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M.

 


[image]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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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알.이.엠.
R.E.M.
'''
'''멤버'''
'''마이클 스타이프, 피터 벅, 마이크 밀스, 빌 베리'''
'''입성 연도'''
'''2007년'''
'''후보자격 연도'''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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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베리 탈퇴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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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베리 탈퇴 이후
1. 개요
2. 활동
3. 음악
4. 음반 목록
5. 뒷이야기


1. 개요


조지아 주 에덴스에서 결성된 미국얼터너티브 록 밴드. 총 8500만장의 앨범판매고를 기록하고 있으며 사실상 얼터너티브 록이라는 장르의 '''창시자'''중 하나이다.[2]
8,90년대 대중음악사를 대표하는 밴드 중 하나며, 너바나, 라디오헤드를 비롯한 1990년대에 활동했던 수많은 밴드들이 영향을 받았다. 이 때문에 인기는 이후 등장하는 걸출한 얼터너티브 음악가들에게 밀릴지 몰라도 90년대 이후 음악에서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훌륭한 아티스트로 손꼽히며, 특히 얼터너티브 록과 모던 록을 선구자적으로 이끌었다는 데에 있어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어클레임드 뮤직을 비롯한 여러 음악 잡지에서도 쉴새없이 거론되며 점점 더 평가가 높아지고 있는 그룹이기도 하다.
또, 지방 듣보잡 밴드가 라디오를 통해 인지도를 쌓아 주류 음악계에 발을 들여놓은 특이한 케이스이다.

2. 활동


1979년 베이시스트 마이크 밀스와 기타리스트 피터 벅이 동네 레코드점에서 만나[3] 밴드를 만들기로 하고, 1980년 보컬 마이클 스타이프와 드러머 빌 베리가 들어오면서 결성되었다 처음에는 불러주는 곳이면 어디든 가서, 생일 파티에 가서 연주하기도 했다. 1981년 인디 레이블 Hib-Tone을 통해 첫 싱글 Radio Free Europe을 발매했다. Hib-Tone은 곧 사라졌고, I.R.S 레이블로 옮겨서 82년에 첫 EP Chronic Town을 발매했다. 처음에 메이저 방송국에서는 R.E.M.에 전혀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팝이 지배하던 당시의 분위기와 맞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뜬금없이 조지아 주 대학 방송국에서 이들의 음악을 틀어대기 시작했고[4], 인기를 얻게 되었다. 결과 1983년 데뷔앨범 Murmur를 발매했다.[5] 이 앨범은 평단의 호평을 얻었고, 그 해 마이클 잭슨의 대표 음반인 Thriller 앨범을 누르고 롤링 스톤지가 선정한 '''올해의 앨범'''이 되었다. 그만큼 이들의 음악이 혁신적이었다는 것이다.
이후 앨범들을 내며 커리어를 쌓다, 1987년 The One I Love가 실린 Document 앨범이 대박을 치면서 메이저 레이블인 워너뮤직으로 이적했고, 1988년 메이저 데뷔작인 Green을 냈다. 1991년 Losing My Religion이 실린 Out of Time이 그래미 4관왕을 찍으며 절정기에 들어섰고, 1992년에 발매된 Everybody Hurts가 실린 Automatic for the People도 엄청난 히트를 기록하며 얼터너티브 장르의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1994년 발매한 Monster에서 그런지 사운드를 도입하는 등 다양한 음악적 행보를 이어나가지만, 1997년 드러머인 빌 베리가 건강 악화로 탈퇴하고 밴드는 3인조가 된다. 빌 베리의 탈퇴[6] 뒤 2000년대 들어서면서는 부진하면서 한물 간 밴드 취급을 받았으나, 2011년 15집인 Collapse into Now를 발매하며 밴드가 건재함을 알렸다. 하지만 아쉽게도 2011년 9월 공식 해체를 발표하며 31년의 역사를 정리했다.

3. 음악


이들은 1980년대 대학가 라디오 방송 운동을 이끈 록 밴드였다.[7] 당시 대학가에 널리 퍼진 이러한 음악들을 통틀어서 '컬리지 록'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당시 팽창할 대로 팽창한 팝 음악계에 반발하는 인디 록의 선구자였다.[8]
이들의 사운드는 비틀즈버즈(미국 밴드)가 시도했던 쟁글 팝의 영향을 받았다. 쟁글 팝은 말 그대로 쟁글거리는 기타 사운드가 중심이 되는 장르로, 기타리스트 피터 벅은 여기에 독특한 아르페지오를 구사하며 밝으면서도 꽉 차 있고 역동적인 사운드를 만들어 냈다. 패티 스미스[9]텔레비전(밴드), 벨벳 언더그라운드 같은 예술적이고 시적인 뉴욕 펑크를[10] 기초로 컨트리나 버즈나 러빈 스푼풀 같은 포크 록, 컨트리를 접목시키면서 1980년대 주류 팝과 다른 길을 개척했다. 이러한 특성은 후에 너바나가 이어받게 된다.[11]
너바나의 Smells like teen spirit가 그렇듯이, R.E.M.의 주요 히트곡들도 20년 넘게 지난 지금 들어도 그렇게 옛날 노래라는 느낌이 별로 들지 않는다. Losing My Religion이나 Everybody hurts, It's the end of the world 등은 지금도 미국 모던록 방송에서는 자주 들을 수 있으며, 모던록 라디오에서 틀어주는 곡들 중 제일 오래된 곡들이 R.E.M.의 곡이다.

4. 음반 목록



5. 뒷이야기


밴드명인 R.E.M.은 '''R'''apid '''E'''ye '''M'''ovement, 급속 안구 운동의 약자다.[12] 마이클 스타이프가 사전에서 무작위로 고른 이름이라고 한다.
보컬이자 막내인 마이클 스타이프는 남성적인 보컬을 가지고 있었고 그 남성성으로 팬들에게 어필을 했지만, 정작 스타이프 본인은 양성애자였다. 후에 커밍아웃을 하긴 했으나 수많은 질문 공세에 시달렸다. 본인이 밝히기를, 여성에게 매력을 느껴 사귄적도 있다고 한다. 사실 스타이프는 게이나 바이, 헤테로 같은 명칭으로 불리기 보다는 퀴어라 불리는걸 선호하며, 딱딱 구분짓는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거기다 나이가 들면서 탈모가 심해져서 90년대 중후반부터는 롭 헬포드처럼 아예 대머리로 활동했다. 이를 두고 모비가 사람들이 자신을 마이클 스타이프로 오인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탄한 적도 있다.
작사하는 마이클 스타이프의 영향으로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가사가 많다. 초기엔 미국인들도 해석에 갑론을박을 펼칠 정도로 상당히 모호한 편이였으나 [13] Document 이후로는 정치적인 메시지가 강해지는 편이다. 실제로 스타이프는 U2의 보노처럼 사회적 활동을 활발히 펼쳤다. 해외에선 U2와 맞먹는 영향력에 비해 한국에선 엄청나게 인지도가 떨어진다. 그래도 90년대 초중반에 너바나의 선배 밴드로 소개되어 듣게 된 사람들도 많다.
델리스파이스 김민규가 강하게 영향을 받았으며, 라디오헤드오아시스가 R.E.M.의 서포트 밴드였던 시절도 있었다.
심슨 가족에 특별출연을 한 적이 있는데, 가 술집을 리모델링해서 기존의 술집이 없어지자 호머 심슨이 자신의 차고를 술집으로 개조하는데, 이 차고에서 환경 보호 캠페인을 하는 줄 알고 공연을 한다. 모가 불법 드립을 치며 차고에 오자 호머가 사냥 클럽이라고 말해서 스타이프가 호머가 거짓말을 한 것에 열받아서 병을 깨고는 그 깨진 병으로 위협하며 화를 내는데, 다른 멤버들이 R.E.M. 스타일이 아니라며 말리자 진정한 뒤 자기가 깬 병을 빗자루로 '''정갈하게''' 쓸어담는다.
밴드 멤버들 사이가 꽤 좋다. 또 하나, 팬들은 다 알지만 일반인들은 잘 모르는 제 5의 멤버는 바로 매니저를 맡고 있는 버티스 다운스 4세Bertis E. Downs, IV. 버티스 다운즈는 R.E.M. 무명시절 로스쿨 졸업하고 빈곤 등의 문제를 다루는 변호사로 살려는 포부를 품었지만 취직이 안돼 반백수처럼 살던 이생망이었다. 그래도 음악은 꽤 좋아해서 레코드 점을 들락거렸는데 그때 레코드점에서 일하던 피터 벅으로부터 자신이 좋아하던 닐 영 레코드 구매 컨설팅(?)을 받던 인연으로 R.E.M.과 엮였다. 처음 공연을 보는 순간 "비틀즈보다 더 대단한 밴드가 될 것"이라고 느꼈다고... 마침 하는 일도 별로 없겠다, 그냥 친구끼리 도와준다고 꼈다가 어느날 정신차려 보니 직업이 됐다.[14] . R.E.M.의 두번째 앨범 Reckoning의 "Wind Out"에 백보컬로 참여하기도 했다.
좀비 아포칼립스 소설 세계대전Z에서도 잠깐 언급된다. 미군 출신 인터뷰어가 주변의 동료들이 엄청 다양한 출신이었다고 하면서 언급되는데, 그 중에서 마이클 스타이프가 있었다고 한다.[15]
이들의 노래인 It's the end of the world는 인디펜던스 데이치킨 리틀의 ost로 사용되었다.
커트 코베인이 자살할 때 마지막으로 들은 음악이 이들의 앨범인 Automatic for the People 이다.[16]
MBC 드라마 별은 내 가슴에에 Everybody Hurts가 나온다
[1] 로큰롤 명예의 전당의 5가지 헌액 카테고리에서 가장 중요한 부문이자 공신력이 인정되는 '공연자(Performers)' 명단에 한하여 기록하도록 함. 나머지 부문의 헌액자들은 따로 문서 내 헌액명단에 수록해주길.[2] 얼터너티브 록 이라는 장르가 너무 넓고, 그 음악적 특징을 규정하기도 힘들어서 유일한 창시자라고 하기는 힘들다. 그래도 어찌 됐든 픽시즈, U2, 너바나 등과 더불어 초기 얼터너티브에서 아주 중요한 아티스트임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3] 이건 다른 자료와 기록이 다르다.위키피디어에 따르면(https://en.wikipedia.org/wiki/R.E.M.) 애씬스의 Wuxtry Records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하던 피터 벅과 그곳을 뻔질나게 드나들던 마이클 스타이프가 서로의 음악 취향이 비슷하다는 걸 알고 의기투합했다고 나와있다. VH1의 Behind the Music(https://www.youtube.com/watch?v=AVck4B1429M)에 따르면 애씬스의 조지아 대학 중퇴생이자 레코드점 점원 이었던 피터 벅은 자신이 사고자하는 레코드 판마다 자신만이 아는 기호를 남기는 버릇이 있었는데 꼬박 꼬박 그 레코드 판을 사가 허탕치게 만드는 손님이 바로 마이클 스타이프였다고 한다. 또 위키피디어에 따르면 마이크 밀스와 빌 베리는 조지아주 애씬스에서 10세때부터 서로 알고 지내던 동네 친구였다고 한다. 들리는 소문으론 마이크 밀스가 범생인 반면 빌 베리는 꽤나 껄렁한 스타일이라서 마이크 밀스가 고생 좀 했다고...어디까지나 소문이다.)[4] 사실은 뜬금없지 않다. 멤버 네명 모두 애씬스의 조지아대학 출신이니까. 쉽게 말해 비록 무명이었어도 이들은 조지아 대학을 대표하는 밴드였던 셈 [5] <Radio Free Europe>을 재녹음해 수록했다. Hib-Tone에서 발매된 싱글과는 약간 다르다.[6] 농장 운영하며 가끔 자선공연 등에만 모습을 보인다.[7] 이는 인디 시절 소속되어있던 IRS 레이블의 전략도 있었다. 미국 대학 방송은 그 수가 대단치 않았고 청중도 소수에 불과했다고 한다. R.E.M.와 IRS은 어찌보면 마이클 잭슨과 대비되는 틈새시장을 개척한 셈.[8] 이러한 이유로 <Radio Free Europe>(Hib-Tone에서 발매된 싱글이다.)은 2009년 미국 의회도서관에서 선정한 National Recording Registry에 영구 등재되었다.[9] 밴드의 주축인 스타이프는 본디 내성적이였지만 패티 스미스의 Horses를 듣고 고등학교 시절 밴드를 결성했고 지금도 열렬한 패티 스미스 찬미자이자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한편 피터 벅 역시 패티 스미스의 공연을 보고 대학을 중퇴했을 정도로 대단한 팬이였다.[10] 이 외 빅 스타렛츠 액티브, 필리스 같은 파워 팝 흐름과 갱 오브 포라던가 와이어 같은 영국 펑크 혁신가들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11] 실제로도 너바나는 R.E.M과 비슷한 면이 많았다. 얼터너티브 록이였지만 팝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었고, 인디 씬을 대표하던 밴드였지만 메이저 밴드가 되고, 상업적으로 변한 자신들의 모습에 고뇌하였으며, 성 소수자 자신이거나 그들을 대변하는 사람이었다.(마이클 스타이프는 동성애 지지자, 커트 코베인은 양성애 지지자였다. ) 서로간에 어느정도 음악적 교류도 있었는데, 초창기 너바나가 R.E.M.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R.E.M.은 1994년작 <Monster>에서 너바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사운드를 시도했다. 개인적으로도 친분이 있었는지 <What's the Frequency, Kenneth?> 뮤직비디오에서 피터 벅은 커트 코베인이 사용하던 펜더 잭스탱을 들고 나와서 연주한다.[12] 렘수면 할때의 렘이 이 단어를 뜻한다[13] 미국 평론가인 숀 오스본의 평을 인용하자면 "R.E.M.의 감상자들은 낯선 장소의 불가사의하고 파편화된 이미지를 본다".[14] http://www.weepingelvis.com/rem-manager-bertis-downs-on-fav-songs-whats-next-reagan/[15] 마이클 스타이프 아버지가 바로 직업군인이다[16] 커트 코베인과 마이클 스타이프는 절친이어서 자살 후 마이클 스타이프도 큰 충격을 받았다. 어느 정도로 절친이었냐면 마이클 스타이프가 커트 코베인 집에 놀러가면 커트니 러브가 삐진 목소리로 "난 빠져줄 테니 둘이서 재미보쇼"하고 나갈 정도였다고...커트 코베인은 R.E.M.이 명성을 관리하는 방법을 많이 부러워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