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탕카멘

 


'''이집트 신왕국 제18대 왕조 제13대 파라오
투탕카멘 | Tutankhamen[1], King T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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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를 바탕으로 복원한 모습
<colbgcolor=#decd87><colcolor=#000> '''출생'''
기원전 1342년
'''사망'''
기원전 1325년 (향년 18세)
'''신장'''
167cm[2]
'''즉위'''
기원전 1334년
'''묘지'''
왕가의 계곡 KV62
'''재위'''
'''이집트 파라오'''
기원전 1334년 ~ 1325년
[image][image]
투탕카멘의 황금 마스크
1. 개요
2. 생전
2.2. 복잡한 후계 문제
2.3. 암살 의혹
3. 사후
3.1. 고고학의 전설
3.2. 이집트의 돈줄
3.3. 투탕카멘의 마스크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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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집트 신왕국 18왕조의 파라오로, 재위기간은 기원전 1333년부터 1323년으로 추정된다.[3]
보통 연음하여 "투탕카멘"이라고 발음하지만, 정식으로는 '''투트-앙크-아멘'''("아문의 살아 있는 이미지")이다.[4]

2. 생전



2.1. 존재감 없는 파라오


재위 시기는 까마득하게 먼 편인데, 그 유명한 고대의 제왕 알렉산드로스 3세진시황이 태어나기 무려 '''1000년'''도 더 전, 그리고 삼국지로부터도 '''1500년''' 정도 전의 사람이다. 무덤이 밀폐된 것은 기원전 1323년으로, 지중해 건너편에서는 한창 그리스 신화 찍던 시절이다.
이집트의 전통 종교를 거부하고 태양신 "아톤"을 유일신으로 추앙했던 아케나톤[5]의 '''아들이자 사위'''로[7] 본명은 아톤에서 따온 투탕카톤이었으나, 왕위에 오른 뒤 아문 신앙이 복귀되면서 투탕카멘으로 개명했다.
그의 무덤에서는 아멘호테프 3세의 아내 티이의 이름이 적힌 상자가 발견되었는데 그 안에서는 머리카락이 발견되었다. 이 머리카락과 아멘호테프 2세의 무덤에서 발견된 미확인 중년 여성 미이라를 대조한 결과 티이로 확인되었다. 그리고 투탕카멘은 원래 근본 자체가 불확실했으나, 여러 비석이나 기록에서 '투탕카멘은 파라오의 아들이다.' 또는 '아멘호테프 3세는 나의 아버지'라고 되어 있었다. 사실 나이로 보아 아케나톤의 아들이 확실했으며, DNA 검사결과 아케나톤의 아들로 정식 확인된 것이다. 즉 상술한 티이는 투탕카멘의 할머니가 된다.
안타깝게도 그는 18세의 꽃다운 나이에 요절했다. 미소년이었다고 전해지는데, 파라오의 황금 마스크는 고인의 형상을 그대로 본따 만들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황금 마스크의 그는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조화가 잘된 애잔한 얼굴이다. 실제로 미라를 기반으로 두상을 만들었더니 미남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밀 측정을 한 결과 본모습은 미남형이 맞지만 뻐드렁니가 있는 애매한 형상이었다. 이에 관해서 자세한 것은 하술한다.
이복누나이자 왕비 안케세나멘과의 사이에서 딸 둘을 가졌으나,[8] 공교롭게도 모두 태어나지도 못하고 사산됐다.[9] 후사가 없어 당시 재상이자 실력자였던 아이가 파라오의 자리를 이었다. 그 뒤를 이어 투탕카멘의 장군이었던 호렘헤브가 즉위했고, 그 뒤에는 호렘헤브의 친구 람세스 1세가 19왕조를 개창하고 즉위한다.[10]
그의 치세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아직 나이가 어린 탓에 앞서 서술한 대재상인 아이와 장군 호렘헤브가 거의 모든 실권을 장악했던 걸로 전해진다. 10살 때 즉위해서 '''배다른 누나''' 안케세나멘과 결혼했다.[11][12]
그의 개명과 아톤 신앙을 버리게 된 것도 아이가 종용한 탓이라는 설이 있다. 이토록 그의 치세가 알려지지 않은 것은 19왕조를 개창한 람세스 1세가 자신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아문-라 신앙의 파괴자인 아케나톤의 역사를 없애기 위한 일환으로, 그의 소생인 투탕카멘과 그의 뒤를 이은 아이의 기록을 지워버리고 호렘헤브의 통치 기록만을 남겨두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지만, 단순한 기록 소실일 수도 있다.[13] 하지만 기록 소실이라고 보기엔 또 무리가 있는 것이, 아비도스 왕명록을 기록하도록 만든 장본인인 세티 1세는 기원전 1358년에 태어나서 1279년에 사망한 인물로, 투탕카멘이 제위한 1333년에는 이미 25살 정도의 건장한 청년이었고, 아버지인 람세스 1세는 고위 사제이자 군사령관 호렘헤브의 친구였다. 따라서 그런 그가 투탕카멘의 존재를 잊어버렸을 리가 없다. 그래도 투탕카멘은 KV55(아크나톤)과 WV23(아이)와 달리 기록에서는 삭제되었어도 의도적인 무덤 훼손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다. 어린 나이에 죽은 데다 짧고 존재감 없는 치세로 인해 크게 원한을 살 일이 없었고, 호렘헤브는 투탕카멘이 재위할 때 고위직에 올랐기 때문에 투탕카멘을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투탕카멘은 이집트 왕조 시절엔 별 존재감 없는 군주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이렇게 존재감이 없었던 군주였기에 그의 무덤이 온전한 채로 유지될 수 있었다. 유명한 군주의 피라미드는 이미 다 털렸지만 투탕카멘은 도굴꾼들에게 거의 철저한 듣보잡이었기 때문이다.

2.2. 복잡한 후계 문제


한편 투탕카멘의 요절 후, 아이는 고령의 나이에 투탕카멘의 미망인안케세나멘과 결혼해서 제위를 이었으며[14] 고령의 아이가 2년여만에 사망하여 호렘헤브가 그 뒤를 잇고, 아문-라의 사제였던 람세스 1세가 뒤를 이어 19왕조를 열었다. 이렇게 추정되는 것은 1920년대 아이와 안케세나멘의 이름이 같이 새겨진 반지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보통 결혼의 의미다. 물론 안케센나멘이 아이의 외손녀이므로, 외할아버지와 외손녀의 혈연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도 한다.
투탕카멘이 죽었을 때 안케세나멘은 히타이트로 편지를 보내 자신과 결혼할 왕자를 보내달라는 요청을 했다고 하는데, 히타이트 측에서는 '''좋다! 내친 김에 이집트 먹자.'''[15] 식으로 제난자라는 왕자를 보냈지만, 이집트 국경에서 사망하고[16] 안케세나멘도 아이 사후 호렘헤브에 의해 숙청당했다는 설이 있지만, 아이와 결혼한 이후에 모든 기록이 사라지기 때문에 단순한 가설일 뿐이다.[17] 결국 이집트와 히타이트의 관계는 극도로 나빠졌고, 훗날 19왕조의 3대 파라오인 람세스 2세카데시 전투도 이것이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18]
사실 제난자가 죽은 직후에도 아들의 죽음에 분노한 히타이트의 수필룰리우마 1세는 이집트에 이를 비난하는 편지[19]를 보내고 이집트령 아시아를 공격했지만, 해당 지역은 때마침 전염병이 돌고 있었기 때문에 수필룰리우마 1세는 병으로 사망하고 원정은 흐지부지되었다. 우르슬라 문서 참고.

2.3. 암살 의혹


발굴 당시 미라를 X-선 촬영한 결과 머리에 큰 상처로 보이는 자국이 발견되어, 그의 사인은 둔기에 의한 두개골 골절, 즉 암살당했다는 설이 설득력있게 다가왔다. 실제로 투탕카멘이 죽은 뒤에 왕위 계승이 영 이상하게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정밀한 CT 촬영에 의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두개골 골절 같은 것은 아예 발견되지 않았고, 두개골에 나있는 갈라진 금은 죽었을 당시에 아직 미성년자여서 두개골이 채 다물어지지 않았을 뿐이라는 게 밝혀졌다. 즉 X-선 촬영 당시에 나타난 자국 자체가 허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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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CT 촬영에서 밝혀진 또 다른 사실은 다리에 '''심각한''' 골절이 있음이 확인되었고, 이걸 사인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항생제가 없었던 당시에는 이런 상처가 덧나 죽는 경우가 굉장히 많았다. 한편으로는 워낙 부친인 아케나톤이 유전적 기형 의혹을 받고 있다 보니, 그로부터 물려받은 선천적 유전병으로 인해 원래 몸이 허약했고, 그래서 오래 재위하지 못하고 병사했다고 보는 학설도 있다. 위의 다리 골절도 그 증거로 보기도 한다.
CT 촬영에서 밝혀진 사실은 이러하다.
1. 무릎 바로 위쪽에서 심각한 골절이 발견되었다.
2. 왼쪽 갈비뼈 여러 개가 부러져 없어졌다.[20]
3. 심장이 없다.
고대 이집트의 사제들은 시신을 엠버밍할 때 내장을 제거했지만, 심장만은 남겨두었다. 사후 세계에서 죽음의 신 아누비스가 심장의 무게를 재서 생전의 죄를 심판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장이 제거됐을 정도라면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뭉개져 손상되어 사제들이 알아보지 못했거나, 도저히 보존이 불가능한 수준이라 포기하고 꺼냈을 정도로 죽을 당시의 부상이 심각했음을 보여준다.
그 외에 말라리아를 사인으로 추정하는 사람도 있다. 그의 미이라를 연구한 연구팀이 유전자 검사로 투탕카멘이 말라리아를 일으키는 원인 기생충인 열대 열원충에 감염되었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 실제로 말라리아로 인해 사망할 경우, 독특한 증상 때문에 독살당한 것으로 오인되는 경우가 많다.
그의 미이라를 조사한 결과, 그는 구순구개열로 인한 언어 장애자였고 왼쪽 다리의 내반족과 오른쪽 다리의 뼈 질환으로 걷기가 힘든 장애인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집트 왕조가 대대로 부녀간, 의붓남매간 근친혼을 장려한 결과, 열성 유전자가 계속 내려오면서 이런 비극을 낳고 말았던 것이다. 현재에는 여러 가지 유전적 질환으로 면역 체계가 약했던 투탕카멘이 다리 골절상을 입은 상태에서 말라리아에 걸려 사망한 것이 아닌가 하고 추정하고 있다.
그 외에 발의 장애는 선천적인 것이 아닌 전투 중에 입은 상처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것은 투탕카멘이 많은 전투에 참가했으며 무릎의 골절상 주위에 파상풍과 염증의 흔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몸이 불편하였기 때문에 최전방에서 싸웠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스러운 점이 있다.
그의 무덤에 써진 문구부터가 "왕의 죽음의 비밀을 밝히는 자를 축복하리라"이니, 당시로서도 사인(死因)이 애매했을 수 있다. 투탕카멘의 저주 어쩌고 하는 글귀에 흔히 나오는 경고문 "왕의 영원한 안식을 방해하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는 의례상 새기는 말이다. 이 글이 새겨진 바로 옆에 쓰여 있는 게 저 문구.
투탕카멘의 미이라에서 발견된 외상을 통해 전차 경주 중 사고가 사인일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의 선조들 때부터 거듭되어 오던 근친혼의 폐해로 생긴 유전병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거기다 황금 마스크의 미남 모습과는 달리 뻐드렁니에 선천성 내반족이 있어 지팡이 없이는 걷지도 못하는 중증 장애인이었다고 한다. 사산되었다는 두 딸도 유전병으로 보이며 설령 성장했다고 해도 오래 살지는 못했을 것이다.
거기다 최근 황금 마스크의 턱수염이 실수로 떨어지자 접착제로 붙인 사실이 밝혀졌다.

3. 사후


객관적으로 보면, 투탕카멘은 자손도 없었고 너무 어려서 딱히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죽은 탓에 그야말로 무게감 없는 파라오였다. 20세기에 들어서 일어난 그 대발견이 없었다면, 투탕카멘을 기억하는 것은 이집트의 역사학자들 정도밖에 없었을거고, 그들도 18왕조의 후반기의 재위 기간이 꽤 되었지만 별 비중이 없는 파라오로 간단히 짚어넘기는 수준에 머물렀을 거다. 중국의 역사를 보자면, 어려서 죽은 탓에 시호도 받지 못한 소제(小帝) 같은 이들과 비슷한 수준의 비중이다.

3.1. 고고학의 전설


그러나 1922년 11월 4일에 왕가의 계곡에서 엄청난 발견이 있었다. 투탕카멘의 무덤(KV62)이 '''거의 도굴되지 않은 거의 완전한 형태로''' 발견되었던 것이다. 다만 여기서 '거의'라고 한 이유는 투탕카멘의 무덤도 도굴당한 흔적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21] 입구에 봉인을 3개 해놓았는데, 2번째 봉인은 발굴 당시에 이미 뚫려 있던 것이다. 투탕카멘 왕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도굴꾼이 침입했는데, 무덤을 지키던 경비대에 걸려 미수로 끝났으며, 마야라는 관리와 사제들이 다시 무덤을 봉인했다는 기록이 전해져온다.[22] 여러 유물에서 도굴의 흔적이 남아 있고 방들이 대체로 어지러져 있었지만, 그 정도가 타 파라오들의 무덤과 비교할 수준이 못 된다. 2번의 도굴 시도에서 도굴꾼들은 가벼운 귀금속들과 귀한 연고 정도를 가지고 간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로 무덤에서 발견된 석상에서는 귀금속이 모두 벗겨져 사라진 채 발견되었다.
투탕카멘의 무덤을 발견한 사람들은 영국의 하워드 카터와 그의 재정 후원자, 영국 귀족 카나본(George Edward Stanhope Molyneux Herbert, 5th Earl of Carnarvon ,1866~1923)이다. (영국 드라마 다운튼 애비에 나오는 저택이 그의 소유지였다.) 이 무덤을 발굴하기 전에도 하워드 카터는 카나본의 후원을 받아 다수의 발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으나, 이미 도굴된 무덤들 뿐이라 큰 성과가 없었다. 그런데 카터는 인근 무덤에서 투탕카멘의 장례식에 쓰인 것으로 보이는 유물 조각들을 찾아내어, 투탕카멘의 존재와 더불어 그의 무덤이 왕가의 계곡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이전에 발굴을 하던 시어도어 데이비스는 '''이제 왕가의 계곡에는 무덤이 없다!'''라고 선언하고 발굴권을 넘겼고, 카터는 '''이번이 마지막 발굴'''이라는 부탁을 해 카나본에게 간신히 자금을 끌어올 수 있었다. 그 마지막 발굴이 세기적인 발굴이 된것이다...포기하지 않고 투탕카멘의 무덤을 발굴하여 이집트의 아이콘이 되었으니 하워드 카터에게 감사해야 할것이다.
카터는 람세스 2세와 람세스 6세 무덤 사이에 있던 곳에 주목했는데 이 곳은 수상했지만 그동안 발굴이 없었던 곳이었다. 이 자리는 원래 람세스 6세 무덤을 만들던 노동자들이 기거하던 오두막이 있던 곳이었는데 카터는 이 곳을 파내려 가다가 마침내 무덤으로 향하는 계단을 발견했다. 정확히는, 카터의 일꾼들중에 일꾼들이 마실 물을 매일 항아리에 담아서 가져오는 일을 하는 '후세인 압델라술(Hussein Abdel-Rassoul)'이라는 소년이 있었는데, 그 소년이 항아리가 넘어지지 않게 하려고 땅에 조그만 구멍을 파다가 무덤으로 향하는 제일 윗계단을 발견하였다. 이 후세인 압델-라술은 이 명성 덕에, 이 무덤 입구에서 관광객들을 상대로 사진 모델을 하면서 받는 돈으로 평생 먹고 살게 되었다.
계단을 발견한 카터는 도굴당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과 동시에 내부에 뭐가 있을까 호기심도 들었지만 5년 동안 막대한 돈을 투자하면서 자신을 믿고 후원해준 후원자인 카나본과 같이 봐야한다는 마음으로 꾹 참고 그 날, 카이로로 가서 지병으로 본가에서 요양하고 있던 카나본에게 전보를 치기 위해 한 걸음에 달려가 전보를 보냈다.

'''마침내 왕가의 계곡에서 엄청난 발견을 이루어냈습니다. 매우 아름다운, 아직까지 봉인이 남아 있는 무덤입니다. 카나본 경께서 도착하실 때까지 재봉인 해 놓겠습니다. 축하드립니다.'''

1922년 11월 6일, 하워드 카터가 보낸 전보를 받아든 카나본은 서둘러 이집트로 갈 준비를 했다. 비록 카나본은 오랫동안 안고 있던 지병으로 인해 오늘 내일 하는 상태였지만, 봉인이 멀쩡한 무덤을 발견했다는 기쁜 소식에, 아픈 몸을 이끌고 그의 딸과 함께 당시 교통으로 꽤 빠른 3주만에 이집트로 왔다. 이렇게 무리하게 이집트로 온 것으로 인해 몸이 더욱 나빠졌다는 말이 설득력 있게 들리는 이유다. 그래서 투탕카멘의 저주에 대하여 비관적인 의견으로도 무시당한다.
당시 카터는 그가 발견한 것이 진짜로 파라오의 무덤인지, 아니면 단순한 부장물 창고인지 확신하지 못하는 상태였는데, 비록 후원자가 있는 상태에서 봉인을 열기 위해 문은 열지 못했지만, 지하로 통하는 통로를 보고 무덤일 것이라는 심증을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
마침내, 1922년 11월 26일, 영국에서 날아온 카나본과 그의 딸, 그리고 발굴 관계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카터는 끌을 이용해 통로의 봉인에 작은 구멍을 뚫었고, 그 구멍에 램프를 집어 넣고 수천 년 만에 열리는 무덤의 안을 본 순간...

뭔가 보이나? (Can you see anything?) (카나본)

네, 아주 아름다운 것들이 보입니다... (Yes, Wonderful things...) (카터)

과연 하워드 카터가 말한 대로, 투탕카멘의 무덤에서는 사진에서 보는 화려한 황금 마스크와 투탕카멘의 미라를 비롯한 수많은 유물이 발견되었고, 덤으로 투탕카멘의 저주라는 도시전설까지 떠돌았다. 고작 9년을 재위(在位)한 별 볼 일 없는 파라오였던 투탕카멘은 그 많은 이집트 파라오를 전부 다 제치고, 단숨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파라오'''가 되었다. 사실 무덤이 도굴당하면 유명한 왕이라도 후손들이 보기엔 그냥 그 왕일 뿐이다. 그 무덤이 온전하게 후세에 전해지면 그 무덤의 주인은 역사에 대서특필된다. 실제 우리나라도 그렇다.
사실 이 규모가 작고 별볼일없는 무덤은, 재위 기간이 짧고 별볼일없는 파라오 투탕카멘에게 걸맞은 것이다. 투탕카멘이 갑자기 죽어버리는 바람에, 그의 무덤은 사실 다른 귀족을 위해 만들어 놓은 무덤을 이용한 것이다. 투탕카멘의 뒤를 이은 아이의 귀족 시절 무덤이었다는 설이 유력하며, 거기다 아이가 투탕카멘의 원래 무덤을 차지했다는 설이 있다.[23] 심지어 최근 연구에 따르면 투탕카멘의 상징과도 같은 황금 마스크조차 네페르티티의 이름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본래 투탕카멘을 위해 만든 것이 아닌 네페르티티를 위해 만들어진 것을 수정해 사용한 것일 가능성이 높을 정도다. 그 때문에 왕에 걸맞지 않게 무덤의 크기가 매우 간소하다. 하지만 그 간소하다는 무덤에서 나온 유물들이 이집트 박물관의 1개 층을 모두 채우고도 남을 양이다. 즉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이집트 고대사를 다룬 ABE 전집 5권 '파묻힌 세계'에서는 "투탕카멘 정도의 약소 파라오의 무덤에서 나온 유물이 이 정도인데, 만약 신왕국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던 람세스 2세의 무덤이 도굴당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대단했을까!"라고 아쉬워하기도 한다.
하지만 도굴이 아니더라도, 당시에는 전임자의 무덤을 털어서 자기가 쓰는 경우가 아주 흔했다. 예를 들어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에서는 19왕조 메르넵타의 석관과 20왕조 람세스 9세의 반지가 나왔을 정도다. 어쨌든 투탕카멘의 무덤이 말짱하게 남은 건 정말 운이 좋았던 것이다. 심지어 19왕조의 재상이었던 라모세의 무덤도 투탕카멘 왕의 것보다 크다. 하지만 투탕카멘은 호렘헤브가 이단자 파라오의 목록[24]에 넣는 바람에 이후에는 존재가 잊혀졌고, 마야라는 관리가 도굴 미수 후에 제대로 봉인을 했으며, 결정적으로 그의 무덤 위에는 20왕조 람세스 6세의 무덤을 짓기 위한 공사에 참여한 노동자들을 위한 숙소가 지어지는 바람에 완벽하게 은폐될 수 있었다. 크기도 크기지만, 설마하니 집 아래에 무덤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진 않았기 때문인 듯하다. 이걸 찾아낸 카터도 대단한데, 그는 인근 무덤에서 나온 작고 조잡한 유물들을 통해 투탕카멘의 존재를 직감하고 마침내 찾아내게 된다.
사실 시어도어 데이비스라는 자가 왕가의 계곡에서 더 이상 새로운 무덤을 없을 거라고 큰소리치고 발굴권을 카터에게 넘겼는데... 투탕카멘의 무덤은 데이비스가 마지막으로 발굴한 무덤에서 고작 '''2m''' 떨어진 곳이었다. 그나마 데이비드에겐 다행인 게 카터가 이 무덤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데이비스가 죽은 후였다. 사실 데이비스가 1914년 이 무덤 발굴을 멈춰야 했던 것도 병으로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 다음 해인 1915년, 78살로 세상을 떠났다. 실제로 데이비스의 유족들이 투탕카멘 무덤 발굴에 대하여 안타까워했었다.
여담이지만 그의 무덤을 의도치 않게 보호하게 된 람세스 6세의 무덤(KV6)은 정말 화끈하게 털렸다. 사실 이 무덤은 원래 그의 전임자이자 조카였던 람세스 5세의 무덤이었다. 하지만 람세스 5세가 요절한 후 람세스 6세가 무덤을 뺏어 확장한 뒤 자신이 사용했는데 이 시기 내분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람세스 5세의 자리를 찬탈했다는 설도 있다. 람세스 6세의 석관은 도굴꾼들에 의해 박살나고 보물을 찾는다고 뒤집어 놨을 정도로 무덤 내부는 엉망이다. 1898년 아멘호테프 2세의 무덤(KV35)에서 발견된 그의 미라는 얼굴 정면이 도끼로 깊이 찍혀 망가져 있고 몸통은 말 그대로 오체분시되어 없어지거나 훼손된 부위는 다른 미라들의 부위를 재활용(?)하여 땜질했을 정도로 상태가 심각하다. 가령 그의 목 부분에서는 어느 여자 미라의 골반이 나왔다고. 참고로 람세스 6세의 박살난 석관 뚜껑에 있던 얼굴 부분은 대영박물관에 있다.
'''2016년, 투탕카멘의 단검에 대한 조사가 있었다.''' 이거 재질이 철이다. 이탈리아 대학(Milan Polytechnic and Pisa University)과 이집트 박물관의 학자들은 이 단검에 대한 성분 조사를 하였는데 운석에서 볼 수 있는 성분이 검출되었다. '''이 단검은 운석으로 제작된 것이다.'''

3.2. 이집트의 돈줄


만약에 19세기에 이 유물들이 발굴되었더라면, 투탕카멘 유물 상당수는 이집트가 아닌 영국 대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집트 측은 투탕카멘 유물을 1점도 해외 반출을 못하도록 막아버렸다. 정확히는 이집트 당시 카이로 박물관장 이븐 하지 라우드가 결사반대했고, 그는 별별 이유를 대가면서 영국이 가져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것도 아주 꼼꼼하게 감시했는데 지금까지 남은 투탕카멘 왕 발굴 현장 사진이나 미이라를 조사하는 사진을 보면, 반드시 이집트인이 하나씩은 사진에 찍혀있는데, 바로 라우드가 믿고 보낸 감시원들 혹은 조수들이다. 그는 한점 한점마다 죄다 번호를 매기고, 어느 연구현장에서건 얼마나 시간이 걸리든, 이게 모두 남아있는지 세세하게 조사를 한 다음에야, 연구를 끝내고 외국 학자들이 이집트를 나가게 조치를 취했을 정도였다. 그의 활약으로 투탕카멘 유물은 고스란히 이집트에 남아 이집트의 돈줄이 된다.
유적을 발굴해내고도 남 좋은 일만 시켜준 카나본 경은 안습이긴 하지만 그 덕분에 인류와 고고학에 큰 족적을 남겼으니 나름 명예라고 할 수 있다. [25] 사실 카나본 경은 투탕카멘만 이집트에 내줬을뿐, 생전에 여러 파라오 유물을 개인 소유로 수집해뒀으며 그의 후손은 가문 소유의 대저택에서 이를 유료로 전시[26]하고 있다. 전시 소개 영상
1922년 당시 세계적인 화제를 몰고온 투탕카멘 보도로, 영어로 애칭인 투티라는 이름이 유행해, 당시 미국이나 영국에선 갓 태어난 남자아이에게 투티란 이름을 많이 지어줄 정도였다고 한다. 그만큼 이걸 구경하러 전 세계적으로 사람들이 많이 왔다.
현존하는 몇 안되는[27] 고대 이집트 파라오 마스크인 투탕카멘 황금 마스크(위 사진에 나온)는 해외 전시 대여비용만 해도 400~500만 달러가 넘는 거액이며, 저거 말고도 황금관에서 파라오 마차와 의자에서 온갖 유물들도 각자 대여 비용이 세다. 미국에서 열린 투탕카멘 특별 전시회만 해도 대여 비용으로 3,000만 달러나 썼다고 한다. 물론 대여한 박물관도 이걸 보고자 찾아온 관람객들과 스폰서들 덕에 그만큼 이득은 건졌다. 그러다 보니 이집트 측의 감시도 엄청났는데, 1996년 하마터면 박물관에서 도난당할 뻔하다가 적발된 일도 있다.
2011 이집트 혁명 때 카이로에 위치한 이집트 박물관에 폭도들이 난입해 투탕카멘의 목상 2점을 비롯한 고대 유물 수십 점을 훔쳐 달아났다. 두 달 뒤 도난당했던 투탕카멘의 목상 중 '작살을 든 투탕카멘 입상'이 가방에 담긴 채 발견되어 회수되었지만, 나머지 한 점의 목상과 함께 같이 사라진 기타 유물들은 아직도 행방이 오리무중이다.
여담으로, 투탕카멘 무덤의 유물들 중에는 한 다발의 꽃송이도 있는데 왕비인 안케세나멘이 올려 놓았다는 설이 있지만 확실치는 않고 아마 미스터리일 것이다. 하지만 생전에 그들은 이복남매에 정략결혼에 가까웠음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금슬이 좋았다고 하며, 실제로 무덤 속의 부장품들도 이들 커플이 항상 함께 등장한다.[28]
투탕카멘의 미라는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지 않고 그의 무덤 속, 뚜껑이 유리로 대체된 외부 석관 속에 자신의 모습을 본딴 황금 관 속에 담긴 채로 여전히 안장되어 있다. 지금까지 무덤을 나온 적은 딱 두어 번 정도였다고. 그것도 무덤 밖 몇 미터 정도에서 검사를 진행한 것이 전부다.
2011년 국립과천과학관에서 투탕카멘 전시회를 했었는데 위에 언급된 보물 등등 투탕카멘 하면 떠오르는 유물들이 거의 대부분 전시되어 있고, 전실, 현실, 보물의 방 등등의 모습을 거의 완벽하게 구현해 놓았었다. 전 세계 순회 전시회로 아시아에선 한국이 처음이었다고. 하지만 이건 모두 '''철저한 고증을 거쳐서 제작한 레플리카, 즉 가짜다.''' 즉, 투탕카멘의 유물 진품을 보려면 '''이집트 가라'''는 소리. 이집트 관광청은 애초에 목적이 "관광객들의 관심이 실제 여행으로 이어지게 하려고"라고 확실히 밝혔다.
2015년 11월 28일, 투탕카멘의 묘실 뒤쪽에 비밀의 무덤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이집트 고대유물부 장관의 기자회견이 있었다. 네페르티티의 무덤으로 추정된다고.
2015년 12월 17일, 9주간의 과정을 거쳐 가면에서 떨어져 나갔던 턱수염의 복원에 성공했다. 이 턱수염은 고대 이집트에서 파라오가 죽은 뒤에는 오시리스와 함께한다는 정체성 및 신성성을 부여하는 상징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관련 뉴스(영문)
2016년 5월 13일. 투탕카멘의 묘실 뒤쪽 비밀의 방은 뻥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뉴스가 기재되었다. 관련 뉴스.
2018년 5월 8일. 지하 투하 레이저로 묘실을 탐색한 결과 비밀의 방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밝혀졌다. #(BBC 코리아 뉴스 링크 기사)

3.3. 투탕카멘의 마스크


투탕카멘하면 처음 떠오르는 것으로 사실상 모든 부장품의 상징이다. 세기의 발견으로 이집트의 아이콘이 되었다.
황금 이외에도 여러 가지 재료가 사용되었다. 실제로 가까이서 보면 파란색 부분도 여러 색상을 갖는다. 가장 진한 색은 눈 주변과 눈썹 부분으로, 이곳은 청금석으로 되어 있다. 다른 파란 무늬는 파이앙스(faience)[29], 터키석[30], 아마조나이트 등을 활용하여 제작되어 있다. 이외에도 석영, 흑요석, 칼세도니 등이 사용되어 있다.
최근에는 마스크에서 네페르티티의 이름이 수정된 흔적이 발견되어 무덤이나 관과 마찬가지로 마스크까지도 본래 투탄카멘을 위해 만든 것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이는 투탄카멘의 왕권이 상대적으로 약했거나, 생전에 무덤을 조성하거나 파라오를 위한 부장품을 처음부터 만들만한 여유가 없이 누구도 예상 못한 시점에 급사했음을 시사한다.[31]

4. 기타


  • 거의 도굴당하지 않은 왕릉이 극적으로 발견되어 유명해졌다는 공통점으로, 한국에선 무령왕릉의 극적인 발굴로 주목받은 백제 무령왕에 빗대는 경우도 종종 있다. 다만 투탕카멘이 정말로 재위기간에 별 행적 없이 어려서 요절한 왕인 반면, 무령왕은 백제의 중요한 한 시기를 풍미한 중흥군주라는 차이가 있다.
  • 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군의 T급 잠수함 P.311이 원래대로라면 HMS 투탕카멘이 됐어야 했으나 지중해에서 1943년 실종되어 받지 못했다. 이후 P.311은 2016년 이탈리아의 잠수부에 의해서 발견되었다.
  • 만화 왕가의 문장에 나오는 남주인공 멤피스 왕의 모델은 투탕카멘으로 추정된다. 여주인공의 타임 슬립이 점토판의 저주 때문이며, 여기에 나오는 멤피스 왕도 상당한 미소년이다. 다만 만화의 대사 가운데 투탕카멘과 동일인이 아니라는 선을 긋는 부분은 존재한다.
  • 유물 중 황금 마스크가 워낙 인상적인 데다가, 일본어로 가면을 "카멘"이라고 읽기 때문에 개그만화 등지에서 가면이 등장하는 부분과 자주 엮인다.
  • 유희왕어둠의 유우기의 모티브라고 한다. 정확히는 캐릭터는 투탕카멘이 모티브지만, 역사에서 이름이 지워졌다는 부분은 아버지인 아케나톤이 모티브라고 한다.
  • J9 시리즈카멘카멘이 이 파라오를 모티브로 했을 가능성이 높다.
  • 이진영LG 트윈스 시절 때 2루땅볼을 하도 많이 쳐서 '투땅카멘'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 개그만화 보기 좋은 날에는 "투탕카멘부"라는 뭔지 알 수 없는 해괴한 부활동이 존재한다.
  • 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서는 투탕카멘의 황금마스크가 고고학 계열 발견물로 등장한다.
  • 가면라이더 고스트에서 15인의 위인 중 한 명으로 꼽혔다. 근데 작품 내에서 말하는 위인(목숨을 불태우며 살았던 사람들)의 기준과 거리가 거의 무관하다.
  • 도미네이션즈에서 투탕카멘 마스크가 전설 유물로 등장한다.
  • 동물의 숲 시리즈 에서 착용 가능한 마스크로 등장한다. 착용 시 이집트 풍의 짧은 효과음이 재생된다. 이 마스크에 특수기능(?)이 있는데 바로 캐릭터가 달리는 중 넘어질 확률이 2배가 되는 효과가 있다(...) 착용시 넘어질 확률이 두배가 된다는 점에서 어찌보면 불행이라 볼 수 있으니 투탕카멘의 저주를 의식한 듯 하다. 그 외에는 착용 시 머리가 무거워져서 자주 넘어진다는듯. 이를 이용해서 놀동숲 시절에는 상해보험을 들었을 경우 넘어진걸로 보험금을 타먹을 수 있다. 하지만 그래봤자 보험금은 고작 100원이니까 그다지 유익한 수입원은 아니다..

[1] 또는 Tutankhamon, Tutankhamun이라고도 한다. 이집트 상형문자히브리어 처럼 모음을 생략해버린 구조인지라 현재는 정확한 발음을 알 수 없다. 따라서 어떻게 읽는지에 대해 조금씩 다른 학설이 존재한다. Amen Amon Amun 모두 이집트의 주신 아문=라를 가리킨다.[2] 미라 조사 결과에서 나온 키이다.[3] 이집트 역대 파라오의 재위 기간은 현존하는 여러 왕력 등을 참고로 역산한 것이라 이설이 있을 수 있다. 여기서는 영문위키 2011.10.27 기사의 기술을 따름.[4] 이집트 상형문자의 음가를 컴퓨터에 나타내기 위해 약속된 음역 표기법이 있는데, 이를 따라 표기할 경우 투트–앙크–아멘은 twt–anX–imn이 된다. twt는 "형상, 현현, 나타남(또는 나타난 것, 즉 "이미지")"이라는 뜻이고, anX는 생명과 관련된 다양한 뜻이 있지만 이곳에서의 쓰임은 "살아있는"이라는 수식어인데, 이집트어에서는 수식어가 피수식어 뒤에 위치하기 때문에 twt–anX는 즉 "살아있는 형상"이라는 뜻이 된다.("맛있는 사과"라는 말이 고대 이집트식으로는 "사과 맛있는"의 형태로 표현되는 셈이다.) 한편, imn은 신의 이름으로서, 여기서는 twt와 쓰여 "아멘의 이미지"라는 의미인데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이집트어의 속격 표현법에 대해 알아야 한다. 고대 이집트어에도 형용사와 전치사가 있으며, 이 전치사 중에는 n(𓈖. 음가가 n이라 n으로 표기한다.)이라는 전치사가 속격을 나타내주는 속격형용사의 역할도 한다.(속격전치사가 아니라 속격형용사인 이유는 오타가 아니고, 고대 이집트어에서 형용사는 피수식어의 문법적 성과 인칭에 따라 형태가 변하는데 이 속격의 뜻을 나타내는 n도 그에 따라 형태가 변하기 때문에 형용사로 봐서 그렇다. 또한, "도"라는 보조사를 쓴 것은 n은 속격형용사의 뜻 말고도 굉장히 다양한 뜻으로도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중 한 역할이 속격형용사의 역할일 뿐이다.) 따라서 "아문의 이미지"라는 말은 "twt n imn"으로 표현된다. n을 영어의 of라고 생각하면 쉽다. 그러나 이 속격 형용사 n은 표기할 때 생략이 일어나기도 하는데 이처럼 속격 형용사가 생락된 형태를 "직접 속격"이라고 하며 이 때의 표기는 "twt imn"이 된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twt anX imm은 이 twt imm이라는 문형에 twt를 수식해주는 수식어 anX가 추가된 형태로서, 그렇기 때문에 그 뜻이 "아문의 살아있는 형상(이미지)"이 되는 것이다. (추가로, 속격 형용사라는 용어는 이집트학을 연구하는 이들이 대부분 서양인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실정에 맞춰 번역된 것에 불과하다. 한국어에서의 형용사와 영어에서의 형용사는 서로 다른 것을 지칭한다는 것을 알텐데, 이 속격 형용사에서 형용사라 함은 영어에서의 형용사를 일컫는 것이다. 즉, (넓게 보았을 때) 한국어에서의 수식어에 해당한다.)[5] 아케나톤이라는 이름도 태양신 '아톤'을 모신다는 의미로 개명한 것이다. 본명은 아버지 아멘호테프 3세와 같은 아멘호테프였으므로 아멘호테프 4세로 즉위하였다.[6] 그녀의 미라는 KV35 무덤에서 발견된 The Younger Lady이다. 왼쪽 뺨에 심한 상처가 있는데, 20대의 젊은 나이에 살해 또는 사고사로 죽은 듯하다.[7] 아케나톤의 왕비 네페르티티의 딸 안케센나멘과 결혼했기 때문에 사위다. 기존에는 아케나톤의 동생으로 보는 설도 있었으나, 2010년 DNA 검사와 여러 검사를 통해 아케나톤의 아들로 그의 어머니는 아케나톤의 여동생(네베타흐 또는 베케타텐으로 추정)으로 밝혀졌다.[6] 네페르티티의 소생인 안케센나멘과는 이복 남매로 아케나톤의 여동생 미라는 다시 아케나톤의 아버지 아멘호테프 3세와 어머니 티이 왕비와의 DNA 대조 결과 결국 둘은 친남매로 확인되었다. 즉, 아케나톤은 투탕카멘의 아버지이자 고모부가 되며 어머니는 어머니와 동시에 고모가 된다.[8] 투탕카멘과 안케세나멘의 나이 차이는 대략 9~10세 정도로 추정된다. 거기다 투탕카멘과 결혼할 당시 안케세나멘은 출산 경험이 있었다.[9] 한 명은 6개월, 한 명은 4개월로 추정된다. 근친상간 때문인지 선천적으로 심한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며, 이 장애가 사산의 원인이 됐다고 추정된다. 사산된 태아임에도 불구하고, 왕녀이기에 모두 미라로 만들어지고 마스크를 씌우고 작은 관에 넣어져 아버지의 무덤에 합장되었다. 이 딸 중에 하나라도 태어나 살아남았다면 18왕조의 역사가 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살아남았다고 해도 유전병으로 오래 살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후 투탕카멘이 죽고 안케센나멘의 죽음으로 18왕조는 대가 끊기고 만다.[10] 아이와 호렘헤브의 즉위로 18왕조가 끝났다고 봐야 되지만, 아이는 왕족이었던 안케센나멘과 결혼했고, 호렘헤브는 아케나톤의 처제이자 아이의 딸로 추정되는 무트노지메트와 결혼했기 때문이다. 고대 이집트는 모계 사회였는데, 아이와 호렘헤브가 후사가 없이 죽고 람세스 1세가 즉위하면서, 19왕조가 개창한 것이다.[11] 미인으로 유명한 네페르티티 왕비의 소생이다. 풀이하면 안케즈-엔-아멘. 본래는 안케즈-엔-파-아톤으로 '아톤을 위한 삶'이라는 의미였으나, 이후 아문-라(아몬라)의 사제들이 권력을 잡으며 아톤 신앙이 밀려났고, 결국 개명할 수밖에 없었다.[12] 이집트에서는 왕이 친누이든 의붓누이든 남매인 왕녀와 결혼하여 계승권을 인정받는 관행이 있었다. 나중에 람세스 2세는 자기 큰딸이 자라자 큰딸도 후비로 맞아들여 그 사이에서 외손자 겸 아들인 자식도 얻었다.[13] 19왕조 세티 1세(람세스 2세의 할아버지)의 신전에 있는 "아비도스 왕명록"에서는 아멘호테프 3세 다음에 바로 호렘헤브로 넘어간다.[14] 다른 해석도 있는데, 아이가 안케세나멘의 외할아버지이며 혈연에 의해 제위를 이었다는 해석도 있다. 현재 남아있는 아이와 안케세나멘의 족보가 애매하게 표현되어 이런 견해차가 생겼다.[15] 고대 이집트는 모계 사회라서 아들이 없으면 딸의 배우자, 즉 사위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도 했다. 그래서 히타이트에서는 이 참에 이집트를 먹을려고 했던 것이다. 물론 그와 별개로 여왕들도 몇 명이 있긴 했다.[16] 만화 하늘은 붉은 강가에서는 이 설을 채택했다.[17] 아이와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는 설, 파라오를 계승한 아이의 손에 의해 용도폐기 당하고 죽었다는 설, 재혼 이후 이름을 바꿔서 사람들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설, 심지어 호렘헤브와 결혼했다는 설까지 다양하지만, 고고학 상의 다른 발견이 있기 전까지는 영구미제일 듯싶다.[18] 다만 실질적인 화근은 18왕조 투트모세 3세 시절에 얻은 아시아 영토까지 히타이트 세력이 뻗치기 시작했기 때문에 일어난 충돌이다.[19] 이 편지의 내용을 보면 제난자는 이집트에서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는 히타이트인들의 추측이라서, 실제로 그렇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이집트에 도착한 후에 사망한 것은 사실인 듯하다.[20] 발굴 도중 손상됐다면 조각이 미라 내에 남아있어야 하지만 왼쪽 갈비뼈들의 경우 조각이 발견되지 않았다.[21] 사실 역대 파라오 중 도굴당하지 않은 상태로 발굴된 무덤은 타니스에서 발견된 21왕조의 프수센네스 1세 '''단 한 곳'''뿐이다. 그러나 21왕조의 이집트는 이미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기에, 투탕카멘의 무덤에 있는 유물과 비할 바가 못 된다. 오히려 전 왕조의 무덤을 약탈해서 재활용한 부장품들이 다수에 무덤 내부가 침수로 인해 상당히 많이 훼손되었다. 더구나 당시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였기에, 이를 발견한 프랑스의 고고학자 피에르 몽테는 하워드 카터에 비해 명성이 상당히 덜하다.[22] 다만 관리들이 부장품 정리를 성의 없이 해서, 영 좋지 못한 상태로 발견된 유물들도 있었고, 원 위치에서 벗어나 있던 유물들도 있다.[23] 그게 서쪽 골짜기에 있는 KV23(또는 WV23)인데 아이의 무덤은 그의 모습이 그려진 벽화가 모두 깎이고 관이 박살났으며, 미라도 어디 갔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도굴꾼들에게 박살났다. 부장품도 전혀 없고 정말 무덤 내부가 썰렁하다. 하지만 아이의 무덤은 훼손이 워낙 심해, 도굴이라기보다는 누군가 계획적으로 파괴한 냄새가 심하게 난다. 보물에 환장한 도굴꾼들이 미라 속 귀금속을 찾는다고 훼손하거나 관 아래 보물을 찾는다고 박살내는 경우는 꽤나 많았으나, 굳이 무덤 벽화를 이렇게 훼손할 이유가 없다. 어쩌면 아래의 '치세 조작'과 관련있을지도 모른다.[24] 아텐 신앙에 관여된 파라오들로 아케나텐, 스멘크카레, 투탕카멘, 아이가 이에 포함된다. 호렘헤브는 이 네 명을 존재하지 않았던 파라오로 만들고 아멘호테프 3세가 죽은 뒤 바로 자신이 즉위한 걸로 조작했다. 따라서 이 네 파라오의 치세 기간도 자신의 치세 기간에 포함시켜 자신의 재위 기간이 '''59년'''이라고 선언했다. 실제로는 30여년이었다는 게 정설인데 아케나텐을 제외한 나머지 파라오들의 치세가 짧아 큰 영향은 없었다.[25] 참고로 카나본 가문은 대대로 상당한 부와 명예를 축적한 명문가다.[26] 수익금은 모두 저택의 유지 및 수리에 쓰인다. 1차 세계대전 때는 부상당한 군인들을 위해 병원으로 내줬을 만큼 유서 깊은 곳이지만 건물 자체가 17세기에 지어졌다보니 유지비용이 상당하다고.[27] 사실 의외로 꽤나 많은 파라오들의 마스크가 남아있는데 그 중에서 황금 마스크는 프수센네스 1세, 아네메모페, 세송크 2세 등의 마스크도 남아 있으니 투탕카멘의 마스크가 유일한 건 아니다. 하지만 이 파라오들은 모두 말기 왕조의 파라오들이라 존재감이 희박하고, 한창 몰락하던 시대라서 마스크 수준이 극히 조잡하다.[28] 후술되는 대항해시대 온라인의 퀘스트에서는 이 설을 따랐다. 안케세나멘이 수레국화를 올려놓으며 그를 기렸다는 내용.[29] 유리와 구리를 섞어만든 세계 최초의 인조 보석이다.[30] 터키석 특유의 하늘색이 특징.[31] 고대 이집트에서는 선대 파라오나 왕족들의 기념물이나 부장품의 이름을 긁어내고 새로 자신의 이름을 새겨 자신의 기념물로 만들거나 자신의 부장품으로 쓰는 경우가 많았다. 다만, 이 경우는 부장품을 재활용했다기보다는 네페르티티를 위해 제작되던 마스크를 투탄카멘이 급사하자 대상을 변경했을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