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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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존 윌리엄 헨리 2세는 보스턴 지역을 근거지로 둔 미국의 거대 스포츠 기업인 펜웨이 스포츠 그룹(Fenway Sports Group, 이하 FSG)의 CEO이다. 또한 보스턴 레드삭스와 보스턴 브루인스 전담 케이블 방송국인 NESN(New England Sports Network)의 오너이자 보스턴 지역 신문인 보스턴 글로브의 발행인이기도 하다.
본인이 CEO로 있는 FSG가 소유한 스포츠 팀으로는 보스턴 레드삭스와 리버풀 FC, 나스카 시리즈에 참가하는 러쉬 펜웨이 레이싱 팀이 있는데, 헨리는 레드삭스와 리버풀의 구단주 겸 러쉬 펜웨이 팀의 공동 소유자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많은 구단주들이 단순히 돈놀이 또는 취미 목적으로 스포츠단을 인수했다가 내팽개치는 경향을 보이지만, 그는 사업만큼이나 스포츠 구단 운영에서도 열정을 쏟아부으며 나름의 철학을 가지고 장기적 안목으로 구단을 운영하는 솜씨가 일품이라고 평가받는다. 현재 보스턴 팬들에게는 '''밤비노의 저주를 깨뜨린 영웅'''으로, 리버풀 팬들에게는 '''파산 직전이던 팀을 구해낸 구단주'''로 인식되고 있다.
2. 대략적인 경력
헨리는 1949년 9월 13일 일리노이주의 퀸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콩을 재배하는 농부였고 그는 농가에서 15살까지 살다가 캘리포니아주의 애플 벨리로 이사갔다. 빅터 벨리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헨리는 빅터 벨리 대학에 입학했고 거기서 철학을 전공했으나 도중에 중퇴했다. 헨리는 옥수수와 콩을 재배하는 기술을 학습했고 계절 변동 또는 토지 황폐화로 인한 가격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한 기초 교육을 습득했다.
1976년, 레이놀드 증권회사의 상품 중개인이 다른 농부들을 도와주는 일을 맡아 달라고 제의했지만 헨리는 이를 거부했다. 이후 그는 노르웨이에서 그의 첫번째 아내와 여름 신혼 여행을 갔다 온 후 미래 상품매매 손익계정을 관리하기 위해 추세추종전략(trend following)을 기반으로 한 기술 개발에 착수했다. 그는 성공적으로 자신만의 경영 전략을 고안해냈고 1981년 존 W. 헨리 & 컴퍼니(약칭 JWH)를 설립했다. 그 후 헨리는 탁월한 사업 수완을 발휘해 막대한 돈을 벌어들여 미국 최고의 갑부 중 하나가 되었다. 현재 그의 자산은 26억 달러(포브스 2017년 기준)로 추정되고 있다.
3. 구단주 경력
헨리는 어린 시절 스탠 뮤지얼의 팬이었고 그가 속한 야구팀인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열렬히 응원했다. 그는 사업에서 성공한 뒤 스포츠 구단을 운영하는데 뜻을 두고 1989년 미국 베이스볼 마이너리그에 속한 트리플 A 퍼시픽 코스트 리그 야구팀인 투산 토로스(Tucson Toros)를 인수했다. 또한 그는 은퇴한 메이저리그 선수들로 구성된 플로리다에서 열리는 겨울 야구 리그를 운영하는 시니어 프로야구협회를 공동 창립하기도 했다. 1990년, 그는 투산 토로스의 지분을 판 후 NBA 올랜도 매직의 지분 일부를 구입했고 NHL 탬파베이 라이트닝의 지분 일부를 사들였고 또한 1991년에는 뉴욕 양키스의 지분 일부를 구입하기도 했다. 이렇듯 여러 스포츠계를 찔러보던 헨리는 1999년 1억 5800만 달러를 지불하고 플로리다 말린스의 구단주로 부임했다가 2002년 1월 제프리 로리아에게 구단주 자리를 넘겨줬다.
3.1. 보스턴 레드삭스
2002년 7월, 헨리는 보스턴 레드삭스를 인수하고 새 구단주로 부임했다. 그는 취임식 자리에서 "밤비노의 저주를 부숴버리겠다."라고 공언했다. 구단주 부임 후, 헨리는 레리 루치아노를 클럽 사장에 임명했고 세이버매트리션 야구 전문가 빌 제임스를 경영 자문에 전격 임명했다. 또한 헨리는 10여년 간 보스턴의 단장으로 활약했던 댄 듀켓을 경질하고 마이클 포트를 임시 단장으로 고용해 2002시즌을 마무리 한 후 테오 엡스타인을 새 단장에 임명했다. 사실 그는 '머니볼'을 현실에 구현해 명성이 자자했던 오클랜드의 단장 빌리 빈을 고용하려 했다. 그러나 빌리 빈이 장고 끝에 거절의 뜻을 밝히자, 헨리는 샌디에이고 대학 로스쿨 출신이자 래리 루치아노 사장과 함께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에서 일한 바 있는 서른 살 청년을 전격 단장에 임명했다.
그의 이러한 움직임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신임 단장 테오 엡스타인은 머니볼 이론과 세이버매트리션에 의거한 야구 스탯을 적절히 이용해 구단 개혁을 착실히 수행했고 마침내 2004년 월드시리즈에서 보스턴에게 86년만의 우승을 안겨주는 데 성공했다. 이후 보스턴은 2007년에도 월드시리즈 우승을 달성했고 엡스타인이 떠난 후 몇년 간 부침을 겪다가 2013년 다시 한번 우승을 달성하며 명실상부한 강팀으로 거듭났다.
한편 그는 보스턴 레드삭스의 영원한 홈그라운드 펜웨이 파크의 리모델링에도 크게 기여했다. 1990년대 중반 메이저리그에 신축구장 붐이 불었을 때 레드삭스 구단과 보스턴 시 정부도 구장 신축안이었던 '뉴 펜웨이 파크' 프로젝트를 계획했고 1999년 5월 15일에 존 핼링턴 레드삭스 CEO가 신축구장 계획안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그러나 레드삭스의 골수팬들은 신축 계획안을 반대했다. 오랜 세월 자신들과 함께 해온 구장을 하루아침에 버릴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펜웨이 파크가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낡을 대로 낡아서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쓰기 어려웠고 리모델링을 하기에는 돈이 턱없이 많이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2002년 구단주로 부임한 헨리는 통 크게도 3억 달러(!)를 들여 리모델링 공사에 착수했다. 좌석 교체, 편의시설 확충은 물론 2002년에는 펜웨이 파크의 상징인 그린몬스터 위에 관중석을 새로 설치했다. 신축구장 짓는 돈과 맞먹을 정도의 돈이 들었지만 리뉴얼이 끝난 펜웨이 파크는 앞으로도 100년은 끄떡없는 구장으로 변모했다고 한다.
3.2. 리버풀 FC
2010년 4월 16일, 리버풀의 톰 힉스와 조지 질레트 구단주는 리버풀을 매각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들은 적어도 자신이 인수했던 금액의 3배의 가격으로 판매할 것이라고 선언했고, 가능하면 4배 가격으로 받기를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이들이 리버풀을 인수할 당시 들였던 돈은 2억 1890만 파운드였으니 매각 가격을 6억 파운드에서 8억 파운드로 매긴 셈이다. 그러나 리버풀이 아무리 명문 구단이라지만 어느 누구도 이 엄청난 가격을 들여가며 인수하려 하지 않았다. 이에 리버풀 보드진은 질레트와 힉스가 구단을 부당하게 운영하고 있다며 영국 법원에 두 사람의 구단주 자격을 박탈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힉스와 질레트는 그들을 "회사 자산 약탈자"라고 묘사하고 리버풀이 탐욕자들에 의해 진이 빠지고 있다고 비난했다.
2010년 10월, 리버풀 보드진은 존 헨리의 FSG에게 구단을 넘겨주기로 결정했다. 그러자 톰 힉스 구단주는 보드진이 자신의 의향은 전혀 반영하지 않고 인수자를 멋대로 정했다며 그들을 해고하겠다고 밝혔다. 그러자 리버풀 보드진은 즉각 해고가 부당하다며 법원에 소송을 걸었다. 당시 리버풀은 톰 힉스, 조지 질레트의 엉성한 팀 운영으로 인해 빚이 천정부지로 쌓였고 제때에 인수자를 구하지 못하면 파산당할 지경에 처해 있었다. 다행히 10월 15일 법정이 리버풀 보드진의 손을 들어줬고 FSG는 3억 파운드 가량의 인수금을 들여 리버풀을 인수했다.
그후 존 헨리는 로이 호지슨의 다음으로 리버풀의 레전드 케니 달글리쉬를 임시 감독으로 고용했고 달글리쉬는 하위권에 처진 리버풀의 경기력을 끌어올리는 데에 성공해 2010-11 시즌을 좋은 분위기 속에서 끝마쳤다. 그렇게 달글리쉬는 정식 감독으로 부임하여 2011-12 시즌을 맞았으나 실망스런 모습을 보여주자[1] 헨리는 시즌이 끝난 후 달글리쉬를 경질하고 스완지 시티에서 훌륭한 지도력을 보여줬던 브랜던 로저스를 새 감독으로 임명했다. 로저스는 차츰 전력을 끌어올려 2013-14 시즌에 눈부신 성공을 거두는 듯 했지만 수비 불안을 극복하지 못해 막판에 우승을 놓치고 리그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그리고 2014-15 시즌에 급격한 경기력 저하로 부진을 겪으며 만족스럽지 못한 성적을 거두었고 2015-16 시즌에도 부진하자 결국 시즌 중반인 2015년 10월 4일에 경질되었다.
2015년 10월 8일, 존 헨리는 장기적인 비전으로 위르겐 클롭을 새 감독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클롭은 암흑기에 허덕이던 리버풀을 부활시키며 2016-17 시즌에는 리그 4위권 복귀, 17-18 시즌에는 챔피언스 리그 결승행을 이끌어냈다. 마침내 18-19 시즌에는 '''14년 만에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클럽을 유럽 최고의 팀으로 만들어냈고, 이듬해 19-20 시즌에는 UEFA 슈퍼컵과 FIFA 클럽 월드컵 우승에 이어, 클럽의 오랜 염원이었던 '''30년 만에 프리미어 리그 우승'''까지 달성하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4. 평가
4.1. 긍정적 평가
4.1.1. 보스턴 레드삭스
존 헨리가 구단주에 부임하기 전까지만 해도, 보스턴은 월드시리즈 우승과는 거리가 멀고 양키스의 아성 앞에 허우적거리기만 했다. 헨리는 이 침체된 구단을 회생시키고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루기 위해 머니볼 이론과 세이브매트리션 개념에 통달한 인재들을 적극적으로 기용해 보스턴을 2000년대 최고의 팀 중 하나로 육성시키는 데 성공했다. 특히 한낱 30대의 애송이로 평가받았던 테오 엡스타인을 단장으로 과감하게 기용하고 팀의 체질을 대대적으로 개선하는 데 힘을 보탠 것은 그의 사람 보는 안목이 뛰어남을 입증하는 사례라 하겠다. 그리고 과감한 투자를 통해 FA계약 및 구단 운영에 차질이 없도록 든든히 지원해줘 보스턴이 계속 강팀으로 남는 데 기여하는 등 팬들이 원하는 구단주로서의 모습을 착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4.1.2. 리버풀 FC
리버풀 FC는 존 헨리가 인수하기 전, 조지 질레트와 톰 힉스의 막장 운영으로 인해 파산 직전까지 몰려 있었다. 헨리는 무너져가는 구단을 전격 인수해 빚을 탕감해주고 침체되던 팀 분위기에 활력을 불어넣는데 큰 기여를 했다.
4.2. 부정적 평가
4.2.1. 보스턴 레드삭스
스포츠가 아무리 비즈니스적인 측면에 의해 돌아간다지만, 존 헨리 이후 보스턴의 행보는 선수들 간의 끈끈한 유대 관계를 무시하고 성과 우선주의에 치우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2004년 월드시리즈 우승 멤버와 2007년 월드시리즈 우승 멤버 중 오랫동안 팀에 남아 활약했다고 할 수 있는 이는 데이비드 오티즈 외 일부에 불과하며 대다수는 성적이 떨어졌다는 이유로 다른팀으로 보내지기 일쑤였다.
심지어 보스턴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나선 이마저 내치기도 했다. 브론슨 아로요는 2004년 월드시리즈 우승에 크게 기여했고 2005년에도 훌륭한 활약을 선보였다. 이에 그의 에이전트는 3년간 2000만 달러를 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아로요는 오히려 '''홈 디스카운트'''라며 레드삭스와 3년간 1125만 달러에 계약을 체결했다. 또한 계약기간 내에 자신을 트레이드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레드삭스에 진심으로 남고 싶어했다. 그러나 보스턴 보드진은 2006년 스프링캠프 때 그를 신시내티로 보내버렸다. 그런데 정작 아로요는 신시내티에서 이닝왕에 등극하는 등 훌륭한 활약을 선보였던 반면 보스턴은 선발진이 붕괴하며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물론 성적을 바로 내야 하는 빅클럽인데다 팬들과 언론의 극성이 심한 보스턴 레드삭스를 운영하는 입장에서 선수들에게 정을 주고 미적지근한 운영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스포츠는 냉혹한 승부의 세계만이 아니라 팬들과 선수 간의 우정을 쌓는 것이기도 하다. 팬들의 사랑을 받고 팀에 애정을 품은 그들, 그리고 팀을 위해 헌신한 그들을 하루아침에 내친다면 당장 성적을 낼 수 있을 지언정 남은 선수들이 팀에 충성을 바치려 할 지 의문이며 팬들도 팀에 애정을 갖기 힘들 것이다. 선수들과 팬은 감정이 있는 사람이지 기계가 아니니까.
4.2.2. 리버풀 FC
'''FSG가 가지고 있는 한 가지 문제는 그들이 이적료로 쓴 지출이 애초에 죄다 이적료 수익으로 번 돈이라는 것이다. 리버풀은 지난 5년 간 리그에서 넷스펜딩 14위이다. 클롭 감독은 정말로 기대치 이상의 성과를 내고 있다.'''
- 케빈 팔머, #
존 헨리는 보스턴 레드삭스를 인수한 이래 머니볼과 세이버매트리션을 적용해 빛나는 성공을 거둔 바 있다. 그는 이러한 방식이 축구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고 여기고 리버풀을 인수한 이래 머니볼 이론을 리버풀에 적용하려 했다. 그는 야구에서 이기려면 타자가 일단 출루해야 한다는 머니볼의 원칙을 베껴 축구에서 이기려면 일단 공격을 퍼부어서 골을 넣을 확률을 높여야 한다고 봤다. 이것 자체는 틀린 말이 아니지만 존 헨리는 축구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면서도 다른 보드진 인물들을 통해 적지 않은 간섭을 보인 게 문제였다. FSG 멤버들로 이루어진 이적위원회를 구성해 감독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선수 영입을 단행한 것이 대표적. 심지어 브랜던 로저스를 감독에 임명한 결정적인 이유들 중 하나도 로저스가 이적위원회의 존재에 동의해서였다. 이렇게 영입된 선수들이 좋은 선수들이었다면 모를까 상당수가 망한 영입이 됐기 때문에 큰 비판을 들었다.[2] 그나마 협상 당시 이적위원회의 해산을 강력히 요구한 위르겐 클롭 선임 후엔 이런 문제는 사라졌다.'''나는 (리버풀이 앞으로 왕조를 건설할 거라고) 걱정하지 않는다. 그들이 맨시티처럼 자금을 투자해줄 수 있는 부자 구단주를 두었다면 걱정했을 테지만, 그들의 현재 구단주는 맨시티만큼의 돈이 없다. 클롭이 엄청난 성과를 내고 있는 것이다.'''
팬들 사이에서 이적시장에서의 투자에 대한 원성이 꾸준히 나오는 편이다. 사실상 리버풀의 선수 영입을 대하는 존 헨리의 스탠스는 ‘알아서 버는 만큼 써라’이며, 헨리는 리버풀에게 무지막지한 수준의 이적자금을 지원해준 적이 별로 없다. 그보단 페르난도 토레스, 루이스 수아레스, 라힘 스털링, 필리페 쿠티뉴 같은 선수들이 거액에 팔림에 따라 번 수익이 크게 작용한 편. 실제로 2018년에 버질 판데이크와 알리송 베케르 등을 엄청난 거금에 영입하며 호평이 나오기도 했었으나 여기엔 천문학적인 가격을 기록한 쿠티뉴의 바르셀로나 이적료가 부담을 덜어준 덕이 분명히 컸다. 리버풀의 넷스펜딩 기록은 다른 프리미어 리그 구단들과 비교해 봐도 오히려 적은 편에 속한다.
물론 구단주라 해서 꼭 엄청난 투자를 하라는 법은 없다. 구단주는 단순한 팀의 물주가 아니며 엄밀히 사업을 하는 투자자이다. 구단을 계산적으로 대하는 건 절대 이상한 점이 아니다. 그러나 FSG는 리버풀 팬들의, 그리고 '''FSG 자신들의 은인'''이나 다름없는 클롭을 이적시장에서 제대로 지원해주지 않고, 2020년에 이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며 이에 팬들이 완전히 폭발해버렸다.
2020년, 코로나 19 사태로 리버풀이 재정적 타격을 입은 상황에서 클롭이 원하던 티모 베르너를 돈이 없다는 이유로 놓치고 여름 이적시장에서 어떠한 영입도 불가능하다고 보도되자 전 세계 서포터들의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 2019년부터 당시까지 데려온 선수라고는 저렴한 어린 유망주들과 자유계약으로 데려온 세컨 골키퍼, 그리고 £7.25m의 백업 선수가 전부였는데, 대체 그동안의 우승 상금들은 다 어디 갔냐는 것이다. 코로나로 시즌이 잠시 중단되기 며칠 전까지도 최근 벌어들인 수익이 얼마네, 수익이 유럽 구단들 중에서 몇등이네 하며 자축하고 언플하던 팀이 순식간에 돈이 없다고 하니 팬들이 상당히 분노했다. 코로나 사태로 수익이 줄어서 돈을 쓸 수 없다는 FSG 측의 입장에 팬들은 코로나가 터지기 전에도 꾸준히 지원 안 해준 주제에 무슨 소리냐며 코웃음을 쳤다.
당연히 코로나로 인한 재정 타격은 유럽의 모든 구단들에게 심각했고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으니 존 헨리와 FSG 입장에선 억울할 수 있다. 그리고 안필드 증축으로 인해 구단 자금의 지출이 제법 있기도 했다. 그러나 FSG의 버는 만큼 쓰라는 이 스탠스가 문제였던 것. 구단의 재정에 이런 차질이 간 상황에서 팬들은 구단주가 특별히 돈을 풀어서 구단을 지원해줬으면 하는데, 존 헨리는 그러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미 FIFA 측에서는 통상적이지 않은 시기이니 FFP룰에 대한 규제를 일시적으로 완화한다는 발표를 하여 구단주들의 지원금을 눈 감아주겠다고 시사했음에도 헨리는 지원금을 풀지 않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리버풀의 제일 강력한 리그 우승 경쟁팀인 맨체스터 시티는 셰이크 만수르 구단주의 아낌없는 지원 아래에 오늘날까지 발전한 팀이고, 결정적으로 베르너를 뺏긴 팀 역시 마찬가지로 로만 아브라모비치 구단주를 등에 업은 첼시였기 때문에 리버풀 팬들의 헨리에 대한 불만은 하늘을 치솟았다.
이후 2020년 여름 이적시장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데얀 로브렌을 판 돈으로 영입한 코스타스 치미카스 말고는 영입이 매우 지지부진하여 엄청난 비난을 받다가 FC 바이에른 뮌헨과 울버햄튼 원더러스 FC가 각각 할부로 티아고 알칸타라와 디오구 조타의 이적을 허락하면서 일단 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런데 시즌 초부터 주전 센터백들인 버질 판데이크와 조 고메즈가 심각한 시즌 아웃 급의 부상을 당함에 따라 누가 봐도 센터백 보강이 필요해지자[3] 클롭이 직접 1월 센터백 영입을 요구했음에도 FSG는 겨울 이적시장에서 돈을 쓸 생각이 없다며 클롭의 요청을 묵살했다. 클롭이 작심한 듯 아예 대놓고 공식석상에서 “센터백 보강이 된다면 무조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영입을 결정하는 건 내가 아니다”라고 밝혔을 정도.[4] 그렇게 겨울 이적시장을 억지로 넘어가려고 하던 찰나에 마지막 남은 시니어 전문 센터백 조엘 마팁까지 1월 막바지에 심각한 부상을 당하며 비상불이 켜지게 되었고, 결국 리버풀은 겨울 이적시장 마감을 약 이틀 남기고 뒤늦게 영입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너무 늦은 시기였기 때문에 탑 타겟이던 두예 찰레타차르을 포함하여 여러 선수들을 찔러봤으나 놓칠 수 밖에 없었고, 결과는 2부리거이던 벤 데이비스와 당시 최악의 폼을 보이고 있던 오잔 카바크를 급하게 데려오게 되었다.[5] 2명의 센터백을 겨우 보강했으나, 누가 봐도 영입이 필요하던 상황에서 클롭의 요구를 무시하면서까지 보강을 거부하다가 결국 시니어 센터백이 완전히 전멸하고서야 뒤늦게 시장에 뛰어들어 시간만 잡아먹은 FSG의 스탠스에 대한 비판 여론은 전혀 잠재워지지 않았다.
단순히 이적시장에서의 행보만이 아니라 클롭 감독은 리버풀에 부임한 후로 계속해서 리버풀 시민들을 생각하는 사회주의적인 면모를 보이는 반면, FSG는 경기 티켓값을 올리거나 코로나 19 사태 후 손해를 줄이겠답시고 직원들을 임시해고 하는 등의 결정을 내려 팬들의 큰 분노와 반발을 산 뒤 두 결정을 철회하는 논란을 만들었다.
게다가 FSG의 클럽 레전드 대우가 형편없다는 의견도 많다. 스티븐 제라드의 자서전에서 자신이 이적을 할 때의 상황을 설명했는데, 이에 많은 리버풀 팬들이 FSG에게 분노하였다. 제라드 뿐만 아니라 다니엘 아게르 등 여러 선수들이 그들에게 걸맞는 대우를 받지 못하여 결국 선수 말년에 리버풀을 떠나는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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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에 아내 마이와 결혼했으나 얼마 안 가 이혼했다. 그리고 1993년에 두 번째 결혼했지만 2007년에 이혼했고 2009년에 29세 연하의 1978년생 Linda Pizzuti와 결혼했다. 하지만 린다 피주티가 흔히들 말하는 '트로피 와이프'는 아니다. Pizzuti 가문 자체도 부동산 개발사업으로 성공한 자산가인데다가, 린다 본인은 MIT 부동산 개발 전공 석사 출신의 엘리트이다. 재산만을 노리는 트로피 와이프들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1] 그래도 리그컵 우승은 거머쥐며 무관을 끊어내긴 했다.[2] 물론 로저스 감독의 능력 문제도 있었다.[3] 남은 전문 1군 센터백은 유리몸으로 악명 높은 조엘 마팁이 전부고 이 외엔 프리미어리그 레벨에서 검증도 되지 않았던 리스 윌리엄스와 나다니엘 필립스 뿐이었다. 이 때문에 수비형 미드필더인 파비뉴가 시즌 내내 센터백 땜빵을 봐야 했고 마팁의 부상, 윌리엄스와 필립스의 안정감 부족으로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인 조던 헨더슨도 때때로 파비뉴의 센터백 파트너로 출전해야 했다.[4] 클롭은 원래 보드진과의 관계를 최우선시하며 영입에 관해 이 정도로 자신의 불편한 속내를 털어놓지 않는 편이다.[5] 그나마 스포팅 디렉터인 마이클 에드워즈의 신들인 흥정 실력으로 협상은 리버풀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갔고, 큰 리스크를 감수하지 않은 채 센터백 2명을 보강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