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미컴 디스크 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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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코트인 '디스크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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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미컴 디스크 시스템 본체와 디스크 라이터
1. 개요
2. 상세
3. 역사
3.1. 개발
3.2. 발매 이후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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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광고 영상
The Gaming Historian의 소개 영상
닌텐도에서 1986년 2월 21일에 15,000엔으로 출시한 패밀리 컴퓨터의 확장기기. 플로피 디스크를 주요 매체로 채택 하였으며, 디스크 드라이브와 램 어댑터[1]로 구성되어 있다.
1992년에 단종 되었으며, 누계 판매 대수는 총 440만 대.

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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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매체인 디스크 카드는 미쓰미의 2.8인치 퀵 디스크에 불법 복제 방지 및 일반 디스크와의 구별을 위한 음각 NINTENDO 로고를 추가하여 3인치로 만든 것이다. 때문에 이것을 제거하면 디스크를 일반 퀵 디스크 드라이브에 사용할 수도 있고, 그 반대도 가능하다. 기본 색상은 노란색이며, '디스크 팩스'용 파란색 디스크, 경품용 금색과 은색 디스크, 개발용 흰색 디스크 등 다양한 바리에이션이 존재한다.[파란색_디스크][금색_디스크][은색_디스크][흰색_디스크]
디스크의 용량은 한 면에 56 KB(448 kbit), 양면 포함 총 112 KB(896 kbit)이며[2], 읽는 것만이 가능했던 롬 카트리지와는 달리, 플로피 디스크의 쓰기 기능을 활용하여 게임 데이터 저장, 새로운 게임을 내려 받을 수 있게 되었다.[3]
램 어댑터에는 LFO 기능이 있는 웨이브 테이블 합성 방식의 1채널 사운드 시스템이 장착되어 있는데, 이 덕분에 디스크 게임들은 카트리지 게임들보다 좀 더 우수한 사운드를 낼 수 있다. 실제로 젤다의 전설, 메트로이드 등의 패미컴 디스크 시스템용 게임들 중 일부는 카트리지 게임과는 확연히 다른 사운드를 낸다.


메트로이드 사운드 비교 영상
젤다의 전설 사운드 비교 영상

3. 역사



3.1. 개발


패미컴 발매 전부터 일본에서는 워드프로세서 붐이 일어나면서 수요가 메모리로 몰리는 바람에 닌텐도는 카트리지에 쓸 롬을 원활하게 공급받지 못했다. 때문에 롬 카트리지의 가격은 4,500엔, 5,000엔을 넘기 시작했다. 닌텐도는 게임의 가격이 오르면 소비자들이 패미컴에서 멀어질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대책을 마련해야만 했다.
1984년 여름, 닌텐도의 이러한 고민을 일찍이 알고 찾아온 허드슨 소프트는 패미컴의 새로운 매체로 미쓰비시수지와 같이 개발한 비카드의 채택을 제안했다. 비카드는 신용카드 만한 크기에 상당한 용량, 게임을 새로 받을 수 있는 등의 여러 장점이 있었다. 닌텐도는 이를 마음에 들어 했으나, 비카드의 비싼 가격과 특허료 때문에 무산 되었다.[4] 대신 비슷한 시기에 채택을 검토해 달라며 찾아온 미쓰미 전기의 퀵 디스크를 새로운 카트리지로 채택하였다. 미쓰미 전기의 퀵 디스크 드라이브의 가격은 6만 엔이 넘었으나, 닌텐도는 사양을 낮추거나, 일부 요소들을 제거하여 15,000엔으로 가격을 낮춘다.
닌텐도는 디스크 시스템 개발과 동시에 NTT와의 협업으로 전화선을 이용해 게임을 배포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도매상의 반발로 취소, 대신 '디스크 라이터'라는 디스크 자판기를 마트나 문구점 등에 설치하여 디스크 판매와 동시에 5백 엔의 요금으로 다른 게임을 내려 받는 다시 쓰기 서비스를 계획한다.
그렇게 1985년 내내 개발에 매진, 갖가지 문제에 시달린 디스크 시스템이었지만 결국 1986년 2월 21일, 무사히 출시된다.

3.2. 발매 이후


디스크 시스템이 발매되며 나온 디스크 게임의 가격은 당시 롬 카트리지 게임의 절반 수준인 2,500엔이라는 파격적인 가격이었다. 나중에 가격이 조금 오르긴 했지만 보통 3천 엔 초반을 넘지 않았으며, 앞서 상술한 다시쓰기 서비스를 통해 500엔 정도의 요금으로 디스크에 새로운 게임을 내려 받을 수도 있었다. 덕분에 디스크 시스템은 첫해에 200만 대나 팔리는 괜찮은 성적을 거두었다.
그러나 1985년에 플라자 합의와 1986년 미일 반도체 협정[5]으로 인해 메모리 반도체의 가격이 폭락해 버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86년 6월에 1 Mbit 게임인 마계촌이, 동년 7월에는 2 Mbit 게임인 고에몽이 등장하면서 디스크의 대용량 장점이, SRAM과 전지를 이용한 전지 백업 시스템이 나오면서 디스크의 저장 시스템 장점이 사라졌으며, 음각 닌텐도 로고를 비롯한 여러 보안 장치를 해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각종 불법 복제 게임들이 십여 종 이상 난립하는 등의 악재에 시달렸다.
디스크 드라이브에 들어간 고무 벨트는 상당히 얇아 끊어지기 십상이었으며, 현재도 이 고무 벨트 문제로 인해 고장난 디스크 드라이브가 넷상에서 자주 보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퀵 디스크의 헤드 부분에는 기록면이 노출되어 있어서 먼지가 쌓이면 에러가 나거나, 자석이나 손가락이 닿으면 영구적인 고장이 생기기도 하였다.
또한 퀵 디스크는 느린 모터 회전 속도와 LP 같은 나선형 데이터 저장 방식으로 인해 데이터 임의 접근을 할 수 없어서 게임 데이터를 읽어들이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 예시로 드라큘라 2 저주의 봉인를 꼽자면, 기동 후 타이틀 화면이 뜰 때까지 약 30초, 데이터를 선택하고 다시 로딩, 디스크 B면 교체 후 게임이 시작될 때까지 약 25초로 총 1분 정도가 소요되며, 마을에서 필드로 이동할 때도 15초 전후로 로딩이 걸린다.
위에 써 있는 것처럼 디스크 게임의 가격은 카트리지 게임보다 낮은 2,500엔 정도였기에 서드파티나 도소매상에서는 이익이 적은 디스크 시스템 게임을 반기지 않았고, 허드슨과 남코 등에서는 신작을 일절 개발하지 않을 정도로 반응이 나빴다.
이와 같은 이유들로 인해 디스크 시스템의 판매량은 출시 다음해인 1987년부터 전년도의 절반도 안되는 75만 대로 급감했고, 소매점에서는 떨이나 폐기 처분을 하기 시작했다. 닌텐도에서는 디스크 시스템 활성화를 위해 '디스크 팩스'[6]라는 기기로 대회를 열었지만 부작용만 초래, 결국 닌텐도는 1988년 하반기에 패미컴 워즈슈퍼 마리오브라더스 3를 롬 카트리지로 발매하면서 디스크 시스템을 포기한다. 1년 뒤인 1989년부터 닌텐도와 허드슨, 남코가 기존의 카트리지 게임을 다시 쓰기 서비스로 지원하다가, 1992년 12월 22일에 나온 '잔켄 디스크성(じゃんけんディスク城)'을 끝으로 단종되었다.
이후 닌텐도에서는 1993년에 디스크 라이터를 전부 수거하여 지사나 서비스 센터, 우편 등을 통해 다시 쓰기 서비스를 2003년까지, A/S를 2004년까지 지원했다.

4. 게임 목록



총 199종의 게임이 발매되었다.

5. 여담


게임 개발 비용이 롬 카트리지보다 저렴했기에 '해커 인터내셔널'이나 '슈퍼 피그' 등의 게임 회사들은 패미컴 디스크 시스템으로 무허가 성인 게임들을 다수 내놓았다. 그밖에도 정식 게임의 해적판, 패미컴의 롬 카트리지 게임의 불법 이식판 또한 다수 유통되었다.
디스크 드라이브는 별도의 전원을 필요로 하나, AC 어댑터가 별매여서 어댑터를 따로 구매해야 한다. 어댑터 대신 C 배터리 6개로도 작동할 수 있다.
디스크 시스템의 출시를 계기로 플레이스테이션의 아버지, 쿠타라기 켄은 닌텐도를 들쑤시고 다니기 시작했다. 디스크 시스템의 원시적인 사양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쿠타라기는 1986년 4월에 부품 판매를 위해 정기적으로 닌텐도를 방문하는 소니 영업 담당자와 동행하여 패미컴을 개발한 제2 개발부 책임자였던 우에무라 마사유키와 만난다. 그는 800 KB 용랑의 2인치 플로피 디스크를 보여주며 채택 검토를 제안하나 우에무라는 이미 늦었다고 말하면서 거절, 대신 쿠타라기가 개발한 신형 사운드 칩을 슈퍼 패미컴의 사운드 시스템으로 채택한다.
램 어댑터 뒤쪽에는 예비 병렬 포트가 있는데, 이것을 사용하는 주변기기를 출시하려던 것으로 보인다.
샤프에서는 패미컴과 디스크 시스템을 합친 트윈패미컴을 발매한 적이 있다.

게임큐브 메뉴 화면의 배경음은 패미컴 디스크 시스템의 시동음을 1/16배속 한 것과 같다.
마스코트인 디스크군은 게임 & 워치스페셜 프라이즈 슈퍼 마리오브라더스 본체를 감싼 케이스의 디자인으로 채택되었다.
CPU와 PPU칩이 있는 패미클론에서도 작동된다고 한다.
'허니 비 패밀리 어댑터'라는 카트리지 컨버터로 NES와 NES2에서도 구동할 수 있다.
[1] 용량은 프로그램용 32 KB, 스프라이트용 8 KB로, 패미컴 롬 카트리지의 기본 사양과 동일하다.[파란색_디스크] [image][금색_디스크] [image][은색_디스크] [image][흰색_디스크] [image][2] 그 당시 패미컴의 롬 카트리지 용량이 40 KB(320 kbit)임을 생각하면 상당한 대용량이다.[3] 용량이 작은 게임의 경우 빈 면인 B면에 내려 받을 수 있다.[4] 이후 허드슨은 NEC에 찾아가 비카드의 개량형인 휴카드를 개발, PC 엔진의 주요 매체로 채택하였다.[5] 1983년부터 일본 전자 기업들의 메모리 반도체 치킨 게임으로 인해 미국에서 무역 분쟁이 발생했는데, 1986년에 미국의 레이건 행정부와 일본의 나카소네 내각이 분쟁을 종결하기 위해 체결한 무역 협정이다. 내용은 반도체 수출 가격을 미국에 제공, 미국의 일본 반도체 투자 허용과 일본 정부의 보조금 철폐 및 미국 반도체의 일본 시장 점유율을 20%까지 올리겠다는 것이다. 당시 일본에서는 쿠로후네 사건, 제 2의 개항이라 일컬을 정도로 굴욕적으로 평가 받았다.[6] 디스크 게임에서 획득한 점수를 닌텐도 본사에 보내는 기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