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상카라
1. 개요
"미치지 않고서는 근본적 변화를 이룰 수 없다. 반체제주의, 구시대의 낡은 유물을 폐기하는 용기, 미래를 창조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어제의 미친 사람들이 우리에게 오늘의 극명함으로 행동하라고 한다. 나는 미친 사람이 되고 싶다. 우리가 미래를 만들어야 하므로.
(Vous ne pouvez pas accomplir des changements fondamentaux sans une certaine dose de folie. Dans ce cas précis, cela vient de l’anticonformisme, du courage de tourner le dos aux vieilles formules, du courage d’inventer le futur. Il a fallu les fous d’hier pour que nous soyons capables d’agir avec une extrême clarté aujourd’hui. Je veux être un de ces fous. Nous devons inventer le futur.)"
토마[1] 이지도르 노엘 상카라(Thomas Isidore Noël Sankara, 1949년 12월 21일 ~ 1987년 10월 15일)는 부르키나파소의 5대 대통령이다."국가의 고위직을 연달아 점유하면서 국민에게는 다른 곳에서 빌려온 가짜 해결책 말고는 보여준 것이 없는 엘리트들이 리무진을 타고 떵떵거리며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는 데 지치고 격노한 대중의 폭발하려는 반발에 의미를 부여해야 합니다. 괴물같은 제국주의에 대항해서 들고 일어난 수많은 대중의 정당한 투쟁에 영혼이 되는 하나의 이념을 부여해야 합니다.
(Il nous fallait donner un sens aux révoltes grondantes des masses urbaines désoeuvrées, frustrées et fatiguées de voir circuler les limousines des élites aliénées qui se succédaient à la tête de l’Etat et qui ne leur offraient rien d’autre que les fausses solutions pensées et conçues par les cerveaux des autres. Il nous fallait donner une âme idéologique aux justes luttes de nos masses populaires mobilisées contre l’impérialisme monstrueux.)""우리는 이 말이 현세에 고통 받는 모든 이에게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그들을 억압하는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서 혹은 시스템에 의해서 자기 존엄성을 무시당하는 모든 이들에게 말입니다. 저는 단지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부르키나파소 국민의 이름으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 어느 곳에선가는 고통을 겪고 있을 모든 사람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Nous voudrions que notre parole s’élargisse à tous ceux qui souffrent dans leur chair, tous ceux qui sont bafoués dans leur dignité d’homme par un minorité d’hommes ou par un système qui les écrase. Permettez, vous qui m’écoutez, que je le dise : je ne parle pas seulement au nom du Burkina Faso tant aimé mais également au nom de tous ceux qui ont mal quelque part.)"
2. 생애
2.1. 출생부터 집권 전까지의 삶
오트볼타(부르키나파소의 옛날 이름) 파소레 현(Province du Passoré) 야코(Yako)에서 출생한 그는 가톨릭 사제가 되라는 부모의 뜻을 거역하고, 19살에 공군에 입대해 공수부대의 장교가 되었다. 주변국 말리와의 국경분쟁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일약 자국에서 전쟁영웅으로서 유명인사가 된다. 이렇게 훌륭한 군인이었지만, 딱딱한 인물은 아니라서 수도 와가두구에서 이름난 밴드의 기타리스트였고 오토바이를 좋아하는 낭만적인 젊은이였다. 이때 그의 절친이었다가 훗날에 배신한 블레즈 콩파오레가 이 밴드의 보컬이었다.
그는 오트볼타 정치권의 심각한 부정부패와 빈부격차, 인간이하의 취급을 받는 여성, 황폐해지는 자연환경과 사회전반을 보고 남들과는 다른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마다가스카르에 연수를 가게 되었고, 여기서 좌익서적을 탐독함으로써 좌경화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좌익서적을 읽고 좌경화된 상카라는 혁명의식을 갖게 되었으며, 오트볼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 사회주의에 주목했고 군부내에 "공산주의 장교그룹(Regroupement des officiers communistes)"이라는 비밀단체를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오트볼타는 당시 자고 일어나면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는 불안정한 체제였다. 쿠데타로 집권한 사예 제르보(Saye Zerbo) 대령이 상카라를 1981년에 정보부 장관에 임명하면서 관직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개혁적 성향의 상카라는 집권세력과 마찰을 빚었고 노동자 정책을 비판하며 "민중의 입에 재갈을 물리려는 자들에게 저주를.(Malheur à ceux qui bâillonnent le peuple !)"이라는 말을 남기고 사임했다.
그러나 1982년 11월, 군부였던 장바티스트 우에드라오고(Jean-Baptiste Ouédraogo) 소령에 의해서 또다시 쿠데타가 일어났다. 대통령이 된 우에드라오고는 1983년, 대중적인 지지를 받는 상카라를 총리로 임명했다. 그러나 상카라의 개혁적 성향을 두려워한 우에드라오고는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방문한 직후 상카라를 가택연금했다. 그러자 대중들은 상카라의 가택연금을 해제하라며 항의했고 결국 민중봉기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의 정치적 동료인 블레즈 콩파오레(Blaise Compaoré)와 함께 당시 차드를 방문하고 있던 리비아의 카다피의 지지를 얻고 쿠데타를 일으켜 우에드라오고를 축출하였다. 이후 그는 오트볼타의 제5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2.2. 대통령 취임 후의 행보
취임 후 상카라는 자신이 구상한 개혁정책들을 추진해 나갔다. 우선 오트볼타라는 프랑스 식민지배 잔재의 국명을 버리고 "부르키나파소"로 개명했다. 부르키나파소는 현지 모시어로 "정직한 사람들의 나라"라는 의미라고 한다.
또한 그전까지 쓰이던 국기와 국가를 버리고 "어느 날 밤(Une Seule Nuit)"이라는 국가를 자신이 직접 작사·작곡하기까지 했다. 정부가 민중들과 함께한다는 의미에서 정부가 소유하고 있던 장관용 관용차 (벤츠) 들을 전부 매각하고 값싼 경차(르노 6)로 바꾸었다.
그리고, 상카라는 사회주의적 경제정책을 통해 부르키나파소의 경제를 일으키려 하였다. 행정개혁을 통해 과감하게 전국을 30개 자치구로 나누고 각각의 자치구에 광범위한 자치권을 부여하여 주민들이 주체적으로 나서서 자치구를 관리하게 하는 "자주관리정책"을 시행했다.
그리고 프랑스 식민지배 이후로 계속 이어져왔던 과중한 인두세를 과감하게 폐지하고 토지 재분배정책을 시행했다. 그러니까 전국에 할거한 부족장들이 지배하는 토지를 몰수하여 국민들에게 나눠주는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국가예산을 효율적으로 집행하여 도로, 상하수도 같은 사회기반시설을 만들었고 각 지역의 특산 수공예 산업 육성에 집중적으로 투자했다. 특히, 90%가 넘는 문맹을 치유하기 위해 교육을 중시하였고, 인재를 키우기 위해서 여러 학교가 설립되었다.
사회정책에서도 상당한 개혁적 조치들을 단행했다. 법적으로 일부 다처제를 금했으며, 아프리카 여성들에게 너무도 가혹했던 풍습인 여성할례의식을 금지시켰고 여성의 날을 국경일로 지정했다. 특히 여성을 고위공무원직에 대거 임명하여 여성 인권을 신장시켰다.
또한 피임을 장려하고 어린아이들에 대한 예방접종도 대대적으로 시행했으며 에이즈의 실체를 아프리카 최초로 정부차원에서 인정하기도 했다. 마을마다 병원을 세워 미신이나 그릇된 지식의 치료법 대신 근대적인 의료체계를 확립하려 했다.
또한 사막화가 계속 진행되는 황폐화된 부르키나파소의 자연환경을 복구하기 위한 재녹화 사업을 추진하기도 했다.
상카라의 일련의 개혁정책들은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 다민족으로 구성된 부르키나파소에 광범위한 자치권을 각 자치구에 부여한 자주관리제도는 성공적이어서 그 동안 문제가 되어왔던 부족갈등이 사라지고 토지재분배 정책도 큰 효과를 거두어서 농업 생산량이 두 배 넘게 증가하여[2] 부르키나파소는 집권 4년만에 식량을 자급자족하게 될 정도로 경제가 살아나게 된다.
하지만, 서방의 기준으로 보면 인권 탄압은 상당했는데 국제사면위원회나 옥스팜, OECD에서 인권 문제로 상카라를 비난했다. 상카라는 인민재판과 비슷한 인민혁명재판소를 열어서 기득권층과 반대파, 노동운동가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한 것이 그 이유. # 그래도 주변 국가의 막장 독재자들의 인권 탄압에 비하면 새발의 피에 불과했다. 더구나 인권을 사랑한다는 서방 국가들은 이런 막장 독재자들의 인권 탄압이나 인종 청소에는 눈감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들을 지원하기까지 했다. 대표적으로 르완다 내전에서 후투족을 지원해 투치족의 제노사이드를 방조한 프랑스가 있다. 이 시기 대서양 너머 중남미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극우 군부 세력이 미국의 묵인과 지원 하에 쿠데타를 일으켜 군부 독재 정권을 수립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했고, 한국에서도 전두환 신군부 정권이 미국의 승인을 받았다.
2.3. 암살당하다
그러나 이런 상카라의 개혁정책들은 주변국의 독재자들[3] 에게는 위협적으로 비쳐졌다. 이들은 토마스 상카라의 존재로 인해서 자국에서도 개혁세력들이 들고 일어나 자신들의 권좌를 위협할 것을 두려워했다.
다른 한편으로 미국에서도 역시 상카라를 위험인물로 간주했다. 상카라는 성공적인 사회주의 개혁가였고 미국은 상카라가 부르키나파소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전체에 반미적인 사회주의 개혁을 퍼뜨릴 것을 우려했다. 결국 부르키나파소 인근 국가들의 독재자들과 미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고 미국 CIA는 상카라의 정치적 동료인 블레즈 콩파오레를 포섭하는데 성공했다.[4]
상카라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이라도 했던지 1987년 장 지글러[5] 를 만난 자리에서 "체 게바라는 몇 살까지 살았나요?"라고 물었다고 한다.[6] 또한 체 게바라 20주기 추모식에서 그는 "혁명가 개인을 죽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사상은 죽일 수 없다.(En tant qu'individus les révolutionnaires peuvent être tués, mais vous ne pouvez pas tuer les idées.)"라는 유언을 남겼다.
1987년 10월 15일, CIA에 포섭된 블레즈 콩파오레는 반혁명 쿠데타를 단행했고 상카라는 맞서다가 결국 수도 와가두구에서 동료들과 함께 살해되고 말았다. 나중에 유해가 발굴된 후 검시결과에 의하면 수십발을 총탄을 맞았다고 한다.
블레즈 콩파오레는 상카라를 살해한 이후에 대통령직에 올랐고, 자신이 토마스 상카라를 살해하라는 지시는 내리지 않았다고 부인했다. 하지만 그는 CIA의 권고대로 그간 실행되어가던 개혁정책을 모조리 이전으로 되돌렸다.
3. 사후
상카라 사후 그의 개혁정책들은 모두 후퇴했고 상카라 집권 이전으로 돌아갔다. 부르키나파소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이웃의 코트디부아르로 나갈정도로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 1987년의 부르키나파소의 1인당 GDP는 303$였고 인플레이션을 고려하지 않아도 이 수준이 회복된 건 2003년에 이르러서야 회복되었다.
한편, 블레즈 콩파오레는 부정선거와 편법을 통해서 27년간 장기집권을 해왔다. 2014년에 임기연장법안에 분노한 시민들과 군부에 의해 쫓겨났다. 새로 들어선 신 정부에선 토마스 상카라와 그의 동료들의 죽음에 대해 진상규명을 할 방침이다.
비록 권좌에 앉았던 시간은 4년이었고 최후는 안타깝게도 암살을 당했지만, 그가 짧은 시간 보여준 여러 성과와 확실한 철학 때문에 부르키나파소를 넘어 아프리카, 그리고 아프리카를 넘어 전세계에 많은 추종자를 거느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