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타바타케 아키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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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畠顕家
1318년 4월 3일 ~ 1338년 6월 10일
1. 개요
2. 생애
4. 평가
5. 기타
6. 대중매체


1. 개요


일본의 가마쿠라 막부 말기와 남북조 시대의 공가, 무장으로 키타바타케 지카후사(北畠親房)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동생은 아키노부(顕信), 아키요시(顕能)가 있고, 아들로는 아키나리(顕成) , 무라카미 모로키요(村上師清) 등이 있다. 즉, 키타바타케 가문은 무라카미 겐지(村上源氏)의 방계이다.

2. 생애


아버지 지카후사는 노치노산보(後の三房)로 불리는 고다이고 천황의 측근 중 한 명이며 겐코 3년/쇼쿄 2년(1333년)에 시작된 겐무 신정에서의 고다이고 천황을 보좌했다. 키타바타케 아키이에는 이 해 종3위 무츠노카미(陸奥守)에 위계된다.
겐무 원년(1334년) 고다이고 천황의 황자인 노리요시 친왕을 받들고 아버지와 함께 간토의 무사를 복속시키기 위해 무츠 국 다가 성(多賀城)으로 하향해 도호쿠 지방(東北地方)을 다스렸다. 같은 해 종2위에 위계되었고, 겐무 2년(1335년)에는 진주후쇼군(鎮守府将軍)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가마쿠라에서 천황의 친정에 반기를 들고 군을 이끌고 교토로 진격한다. 이 때문에 음력 12월 아키이에는 무츠의 병력을 이끌고 상경해 닛타 요시사다, 구스노키 마사시게와 함께 아시카가 군을 격파하여 다카우지를 교토에서 축출하였다. 겐무 3년(1336년) 음력 1월 다시금 상경군을 이끌고 온 다카우지를 셋츠에서 격파했고, 다카우지는 큐슈로 도주하였다.
음력 3월 곤주나곤(権中納言)에 임관되고, 봉기했던 아시카가 측 무사를 토벌하기위해 무츠로 돌아갔다.
엔겐 2년·겐무 4년(1337년) 아시카가 군이 다가 성을 공략했지만, 이 시기 아키이에는 지배 거점을 료 산((霊山, 현 소마 시(相馬市) 또는 다테 시(伊達市)으로 옮겼기 때문에 난을 피했다.

3. 아오노가하라 전투


엔겐 3년·겐무 5년(1338년) 음력 5월 다시 서쪽으로 진격해 아시카가 측의 가마쿠라를 공략한다.
아오노가하라 전투((青野原の戦い)에서 아시카가 측에 승리했지만, 병력의 감소와 피로 누적에 따라 교토 공략을 단념하고 이세(伊勢)로 후퇴했다. 다시 세를 수습하여 이가(伊賀)로 진출했지만, 오슈부터 종군한 역전의 장병들이 피로와 기아로 힘 한번 쓰지 못하고 패해 퇴각하였다. 또, 다시 재기를 꾀해 이즈미 국 사카이 시, 이시즈에서 거병하지만, 예정되었던 우군의 도착 지연으로 고노 모로나오가 이끄는 아시카가 군과의 전투에서 오합지졸로 맥없이 패해 전군이 산개되어 버린다.
이 후, 아키이에는 함께 남아 있던 2백 기의 병사를 이끌고 싸워보지만, 이시즈 전투에서 패사하였다. 그의 나이 향년 21세였다. 사카이 시 니시 구(西区)의 기슈 가도(紀州街道)와 이시즈 강 교차 지점에 놓인 다이요 다리(太陽橋) 남쪽 부분에서 아키이에가 전사했다고 한다. 현재 그 장소에는 그의 공양탑이 세워져있다.

4. 평가



5. 기타


다케다 신겐이 사용했다는 풍림화산의 깃을 먼저 사용했다는 설이 존재하지만, 명확한 증거는 없다.

6.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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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노부나가의 야망 혁신에서 특전무장으로 등장했다.
다카우지의 일생을 그린 1991년작 NHK 대하드라마 태평기에서는 여배우인 고토 쿠미코가 아키이에 역을 맡았다.영상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의 에디터에는 키타바타케 아키이에가 일본 문명의 특수 유닛인 사무라이의 영웅 유닛으로 구현되어있으나, 문제는 키타바타케가 등장하는 캠페인이 전혀 없다(...)[1]. 사실상 에디터 전용 영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