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루크 1세

 


'''이집트 왕국의 역대 국왕'''
1대
푸아드 1세

2대
'''파루크 1세'''

3대
푸아드 2세
[image]
روه مو هيون بالإصبع/Fārūq ij nua laon.
Faruk,Farouk 1. 1920년. 2. 11 ~ 1965년. 3. 18.
재위 - 1936년 4월 28일 ~ 1952년 7월 26일.
1. 개요
2. 국왕 시절
3. 퇴위 이후
4. 기타


1. 개요


'''이집트의 사실상 마지막 왕.'''[1]

2. 국왕 시절


사실상 영국 식민지나 다름없던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푸에드 1세(1868~1936)가 죽고 16살에 제위를 이어받았다. 하지만 이집트/역사 항목에 나오듯이 이집트는 영국 식민지나 다를 거 없었다. 18살 때 파리다 왕비와 결혼하여 공주만 셋을[2] 얻었고, 28살에 이혼했다가 1951년에 재혼하면서 아들 푸아드 2세를 얻게 되었다.
1942년에는 영국의 압력에 굴복하고 영국 눈치를 봐야했기에 허수아비 왕으로서 군림하던 중 1차 중동전쟁에서 패배하면서 군부의 반발이 이어진다. 그런 와중에 1952년 가말 압델 나세르가 주도하는 군부에게 퇴위당했다.
이 당시, 재산을 거의 놔두고 몸만 유럽으로 떠났지만 그래도 머리를 써서 몇몇 재산 일부만을 가져가게끔 허락을 맡았는데 그것이 바로 와인 상자였다. 이 상자안에 와인과 같이 거액을 상당히 챙겨서 유럽으로 가서 살게된다.

3. 퇴위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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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에서 아내 나리만 사데크(1934~2005, 왕비가 된 지 1년 만에 아들을 낳고 그 해 퇴위)와[3] 아들인 푸아드 2세(1952년생으로 지금도 생존)[4]와 같이 찍은 사진.
한 가득 챙긴 재산 덕분에 터키 공화국 수립 후 모국에서 추방되어 몰타에서 사망한 터키 오스만 제국의 마지막 술탄인 메흐메트 6세나 카다피의 군부 쿠데타와 이란 혁명으로 왕정체제가 전복되면서 해외로 쫓겨나 궐석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이후 타국에서 노환과 으로 쓸쓸이 사망한 이집트의 이웃나라 리비아 알 세누시 왕조의 마지막 국왕인 이드리스 1세와 이란 팔라비 왕조의 마지막 국왕인 팔라비 2세,[5] 아들 카부스의 쿠데타로 추방당해 망명지 영국에서 쓸쓸이 죽은 오만 알 부사이디 왕조의 전 술탄 사이드 빈 타이무르, 쿠데타를 일으킨 반란군 세력들에게 총탄 세례를 받고 살해당하고 조리돌림 당한 이라크 하심왕조의 마지막 국왕 파이살 2세 등 다른 중동권 국가의 여러 폐왕들과 달리 꽤 여유롭게 잘 살 수 있었다.
엄청난 대식가였고 종교는 술을 금한다는 이슬람이었지만 와인이나 맥주를 무척 즐겨 마셨다. 한 끼 식사에 세 병의 와인을 족히 비울 정도로 술을 좋아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특히 파루크 1세는 국왕 즉위 이후 어느 시점에서부터 급격히 비대해지기 시작하였는데....여기서 파루크 1세가 비대해지기 이전의 사진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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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랬던 파루크가 그놈의 식습관 때문에 본문 서두의 비대한 이미지로 역변.
그의 누이동생 파우지아 시린은 이란 국왕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의 첫 번째 아내였기에 (다만 이들은 1948년에 이혼했다.) 한때는 이란으로 가서 살려고 했지만 레자 샤가 입국을 거절해서 갈 수 없었다. 이렇게 문전박대를 당하자 파루크 1세는 "그놈이라고 언제나 그 왕위를 유지할 지 아느냐?" 이라며 비아냥거렸는데 정말로 1979년 이란 혁명에 의해 레자 샤는 퇴위당했다. 웃긴 건 레자 샤는 퇴위 직후 이집트로 망명했고 2년도 못 가 1980년 죽어서 이집트에 묻혀졌다.(...)[6]
이탈리아에서 살아가던 그는 1965년 3월 18일 로마의 고급 레스토랑에서 푸짐한 식사를 하던 도중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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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그는 사망 후 시신으로나마 조국으로 보내져 무덤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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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푸아드 2세의 현재 모습. 60대가 된 그는 아버지의 과거 모습처럼 비대한 몸집을 자랑하고 있다. 푸아드 2세는 프랑스에서 살았으나 현재 스위스로 이주하여 살고 있으며, 이집트는 어쩌다가 한 번씩 방문하는 정도.(안와르 사다트 정권 시절 나세르 정권 시기에 내려진 구 왕조 일가의 입국 금지령을 폐지하고, 시민권을 부여하면서 푸아드 2세를 위시한 구 왕조 일가들이 이집트에 갈 수 있게 되었다.) 압델 파타 엘 시시를 지지한다. 하지만 2017년에 엘시시 정부가 제 2의 수에즈 운하 개통식 열 당시 참석은 거절했다.

4. 기타


1967년 4월 5일자 중앙일보에 소개된 파루크 1세 전기 소개 기사
자동차 운전 및 수집을 좋아했다. 한 가지 특이점은 붉은색을 좋아했는지 그가 차를 사는 족족 붉은색으로 모조리 도색했다는 점이다. 그러고는 법으로 붉은 차를 모는 것을 금지했는데, 이유는 자기 혼자만 붉은 차를 몰아서 아무리 도로에서 과속이나 음주운전을 해도 경찰들이 자신인 것을 알아보게 해서 벌금을 매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도벽 증세가 있었다. 윈스턴 처칠과 회담 도중 처칠의 시계를 몰래 훔쳐서 본국으로 가지고 왔다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큰 포르노 콜렉션을 가지고 있었다.
CIA는 파루크 2세가 소련의 어떤 행동보다도 이집트에서 공산주의가 퍼지는데 도움을 준다고 보고 이집트에서 축출하고자 했다. 나세르의 쿠데타때 CIA가 배후에서 지원을 했는데 이때 작전 이름이 FF작전이었다. FF의 뜻은 Fat Fucker.
이외에도 온갖 기행으로 소문난 군주인지라, 2011년 아랍의 봄으로 카다피 독재정권이 붕괴된 후 정국 혼란이 이어지면서 가끔씩 카다피의 쿠데타로 폐지되었던 알세누시 왕조에 대한 왕정 복고 주장이 간간히 나오기도 하는 이집트의 이웃나라인 리비아에 비하면, 이집트는 왕정복고 주장이 별로 힘을 얻지 못하는 편이다.
[1] 진짜 마지막 왕은 그의 아들 푸아드 2세(1952~)지만, 생후 6개월 만에 왕위에 올라 11개월 만에 폐위되어 큰 의미는 없다. 단, 이는 이집트를 다스린 모든 왕을 통틀어서 따졌을 때의 이야기이고, 근대 이집트 왕국은 알바니아-터키메흐메트 알리 왕조이기 때문에 토착민이 아니고, 그 전에는 영국, 오스만 제국, 아랍 이슬람 제국, 로마 제국,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으므로, 이집트의 마지막 토착민 군주는 고대 제 30왕조의 3번째 파라오인 넥타네보 2세였다. 이집트는 넥타네보 2세가 죽고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에게 점령당한 이후 파루크 1세가 물러나기까지 2000년 넘는 세월동안 외세의 통치를 받아야만 했다. 다만 이게 꼭 암울한 것만은 아닌 것이 넥타네보 2세 이후로도 토착민이 아니었을 뿐이지 파라오라는 직책은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리온까지 계승되었고 로마 시대 군주들 역시 비슷한 컨셉을 유지했고 뒤를 이어 이집트를 다스린 아랍인 군주들도 이집트를 자신의 나라로 생각하고 다스렸기 때문에 이집트라는 나라가 지금까지 유지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집트는 그때 당시에도 문화와 경제의 중심지 중 하나였고, 지금도 중동의 대중문화를 책임지는 주요한 중동의 문화강국이다.[2] 페르알, 파지아, 페디아 공주[3] 퇴위 후 망명생활의 고달픔과 파루크 1세의 바람기에 질려 1954년 이혼하고 이집트로 돌아왔다. 2번 더 결혼한 후 2005년에 카이로 근교에 있는 세번째 남편의 집에서 살다가 뇌출혈로 쓰러져 카이로의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4] 이후 푸아드 2세는 1976년에 프랑스인 여성 도미니크와 결혼하여 장남 무하마드 알리, 차남 파크루딘, 딸 파지아-라티파를 두었다. 하지만 도미니크와는 1996년에 이혼하고 만다.[5] 리비아의 전 독재자 카다피는 이드리스 1세 전 국왕에게는 사형 판결을 내렸지만, 정작 집권 후 이드리스를 제외한 나머지 다른 구 왕가의 사람들은 징역형이나 재산 몰수 등 낮은 처벌을 내렸거나, 구 왕가 인사들 중 일부는 정부 장관직에 임명하는 등 어느정도 구 왕족들을 포용적으로 대했다.[6] 다만 나세르 정권 이후 엣 무함마드 알리 왕조 일가들의 귀국이 허용되었던 이집트와 달리 이란은 여전히 망명 중인 옛 팔라비 왕가 인사들의 귀국을 불허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