닛타 요시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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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타 가문의 가몬인 닛타 인양문(新田一つ引き).[2]
新田義貞
1301년[3] ~ 1338년 8월 17일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호적수'''.
일본의 가마쿠라 막부 말기의 고케닌이며 남북조 시대#s-2남북조 시대의 무장으로 미나모토 요시사다(源義貞)로 불리었다. 본성은 미나모토 씨이다.
가와치 겐지의 일문으로 고즈케 국에 자리잡은 닛타 가문 종가 8대 당주이다. 메이지 유신 후인 1882년 8월 7일 정일위(正一位)로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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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타 가문은 가와치 겐지의 3대 당주로 하치만타로라 불리며 도고쿠 무사들의 숭앙을 받았던 미나모토노 요시이에의 넷째 아들 미나모토노 요시쿠니의 서장자 닛타 요시시게를 시조로 하며 닛타 장원(현 군마 현 오타 시 부근)에 터를 잡고 살았지만, 닛타 요시사다 때에는 닛타 가문의 본가 영지는 닛타 장원 60 마을안 겨우 10여 마을 이내에 지나지 않았고, 요시사다 자신도 이렇다 할 관위도 관직도 없이 눈길 한번 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분포 2년 (1318년) 음력 10월 요시사다의 토지 문서에 매주(買主)로써 요시사다의 이름이 사다요시(貞義)로 잘못 표기되었고, 이는 가마쿠라 막부 내에서의 닛타 본가의 지위가 낮았음을 알려준다.
요시사다의 장자 닛타 요시아키의 생모의 출자를 안도 가문으로 적은 사료가 있는데, 싯켄 호조 가문의 유력가신 안도 세이슈의 딸이라는 설이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몰락한 무사 가문인 닛타 본가가 싯켄 호조 가문의 가신 안도 가문의 딸을 맞이한 것이 된다.[4] 당시 호조 가문은 시모쓰키 소동으로 고즈케 국의 슈고 아다치 가문을 멸망시키고 고즈케 지역에 호조 가문의 영향력을 강화시켰는데, 요시사다가 호조 가문의 가신과 인척이 된 것은 권력 밖으로 밀려 쇠퇴해가는 닛타 본가를 다시 세우려는 아버지 닛타 도모우지와 함께 요시사다의 눈물겨운 노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5]
겐코 원년(1331년)부터 겐코의 변에서 닛타 요시사다는 가마쿠라 막부에 속했고, 가와치 국에서 거병한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지하야 성 전투에 참가하였지만, 곧 병을 이유로 무단으로 자신의 영지인 닛타 장원으로 돌아갔다. 이 이유 중 하나는 닛타 장원에 대한 막부측의 과도한 군비 요구와 강압적 집행이었고다고 하며, 이때의 일은 닛타 요시사다가 거병한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고 사료된다. 《태평기》와 《매송론》에서는 병을 핑계로 닛타 장원에 숨어 있던 요시사다가 닛타 장원에 조사하러 온 막부의 징세사 가네자와 이즈모노스케[6] 와 구로자와 히코시로를 포박해 가네자와 이즈모노스케는 유폐시키고 구로자와 히코시로를 살해한 후, 거병을 결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겐코의 변에서 막부군에 속해 출병하던 중 모리요시 친왕(護良親王)[7] 으로부터 호조 가문을 타도하라는 밀명을 받았다는 설도 있다.
겐코 3년/쇼코 2년(1333년) 음력 5월 8일 고다이고 천황의 부름에 응해 이쿠시나 신사에서 일가 친지를 모아 가마쿠라 막부 토벌을 기치로 거병하였다. 처음 모은 군은 겨우 150 기에 불과했다고 한다. 당초에는 도네 강을 건너 일가 친지가 있는 에치고 방면으로 진군할 예정이었지만, 동생 와키야 요시스케의 의견을 받아들여 가마쿠라로의 진격을 결의했다고 한다. 에치고의 일가 친지도 가세하여 닛타 군은 도산도 서쪽으로 진격해 고즈케 슈고의 관아를 장악하고, 도네 강을 건널 무렵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적장자 아시카가 센주오(후에 아시카가 요시아키라) 군과 합류하였다. 호조 가문과의 먼 친척관계인 유력 고케닌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적장자가 가세함으로써 주변 고케닌도 힘을 모아 닛타 군의 규모는 수 만을 헤아를 정도의 대군으로 변모했다.
더욱이 닛타 군은 가마쿠라 가도를 따라 이루마 강을 건너 고테사시하라(현 도코로자와 시)에 도달하였고, 이 곳에서 사쿠라다 사다쿠니, 가네자와 사다마사가 이끄는 막부군과 격돌한다. 이 고테사시하라 전투에서 막부군이 승리하지만, 막부측에 불만을 품은 가와고에 가문(河越氏) 등 무사시 국의 고케닌들이 닛타 군을 지지하였고, 이로 인해 막부군은 열세에 놓여 부바이가와라(현 후추 시)까지 퇴각하였다. 막부군은 다시금 부바이가와라에 진을 치고 포진해 닛타 군과의 결전에 돌입했다. 이 부바이가와라 전투에서 닛타 군은 대패하였지만, 다음 날 원군으로 가세한 오타와 요시카쓰 군과 함께 막부군을 격파하였다. 이는 아마도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로쿠하라 단다이 제압 소식을 들은 막부군의 증원대가 배신과 내부 분열 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날 세키토(현 다마 시)에서 닛타 군은 막부군을 완전히 몰아내 승리하였다.
후지자와(현 후지자와 시)까지 진출한 닛타 요시사다는 군을 3방면으로 나누어 가마쿠라로의 총공격을 감행한다. 고쿠라쿠지(極樂寺) 방면 군이 주춤하자 요시사다는 간조를 이용해 이나무라가사키로 상륙, 막부군의 배후를 파고 들어 가마쿠라로 난입하였고, 이 도쇼지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이 전투 중 호조 다카토키 일가는 도쇼지에서 자결한다. 거병한 지 겨우 보름 만에 가마쿠라 막부를 멸하였으나, 가마쿠라 함락후,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적장자 아시카가 센주오 보좌를 위해 파견된 호소카와 가즈우지, 호소카와 아키우지와 마찰을 빚어 갈 곳을 잃은 요시사다는 교토로 상경하였다.
겐무 신정에서 닛타 요시사다는 가마쿠라 공격의 공을 인정받아 좌병위독에 임명되어, 교토 경비관아의 수장이 되었다.
1335년 가마쿠라에 있던 호조 정권의 잔당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다카우지는 칙명도 없이 출병하여 이 반란을 진압[8] 하고, 그대로 가마쿠라에 눌러앉아 멋대로 수하 무사들에게 은상을 내렸다. 당연히 고다이고 천황은 다카우지에게 귀환 명령을 내리지만 다카우지는 이를 무시한다.
1335년 음력 11월, 다카우지는 닛타 요시사다가 간신이라며 덴노에게 "현기증 난단 말이예요. 요시사다 토벌령 빨리 좀 내려주세요"라고 요청했으나 다카우지에게 쌓일대로 쌓인 게 많았던 고다이고는 이를 씹고 오히려 '''요시사다에게 다카우지를 토벌하라는 칙령'''을 내려버린다. 교토에서 요시사다는 다카요시 친왕을 내세워 도카이도를 통해 가마쿠라로 향했고, 동생 와키야 요시스케와 함께 야하기 강 전투(현 오카자키시), 데고시가와라 전투(현 시즈오카시 스루가 구)에서 아시카가 다다요시(足利直義)[9] , 고 모로야스 군을 격파했다.
급해진 다카우지는 모든 조정관직에서 물러나겠다고 하면서 자신을 사면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당연히 덴노는 이를 씹었고, 결국 다카우지는 덴노 정권에 대항해 궐기를 공식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 해 12월 요시사다는 가마쿠라에서 군을 이끌고 온 다카우지에게 하코네 · 다케노시타 전투에서 패해 교토로 도주했다. 이듬해인 1336년 1월에 다카우지는 교토에 입성했고 고다이고는 히에이산으로 도망쳤다.
겐무 3년(1336년) 음력 1월 오슈에 파견된 구게(公家) 키타바타케 아키이에와 교토의 구스노키 마사시게와 연합하여 상경하는 아시카가 다카우지 군을 교토에서 축출하였고, 또 다시 상경하려는 아시카가 군을 셋쓰 국 도요시마가와라(현 이케다 시)에서 격파하였다. 이 공으로 닛타 요시사다는 정4위하 좌근위중장에 위계되었다. 계속해서 규슈로 도주한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추격하지만, 하리마 국의 시로하타 성에서 아카마쓰 노리무라에 의해 저지되었다.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규슈를 평정한 후, 바닷길로 교토로 진격하였고, 그동안 닛타 요시사다는 시로하타 성 공격에 시간을 허비하였다. 구스노키 마사시게와 함께 싸운 미나토가와 강 전투에서 닛타 요시사다는 와다 곶에 진을 치고 맞섰으나 아시카가 수군의 상륙을 막지 못했고, 구스노키 마사시게는 전사하고 니시노미야에서 교토로 도주했다.
미나토가와 강 전투 후 히에이 산으로 도망친 남조군은 아시카가 군세로부터 교토를 되찾기 위해 산발적인 전투를 벌이지만, 이마저도 저지된다. 고다이고 천황은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화의를 맺고 닛타 요시사다를 내침으로써 히에이 산에서 하산하려 하지만, 닛타 요시사다의 가신 호리구치 사다미츠가 고다이고 천황에게 “우리 닛타 집안의 충의를 버리고 아시카가에게 항복하시겠다면 우리 일족 전원의 목을 베고 가 주소서”라며 이를 저지했다. 이에 고다이고 천황은 황위를 츠네요시 친왕에 양도하고 친왕과 다카요시 친왕(尊良親王)에 지휘권을 위임한 후 하산했다. 닛타 요시사다는 두 친왕과 아들 닛타 요시아키, 동생 와키야 요시스케와 함께 호쿠리쿠로 향해 에치젠 가나가사키 성에 입성하였다. 하지만, 곧 고 모로야스[10] 시바 다카츠네가 이끄는 아시카가 군에 포위되었다. 닛타 요시사다, 요시스케는 소마야마 산성을 탈출해, 소마야마 산성 성주 우리우 다모쓰와 함께 가나가사키 성의 포위진을 붕괴시키려 하지만, 실패한다. 엔겐 2년/겐무 4년(1337년) 음력 3월 6일 가나가사키 성은 함락되었고, 다카요시 친왕과 닛타 요시아키는 자결, 츠네요시 친왕은 추포되어 교토로 호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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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년 여름이 되자, 닛타 요시사다는 세를 회복한 후, 시바 다카츠네와의 사바에 전투에 승리해 에치젠 후추와 가나가사키 성을 탈환했다. 엔겐 3년/겐무 5년(1338년) 윤 7월 아시카가 측으로 돌아선 헤이센지 승병들이 농성하는 후지시마 성을 우익 군으로 공격하게 하고, 구로마루 성에서 원군으로 가세하기 위해 후지시마 성으로 향하던 중 우연히 적군과 만나 전투를 벌였다. 불행히도 닛타 요시사다는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11] 닛타 요시사다의 목은 교토로 보내졌고, 그가 가마쿠라 막부 공격 때 노획한 세이와 겐지의 가보 히게키리(髭切)[12] 도 아시카가 가문 손에 넘어 왔다고 한다.
이에 더하여 에도 시대인 1656년 이 전장터에서 경작하던 가헤(嘉兵衛)라는 농민이 투구를 발견하여 후쿠이 번주 마쓰다이라 미츠미치에게 헌상했다. 투구의 장식으로 보야 꽤 높은 신분의 무장이 착용했던 것으로 생각돼 감정하였고, 그 결과 닛타 요시사다의 투구로 여겨 마쓰다이라 가문이 보관하였다. 메이지 유신 후, 닛타 요시사다를 모신 후지시마 신사가 창건될 때, 에치젠 마츠다이라 가문이 신사에 헌납하였다. 현재 중요 문화재로 지정돼 보관중이다.
동시대에 남조를 주도한 기타바타케 지카후사(北畠親房)가 쓴 《신황정통기》에서는“고즈케 국에 미나모토노 요시사다라는 자가 있다. 고 가문(高氏)[13] 일가이다.”라고 아시카가 다카우지보다 격하시켜 부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또, 같은 기사는 《마스카가미(增鏡)》에도 기재되어 있다. 하지만, 실제 닛타 가문의 조상은 미나모토노 요시이에의 셋째 아들 요시쿠니의 첫째 아들 닛타 요시시게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가마쿠라 막부 창설에 비협조적이었기 때문에 막부 성립후 미나모토노 요시쿠니 계통을 묶어 이들 가문을 이끌 기둥은 닛타 요시시게의 동생 아시카가 요시야스의 아들 아시카가 요시카네로 보았고, 닛타 가문 뿐만 아니라 겐지(源氏) 계보를 가진 무사들에게도 관행처럼 정착되었다는 설이 있다. 실제 닛타 일가 중에서도 아시카가 가문을 무가의 도료(당주)로 인식한 자도 있었고, 야마나 가문 등은 닛타 요시사다가 거병했을 때, 아시카가 센주오(후의 아시카가 요시아키라)의 지휘권 안에 편입해 아시카가 측에 조력하였다.
또, 무로마치 시대에 집필된 군기물 《태평기》에서는 문무와 지략을 겸비한 무장으로 그려지는 구스노키 마사시게에 대비해 요시사다는 작자의 공감대를 사지 못해 아시카가 다카우지와의 싸움에서 패한 우유부단한 무장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 일례로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셋쓰 도요시마가와라에서 닛타 요시사다에 패해 규슈로 도주했을 때 고토노 나이시와의 이별을 아쉬워하여 추격에 소홀했고, 그 틈에 다카우지는 세를 수습해 다시 거병해 미나토가와 강에서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군을 격파하고 교토에 개선하였다는 것이다.
한편, 《매송론》에서는 하코네 전투에 패한 닛타 군의 병사가 덴류 강의 다리를 끊으려 할 때, 요시사다는 “다리를 끊더라도 다시 놓으면 된다. 닛타 군이 다리를 끊고 허둥대며 도주한다면 이는 후대까지 수치로 남는다.”며 현지 주민에게 다리를 지켜줄 것을 부탁하고 병력을 이끌었다. 그 후 추격해온 아시카가 군 장병이 그 발언을 듣고 “무가에 태어난 자는 누구라도 요시사다와 같이 행동했을 것이다.”라고 상찬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메이지 유신부터 태평양 전쟁 전까지 황국사관 아래에서 〈역적〉 아시카가 다카우지에 대비해 고다이고 천황을 따른 충신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뒤를 잇는 영웅으로 평가되어 강담 등에의 소재로 이야기되었지만, 종전 후 일개 간토의 무장에 불과한 자가 능력 이상의 대임을 맡은 평범한 무장으로 보기 시작했고, 전략가로서도 평범하고 우둔하다는 평가가 있다. 그러나, 이는 《태평기》의 묘사만의 평가로 그다지 신빙성이 낮고, 다카우지와의 인망의 차이도 가문의 격에서 온 것일 뿐, 단기간에 가마쿠라를 함락시킨 점과, 압도적 실력차가 있던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잠시 동안이나마 격파했던 점 등을 거론하여 무장의 자질을 평가해야 된다는 의견도 있다.
또, 군마의 지역 가루타인 조모 가루타에서 닛타 요시사다가 등장해 지역민에게는 친숙한 무장이다. 닛타 요시사다가 등장하는 부분은 이로하 중 레(れ)부분이며 “역사(레키시)에 명망높은 닛타 요시사다”로 쓰여져 있다.
《태평기》에서는 규슈로 도주한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추토를 명받은 닛타 요시사다가 고다이고 덴노로부터 윤허된 궁녀 고토노 나이시와의 이별을 애석히 여겨 추토의 시기를 놓친 이야기를 기술하고 있다. 고토노 나이시란 궁중의 역직중 하나로 고다이고 덴노를 모신 이치조 츠네타다의 딸을 가리킨다. 연대 등으로 미루어 실재 존재유무가 의문시되어 가공의 인물로 사료된다.
《태평기》에서는 천황의 윤허를 받아 요시사다의 아내가 된 나이시를 요시사다가 애석히 여겨[14]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토벌 시기를 놓친 것으로 기술하고 있어서 황국사관에서는 충신 닛타 요시사다의 아내이면서 같은 충신 구스노키 마사시게를 죽음으로 내몬 장본인으로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나이시는 요시사다의 전사 소식을 듣고 비와호에 투신했다고 한다.[15] 혹은 교토 또는 가타타(현 오쓰 시)에서 요시사다의 제를 지냈다는 전설이 남아 있고, 그녀의 묘라고 전해지는 곳도 다소 전해져오고 있다.
가마쿠라 막부를 공격할 때, 호조 사다나오가 수비하는 고쿠라쿠지 방면에서 결착이 나지 않고 더욱이 해안은 호조 측 선단으로 막혀있었다. 이에 닛타 요시사다는 이나무라가사키에서 황금으로 된 타치를 바다에 던져 용왕에게 기원했고, 그러자 바닷가에 썰물이 나타나 그곳으로 강행돌파하여 전투에서 승리했다라는 기술이 《태평기》 등에서 나온다. 문부성에서는 이 일을 창가로 만들어 교과서에 개재하였다.
《태평기》는 그 날이 겐코 3년(1333년) 음력 5월 21일로 되어 있지만, 1915년 오가와 기요히코가 그 날을 전후하여 이나무라가사키의 물때를 계산한 결과 음력 5월 21일에는 간조가 없었고, 실제 막부군은 닛타 군이 이나무라가사키로 도해(渡海)할 수 없음을 알고 방심한 결과, 닛타 요시사다가 '''바닷물이 빠지고 뭐고에 상관없이 그냥 이나무라가사키를 건넜다'''는 견해를 밝혔다. 하지만, 1993년 이시이 스스무가 오가와 기요히코의 산출기록을 오래된 기록과 대조해, 닛타 군의 이나무라가사키로의 도해 및 가마쿠라 공격 시기를 실제로 썰물이 발생했던 음력 5월 18일 오후라 보고, 《태평기》의 날짜가 잘못 표기되었다는 견해를 밝혔다.[16]
무로마치 시대에 닛타 가문은 조정의 적, 역적무리로 인식되어 토벌의 대상이 되었다.
닛타 요시사다의 직계는 오에이 연간(1394년 ~ 1427년) 닛타 요시사다의 손자 닛타 사다카타가 체포되어, 사다카타의 큰아들 닛타 사다쿠니과 함께 가마쿠라시에서 처형되었다고 한다. 사다카타의 여러 아들 중에 호리에 사다마사는 호리에(堀江)란 씨명을 사용하여 무사시 국 이나게에서 살아남아 그의 자손은 고호조 가문을 섬긴다. 또 나카무라 사다나가는 나카무라(中村)란 씨명을 사용하여 무쓰 국에서 살아남아 다테 가문을 섬겼다. 또, 요시사다의 서가 출신인 후지자와 씨(藤沢氏) 등이 현재 남아있다. 이에 더하여 사다카타의 서자인 닛타 무네지카의 가계도 존속해 있다고 한다.
한편, 이와마쓰 미쓰쿠니와 닛타 요시카타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이와마쓰 미쓰즈미도 닛타 요시카타의 아들로 이와마쓰 가문에 양자로 입양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에도 시대 닛타 일족이라고 칭하는 도쿠가와 가문에 의해[17] 닛타 씨로의 복성이 허락되지 않았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이와마쓰 가문은 닛타 요시사다를 조정을 위해 '역적'에 맞서 싸운 충신으로 인정했고, 메이지 정부의 판단에 따라 요시사다의 자손으로 인정되어 닛타 씨로 복성해 화족으로써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또, 이와마쓰 가문의 가신 가문인 요코세 가문은 센고쿠 시대 하극상으로 센고쿠 다이묘로 거듭났으며 유라 씨(由良氏)로 개성하였고, 닛타 가문의 자손임을 강조했다. 요코세 가문도 메이지 유신 후, 닛타 씨로 복성했다.
지바 우지타네와 닛타 요시사다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지바 미쓰타네의 가계는 지바 가문의 종가로 명맥을 유지했다.
100만인의 신장의 야망에서 특전무장으로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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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타 가문의 가몬인 닛타 인양문(新田一つ引き).[2]
新田義貞
1301년[3] ~ 1338년 8월 17일
1. 개요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호적수'''.
일본의 가마쿠라 막부 말기의 고케닌이며 남북조 시대#s-2남북조 시대의 무장으로 미나모토 요시사다(源義貞)로 불리었다. 본성은 미나모토 씨이다.
가와치 겐지의 일문으로 고즈케 국에 자리잡은 닛타 가문 종가 8대 당주이다. 메이지 유신 후인 1882년 8월 7일 정일위(正一位)로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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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닛타 가문은 가와치 겐지의 3대 당주로 하치만타로라 불리며 도고쿠 무사들의 숭앙을 받았던 미나모토노 요시이에의 넷째 아들 미나모토노 요시쿠니의 서장자 닛타 요시시게를 시조로 하며 닛타 장원(현 군마 현 오타 시 부근)에 터를 잡고 살았지만, 닛타 요시사다 때에는 닛타 가문의 본가 영지는 닛타 장원 60 마을안 겨우 10여 마을 이내에 지나지 않았고, 요시사다 자신도 이렇다 할 관위도 관직도 없이 눈길 한번 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분포 2년 (1318년) 음력 10월 요시사다의 토지 문서에 매주(買主)로써 요시사다의 이름이 사다요시(貞義)로 잘못 표기되었고, 이는 가마쿠라 막부 내에서의 닛타 본가의 지위가 낮았음을 알려준다.
요시사다의 장자 닛타 요시아키의 생모의 출자를 안도 가문으로 적은 사료가 있는데, 싯켄 호조 가문의 유력가신 안도 세이슈의 딸이라는 설이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몰락한 무사 가문인 닛타 본가가 싯켄 호조 가문의 가신 안도 가문의 딸을 맞이한 것이 된다.[4] 당시 호조 가문은 시모쓰키 소동으로 고즈케 국의 슈고 아다치 가문을 멸망시키고 고즈케 지역에 호조 가문의 영향력을 강화시켰는데, 요시사다가 호조 가문의 가신과 인척이 된 것은 권력 밖으로 밀려 쇠퇴해가는 닛타 본가를 다시 세우려는 아버지 닛타 도모우지와 함께 요시사다의 눈물겨운 노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5]
3. 거병
겐코 원년(1331년)부터 겐코의 변에서 닛타 요시사다는 가마쿠라 막부에 속했고, 가와치 국에서 거병한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지하야 성 전투에 참가하였지만, 곧 병을 이유로 무단으로 자신의 영지인 닛타 장원으로 돌아갔다. 이 이유 중 하나는 닛타 장원에 대한 막부측의 과도한 군비 요구와 강압적 집행이었고다고 하며, 이때의 일은 닛타 요시사다가 거병한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고 사료된다. 《태평기》와 《매송론》에서는 병을 핑계로 닛타 장원에 숨어 있던 요시사다가 닛타 장원에 조사하러 온 막부의 징세사 가네자와 이즈모노스케[6] 와 구로자와 히코시로를 포박해 가네자와 이즈모노스케는 유폐시키고 구로자와 히코시로를 살해한 후, 거병을 결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겐코의 변에서 막부군에 속해 출병하던 중 모리요시 친왕(護良親王)[7] 으로부터 호조 가문을 타도하라는 밀명을 받았다는 설도 있다.
겐코 3년/쇼코 2년(1333년) 음력 5월 8일 고다이고 천황의 부름에 응해 이쿠시나 신사에서 일가 친지를 모아 가마쿠라 막부 토벌을 기치로 거병하였다. 처음 모은 군은 겨우 150 기에 불과했다고 한다. 당초에는 도네 강을 건너 일가 친지가 있는 에치고 방면으로 진군할 예정이었지만, 동생 와키야 요시스케의 의견을 받아들여 가마쿠라로의 진격을 결의했다고 한다. 에치고의 일가 친지도 가세하여 닛타 군은 도산도 서쪽으로 진격해 고즈케 슈고의 관아를 장악하고, 도네 강을 건널 무렵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적장자 아시카가 센주오(후에 아시카가 요시아키라) 군과 합류하였다. 호조 가문과의 먼 친척관계인 유력 고케닌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적장자가 가세함으로써 주변 고케닌도 힘을 모아 닛타 군의 규모는 수 만을 헤아를 정도의 대군으로 변모했다.
더욱이 닛타 군은 가마쿠라 가도를 따라 이루마 강을 건너 고테사시하라(현 도코로자와 시)에 도달하였고, 이 곳에서 사쿠라다 사다쿠니, 가네자와 사다마사가 이끄는 막부군과 격돌한다. 이 고테사시하라 전투에서 막부군이 승리하지만, 막부측에 불만을 품은 가와고에 가문(河越氏) 등 무사시 국의 고케닌들이 닛타 군을 지지하였고, 이로 인해 막부군은 열세에 놓여 부바이가와라(현 후추 시)까지 퇴각하였다. 막부군은 다시금 부바이가와라에 진을 치고 포진해 닛타 군과의 결전에 돌입했다. 이 부바이가와라 전투에서 닛타 군은 대패하였지만, 다음 날 원군으로 가세한 오타와 요시카쓰 군과 함께 막부군을 격파하였다. 이는 아마도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로쿠하라 단다이 제압 소식을 들은 막부군의 증원대가 배신과 내부 분열 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날 세키토(현 다마 시)에서 닛타 군은 막부군을 완전히 몰아내 승리하였다.
후지자와(현 후지자와 시)까지 진출한 닛타 요시사다는 군을 3방면으로 나누어 가마쿠라로의 총공격을 감행한다. 고쿠라쿠지(極樂寺) 방면 군이 주춤하자 요시사다는 간조를 이용해 이나무라가사키로 상륙, 막부군의 배후를 파고 들어 가마쿠라로 난입하였고, 이 도쇼지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이 전투 중 호조 다카토키 일가는 도쇼지에서 자결한다. 거병한 지 겨우 보름 만에 가마쿠라 막부를 멸하였으나, 가마쿠라 함락후,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적장자 아시카가 센주오 보좌를 위해 파견된 호소카와 가즈우지, 호소카와 아키우지와 마찰을 빚어 갈 곳을 잃은 요시사다는 교토로 상경하였다.
4. 겐무 신정
겐무 신정에서 닛타 요시사다는 가마쿠라 공격의 공을 인정받아 좌병위독에 임명되어, 교토 경비관아의 수장이 되었다.
1335년 가마쿠라에 있던 호조 정권의 잔당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다카우지는 칙명도 없이 출병하여 이 반란을 진압[8] 하고, 그대로 가마쿠라에 눌러앉아 멋대로 수하 무사들에게 은상을 내렸다. 당연히 고다이고 천황은 다카우지에게 귀환 명령을 내리지만 다카우지는 이를 무시한다.
1335년 음력 11월, 다카우지는 닛타 요시사다가 간신이라며 덴노에게 "현기증 난단 말이예요. 요시사다 토벌령 빨리 좀 내려주세요"라고 요청했으나 다카우지에게 쌓일대로 쌓인 게 많았던 고다이고는 이를 씹고 오히려 '''요시사다에게 다카우지를 토벌하라는 칙령'''을 내려버린다. 교토에서 요시사다는 다카요시 친왕을 내세워 도카이도를 통해 가마쿠라로 향했고, 동생 와키야 요시스케와 함께 야하기 강 전투(현 오카자키시), 데고시가와라 전투(현 시즈오카시 스루가 구)에서 아시카가 다다요시(足利直義)[9] , 고 모로야스 군을 격파했다.
급해진 다카우지는 모든 조정관직에서 물러나겠다고 하면서 자신을 사면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당연히 덴노는 이를 씹었고, 결국 다카우지는 덴노 정권에 대항해 궐기를 공식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 해 12월 요시사다는 가마쿠라에서 군을 이끌고 온 다카우지에게 하코네 · 다케노시타 전투에서 패해 교토로 도주했다. 이듬해인 1336년 1월에 다카우지는 교토에 입성했고 고다이고는 히에이산으로 도망쳤다.
겐무 3년(1336년) 음력 1월 오슈에 파견된 구게(公家) 키타바타케 아키이에와 교토의 구스노키 마사시게와 연합하여 상경하는 아시카가 다카우지 군을 교토에서 축출하였고, 또 다시 상경하려는 아시카가 군을 셋쓰 국 도요시마가와라(현 이케다 시)에서 격파하였다. 이 공으로 닛타 요시사다는 정4위하 좌근위중장에 위계되었다. 계속해서 규슈로 도주한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추격하지만, 하리마 국의 시로하타 성에서 아카마쓰 노리무라에 의해 저지되었다.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규슈를 평정한 후, 바닷길로 교토로 진격하였고, 그동안 닛타 요시사다는 시로하타 성 공격에 시간을 허비하였다. 구스노키 마사시게와 함께 싸운 미나토가와 강 전투에서 닛타 요시사다는 와다 곶에 진을 치고 맞섰으나 아시카가 수군의 상륙을 막지 못했고, 구스노키 마사시게는 전사하고 니시노미야에서 교토로 도주했다.
5. 호쿠리쿠에서의 말년
미나토가와 강 전투 후 히에이 산으로 도망친 남조군은 아시카가 군세로부터 교토를 되찾기 위해 산발적인 전투를 벌이지만, 이마저도 저지된다. 고다이고 천황은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화의를 맺고 닛타 요시사다를 내침으로써 히에이 산에서 하산하려 하지만, 닛타 요시사다의 가신 호리구치 사다미츠가 고다이고 천황에게 “우리 닛타 집안의 충의를 버리고 아시카가에게 항복하시겠다면 우리 일족 전원의 목을 베고 가 주소서”라며 이를 저지했다. 이에 고다이고 천황은 황위를 츠네요시 친왕에 양도하고 친왕과 다카요시 친왕(尊良親王)에 지휘권을 위임한 후 하산했다. 닛타 요시사다는 두 친왕과 아들 닛타 요시아키, 동생 와키야 요시스케와 함께 호쿠리쿠로 향해 에치젠 가나가사키 성에 입성하였다. 하지만, 곧 고 모로야스[10] 시바 다카츠네가 이끄는 아시카가 군에 포위되었다. 닛타 요시사다, 요시스케는 소마야마 산성을 탈출해, 소마야마 산성 성주 우리우 다모쓰와 함께 가나가사키 성의 포위진을 붕괴시키려 하지만, 실패한다. 엔겐 2년/겐무 4년(1337년) 음력 3월 6일 가나가사키 성은 함락되었고, 다카요시 친왕과 닛타 요시아키는 자결, 츠네요시 친왕은 추포되어 교토로 호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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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년 여름이 되자, 닛타 요시사다는 세를 회복한 후, 시바 다카츠네와의 사바에 전투에 승리해 에치젠 후추와 가나가사키 성을 탈환했다. 엔겐 3년/겐무 5년(1338년) 윤 7월 아시카가 측으로 돌아선 헤이센지 승병들이 농성하는 후지시마 성을 우익 군으로 공격하게 하고, 구로마루 성에서 원군으로 가세하기 위해 후지시마 성으로 향하던 중 우연히 적군과 만나 전투를 벌였다. 불행히도 닛타 요시사다는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11] 닛타 요시사다의 목은 교토로 보내졌고, 그가 가마쿠라 막부 공격 때 노획한 세이와 겐지의 가보 히게키리(髭切)[12] 도 아시카가 가문 손에 넘어 왔다고 한다.
이에 더하여 에도 시대인 1656년 이 전장터에서 경작하던 가헤(嘉兵衛)라는 농민이 투구를 발견하여 후쿠이 번주 마쓰다이라 미츠미치에게 헌상했다. 투구의 장식으로 보야 꽤 높은 신분의 무장이 착용했던 것으로 생각돼 감정하였고, 그 결과 닛타 요시사다의 투구로 여겨 마쓰다이라 가문이 보관하였다. 메이지 유신 후, 닛타 요시사다를 모신 후지시마 신사가 창건될 때, 에치젠 마츠다이라 가문이 신사에 헌납하였다. 현재 중요 문화재로 지정돼 보관중이다.
6. 인물
6.1. 평가
동시대에 남조를 주도한 기타바타케 지카후사(北畠親房)가 쓴 《신황정통기》에서는“고즈케 국에 미나모토노 요시사다라는 자가 있다. 고 가문(高氏)[13] 일가이다.”라고 아시카가 다카우지보다 격하시켜 부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또, 같은 기사는 《마스카가미(增鏡)》에도 기재되어 있다. 하지만, 실제 닛타 가문의 조상은 미나모토노 요시이에의 셋째 아들 요시쿠니의 첫째 아들 닛타 요시시게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가마쿠라 막부 창설에 비협조적이었기 때문에 막부 성립후 미나모토노 요시쿠니 계통을 묶어 이들 가문을 이끌 기둥은 닛타 요시시게의 동생 아시카가 요시야스의 아들 아시카가 요시카네로 보았고, 닛타 가문 뿐만 아니라 겐지(源氏) 계보를 가진 무사들에게도 관행처럼 정착되었다는 설이 있다. 실제 닛타 일가 중에서도 아시카가 가문을 무가의 도료(당주)로 인식한 자도 있었고, 야마나 가문 등은 닛타 요시사다가 거병했을 때, 아시카가 센주오(후의 아시카가 요시아키라)의 지휘권 안에 편입해 아시카가 측에 조력하였다.
또, 무로마치 시대에 집필된 군기물 《태평기》에서는 문무와 지략을 겸비한 무장으로 그려지는 구스노키 마사시게에 대비해 요시사다는 작자의 공감대를 사지 못해 아시카가 다카우지와의 싸움에서 패한 우유부단한 무장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 일례로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셋쓰 도요시마가와라에서 닛타 요시사다에 패해 규슈로 도주했을 때 고토노 나이시와의 이별을 아쉬워하여 추격에 소홀했고, 그 틈에 다카우지는 세를 수습해 다시 거병해 미나토가와 강에서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군을 격파하고 교토에 개선하였다는 것이다.
한편, 《매송론》에서는 하코네 전투에 패한 닛타 군의 병사가 덴류 강의 다리를 끊으려 할 때, 요시사다는 “다리를 끊더라도 다시 놓으면 된다. 닛타 군이 다리를 끊고 허둥대며 도주한다면 이는 후대까지 수치로 남는다.”며 현지 주민에게 다리를 지켜줄 것을 부탁하고 병력을 이끌었다. 그 후 추격해온 아시카가 군 장병이 그 발언을 듣고 “무가에 태어난 자는 누구라도 요시사다와 같이 행동했을 것이다.”라고 상찬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메이지 유신부터 태평양 전쟁 전까지 황국사관 아래에서 〈역적〉 아시카가 다카우지에 대비해 고다이고 천황을 따른 충신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뒤를 잇는 영웅으로 평가되어 강담 등에의 소재로 이야기되었지만, 종전 후 일개 간토의 무장에 불과한 자가 능력 이상의 대임을 맡은 평범한 무장으로 보기 시작했고, 전략가로서도 평범하고 우둔하다는 평가가 있다. 그러나, 이는 《태평기》의 묘사만의 평가로 그다지 신빙성이 낮고, 다카우지와의 인망의 차이도 가문의 격에서 온 것일 뿐, 단기간에 가마쿠라를 함락시킨 점과, 압도적 실력차가 있던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잠시 동안이나마 격파했던 점 등을 거론하여 무장의 자질을 평가해야 된다는 의견도 있다.
또, 군마의 지역 가루타인 조모 가루타에서 닛타 요시사다가 등장해 지역민에게는 친숙한 무장이다. 닛타 요시사다가 등장하는 부분은 이로하 중 레(れ)부분이며 “역사(레키시)에 명망높은 닛타 요시사다”로 쓰여져 있다.
6.2. 고토노 나이시
《태평기》에서는 규슈로 도주한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추토를 명받은 닛타 요시사다가 고다이고 덴노로부터 윤허된 궁녀 고토노 나이시와의 이별을 애석히 여겨 추토의 시기를 놓친 이야기를 기술하고 있다. 고토노 나이시란 궁중의 역직중 하나로 고다이고 덴노를 모신 이치조 츠네타다의 딸을 가리킨다. 연대 등으로 미루어 실재 존재유무가 의문시되어 가공의 인물로 사료된다.
《태평기》에서는 천황의 윤허를 받아 요시사다의 아내가 된 나이시를 요시사다가 애석히 여겨[14]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토벌 시기를 놓친 것으로 기술하고 있어서 황국사관에서는 충신 닛타 요시사다의 아내이면서 같은 충신 구스노키 마사시게를 죽음으로 내몬 장본인으로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나이시는 요시사다의 전사 소식을 듣고 비와호에 투신했다고 한다.[15] 혹은 교토 또는 가타타(현 오쓰 시)에서 요시사다의 제를 지냈다는 전설이 남아 있고, 그녀의 묘라고 전해지는 곳도 다소 전해져오고 있다.
6.3. 이나무라가사키의 타치
가마쿠라 막부를 공격할 때, 호조 사다나오가 수비하는 고쿠라쿠지 방면에서 결착이 나지 않고 더욱이 해안은 호조 측 선단으로 막혀있었다. 이에 닛타 요시사다는 이나무라가사키에서 황금으로 된 타치를 바다에 던져 용왕에게 기원했고, 그러자 바닷가에 썰물이 나타나 그곳으로 강행돌파하여 전투에서 승리했다라는 기술이 《태평기》 등에서 나온다. 문부성에서는 이 일을 창가로 만들어 교과서에 개재하였다.
《태평기》는 그 날이 겐코 3년(1333년) 음력 5월 21일로 되어 있지만, 1915년 오가와 기요히코가 그 날을 전후하여 이나무라가사키의 물때를 계산한 결과 음력 5월 21일에는 간조가 없었고, 실제 막부군은 닛타 군이 이나무라가사키로 도해(渡海)할 수 없음을 알고 방심한 결과, 닛타 요시사다가 '''바닷물이 빠지고 뭐고에 상관없이 그냥 이나무라가사키를 건넜다'''는 견해를 밝혔다. 하지만, 1993년 이시이 스스무가 오가와 기요히코의 산출기록을 오래된 기록과 대조해, 닛타 군의 이나무라가사키로의 도해 및 가마쿠라 공격 시기를 실제로 썰물이 발생했던 음력 5월 18일 오후라 보고, 《태평기》의 날짜가 잘못 표기되었다는 견해를 밝혔다.[16]
7. 동상 · 유품 · 비
- 동상은 군마 현 오타 시 세라다 정의 도모 역사자료관 앞과 도쿄 도 후추 시 부바이가와라(分倍河原) 역 앞 로터리 앞에 세워져있다.
- 유품으로는 앞서 서술한 대로 투구가 있으며, 후쿠이 번주 마츠다이라 미츠미치가 세운 비가 있다. 비가 세워진 곳은 도묘지나와테 닛타 요시사다 전몰전설지로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 군마 현 오타 시 닛타소리마치 정에 있는 사찰 소리마치야쿠시(反町薬師)는 닛타 요시사다가 거병을 결의한 곳으로 〈소리마치 관터〉라는 명칭으로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 후쿠이 현 후쿠이 시에는 닛타즈카(新田塚:닛타 무덤)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8. 자손
무로마치 시대에 닛타 가문은 조정의 적, 역적무리로 인식되어 토벌의 대상이 되었다.
닛타 요시사다의 직계는 오에이 연간(1394년 ~ 1427년) 닛타 요시사다의 손자 닛타 사다카타가 체포되어, 사다카타의 큰아들 닛타 사다쿠니과 함께 가마쿠라시에서 처형되었다고 한다. 사다카타의 여러 아들 중에 호리에 사다마사는 호리에(堀江)란 씨명을 사용하여 무사시 국 이나게에서 살아남아 그의 자손은 고호조 가문을 섬긴다. 또 나카무라 사다나가는 나카무라(中村)란 씨명을 사용하여 무쓰 국에서 살아남아 다테 가문을 섬겼다. 또, 요시사다의 서가 출신인 후지자와 씨(藤沢氏) 등이 현재 남아있다. 이에 더하여 사다카타의 서자인 닛타 무네지카의 가계도 존속해 있다고 한다.
한편, 이와마쓰 미쓰쿠니와 닛타 요시카타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이와마쓰 미쓰즈미도 닛타 요시카타의 아들로 이와마쓰 가문에 양자로 입양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에도 시대 닛타 일족이라고 칭하는 도쿠가와 가문에 의해[17] 닛타 씨로의 복성이 허락되지 않았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이와마쓰 가문은 닛타 요시사다를 조정을 위해 '역적'에 맞서 싸운 충신으로 인정했고, 메이지 정부의 판단에 따라 요시사다의 자손으로 인정되어 닛타 씨로 복성해 화족으로써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또, 이와마쓰 가문의 가신 가문인 요코세 가문은 센고쿠 시대 하극상으로 센고쿠 다이묘로 거듭났으며 유라 씨(由良氏)로 개성하였고, 닛타 가문의 자손임을 강조했다. 요코세 가문도 메이지 유신 후, 닛타 씨로 복성했다.
지바 우지타네와 닛타 요시사다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지바 미쓰타네의 가계는 지바 가문의 종가로 명맥을 유지했다.
9. 대중매체에서
100만인의 신장의 야망에서 특전무장으로 등장.
[1] 아시카가 가문의 시조[2] 닛타 가문의 시조인 닛타 요시시게(新田義重)의 남동생 아시카가 요시야스(足利義康)[1] 의 후손인 아시카가 가문도 비슷한 아시카가 인양문(足利二つ引き)이지만 그쪽은 삼중 가로줄 문장이라서 닛타 가문의 인양문과는 꽤 차이가 난다.[3] 1300년생이라는 설도 있다.[4] 안도 세이슈의 일가인 안도 시게야스의 딸이라는 설도 있다.[5] 다만 겐코 2년(1322년) 닛타 일가의 이와마쓰 마사쓰네와 오다테 무네우지가 용수 사용 문제로 다툼이 일어났을 때 막부에 판정을 요구하였지만 요시사다의 판정은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 같다고. 안습.[6] 싯켄 호조 가문의 가신인 기 씨(紀氏)쪽 사람이라는 설이 있다.[7] 고다이고 천황의 황자로 무예에 뛰어났으며 출가해 승려가 되었으나 아버지가 막부 타도를 외치며 거병했을 때 환속해 아버지를 도왔다. 함께 막부를 타도했던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위험인물로 보아 경계하였으나 아버지와의 불화(정확히는 아버지의 후궁인 아노 렌시와의 불화였다)로 황위 찬탈의 혐의를 쓰고 가마쿠라에 유폐되었고, 얼마 안 가서 살해되었다. 호사가들 중에서는 황족의 대표로써 그 자신이 무력을 지니고 있었던 모리요시 친왕이 죽지 않고 고다이고 천황이 그에게 천황의 자리를 이어받게 했다면 가마쿠라 막부 타도 이후 일본의 역사가 다르게 흘러갔을지도 모른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8] 막부 개설은 이 뒤의 일이지만 고다이고 천황은 이 때 다카우지가 칙명도 없이 그냥 출병해 버리자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정이대장군 직함을 내렸다.[9]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친동생[10]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집사였던 고 모로나오의 동생이다.[11] 《태평기》에서는 닛타 요시사다가 탄 말이 활에 맞아 고꾸라졌고, 왼발을 안장에서 빼려는 찰나에 미간에 활을 맞아 요시사다 스스로 자신의 목을 베었다고 적고 있다. 닛타 요시사다가 이곳에서 전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죽음에 대한 묘사는 사실로 보기 어렵고, 《헤이케모노가타리》에서 묘사된 미나모토노 요시나카의 죽음에 힌트를 얻어 《태평기》의 작가가 창작했을 것으로 보인다고.[12] 헤이안 시대 미나모토노 미츠나가가 만들게 했다는 일본도로 히자마루라는 일본도와 함께 미나모토 가문의 중요 보검으로 전해지고 있다. 교토의 기타노덴만구(北野天満宮)에 소장되어 있으며 중요 문화재이다. 칼의 길이는 약 81 cm이다.[13]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집사였던 고 모로나오와 같은 집안이다. 덴무 천황의 먼 후손으로 알려진 다카시나(高階) 씨의 일족이라고.[14] 사실은 나이시의 미모에 요시사다가 푹 빠져 며칠 동안이나 그녀와 잠자리를 함께 하느라고 지쳐서, 다카우지를 공격하러 갈 날짜를 놓쳤다고 보는 편이 더 적합하다...[15] 그러나 죽지 않고 비구니가 되어 출가했다는 이야기도 있다.[16] 호소이 히로시 《고대 천문이변과 사서(古代の天文異変と史書)》 깃카와고분칸 2007년[17] 도쿠가와 가문이 정말로 닛타 일족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족보 위조일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