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노키 마사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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楠木正成
1294년 4월 25일?[1] ~ 1336년 7월 4일
일본의 가마쿠라 막부 말기와 남북조 시대의 무장으로 일본에서는 충의의 대명사로 여겨지고 있으며, 법명은 레이코지다이엔요시타츠만도우(霊光寺大圓義龍卍堂). 덴노에게 대항한 무사들이 많았던 일본에서 덴노와 일본 황실에 끝까지 충성을 바쳤기에 덴노에 대한 충성심의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묘비에 따르면 카와치국 이시카와군 아카사카촌 출생이고, 가마쿠라 막부 측 사료에는 악당 (惡堂) 구스노기 효에노죠(悪党楠木兵衛尉)라고 기록되어 카와치를 중심으로 활동한 호족이라고 추측한다.
구스노기 마사토의 아들이라고 알려졌지만 사실 여부는 명확하지 않다. 이요 국 타치바나 가문 타치바나 토오야스의 후예라는 말도 있지만, 이전의 계보와 일치하지 않고 카와치 국에는 타치바나 성의 유래가 되는 지역이 없으므로 후세에 지어낸 이야기인 듯하다.
그 밖에 간토 지역 출신 또는 하타 가문의 일족, 조상이 호죠 가문의 가신으로 카와치로 이주했다는 설 등이 있다.
1331년에 가마쿠라 막부를 타도하기 위해 고다이고 덴노가 카사기 산에서 거병을 시도하자 이에 호응하여 덴노 편에서 서서 싸울 것을 결의하여 국수의 가문을 하사받았으며, 시모아카사카 성을 축성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9월 11일에 시모아카사카 성에서 500명의 군사로 약 20 ~ 30만의 막부군을 상대로 농성을 하면서 유격전을 펼친 아카사카 전투를 벌였지만 포위하는 막부군의 병력이 늘어나면서 수로까지 차단되자 10월에 성에 불을 질러 밤에 성 밖으로 도주하여 요시노, 쿠마노 방면으로 잠복했다.
이후 반 년 후에 카미아카사카 성, 치하야 성을 축성하였으며, 1332년 4월에 막부군이 시모아카사카 성에 주둔하면서 군량미 조달에 어려움을 겪자 키이에서 군량미를 보급하려고 하자 키미토우게에서 매복하여 보급품을 탈취하였다. 또한 군사들을 호위병과 인부로 위장하여 쌀 가마니에 병장기 등을 숨기면서 수송대와 구스노키군이 싸우는 것처럼 연기하였는데, 막부군이 수송대가 위험한 것이라 판단하여 이들을 구원하면서 성 안으로 수용하자 가짜 수송대로 쌀 가마니 안에서 병장기들을 꺼내어 유아사 조부츠의 막부군을 공격하여 시모아카사카 성을 탈환하였다.
이후에도 텐노지, 나카노시마 방면에서 막부군을 격파하여 자금을 탈취하였으며, 야마토국의 요시노에서 막부와 싸우고 있는 고다이고 덴노의 황자인 모리요시 친왕과 함께 카미아카사카 성, 콘고우 산의 산성, 치하야 성 등에서 농성하였다. 막부에서 마사시게에게 엄청난 현상금을 걸자 각지에서 수 만의 대군[2] 이 치하야 성으로 올 때 마사시게의 병력은 1000명밖에 안되었다고 하며, 치하야 성에서 돌이나 나무를 던지거나 담장을 쌓으면서 짚으로 만든 인형으로 유인하여 열탕이나 분뇨 등을 투하하는 전술 등으로 100일 이상 버텨내는 활약으로 1333년에 막부 타도의 움직임이 확산되어 각지의 반 막부 세력들이 일어나 막부를 멸망시키게 된다.
고다이고 덴노가 교토로 개선하자 효고까지 마중나가서 호위를 했다고 하며, 고다이고 덴노의 겐무 신정이 시작되자 기록소의 요류도와 잡소결단소의 부교, 사에몬노죠, 쥬고이산, 카와치, 이즈미의 슈고 등의 관직을 거쳤으며, 고다이고 덴노의 신임을 받아 유우키 치카마츠, 나와 나가토시, 치구사 타다아키 등과 함께 ‘산보쿠잇소‘라고 불렸다. 하지만 1334년 겨울에 호죠 가문의 잔당을 공격하기 위해 교토를 떠난 이후에 모리요시 친왕이 모반 혐의로 체포되어 아시카가 다카우지에게 인도되자 관직을 사직했다.
1335년에 호죠 토키유키가 일으킨 나카센다이의 난을 진압하러 간 타카우지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고다이고 덴노가 파견한 닛타 요시사다를 격파하여 교토로 진격하자 복귀하여 키타바타케 아키이에와 연계하여 쿄토, 우지 싸움으로 타카우지를 격파하여 교토에서 축출했다.
1336년에 규슈에서 군대를 재정비한 다카우지가 교토를 공격하려고 하자 고다이고 덴노에게 요시사다를 멀리하고 다카우지와 화목하자는 의견을 냈지만 묵살되었으며, 5월 25일 요시사다 휘하에서 2천명의 병력으로 아시카가 타다요시가 이끄는 수 만의 병력[3] 을 상대로 미나토가와 강 전투를 벌이게 된다. 이 전투를 앞두고 아들 마사츠라(正行)를 사쿠라이에서 가와치로 돌려보낼 때 마사츠라에게 자신이 죽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구스노키 가문과 남조 조정을 위해 계속 싸워줄 것을 당부했다고 하며, 이때 마사시게가 마사츠라에게 전한 유훈을 노래로 각색한 것이 사쿠라이의 결별(桜井の訣別)이다. 다만 태평기 자체가 엄밀한 역사서는 아닌 점 등으로 인해 정식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각색된 전설로 여겨진다.
현재 JR시마모토역 앞에 그 사쿠라이 역 터가 공원처럼 조성되어 있다. 이 사쿠라이의 결별이라는 일화는 후술할 칠생보국과 더불어 태평기에서 가장 유명한 두 씬 중 하나이다. 태평기 16권 <마사시게 효고로 내려가 자식에게 유훈을 남기다>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사자는 새끼를 낳은 지 3일째 될 때 수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던진다[4] . 사자로서의 기량이 갖추어져 있으면 가르쳐주지 않아도 살 것이다. 너는 벌써 열 살이 넘었으니 지금부터 하는 말을 기억하고 이를 지키도록 해라.[5] 이번 전투는 천하를 가를 전투가 될 것이고 이번 생에 네 얼굴을 보는 것은 이것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네가 내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는 때에는 이미 세상은 다카우지의 것이 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이 그렇게 되어 있다 할지라도 네 한 목숨 살려고 오랜 충절을 버리고 항복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친척이든 부하든 우리 집안의 사람이라면 곤고센(金剛山)으로 들어가, 적이 쳐들어 온다면 설령 그게 초나라 활의 명수였던 양유라 할지라도 목숨을 걸고 맞서, 유방 대신 죽은 기신과 같이 충절을 다해라. 그것이 네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효도다"라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고는 서로가 각자 동서로 헤어졌다.
에게야마에 진을 쳐서 16차례 돌격하여 타다요시의 본진 근처까지 올라갈 정도로 유리한 싸움을 진행하지만 해로로 진군한 다카우지의 군세의 양동 작전에 걸린 요시사다가 동쪽으로 이동하여 마사시게가 이끄는 군사들과 떨어지자 바다와 육지로부터 포위되어 고립된다. 포위된 상황에서 다카우지군을 상대로 계속 싸우다가 이쿠타지 숲에서 교토로 패주하는 요시사다의 퇴로를 지키기 위해 밤낮으로 병력 2천으로 버티다가 병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패배하여 잡힐 지경까지 오게되자 가신들과 함께 할복하여 사망한다. 이때 구스노키는 동생 구스노키 마사스에(楠木正季)와 함께 서로 찌르는 방식으로 자결하였다고 한다.
구스노키의 최후 역시 『태평기』에서 매우 유명한 씬 중의 하나이다. 태평기 16권 <마사시게 전사>에서는 마사쓰라와 마사시게의 최후의 대화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인간은 마지막 순간의 일념에 의해 내세의 선악이 결정된다고 한다. 구계(九界)[6] 중 너는 어디에 가기를 바라느냐"
"일곱 번이고 인간 세상에 다시 태어나서 이 손으로 朝敵을 멸하고 싶습니다"
"참으로 죄가 깊고 악한 소원이구나. 하지만 나도 그러하고 싶다. 자, 그렇다면 같이 다시 태어나서 이 바람을 이루도록 하자"
라고 약속하고는 서로를 찔러 같은 곳에 쓰러져 죽었다.
여기서 마사쓰라의 '일곱 번이고 인간 세상에 다시 태어나서'라는 말이 유명해져서, 일곱 번을 다시 태어나더라도 나라를 위해 헌신한다는 뜻의 '칠생보국'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수급은 다카우지에게 보내졌지만 그의 무용에 감탄하면서 존중하여 그 수급은 유족들에게 보내졌다고 한다.
아내는 미나미에 마사타다의 딸 히사코이며 자식으로는 후세에 아버지를 이어 소(小) 남공이라 불린 마사쓰라(正行, 구스노키 마사쓰라)를 필두로 마사토키(正時, 구스노키 마사토키)ㆍ마사노리(正儀, 구스노키 마사노리)가 있다. 이들도 아버지가 섬겼던 천황을 따라 남조에 가담해 다카우지와 맞서 싸웠다.
남조의 시각에서 남북조 시대를 그린 고전 태평기에서 그의 공적을 유난히 강조해 서술하였으며, 아시카가 집안의 사서인 매송론에서는 그를 동정적인 시점으로 서술하여 지, 인, 용을 겸비한 무장이라고 평가받았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전사한 마사시게의 목을 본 다카우지가 "죽고 없다 한들, 가족은 필시 만나고 싶을 게지."라며 그의 목을 정중하게 유족에게 돌려보내는 등, 청렴했던 그에게 보인 다카우지의 경의 때문이기도 했다는 분석이 있다. 또 미나토 강에서 자결할 때까지 아시카가 군과 16번의 전투를 치렀고, 전황이 구스노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던 후반에 다카우지는 구스노키가 그냥 자신에게 투항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잠시 동안 공격을 멈추고 그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는 설이 있다. 이 이야기는 NHK 역사 다큐멘터리 「그때 역사가 움직였다」에서도 인용되었다.
1337년에 고다이고 덴노가 직접 조각한 마사시게 조각상에 제사를 지낸 것을 시작으로 하여 고무라카미 덴노가 나기 명신으로 신의 칭호를 주었으며, 타케미쿠마리 신사의 섭사인 나기 신사에 구스노키 마사시게를 신으로 모시고 있다.
일본 전국시대인 1559년에 마사시게의 자손이라 하는 구스노키 마사토라가 조정의 적이 된 것을 사하여 달라는 탄원을 하여 오오기마치 덴노가 그 죄를 사하였다고 한다. 당시 무로마치 막부 쇼군이던 아시카가 요시테루도 이를 용인했다.
에도 시대에 들어서면 구스노키를 비롯한 남조의 역사에 큰 관심이 몰리게 된다. 미토학과 미토 고몬으로 유명한 미토 번의 번주 도쿠가와 미쓰쿠니는 특히 마사시게를 좋아하여 미나토가와에 마사시게의 추모비를 세운 것이 유명하다. 고다이고 천황이 창건한 미나토가와 근처[7] 의 고곤지(廣嚴寺)에는 마사시게의 목상을 봉납하기도 했다.
스이카 신도로 유명한 사상가 야마자키 안사이도 마사시게를 매우 숭상해, 야마자키 안사이의 학파인 기몬(崎門, 야마'자키' 일문이라는 뜻) 학파를 망남(望楠) 학파라고 하기도 한다. 막부 말기 사쓰마 번사였던 아리마 신시치가 안사이의 학문과 마사시게를 존경하여, 앞서 말한 고곤지의 목상을 사쓰마로 가져가기도 한다. 요시다 쇼인[8] , 가쓰 가이슈, 사이고 다카모리도 마사시게를 충신으로서 존경하여 마사시게나 남조 무장들에 관한 한시를 여러 수 남기고 있다. 막말기 당시에는 심지어는 민간에서는 '조슈 님께서는 正成(마사시게)를 하신다'라는 표현도 유행했고, 반대급부로 기도 다카요시는 누군가의 뒷담화(...)를 할 때 '저 자식은 다카우지 중의 다카우지다'라는 표현을 썼다고 한다[9] . 양이지사나 유신지사와 같은 말로 유명한 '지사(志士)'란 말이 막부 말기에 유행한 것도, 원래 출전은 맹자이지만 태평기에서 그것을 인용한 것이, 에도 시대에 태평기가 유행하면서 지사라는 말이 같이 유행한 결과라고도 한다[10] .
메이지 시대에 들어서면 1880년에 정일위에 추서되어 남공(楠公)[11] 으로 불리거나 미토 번에서 융성했던 미토학의 존왕주의 사가들에 의해 마사시게는 충신으로 추대되어 재조명되기 시작한다. 에도 막부 후기에는 존왕파에 의해서 빈번히 그의 제사가 올려졌고[12] , 그 움직임은 그 후 1872년에 미나토가와 신사 창건으로 결실을 맺었다. 이는 야스쿠니 신사 등의 초혼사 창건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오늘날의 게릴라전과도 유사한 전술을 장기로 구사했던 마사시게의 병법이 유행하여 에도 시대에는 구스노키류 군학으로 널리 알려져, 마사시게의 자손이라 하는 구스노키 마사타츠의 제자였던 유이 쇼세츠가 구스노키류 군학을 강연하기도 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 정부에서 그의 자손들을 수소문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13] 명분 상으로 덴노를 주축으로 한 메이지 시대에는 국가와 덴노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기 위해 덴노를 지킨 충신으로서의 상징으로 부각되어 1890년부터 10년에 걸쳐 일본의 덴노가 사는 황거 바깥 정원에 마사시게의 동상을 건립하여 현대에도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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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남북조정윤론이 제기되어 남조가 정통성을 가진 것으로 여겨지면서 다이난공(대남공)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강담 등에서는 삼국지연의 속의 천재 전략가 제갈량(諸葛亮)과 견주어 참모적인 이미지가 거듭 붙여졌다. 시바 료타로에 따르면[14] 메이지 10~20년대 오사카의 서민가(시타마치)에서는 매일 제갈공명이나 마사시게 등의 영웅담을 길거리에서 버스킹처럼 돈 받고 이야기하는 변사 내지 이야기꾼들이 자주 등장했다고 한다.
그의 패도인 코류 카게미츠는 야마다 아사에몬의 손을 거쳐 메이지 덴노의 패도로 사용되었는데 메이지 덴노는 청일전쟁 중 대본영이 히로시마로 옮겨질 때도 이 칼을 차고 갔다고 한다. 현재 이 패도는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중 황국 사관의 영향으로 대의를 위해 죽을 각오로 전투에 임하는 충신의 표상, 일본인의 귀감이라 찬양되어 수신 교육에도 영향을 주었다. 참고로 위 동상은 일본 황거에 있는 동상.
국화무늬 물이 흐르는 국수(菊水. 키쿠스이)깃발을 사용했는데 2차대전 후기 오키나와 전투의 자살특공작전인 키쿠스이 작전이 여기서 따온 이름이다. 전함 야마토를 포함한 자살특공대원들이 비리법권천 깃발을 두른 것도 구스노키가 국수기와 비리법권천기를 두르고 출정했다 알려졌기 때문이다(비리법권천 일화는 에도 시대에 윤색된 내용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중세사 연구가 진행되어 가마쿠라 막부 말기의 사적 무력집단을 지칭하는 "악당"으로서의 성격이 강조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소설가인 요시카와 에이지[15] 의 소설 사본태평기(私本太平記)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와는 다른 마사시게를 그려냈다.[16] 다만 이 "악당"으로서의 성격은 어디까지나 역사학에서의 이야기이고 아직까지도 마사시게는 일본인들에게는 영웅으로서의 이미지가 대중적으로 자리잡고 있다. 일본 NHK 방송의 TV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당당 일본사(堂々日本史)」에서 「겐무신정의 파괴, 악당 구스노키 마사시게 할복」이라는 타이틀로 방송한 것에 미나토가와 신사가 항의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17]
현대에는 니가타 현에 마사시게의 직계 후손으로 미나미 씨가 있다고 한다. 이 외에도 자손이라고 자칭하는 집안이 몇 개 있기는 한데, 다만 검증은 불가능하다. 15-16세기에 구스노키 집안은 막부의 적으로 씨를 말리다시피 했으니 진짜 자손이 살아남았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징기스칸 4에서는 시니라오 2에서 나오는데, 능력치는 정치, 전투, 지모 순으로 33/'''89'''/'''78'''에 적성은 보병, 궁병, 기병, 수군 순으로 SBAE이다.
전투력과 적성은 다카우지보다 높지만, 총합과 정치, 지력은 다카우지보다 낮다. 엄청난 일본의 에이스지만, 등장시기가 오래 걸린다. 플스판에서는 전투력이 91, 지모가 83까지 상승했다. 전투 특기는 기동, 화공, 공성, 복병. 병과 적성과 전투 특기만 놓고 보면 무사보다는 보병을 이끌기 좋게 되어 있지만, 능력치가 워낙 좋으므로 전투를 통해 다른 특기를 습득시키면 된다.
노부나가의 야망 천하창세의 합전 트라이얼 모드 일본사 편 4번째 스테이지에 아군 총대장으로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전투 99에 지략 100이라는 오버스탯. 징기스칸 4와는 달리 적 총대장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능력치로 확실하게 바른다. 워낙 먼치킨이다 보니 다소 난이도가 있는 일본사 편 중에서는 이 스테이지가 제일 쉽다.
차나왕 요시츠네의 작가 사와다 요시후미의 작품 <산적왕>에서 주인공의 주군으로 등장한다. 작중에선 주인공과 함께 먼치킨으로 그려진다. 여기서는 가마쿠라 막부를 타도할 중요한 5명의 인물이 각각 몸에 별 모양의 점을 가지고 있는데 막부 타도 후에는 이 별이 몸에서 사라진다. 호죠 정권 타도 시점에서 작품이 끝나서 마사시게의 이후 행보는 나오지 않는다.
미즈키 시게루의 '총원 옥쇄하라'에서 대대장이 좋아하는 인물로 유명해졌다. 작중 언급하는 '다이난 공'이 이 사람이다. 정작 구스노키 마사시게는 무작정 옥쇄하기 보다는 아군의 피해를 줄이고 적군에게 피해를 강요하는 현실적인 인물이었다. 작품 내에서도 부하들이 '다이난 공을 모범으로 삼는다면 그러면 안되는데......'라며 회의감을 가지는 모습이 나온다.
楠木正成
1294년 4월 25일?[1] ~ 1336년 7월 4일
1. 개요
일본의 가마쿠라 막부 말기와 남북조 시대의 무장으로 일본에서는 충의의 대명사로 여겨지고 있으며, 법명은 레이코지다이엔요시타츠만도우(霊光寺大圓義龍卍堂). 덴노에게 대항한 무사들이 많았던 일본에서 덴노와 일본 황실에 끝까지 충성을 바쳤기에 덴노에 대한 충성심의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2. 그의 출신
묘비에 따르면 카와치국 이시카와군 아카사카촌 출생이고, 가마쿠라 막부 측 사료에는 악당 (惡堂) 구스노기 효에노죠(悪党楠木兵衛尉)라고 기록되어 카와치를 중심으로 활동한 호족이라고 추측한다.
구스노기 마사토의 아들이라고 알려졌지만 사실 여부는 명확하지 않다. 이요 국 타치바나 가문 타치바나 토오야스의 후예라는 말도 있지만, 이전의 계보와 일치하지 않고 카와치 국에는 타치바나 성의 유래가 되는 지역이 없으므로 후세에 지어낸 이야기인 듯하다.
그 밖에 간토 지역 출신 또는 하타 가문의 일족, 조상이 호죠 가문의 가신으로 카와치로 이주했다는 설 등이 있다.
3. 가마쿠라 막부 타도를 외치다
1331년에 가마쿠라 막부를 타도하기 위해 고다이고 덴노가 카사기 산에서 거병을 시도하자 이에 호응하여 덴노 편에서 서서 싸울 것을 결의하여 국수의 가문을 하사받았으며, 시모아카사카 성을 축성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9월 11일에 시모아카사카 성에서 500명의 군사로 약 20 ~ 30만의 막부군을 상대로 농성을 하면서 유격전을 펼친 아카사카 전투를 벌였지만 포위하는 막부군의 병력이 늘어나면서 수로까지 차단되자 10월에 성에 불을 질러 밤에 성 밖으로 도주하여 요시노, 쿠마노 방면으로 잠복했다.
이후 반 년 후에 카미아카사카 성, 치하야 성을 축성하였으며, 1332년 4월에 막부군이 시모아카사카 성에 주둔하면서 군량미 조달에 어려움을 겪자 키이에서 군량미를 보급하려고 하자 키미토우게에서 매복하여 보급품을 탈취하였다. 또한 군사들을 호위병과 인부로 위장하여 쌀 가마니에 병장기 등을 숨기면서 수송대와 구스노키군이 싸우는 것처럼 연기하였는데, 막부군이 수송대가 위험한 것이라 판단하여 이들을 구원하면서 성 안으로 수용하자 가짜 수송대로 쌀 가마니 안에서 병장기들을 꺼내어 유아사 조부츠의 막부군을 공격하여 시모아카사카 성을 탈환하였다.
이후에도 텐노지, 나카노시마 방면에서 막부군을 격파하여 자금을 탈취하였으며, 야마토국의 요시노에서 막부와 싸우고 있는 고다이고 덴노의 황자인 모리요시 친왕과 함께 카미아카사카 성, 콘고우 산의 산성, 치하야 성 등에서 농성하였다. 막부에서 마사시게에게 엄청난 현상금을 걸자 각지에서 수 만의 대군[2] 이 치하야 성으로 올 때 마사시게의 병력은 1000명밖에 안되었다고 하며, 치하야 성에서 돌이나 나무를 던지거나 담장을 쌓으면서 짚으로 만든 인형으로 유인하여 열탕이나 분뇨 등을 투하하는 전술 등으로 100일 이상 버텨내는 활약으로 1333년에 막부 타도의 움직임이 확산되어 각지의 반 막부 세력들이 일어나 막부를 멸망시키게 된다.
4. 겐무 신정 이후
고다이고 덴노가 교토로 개선하자 효고까지 마중나가서 호위를 했다고 하며, 고다이고 덴노의 겐무 신정이 시작되자 기록소의 요류도와 잡소결단소의 부교, 사에몬노죠, 쥬고이산, 카와치, 이즈미의 슈고 등의 관직을 거쳤으며, 고다이고 덴노의 신임을 받아 유우키 치카마츠, 나와 나가토시, 치구사 타다아키 등과 함께 ‘산보쿠잇소‘라고 불렸다. 하지만 1334년 겨울에 호죠 가문의 잔당을 공격하기 위해 교토를 떠난 이후에 모리요시 친왕이 모반 혐의로 체포되어 아시카가 다카우지에게 인도되자 관직을 사직했다.
1335년에 호죠 토키유키가 일으킨 나카센다이의 난을 진압하러 간 타카우지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고다이고 덴노가 파견한 닛타 요시사다를 격파하여 교토로 진격하자 복귀하여 키타바타케 아키이에와 연계하여 쿄토, 우지 싸움으로 타카우지를 격파하여 교토에서 축출했다.
5. 미나토가와 전투와 최후
1336년에 규슈에서 군대를 재정비한 다카우지가 교토를 공격하려고 하자 고다이고 덴노에게 요시사다를 멀리하고 다카우지와 화목하자는 의견을 냈지만 묵살되었으며, 5월 25일 요시사다 휘하에서 2천명의 병력으로 아시카가 타다요시가 이끄는 수 만의 병력[3] 을 상대로 미나토가와 강 전투를 벌이게 된다. 이 전투를 앞두고 아들 마사츠라(正行)를 사쿠라이에서 가와치로 돌려보낼 때 마사츠라에게 자신이 죽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구스노키 가문과 남조 조정을 위해 계속 싸워줄 것을 당부했다고 하며, 이때 마사시게가 마사츠라에게 전한 유훈을 노래로 각색한 것이 사쿠라이의 결별(桜井の訣別)이다. 다만 태평기 자체가 엄밀한 역사서는 아닌 점 등으로 인해 정식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각색된 전설로 여겨진다.
현재 JR시마모토역 앞에 그 사쿠라이 역 터가 공원처럼 조성되어 있다. 이 사쿠라이의 결별이라는 일화는 후술할 칠생보국과 더불어 태평기에서 가장 유명한 두 씬 중 하나이다. 태평기 16권 <마사시게 효고로 내려가 자식에게 유훈을 남기다>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사자는 새끼를 낳은 지 3일째 될 때 수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던진다[4] . 사자로서의 기량이 갖추어져 있으면 가르쳐주지 않아도 살 것이다. 너는 벌써 열 살이 넘었으니 지금부터 하는 말을 기억하고 이를 지키도록 해라.[5] 이번 전투는 천하를 가를 전투가 될 것이고 이번 생에 네 얼굴을 보는 것은 이것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네가 내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는 때에는 이미 세상은 다카우지의 것이 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이 그렇게 되어 있다 할지라도 네 한 목숨 살려고 오랜 충절을 버리고 항복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친척이든 부하든 우리 집안의 사람이라면 곤고센(金剛山)으로 들어가, 적이 쳐들어 온다면 설령 그게 초나라 활의 명수였던 양유라 할지라도 목숨을 걸고 맞서, 유방 대신 죽은 기신과 같이 충절을 다해라. 그것이 네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효도다"라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고는 서로가 각자 동서로 헤어졌다.
에게야마에 진을 쳐서 16차례 돌격하여 타다요시의 본진 근처까지 올라갈 정도로 유리한 싸움을 진행하지만 해로로 진군한 다카우지의 군세의 양동 작전에 걸린 요시사다가 동쪽으로 이동하여 마사시게가 이끄는 군사들과 떨어지자 바다와 육지로부터 포위되어 고립된다. 포위된 상황에서 다카우지군을 상대로 계속 싸우다가 이쿠타지 숲에서 교토로 패주하는 요시사다의 퇴로를 지키기 위해 밤낮으로 병력 2천으로 버티다가 병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패배하여 잡힐 지경까지 오게되자 가신들과 함께 할복하여 사망한다. 이때 구스노키는 동생 구스노키 마사스에(楠木正季)와 함께 서로 찌르는 방식으로 자결하였다고 한다.
구스노키의 최후 역시 『태평기』에서 매우 유명한 씬 중의 하나이다. 태평기 16권 <마사시게 전사>에서는 마사쓰라와 마사시게의 최후의 대화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인간은 마지막 순간의 일념에 의해 내세의 선악이 결정된다고 한다. 구계(九界)[6] 중 너는 어디에 가기를 바라느냐"
"일곱 번이고 인간 세상에 다시 태어나서 이 손으로 朝敵을 멸하고 싶습니다"
"참으로 죄가 깊고 악한 소원이구나. 하지만 나도 그러하고 싶다. 자, 그렇다면 같이 다시 태어나서 이 바람을 이루도록 하자"
라고 약속하고는 서로를 찔러 같은 곳에 쓰러져 죽었다.
여기서 마사쓰라의 '일곱 번이고 인간 세상에 다시 태어나서'라는 말이 유명해져서, 일곱 번을 다시 태어나더라도 나라를 위해 헌신한다는 뜻의 '칠생보국'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수급은 다카우지에게 보내졌지만 그의 무용에 감탄하면서 존중하여 그 수급은 유족들에게 보내졌다고 한다.
아내는 미나미에 마사타다의 딸 히사코이며 자식으로는 후세에 아버지를 이어 소(小) 남공이라 불린 마사쓰라(正行, 구스노키 마사쓰라)를 필두로 마사토키(正時, 구스노키 마사토키)ㆍ마사노리(正儀, 구스노키 마사노리)가 있다. 이들도 아버지가 섬겼던 천황을 따라 남조에 가담해 다카우지와 맞서 싸웠다.
6. 후세의 평가
남조의 시각에서 남북조 시대를 그린 고전 태평기에서 그의 공적을 유난히 강조해 서술하였으며, 아시카가 집안의 사서인 매송론에서는 그를 동정적인 시점으로 서술하여 지, 인, 용을 겸비한 무장이라고 평가받았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전사한 마사시게의 목을 본 다카우지가 "죽고 없다 한들, 가족은 필시 만나고 싶을 게지."라며 그의 목을 정중하게 유족에게 돌려보내는 등, 청렴했던 그에게 보인 다카우지의 경의 때문이기도 했다는 분석이 있다. 또 미나토 강에서 자결할 때까지 아시카가 군과 16번의 전투를 치렀고, 전황이 구스노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던 후반에 다카우지는 구스노키가 그냥 자신에게 투항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잠시 동안 공격을 멈추고 그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는 설이 있다. 이 이야기는 NHK 역사 다큐멘터리 「그때 역사가 움직였다」에서도 인용되었다.
1337년에 고다이고 덴노가 직접 조각한 마사시게 조각상에 제사를 지낸 것을 시작으로 하여 고무라카미 덴노가 나기 명신으로 신의 칭호를 주었으며, 타케미쿠마리 신사의 섭사인 나기 신사에 구스노키 마사시게를 신으로 모시고 있다.
일본 전국시대인 1559년에 마사시게의 자손이라 하는 구스노키 마사토라가 조정의 적이 된 것을 사하여 달라는 탄원을 하여 오오기마치 덴노가 그 죄를 사하였다고 한다. 당시 무로마치 막부 쇼군이던 아시카가 요시테루도 이를 용인했다.
에도 시대에 들어서면 구스노키를 비롯한 남조의 역사에 큰 관심이 몰리게 된다. 미토학과 미토 고몬으로 유명한 미토 번의 번주 도쿠가와 미쓰쿠니는 특히 마사시게를 좋아하여 미나토가와에 마사시게의 추모비를 세운 것이 유명하다. 고다이고 천황이 창건한 미나토가와 근처[7] 의 고곤지(廣嚴寺)에는 마사시게의 목상을 봉납하기도 했다.
스이카 신도로 유명한 사상가 야마자키 안사이도 마사시게를 매우 숭상해, 야마자키 안사이의 학파인 기몬(崎門, 야마'자키' 일문이라는 뜻) 학파를 망남(望楠) 학파라고 하기도 한다. 막부 말기 사쓰마 번사였던 아리마 신시치가 안사이의 학문과 마사시게를 존경하여, 앞서 말한 고곤지의 목상을 사쓰마로 가져가기도 한다. 요시다 쇼인[8] , 가쓰 가이슈, 사이고 다카모리도 마사시게를 충신으로서 존경하여 마사시게나 남조 무장들에 관한 한시를 여러 수 남기고 있다. 막말기 당시에는 심지어는 민간에서는 '조슈 님께서는 正成(마사시게)를 하신다'라는 표현도 유행했고, 반대급부로 기도 다카요시는 누군가의 뒷담화(...)를 할 때 '저 자식은 다카우지 중의 다카우지다'라는 표현을 썼다고 한다[9] . 양이지사나 유신지사와 같은 말로 유명한 '지사(志士)'란 말이 막부 말기에 유행한 것도, 원래 출전은 맹자이지만 태평기에서 그것을 인용한 것이, 에도 시대에 태평기가 유행하면서 지사라는 말이 같이 유행한 결과라고도 한다[10] .
메이지 시대에 들어서면 1880년에 정일위에 추서되어 남공(楠公)[11] 으로 불리거나 미토 번에서 융성했던 미토학의 존왕주의 사가들에 의해 마사시게는 충신으로 추대되어 재조명되기 시작한다. 에도 막부 후기에는 존왕파에 의해서 빈번히 그의 제사가 올려졌고[12] , 그 움직임은 그 후 1872년에 미나토가와 신사 창건으로 결실을 맺었다. 이는 야스쿠니 신사 등의 초혼사 창건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오늘날의 게릴라전과도 유사한 전술을 장기로 구사했던 마사시게의 병법이 유행하여 에도 시대에는 구스노키류 군학으로 널리 알려져, 마사시게의 자손이라 하는 구스노키 마사타츠의 제자였던 유이 쇼세츠가 구스노키류 군학을 강연하기도 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 정부에서 그의 자손들을 수소문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13] 명분 상으로 덴노를 주축으로 한 메이지 시대에는 국가와 덴노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기 위해 덴노를 지킨 충신으로서의 상징으로 부각되어 1890년부터 10년에 걸쳐 일본의 덴노가 사는 황거 바깥 정원에 마사시게의 동상을 건립하여 현대에도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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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남북조정윤론이 제기되어 남조가 정통성을 가진 것으로 여겨지면서 다이난공(대남공)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강담 등에서는 삼국지연의 속의 천재 전략가 제갈량(諸葛亮)과 견주어 참모적인 이미지가 거듭 붙여졌다. 시바 료타로에 따르면[14] 메이지 10~20년대 오사카의 서민가(시타마치)에서는 매일 제갈공명이나 마사시게 등의 영웅담을 길거리에서 버스킹처럼 돈 받고 이야기하는 변사 내지 이야기꾼들이 자주 등장했다고 한다.
그의 패도인 코류 카게미츠는 야마다 아사에몬의 손을 거쳐 메이지 덴노의 패도로 사용되었는데 메이지 덴노는 청일전쟁 중 대본영이 히로시마로 옮겨질 때도 이 칼을 차고 갔다고 한다. 현재 이 패도는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중 황국 사관의 영향으로 대의를 위해 죽을 각오로 전투에 임하는 충신의 표상, 일본인의 귀감이라 찬양되어 수신 교육에도 영향을 주었다. 참고로 위 동상은 일본 황거에 있는 동상.
국화무늬 물이 흐르는 국수(菊水. 키쿠스이)깃발을 사용했는데 2차대전 후기 오키나와 전투의 자살특공작전인 키쿠스이 작전이 여기서 따온 이름이다. 전함 야마토를 포함한 자살특공대원들이 비리법권천 깃발을 두른 것도 구스노키가 국수기와 비리법권천기를 두르고 출정했다 알려졌기 때문이다(비리법권천 일화는 에도 시대에 윤색된 내용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중세사 연구가 진행되어 가마쿠라 막부 말기의 사적 무력집단을 지칭하는 "악당"으로서의 성격이 강조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소설가인 요시카와 에이지[15] 의 소설 사본태평기(私本太平記)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와는 다른 마사시게를 그려냈다.[16] 다만 이 "악당"으로서의 성격은 어디까지나 역사학에서의 이야기이고 아직까지도 마사시게는 일본인들에게는 영웅으로서의 이미지가 대중적으로 자리잡고 있다. 일본 NHK 방송의 TV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당당 일본사(堂々日本史)」에서 「겐무신정의 파괴, 악당 구스노키 마사시게 할복」이라는 타이틀로 방송한 것에 미나토가와 신사가 항의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17]
현대에는 니가타 현에 마사시게의 직계 후손으로 미나미 씨가 있다고 한다. 이 외에도 자손이라고 자칭하는 집안이 몇 개 있기는 한데, 다만 검증은 불가능하다. 15-16세기에 구스노키 집안은 막부의 적으로 씨를 말리다시피 했으니 진짜 자손이 살아남았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징기스칸 4에서는 시니라오 2에서 나오는데, 능력치는 정치, 전투, 지모 순으로 33/'''89'''/'''78'''에 적성은 보병, 궁병, 기병, 수군 순으로 SBAE이다.
전투력과 적성은 다카우지보다 높지만, 총합과 정치, 지력은 다카우지보다 낮다. 엄청난 일본의 에이스지만, 등장시기가 오래 걸린다. 플스판에서는 전투력이 91, 지모가 83까지 상승했다. 전투 특기는 기동, 화공, 공성, 복병. 병과 적성과 전투 특기만 놓고 보면 무사보다는 보병을 이끌기 좋게 되어 있지만, 능력치가 워낙 좋으므로 전투를 통해 다른 특기를 습득시키면 된다.
노부나가의 야망 천하창세의 합전 트라이얼 모드 일본사 편 4번째 스테이지에 아군 총대장으로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전투 99에 지략 100이라는 오버스탯. 징기스칸 4와는 달리 적 총대장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능력치로 확실하게 바른다. 워낙 먼치킨이다 보니 다소 난이도가 있는 일본사 편 중에서는 이 스테이지가 제일 쉽다.
차나왕 요시츠네의 작가 사와다 요시후미의 작품 <산적왕>에서 주인공의 주군으로 등장한다. 작중에선 주인공과 함께 먼치킨으로 그려진다. 여기서는 가마쿠라 막부를 타도할 중요한 5명의 인물이 각각 몸에 별 모양의 점을 가지고 있는데 막부 타도 후에는 이 별이 몸에서 사라진다. 호죠 정권 타도 시점에서 작품이 끝나서 마사시게의 이후 행보는 나오지 않는다.
미즈키 시게루의 '총원 옥쇄하라'에서 대대장이 좋아하는 인물로 유명해졌다. 작중 언급하는 '다이난 공'이 이 사람이다. 정작 구스노키 마사시게는 무작정 옥쇄하기 보다는 아군의 피해를 줄이고 적군에게 피해를 강요하는 현실적인 인물이었다. 작품 내에서도 부하들이 '다이난 공을 모범으로 삼는다면 그러면 안되는데......'라며 회의감을 가지는 모습이 나온다.
[1] 에도 시대 라이 산요(頼山陽)가 저서《일본외사(日本外史)》에서 에이닌 2년(1294)생으로 추측해 향년 43세로 언급한 것이 후세에 관용처럼 인용된다.[2] 남조 측에서 쓴 태평기의 기록으로 100만 대군이라 기록되었지만 마사나리의 공적을 높였기 때문에 과장된 수치일 것이다.[3] 기록에는 50만이지만 앞의 사례처럼 과장일 것이다.[4]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자는 새끼를 절벽으로 떨어뜨린다'는 말은 여기서 처음 유래한다. 실제 사자는 당연히 저런 짓 안 한다. 애초에 저 시대 일본에 진짜 사자가 있을 리가 없긴 하지만.[5] 마사시게의 이 말은 ''''태어난 지 사흘 된 사자 새끼도 누가 안 가르쳐 줘도 저렇게 한다는데''' 무사의 자식이고 열 살이나 먹은 네가 짐승보다 못하다는 것은 아니겠지?'라는 뉘앙스로, '''사자가 막 태어난 자기 새끼를 절벽으로 떨어뜨려서 기어올라오는 자식을 키우는 것'''이 포인트가 아니라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사자 새끼가 절벽에 떨어져서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자기가 알아서 판단하고 자기 힘내서 기어 올라오는 것'''이 포인트다. [6] 불교에서, 육도(六道 : 지옥도, 아귀도, 축생도, 수라도, 인간도, 천상도)에 성문계, 연각계, 보살계, 불계를 더한 10계 중 불계를 뺀 나머지 아홉 가지[7] 미나토가와 신사를 이곳에 세운 것을 계기로 메이지 시대에 들어가면 아예 이 동네 지명을 구스노키초(楠町)라고 짓는다. 이 지명은 현재도 유지되고 있다.[8] 요시다 쇼인의 경우는 제자들과 함께 태평기를 읽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9] 반면에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처음 거병한 단바 지역에서는 '다카우지'는 자랑이나 칭찬의 표현이기도 했다고.[10] 심지어 도쿠가와 이에야스조차도 태평기를 좋아했다는 말이 있다. 이에야스 자신은 닛타류 겐지, 즉 닛타 요시사다의 후손을 자처한 바 있다.[11] 또는 아들인 마사쓰라(소남공)에 대비해서 대남공으로 불리기도 했다. 근대 이후엔 구스노키를 주로 楠木라고 쓰지만, 전근대에는 楠라고 쓰는 경우가 많았다.[12] 산조 사네토미가 여러 번 제사를 지낸 것으로 유명하다. 심지어 8월 18일 정변-금문의 변으로 인한 도피생활 중에도 조슈에서 구스노키제를 지낸 기록이 있다.[13] 자손이라 자칭하는 집안은 꽤 있었지만 아무도 증명을 할 수 없었다.[14] 시바 료타로는 소설가지만, 해당 글은 실제 메이지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을 인터뷰한 내용이다.[15] 국내에는 요시카와 에이지 삼국지로 잘 알려진 소설가. 미야모토 무사시에 대해서도 소설을 썼고 국내에도 번역되어 있다.[16] 이 소설은 또한 그 전까지 역적으로 이미지가 박히다시피 했던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대중적인 재조명에도 크게 한몫했다는 평가를 받는다.[17] 단 여기서의 '악당'은 문자 그대로 악의 세력이라는 뜻이 아니라 중세 지역사회에서 기성 질서에 대항하는 세력을 말한다. 악당항목 참조. 惡이라는 글자에는 나쁘다는 뜻 뿐만이 아니라 강하다라는 뜻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