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왕립 해군
1. 개요
1861년부터 1946년까지 존재하였던 이탈리아 왕국의 해군. 7주 전쟁부터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많은 전쟁을 치렀다. 활동 범위 역시 전세계를 무대로 했던 영국 해군보다는 좁았지만, 지중해, 대서양, 태평양, 야프리카, 흑해 등 웬만한 곳에서는 다 활동한 적이 있다. 1946년 국민투표를 통해 이탈리아 왕국이 멸망하고 이탈리아 공화국이 세워지면서 자연스럽게 이탈리아 왕립 해군 역시 이탈리아 해군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 참전 전쟁
7주 전쟁
이탈리아-터키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스페인 내전
알바니아 침공(무력 합병)
제2차 세계 대전
3. 전력
3.1. 함선
4. 활동
4.1. 7주 전쟁
7주 전쟁 당시에는 오스트리아 해군과 맞서 싸웠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리싸 해전인데, 이 전투에서 이탈리아 왕립 해군 함대는 어뢰정을 제외한 모든 전력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으나 함대의 지휘권을 놓고 갈등이 벌어진 데다, 오스트리아 해군의 교란작전에 넘어가 분산되었고 결국 하나둘씩 각개격파 당했다. 최종적으로 이탈리아는 이 해전에서 장갑함 2척을 잃고 620명이 사망하는 큰 피해를 입은 반면 적이었던 오스트리아 해군의 피해는 장갑함 2척 중파에 34명 사망이 끝이었다. 즉 완패했다.
4.2. 제1차 세계 대전
4.3. 제2차 세계 대전
4.3.1. 지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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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포하는 리토리오급 전함 리토리오와 비토리오 베네토.[2]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지중해에서 영국 해군과 치열하게 싸웠다. 초반에는 홈 어드벤티지와 나치 독일의 지원을 적극 받은 이탈리아가 유리했으나, 영국 해군 역시 몰타를 거점으로 격렬하게 저항했고 일러스트리어스급 항공모함과 U급 잠수함등 수많은 잠수함/항모들을 지중해에 파견해 이탈리아 해군을 막아냈다. 거기에 마타판곶 해전과 페데스탈 작전(주춧대 작전)[3] 등 대규모 전투를 치룬 이탈리아 해군은 큰 손실을 입었고,[4] 거기에 영국에게 타란토 공습이라는 희대의 빅엿을 먹은 결과 전함 등 이탈리아 왕립 해군의 대형함들은 항복 직전까지 말그대로 항구에 틀어박혀서 지내게 된다.
다만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이탈리아 해군은 북아프리카로 향하는 호송선단 호위 임무를 상당히 잘 수행하였다. 전쟁 초기에는 이탈리아 왕립 공군이 독일이 공여해준 Ju87과 자체개발한 폭격기 SM.79를 이용해 해군을 도왔고,[5] 특수부대 Decima Flottiglia MAS는 자폭보트와 인간어뢰 등을 동원하여 '''영국군의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을 두척이나 중파시켰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영국군에게 질적으로 너무나도 밀렸고, 거기다가 이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어야 할 전함 등 대형함들은 말 그대로 '''항구에 숨어서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횃불 작전 이후에 이탈리아 해군은 일찌감치 항복해버린다. 소수의 해군 전력은 항복을 거부하고 독일군의 지원을 받으며 계속해서 저항하였으나, 영국 해군을 상대하는 것만 해도 힘들었던 이탈리아 왕립 해군에게 '''미국 해군은 너무나도 강력한 존재였다.''' 또한 이탈리아 해군이 항복하는 과정에서 이탈리아 해군의 전함 전력이 연합군으로 넘어가는 걸 원치 않았던 독일군이 항복한 이탈리아 해군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후술할 "이탈리아 항복 이후" 부분이나 로마 문서를 참조할 것.
4.3.2. 대서양
이탈리아 왕립 해군이 당장 본진인 지중해 지키기도 바쁜 상황에서 어떻게 대서양에 해군을 보냈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영국 본토 항공전 때와 비슷하게 이탈리아는 잠수함 전력 일부를 지중해로 파견해 크릭스마리네의 U보트와 합류시켰다. 대서양 파견 잠수함들의 본거지는 프랑스의 보르도였다. 전쟁 내내 총 32척의 잠수함들이 지중해로 파견되었고 이들은 도합 109척에 달하는 연합군 상선을 격침시켰다. 영국 본토 항공전때 도움 1도 안되고[6] 신나게 털린 이탈리아 왕립 공군에 비해 그나마 이탈리아 왕립 해군은 어느정도 활약이라도 한 셈. 이탈리아는 1942년 12월 잠수정을 이용한 '''미국 뉴욕 항구 공격을 계획했으나,''' 여러가지 사정으로 인해 계획은 차일피일 미뤄졌으며 결국 폐기되었다.
4.3.3. 홍해
이탈리아의 아프리카 식민지들이 홍해를 끼고 있었기 때문에, 이탈리아 해군은 홍해에서도 활동했다. 홍해 전단의 본거지는 마사와였다.[7] 이들은 전쟁 초반에는 이탈리아 육군과 함께 영국령 소말릴란드를 침공하여 항구 몇 개를 점령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으나, 얼마 가지 못한 1941년 4월, 홍해 전단은 영국과 영연방 해군에게 맹렬한 반격을 받았고, 결국 전단 전체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이 과정에서 본거지 마사와 역시 영국이 탈환하였다.
한편 홍해 전단의 최후가 임박해지자, 이탈리아 왕립 해군 지휘부는 잔존 홍해 전단 소속 함선들을 탈출시켰다. 대표적으로 마사와가 함락되기 2달 직전이었던 1941년 2월, 에리트레아급 포함 에리트레아와 무장상선 2척이 마사와를 탈출해 일본 제국으로 긴 대장정을 시작했다. 이들의 최종 목적지는 고베였다. 결과는 성공이였는데, 중간에 무장상선 1척이 뉴질랜드군 순양함에게 격침당하였으나 에리트레아와 나머지 무장상선 1척은 무사히 고베에 도착했다.[8] 마찬가지로 마사와가 함락되기 직전, 홍해 전단 소속의 잠수함 4척 역시 탈출을 시도하였는데, 이들은 성공적으로 희망봉을 돌아 보르도[9] 로 탈출하는데 성공하였다. 또한 이탈리아 상선 한두척 역시 비시 프랑스의 영토였던 마다가스카르로 탈출했다. 그리고 6월 11일, 이탈리아의 마지막 홍해 항구였던 아사브가 영국군에 의해 탈환되었고, 이것으로 홍해 전단은 최종적으로 소멸되었다.
4.3.4. 흑해
1942년 5월, 독일군은 흑해에 이탈리아 함대를 파견할 줄 것을 공식적으로 요청했고, 이에 회답한 이탈리아 왕립 해군은 어뢰정과 잠수정으로 이루어진 20척 가량의 해군 전력을 흑해로 파견시켰다. 이들은 다뉴브 강을 통과해 최종적으로 루마니아 왕국의 콘스탄차 항을 통해 흑해로 진입했다. 흑해 전단의 본거지는 전술한 콘스탄차 항이었고 전단 자체는 주로 얄타와 페오도시아 부근에서 활동하였다. 이후 이탈리아가 항복하고 추축국에서 탈퇴하자, 살아남은 대부분의 함선들은 독일군이나 루마니아가 접수했고 크릭스마리네나 루마니아 왕립 해군 소속이 되어 활동했다. 그리고 흑해 전단은 1944년 본거지였던 콘스탄차 항이 함락되면서 완전히 소멸되었다.[10] 이때까지도 살아남았던 운좋은 일부 잠수정들은 모조리 루마니아 해군이 가져갔다.
4.3.5. 동아시아
놀랍게도, 이탈리아 왕립 해군은 적은 전력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에까지 손을 뻗었다. 당시 이탈리아 왕국은 톈진을 식민지로 두고 있었는데, 톈진은 항구도시였기 때문에 잠수함이나 무장상선을 비롯한 소수의 해군 전력을 파견해 둔 상태였다. 이들 전력은 제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같은 추축국이었던 일본과 협력해서 통상파괴작전을 벌이며 싸웠다.
그러는 사이 이탈리아 본토에서는 별도로 일곱 척의 잠수함들을 동아시아로 파견했다. 다만, 이들은 그냥 잠수함은 아니었고 개조를 해서 무장을 때어내고 물자를 수송하는 일명 "수송용 잠수함"들이었다. 이들은 일본에 물자를 전달하러 가는 길이었고, 독일의 몬순 전단[11] 을 지원할 목적도 있었다. 또한 이탈리아 왕립 해군은 이들을 추가적으로 지원할 로몰로급(Romolo-Class) 수송용 잠수함을 12척이나 건조시켰지만, 이중에서 고작 2척만이 종전 전까지 완성되었다. 게다가 이 2척 역시 진수식 직전 연합군의 폭격으로 항구 내에서 격침당했다.
4.4. 이탈리아 항복 이후
이탈리아가 항복하자, 이탈리아 왕립 해군 역시 두 파로 찢어졌다.[12] 대부분의 잔존 해군 전력은 연합군에 온전히 넘어갔으나, 소수의 병력들은 항복을 거부하고 살로 공화국 정부에 충성했다. 이건 특수부대도 예외는 아니어서, 소형함 중심으로 지중해에서 활동하며 영국 해군을 끊임없이 괴롭혔던 특수부대 Decima Flottiglia MAS 역시 두 파로 찢어져 활동는데, 이 중 연합군에 협력하였던 세력은 자폭 보트를 이용해 살로 공화국이 가져가 건조 중이던 항공모함 아퀼라를 공격해 대파시켰다. 추축국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는데, 루프트바페가 항복 후 연합군 점령지로 이동하던 이탈리아 전함대를 공격, 전함 로마를 격침시키고 동급 전함 리토리오를 대파시키기도 했다. 또 살로 공화국은 한때 이탈리아 왕립 해군을 지휘하였던 이니고 캄피오니 제독을 자신들과의 협력을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숙청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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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유폭 순간.
4.5. 종전과 해체
어찌 되었든, 전쟁은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고, 1946년 이탈리아가 공화정으로 전환되면서 이탈리아 왕립 해군은 해체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이탈리아 해군으로 바뀌었다.
한편 신생 이탈리아 해군은 1947년에 맺어진 파리 조약으로 인해 중요 전력 대부분을 연합국에게 넘겨 주어야 함과 동시에 독일 등 다른 추축국들과 비슷하게 향후 핵무기, 전함이나 항공모함 등 대량살상무기나 대형함 보유를 제한받았다. 이로 인해 그때까지 어찌어찌 살아남았던 대형함들은 배상함으로 영국이나 미국 등의 승전국들에 넘겨졌으나, 이 중 영국이나 미국이 가져간 대형함 일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탈리아로 반환된 뒤 해체되었다.[13] 어뢰정이나 기뢰부설함, 구축함 등의 중소형 함선들의 경우, 이탈리아에게 시달렸던 유고슬라비아, 그리스, 알바니아 등의 발칸 반도 국가들이 배상함 형식으로 가져갔다.
참고로 소련도 이탈리아 왕립 해군의 함선들을배상함 형식으로 받았는데, 이들 중 한 척(전함 줄리오 체자레)는 사고를 가장한 이탈리아군 특수부대의 파괴공작으로 침몰하였다는 설이 존재한다. 이탈리아가 워낙 2차 세계 대전에서 Decima Flottiglia MAS 같은 걸출한 특수부대들을 많이 운용했고 실제로 아퀼라를 대파시키거나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 2척을 중파시킨 전적도 있음을 고려하면 나름 현실성 있는 가설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후 냉전이 터졌고, 공산화된 발칸 반도 국가들과 유사시 지중해로 내려오는 소련 흑해함대로부터 지중해야 수에즈 근방을 방어해야 한다는 이유로 이탈리아 해군은 다시 대형함 보유를 허용받았으며, 이탈리아 해군은 빠르게 예전 전력을 되찾을 수 있었다.
[1] 한 차례 개정된 문장으로, 1900년부터 해체될때까지 사용한 문장이다. 아래는 1861년부터 1900년까지 사용한 문장. [image][2] 앞이 비토리오 베네토이고 뒤가 리토리오다.[3] 주춧대 작전 자체는 추축국의 전략적 승리였지만, 이탈리아 해군이 입은 피해는 제법 컸다.[4] 대표적으로 마타판곶 해전에서는 이탈리아군 전함 1척이 대파되었고 중순양함 3척과 구축함 2척이 한번에 날아갔는데 비해 영국군의 피해는 매우 경미하였다.(순양함 4척 소파, 뇌격기 1기 격추) 다만 이는 예정되어 있던 독일의 항공자원이 오지 않아서 이렇게 참패한 것이긴 하다.[5] 해군 항공대가 아닌 공군이 이 일을 도맡은 것은 이탈리아 왕립 해군이 자체적인 항공대를 보유하지 못했던 것도 한 몫 했다. 그 이유는 즉슨 공군사령관 이탈로 발보가 해군의 함재기 보유를 금지시켰기 때문이었다.[6] 실제로 영국 본토 항공전 내내 이탈리아 왕립 공군은 루프트바페의 장교들과 파일럿 모두에게 골칫덩어리였다.[7] 마사와는 한때 에티오피아의 항구도시였지만 1993년 이후 에리트레아의 도시가 되었다.[8] 이후 에리트리아는 일본해군 소속이 되어 이탈리아가 항복하기 전까지 태평양에서 통상파괴전을 실행하다가 이탈리아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스리랑카로 가서 연합국에게 항복한다.[9] 전술했듯이 이곳은 이탈리아 대서양 잠수함 전단의 본거지이도 했다.[10] 흑해 전단 자체는 이탈리아가 연합국에 항복하고 전쟁에서 빠진 1943년에 해체되었다.[11]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을 도울 목적으로 독일군이 아시아에 파견한 유보트 전단을 이르는 말. 이들은 일본 해군과 합동 작전을 펼쳤다.[12] 이 시점에서 이탈리아 왕립 해군은 전력의 상당수를 잃은 후였다.[13] 여기에 대해서는 유지비 문제로 그랬다는 설이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