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 시버

 

'''톰 시버의 수상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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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시리즈 우승 반지'''
'''1969'''



'''명예의 전당 헌액자'''
[image]
'''톰 시버'''
헌액 연도
1992년
헌액 방식
기자단(BBWAA) 투표
투표 결과
98.84% (1회)

'''1969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사이 영 상'''
밥 깁슨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톰 시버
(뉴욕 메츠)'''

밥 깁슨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1973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사이 영 상'''
스티브 칼튼
(필라델피아 필리스)

'''톰 시버
(뉴욕 메츠)'''

마이크 마샬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1975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사이 영 상'''
마이크 마샬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톰 시버
(뉴욕 메츠)'''

랜디 존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1967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신인왕'''
토미 헴스
(신시내티 레즈)

'''톰 시버
(뉴욕 메츠)'''

자니 벤치
(신시내티 레즈)


'''1969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선정 올해의 스포츠맨'''
[image]
빌 러셀

'''톰 시버'''

바비 오어


'''뉴욕 메츠 No. 41'''
'''조지 토마스 "톰" 시버
(George Thomas "Tom" Seaver)
'''
'''생년월일 '''
1944년 11월 17일
'''사망 '''
2020년 8월 31일
'''국적'''
[image] 미국
'''출신지'''
캘리포니아 주 프레즈노
'''신체'''
185cm, 93kg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66년 자유계약 (NYM)
'''소속팀'''
'''뉴욕 메츠 (1967~1977)'''
신시내티 레즈 (1977~1982)
뉴욕 메츠 (1983)
시카고 화이트삭스 (1984~1986)
보스턴 레드삭스 (1986)
'''수상'''
'''12회 올스타 (1967~1973, 1975~1978, 1981)
월드 시리즈 우승 (1969)
3회 NL 사이 영 상 (1969, 1973, 1975)
NL 신인상 (1967)'''
3회 NL 다승왕 (1969, 1975, 1981)
3회 NL 방어율왕 (1970, 1971, 1973)
5회 NL 탈삼진왕 (1970, 1971, 1973, 1975, 1976)
'''기록'''
'''노히트 노런 (1978.06.16)'''
1. 개요
2. 선수 경력
2.1. 데뷔 이전
2.2. 뉴욕 메츠의 에이스
2.3. 이적 후
3. 사망
4.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5. 플레이 스타일
6. 관련 문서


1. 개요


[image]
[image]
메츠의 첫 우승을 이끌었던 선수 시절 모습
2013 메이저리그 올스타전 시구자로 나서서. 왼쪽이 톰 시버, 오른쪽은 데이비드 라이트
전 메이저리그 투수. '어메이징 메츠'의 주역이자 메츠 최고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현대 야구를 빛낸 우완 에이스 투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1] 또한 통산 300승과 3,000탈삼진을 기록한 선수 중 월터 존슨과 함께, 통산 평균자책점이 2점대인 둘뿐인 선수.
역대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 입성자 중에서 네번째로 높은 득표율[2] 을 기록한 선수이자, 마이크 피아자와 함께 뉴욕 메츠의 유니폼을 입고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고 영구결번된 둘 뿐인 선수.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까지 메이저리그를 평정하며 초창기 암울했던 뉴욕 메츠를 일약 강호로 만든 주인공이기에 별명도 The Franchise. 2차대전 이후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선발투수 중 유일한 300승과 2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했으며 신인왕을 수상한 선발투수 중 유일하게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통산 성적은 20 시즌 동안 311승 205패, 2.86 ERA, 4782.2이닝, 3640K, K/9 6.85, BB/9 2.61, K/BB 2.61, HR/9 0.71, 231완투 61완봉을 기록했다.

2. 선수 경력



2.1. 데뷔 이전


원래는 영 신통치 않은 투수였다. 재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문제는 키. 168cm의 키로는 투수로서 주목받기 어려웠다. 결국 주니어 칼리지에 들어가 야구를 계속하다가 군에 징집되어 훈련을 받았는데, 여기서 터득한 하체 훈련의 중요성을 통해 빠른 공의 구위와 구속이 모두 빨라졌다. 하지만, 작은 키로는 그런 빠른 공을 감당하지 못했겠지만, 갑자기 키가 17cm가 커지면서 문제가 해결되었다. 그리고 185cm의 당당한 체구를 가진 파워 피처가 되어[3] USC에 입학해 야구 선수로서의 경력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처음 그를 주목한 것은 LA 다저스였지만, 1965년 드래프트에서는 시버 본인이 입단을 거부했다. 5만 달러 이상을 생각했던 시버에게 들어온 계약금은 딱 2,000달러였기 때문. 그 이듬해인 1966년 드래프트에서 애틀랜타 브레이브스가 만족할만한 제안을 하자 입단을 승낙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는데, 바로 대학 시즌이 끝나기 전에 계약을 했다는 이유로 계약이 무효화된 것. 결국 시버는 자유계약 선수 신분이 되어 추첨을 통해 행선지가 결정되었는데, 행운의 제비를 뽑은 쪽은 당시 동네북이었던 뉴욕 메츠였다.
'''그리고 이 제비 하나가 메츠의 운명을 바꿨다.'''

2.2. 뉴욕 메츠의 에이스


창단 첫 해 120패를 당하는 등, 내셔널리그 공인 동네북이었던 메츠는 시버를 필두로 마운드의 높이를 올리면서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시버 자신은 이미 1967년 16승 13패 2.76의 좋은 성적을 내면서 내셔널리그 신인왕에 오르며, 자신의 재능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차근차근 전력을 모은 뉴욕 메츠는 마침내 1969년 한 때 10경기차까지 뒤쳐졌던 시카고 컵스를 상대로 38승 10패라는 기적적인 성적으로 역전, '기적의 메츠'(Amazing Mets)라고 불리며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볼티모어 오리올스와의 월드시리즈에서 절대 열세라는 예상을 뒤엎고, 창단 첫 우승의 감격을 안았다.
그 중심에 시버가 있었다. 시버는 1969년 25승 7패 2.21이라는 놀라운 성적을 내며 사이 영 상을 수상했고, 월드시리즈에서도 10이닝 완투를 선보이며 팀의 승리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그리고 이 때 반짝 활약한 것이 아니라 그 뒤로도 꾸준한 활약을 선보였다.
1970년 4월 22일에는 파드리스를 상대로 '''10타자를 연속 삼진으로 잡아버리며 메이저리그 연속 탈삼진 기록'''을 세우게 된다. 참고로 이날 경기에서 시버가 잡은 탈삼진의 갯수는 '''19개'''였다.#
시버의 활약은 계속되어 1971년에는 20승에 1.76의 평균 자책의 기염을 토했고, 1973년과 1975년에 다시 사이 영 상을 수상했다. 이 기간동안 시버는 매년 200탈삼진 이상을 기록했고, 엉덩이 부상으로 주춤했던 1974년 한 시즌을 빼고 모두 2점대 평균자책을 기록하는 괴수의 위엄을 과시했다. 또한 1968년부터 1976년까지 평균이닝 ''''274이닝''''이라는 미친 듯한 이닝이팅을 기록한다. 그 사이 메츠는 꾸준히 강자로 군림해 1973년에 다시 월드시리즈에 진출했다. 비록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에게 지면서 우승에는 실패했지만, 동네북 메츠를 강호로 바꾼 것은 온전히 시버의 공이었다. 마침 시버가 활약하던 시기는 뉴욕 양키스의 암흑기이기도 해서 메츠는 순식간에 양키스와의 인기를 상당부분 따라잡는데 성공했다.
다만, 은근히 승률이 좋지는 않은데, 메츠가 타선이 좋았던 팀까지는 아니었기 때문. 그래도 시버 자신의 승률은 생각보다 나쁘지는 않다. 무엇보다 이 시기 그는 팀을 위해 헌신했고, 세 차례 사이 영 상을 탔고, 20승 시즌을 네 번이나 만들어냈으며, 구위와 제구에서 모두 리그 최고 수준의 에이스였다.
'''문제는 그런 그를 메츠가 버렸다는 것이다.'''

2.3. 이적 후


1977년 연봉 문제로 팀과 갈등을 빚던 톰 시버를 뉴욕 메츠는 전격적으로 신시내티 레즈로 트레이드시켰다. 그리고 이 트레이드 이후, 메츠의 홈 구장인 셰이 스타디움은 싸늘하게 비기 시작했고, 성적은 곤두박질쳤다. 시버 자신의 구위는 전성기의 그것까지는 아니어도 큰 문제는 일으키지 않을 정도의 수준이었다. 신시내티에서도 20승 시즌을 한 차례 만들면서 준수하게 활약을 했다. 1982년 이제 나이 때문인지 부진한 그를 신시내티가 다시 팔려고 하자, 뉴욕 메츠가 나서서 그를 복귀시켰고, 1983년은 그렇게 메츠에서 뛰었다.
그런데 문제는 메츠가 그를 보호선수로 지정하지 않은 것. 이 당시 규정상 FA 보상선수는 전 팀에서 다 영입이 가능했는데, 이 때 시카고 화이트삭스가 그를 보상선수로 데리고 가 버린 것이었다. 메츠가 설마 만 39세의 투수이고, 연봉도 제법 있는 선수를 데리고 갈까 했는데,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시버는 메츠 선수로 은퇴하는 대신, 300승의 꿈을 위해[4] 화이트삭스 행을 받아들였고, 결국 화이트삭스에서 칼튼 피스크와 호흡을 맞추며 마침내 통산 300승 고지에 오른다.
1986년 보스턴 레드삭스로 이적했는데, 부상으로 등판 자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얄궂게도 그 해 월드시리즈는 보스턴 레드삭스와 그의 친정인 뉴욕 메츠의 대결이 되었고, 그는 벤치에서 빌 버크너의 알까기로 뉴욕 메츠가 우승하는 장면을 보스턴 덕아웃에서 목격했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선수 생활의 마지막이었다.
하지만 그는 말년에 레드삭스에서 함께 뛰던 한 젊은 투수에게 자신의 트레이닝 비법과 노하우를 전수했고, 그 해 그 투수는 한경기 탈삼진 20개의 대기록과 만장일치 사이영상, MVP를 수상,[5] 일약 메이저리그의 스타로 도약했다. 그 투수는 바로 '''로저 클레멘스'''였다.
1992년에는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98.82%라는 득표율을 얻어, 최초의 5인 득표율 1위 겸 당시까지 역대 명예의 전당 득표율 1위였던 타이 콥의 기록을 최초로 깨는 파란을 일으키며 입성했는데, 이는 2016년에 켄 그리피 주니어가 99.32%로 기록을 갈아치우기 전까지 역대 최고의 득표율이었다. 2013년 뉴욕 메츠의 홈구장인 시티 필드에서 열린 올스타전에서 톰 시버가 시구자로 나섰다.

3. 사망


2020년 75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지병이었던 치매가 있던 상황에서 코로나19에 감염된 것이 원인이라고 한다. 이렇게 '''메츠의 영원한 에이스'''는 2020년을 휩쓴 코로나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4.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블랙잉크
그레이잉크
HOF 모니터
HOF 스탠다드
톰 시버
57
292
244
66
HOF 입성자 평균
40
185
100
50
  • JAWS - Starting Pitcher (6th)

career WAR
7yr-peak WAR
JAWS
톰 시버
110.5
59.5
85.0
선발투수 HOF 입성자 평균
73.9
50.3
62.1

5. 플레이 스타일


전성기가 지났음에도 구위가 무시무시하다 영상에서도 무릎이 땅에 닿을듯한 모습이 보인다 그만큼 하체가 탄탄해 위력적인 공을 뿌릴 수 있었다.
키가 작던 시절 익힌 제구 위주의 피칭과 키가 커지고 하체 단련을 통해 얻은 강속구가 결합하면서 최고의 투수로 성장할 수 있었다. 역시 주무기는 강속구였지만, 제구를 바탕으로 상대를 제압하면서 많은 삼진을 잡아낼 수 있었다. 주무기는 빠른 공이었지만, 단순히 무식하게 빠른 공만 쑤셔넣는 타입이 아니라, 빠른 공의 완급을 조절해서 상대를 농락했다.
무엇보다 시버의 트레이드 마크는 다이나믹한 투구폼. 하체를 이용해서 무릎이 거의 땅에 닿을 정도로 역동적인 투구폼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시버 자신이 엄청난 운동과 러닝을 통해 하체를 단련시켜 얻어낸 폼이었다. 그 때문에 시버는 매일 엄청난 양의 러닝을 소화했고, 매번 달리는 것을 통해 허벅지를 단련시켰다. 박찬호의 전성기때 미국 언론은 그의 역동적 투구폼과 굵은 하체를 보고 탐 시버의 재림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당연히 훈련량 자체는 당대 최고 수준. 그리고 상대 타자를 분석한 노트를 항상 만들어서 매번 연구했다고 한다.

6. 관련 문서



[1] 라이브볼 시대에는 시버 외에도 그렉 매덕스, 밥 깁슨, 밥 펠러, 등이 최고의 우완투수로 꼽힌다.[2] 오랜기간 1위를 유지하였으나, 2016년 켄 그리피 주니어가 99%를 넘기는 대기록으로 깨버렸다. 그리고 2019년 마리아노 리베라가 만장일치를 기록하여 3위가 되었다. 지금은 데릭 지터에 의해 4위[3] 2020년 MLB 투수의 평균 신장이 74.6인치 약 190cm이다. 185cm는 60~70년대 투수들의 평균신장보다 크다.[4] 메이저리그는 선수에게 있어 계약금이 아주 중요하다. 단순히 선수 개인의 수익 뿐만이 아니라, 높은 연봉을 받는 선수는 그만큼 활용하기 때문에 결국 기회가 보장되는 것이다.[5] 게다가 이때의 로켓맨은 아직 약에 손대지 않던 시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