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페르디난트
1. 개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이자 합스부르크 왕가의 적통 계승자. 작위는 대공(Archduke).
제1차 세계 대전의 불씨를 앞당긴 사라예보 사건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영국에서 크게 흥했던 스코틀랜드의 록밴드 프란츠 퍼디난드는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이름을 따온 것이라고 한다.
2. 생애
1863년 프란츠 요제프 1세(1830~1916, 재위 1848.12~1916.11)의 남동생인 카를 루트비히(1833~1896) 대공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친모인 마리아 안눈치아타는 결핵으로 프란츠가 8세 때 사망하였으며 이후 계모인 마리아 테레사 대공비가 프란츠를 양육했다. 1875년에는 합스부르크가의 분가 중 하나인 모데나 공작가[2] 의 마지막 공작 프란체스코 5세가 죽으면서 가계가 끊기자, 모데나 가문의 상속자가 되어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고 부자가 된다.
페르디난트는 원래대로라면 오스트리아 제위와 크게 연이 없는 사람이었다. 큰아버지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는 이미 사촌형인 루돌프 황태자(1858~1889)가 있었고, 그 외에도 다른 큰아버지인 막시밀리안(1832~1867)등이 있었기 때문. 그런데 페르디난트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게 된다.
1889년 1월 사촌형이었던 루돌프 황태자가 권총으로 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오스트리아의 황제이자 프란츠의 백부였던 프란츠 요제프는 자신의 외아들이 죽자 자신의 친척 가운데 오스트리아 황제를 계승할 사람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프란츠 요제프의 형제 가운데 막시밀리안은 20년 전에 멕시코에서 처형되었고[3] 막시밀리안의 아들도 없어 대가 끊긴 상황이었고, 결국 페르디난트의 아버지인 카를 루트비히 대공이 황제의 후계자로 지명된 것이다. 그러던 1896년 아버지 카를이 사망하면서[4] 카를의 맏아들인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제위 계승자로 낙점되었다.
황태자가 된 페르디난트는 후계를 위해 결혼 중매를 받는데, 이상하게도 동생 오토[5] (1865~1906)와는 달리 중매를 번번이 거절하였다. 그러면서 합스부르크 왕가의 다른 분가인 테셴 가문의 프리드리히 대공[6] 의 집을 자주 방문했는데, 이에 프리드리히 대공의 아내인 대공비 이자벨라는 8명이나 되는 자신의 딸들 중에서 하나가 황태자비로 선택되리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1898년 페르디난트는 공작의 딸들이 아니라 그들의 시녀에 불과한 조피 폰 초테크를 아내로 선택했다. 당연히 황실은 뒤집어졌고, 차기 황후가 될 여자가 겨우 중류 귀족 여인[7][8] 이라니 말도 안 된다고 격렬히 반대했다. 이건 오스트리아 제국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당시 시대상 동서를 불문한 어느 나라의 왕실이라도 무조건 반대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조피와의 결혼을 고집했고, 결혼을 결사반대하던 프란츠 요제프 황제 사이에는 극심한 반목이 일어났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귀천상혼을 이유로 그의 계승권을 박탈할 수도 있었으나[9][10] 이미 루돌프 황태자의 자살로 여론이 뒤숭숭한 마당에 또 다른 제위 계승자가 계승권을 박탈당한다면 감당하지 못할 만큼 여론의 비난이 거세질 것을 우려하여 결국 그들의 결혼을 허락하였다.
하지만 조피 폰 초테크는 황제가 수여한 호헨베르크 여공작이라는 타이틀로 만족해야 했다. 그들의 자녀들[11] 은 황족 취급을 받지 못해 제위 계승자가 될 수 없었다. 조피는 결코 공식 석상에서 황태자와 마주할 수 없었으며, 궁중에서 가장 서열이 먼 대공녀보다 아래에 위치해 있어야 했다. 결혼식 때는 명색이 황태자의 결혼식인데도, 프란츠 요제프 황제 본인은 물론 황실 인사들이 전혀 참석하지 않았다.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새어머니로 유일하게 결혼에 찬성했던 마리아 테레지아와, 그녀의 친딸이자 프란츠의 이복 여동생 2명만이 참석했을 뿐이었다. 유럽 왕족 사회에서 이러한 대우는 왕족의 정부와 그 자손들에게 대하는 대우로 당시 이들이 황실 내에서 어떠한 취급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조피를 자신의 아내이자 황태자비로서 당당히 사람들 앞에 드러내기를 바랐고, 1914년 사라예보 방문 때 아내를 대동한 것도 아내의 정치적 위신을 세워주고자 한 배려였지만 안타깝게도 결과만 놓고 보면 최악으로 끝나고 만다.
페르디난트는 큰아버지 프란츠 요제프 황제와 사상의 차이로 자주 대립하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고질적인 문제인 민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1906년 '''대(大)오스트리아 합중국''' 방안을 제창하여[12] 민족문제의 근원적인 해결을 추구하였는데, 이렇게 되면 기존 체제에서 권익을 가졌던 독일계 오스트리아인과 헝가리인이 불리했기 때문에[13] 기존 권력자들,[14] 특히 헝가리 정계와의 반목이 극심했다. 헝가리 총리는 대놓고 황태자가 제위를 이은 뒤 개혁을 밀어붙이려고 한다면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 않겠다고 공언할 정도였다.[15]
그는 당시 사람치고는 드물게 고집이 세고 자기주관이 강한 인물이었다. 아무래도 본래 황위계승과는 먼 사람이었다 후계자가 된 자라 그런 모양. 황태자는 기존 권력자들이었던 오스트리아나 헝가리 정계에 친분이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페르디난트는 꾸린 예비 내각만 보더라도 기성 정치권에서 소외된 슬라브 출신이 많았다.
평화 유지에 대한 강력한 소신[16] , 불평등한 국가 구조의 혁신에 대한 정치적 신념, 오스트리아 해군과 군의 보급제도에 대한 현대적인 개선[17] , 귀천상혼 같은 개념은 내버리고 사랑을 찾아서 한 결혼 등 여러모로 진보적인 인물이었고, 오스트리아 정계의 멸시도 다른 관점에서 보면 다민족국가인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슬라브족 등용을 통한 오스트리아 제국 통합에 중요한 분기점이 될 만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페르디난트는 누가 뭐래도 오스트리아의 황실의 후계자였고 당시 큰아버지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나이를 생각해 보면 시간은 그의 편이었다.
하지만 페르디난트의 개혁 성향은 독립하려던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을 자극했는데 황태자의 개혁이 성공하면 민족자결의 원리에 따라 오스트리아 제국 내의 남슬라브인(유고슬라비아)들도 독일계, 헝가리인과 동등한 권리를 가지게 되어 굳이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추종할 이유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제국의 황태자이기 때문에 제국의 분열을 바라지 않았고, 그 때문에 제국의 재편성 계획을 내놓은 것이었다. 따라서 세르비아의 광신적 민족주의자들은 황태자를 제거하려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 극단주의자의 만행은 세르비아를 지옥으로 만들고 기나긴 혼란의 시대를 부르는 역효과를 가져왔다.
3. 암살
1914년 6월 28일 아침 황태자는 아내 조피와 함께 육군 훈련을 참관하기 위해 보스니아의 사라예보에 도착했다. 원래 육군훈련에 조피 부인은 따라갈 필요가 없었지만 프란츠는 귀천상혼으로 힘든 생활을 보내고 있는 아내의 권위를 살려주기 위해 동행시켰다.[18] 하지만 황태자 부부는 도착한지 1시간도 안 된 10시 10분에 검은 손 단원 네델코 차브리노비치에게 수류탄 테러를 당한다. 여기서 상당수의 부상자가 생겼지만 황태자 부부는 다행히 무사했다. 이후 시청에서 영접행사를 마친 프란츠는 방금 전 폭탄 테러의 피해자들을 위로하러 가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프란츠는 다시 차에 올라 병원으로 이동하는데 노점에서 대기하고 있던 또 다른 검은 손의 암살자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황태자를 보게 된다.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프란츠 황태자를 보고 바로 2발의 총알을 쏘고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는 그 총알에 목숨을 잃는다. 당시 경호원이자 운전기사였던 하라히 중령의 증언에 따르면 프란츠는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Sopherl! Sopherl! Stirb nicht! Bleib' am Leben für unsere Kinder!(조피! 조피! 죽으면 안되오! 아이들을 위해 꼭 살아주시오!)"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조피는 시청에서 숨을 거두었고 프란츠도 몇분 뒤에 숨을 거두었다. 왜 이런 말을 마지막까지 했냐면 자신들이 죽으면 아이들이 황실에서 찬밥이 되어 푸대접을 받을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사라예보 사건 문서 참조.
그리고 황태자 부부의 죽음은 정확히 1개월 뒤 불이 당겨진 제1차 세계 대전의 시발점이 되었다
4. 사후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묘는 본래 오스트리아 황실 묘지에 안장될 예정이었으나, 아내 조피가 위에서 말한 신분 문제 때문에 황실 묘지에 묻히지 못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계모인 마리아 테레사가 나서서 황실 묘지에 프란츠를 혼자 놔두는 것보다 차라리 조피와 함께 안장하는 것이 낫다고 주장하였고, 이를 받아들여서 페르디난트 부부의 묘는 황태자의 별장이었던 하오스트리아 지방의 바카우 계곡 근처에 있는 아르트스테텐(Artstetten) 성 지하에 함께 안장되었다.[19] 하지만 조피는 죽어서까지도 황실로부터 푸대접을 받았다. 황태자 부부의 장례식은 합동으로 치러졌지만 그녀의 관은 남편보다 15인치가량 낮은 곳에 위치해 있어야 했고, 그 위에는 '''시녀'''를 상징하는 장갑이 놓여 있었다고 한다.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이는 그의 장남 막시밀리안이 아니라 조카인 카를 1세였다. 귀천상혼으로 그의 아들은 후계자가 될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오스트리아 황실은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조피의 자녀들이 오스트리아 황실 소속이 아니라 조피가 하사받은 칭호인 호헨베르크 가문이라는 핑계로 연금 지급까지 거부했다. 프란츠가 물려준 유산은 적지 않았지만, 대부분 토지 등 부동산 형태라서 아직 어린 자녀들이 그것을 가지고 생활하기엔 곤란했다. 그나마 다행히도 페르디난트의 자식들에게 동정적이었던 일부 인사들이 이들을 보호해 주었는데, 특히 이들의 계조모인 마리아 테레사 대공비가 나서서 황실에서 프란츠의 자녀들을 돌봐주지 않는다면 차라리 마리아 본인의 연금을 대신 주고서라도 보호하겠다고 강짜를 부렸다. 당시 황실의 여성 중에선 그녀가 가장 지위가 높아서[20] 그녀의 발언권을 무시할 수 없었고, 결국 황실에서 연금을 되돌려 주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오스트리아 황실이 해체되면서 부동산이 여러 독립국들로 쪼개지고 재산 대부분을 몰수당해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또한 자녀 중 아들들(막시밀리안, 에른스트)은 나치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에 반대하다 강제수용소로 끌려가서 고초를 겪고 독일의 2차 대전 패전 후에야 석방되었다.
5. 여담
-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사냥을 즐겼다. 원래 좋아하기도 했지만, 결혼 문제로 황제와 갈등을 빚으면서 현실도피로 사냥에 더 몰두했다고 한다. 대공비의 고향인 체코, 프라하 남쪽에 있는 코노피슈테(Konopiste) 성에는 그가 잡은 사냥감들이 박제되어 보관되고 있는데, 호랑이나 곰은 물론이고 6000번째 사슴, 1000번째 영양, 100번째 독수리 등이 있다고 한다.
6. 후손들
어머니 조피의 뒤를 이어 2대 호헨베르크 공작이 된 막시밀리안(1902~1962)은 1945년부터 10년간 소련군정 하에서 호헨베르크 공가의 본가가 있는 아르츠테텐(Artstetten)이라는 소도시의 시장을 지내기도 했다. 막시밀리안은 슬하에 6형제를 두었으며 명목상 호헨베르크 공작위는 그 장남 프란츠(1922~1977)가 승계했다. 프란츠는 룩셈부르크 샤를로트 여대공의 딸 엘리자베트와 결혼하여 두 딸을 보았으나, 호헨베르크 공작위가 살리카법 때문에 명목상의 공작위[21] 는 동생 게오르크(1929~2019)가 이어받았다. 그는 직업외교관으로 바티칸 주재 오스트리아 대사를 지냈다. 2남 1녀를 두었다. 호헨베르크 공작가의 현재 남계 후손들 목록
한편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조피의 둘째아들인 에른스트는 1938년 독-오 합병때 나치에게 체포되어 수감되었다가 석방되고, 이후 어렵게 살다가 1954년 50세로 세상을 떠났다.
한편 딸인 조피는 1920년에 19살 나이로 결혼해 4명의 자식을 낳았으나, 독소전쟁에 참전했던 차남 프리드리히 에른스트 레오폴트는 1945년 전쟁터에서 22세로 전사하고 같이 참전한 장남인 프란츠 페터 파울은 소련 굴라크에서 1949년 28세로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다. 그래도 그녀는 페르디난트의 자식 가운데 가장 오래 살았는데 공교롭게도 부모를 죽인 일당 중 하나이며 범인 가운데 가장 오래 살았던 바소 추브릴로비치(1897~1990)와 같은 1990년 89세로 숨을 거뒀다. 그녀의 아이들 중 3째인 알로이스 카를 요제프(1925~2003)는 천수를 누리며 많은 손자, 손녀, 증손녀를 남겼으며 막내인 딸 조피 아말리아 테레지아는 1929년생으로 2024-11-08 01:15:18 현재까지 살아있다.
[1] [image]
컬러화 작업을 진행한 사진도 있다.[2] 정확히는 다스부르고에스테(d'Asburgo-Este)으로, 마리아 테레지아의 4남 페르디난트(Erzherzog Ferdinand Karl von Österreich (1754–1806))가 모데나 공작가의 상속녀인 마리아 베아트리체 데스테(Maria Beatrice d'Este)와 혼인하면서 생긴 가문이다.[3] 멕시코가 내전을 수습하느라 정신없는 틈에 나폴레옹 3세가 그를 멕시코의 황제로 만들어 그를 통해 멕시코를 지배하려고 했으나, 처절하게 실패하고 혁명군에 의해 오히려 처형당하게 되었다. 안습.[4] 신앙심이 깊어서 매일 성지에서 떠온 물을 마시다가 위장병으로 죽었다고 한다(...).[5] 황실에서 시키는 대로 독일 작센 가문의 공주 마리아 요제파와 결혼했다.[6] 나폴레옹 전쟁 때의 명장 카를 대공의 손자.[7] 조피는 시녀였어도 엄연히 귀족이었다. 전근대 시대의 귀족 영애는 왕족 여인의 시녀로 일하는 관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헨리 8세의 아내들만 해도, 앤 불린과 제인 시모어가 왕비의 시녀 출신이다.[8] 다만 백작가를 중류 귀족이라고 보는 것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근세~근대 유럽의 귀천상혼-동등결혼 판단에서 중요한 것은 '지배가문' 출신인지의 여부이다. 귀족이라고 다 같은 귀족이 아니라 자신의 영지(독립된 영토)를 통치하는 '군주' 와 그러한 군주의 신하인 귀족은 서로 다른 신분으로 여겨졌던 것. 예시를 들면, 황가와 백작 가문의 결혼이라도 백작쪽이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같이 지체 높은 백작가면 격이 충분히 맞다고 판단되어 귀천상혼이 아닌 동등결혼으로 인정받는다. 반면에 조피는 뷔르템베르크 왕국 아래의 슈투트가르트 백작령의 넷째딸이었기 때문에 비독립 귀족에 후계자조차 아닌 신분이어서, 계승권조차 없는 한미한 귀족 사내와 결혼해서 살다가 후대에는 이름만 귀족인 평범한 집안이 될 팔자였다. 이런 조피와 독립 제국의 후계자인 프란츠와의 결혼은 귀천상혼으로 간주되었다.[9] 실제로 귀천상혼으로 자신의 계승권을 포기하는 사례는 왕왕 존재했다.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황후 엘리자베트의 큰오빠 또한 귀천상혼을 이유로 계승권을 포기했고, 따라서 그 작위는 둘째가 이었다.[10] 귀천상혼으로 태어난 자녀들은 제위권이 없다. 후계자를 생산할 수 없다는 것은 군주에게는 매우 심각한 결격사유다.[11]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12] 이 방안을 제안한 아우렐 포포비치는 루마니아 인이었다.[13] 두 민족을 합쳐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 전 인구 비율에서 고작 44%에 지나지 않았다.[14] 프란츠 요제프 황제와도 대립했다. 황제는 일생일대의 업적인 대타협에 대단한 자부심이 있었고 실제로 그럴만한 자격도 있었지만, 때문에 대타협 체제를 근본부터 뒤집는 것에 반대했다.[15]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두 나라가 공동으로 운영하며 명목상 황제가 지휘하는 정규군 조직인 '공동군' 외에도 미국의 주방위군처럼 독자적인 예비군 조직인 '방위군'(오스트리아 제국은 란트베어, 헝가리 왕국은 혼베드)을 유지하고 이는 각각 오스트리아 총리, 헝가리 총리의 지휘를 받았다. 이 때문에 헝가리 총리가 황실 후계자에게 큰 소리를 칠 수 있었던 것. 헝가리가 그렇게 뻗댄다면 군대로 밀어버리거나 해서 강제로라도 고분고분하게 만들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랬다가는 동군연합의 특성상 제국이 해체되어 버렸을 것이다.[16] 합스부르크 제국과 로마노프 제국이 서로 전쟁을 벌이면 '''둘 다 망한다고''' 생각하며 러시아에 대한 적대정책에 반대했다. 결국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17] 특히 페르디난트는 오스트리아 해군의 열렬한 지지자중 한 명이었으며 페르디난트가 사망한 후 그와 부인은 오스트리아 전함 비리부스 유니티스(Viribus Unitis)에 탑승해 장례가 치러지기도 했다.[18] 당시 페르디난트는 육군 원수직을 겸하고 있었기에 육군 원수 부인으로 함께 했다.[19] 자식과 손자들도 함께 매장되어 있다.[20] 황후 시씨는 암살당했고 막시밀리안의 아내인 샤를로테(카를로타)는 막시밀리안이 총살당한 후 정신병에 걸려서 유폐 생활을 하고 있었으므로(1927년 사망) 사실상 마리아가 황실 내 최고 어른이었다.[21] 현재 공화국인 오스트리아는 공작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컬러화 작업을 진행한 사진도 있다.[2] 정확히는 다스부르고에스테(d'Asburgo-Este)으로, 마리아 테레지아의 4남 페르디난트(Erzherzog Ferdinand Karl von Österreich (1754–1806))가 모데나 공작가의 상속녀인 마리아 베아트리체 데스테(Maria Beatrice d'Este)와 혼인하면서 생긴 가문이다.[3] 멕시코가 내전을 수습하느라 정신없는 틈에 나폴레옹 3세가 그를 멕시코의 황제로 만들어 그를 통해 멕시코를 지배하려고 했으나, 처절하게 실패하고 혁명군에 의해 오히려 처형당하게 되었다. 안습.[4] 신앙심이 깊어서 매일 성지에서 떠온 물을 마시다가 위장병으로 죽었다고 한다(...).[5] 황실에서 시키는 대로 독일 작센 가문의 공주 마리아 요제파와 결혼했다.[6] 나폴레옹 전쟁 때의 명장 카를 대공의 손자.[7] 조피는 시녀였어도 엄연히 귀족이었다. 전근대 시대의 귀족 영애는 왕족 여인의 시녀로 일하는 관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헨리 8세의 아내들만 해도, 앤 불린과 제인 시모어가 왕비의 시녀 출신이다.[8] 다만 백작가를 중류 귀족이라고 보는 것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근세~근대 유럽의 귀천상혼-동등결혼 판단에서 중요한 것은 '지배가문' 출신인지의 여부이다. 귀족이라고 다 같은 귀족이 아니라 자신의 영지(독립된 영토)를 통치하는 '군주' 와 그러한 군주의 신하인 귀족은 서로 다른 신분으로 여겨졌던 것. 예시를 들면, 황가와 백작 가문의 결혼이라도 백작쪽이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같이 지체 높은 백작가면 격이 충분히 맞다고 판단되어 귀천상혼이 아닌 동등결혼으로 인정받는다. 반면에 조피는 뷔르템베르크 왕국 아래의 슈투트가르트 백작령의 넷째딸이었기 때문에 비독립 귀족에 후계자조차 아닌 신분이어서, 계승권조차 없는 한미한 귀족 사내와 결혼해서 살다가 후대에는 이름만 귀족인 평범한 집안이 될 팔자였다. 이런 조피와 독립 제국의 후계자인 프란츠와의 결혼은 귀천상혼으로 간주되었다.[9] 실제로 귀천상혼으로 자신의 계승권을 포기하는 사례는 왕왕 존재했다.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황후 엘리자베트의 큰오빠 또한 귀천상혼을 이유로 계승권을 포기했고, 따라서 그 작위는 둘째가 이었다.[10] 귀천상혼으로 태어난 자녀들은 제위권이 없다. 후계자를 생산할 수 없다는 것은 군주에게는 매우 심각한 결격사유다.[11]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12] 이 방안을 제안한 아우렐 포포비치는 루마니아 인이었다.[13] 두 민족을 합쳐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 전 인구 비율에서 고작 44%에 지나지 않았다.[14] 프란츠 요제프 황제와도 대립했다. 황제는 일생일대의 업적인 대타협에 대단한 자부심이 있었고 실제로 그럴만한 자격도 있었지만, 때문에 대타협 체제를 근본부터 뒤집는 것에 반대했다.[15]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두 나라가 공동으로 운영하며 명목상 황제가 지휘하는 정규군 조직인 '공동군' 외에도 미국의 주방위군처럼 독자적인 예비군 조직인 '방위군'(오스트리아 제국은 란트베어, 헝가리 왕국은 혼베드)을 유지하고 이는 각각 오스트리아 총리, 헝가리 총리의 지휘를 받았다. 이 때문에 헝가리 총리가 황실 후계자에게 큰 소리를 칠 수 있었던 것. 헝가리가 그렇게 뻗댄다면 군대로 밀어버리거나 해서 강제로라도 고분고분하게 만들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랬다가는 동군연합의 특성상 제국이 해체되어 버렸을 것이다.[16] 합스부르크 제국과 로마노프 제국이 서로 전쟁을 벌이면 '''둘 다 망한다고''' 생각하며 러시아에 대한 적대정책에 반대했다. 결국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17] 특히 페르디난트는 오스트리아 해군의 열렬한 지지자중 한 명이었으며 페르디난트가 사망한 후 그와 부인은 오스트리아 전함 비리부스 유니티스(Viribus Unitis)에 탑승해 장례가 치러지기도 했다.[18] 당시 페르디난트는 육군 원수직을 겸하고 있었기에 육군 원수 부인으로 함께 했다.[19] 자식과 손자들도 함께 매장되어 있다.[20] 황후 시씨는 암살당했고 막시밀리안의 아내인 샤를로테(카를로타)는 막시밀리안이 총살당한 후 정신병에 걸려서 유폐 생활을 하고 있었으므로(1927년 사망) 사실상 마리아가 황실 내 최고 어른이었다.[21] 현재 공화국인 오스트리아는 공작위를 인정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