이슨은 걸걸한 전성기 시절 목소리를 비교적 잘 유지하고 있었다.[13] 하지만 정규앨범 'Heavy Metal Music'이 갓 나온 2014년 9월, 돌연 홈페이지와 인스타그램, 트위터, 페이스북을 일거에 폐쇄하고는 아래와 같은 메시지만을 띄워놓은 채 '''완전히''' 잠적해버렸다.

Jason Newsted is not on Twitter, Instagram, Facebook, or any other social networking website as of September 15, 2014 & and has no affiliation with any such impostor sites using his name or likeness unlawfully. (제이슨 뉴스테드는 2014년 9월 15일부로 트위터,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또는 그 외 다른 어떤 사회관계망 서비스도 이용하고 있지 않으며, 그의 이름을 도용하는 어떠한 사칭 사이트와도 관계가 없음을 밝힙니다.)

Newsted 투어를 함께한 기타리스트의 말에 따르면 정규 앨범을 녹음하고 얼마 되지 않아 갑작스럽게 해체 의지를 밝혔다고 하며 간간이 연락은 된다고. 하지만 뭔가 떨떠름한 태도와 헤비메탈 뮤지션답지 않게 정치적 올바름이 느껴지는 발언때문에 일부 호사가들은 그가 약물 중독 치료를 받게 된 것이 아닌가 의심하기도 한다. 그래도 루머와 달리 건강히 잘 지내고 있기는 한 듯. 최근 인터뷰에 따르면 밴드 운영 및 투어에 너무 많은 비용이[14] 소모된 데다, 어머니의 건강 문제까지 겹쳐 결국 해체 결정을 내리고 2016년까지 아주 활발한 음악활동은 하지 않고 있다.
2015년 12월 28일 모터헤드의 리더 레미 킬미스터가 사망한 이후 여러 매체에서 모터헤드와 관련된 뮤지션들을 상대로 레미와의 추억에 대한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29일 미국의 어느 라디오 방송국에서 제이슨 뉴스테드와 전화연결 섭외에 성공해 레미에 대해 회고하는 시간을 가졌다. 단 미리 약속된 부분인지 제이슨의 근황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기에 뭘 하고 지내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그리고 2016년 7월 그가 새로운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Would And Steal라는 이름의 어쿠스틱 밴드로 활동할 계획을 잡고 있다고 한다. 확정된 밴드명은 Jason Newsted and the Chophouse Band로, 기존 커리어를 생각해보면 매우 뜬금없게도 컨트리 뮤직 밴드이다.[15] 제이슨은 보컬 겸 어쿠스틱 기타리스트를 맡고 있으며, 꽤 걸쭉한 톤으로 자작곡과 여러 커버곡들을 무대에서 선보이고 있다. 메탈리카 시절 Garage inc. 음반에 수록된 밥 시거의 Turn the Page도 즐겨 커버하는 것으로 보인다.

3.4. 사용 장비


고가 베이스 유저로 유명하다. 스펙터, 알렘빅 등을 사용했을 때 사운드에 불만은 없었지만 무게가 무겁고 땀을 흘렸을 때 악기의 연주감이 떨어져 공연에 사용하기 어렵다는 불만이 있었다. 그 후 윌 리(Will Lee)를 비롯한 주변 베이시스트들의 추천으로 Sadowsky 악기를 접하였고 그 이후부터 주로 사용하는 베이스는 Sadowsky NYC 모델이다. 악기를 알게 된 후 억 단위의 돈을 꼬라박아 NYC를 수집한 것은 유명한 일화. Sadowsky뿐만 아니라 Alembic, Dingwall, Spector USA, Wal, Zon 등 하이엔드 베이스를 수십대 보유하고 있다.

4. 기타


▼뉴스테드의 오디션 당시 녹음한 트랙들로 생생한 톤을 들을 수 있다. 특히 Fight Fire With Fire에서 피크 피킹의 장점을 살린 날카로운 맛이 일품.

00:00 Master Of Puppets
07:40 Battery
11:50 Seek and Desroy
18:00 Creeping Death
23:50 Fight Fire With Fire
▼Creeping Death Live - 3분 33초부터 뛰어다니고[16] 5분 30초무렵에는 리드보컬로 부른다.

▼Battery에서 헤드뱅잉 장면만 이어 붙인 영상

  • 2016년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세션맨들의 이야기를 다룬 '하이어드 건'이란 다큐멘터리에 이와 관련된 제이슨의 인터뷰가 담겨있다. 클리프 죽음 이후 벌어진 오디션 때 자기가 제일 처음으로 오디션 장에 도착했었다는 얘기와, 처음 몇주는 푼돈만 받고 연주를 하다 한참 후에야 정규 멤버가 될 수 있었다는 얘기 등을 했다. 그리고 랜디 로즈 죽음 이후 오지 오스본 밴드에서 그를 대신한 기타리스트 브래드 길리스와 비교되는 식으로 이야기가 나온다. 두 사람은 서로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인터뷰를 한다. 광적인 신도를 보유했고 죽음으로 누구도 대신 못할 위상을 지녀버린 사람들을 대신해야 했던 두 사람의 얘기가 절절하게 담겨있다. 그리고 제이슨의 경우 메탈리카 시절 겪은 푸대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법도 한데 어떤 하소연도 없이 같이 했던것으로 영광이었다는 식의 훈훈한 인터뷰를 했다.(반면 빌리 조엘 백밴드는 빌리에 대한 험담을 잔뜩했다.)
  • 풍성한 머리숱과 그 장발의 헤드뱅잉이 인상적인 사람이지만 메탈리카 멤버들 중에서 가장 먼저 헤어스타일을 단발로 바꾸었다. 이전부터 스트링에 머리카락이 끼는 등 사소한 문제가 있었지만 무대 불꽃이 머리카락으로 옮겨 붙어서 짧게 자른 후부터 짧은 헤어스타일을 유지하고 있다.
  • 2006년에는 앰프가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해서 왼쪽 어깨뼈가 골절되고 회전근 등이 파열돼서 1년 넘게 모던 아트계열 그림을 그리면서 요양하였다.
  • 대인배적인 성격으로도 유명한데, 상술했듯 메탈리카에 대한 감정에 대한 얘기들을 봐도 알 수 있다. 또한 넓은 인맥으로도 유명하여 대선배인 이언 길런, 토니 아이오미, 오지 오스본 과도 친분이 있고 자신의 첫 밴드인 플롯앤재썸에도 탈퇴 후에도 종종 앨범작업을 도와주었다. 데이브 머스테인과도 친분이 있어, 메가데스 공연에 게스트로 참여하여 데이브가 메탈리카 시절 연주했던 Phantom Lord를 노래하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이 당시 나이가 51세인데 아직까지도 그 악마같은 성량을 뽐내고 있다...반대로 젊은시절 잘생긴외모와 매력적인 웃음소리를 가지고있다.
  • 로버트 트루히요랑은 메탈리카의 베이스 자리가 교체되기 훨씬 전 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이다. 둘다 성격이 좋다보니, 서로 질투하지 않고 응원하는 사이.

[1] 심지어 이게 메탈리카 재적 시절 거의 유일한 실수였다고...[2] 여기에 대해 제임스는 제이슨이 보컬과 베이스를 같이 할 수 있는 노래가 그것들뿐이라서(...) 시켰다 하는 농담을 한 적이 있다.[3] 베이스 기타 항목에도 작성된 내용이지만 피크 피킹이 핑거 피킹보다 떨어지니 어쩌니 하는 것은 정말 부질없는 짓이다. 피킹 주법은 크게 핑거 피킹과 피크 피킹 두 가지가 있고 그 중 연주자의 편의성, 사운드 등을 고려해서 사용하면 그걸로 땡이다. 피크를 애용하는 프로 베이시스트들도 어지간한 아마추어들보다 핑거 피킹을 비롯한 다른 연주법을 훨씬 잘 연주한다. 메탈리카 가입 당시에 그렇게 욕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요즘 유튜브 댓글 중 다수는 제이슨을 칭송하고 있다.[4] 레미는 밴드에서 베이시스트가 나간 이후 직접 베이스를 연주하기로 했는데, 기타에 익숙한 손인지라 베이스 역시 피킹을 선호했다.[5] 라스 울리히가 오디션에 참가해달라는 요청을 했으나 거절했다. #[6] 떠돌던 풍문과 달리 메가데스의 베이시스트 데이빗 엘렙슨은 메탈리카의 오디션과 관련이 없다. 데이브 머스테인은 클리프 사망 후에 메탈리카가 데이빗 엘렙슨을 영입하려고 한다는 '''소문'''이 돌아서 엄청나게 긴장을 타고 있었지만 엘렙슨이 메가데스에 남아서 매우 안심했다고 밝혔다. (당시 엘렙슨에게 개인적으로 연락이 왔는지는 본인만 알겠지만) 머스테인의 기억으로는 86년에 메탈리카가 엘렙슨에게 오디션에 참가해달라는 연락을 한 적은 없다. (Bassist David Ellefson wasn’t invited to join Metallica after the tragic death of Cliff Burton.) #[7] 테스타먼트의 베이시스트였던 그렉 크리스찬 역시 인터뷰나 다른 뉴스 소식으로 메탈리카 오디션에 참가했다는 기록은 없다.[8] 프라이머스(밴드)에 소속된 채 오디션에 참여하였으며, 커크 해밋의 친구였다. 프라이머스는 1984년 결성되어 공연중이었으나 아직 정규음반을 내지 않은 상태였는데, 제임스는 '본인의 색깔이 너무 강하여 메탈리카를 덮고도 남을 컬러다'라며 레스를 최종 선발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탈락한 레스는 프라이머스에 계속 남아 데뷔음반을 낼 수 있었다. 레스 본인의 말에 따르면 스케이트 바지에 테니스 신발을 신고 뱃지가 주렁주렁 달린 자켓에 모히칸 머리를 한 채 오디션장에 들어가는 바람에 제임스가 “이 이상한 놈은 뭐지?”하는 무관심한 표정을 한 번 보이고 자기 쪽에 관심을 거의 두지 않았다고 한다.[9] 메탈리카 가입 후 첫 공연이 1986년 일본 무도관 공연이었다.[10] 베이스 몸통에 머리를 들이박는다든가..[11] 공교롭게도 제이슨의 메탈리카 탈퇴로 인해 오지 오스본의 베이시스트 로버트 트루히요가 메탈리카로 빠져나갔는데, 제이슨은 로버트의 공석을 메우는 알바를 한 셈이 되었다.[12] 메탈리카 앨범에서 등장했다면 상당히 팬들이 좋아했을 만한 곡들도 있다.[13] 90년대 중반기에는 사실 제임스가 기량이 저하되긴 했어도, 그나마 가장 나은 목상태였는데도, 제이슨이 백보컬로 같이 들어올때는 제임스의 소리가 묻힌다. 흠좀무..[14] 규모 있는 락페에 초대되어 게런티를 받거나 대형밴드의 투어는 수익이 발생할 수 있지만 소규모 밴드의 월드 투어는 수익을 내기가 어렵다. 제이슨의 경우 솔로밴드를 가동하면서 발생하는 모든 비용을 본인이 처리했기 때문에 작은 규모라도 월드 투어를 시작하면 국가를 옮길 때마다 몇 백에서 몇 천만원 정도로 돈이 깨진다. 뉴스테드 본인의 재산도 상당한 것으로 예상하고 있지만 앨범 판매도 대박나지 않은 상태로 밴드를 끌고 다니면 그 지출은 무시못할 수준이 된다.[15] 선배인 리치 블랙모어잉베이 맘스틴도 같은 행보를 보였다. 오랫돈안 메탈에 몸담았다가 다른 장르로 갈아탄 대표적인 케이스. 제이슨도 오랫동안 메탈을 했다가 메탈에 지쳐서 좀 다른 방향으로 갔을 수도 있다.[16] 단순 반복 리프라도 뛰어다니면서 연주하는 것은 정말 힘들기에 메탈계열 연주자들이 헤드뱅잉은 많이 해도 뛰어다니면서 연주하는 경우는 드물다. 알렘빅 베이스가 베이스 중에서도 무거운 편에 속하는 데다가 제이슨의 베이스를 낮게 메는 습성 상 저렇게 뛰어다니는거 장난 아니게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