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 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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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힉스는 NHL 댈러스 스타스, MLB 텍사스 레인저스, EPL 리버풀 FC의 前 구단주이다. 그는 텍사스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업가로, 2009년 《포브스》에 의하면 현재 자산은 10억 달러로 추정된다. 또한 정치에도 깊숙이 관여하여 공화당 쪽에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1] 그러나 사업적 수완과는 별개로, 스포츠팀 구단주로서는 최악의 인물로 손꼽히고 있다. 텍사스 레인저스에서는 구단의 돈을 빼돌려 사적 유용을 하다 발각되었고 구단 경영을 제대로 하지 않아 팀의 전력을 악화시키는데 일조했다. 또한 리버풀 FC에서는 공동 구단주인 조지 질레트와 함께 온갖 삽질을 자행하더니 급기야 리버풀이 법정관리 및 승점 삭감이라는 최악의 사태를 맞이할 뻔하게 만들었다.
힉스는 1946년 2월 7일 텍사스 주의 휴스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존 힉스는 라디오 방송국의 오너였다. 힉스는 1964년 토머스 제퍼슨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텍사스 대학교에 입학한 후 1968년 금융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또한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도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퍼스트 내셔널 뱅크 오스틴 벤처 캐피탈 그룹을 인수해 각종 청량 음료들을 제조하였고, 1984년 동업자 로버트 하스와 함께 힉스 & 하스 그룹을 창립했다.
1989년에는 은행가 존 뮤즈와 함께 공동 투자 회사, 힉스 뮤즈 테이트 퍼스트(비르 전직 프루덴셜 증권) 등을 설립하였고, 회사, 생명 보험 회사, 생명 파트너 그룹 등을 포함한 초기 투자로 2억 500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1991년 모건스탠리의 찰스 테이트, 퍼스트 보스턴의 잭 프러스트와 동업자가 되어 1989년부터 2004년까지 회장을 지냈다.
그는 2004년 3월 힉스 뮤즈의 회장 직에서 물러난 뒤 그만의 벤처 기업을 세웠으니 바로 '힉스 홀딩스'다. 그는 스포츠 산업에 좀더 집중했고 TV 사업에도 뛰어들어 막대한 수익을 거두었으며 중국, 아르헨티나 등에도 자사를 설립하고 부동산 사업을 실행에 옮겼다. 또한, 힉스는 자원 에너지 협회를 설립하고 가스와 석유 산업에도 뛰어들었다. 그의 아들 토머스 O.힉스 주니어는 이 협회의 보드진으로서 활동하고 있다.
힉스는 정치 쪽에서도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는 공화당을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있으며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뉴욕에서 공화당의 루돌프 줄리아니의 정치행동위원회 일원으로 일했다. 텍사스에 토지를 기증해 톰 힉스 초등학교를 설립하는 등 자선 사업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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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12월, 힉스는 NHL의 댈러스 스타스를 인수하고 팀의 구단주로 취임했다. 힉스는 스타스의 회장이 되었고 NHL 협회의 임원을 겸했다. 그는 아메리칸 에어라인스 센터[3] 를 건설하는 사업을 위해 장기적인 계획을 수립, 댈러스 스타스를 통해 홍보효과를 누리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힉스의 구단 운영하에, 스타스는 디비전 우승 7회, NHL 서부컨퍼런스 우승 2회, 프레지던트컵 2회 우승을 거뒀다. 또한 1998-1999 시즌에는 스탠리 컵에서 우승까지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힉스는 스타스 팬들로부터 위대한 구단주로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2010년 4월, 힉스가 운영하는 회사가 스타스 운영비와 아메리칸 에어라인스 센터를 담보로 한 은행 이자빚의 50%에 해당하는 5억 2500만달러에 대해 '''디폴트를 선언했다.''' 2011년 9월 13일, 힉스에게 돈을 빌려줬던 대출 은행들은 스타스를 파산시키고 경매에 붙이기로 합의했다. 이후 2011년 11월 22일 파산법원은 톰 가지아디가 스타스를 2억 4000만 달러에 매입하는 것을 승인했다. 이로써 힉스는 댈러스 스타스에서 강제로 쫓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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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6월, 힉스는 조지 W. 부시로부터 MLB의 텍사스 레인저스를 인수했다. 그가 운영하던 시절의 레인저스는 1998년과 1999년에 2년 연속으로 아메리칸리그 서부지구 1위를 차지했다. 팀이 창단된 지 30여 년이 지난 상황에서 드디어 우승을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놓였고, 힉스는 레인저스의 월드 시리즈 우승을 위해 돈지랄을 하기 시작했다.
힉스의 첫번째 돈지랄은 바로 2000년 12월 '''알렉스 로드리게스의 10년 2억 5200만 달러의 FA 영입'''. 여기에도 공격력이 부족했다고 생각했는지 켄 캐미니티, 안드레스 갈라라가 등의 한방이 있는 거포들을 수집했다. 그러나 이 계약은 장기적인 측면에서 레인저스 내의 다른 선수들을 잡을 여력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인 이반 로드리게스를 놓칠 정도였으니. 그렇게 의욕적으로 한 돈지랄이었건만 레인저스는 2000 시즌에 지구 꼴찌를 하게 된다(...)
이듬해에는 박찬호를 5년 6500만 달러 FA 영입을 했다. 텍사스의 프론트는 박찬호가 다저스에서 그랬듯 에이스급 호투를 해줄 것을 기대했으나, 레인저스는 박찬호의 고질적인 허리 부상을 고려하지 않고 계약해버리고 만다. 박찬호는 매 시즌 부상과 부진을 반복했고 단 한번도 팀의 에이스로서 활약하지 못해 결국 이 계약은 재앙이 된다. 그리고 이건 박찬호 개인에게 있어서나 텍사스에 있어서 흑역사로 남고 말았다.
이렇듯 힉스가 구단주로 있던 시절 레인저스는 대형 계약을 연거푸 삽질하여 재정에 문제가 생겼고, 결국 2004 시즌 전에 알렉스 로드리게스를 연봉보조의 조건으로 뉴욕 양키스로 트레이드 시켰다. 한편, 힉스는 훗날 로드리게스가 텍사스 시절 약물 복용을 한 것을 인정한 것에 대해 배신감을 느꼈다고 밝혔다.
한편, 힉스는 2010년 완공을 목표로 했던 텍사스 레인저스의 새 홈구장 글로리 파크 건설을 지휘하고 있었으나 이 역시도 파기되고 만다. 2008년 5월 미국과 런던의 자금 시장에 요청했던 대출신청이 무산되자 급격한 재정난에 시달렸고 결국 야구장 건설을 중단해야 했다. 이후 급전이 필요해진 힉스는 레인저스를를 조기에 팔아버리기로 결심했다. 게다가 '댈러스 스타스' 문단에 상기됐듯, 힉스 스포츠 그룹의 5억 달러 규모의 이자빚을 지불하지 못해 디폴트를 선언해버렸으니 더더욱 급해졌다. 결국 힉스는 2010년 1월 23일 척 그린버그와 놀란 라이언의 투자단에 5억 2000만 달러를 받는 대가로 구단을 넘기는 데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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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2월, 힉스는 레 카나디앵 드 몽레알의 구단주 친구인 조지 질레트와 함께 공동으로 리버풀 FC를 인수했다. 그는 두바이 국제 기업으로부터 막대한 금액을 대출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2007년 2월 6일, 힉스와 질레트는 리버풀을 4억 3290만 달러(2억 1890만 파운드)에 인수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로써 리버풀은 아스톤 빌라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이어 3번째로 미국인 구단주가 운영하는 프리미어리그 구단이 되었다. 힉스와 질레트는 기자회견에서 리버풀을 인수한 소감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또한 힉스는 기존의 안필드가 너무 오래되어 낡고 불편하여 팬들의 편의를 해치고 있으니 스탠리 파크 스타디움으로 명명될 새 경기장을 건설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새 경기장이 건설되는 일은 없었고 그들이 인수 직전에 한 약속들은 단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다. 당연히 팬들은 이에 분노했다.
게다가 그는 선수들을 영입하는 데 열성을 기울이지 않고 영입자금을 가능한 적게 책정하려고 했으며, 2008년에는 힐스버러 참사 19주기 추모식에 참석한 지 불과 24시간 후에 스카이 스포츠와의 인터뷰를 통해 라파엘 베니테즈 감독과 릭 페리 단장을 비난하여 팬들의 공분을 샀다. 또한 힉스는 자신의 아들인 톰 힉스 주니어를 리버풀 보드진에 앉히려 했다. 그러자 리버풀 팬들은 이메일로 "Blow me fuck face. Go to hell. I'm sick of you"라는 내용의 이메일을 줄기차게 보내며 격렬하게 반대했다.
2008년 2월 22일, 리버풀 팬들은 아스톤 빌라와의 경기에서 질레트와 힉스를 격렬히 비난하는 구호를 외쳤다. 그들은 베니테스에게 영입 자금을 제대로 지원해주지 않는 것을 비판하며 "그럴 거면 두바이에 팔아라"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힉스는 구단을 매각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베니테즈를 절대적으로 지지한다고 밝혔다. 그후 2009년 1월, 릭 페니 단장과 베니테즈 간의 대립이 격화되자 힉스는 베니테즈의 손을 들어주고 릭 페니를 해고했다. 하지만 베니테즈에게 주어진 자금은 맨유, 아스날, 첼시 같은 빅클럽들에 비해서는 여전히 형편없었고 힉스는 더 많은 자금을 요구하는 베니테즈에게 "그러면 선수를 팔아서 자금을 마련하면 되지 않느냐"라며 선수 판매를 종용했다. 결국 베니테스는 리버풀의 주축 선수들을 팔아서 영입자금에 보탤 수밖에 없었고 리버풀은 날이 갈수록 전력이 악화되었다. 결국 리버풀은 2009-10 시즌에 7위에 그치고 말았고 힉스는 성적 부진을 이유로 베니테즈를 경질했다.
2010년 4월 16일, 상기한 힉스 스포츠 그룹의 디폴트 선언 여파로 급전을 마련하기 위해 리버풀을 매각하기로 했다. 그는 적어도 자신이 인수했던 금액의 3배의 가격으로 판매할 것이라고 선언했고 가능하면 4배 가격으로 받기를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즉, 힉스는 리버풀의 매각 가격을 6억 파운드에서 8억 파운드 정도로 매긴 것이다. 힉스는 "리버풀은 가장 가치있는 투자가 될 것이다"라며 투자자들을 끌어모으려 애썼다. 그러나 리버풀이 아무리 명문 구단이라지만 어느 누구도 이 엄청난 가격을 지불하면서까지 구단을 인수하려 들지 않았다. 2010년 6월 6일, 윌튼 MP 스티브 로더햄사는 질레트와 힉스가 구단을 부당하게 운영하고 있다며 영국 법원에 두 사람의 구단주 자격을 박탈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힉스와 질레트는 그들을 "회사 자산 약탈자"라고 묘사하고 리버풀이 탐욕자들에 의해 진이 빠지고 있다고 비난했다.
2010년 10월, 리버풀 팬들은 "Dear Mr. Hicks"라는 제목의 동영상을 유튜브에 올렸다. 이 동영상에서, 팬들은 힉스의 만행을 열거하고 구단주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에 대해 소상하게 밝혔다. 이 비디오는 42시간 동안 4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시청했다. 그러나 힉스는 팬들의 이러한 아우성을 묵살하고 계속해서 자신의 직위를 유지하려 들었다. 그는 리버풀 보드진이 자신의 의향은 전혀 반영하지 않고 인수자를 멋대로 정했다며 그들을 해고하겠다고 밝혔다. 그러자 리버풀 보드진은 즉각 해고가 부당하다며 법원에 소송을 걸었다.
이에 10월 13일에서 15일까지 영국 법원에서 재판이 벌어졌다. 질레트와 힉스 측은 피터 림이 더 많은 인수금을 주기로 약속했고 그에게 구단을 팔려고 했는데 이안 에어 등 리버풀 보드진이 자신들의 의향을 받아들이지 않고 존 헨리 소유의 뉴잉글랜드 스포츠 벤처(NESV)에게 구단을 넘기기로 결정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리버풀 보드진 임원들은 자신들은 충분히 고려했으며 NESV가 인수자로서 더 적합했기에 결정을 내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공방전은 2010년 10월 15일에 결판났다. 힉스는 구단주 자격을 박탈당했고 리버풀은 3억 파운드 가량의 인수금을 통해 NESV에게 인수되었다. 힉스는 이 판결에 대해 "이 결과는... 구단을 평가절하한 것이다...."라며 자신은 사기의 피해자라고 주장했다. 리버풀 팬들은 구단이 인수되었다는 소식에 열광했다. 콥 팬그룹에 속한 스티브 호너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이후 힉스와 질레트는 영국 법원의 판결이 부당하다며 텍사스주 법원에 소송을 걸었지만 "텍사스주 법원의 판결은 영국에선 효력을 미치지 못한다"는 대답을 들어야 했다. 그래도 그들은 자신들이 사기에 당했다며 소송을 계속 걸었지만 결국 2013년 1월 11일에 소송을 취하하기로 결정했다.
1. 소개
톰 힉스는 NHL 댈러스 스타스, MLB 텍사스 레인저스, EPL 리버풀 FC의 前 구단주이다. 그는 텍사스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업가로, 2009년 《포브스》에 의하면 현재 자산은 10억 달러로 추정된다. 또한 정치에도 깊숙이 관여하여 공화당 쪽에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1] 그러나 사업적 수완과는 별개로, 스포츠팀 구단주로서는 최악의 인물로 손꼽히고 있다. 텍사스 레인저스에서는 구단의 돈을 빼돌려 사적 유용을 하다 발각되었고 구단 경영을 제대로 하지 않아 팀의 전력을 악화시키는데 일조했다. 또한 리버풀 FC에서는 공동 구단주인 조지 질레트와 함께 온갖 삽질을 자행하더니 급기야 리버풀이 법정관리 및 승점 삭감이라는 최악의 사태를 맞이할 뻔하게 만들었다.
2. 대략적인 경력
힉스는 1946년 2월 7일 텍사스 주의 휴스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존 힉스는 라디오 방송국의 오너였다. 힉스는 1964년 토머스 제퍼슨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텍사스 대학교에 입학한 후 1968년 금융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또한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도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퍼스트 내셔널 뱅크 오스틴 벤처 캐피탈 그룹을 인수해 각종 청량 음료들을 제조하였고, 1984년 동업자 로버트 하스와 함께 힉스 & 하스 그룹을 창립했다.
1989년에는 은행가 존 뮤즈와 함께 공동 투자 회사, 힉스 뮤즈 테이트 퍼스트(비르 전직 프루덴셜 증권) 등을 설립하였고, 회사, 생명 보험 회사, 생명 파트너 그룹 등을 포함한 초기 투자로 2억 500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1991년 모건스탠리의 찰스 테이트, 퍼스트 보스턴의 잭 프러스트와 동업자가 되어 1989년부터 2004년까지 회장을 지냈다.
그는 2004년 3월 힉스 뮤즈의 회장 직에서 물러난 뒤 그만의 벤처 기업을 세웠으니 바로 '힉스 홀딩스'다. 그는 스포츠 산업에 좀더 집중했고 TV 사업에도 뛰어들어 막대한 수익을 거두었으며 중국, 아르헨티나 등에도 자사를 설립하고 부동산 사업을 실행에 옮겼다. 또한, 힉스는 자원 에너지 협회를 설립하고 가스와 석유 산업에도 뛰어들었다. 그의 아들 토머스 O.힉스 주니어는 이 협회의 보드진으로서 활동하고 있다.
힉스는 정치 쪽에서도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는 공화당을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있으며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뉴욕에서 공화당의 루돌프 줄리아니의 정치행동위원회 일원으로 일했다. 텍사스에 토지를 기증해 톰 힉스 초등학교를 설립하는 등 자선 사업도 펼치고 있다.
3. 구단주 경력
3.1. 댈러스 스타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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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12월, 힉스는 NHL의 댈러스 스타스를 인수하고 팀의 구단주로 취임했다. 힉스는 스타스의 회장이 되었고 NHL 협회의 임원을 겸했다. 그는 아메리칸 에어라인스 센터[3] 를 건설하는 사업을 위해 장기적인 계획을 수립, 댈러스 스타스를 통해 홍보효과를 누리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힉스의 구단 운영하에, 스타스는 디비전 우승 7회, NHL 서부컨퍼런스 우승 2회, 프레지던트컵 2회 우승을 거뒀다. 또한 1998-1999 시즌에는 스탠리 컵에서 우승까지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힉스는 스타스 팬들로부터 위대한 구단주로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2010년 4월, 힉스가 운영하는 회사가 스타스 운영비와 아메리칸 에어라인스 센터를 담보로 한 은행 이자빚의 50%에 해당하는 5억 2500만달러에 대해 '''디폴트를 선언했다.''' 2011년 9월 13일, 힉스에게 돈을 빌려줬던 대출 은행들은 스타스를 파산시키고 경매에 붙이기로 합의했다. 이후 2011년 11월 22일 파산법원은 톰 가지아디가 스타스를 2억 4000만 달러에 매입하는 것을 승인했다. 이로써 힉스는 댈러스 스타스에서 강제로 쫓겨났다.
3.2. 텍사스 레인저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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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6월, 힉스는 조지 W. 부시로부터 MLB의 텍사스 레인저스를 인수했다. 그가 운영하던 시절의 레인저스는 1998년과 1999년에 2년 연속으로 아메리칸리그 서부지구 1위를 차지했다. 팀이 창단된 지 30여 년이 지난 상황에서 드디어 우승을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놓였고, 힉스는 레인저스의 월드 시리즈 우승을 위해 돈지랄을 하기 시작했다.
힉스의 첫번째 돈지랄은 바로 2000년 12월 '''알렉스 로드리게스의 10년 2억 5200만 달러의 FA 영입'''. 여기에도 공격력이 부족했다고 생각했는지 켄 캐미니티, 안드레스 갈라라가 등의 한방이 있는 거포들을 수집했다. 그러나 이 계약은 장기적인 측면에서 레인저스 내의 다른 선수들을 잡을 여력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인 이반 로드리게스를 놓칠 정도였으니. 그렇게 의욕적으로 한 돈지랄이었건만 레인저스는 2000 시즌에 지구 꼴찌를 하게 된다(...)
이듬해에는 박찬호를 5년 6500만 달러 FA 영입을 했다. 텍사스의 프론트는 박찬호가 다저스에서 그랬듯 에이스급 호투를 해줄 것을 기대했으나, 레인저스는 박찬호의 고질적인 허리 부상을 고려하지 않고 계약해버리고 만다. 박찬호는 매 시즌 부상과 부진을 반복했고 단 한번도 팀의 에이스로서 활약하지 못해 결국 이 계약은 재앙이 된다. 그리고 이건 박찬호 개인에게 있어서나 텍사스에 있어서 흑역사로 남고 말았다.
이렇듯 힉스가 구단주로 있던 시절 레인저스는 대형 계약을 연거푸 삽질하여 재정에 문제가 생겼고, 결국 2004 시즌 전에 알렉스 로드리게스를 연봉보조의 조건으로 뉴욕 양키스로 트레이드 시켰다. 한편, 힉스는 훗날 로드리게스가 텍사스 시절 약물 복용을 한 것을 인정한 것에 대해 배신감을 느꼈다고 밝혔다.
한편, 힉스는 2010년 완공을 목표로 했던 텍사스 레인저스의 새 홈구장 글로리 파크 건설을 지휘하고 있었으나 이 역시도 파기되고 만다. 2008년 5월 미국과 런던의 자금 시장에 요청했던 대출신청이 무산되자 급격한 재정난에 시달렸고 결국 야구장 건설을 중단해야 했다. 이후 급전이 필요해진 힉스는 레인저스를를 조기에 팔아버리기로 결심했다. 게다가 '댈러스 스타스' 문단에 상기됐듯, 힉스 스포츠 그룹의 5억 달러 규모의 이자빚을 지불하지 못해 디폴트를 선언해버렸으니 더더욱 급해졌다. 결국 힉스는 2010년 1월 23일 척 그린버그와 놀란 라이언의 투자단에 5억 2000만 달러를 받는 대가로 구단을 넘기는 데 동의했다.
3.3. 리버풀 FC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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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2월, 힉스는 레 카나디앵 드 몽레알의 구단주 친구인 조지 질레트와 함께 공동으로 리버풀 FC를 인수했다. 그는 두바이 국제 기업으로부터 막대한 금액을 대출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2007년 2월 6일, 힉스와 질레트는 리버풀을 4억 3290만 달러(2억 1890만 파운드)에 인수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로써 리버풀은 아스톤 빌라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이어 3번째로 미국인 구단주가 운영하는 프리미어리그 구단이 되었다. 힉스와 질레트는 기자회견에서 리버풀을 인수한 소감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리버풀은 놀라운 역사와 열정이 넘치는 팬들이 있는 환상적인 구단입니다. 우리는 리버풀에는 특별한 유산과 훌륭한 역사가 있음을 인정하며 이를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또한 우리는 이 유산이 미래에 더욱 존중받도록 할 것입니다.
또한 힉스는 기존의 안필드가 너무 오래되어 낡고 불편하여 팬들의 편의를 해치고 있으니 스탠리 파크 스타디움으로 명명될 새 경기장을 건설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새 경기장이 건설되는 일은 없었고 그들이 인수 직전에 한 약속들은 단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다. 당연히 팬들은 이에 분노했다.
게다가 그는 선수들을 영입하는 데 열성을 기울이지 않고 영입자금을 가능한 적게 책정하려고 했으며, 2008년에는 힐스버러 참사 19주기 추모식에 참석한 지 불과 24시간 후에 스카이 스포츠와의 인터뷰를 통해 라파엘 베니테즈 감독과 릭 페리 단장을 비난하여 팬들의 공분을 샀다. 또한 힉스는 자신의 아들인 톰 힉스 주니어를 리버풀 보드진에 앉히려 했다. 그러자 리버풀 팬들은 이메일로 "Blow me fuck face. Go to hell. I'm sick of you"라는 내용의 이메일을 줄기차게 보내며 격렬하게 반대했다.
2008년 2월 22일, 리버풀 팬들은 아스톤 빌라와의 경기에서 질레트와 힉스를 격렬히 비난하는 구호를 외쳤다. 그들은 베니테스에게 영입 자금을 제대로 지원해주지 않는 것을 비판하며 "그럴 거면 두바이에 팔아라"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힉스는 구단을 매각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베니테즈를 절대적으로 지지한다고 밝혔다. 그후 2009년 1월, 릭 페니 단장과 베니테즈 간의 대립이 격화되자 힉스는 베니테즈의 손을 들어주고 릭 페니를 해고했다. 하지만 베니테즈에게 주어진 자금은 맨유, 아스날, 첼시 같은 빅클럽들에 비해서는 여전히 형편없었고 힉스는 더 많은 자금을 요구하는 베니테즈에게 "그러면 선수를 팔아서 자금을 마련하면 되지 않느냐"라며 선수 판매를 종용했다. 결국 베니테스는 리버풀의 주축 선수들을 팔아서 영입자금에 보탤 수밖에 없었고 리버풀은 날이 갈수록 전력이 악화되었다. 결국 리버풀은 2009-10 시즌에 7위에 그치고 말았고 힉스는 성적 부진을 이유로 베니테즈를 경질했다.
2010년 4월 16일, 상기한 힉스 스포츠 그룹의 디폴트 선언 여파로 급전을 마련하기 위해 리버풀을 매각하기로 했다. 그는 적어도 자신이 인수했던 금액의 3배의 가격으로 판매할 것이라고 선언했고 가능하면 4배 가격으로 받기를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즉, 힉스는 리버풀의 매각 가격을 6억 파운드에서 8억 파운드 정도로 매긴 것이다. 힉스는 "리버풀은 가장 가치있는 투자가 될 것이다"라며 투자자들을 끌어모으려 애썼다. 그러나 리버풀이 아무리 명문 구단이라지만 어느 누구도 이 엄청난 가격을 지불하면서까지 구단을 인수하려 들지 않았다. 2010년 6월 6일, 윌튼 MP 스티브 로더햄사는 질레트와 힉스가 구단을 부당하게 운영하고 있다며 영국 법원에 두 사람의 구단주 자격을 박탈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힉스와 질레트는 그들을 "회사 자산 약탈자"라고 묘사하고 리버풀이 탐욕자들에 의해 진이 빠지고 있다고 비난했다.
2010년 10월, 리버풀 팬들은 "Dear Mr. Hicks"라는 제목의 동영상을 유튜브에 올렸다. 이 동영상에서, 팬들은 힉스의 만행을 열거하고 구단주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에 대해 소상하게 밝혔다. 이 비디오는 42시간 동안 4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시청했다. 그러나 힉스는 팬들의 이러한 아우성을 묵살하고 계속해서 자신의 직위를 유지하려 들었다. 그는 리버풀 보드진이 자신의 의향은 전혀 반영하지 않고 인수자를 멋대로 정했다며 그들을 해고하겠다고 밝혔다. 그러자 리버풀 보드진은 즉각 해고가 부당하다며 법원에 소송을 걸었다.
이에 10월 13일에서 15일까지 영국 법원에서 재판이 벌어졌다. 질레트와 힉스 측은 피터 림이 더 많은 인수금을 주기로 약속했고 그에게 구단을 팔려고 했는데 이안 에어 등 리버풀 보드진이 자신들의 의향을 받아들이지 않고 존 헨리 소유의 뉴잉글랜드 스포츠 벤처(NESV)에게 구단을 넘기기로 결정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리버풀 보드진 임원들은 자신들은 충분히 고려했으며 NESV가 인수자로서 더 적합했기에 결정을 내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공방전은 2010년 10월 15일에 결판났다. 힉스는 구단주 자격을 박탈당했고 리버풀은 3억 파운드 가량의 인수금을 통해 NESV에게 인수되었다. 힉스는 이 판결에 대해 "이 결과는... 구단을 평가절하한 것이다...."라며 자신은 사기의 피해자라고 주장했다. 리버풀 팬들은 구단이 인수되었다는 소식에 열광했다. 콥 팬그룹에 속한 스티브 호너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리버풀 서포터 클럽의 회장인 리치 패더는 리버풀 에코지에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올렸다.먹구름이 우리를 떠난 것 같다... 힉스와 질레트는 어떠한 유산도 남기지 못했고 카오스만을 남겼다.
힉스와 질레트가 구단을 맡기 2년 전, 리버풀은 2005년 챔피언스리그를 우승했고 2006년 FA컵에 우승을 차지하는 등 훌륭한 업적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러나 힉스와 질레트의 재임 동안 리버풀은 단 한 개의 트로피도 들어올리지 못했고[4] 그들이 떠날 무렵인 2010년 10월에는 강등권에 머물려 있었다. 팬들은 선수들을 영입하는 데 매우 소극적이었던 것을 비난한다. 하지만 힉스는 자신은 1억 5천만 파운드에 달하는 금액을 이적자금으로 썼는데 이것이 부족하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반박했다. 선데이 미러지는 순지출은 아마도 2500만 파운드를 넘지 않았고 대부분의 영입 자금은 선수를 팔고 번 돈으로 충당했을 뿐이라고 재반박했다.이것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다. 클럽의 어깨 위에 놓여져 있던 많은 것들이 사라졌다. 힉스와 질레트의 제거는 좋은 일이다.
이후 힉스와 질레트는 영국 법원의 판결이 부당하다며 텍사스주 법원에 소송을 걸었지만 "텍사스주 법원의 판결은 영국에선 효력을 미치지 못한다"는 대답을 들어야 했다. 그래도 그들은 자신들이 사기에 당했다며 소송을 계속 걸었지만 결국 2013년 1월 11일에 소송을 취하하기로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