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재판

 

1.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재판
1.1. 소련에서
1.2. 중국에서
1.3. 북한에서
2. 제대로 된 절차나 규칙 없이 내리는 즉결재판
2.1. 역사 속에서
2.1.1. 한국전쟁에서 북한군에 의해 시행된 경우
2.2. 창작물에서
3. 인터넷상에서의 인민재판
3.1. 사례


1.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재판


인민재판의 본래 의의는 인민들이 사법체계의 보호를 받는 데에 장벽을 없애는 것이다. 보다 엄밀하고 공정한 판단을 위해 사법체계가 발전하는 만큼 그 반대급부로 전문적이어지고 누구나 쉽게 접근하기 힘들어진다. 따라서 소송을 하려면 엄청난 시간과 비용이 들게 된다. 그래서 억울한 일을 당해도 그리 중요한 사안이 아니고 승소하여 받을 보상이 크지 않을 경우 소송비용이 더 커져서 아예 사법부의 판단을 받는 것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인민재판은 이러한 장벽을 없애고 누구나 손쉽게 사법체계의 보호를 받을 수 있게 하자는 의도에서 탄생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사람 사는 세상이 워낙 복잡하고 요지경이니 누구나 적은 비용으로 쉽게 소를 제기하고 재판을 받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결국 중국이나 북한도 여러 가지로 사법체계를 정비하고 전문화시켜서 오늘날 중국이나 북한의 인민재판은 본래의 뜻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인민재판은 누구나 쉽게 참여할 수 있는 사법절차를 지향하다 보니 그만큼 여론재판으로 전락할 가능성도 높은 데다가 사회주의 혁명 시기에는 그저 자본가를 타도하자는 정치적 프로파간다의 표출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인민재판은 2의 설명을 볼 것.

1.1. 소련에서


인민재판이라 하면 보통 형사재판을 많이 떠올리지만 소련의 경우 범죄 규정이 적고 행정제재가 많아 행정심판이 잦았다.
소련은 로마-게르만법계에 맑스-레닌주의 법철학이 기미된 법체계를 갖고 있던 터라 어디까지나 독일법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형법은 중범죄와 별개로 사적 자본의 소유에 대해서 기망행위를 통해 자본을 취득하는 경우 강하게 처벌하였다. 물론 이는 현대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경제질서를 문란케하는 경우 강한 형벌을 부과하고 있긴 하다.
그 외, 민사소송은 다른 자본주의 국가와 유사하게 '자본'이 아닌 재산권 보호를 위한 재판이 진행돼 소련최고재판소의 판결문이 다수 남아있다.

1.2. 중국에서


중국의 법원인 인민법원에서 행하는 재판.
사실 중국에서는 일반재판을 인민재판이라고 하며, 북한식 "인민재판"은 비투회(批斗会)라고 한다. 이런 비투회는 문화대혁명 이후 사라졌고, 현재는 모든 재판은 다른나라와 마찬가지 형식이다.
다른 법치국가와 비슷한 형태의 재판을 실시한다. 구체적으로는 공안기관 및 인민검찰과 인민법원이 법률에 의거하여 형사, 민사, 행정재판을 실시하며, 형사재판만 2심제를 채택하고, 나머지 재판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3심제이다. 한국과 대만처럼 대륙법[1] 채택했기에 국내 법원의 재판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다만 형량이 민주주의 국가들과 비교했을 때 비교적 높은 편이고 사형을 당할 수 있는 경우의 수 또한 많아서(…) 엄혹하다는 이미지가 있다. 단적인 예로 한국에서는 마약을 소지했을 경우 징역(그나마도 초범이니 뭐니 해서 집행유예가 많이 뜬다)형으로 끝이지만[2], 아편전쟁트라우마가 있는 중국에서는 '''무조건 사형이 원칙이다.'''[3] 요즘은 많이 누그러져서 단순 흡입 및 소지의 경우는 적당히 풀어주지만 마약 제조나 유통, 알선책 같은 경우는 알짤없다. 심지어 이건 외국인 마약상이라고 해도 안 봐주고 사형시킨다.(#)

1.3. 북한에서


북한에서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법원을 인민재판소라고 부른다. 민사 소송이나 이혼 소송 같은 것이 지역 인민재판소에서 행해진다고 알려져 있다. 북한은 2심제를 택하고 있으며 지방에 다양한 형태의 하급 재판소가 있고 그위에 대법원 격인 최고재판소가 있다. 다른 나라의 재판과 마찬가지로 판사, 검사, 변호사가 있고 이에 따라 원고와 피고가 사건을 두고 시시비비를 가린다. 우리가 아는 인민재판은 북한표 인민재판이기 때문에 인민재판소 역시 무시무시하다고 생각되지만, 공산국가라서 인민이라는 명칭이 붙은 것이지 대부분은 그냥 지방법원과 별 차이가 없다. 예를 들면 금전 문제 등[4] 민사 소송, 이혼 소송 등 대부분이 지역 인민재판소에서 행해진다.
하지만 단순 민사, 형사사건이 아닌 체제 유지에 타격이 가거나 권력 관계와 얽힌 정치성 사건이 되면 골치 아파진다. 겉으로는 판사, 검사, 변호사까지 다 있지만 당연히 형식적인 부분이고 일단 죄를 지었다고 의심되는 순간 유죄로 직행한다. 이 때 변호사는 무죄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유죄를 인정하라고 권고한다... 탈북자들의 수기를 보면 이런 사건에 휘말려 들어가는 교화소는 정치범수용소보다 약간 나은 정도로 혹독한 환경이라 몇 개월이라도 교화소에 들어갔다가 나오면 폐인이 된다.[5] 간단한 예시로 남한 드라마를 본 혐의로 체포된 사람들은 제대로 된 법률적 조력이나 증거의 객관성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재판을 받았다. #
휴전선 부근의 부대에는 이보다 더 정도가 심한 '동지재판'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이는 국가반역죄를 지었거나 남조선으로 도주하려다 잡힌 군인에게 처하는 형벌로서, 같이 복무하던 '동지'들이 총을 쏘거나, 총검으로 찔러서 처형하는 재판이다. 말이 재판이지 그냥 답정너 처형.#

2. 제대로 된 절차나 규칙 없이 내리는 즉결재판


Kangaroo court
1의 의미를 비꼰 것으로 제대로 된 절차나 규칙 없이 무작위로 내리는 즉결재판을 뜻한다. 말만 재판이지 사실 형식만 있는 형벌이다.
배심제가 극단적으로 변질될 경우, 사실상의 이 인민재판으로 바뀌기도 한다.
의외로 많은 시민들이 희망하는(?) 재판이기도 하다. 특히 강력범죄자들의 경우 대다수의 시민들이 법적인 절차보다는 인민재판적 성격의 재판을 희망한다.

2.1. 역사 속에서


토지개혁 시기와 6.25 전쟁 당시에 북한이 실시한 것으로 유명했던 재판의 형식. 한반도에서만 행해졌던 것은 아니다. 원래 중국의 인민재판에서 유래했으나 인민이란 말이 공산국가에서나 사용하는 말로 인식되면서 의미가 변질되었다.
말 그대로 인민에 의한 재판. 주된 기소 대상은 지주계급(부르주아), 지주계급에 빌붙어 인민을 세뇌시키고 풍기를 어지럽혔다고 주장하며 공산당을 지지하지 않는 마름, 지식인과 문화예술인[6]들을 심판했으며 공산당원이 참관하여 인민들이 배심원이 되어 판결을 내린다.

(2:51까지 보면 된다)

(북한군이 점령한 서울 어딘가에서 공산당원들이 인민재판을 벌이고 있다.)

공산당원: 동무들! 이 반동 새끼는 과거에 우익 경찰에 붙어서, 수많은 우리 당 일꾼들을 해친 반역자입니다. 거기다 친일파이며, 왜놈 시절에도 왜놈 순경을 지냈다, 이 말입네다! 이 반동 새끼를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여맹[7]

원: 죽이시오! 반동은 죽어야 합니다! 죽이시오! 죽어야 합니다! 죽이시오! 죽이시오!

좌익 자경단들: 죽이시오! 죽이시오! 반동 새끼는 죽어야 합니다!

공산당원: 이 반동 새끼를 그럼 죽일까요?

(지켜보던 군중들이 망설이다가 일제히 죽이시오를 외친다)

공산당원: 인민재판은 너 반동을 사형에 처하기로 하였다. 뭣들 하오? 죽이시오!

우익으로 지목된 시민: 살려주시오! 난 잘못한 것이 없소! 경찰이란 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이오. 그저 먹고 살려고 했소, 살려 주시오!

공산당원: 어서 죽이시오!

(좌익 자경단들이 우익으로 지목된 시민을 때려죽인다)

좌익 자경단들: 이 반동 새끼!

(군중들이 마지못해 박수친다. 좌익들도 따라서 박수친다. 그 모습을 이정재가 숨어서 바라볼 동안 좌익들이 맞아죽은 우익 시민의 시신을 달구지에 싣는다. 달구지 위에는 이미 살해당한 서울 시민들의 시신이 쌓여 있다)

공산당원: 다음은 공창수[8]

라는 늙은 반동놈을 재판하겠소. 끌고 나오시오!

(좌익들에게 끌려나온 공창수)

공산당원: 이 반동놈은 악질 고리대금업자로서, 수많은 가엾은 인민들을 착취하고, 협박하고, 울린 놈이요(놈이오). 살려 줄까요? 아니면 사형을 내릴까요?

군중과 좌익들: 죽이시오! 죽이시오! 죽이시오! 반동놈을 죽이시오!

공산당원: 사형에 처하시오!

공창수: 이, 이놈들! 내 돈 빌려주고! 이자 받아먹었다! 그게 죄냐? 네 이놈들!

공산당원: 어서 죽이지 않고 뭐 하오? 동무들! 죽이란말야!

(곧바로 좌익들이 공창수를 때려죽이고, 이정재도 군중 사이에 섞여서 계속 바라본다)

야인시대 83화에서 묘사한 인민재판.

그런데 너도나도 고발이 가능하고, 어떻게든 사람들을 선동해서 판결을 이끌어 내면 그만이기 때문에 결과가 과격한 경우가 매우 많았다. 설상가상으로 공산당에서 이미 인민재판의 결과를 다 정해놓고, 재판 당일에는 선동하는 사람까지 동원해서 공산당이 정한 사람이 죽도록 일부러 재판을 조작하는 경우까지 발생하니 이미 이 시점에서 '''재판의 이름을 걸기만 하고 그냥 형벌을 집행한다고 볼 수준이다.'''
당연하게도 인민재판을 받는 사람은 몸 성하게 나가는 경우는 진짜로 행운몰빵한 경우거나 공산당이 선동해도 사람들이 거부할 정도로 인덕이 높고 평소 사람들에게 베풀면서 살아서 적이 없는 대단한 경우라는 극소수의 사례라고 보면 된다. 따라서 보통 인민재판에 회부되면 기본적으로 유죄판결을 받는데다가 죄질에 비해 형벌이 가혹해서 죽도록 때리던가, 실제로 죽이던가. 재산 몰수는 기본에, 심지어는 죽은 사람의 시체를 수습해주는 사람까지도 동조했다는 죄를 덮어쓰는 판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사상대립이 격화되면서 점점 무고한 사람들을 밀고하여 죽여버리는, 마녀재판과도 같은 것으로 변질된다. 굳이 지주나 부유층이 아니더라도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을 고발하거나, 왠지 누군가를 고발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공포 분위기에 엄한 사람을 고발하기도 했다. 사실상 공산주의에서 반동분자로 분류되는 지식인층이나 종교인들은 없는 죄를 뒤집어쓰고 죽었다고 보는 편이 맞다. 이에 대해서는 팔봉 김기진이 인민재판을 당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을 기록으로 남겼고, 훗날 이를 재구성한 이야기에 자세히 드러나 있다.# 또는 자기가 고발했다가 역고발크리로 자기가 죽는 경우도 있었다(...).
중국의 문화대혁명이나 홍위병 시절을 그린 매체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남북한의 경우 일제에 협력한 친일반민족행위자에 대한 처형은 소가 뒷걸음치다 쥐잡는 격이었고 인민재판 자체도 친일청산이 목적이 아닌 반동분자를 척살하기 위한 공포정치의 산물이었다.[9] 어차피 공산당의 집권에 대항마가 되는 능력을 가진 세력은 싸그리 잡아죽이다 보니 친일파도 때려잡게 된 것. 설사 개중에 친일파를 처벌했다 치더라도 그 절차에 공정성이 없었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으며, 같은 친일파라도 누구는 인민재판으로 처형당하고 누구는 공산당원이 되어[10] 인민재판을 진행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인민재판에 회부된 사람들 중에 악덕지주들도 있었다 해도 그 절차가 과연 공정했는가, 처분이 적절했는가에 의문이 남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게다가 한국에서 공무원이나 경찰직에 종사했다는 이유만으로 반동분자로 몰려 증거도 없이 고문에 의한 자백과 거짓증언을 통해서 즉각적으로 심판을 내렸다. 그야말로 중우정치의 극악이자 야만의 극치였다.
결국 당시 북한에서 행해졌던 인민재판은 결국 내부밀고를 통한 공포정치의 도구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민재판은 혁명기에 터져나오는 자연발생적이지만 극좌적 오류로 지적된다. 길게는 프랑스 혁명 시기에도 비슷한 재판이 존재했으며, 러시아의 1848, 1917년의 혁명 때도 이러한 것이 존재했지만 소련 건국 이후에는 이러한 사건이 문제됨을 인식하고 철저하게 금지했다.
한국전쟁 때 인민재판의 실태를 알게 된 스탈린이 '''"김일성 동지는 대체 이런 짓을 왜 그냥 보고만 있는 것인가. 뭘 하고 있는가. 당장 이를 중지하라."'''고 격노했다고 한다.[11] 대숙청을 벌였던 그로써도 김일성의 인민재판은 스스로 실패를 재촉하는 어리석은 짓이었으므로 반대한 것이다. 스탈린의 대숙청과 김일성의 인민재판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권력의 유무다. 스탈린이 본격적으로 대숙청을 시작한 시기는 1937년부터이며, 이전까지 스탈린은 트로츠키와 같은 다른 정적들을 제거할 때 안 좋은 소문을 퍼뜨리거나, 조용히 처리하는 식으로 은밀하게 정적을 제거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위협이 될 만한 정적이 모두 사라지고 자신의 권력이 정적들을 압도할 정도로 강력해지자 대숙청을 꺼내든 것이다. 또한 스탈린은 당시 소련 전체가 사회주의 국가였고 대숙청은 철저히 소련 내부에서만 진행되었기 때문에, 현지 민심을 신경쓸 필요성은 적었다. 그러나 김일성의 인민재판은 남한이 완전히 멸망하거나, 자유주의 세력들이 말살된 상황도 아니고, 북한 내부에서조차 박헌영, 허가이 등 김일성과 맞먹을 권력을 지닌 자들이 여럿 있는 상황에서 벌인 것이다. 이념이 전혀 다른 지역에서 같은 공산주의자도 아닌 무고한 사람들을 잡아다가 무턱대고 때려죽여대니 현지 민심은 공산주의에 완전히 등을 돌렸다. 또한 대숙청은 마구잡이식 학살이나 다름없는 한국전쟁의 인민재판이 아니라 굉장히 정교하게 이루어진 테러이다. 원래 스탈린은 볼셰비키 당 관료들 사이에 일하면서 그 관료들을 중심으로 권력에 올랐으며, 대숙청 또한 법적인 절차와 형식이 갖추어진 사법살인에 가깝지 북한, 중국 식의 동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와 손가락질하고 즉결처분하는 아수라장은 없었다. 이건 혁명과 소련 정권 초기, 즉 스탈린 이전에 있었던 일이며, 이를 두고 슬라보예 지젝이 하는 말이 레닌 정권과 스탈린 정권의 폭력성의 차이를 두고 공개성과 비밀성이라 논한 것이다.
한 가지 더하자면, 사실 당시 대숙청은 스탈린이 의도한 것이 아니라는 최근 연구결과도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스탈린부터 공산당의 말단까지 휩쓸린, 소련 내의 정책 실패로 인한 경제위기로 시작되고 세르게이 키로프의 암살로 촉발된, 권력투쟁으로 인한 대혼란 속의 집단 히스테리가 대숙청의 진짜 모습이라는 주장이다. 대숙청 항목 참조.
1983년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방송 당시 인민재판에서 살아남았거나 혹은 가족[12]이 살해당한 기억을 말하고 있는데, 당시 일반적이었던 대본대로 진행하는 방송환경이 아닌 출연자들이 실제로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감정적으로 흥분한 상태에서 울다가 웃다가 하며 인민재판을 성토하는 모습을 현재 남겨진 방송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멕시코 등지에서의 마약 카르텔이 반대 세력을 죽일 때에도 이런 방식의 인민재판을 거쳐 살해하는 경우가 많다. 대도시권에서는 일어나기 힘드나 시골 지역에서는 닫힌 사회의 특성상 확률이 크다.

2.1.1. 한국전쟁에서 북한군에 의해 시행된 경우


[image]
1950년 7월 2일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상태에서 벌어진 인민재판 광경. 양복 입은 이가 김팔봉(본명은 김기진, 1903~1985)이다. 그는 이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몽둥이를 맞고 기절한 채 끌려 다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인민재판의 사례로 자주 거론되는 김팔봉의 경우는 남로당 서울시당 중구지역당의 상임집행위원회에서 결정해 출판노조에서 집행되었다. 그는 1950년 7월 1일 잡혀 형을 받았는데 이 시기는 아직 점령체계가 완전히 잡히지 않은 상황에서 원한에 의한 무차별적인 학살이 일어나고 있던 시기였다. 당시 판사 이영기는 오프세트공사 공원이었고 검사는 노동운이었다. 그는 남이 미리 써준 논고문을 읽는데 한자가 나오면 읽지 못했다고 한다. 김팔봉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하였다.

“철사로 둘둘 말고 쇠꼬창이가 달린 몽둥이로 내 뒤통수를 내리쳤는데 피를 분수처럼 쏟더래요. 또 한 대 내리치니까 앞으로 꼬꾸라지더랍니다. … 막대기 하나를 주워들고 일어나 반격태세를 취하며 세 발짝 걸어나갈 때 두 놈이 한꺼번에 두 몽둥이로 머리를 내리 치니까 넘어지면서 쭉 뻗더랍니다. … 그 다음에 그자들은 내 발목을 전깃줄로 묶어, 계단 아래로 끌어내렸대요. 목에 힘이 완전히 빠졌는지 한 계단을 내릴 때마다 머리통이 덜컥덜컥 떨어져 구경꾼들은 저 사람 벌써 숨이 떨어졌다고 생각했대요. 같이 사형판결을 받고, 머리를 얻어맞은 문선과장 전재홍씨는 그래도 끌어내릴 때 주루룩 끌려내렸지 머리통이 털거덕거리지는 않더랍니다.”[13]

김팔봉은 그런 상태에서 2킬로미터를 끌려 다니다가 북한군 고위장교가 말려 시체(죽은 것으로 판단됨)를 내무서에 인계하라고 해서 중단되었다. 그는 4일 만에 깨어나 살아났다. 그가 깨어났을 때 인민서원이 “선생님, 정신이 드십니까? 나오십시오”라고 했다고 해서 살아날 수 있었다. 당시 인민재판 판사였던 이영기는 이후 미해병사단 24연대의 노무자로 있다가 체포되었는데, 사회주의자로 보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김팔봉과 함께 참혹한 봉변을 당했던 전재홍은 그때 구타한 사람들이 덩달아 날뛴 사람들이지 진짜 빨갱이는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고 증언하였다.[14]
[image]
인민재판소 재판 광경.
인민군 점령시기 우익인사들이 처형된 경우 대체로 일정한 죄목이 있었고, 그 죄목은 주로 양민 특히 좌익을 투옥·살해했다는 것이었다. 처형된 이들의 직업 중에서 경찰과 공무원이 가장 많았던 데서도 그런 점을 알 수 있다. 안봉석의 경우 10명의 좌익을 살해하고 공산주의와 스탈린을 악평했다는 죄로 체포되어 처형될 예정이었으나 간신히 살아남았다. 청년단 단장이었던 김동학은 군산경찰서를 습격한 좌익 3명을 사살했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다.[15]
처형자들의 경우 대체로 여러 번의 심문을 거치고 본인의 자술서를 쓴 다음에 학살되었다. 자술서를 쓰는 과정에서 심한 구타나 고문이 있었기 때문에 그 내용이 정확하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이갑산의 경우, ‘양민을 투옥하고 학살했다’는 내용의 자술서를 거부하다가 심한 구타를 당했다. 이걸 본 다른 수감자들은 모두 양민을 학살했다는 허위 자술서를 썼다고 한다. 다들 인민재판 때 항소해 보겠다는 생각을 갖고 허위로 썼다고 한다.[16]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은 피난가지 못한 경찰을 체포하여 곧바로 인민재판에 회부했으며, 체포를 거부하는 경우는 그 자리에서 살해했다. 보도연맹사건 등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경찰과 우익인사에 대한 인민재판과 처형에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전쟁 초기 질서가 잡히지 않은 무법천지 상태에서 절차도 없이 마구잡이로 처형되는 경우가 많았다. 재판현장에서 동원된 주민들의 목소리 크기에 의해 생사가 결정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념적 기준이 아니라 평소의 인간관계, 원한 여부 등 사적인 요소에 의해 처형 여부가 결정되곤 하였다.
지역단위에서 인민의 원한을 산 반역자는 고급관료나 경찰간부가 아니라 하급경찰과 말단공무원이었다. 8월 중순경 인민군에 의해 점령된 남해군 창선면에서는 8월 20일 은둔 중이던 지역좌익 배용호, 이문세 등이 면치안대를 조직하여 전직 경찰관과 우익단체원 등을 즉결처분 형식으로 수차에 걸쳐 살해하였다. 8월 29일에는 반동분자로 체포되어 감금 중이던 남해경찰서 순경 김성율 등 경찰관 4명을 창선면 거주 보도연맹원 가족 70여명이 동원되어 즉결처분 형식으로 살해하기도 했다.[17]
그러나 실제로 즉결처분에 의한 학살은 전세가 불리해져 인민군이 퇴각하게 되는 점령 말기에 노골화되었다. 이때 진행된 숙청대상자는 기존의 반역자로 규정된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까지 해당한 경우가 허다했다. 이 시기의 정치적 숙청은 반혁명세력에 대한 정치적 배제와 죄과에 따른 처벌의 차원을 넘어 '''“적에게 유리하게 이용될 모든 유생역량의 일소”'''라는 전쟁논리의 차원으로 바뀌게 된다. 인천상륙작전과 유엔군의 총반격으로 9월 중순 이후 전세가 불리해지자 중앙당의 지시를 받은 인민군 전선사령부는 후퇴명령과 함께 각 지방당에 '''“유엔군 상륙시 지주(支柱)가 되는 모든 요소를 제거할 것”'''등의 지시사항을 내렸는데 이는 하급단위로 내려가면서 무차별적인 민간인 학살의 중요한 근거로 이용되었다.[18]

2.2. 창작물에서


  • 반공동화 및 정부 간행물로 나온 반공서적 등 북한군의 잔혹성을 강조하기 위해 형집행묘사에서 잔인함을 두각시키기도 한다. 기둥에 묶인 반공인사 머리를 도끼로 쪼개서 죽인다는식으로 상세히 서술한다거나.
  • 다크 나이트 라이즈 - 베인의 폭도들이 지배하는 무정부상태가 된 고담에서 조나단 크레인이 인민재판에서 판사 행세를 하며 고담에서 잘나가는 자들 중 자기들 맘에 안드는 자들을 골라다가 "사형 혹은 추방"을 선고한다. 여기서 추방은 얇은 얼음이 낀 강을 건너게 하는 것으로 절대로 생존할 수 없고, 사형도 또한 '추방에 의한 사형'으로 얼음강을 걷게해 죽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뭘 선택하든 강에 빠져 죽는다.
  • 앵무새 죽이기 - 흑인 톰 로빈슨은 억울하게 백인 여자를 강간했다는 누명을 쓴다.
  • 원피스 - 세계정부에니에스 로비. 800년 동안 무죄를 선고받은 죄수는 단 한번도 없었다고 하며, 재판장이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는 말그대로 인민재판의 현장이다. 사실상 이름만 법원이지 실제로는 무조건 임펠다운으로 향하는 자동문 역할인 셈이다. 애초에 세계정부 자체가 세계평화를 내세운 독재 집단인 걸 감안하면 에니에스 로비의 추태는 당연한 것이었다.
  • 국민사형투표 - 일련의 집단이 휴대폰으로 여론을 모아 무죄판결을 받고 풀려난 악당들을 사형시키는 사건을 다루는 만화. 이들이 하는 행위는 인민재판과 다를게 없다.
  • 패왕별희 - 중화인민공화국 창립된 이후, 체포된 반동세력을 군중집회로 민중을 선동, 사형 판결을 내리는 장면이 나온다.
  • 서울 1945 - 인민군이 서울을 접수하고 인민재판을 실시하여, 주인공 최운혁(류수영)이 은인 이인평(최종원)을 친일파 및 악질지주를 기소하는 검사로 나오지만, 최운혁은 자신의 학비를 대준 은인인 이인평을 살리기 위해 이인평이 독립운동에 비밀리에 자금을 댔다는 사실을 집회에서 대중들에게 이야기하여, 목숨만은 부지하게 한다.
  • 슈퍼 마리오 선샤인 - 가짜마리오가 돌픽 섬에 낙서를 하여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는데, 오프닝에서 마리오가 몽타주와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누명을 쓰고 원주민들로부터 진범이라고 단정지어지게되어 아주 악질적인 케이스의 피해자가 된다.
  • 야인시대 - 6.25 전쟁 부분에서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 나오는데 가장 널리 알려진 인민재판 영상으로서 인민재판이 뭔지 간략하게 보여주고 있다.#
  • 인천상륙작전(영화) - 북한군의 영역 안에서 탈출하려는 한/미부대원 및 연관된 사람을 사살한 후 방치하거나 나무에 매달아 놓는 등의 행위 등이 나온다.
  • 역전재판 - 역전의 약속에서 나루호도 류이치는 체육시간 감기 때문에 교실에 있었는 바, 이때 미츠루기 레이지의 급식비 3000엔이 없어져, 나루호도가 범인이 아님에도[19] 범인으로 의심받아 학급재판이 열려 학급 아이들이 나루호도를 범인이라고 해 인민재판 모습을 확실히 보여준다. 심지어 선생조차도 나루호도의 얘기를 들어볼 생각도 하지 않고 '어서 잘못했다고 말하라' 고 나루호도를 압박한다.
  • 황순원의 작품 카인의 후예

3. 인터넷상에서의 인민재판


인터넷상에서 불특정다수가 소수를 괴롭히는 행위. 인터넷 커뮤니티나 포털사이트 뉴스 댓글들은 집단적 광기와 자신의 도덕적 우월함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 사실 확인 이전에 빠르게 퍼져가는 소문, 반대자에 대한 배척등 인민재판의 모든 요소를을 포함하고 있는 완벽한 공간이다. 현행법상 개인정보 유포죄, 명예훼손죄, 모욕죄정도로만 규제할 수 있으나 요건이 까다롭기에 처벌이 어려우며, 형사처벌을 당하고도 갱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인터넷 사용시간과 사고의 의존도 증가에 따라 그 양상은 더 심해져가고 있다.

3.1. 사례



[1] 사실상 파생된 영미법계와 대륙법계의 요소가 포함된 혼합형 법계이다. 중국은 원래 사회주의 법계를 채택했으나 개혁개방 이후 폐기했다.[2] 그러나 가중구성요건을 충족할 경우 사형도 가능하다.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제58조 제2항 참조.[3] 대만, 홍콩, 마카오, 싱가포르 등 다른 중화권도 중국만큼은 아니지만 마약 범죄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을 받는 경우가 많다.[4] 북한도 사람 사는 곳이기 때문에 자본주의 국가처럼 대규모 돈놀이는 불가능해도 개인적으로 소소하게 돈을 빌려주고 하는 일은 당연히 존재한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돈을 떼어먹히면 고소를 때릴 수 있고 재판까지 가게 된다.[5] 일반 범죄자 교화소는 그 정도는 아니고 그냥 북한과 소득수준이 비슷한 제3세계 교도소 수준.[6] 주로 부유층의 사치를 조장했다는 명목으로. 중국의 문화대혁명의 경우 '''공자와 제갈량 등 과거의 위인들의 유산을 포함한''' 기존 문화를 지주계급의 사치에 의한 산물으로 보아 닥치는대로 파괴했다. 얼마나 철저하게 파괴했는지 대부분의 묘와 유적이 완전히 가루가 되었고 만한전석등의 무형문화 또한 거의 완전히 소실되어 현대에 와서 복구하는데에도 애를 먹고 있다. 심지어 자금성도 파괴당할 뻔 했으니 말 다했다.[7] 북한의 관제 여성단체.[8] 야인시대에서 등장한 단역 캐릭터.[9] 심지어 여순사건 때는 일제강점기에 독립군에 자금을 지원했던 부호를 친일파로 몰아서 살해한 적이 있다. 군중들이 그 사람은 친일파가 아니라고 아우성을 쳤음에도 소용없었다.[10] 이런 부류를 잘 표현한 작품이 바로 꺼삐딴 리.[11] 출처 : 박헌영평전[12] 주로 가장이 많았기 때문에, 유일하게 돈 벌어오던 사람을 잃은 남겨진 가족들이 하루아침에 가난의 구렁텅이에 처박히는 등 비참한 신세로 전락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군경가족은 물론이고 국영공장의 현장관리직이었단 이유만으로 살해당한 사람도 있었을 정도.[13] 중앙일보사편, 『민족의 증언 2』, 59~60쪽[14] 중앙일보사편, 『민족의 증언 2』, 56~66쪽[15] 이나미, 중앙일보사편, 『민족의 증언 2』, 54쪽[16] 우종창, 「1950년 여름, 대전형무소를 휩쓴 광기」,『월간조선』 2000년 6월, 271~274쪽[17] 우종창, 「1950년 여름, 대전형무소를 휩쓴 광기」,『월간조선』 2000년 6월, 88쪽[18] 김남식, 「1950년 여름, 대전형무소를 휩쓴 광기」,『월간조선』 2000년 6월, 455쪽[19] 참고로 범인은 나루호도의 친구 야하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