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루트비히
1. 개요
레오폴트 2세의 아들이자 프란츠 2세의 동생. 외스터라이히 대공이자 테셴의 공작이기에 흔히 '''카를 대공'''으로 알려져 있다. 프랑스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 당시 연합군 사령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친동생이라는 당시 지휘관들 중에 최고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1] 같은 신분을 가진 콘스탄틴 대공이나, 비슷한 신분이었던 오스트리아의 고위 귀족 출신 장성들과 달리 뛰어난 전술, 전략적 식견을 보유하고 있었던 인물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가장 강력한 적수 중 하나였다고 평가된다.
2. 생애
2.1. 유년기와 초기 경력
카를 루트비히 대공은 부황 레오폴트가 토스카나 대공이던 시절, 그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날 때부터 병약하였던 그는 어렸을 적부터 뇌전증을 앓았고, 그 증상은 성장한 이후에도 계속되어 신체적, 정신적으로 안정되지 못하였다.[2] 후계자가 없던 고모, 테셴 여공 마리아 크리스티나와 그 남편 알베르트 부부에게 입양된 그는 부친의 영지였던 토스카나와 제국의 수도였던 빈, 그리고 양부이자 고모부가 총독으로 있던 오스트리아령 저지대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부모는 본래 카를이 성직자의 길을 가게 하려고 하였지만, 그는 성장하면서 군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결국 군에 들어간 그는 프랑스 혁명 전쟁이 개시되자 고모부가 담당하고 있던 저지대 주둔 오스트리아의 군부대를 지휘하게 되었고, 샤를 프랑수아 뒤무리에 장군[3] 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을 상대로 하여 네르빈덴 전투 등에서 공훈을 세웠다. 무훈을 계속 세운 결과, 그는 오스트리아령 저지대의 총독까지 역임하게 되었다.[4]
2.2. 라인의 사령관
혁명 전쟁 당시 프랑스는 크게 세 방향에서 오스트리아를 압박하는 전략을 수립하였다. 하나는 북이탈리아였고, 하나는 저지대, 하나는 남부 독일이었다. 이 중 저지대와 남부 독일 전선은 라인 강 유역으로 크게 묶여 있었다. 카를 대공이 라인 강 방어선을 책임지게 된 1796년 당시, 프랑스군의 라인 방면 공격군 사령관은 장 빅토르 마리 모로, 장 바티스트 주르당이었다.
2.3. 비운의 천재
라인에서의 무훈을 세운 후, 카를은 건강 악화로 인해 사령관직을 내려놓았다.
2.4. 아스페른의 승리자
1809년, 반도 전쟁에서 대육군이 고전하는 모습을 보이자, 오스트리아 내부에서는 프랑스와의 전쟁을 벌일 것을 바라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카를 대공은 군대를 이끌고 나가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 나폴레옹을 상대로 승리를 거뒀지만 이후
나폴레옹과의 바그람 전투에서 혈투 끝에 패배를 당하였고
이후 추격해온 오귀스트 마르몽의 프랑스군에게 다시 패배하여 나폴레옹에게 휴전을 제의하였지만 이 휴전 협상으로 인해
형인 프란츠 2세와의 사이는 나빠지게 되었다.
2.5. 은퇴와 후생
츠나임 휴전 이후, 카를 대공은 완전히 은퇴하였다. 그는 이전부터 진행하던 전술서나 자신이 겪은 전쟁에 대한 기록 등을 남기는 데 집중하였고, 군으로 복귀하는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에는 형인 프란츠 2세가 프랑스의 영토에서 부르고뉴와 알자스 지역을 따로 분리시켜 오스트리아의 괴뢰국을 세우고 그곳의 영주로 내세우려 했으나 러시아와 프로이센의 반발로 실패하였다.
1815년, 카를은 44세의 나이로 나사우바일부르크 가문[5] 의 헨리에타 공녀와 혼인하였다. 신교도였던 그녀는 1797년 생으로, 대공보다 무려 26세나 어렸다. 그러나 부부 사이는 매우 좋았다. 그녀는 대공과의 사이에서 7명이나 되는 아이를 낳았고, 황제 프란츠를 비롯한 카를의 가족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신교도 지역에서 주로 나타나던 풍습인 크리스마스 트리를 빈의 합스부르크 궁정에 가져온 것도 그녀였다. 카를은 그녀를 위해 바덴에 여름 궁전을 새로이 지어 주기도 하였다. 카를의 생활은 그녀와 아이들을 통해 안정되었다. 이 시기인 1822년 양부이자 고모부인 테셴 공작 알베르트가 죽자, 그는 유산과 작위를 계승하였다.
카를과 헨리에타 일가의 행복한 생활은 14년 밖에 가지 못했다. 1829년, 성홍열에 걸린 아이들을 돌보던 헨리에타는 그 병에 옮아 앓다가 일어나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그녀는 카푸친 교회의 황실 봉안당에 안치되었다.[6] 아내의 사후, 카를은 남은 아이들의 교육을 스스로 책임지고 아내의 몫까지 아이들을 가르치며 살았다. 1847년, 그는 빈에서 숨을 거두었고, 황실 봉안당에 먼저 안치된 아내의 곁에 안치되었다.
3. 기타
[1] 러시아의 근위대 지휘관인 알렉산드르 1세의 동생이었던 콘스탄틴 대공 정도만 같은 위치다.[2] 이러한 점은 뒷날 그의 전략에도 영향을 주었다.[3] 혁명기 프랑스의 장군. 지롱드당에 속하는 정치가이기도 했다. 혁명군의 첫 승전과 같던 발미 전투의 주역이었고, 오스트리아령 저지대를 장악하기까지 하였으나, 이후 전황이 불리하게 흐르고 중앙에서 몽타뉴파가 세력을 확대하자 위기감을 느껴 쿠데타를 꾀했다. 그러나 적발되어 조기에 진압당했고, 본인은 연합군에게 투항하였다.[4] 그러나 이후 저지대는 결국 프랑스의 손에 넘어가, 그는 오스트리아령 저지대의 마지막 총독이 된다.[5] 현재 룩셈부르크를 다스리고 있는 가문이다.[6] 이는 개신교를 받아들이지 않던 합스부르크 가문에게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로 인해 수도사들 사이에서도 헨리에타를 봉안당에 안치할 수 없다며 반발이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헨리에타는 평생을 남편의 가문과 함께 살았으니 죽어서도 함께할 권리가 있다는 프란츠 황제의 어명은 그것을 무마시켰다. 결국 헨리에타는 황실 봉안당에 안치된 유일한 신교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