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게토프급 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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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테게토프급(테게트호프급)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드레드노트급 전함으로 1910년부터 건조되기 시작해서 1912년에서 1915년 사이에 취역했다. 테게토프급은 총 4척이 건조되었으며 자매함으로는 1번함 비리부스 우니티스(Viribus Unitis)[1] , 2번함 테게토프(Tegetthoff)[2] , 3번함 프린츠 오이겐(Prinz Eugen)[3] , 4번함 센트 이슈트반(Szent István)[4] 가 있다. 초도함 함명을 따라 비리부스 우니티스급 전함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테게토프급은 나름 건함사의 한 획을 그은 전함인데 다름아닌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최초로 건조한 드레드노트 전함이면서 세계 최초로 3연장 포탑을 장착한 전함이자 3연장 포탑을 격층식(Superfiring)으로 배치한 전함이다.[5]
2. 탄생
1900년대 초 건함 경쟁의 막이 오르면서 영국과 독일 제국을 필두로 유럽 열강들이 해군력을 미친듯이 증강하고 있을 때 열강 중 하나였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열강 중 후발주자이자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가상적국인 이탈리아 왕국이 급격하게 성장하면서 지중해와 아드리아 해의 제해권을 노리고 해군을 증강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황립 및 왕립(K.u.K) 해군보다 규모가 커졌기 때문에 이대로 가면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접하고 있는 유일한 바다인 아드리아 해의 제해권를 이탈리아에게 내어줄 것이라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는 판단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다른 열강에 비해 해군력이 매우 부실했는데 가령 해군에 배당된 예산은 당시 세계 최강국이었던 영국의 1/30도 안 되며, 가상적국인 이탈리아와 비교해도 1/5에 불과했다. 이러다보니 대형함을 건조할 경험도 부족해서 1900년이 돼서야 자체적으로 전함을 건조할 수 있다. 1904년,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 총사령관이었던 루돌프 몬테쿠콜리(Rudolf Montecuccoli)[6] 중장은 해군 전력의 현대화를 통해 전력차이를 극복하자는 주장을 했으며 제국의회에서도 몬테쿠콜리 중장의 의견을 받아들였으며 안정적인 건함 예산을 보장받는다. 특히 황태자였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해군력을 키우고 싶어했으며 정치적으로 열렬한 지지를 해준 것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 1905년 구체적인 해군 증강 계획안이 나왔는데 그 내용은 전함 12척, 장갑순양함 4척, 정찰 순양함 8척, 구축함 18척, 원양항해가 가능한 대형 어뢰정 36척, 잠수함 6척을 보유한다는 것이었다. 몬테쿠콜리 중장은 안정적으로 받은 예산을 기반으로 영국처럼 드레드노트급 전함을 건조하려고 했지만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보유하고 있는 전함 중 가장 최신 전함이었던 에르츠헤르초크 카를(Erzherzog Karl)[7] 은 고작 배수량이 1만톤에 불과했고 주포도 240mm 4문으로 무장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당장 2만톤이 넘는 거함을 건조할 수 있을지도 불확실했다. 그래서 먼저 배수량 1만 5천톤 수준의 전드레드노트 전함인 라데츠키급 전함(Radetzky class) 3척을 건조하기로 결정했다. 라데츠키급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전함중 최초로 12인치(약 305mm)급 주포를 장착한 전함이었고 1907년에 건조가 시작되었으며 1910년부터 취역했다.
라데츠키급을 건조하는 중 1908년, 보스니아 사태(Bosnian Crisis)가 터져서 이탈리아와의 관계가 더욱 악화되자 이중제국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몬테쿠콜리 중장의 해군증강안의 규모를 더 키우라고 했다. 결과적으로 계획안은 전함 16척, 순양함 12척, 구축함 24척, 대형 어뢰정 72척, 잠수함 12척을 보유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이탈리아의 드레드노트 전함 건조 계획 소식이 들리자 오스트리아-헝가리는 크게 불안해 했고 신형전함을 무조건 이탈리아 신형전함보다 강하게 만들려고 했다. 결과적으로 몬테쿠콜리 중장은 1905년에 계획했던 전함 설계안을 기반으로 현대적으로 설계를 개선해 2만톤급 전함을 제시했고 해당 설계안이 채택되면서 테게토프급 전함이 건조되게 된다.
1910년, 테게토프급 전함 2척을 건조하게 되었는데 황제의 개인적 건의로 1번함의 이름을 황제의 개인적 모토였던 'Viribus Unitis'로 변경하게 되었다. 한편 추가 예산을 받아 1912년에 3번함을 건조하게 되었고 또한 헝가리 의회에서 따로 건함 예산을 짜서 4번함까지 건조하게 되었다. 테게토프급은 의회의 전격적인 지원을 받은 만큼 빠르게 건조되었는데 초도함이었던 비리부스 우니티스는 1910년 7월 24일에 건조를 시작했는데 취역을 1912년 10월 6일에 할 정도였다. 그러나 돈이 부족했던 헝가리 의회의 지원을 받아 건조한 4번함 센트 이슈트반은 건조 속도가 늦었고 1912년 1월 29일에 건조가 시작되어서 1915년 12월 13일에 취역했다. 센트 이슈트반이 취역했을 때는 이미 테게토프급 3척이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전선에 투입된 뒤였다.
테게토프급을 성공적으로 취역시킨 오스트리아-헝가리는 테게토프급을 기반으로 슈퍼드레드노트 전함인 에르자츠 모나르히(Ersatz Monarch)급을 건조했지만 주포를 빠르게 확보하지 못한데다가 전쟁으로 경제가 악화되자 건조가 늦어졌고 결국 종전으로 완공하지 못했다.
1, 2, 3번함은 트리에스트에서 건조되었고 4번함 센트 이슈트반만 피우메에서 건조되었다.
3. 문제점
테게토프급은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최신 기술로 만든 전함답게 여러모로 혁신적인 면이 많았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조선 경험 부족 때문에 문제가 없진 않았다. 당시 어떤 나라도 시도한 적이 없는 3연장 포탑의 적층식 배치는 테게토프급의 장점이기도 했지만 실험적인 면도 많았기 때문에 문제점도 내포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문제가 바로 2, 3번 포탑으로 인한 불안정한 무게중심 문제였다. 2, 3번 포탑은 1, 4번 포탑보다 높기 때문에 탄약고에 탄을 적재할 때 무게중심을 고려해서 쌓아야 했다. 또한 2, 3번 포탑의 높이 때문에 송탄기가 더 높이 포탄과 작약을 올려줘야 했기 떄문에 자주 말썽을 피웠다. 거기에다가 연장 포탑보다 3연장 포탑이 더 무겁다 보니 포탑의 회전이 전함의 무게중심에 영향을 줄 수 있었기 때문에 선회 시에 포탑의 방향도 신경써야했다. 이러한 문제점은 타국에서도 나타났지만 테게토프급은 세계 최초였기도 했고 타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벼운 전함이었기 때문에 크게 두드러졌다.
또한 배수량이 작은 배인만큼 장갑 배치에 크게 신경썼지만 유감스럽게도 수선하 방호력은 좋지 않았다. 포탑은 나름 튼튼하게 만들었지만 2, 3번 포탑의 바벳은 위에서 계속 언급되는 무게중심 문제 때문에 그다지 튼튼하지 못했다. 게다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기술력 부족으로 기관부의 성능이 타국에 비해 좋지 못했다. 항속거리도 짧은 편이지만 이 점은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이 아드리아 해에서 주로 활동할 것을 상정하고 건조했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한편 4번함 센트 이슈트반은 건조 경험이 부족한 조선소에서 건조되었고 예산부족까지 겹쳐서 기관부가 부실해졌고 리벳결합은 헐거웠다. 거기에다가 방뢰망도 장착하지 않았다.
출처는 불분명하지만 테게토프급의 3연장 포탑은 2연장 포탑 가운데 공간을 두고 추가로 포 1문을 끼워넣은 것에 불과했기 때문에 실전에서는 사실상 3연장으로 운용이 불가능했다는 말이 있지만[8] 같은 회사가 생산한 포탑을 장착하고 있는 러시아 제국의 강구트급 전함에서 3연장 포탑에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는 말이 없는 걸 봐서는 사실이 아닌 듯하다.
4. 함생
테게토프급 전함은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보유한 최강의 전력이었다. 이탈리아 왕국은 테게토프급의 취역을 크게 두려워했고 결과적으로 단테 알리기에리의 문제점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보다는 당장 건조할 수 있을 수준의 전함을 건조하게 되었고 포탑의 적층식 배치와 비적층식 배치가 혼합된 콘테 디 카보우르급 전함 3척과 카이오 두일리오급 전함 2척을 건조하게 되었다.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 사건으로 황태자 부부가 암살되자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황태자 부부의 유해를 비리부스 우니티스에 싣었고 유해를 본국까지 옮겼다. 한달 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1번함 SMS 비리부스 우니티스, 2번함 SMS 테게토프, 3번함 SMS 프린츠 오이겐은 제1 전함 함대에 배속되어 세르비아를 압박하기 위해 몬테네그로 해안을 봉쇄했다. 이때 지중해에 있었던 독일 순양전함 SMS 괴벤과 순양함 SMS 브레슬라우가 영불 함대에 쫓겨 도주하자 이를 지원하기 위해 출격했지만 독일 해군이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의 지원 소식을 정확히 전달받지 못했고 결국 그리스를 돌아 오스만 제국으로 도주하게 된다.
이후 영불함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압박하기 위해 아드리아 해를 봉쇄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은 테게토프급 전함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했는데, 이는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질좋은 석탄의 70%를 영국에서 수입했기 때문에 연료부족으로 활동이 축소되었다고 한다. 1915년 이탈리아가 협상국으로 참전하자 이탈리아 동해안의 포격 및 협상군의 아드리아 해 봉쇄망을 돌파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탈리아 해군의 주력은 지중해에 있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은 아드리아해 내부에서는 제해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했고 이러한 우위는 1918년 6월 10일 4번함 센트 이슈트반이 아드리아 해에서 작전 도중 이탈리아 해군의 M,A,S 어뢰정에게 격침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테게토프급은 존재만으로도 가치가 있었지만 전함의 수는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보다 많았고 영국, 프랑스 해군이 전함을 지중해에 파견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도 독일 제국처럼 유보트를 적극적으로 사용 할 수 밖에 없었다.[9]
나머지 3척은 종전 직전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가 자국 해군의 다른 군함들과 함께 신생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세르비아국 임시정부에게 양도했으나, 1918년 11월 1일 2번함 비리부스 우니티스가 이탈리아 해군의 인간 어뢰에 공격당해 격침되었고, 종전까지 살아남은 2척은 종전 이후 협상군의 통제 하에 들어 테게토프는 이탈리아 해군에게 보상함으로 인도되어 전리품으로 전시되다가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으로 인해 1925년 퇴역 및 해체되었고, 프린츠 오이겐은 프랑스 해군에게 양도되어 1922년 표적함으로 사용되어 침몰하였다.
5. 매체에서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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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오브 워쉽에서 1번함 비리부스 우니티스함이 범유럽 5티어 프리미엄 전함으로 등장하였다.
전함소녀에 비리부스 우니티스가 등장한다.
[1] '단결된 힘으로'라는 뜻의 라틴어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표어[2]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당시 리사 해전에서 오스트리아 함대를 지휘하여 이탈리아 해군에게 승리를 거둔 빌헬름 폰 테게토프(Wilhelm von Tegetthoff) 중장.[3] 사부아 공자 외젠의 독일어 표기, 이후 이 이름은 크릭스마리네의 아트미랄 히퍼급 중순양함의 3번함으로 계승된다.[4] 헝가리의 건국 시조 이슈트반 1세.[5] 건조 자체는 이탈리아 왕국의 단테 알리기에리나 러시아 제국의 강구트급 전함이 더 빨랐지만 취역은 비리부스 우니티스가 가장 빠르다. 여담으로 모든 포탑을 적층식으로 배치한 최초의 전함은 미국의 사우스캐롤라이나급 전함이다.[6] 17세기 이탈리아의 유명한 콘도티에리 라이몬도 몬테쿠콜리(Raimondo Montecuccoli)의 먼 후손이다.[7] 카를 루트비히 대공에서 따온 함명이다.[8] 포탄이송기가 주포당 하나씩 있는게 아니라 3연장포탑에 두개씩 밖에 없어 지속적인 발사시엔 한번에 주포 2문밖에 장전/발사가 안되기 때문. 즉, 미리 포탄을 장전해둔 초탄사격이후엔 사실상 각 포탑에서 주포 1문씩은 장전/발사가 안된다는 얘기다.[9] 이 전함 수 격차는 점점 벌어졌는데, 1916년에 이탈리아의 카이오 두일리오급 전함 2척과 프랑스의 슈퍼드레드노트 전함 브르타뉴급 전함 2척이 추가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에게 정면돌파의 가능성은 더욱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