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ayStation(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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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사'''
소니 컴퓨터 엔터테인먼트
'''제조사'''
소니 컴퓨터 엔터테인먼트
'''출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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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12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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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9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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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9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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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3월[1]
2002년 2월 22일[2]
'''생산'''
'''종료일'''

2006년 3월 23일
'''가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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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9 → $199 → $149
→ $129 → $99 → $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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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980 → ¥29,800
→ ¥24,800 → ¥19,800
→ ¥18,000 → ¥15,000
→ 오픈프라이스[4]
'''판매량'''
1억 249만 대[5]
1. 개요
2. 역사
2.1. 닌텐도 플레이 스테이션
2.2. 자체 프로젝트 개시
2.2.1. 서드파티 모집
2.3. 출시 이후
2.3.2. 게임 유통 혁명
3. 사양
3.1. 모델
4. 특징
6. 주변기기
6.1. 포켓 스테이션
6.1.1. 지원 게임
7. 배리에이션
7.1. PS one
7.2. 개발 기기
7.3. 프로토타입
7.4. 아케이드 호환기
7.5. 복각판: 플레이스테이션 클래식
7.5.1. 게임 라인업
7.5.2. 특징
7.5.3. 평가
7.5.4. 이후
8. 기타
8.1. 불법 복제칩
9.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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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동 화면[6]
플레이스테이션 시리즈의 첫 게임기이자 거치형 게임기이다. 이름의 유래는 업무용 컴퓨터 '워크스테이션'에서 놀이를 위한 컴퓨터인 '플레이스테이션' 으로 이름을 붙였으며 1994년 12월 3일, 일본에 처음 출시해 2006년 3월 23일까지 판매했고, 한국에는 카마엔터테인먼트를 통해 1997년 3월에 정식 출시했다. 게임기 판매량은 1억 429만대이고 최다 판매 게임은 1,085만 장(10%)의 그란 투리스모. 동시 발개 게임은 남코릿지 레이서.
가전회사 소니의 게임기 시장 참여에 처음엔 그 누구도 성공을 예상하지 않았다. 출시 초기에는 세가 새턴에 밀려 근소한 차이로 100만 대 판매를 먼저 내주며 고전했지만 1995년 6월 아크 더 래드를 시작으로 사실상 발매 2년차나 다름없는 시기였던 1996년 상반기 철권 2와 캡콤조차 예상 못했던 바이오하자드의 깜짝 대성공으로 분위기가 반전됐다. 하반기에는 너티 독크래시 밴디쿳이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일본에서는 아크 더 래드2와 파라파 더 래퍼를 100만 장 넘게 판매했다. 또한 같은 해 스퀘어의 파이널 판타지 7 발매 선언으로 가정용 게임기 전쟁의 패권은 완전히 플레이스테이션으로 넘어갔다.
고가의 업무용 워크스테이션에서나 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실시간 3D 렌더링을 가정용 게임기에서 이뤄낸 뛰어난 하드웨어 설계에 개발사 친화적인 저렴한 로열티와 개발환경 지원을 통한 서드파티 포섭, 지속적인 게임기와 게임 가격 인하가 가능해진 제조와 유통 혁명에 광고계 역사에 남을 특유의 마케팅 수법까지 더해졌던 비디오 게임계 혁신의 총합이다.
한국에서의 약칭은 PS, 플스 등으로 흔히 불리며 게임 매거진 혼자서 프레스라는 약칭을 사용했지만 별로 보급되지 않았다. 일본에서의 약칭은 "프레스테(プレステ)"가 쓰였는데[7], 후속기가 나오면서 부르기 쉬운 PS(ピーエス)로 더 많이 불린다. 어떤 사람들은 직역하여 "아소부에키(遊ぶ駅)"라고도 부르기도 한며 이는 한국도 마찬가지로 "노는역"이라고 부른다. 영어권에서는 보통 PSX[8]라고 더 많이 불리었으나 지금은 쓰이지 않는다.
플레이스테이션 20주년 기념으로 만든 플레이스테이션 4, PS Vita의 테마에 플레이스테이션의 시동음이 들어갔다.# 플레이스테이션 스토어에서 받을 수 있다. 플레이스테이션 4용이고, 플레이스테이션 4 본체에서 받거나 PC등에서 웹으로 접속해 미리 구매(무료)할 수 있다.

2. 역사


플레이스테이션의 탄생 비화에는 닌텐도의 배신으로 인한 소니의 분노로 플레이스테이션을 만들었다는 일화가 전설처럼 떠돌고 있다. 이 사건에 대한 IGN 기사나, 오가 노리오의 자서전에서도 위의 일화는 사실인 것처럼 쓰여있다. 관련 서적이나 유명 블로그등에도 그렇게 알려져 있지만 당시 SCE의 이사회 의장이었던 마루야마 시게오는 2016년 인터뷰에서 그간 사람들이 듣지 못했던 다른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애시당초 쿠타라기는 반도체 사업을 하고 싶었고 워크스테이션을 보며 가정용으로 만들고 싶다는 말을 하고 다니다가 이상한 취급을 받기도 한 만큼 닌텐도와의 일은 일종의 부스터가 된 것이지 타도 닌텐도라는 목표를 세우고 게임기 사업을 사직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9] 쿠타라기 켄도 소니와 닌텐도의 대결 구도는 언론이 지어낸 것이며 패미컴을 개발한 우에무라 마사유키와 리쓰메이칸 대학에서 토크쇼도 했을 정도로 사이가 좋다고도 말했다.[10] 따라서 밑에 써 있는 내용은 사실과 언론이 지어낸 소설에 가까운 내용이 혼재되어 있으며, 이 점을 감안하여 읽는 것이 좋다.

2.1. 닌텐도 플레이 스테이션


슈퍼 패미컴용 플레이 스테이션[11] 콘셉트
플레이스테이션 데모
1975년 소니에 입사한 쿠타라기 켄은 1983~1988년 가나가와현 아츠기시에 있는 소니 정보처리연구소 소속 시절 방송국용 실시간 3D 특수 효과(VFX) 시스템인 '시스템 G'의 데모 영상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생방송에 실시간으로 3D 효과를 넣을 수 있는 장치인 시스템 G를 보며 쿠타라기는 '이걸로 가정에서 게임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 시스템 G를 가정용 게임기로 만들려면 2만 개의 LSI가 필요하다고 보았지만 쿠타라기는 무어의 법칙이나 자신의 지식과 경험으로 1994~1995년 정도에는 그것이 가능하리라고 보았다.
그런 쿠타라기가 패미컴 디스크 시스템으로 닌텐도와 인연을 맺기 시작하며 쿠타라기는 게임 사업에 한발 더 가까워졌다. 자신이 관여한 2인치 플로피 디스크 시스템을 납품하는데는 실패했지만 슈퍼패미컴에 PCM 사운드 시스템을 공급하는데 성공했다. 1987년 양사간에 2박 3일 동안 합숙을 하며 쿠타라기는 여러 제안을 했고 차세대기에는 CD-ROM을 사용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1989년 슈퍼패미컴 개발이 막바지일때 다시 한 번 제안했지만 내키지 않았던 닌텐도는 대신 소니에게 '슈퍼 패미컴의 외장형 CD-ROM 드라이브'와 소니만의 자체적인 일체형 머신을 만들 수 있게 해 줬다. 그래도 마루야마는 이 일은 어디까지나 게임기 비즈니스가 아닌 '외장형 CD-ROM 드라이브'를 만드는 것이었다며 선을 긋고 있다.
그러나 1991년 5월, 사장이 되기 전 홍보이사였던 이데이 노부유키와 교토로 향하던 쿠타라기는 닌텐도와의 제휴가 깨졌다는 소식을 들었고 겨우 찾아간 닌텐도에서는 아라카와 미노루 닌텐도 오브 아메리카 사장[12]이 둘을 맞아 계약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우리는 필립스와 일을 할 것 이라는 대답을 했다. 며칠 뒤 미국에서 열린 CES에서 소니 아메리카에서는 그대로 공개를 강행했지만 그 다음날 닌텐도는 필립스와의 제휴를 발표함으로서 소니에게 망신을 주어 마찬가지의 일이 되풀이되었다..뉴욕 타임즈 기사 이미 1991년 초에 아라카와가 필립스를 오가며 협의를 했다는 것이 알려졌다.
왜 닌텐도와의 계약이 깨지게 되었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최초 계약 당시 CD-ROM에 관련된 수익 배분 문제나 플랫폼 주도권을 빼앗기는 것에 두려움, 쿠타라기의 고집스런 협상태도나 마루야마는 게임 이외의 것은 해도 된다는 조건으로 가정용 가라오케나# 독점 해 볼까라고 했다고 말은 하지만 당시 소니 뮤직 엔터테인먼트에서 제작 중이던 소프트[13]가 야마우치를 화나게 만들었다는 등의 소문이 도는 정도이다. 또한 여기에는 소니의 CD-i사업부까지 쿠타라기의 사업을 깨기 위해 닌텐도-필립스와 내통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관계자들은 대체로 소니가 순수한 피해자라고 말하는 데에는 조심스러운 모습이다. 아무튼 그때까지 만든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개발 비용과 생산 준비에 들인 비용 15억엔 정도를 날렸다고 한다.
이 취소로 이데이 노부유키는 마루야마에게 전화해서 무슨 일을 이렇게 하는거냐며 크게 화를 냈고, 후에 이데이가 CEO로 취임할때는 매우 긴장했다고 할 정도로 쿠타라기의 자리를 날려 버릴 수도 있는 사건이었다. 오가 노리오 사장은 이후로 이런 쿠타라기 켄을 사내의 다른 간부들에게서 보호하며 마음껏 날뛸 수 있도록 그들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도쿄 미나토구 아오야마에 있었던 소니 뮤직 엔터테인먼트의 EPIC 레코드 저팬 뉴미디어 사업부로 출향시켰다. 마루야마 시게오는 이에 대해 당시에 이미 쿠타라기에게 의견을 낼 수 있는 사람은 사장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고 했을 정도였다. 오가 노리오 사장은 쿠타라기를 총애했고, 그리고 나머지 사원들은 쿠타라기가 일 벌리면 수습하고 사과하는 노예들이었다고 말했다. 이는 쿠타라기 켄이 정보처리연구소에 근무했던 시절 소니의 창업자 가운데 한 명이었던 이부카 마사루 사장에게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1991년 후반기까지 닌텐도와의 협상은 계속되었지만 지지부진했고 쿠타라기는 사업보고서에 '우리는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며 게임기 사업으로의 진출이라는 목소리를 본격적으로 내기 시작했다. 이후 1992년 6월 24일에 게임기의 사업의 진퇴를 결정할 소니 그룹 최고 경영 회의에 나타난 쿠타라기 켄은 '''우리는 이대로 물러나도 좋습니까? 소니는 평생 웃음거리가 될 겁니다.'''[14]라고 발언하였고[15], 임원들은 '소니가 져도 되는 상대는 분하지만 마쓰시타(현 파나소닉) 뿐', '교토의 화투집에 지면 어쩔려고 그러냐' '천하의 소니가 장난감을 만드냐' 등등 게임 사업에 잔뼈가 굵은 닌텐도에 문외한인 소니는 경쟁이 안된다며 반대를 했지만 '''"닌텐도에게 먹칠을 당했는데 다물고 있을 겁니까?"'''[16]라고 했고 오가 노리오 사장은 '''"그렇게까지 말하거든 독자노선으로 갈 수 있을지 없을지 증명해봐라. DO IT!"'''[17]'이라며 승인했다는 설이 있다.[18]

2.2. 자체 프로젝트 개시


미국 소니는 이전부터 메가 CD용 게임들을 퍼블리싱하면서 세가와 인연을 맺어 사이가 좋았다. 그래서 미국의 올라프 올라프슨 주축으로 미국 세가와 함께 차세대 게임기를 공동 설계하려고 했다. 소니와 세가는 차세대 게임기 하드웨어 시스템 사양과 하드웨어 판매 손실 분담, 수익 분배에 대하는 온건한 계약 조건[19]을 제안했고, 칼린스키 사장은 이를 듣고 제안서를 작성해 이사회에 공동 사업을 제안했지만 세가 나카야마 하야오 사장과 이사회에서 '''"멍청한 생각이군, 소니는 하드웨어도, 소프트웨어도 만들 줄 모르는데, 이걸 왜 해야 하나?"'''[20]라며 제안을 거절했다.# 일본에서도 소니가 닌텐도와의 파담 직후 마이클 슐호프 미국 소니 사장이 자체 사업보다는 세가와 파트너십을 맺으면 어떤가 하는 제안을 했고, 실제 쿠타라기와 세가의 사토 히데키 등이 팀을 이루어 기술 검토를 했지만 3D 게임기와 2D 게임기의 이견으로 결렬되었다.#
그 무렵 EA를 퇴사해 3DO 컴퍼니를 설립한 트립 호킨스도 차세대 게임기 3DO를 개발하고 있었다. 그 얘기를 들은 쿠타라기 켄은 견학을 갔는데, 3DO의 그래픽은 프리랜더링된 그래픽이나 동영상을 사용하는 2D 게임기였다. 쿠타라기는 왜 3D를 실시간으로 그리지 않는지 묻자 호킨스는 '몇십만 달러 하는 워크스테이션에서조차 어려운 것을, 가정용 게임기로 할 수는 없을 것이다.'라고 대답했고 쿠타라기는 그렇군요 라고 말하며 웃으며 돌아왔다고 한다.#
그 뒤 쿠타라기는 임원 회의 때에 백 수십억 엔짜리 계약서를 들고 와서 주변을 깜짝 놀라게 했다. 결국 1993년 봄에 LSI 로직스와 CPU를 만들기 위해 투자한 돈이 140억 엔. 아까의 손해액과는 앞자리부터가 다르다. 그렇게 칩을 백만 대분 주문했고, 팔리지 않으면 정말 끝장이었다. 현장에서는 비명을 질렀고, '목표 100만 대'라는 당시 광고 구호가 단순히 구호로서만의 의미가 아니었던 것이었다.

2.2.1. 서드파티 모집


업계에서도 비관적 태도로 주시했다. 실제로 소니에서는 서드 파티를 모으고자 플레이스테이션에 대한 프레젠테이션을 하러 게임 기업 등 관련 기업들을 돌았지만 C 언어로 3D게임을 만든다는 것에 대해 황당해 하거나, 게임기 사업은 삼가는 것이 좋다는 충고를 듣거나 복수의 기업체들로부터는 300만 대를 팔면 그때 다시 오라는 등 냉대를 받았다.[21]
그나마 비슷한 시기 남코는 에반스 & 서덜랜드 TR3(Texture Mapping Real-Time Real-Visual Rendering System) 3D 그래픽 시스템이 들어간 시스템 22의 비싼 가격으로는 세가에게 대항할 수 없다고 판단, 이를 해결할 저가형 3D 기판의 개발과 닌텐도와의 다툼으로 자체 가정용 게임기 개발의 고민들이 있었는데 플레이스테이션의 탁월한 가성비에 놀라 이를 기반으로 아케이드 기판인 시스템 11을 만들고 철권, 철권 2, 소울 엣지 등을 개발하는 등 적극적인 우군으로 참여했다. 당시 SCE의 이사회 회장인 마루야마 시게오는 이에 '대기업 대부분이 300만 대 보급 전망이 있다면 개발을 검토하겠다고 주저하는 가운데 남코만이 개발비를 회수할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을 줬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그러나 1993년 8월, 31회 오락기기 박람회[22]에서 버추어 파이터가 공개되면서 이런 게임 회사들의 태도가 급변했다. 그전까지 '우리 업계에서 3D는 안된다'며 냉정했던 개발자들은 버추어 파이터에서 3D의 가능성을 보고 박람회 관람을 마치는 길에 바로 소니로 찾아올 정도였고 데모를 보여주자 정말 이런게 가능하냐며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훗날 SCE 초대 사장인 토쿠나카 테루히사는 이에 플레이스테이션의 성공은 세가 버추어 파이터의 성공 덕분임을 언론과 서적을 통해 회고했다.
1993년 10월 28일, 소니는 소니 본사 대강당에서 플레이스테이션 시연회를 열었다. 이 시연회에 모인 개발자들은 대체로 대기업은 아닌 회사쪽 사람들로 이루어졌지만 많은 수가 참석했고, 쿠타라기 켄은 플레이스테이션의 프로토타입 4대를 설치해 3D 데모를 시연했다. 아래 링크되어 있는 티라노사우루스의 3D 동영상을 시연하자 다들 충격을 받았다. 회장은 조용해서 시연회가 실패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을 정도였다고 할 정도로 충격이 컸다. 쿠타라기 켄의 말로는 프로토타입 기기 말고도 워크스테이션이 따로 있는 거 아니냐는 질문이 오기도 했다고 한다.
[23] 그리고 이 데모에 나온 공룡은 훗날 플레이스테이션 5 구매 시 설치되어 있는 무료 게임, 아스트로룸에서 그 모습 그대로 최종 보스로 나온다. 플레이스테이션 게임 특유의 부들거리는 텍스쳐도 그대로 재현했고, 화면 비율도 4:3으로 바뀐다. 플레이스테이션 시절을 실시간으로 경험한 게이머라면 감동할 만한 장면.
공룡 데모 행사의 대성공, 150만 엔이라는 저렴한 개발 장비 가격, 세가새턴이 부실한 라이브러리 지원으로 원성을 샀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프로그래머의 개발 부담을 덜기 위한 꾸준한 라이브러리 지원 등을 통해 SCE는 1994년 여름까지 플레이스테이션에 게임을 내놓기로 계약한 서드파티 게임 회사를 200곳 넘게 확보하였다. 기기를 다루는데 제약이 생길까봐 라이브러리에 대해 못마땅해하는 일류 개발자들도 있었지만 릿지레이서를 빠르게 이식할 수 있었던 것도 라이브러리 덕분이며 계속된 버전업으로 최종적으로는 1800여개에 달하는 기능이 추가되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SCE는 전신인 음반회사 소니뮤직의 발상으로 개발자를 크리에이터, 아티스트로 대우하며 게임야로제!(ゲームやろうぜ!) 라는 오디션 프로그램을 개최한다. XI(sai) 와 도코데모 잇쇼 같은 게임들이 이 프로그램을 통해 제작되었다. 이때까지 게임업계 대부분은 개발자의 이직을 막기위해 크레딧에 실명을 쓰지 못하게 했는데 SCE는 적극적으로 크리에이터들을 인터뷰에 내보내고 이름을 알리게한다. 마루야마 시게오는 이때 만난 크리에이터들에게 '너희들 여자에게 인기 없지? 내가 음악업계 출신이라 잘 아는데 코무로 테츠야는 인기가 많다. 너희들도 이걸 잘하면 코무로처럼 될 수 있다'며 다독였다고 한다. 이외에도 소니뮤직 자체에서도 '디지털 엔터테인먼트 프로그램' 이라는 인재발굴 프로그램을 실시했다.
또한 개발지식을 갖춘 일반인들도 플레이스테이션 개발을 할 수 있도록 넷 야로제!(ネットやろうぜ!) 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일정 심사를 거쳐 회원이 되면 간이 플레이스테이션 개발기와 소프트웨어를 12만엔(+세금)에 구입할 수 있었다. 개발 입문의 문턱을 이렇게까지 낮춘 것은 실로 파격적인 일이었다. 다만 전용 개발기와는 달리 시리얼 통신만으로 프로그램을 전송해야 했기에 속도가 느렸고 관련 문서나 인터넷 서비스도 빈약해서 프로의 환경에 비해 게임을 개발하기엔 대체로 무리였다는 소감이 있다. 넷 야로제판 LightWave 3D를 번들로 제공했다.

2.3. 출시 이후



2.3.1. 차세대 게임기 전쟁


플레이스테이션은 발매 약 3주 전 겨우 완성되어 양산하기 시작했다. 최초 생산 계획 물량은 30만 대로 잡았다. 쿠타라기 켄은 발매 당일 그 어떤 언론에서도 취재하러 오지도 않았고, 이후 언젠가는 교토의 헤이안 신궁 도서관에서 1994년 12월 3일 신문 축쇄판을 보았는데 어느 곳에도 플레이스테이션에 발매에 대한 기사가 실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당시 언론이나 게임 업계는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이 100% 실패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사람들은 새벽부터 줄을 서서 플레이스테이션을 구입했고, 쿠타라기와 사에키는 아침부터 아키하바라에서 그것을 지켜보았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정오가 되기 전에 매진이 되어 초회물량 10만 대를 하루에 다 팔았다. 다음날 신문에도 대서특필이 되었고 그때까지 소니가 게임기에 참여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던 곳에서마저 주문이 쏟아졌으며 소니 안에서도 게임기 사업을 반대하던 이사의 부인이 오가 노리오에게 한 대만 구해달라며 부탁을 하는 등 세간의 평가는 180도로 변했다.
우수한 서드 파티를 뒤에 업고 세가 새턴 다음으로, 닌텐도 64보다 빠르게 출시한 플레이스테이션은 세가 새턴닌텐도 64와 정말 '''피 터지게''' 경쟁했다. SCE, 세가 둘 다 닌텐도 64가 나오기에 앞서 상대를 끝장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닌텐도의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은 '저런 게 50만 대 이상 팔리면 물구나무 서서 걸어간다' 같은 말을 했고[24] 1995년까지만 해도 닌텐도에서도 "닌텐도 64를 천천히 발매해도 금방 따라잡겠지."라고 판단했을 정도로, 소니는 플레이스테이션 출시부터 이듬해인 1995년까지는 게임계에서 별 것 아닌 존재였다. 심지어는 1995년 2월 4일부터 3월 23일까지 약 46일 동안 플레이스테이션으로 그 어떠한 게임도 발매하지 않은 적도 있다. 이로 인해 1995년 봄에만 해도 PC-FX의 재림이라는 악평도 들었다. 최초로 100만 대, 200만 대 판매를 달성한 것도 세가 새턴이다. 주요 게임 언론들은 이런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과 세가 새턴의 치열한 경쟁 구도를 '''차세대 게임기 전쟁'''이라 불렀는데 이 단어는 당시 SCE의 마케팅 총괄 부장이었던 사에키 마사시가 만들어낸 단어였다.
음악계의 큰 손이기도 한 마루야마 시게오의 수완도 빛을 발했다. 쿠타라기 하드웨어를 담당했다면 마루야마쪽은 소프트웨어를 맡았는데, 일찌기 패미컴의 가능성을 보고 CBS소니 시절부터 몇 개의 패미컴 게임을 퍼블리싱 한 적이 있기도 하다. 마루야마는 적극적으로 개발자 발굴에 나섰으며 코지마 히데오는 '플레이스테이션이 우리를 예술가로 만들어줬다' 라고 할 정도로 새로운 개발사들이 적극 발굴된다.
또한 마루야마는 친한 음악가들에게 플레이스테이션을 무료로 선물하는 일종의 바이럴 마케팅을 시도했고 그것은 음악가들이 플레이스테이션에 빠져 음악 방송 등지에서 플레이스테이션 이야기를 꺼내며 제대로 효과를 발휘한다. 고작 300대를 뿌린 것으로 어마어마한 효과를 본 것이다. 소니는 전자 제품을 홍보할 때 보통은 일본의 광고 대행 대기업 덴츠를 통해 홍보하는 전략을 택하는데, 마루야마 시게오가 SCE로 영입해온 사람들은 소니 뮤직 엔터테인먼트 사람들이었고, 소니 뮤직 엔터테인먼트는 연예인의 방송 출연이 음반 판매 주요 마케팅 전략이었기 때문에 플레이스테이션 홍보에도 비슷한 방식을 취한 것이었다. 덕분에 마케팅에 비용이 얼마 들지 않았을 뿐더러 소니 홍보팀에서 뒤늦게 이 사연을 듣고 기겁해 놀랐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닌텐도 특히 야마우치는 4만엔이 넘는 게임기 따위는 비즈니스로서 성립할 수 없다고 부정했지만 쿠타라기는 미래를 내다보고 추후 계속해서 가격이 떨어질 부분과 나중에 삭제해도 상관없는 부분 등 절묘한 설계를 한 덕분에 계속해서 가격을 낮출 수 있었다. 거기에 더불어 '게임기를 손해 보고 팔아도 소프트웨어로 이득을 올린다'는 전략으로(사실인지 아닌지는 불분명) 가격 인하 공세를 펼쳤다. 새턴은 이런 설계를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격을 낮출수록 손해를 봐야 했기에 피해가 막심했다. 실제로 닌텐도 64가 출시될 무렵에는 가격이 더 저렴해졌다.
1994년 11월 22일, 세가에서는 세가 새턴을 49,800엔에 출시했고, 출시 6개월간 5,000엔 인하 프로모션을 진행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SCE에서는 12월 3일에 플레이스테이션을 39,800엔에 출시했다. 1996년까지 세가 새턴은 일본 시장에서 20,000엔에서 가격 인하를 더 할 수 없었지만, 플레이스테이션은 1996년에 19,800엔까지 인하했으며, 이듬해에는 18,000엔으로 인하했다. 북미 시장에서도 새턴의 시장 선점을 위해 E3 1995 게임쇼의 세가 컨퍼런스에서 $399의 가격으로 즉시 발매를 발표했을 때, SCE 측에서는 컨퍼런스에서 세가 새턴보다는 조금 늦게 출시하지만 플레이스테이션의 가격을 $299로 출시하겠다고 발표해 청중의 갈채를 받기도 했다.[25][26] 이듬해 E3 1996 게임쇼에서는 SCE에서 플레이스테이션의 가격을 $199로 즉시 내리면서, 세가 새턴은 생산 단가면에서 확연히 불리했음에도 가격 인하를 해야 했다. 개발 환경면에서도 복잡한 구조의 세가 새턴보다 플레이스테이션이 우세를 점했기 때문에, 게임의 양이나 질적인 면에서 차이가 서서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닌텐도 64는 플레이스테이션보다 하드웨어 성능이 좋지만,[27] 경쟁 기종인 세가 새턴과 플레이스테이션보다 1년 6~7개월이나 늦게 출시했는데 그 사이 세가와 SCE가 선점 효과를 누리고 있었던 데다가, 저장 매체로 롬 카트리지를 고집하면서 게임기 내부가 복잡해지는 원인을 가져왔으며 그 당시 게임의 대용량화 추세를 맞추는 게 불가능해졌다. 스퀘어에서는 파이널 판타지 6 발매 직후부터 파이널 판타지 7을 3D 기반 RPG로 기획하고 있었으나,[28] 빈약한 용량의 롬 카트리지로는 택도 없기 때문에 이는 스퀘어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29]
그리고 SCE에서는 이 틈을 타 소니 그룹의 출자를 통한 파이널 판타지 7 닌텐도 투자금 변제 및 스퀘어의 라이선스 비용 최혜 대우, 일본 내 스퀘어 독자 유통망을 통한 게임 판매를 인정하면서,[30] 1996년 1월 12일 플레이스테이션 진영으로의 이적을 발표했고, 그 이후 파이널 판타지 7의 플레이스테이션 발매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파이널 판타지 7은 크게 흥행했고 플레이스테이션에 날개를 달아주었지만, 그 대신 스퀘어에서는 한동안 휴대용 게임은 당시 주류 기종이었던 게임보이 시리즈가 아닌 원더스완에 내야만 했다. 스퀘어는 몇 년이 지나서야 닌텐도와 화해했는데 자세한 내용은 스퀘어#s-2 문서를 참고하자.
사실 파이널 판타지 7 발매 이전인 1996년에 플레이스테이션의 승리는 이미 어느 정도 정해지고 있었지만 파이널 판타지 7가 대히트를 치면서 닌텐도까지 넘어서는데 성공하였고, 판매 대수 면에서 2위인 닌텐도 64와 2배 이상의 격차를 보이며 거치형 게임기 시장을 정복했다. 그리고 스퀘어의 흥행에 고무된 에닉스까지 플레이스테이션으로 국민 RPG라 불리는 드래곤 퀘스트 7을 발표했고, 또 전무후무한 대흥행에 성공하면서 사실상 소니는 차세대기 전쟁에서 승리의 쐐기를 박아버린다.
E3 1997 게임쇼 2달 전에 소니에서는 플레이스테이션의 북미 시장 가격을 $149로 또 내렸고, E3 1997에서 세가에서는 컨퍼런스에서 새턴은 우리의 미래가 아니라는 발언으로 패배를 정식으로 인정했다.

2.3.2. 게임 유통 혁명


소니는 게임업계의 초심자였기 때문에 업계의 습성을 잘 모르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본체 공급 협상 당시 리베이트나 대량주문할인을 해주지 않으려고 이에 대해 모르는 척 넘어갔지만 정작 가전 업계의 습성에 따라 본체의 마진률을 25%로 잡는 실수를 했는데 오히려 이 실수가 소매상의 입장에서는 4만엔짜리 플레이스테이션 한 대를 팔면 1만엔의 이득을 얻는 것이었기 때문에 플레이스테이션를 팔기위해 혈안이 되었고 플레이스테이션의 초반 보급에 큰 기여를 했다.
이전까지 닌텐도가 주도하던 게임의 유통 형태는 수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자세한 것은 닌텐도/비판#s-8 문서를 참고하자. SCE는 서드파티를 포섭하면서 여러 불만들을 들었고 SCE의 또 다른 한 축인 사토 아키라(佐藤 明)는 이것들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방법들을 도입했다. 당시 SCE 소속 아크 더 래드 시리즈의 프로듀서였던 아카가와 료지는 플레이스테이션의 성공 요소로 이 게임 유통 혁명을 꼽고 있다. 이런 소니의 유통 개혁 때문에 닌텐도의 초심회는 1997년에 해산했다.
이러한 문제점의 원흉은 대부분 롬 카트리지에서 나온다고 생각했고 플레이스테이션이 CD-ROM을 채용한 결정적인 이유였다. 게임 회사들은 CD-ROM 채용에 의문을 표시했지만 쿠타라기는 이미지 읽어들여 재생하는 것이 아닌 3D로 생성하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서드파티를 끌어들이기 위해 파격적인 특허료 정책을 제시하였다. 닌텐도의 라이선스 비용 체계는 매우 훌륭했기에 게임의 기본 가격을 5800엔으로 하기 위해 요율만 인하했다. 소니가 직접 도매상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유통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똑같은 게임인데도 슈퍼 패미컴용은 가격이 1만엔을 넘었지만 플레이스테이션 게임은 절반 정도의 가격으로 발매할 수 있었다.
롬 카트리지는 비싸며 생산 소요 시간(리드 타임)이 2개월은 걸렸고 최소 1천개 이상을 주문해야 했으나 소니의 CD-ROM 생산은 비용이 매우 저렴할 뿐만 아니라 생산 소요 시간도 매우 짧아 소량 주문도 받을 수 있는 닌텐도에는 없는 강점이 있었다. 게임이 너무 잘 팔려도 품절 이후 긴 생산 소요 시간으로 인한 기회 손실까지 걱정해야만 했던 닌텐도 시절과 달리 소니는 일주일 단위로 수요를 점검해 빠르게 찍어서 공급할 수 있었고 이 덕분에 개발사와 퍼블리셔, 소매점은 기존 관행에서 필연적으로 발생되었던 문제들에서 어느정도 해방되었다. 소니는 CD-ROM 규격을 정한 회사이면서 음악 회사였던 덕에 CD-ROM 생산 공장과 유통 체계가 있어 다른 회사들에 비해 우위에 설 수 있었다. 게임이 잘 팔리면 음악 CD 생산을 조절해서라도 게임을 생산할 수 있었고 수요 예측을 위한 판매량 점검을 위해 게임의 발매일을 목요일로 조정했다. 이러한 시스템은 초기 출하 20만장의 바이오하자드가 스테디 셀러로 100만장을 달성하며 증명된다.
생산 소요 시간이 짧기 때문에 게임이 품절되더라도 일주일만 기다리면 게임을 구입할 수가 있었기에 중고 시장으로 몰리는 것을 막을 수 있었으며 중고 시장의 대책으로 저렴한 생산비를 이용하여 발매 후 일정 시간이 지난 게임의 염가판을 발매하여 대응했다. 그 덕분인지 재고를 파기할 경우 200엔 정도만 제외하고 로열티는 되돌려주던 시절도 있었다고 한다. 게임 회사들도 자유롭게 디스크 수를 늘리거나 체험판 디스크를 넣을 수 있었고 SIMPLE 시리즈 같은 초 염가 게임도 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게임이 너무 많이 풀리면 가격 하락 압력이 커지기 때문에 소니는 게임의 생산량을 강하게 통제했다. CD는 빠르게 반복 생산할 수 있기 때문에 수급 균형을 통제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 하에 모든 게임의 생산량을 SCE가 결정하는 대신 생산하는 게임을 SCE가 모두 사들여 리스크를 부담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이는 영세 업체로서는 환영할만한 일이었지만 자사 유통이 가능한 대기업에게 있어서는 불필요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니는 끈질기게 게임 회사들을 설득했고 코나미는 18개월간 소니가 하자는 대로 조건을 걸어 승낙했다. 이 제도의 파기를 위해 남코에 연대를 요청했지만 남코는 소니 편을 들었다고 한다. 코나미는 마지못해 수락하고 참아보았지만 직접 조사해보니 그 빠른 반복 생산이라는 것도 생각 외로 잘 돌아가지 않아서 클레임을 넣은 적도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짧은 생산 소요 시간만 믿고 초동 생산량을 지나치게 억제하고 약속을 잘 지켜주지도 않는 바람에 에너미 제로 사건이 벌어졌다. 코나미에게 유통권을 즉시 돌려주지 않고 버티기도 하다가 결국 소니는 1997년 여름 이 제도를 없앴다.
또한 소니가 소매점에게 있어 새로운 희망이 되었냐면 그것도 아니라서 대기업 영업사원이라며 거만한 사람들도 많았고 매장 내 진열 방식 같은 것을 까다롭게 검사하고, 본래는 물건 인수 한달 후 결제하는 관행도 납품 1주일 전에 거둬가는 등의 일도 있었다. 특히 반품을 받지 않는 것이 원칙이긴 해도 뒤로는 받아준다고 했는데 정작 반품을 하려면 태도가 변하고, 반액만 하거나 나중에는 아예 반품 제도가 없어지고 말았다. 그 외에도 할인 판매나 중고 판매가 금지였는데 이를 어기면 게임 공급 제한으로 괴롭히기까지 했다고 한다. 또한 스퀘어가 디지큐브를 만들어 파이널 판타지 7의 초회 생산분의 80%를 디지큐브 가맹 편의점으로 돌리는 바람에 물건이 없어 장사를 못하게 되었다.
특히 할인 판매와 중고 판매를 금지한 것이 문제가 되어 SCE는 일본 공정거래위원회의 조사를 받아 1998년 1월 20일 독점금지법 위반 혐의로 일본 공정거래위원회로 말미암아 배제 권고 명령이 떨어졌다. SCE는 해당 혐의를 부인했지만 2001년 8월 1일에 공정거래위원회 심결에서 사실이 인정됐고, 그해 11월 20일에 결국 SCE는 공정거래위원회의 배제 권고를 수락했다. 중고 판매 문제 역시 재판까지 가서 패배했다.
소니가 자신하던 빠른 반복 생산으로 인한 수급 조절도 완벽한 것이 아니었고 소니 역시 자사가 퍼블리싱하는 그저 그런 게임을 마케팅만으로 팔아보려고 대량으로 찍는 바람에 시장에 중고가 넘치게 되었다. 생산량 통제 포기 이후 캡콤은 바이오하자드 2를 많이 찍었다가 덤핑을 피하지 못하게 된다. 정가 판매를 전제로 염두에 두고 설정한 5800엔이라는 가격이 지켜지지 않아 소매점은 적자에 시달리게 되어 디지큐브가 망한 이후 플레이스테이션2 게임의 기본 가격은 대체적으로 6800엔+세금 수준으로 올랐다.

3. 사양


CPU
소니/LSI logic Coreware CW33300 커스텀 32 비트 33.8 MHz (MIPS I R3000A 호환)
GPU
소니 커스텀 32비트 GPU 53.2 MHz
사운드
소니 커스텀 16비트 SPU
메모리
메인 메모리: 2 MB EDO DRAM
비디오 메모리: 1 MB 16 MHz VRAM
사운드 메모리: 512 KB EDO DRAM
CD-ROM 버퍼: 128 KB
미디어
CD-ROM 2배속
단자
입출력 콘트롤러×2
MEMORY CARD×2
AVMULTI OUT×1
S-VIDEO OUT×1[31]
AV 다이렉트 OUT×1[32]
병렬 포트×1[33]
직렬 포트×1[34]
규격
260 mm×185 mm×45 mm, 1.5 kg
193 mm×144 mm×38 mm, 550 g(PSone)

3.1. 모델


상세 내용은 아카이브기판 참고
맨 끝자리의 숫자는 국가번호이다.[35] 즉 SCPH-1000은 일본에서 나온 SCPH-100x라는 의미.
  • SCPH-100x: 첫 출시 모델이며, 그간 출시된 모델 중 가장 많은 입출력 포트를 자랑한다.
  • SCPH-300x: S단자 비디오 출력부가 제거되었다.
  • SCPH-350x: 부속품에 플레이스테이션 컨트롤러 2개 추가.
  • SCPH-500x: 버그 수정.
  • SCPH-550x: 버그 수정, 컴포지트 비디오(RCA) 출력부 제거. 플레이스테이션 2와 같은 AV멀티 출력 단자를 통해 출력한다. 5501 한정으로 이때부터 멕시코에서도 생산되었다.
  • SCPH-700x: 듀얼쇼크 부속, 부트롬에 CD 디지털 오디오 화상 처리 기능 '사운드 스코프' 내장, CD-ROM 드라이브 비용 절감
  • SCPH-750x: SPU, CD-ROM 드라이브 비용 절감. 기판이 눈에 띄게 작아짐.
  • SCPH-900x: 병렬 포트 제거. 기판이 반토막으로 줄어듦.
  • SCPH-10x: PS one, 전원부를 외부로 빼 어댑터를 추가한 대신 본체를 작게 만들어 휴대성을 높였다.

4. 특징


'''VS'''
'''PS와 SS의 멀티플랫폼 게임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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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비교 1

게임 비교 2

게임 비교 3

게임 비교 4

게임 비교 5

  • CPU와 코프로세서(Control Processor)외에 지오메트리 연산 전용 칩 GTE (Geometry Transformation Engine)을 장착했다. SCE는 이 코프로세서 칩의 연산능력이 초당 최대 150만 폴리곤에, GPU는 초당 최대 36만 폴리곤(텍스쳐, 반투명, 쉐이딩 포함)을 처리할 수 있다고 밝혔는데, 이 두루뭉술한 거짓말에 다들 속아서 다들 대충 '플레이스테이션은 백만 폴리곤' 이라고 믿곤 하는 경우도 많았다. 초당 36만이라는 것도 어디까지나 최대수치에, 초당이라는 말이 또 속임수인데 실질적으로는 표시하고자 하는 프레임으로 나누면 30프레임에 1만2천, 60프레임에 6천에 각종 효과를 더하면 거기서 더 깎아야 한다.

  • Motion JPEG와 H.261 비디오 디코더 기능을 수행하는 MDEC(Playstation Motion Decoder)을 장착했다. 대체로 동영상들은 15프레임으로 담겨졌다. 부동 소수점 연산 장치가 없어 정수 연산만 지원한다.
  • GPU는 도시바가 만들었다. GPU 사양 상으로는 최대 24비트 트루 컬러(16,777,216색) 색상을 지원하지만 성능 확보를 위해 주로 15비트(32,768색) 텍스처로 렌더링했다. 다만 이런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컬러 밴딩 현상을 억제하기 위해 디더링(Dithering)으로 보완했다. S-video 이상의 선명한 화질의 단자로 연결할 경우 디더링 무늬가 잘 보이지만, 플레이스테이션 시절에 주로 쓰였던 컴포지트 영상 단자 이하로 연결하는 경우 무늬는 사라지고 계조 표현이 깔끔해진다. 코드를 조작해서 디더링을 끌 수도 있지만 사일런트 힐 같은 게임의 경우에는 컬러 밴딩 현상이 심해진다. 해상도 256×224에서 최대 640×480까지 지원하나, 주로 256×224나 320×224의 해상도를 썼다.
플레이스테이션은 세가 새턴의 정방향 텍스처 매핑(Forward Texture Mapping)[36]과 반대로 역방향 텍스처 매핑(Inverse Texture Mapping)[37]을 지원했다. 그러나 현대 게임들과 다르게 텍스처 좌표를 원근(Z축)에 따른 보간(Perspective Correction)이 아닌 선형적으로만 보간(Linear Interpolation)해 물체에 매핑했는데, 이런 방식을 두고 아핀 텍스처 매핑(Affine Texture Mapping)이라 부른다.[38] 원근 보정 텍스처 매핑은 부동 소수점 연산이 필요한 데다 연산 성능을 막대하기 잡아 먹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플레이스테이션의 3D 게임들을 잘 살펴 보면 캐릭터가 서 있거나 이동할 때도 텍스처가 찌그러지거나 우글거리는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시대를 먼저 내다보고 3D 기능에 집중하였고 이 예상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특히 실제로도 우수한 엔지니어였던 쿠타라기 켄이 진두지휘하며 칩부터 시작하여 기계를 스스로 설계한 덕분에 플레이스테이션은 뛰어난 성능, 균형적인 사양, 괜찮은 가격 등의 강력한 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다.

게다가 1998년 이후에는 위에 있는 영상처럼 아예 기기의 한계마저 갈 정도의 뛰어난 비주얼을 자랑하는 3D 게임들이 연달아 발매되었다.
  • 플레이스테이션 초기 기종이었던 SCPH-1000과 3000, 1001, 1002에서 컬러 밴딩 현상이 있다. GPU의 사양이었던 8비트가 아닌 5비트 쉐이딩만 했던 버그가 원인이었다. SCPH-1001, 1002 후기 버전과 3500번 모델부터 이 문제를 해결한 GPU가 들어갔다.#

플레이스테이션 컬러 밴딩 현상
  • SPU는 FM, PCM, ADPCM을 지원하며 MIDI 시퀀서 역할도 가능하다. 최대 24채널의 소리를 낼 수 있었고, ADPCM의 경우 그린 북 레벨 B 오디오 규격을 지원해 37.8kHz, 그외의 경우 44.1kHz 샘플 주파수의 16비트 스테레오 사운드를 지원했다. 음악은 다양한 방식을 지원했는데, 전통적인 FM 방식과 전문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디지털 오디오를 ADPCM 등의 손실 압축 코덱으로 압축해 CD에 담는 방식, 데이터와 레드 북 규격의 CD 디지털 오디오가 공존하는 혼합 모드 방식이 있었으나, 주로 가상 악기 샘플 데이터를 CD에 저장해 MIDI 시퀀서로서 음악을 반주하는 방식을 더 선호했다. 그 당시 음질 대비 용량 면에서 가장 효율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사운드 효과로 피치 모듈레이션, 엔벨로프 생성, 잔향 효과를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반복 재생도 지원했다.
  • VRAM은 비디오 메모리의 준말이 아닌 1980년대 중반에 IBM에서 개발한 DRAM 규격들의 하나인 Dual-ported DRAM을 가리킨다. 1001, 1002번대 후기 생산 버전과 3500번대 이후부터는 더 빠른 83MHz, 100MHz SGRAM(Synchronized Graphics DRAM)을 장착했다.
메모리 용량이 작고 확장도 불가능한 관계로[39] 메모리를 많이 사용하는 게임에서 여러 문제점이 있다. 기본적으로 플레이스테이션보다 하드웨어로 더 다양한 2D 효과 기능을 가지고 있고 처리 속도도 더 빠른 데다 확장 메모리를 이용하여 스프라이트 데이터를 추가로 불러들이는 것이 가능한 새턴의 상대가 되기 어렵다. CD-ROM의 로딩 시간도 있다 보니 슈퍼 패미컴 게임도 그대로 이식하지 못하고 읽어들이는 시간만 길어졌으며, 메모리 용량 문제 때문에 프레임이 마구 삭제된 캡콤이나 SNK의 인기 2D 아케이드 게임들은 플레이스테이션 이식판이 매우 낮은 평가를 받았다.[40] 하지만 시대의 흐름이 3D에 있었기에 이런 약점은 큰 문제는 아니었고, 1997년부터는 스트리트 파이터 제로 3처럼 메모리 용량의 한계를 어떻게든 극복해보려 시도한 작품이 나오기도 했다.[41] 또한 3D 기술을 접목시킨 악마성 드라큘라 X 월하의 야상곡과 같은 뛰어난 게임이 나오기도 하였는데, 이 때문에 '2D가 강한 새턴'에 그래픽 품질을 떨어뜨려 이식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하였다.[42] 그리고 록맨 X4도 새턴판 대비 몇몇 그래픽 효과가 사라졌지만 반투명 효과는 좀더 풍부하게 활용하는 뛰어난 품질로 만들어졌다.[43] 그 외 랑그릿사 4도 새턴판에 비해 기기의 한계로 해상도와 사운드는 열화되었지만 게임성은 후속작 랑그릿사 5의 시스템을 베이스로 하여 오히려 PS1판이 좀 더 높은 평가를 받는다.
  • 플레이스테이션의 픽업 어셈블리는 KSM-440이라는 모델명이었다. 맨 첫 모델이 KSM-440-AAM이고 PSone에 쓰인 모델이 KSM-440BAM이다. 번호가 같은 만큼 큰 차이는 없고 선의 길이가 조금씩 다른 정도이다.#
  • 게임 저장을 위해 플래시 메모리를 사용한 외장 메모리 카드를 기본으로 사용하었다. 플레이스테이션의 메모리 카드는 이전의 SRAM으로 구성한 게임 저장 장치들과 다르게 전지가 필요 없기 때문에 데이터를 반영구 보존할 수 있었다. 게다가 데이터의 관리와 다른 메모리 카드로의 이동도 가능했다. 이런 점들은 큰 혁신을 가져왔다.[44] 그러나 속도가 매우 느렸기 때문에 이상한 던전 같은 게임에서는 "강제 저장"이라는 전통이 무너졌다.
이 메모리 카드의 용량은 128 KB(1 Mbit)이고 가격은 1800엔이었기 때문에 역사상 모든 저장 매체를 통틀어서 저장 용량 대비 가격이 가장 비싼 매체였다. 블럭 단위로 게임을 저장할 수 있었으며 1 블럭의 용량은 8 KB였다. 그 중 1개의 블럭은 메모리 카드 내부 관리용으로 시스템에 의해 예약돼 있기 때문에, 총 15개의 블럭(120 KB)을 게임 저장용으로 쓸 수 있었다. 게임에 따라 1~2개의 블럭을 사용했다.
  • 패드 디자인 결정에 있어서 제품 디자이너인 고토 테이유(後藤禎祐)는 현재 모두가 알고 있는 플레이스테이션 패드의 그립형 디자인을 내놓았다. 쿠타라기를 비롯한 사업부에서 기존 소비자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며 종래의 평면형 패드를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자가용 비행기와 헬리콥터 등으로 오가 노리오 사장이 컨트롤 스틱에 일가견이 있었던 걸 알았던 고토는 오가 사장에게 컨트롤 스틱이라는 단어를 쓰면서 컨트롤러 형상의 중요성을 주장했다. 이를 납득한 오가 사장이 고토의 디자인을 채택하면서 그립형 디자인이 플레이스테이션 컨트롤러의 표준 디자인이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45] 고토 테이유는 플레이스테이션 3까지의 디자인에도 참여했으며, 바이오 노트북의 네이밍과 상표 디자인에도 참여했다.
초기에는 단순히 십자 버튼만 있는 패드가 기본이었으나, 닌텐도에서 닌텐도 64용 아날로그 스틱과 진동팩 등을 내놓고 크게 호평을 받자 이걸 카피해서 아날로그 패드를 내놓았고, 1997년 이후 기능을 개선해서 듀얼쇼크를 내놓았다. 아날로그의 조작감은 떨어져도 양 손에 서로 다른 진동을 전해주는 듀얼쇼크 자체는 그야말로 쇼크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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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패드
듀얼쇼크
  • CD-ROM을 기본으로 탑재했다. 최대 용량은 650~700 MB[46]. 물론 이전에도 CD-ROM 게임기는 존재했으나 절묘한 타이밍과 소니라는 존재 자체 덕분에 CD에 관련 단가를 낮추는 것이 가능했고 게임 회사들은 음성이나 동영상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었다.
CD는 검은색이다. 특별한 이유는 없고, 그저 플레이스테이션용 게임 CD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초대 플레이스테이션 CD는 정품과 짝퉁을 구분하기 쉽다.
  • 플레이스테이션의 황혼기나 PS2때 하위호환 이용을 염두에 두고 재출시된 게임이라면 디스크 후면이 검은색이 아닌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파이널 판타지 7 인터내셔널을 꼽을 수 있다.
플레이스테이션 CD를 음악 CD 플레이어에 넣으면 플레이어는 물론 스피커에도 악영향을 끼치는 관계로[47] 1번 트랙에는 음악 트랙으로 경고 메시지[48] 같은 걸 넣었는데, 몇몇 작품 같은 경우는 이 점을 노려서 꽤나 재미있는 경고 메시지를 남기기도 한다. 예를 들어, 역습의 샤아 PS판을 음악 CD 플레이어에 넣으면 아무로와 샤아가 투닥거릴 때 나나이가 말리다가 카미유가 나와서 제타 건담 마지막의 명대사를 날리고 종료한다(참고).
  • CD는 보통의 CD 케이스에 담있다. CD 2장짜리부터는 표지와 매뉴얼을 분리하거나, CD 1장짜리여도 매뉴얼을 분리한 자체 케이스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이후 플레이스테이션 2부터는 자체 킵 케이스에 담았다. 소니 그룹의 자산을 이용하기 쉬웠던 만큼 그 수혜를 톡톡히 보기도 하였다. 직영 CD 프레스 공장이 있었을 뿐 아니라 유통망을 이용하여 게임의 가격을 닌텐도의 절반 정도인 5800엔까지 끌어내린 것은 소비자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구세주라고 봐도 과언이 아닌 것.
  • 하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점차적으로 고용량 게임이 나왔고 CD-ROM 저장 매체로는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당시 SCE의 해법은 바로 CD의 수를 늘려 고용량의 게임들을 여러 개의 CD로 분할시켜 담아두기 시작했고, 실제로 PlayStation 게임 중에서 CD 2장이나 3~4장이 되는 게임들을 볼 수 있다. 특히 절정은 CD 5장이나 되는 게임이 제작하기에 이르렀고 결국에는 SCE 측에서 CD 여러 장으로 분할시켜 고용량 게임을 저장하는 방식을 포기하고 후속 기기인 PlayStation 2에서 저장 용량에 비교적 자유로운 DVD를 저장 매체로 채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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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면은 프린팅, 후면은 검은색
  • 소니타이머라는 말을 유행시킨 주범으로서, 시간이 흐르면 렌즈의 인식률이 떨어져 동영상이 끊기기 시작하며 급기야 게임의 로딩에 실패하는 등의 증상이 발생했다. 이 원인은 렌즈 유닛의 구동부가 플라스틱으로 되어있어 마모에 취약하였기에 슬레드 유닛 가이드의 한쪽이 무너져 레이저가 올바른 위치를 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였다. 때문에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세우거나 뒤집으면 잘 되더라는 민간요법이 먹히기도 했다. 전원부에서 나는 열도 마모를 가속시키는 이유였기에 이후 렌즈 유닛의 플라스틱 부분을 다이캐스트 메탈과 나일론 지지대로 교체하며 렌즈부의 위치를 전원 유닛에서 떨어트리는 식으로 개선한다.
  • 본체는 비용 절감을 목적으로 주로 각종 단자를 제거하는 형식으로 계속적으로 설계를 변경했는데 1000번부터 시작하여 9000번까지 새로운 모델을 발매했다. 가격이 낮아진 만큼 새로운 옵션을(듀얼쇼크 등) 기본적으로 추가해 준다거나 하는 식으로 소비자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최종적으로 TV 입력 단자와 확장 단자가 사라졌다. 또한 후기 기종에서 비디오 메모리가 개선품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병렬 포트를 이용한 주변 기기는 공식적으로 나온 적이 없었으나, 이걸 이용한 액션 리플레이 등이 등장하였다. 불법 복제 문제로 인한 것인지 9000번대 이후의 본체에서는 이 단자를 제거했다. 직렬 포트를 이용하여 2대를 연결해서 멀티 플레이를 할 수 있지만, 플레이스테이션 본체와 TV, 이러한 기능을 지원하는 게임의 디스크가 각각 2개씩 있어야 했다. 사용 빈도가 낮았던 직렬 포트는 결국 PSone에서 제거했다.
  • 공식적으로 플레이스테이션 전용 게임과 음악 CD만 지원하지만, SCPH-5903[49] 한정으로 비디오 CD를 재생할 수 있었다.
  • 기본 개발 언어는 C이나, 신기하게도 C++ 코드를 컴파일러에 넣어도 정상 컴파일이 가능했다는 전설이 있다. 이 현상에 대해 소니에 문의하자 '이상하네요. 우리도 컴파일러 제작 의뢰할 때 사양이 그냥 C였는데...'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고.
  • NTSC방식 PS를 576i PAL방식 TV에 연결하기 위한 N-PAL 컨버터가 있었으며 주로 동남아시아와 같이 TV 방식이 NTSC(타이완, 필리핀, 미얀마)와 PAL(태국, 베트남, 캄포디아, 홍콩/마카오 등 나머지 전부)로 서로 가까우면서 파편화가 된 국가들에서 쓰였다.

5. 발매한 게임



6. 주변기기



6.1. 포켓 스테이션


[image]
포켓스테이션
[50]
플레이스테이션용 휴대용 게임기 형태의 메모리 카드이다. 1999년 1월 23일에 출시했다. 2002년에 단종했으며 대략 500만개를 판매했다. 지원하는 플레이스테이션 게임의 경우 플레이스테이션으로부터 전송받은 미니 게임을 즐길 수 있었다.
세가 드림캐스트의 비주얼 메모리와 같은 콘셉트의 메모리 카드인데, 드림캐스트와 달리 본체에 연결하는 방식이라 패드 무게가 증가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었다. 다만, 전지 소모가 매우 빠른 것이 단점.
도코데모 잇쇼의 성공으로 같이 대박을 쳤다.
'''사양'''
CPU
ARM7T 32비트 33.8 MHz CPU
메모리
2 KB SRAM
스토리지
128 KB 플래시 메모리
디스플레이
32×32 흑백 LCD
사운드
10비트 PCM
통신
적외선 양방향 통신
스위치
5개의 입력 버튼과 1개의 리셋 버튼
배터리
CR2032 리튬 버튼 배터리(3 V, 225 mAh)
규격
64㎜×42㎜×13.5㎜, 30 g

6.1.1. 지원 게임



7. 배리에이션



7.1. PS one


[image]
PS one
[51]
2000년 7월 7일[국내]에 출시된 염가 모델. 2006년 3월 23일에 전 플레이스테이션 모델을 생산 중단할 때까지 2815만 대를 팔았다. 일본에 491만 대, 북미에 1270만 대, 유럽에 1126만 대를 팔았다.
오리지널 PlayStation과 내부 성능상의 차이는 없으나, 두께가 얇아지고 크기가 오리지널의 2/3 정도로 줄고 외형이 둥글어졌으며, 리셋 버튼이 전원 버튼에 통합되었다. 그러므로 PS one을 리셋하기 위해서는 전원 버튼을 껐다 켜는 방법밖에 없다. 또한 전원부가 외부로 빠져, 어댑터를 통해 연결했다. 그리고 직렬 포트도 제거했다.
주변 기기로 아예 부착용 LCD[52]와 스피커를 같이 발매했으며, 휴대용 플레이를 위한 차량용 시거잭 전원 장치까지 발매했다.

7.2. 개발 기기


개발자용 기종으로 연구소나 개발사급에만 판매한[53] 디버깅스테이션이 있으며, 이쪽은 코드프리에다가 동시에 4개의 메모리카드를 사용할 수 있고 8 MB 메모리를 사용한다는 이점이 있다. 기체가 푸른색을 띠고 있어 일명 블루 플레이스테이션이라고 불렸다. 이 디버깅스테이션으로 개발한 게임은 완벽한 개별의 게임으로써 구동이 가능하다.
또한 개발자 양성을 위해 한 때 넷 야로제 프로젝트를 진행, 무광 검은색인 넷 야로제 플레이스테이션을 SCE를 통해 직접 판매하기도 하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건 아니고 서류를 구비해서 국가별 SCE에 제출하면 심사 후 구매가 가능했으며 본체뿐만이 아니라 개발에 사용하는 소프트웨어 등까지 별도로 구매해야 했기 때문에 가격에 자비가 없었다. 디버깅스테이션과 비교해봤을 때 넷 야로제의 차이점은 일반 가정용과 동일한 2MB 메모리를 탑재하고 있다는 것이며, 액세스카드로 메모리 카드 슬롯을 하나 사용하기 때문에 개발 환경에서는 메모리 카드를 1개밖에 쓸 수 없다는 점에 있다. 또한 넷 야로제로 개발한 게임은 반드시 부트 CD와 병행해야만 구동이 가능하다.
컴링크 카드와 액션 리플레이를 이용하면 일반 플레이스테이션으로도 게임을 개발하는 게 가능하긴 했지만, 당연히 디버깅스테이션이나 넷 야로제에 비하면 많은 제약이 따랐다. 현재 디버깅스테이션은 유니크급, 넷 야로제는 레어급 아이템.
[image]
[image]
디버깅스테이션
넷 야로제

7.3. 프로토타입


[image]
닌텐도와 협약 시절의 프로토타입이 발견되었다. 다만, 기기에 닌텐도의 로고가 일절 없고[54] PlayStation이라는 표기 방식과 글자의 폰트도 이후 SCE에서 발매한 버전과 같다는 점을 볼 때 계약 결렬 직후에 새로 설립한 SCE에서 마개조를 시작한 버전으로 보인다.
2016년 7월에 이 기기의 구조 및 스펙이 밝혀졌다! 참고 본체에 별도로 추가한 CPU나 램 등의 칩은 없고, 대신에 함께 유출된 롬 카트리지에 CD 구동 펌웨어가 들어있는 롬과 CD-ROM에서 게임을 로드하기 위한 확장 메모리 2 Mbit(256 KB), 게임 세이브용 64 Kbit(8 KB), 그리고 세이브 데이터 보존용 전지를 내장했다.
더 자세한 사항은 이곳을 참고하자.

7.4. 아케이드 호환기


상술했듯이 SCE는 남코에게 플레이스테이션 시스템 라이선스를 내주었는데, SCE는 플레이스테이션과의 상호 이식 용이성을, 남코는 작고 저렴한 3D 아케이드 게임기를 위해 시스템 1X 시리즈 같은 아케이드 시스템 기판과 게임을 내놓을 수 있었다.
이를 지켜본 주요 아케이드 게임을 내놓는 캡콤, 코나미, 타이토 같은 회사들도 SCE와 계약을 맺어 플레이스테이션 기반 아케이드 시스템 기판을 개발하고 3D 게임을 내놓았는데, 대표적으로 캡콤 ZN-1,2 기판, 코나미 시스템 573 시리즈와 TWINKLE, 타이토 FX-1 시리즈와 G-NET의 아케이드 시스템 기판과 게임을 내놓았다.
플레이스테이션 기반 아케이드 시스템 기판이라고 해도 사운드 시스템은 게임 회사와 기판에 따라 고유의 시스템으로 다르게 구성한 경우가 대부분이며, CPU가 플레이스테이션에 비해 오버클럭 한 경우도 있고 RAM을 더 많은 용량으로 구성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SCE의 아케이드 시스템 기판 지원은 몇 년 더 이어졌는데, 플레이스테이션 2 시절에는 남코의 SYSTEM 2X6 시리즈 기판과 코나미의 파이썬 시리즈 기판에, 플레이스테이션 3 시절에는 남코의 SYSTEM 357 시리즈 기판으로 이어지다가 현재는 아케이드 시스템 기판들을 전부 x86 PC 기반으로 이전하면서 명맥이 끊어졌다.
- 남코
SYSTEM 1X 시리즈를 참고.
- 코나미
TWINKLE시스템 573을 참고.
이외에도 코나미 GV와 GQ 시스템 기판에도 쓰였다.
- 캡콤
  • ZN-1
    • 투신전 2[55]
    • 스타 글래디에이터
    • 스트리트 파이터 EX
    • 로직 프로 어드벤처[56]
  • ZN-2
- 타이토

7.5. 복각판: 플레이스테이션 클래식



[image]
플레이스테이션 클래식 SIEK 공식 트레일러
구성품
상세 스펙
닌텐도 미니 클래식의 성공으로 클래식 미니 복각 제품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고 결국 이를 의식하여 소니에서도 미니 복각판 제품을 발표했다. 플레이스테이션을 출시한지 딱 24년 만인 2018년 12월 3일 발매했으며, 한국에서도 발매했다. 가격은 일본판이 9,980엔(소비세 별도), 한국판이 11만 8천 원이다. 오리지널 플레이스테이션 대비 너비는 45%, 부피는 80% 더 작아졌다. USB-A 타입의 플레이스테이션 패드 2개, HDMI 케이블, USB micro Type-B 케이블, 20개의 게임으로 구성했다. 한국 발매 버전은 모두 영어 버전이다. 720P 출력에 패드는 듀얼쇼크가 아닌 초기형 패드 재현으로 아날로그 스틱과 진동 기능이 없고 인터넷이나 PSN 접속 지원, 트로피 기능 지원 역시 없다. 수량 한정 생산을 공언하고 있으며 일본은 PS+ 가입자 한정으로 1인 1대 예약 추첨을 받아 판매한다. 선행 추첨 이후에는 11월 4일부터 소니 스토어 공식 및 일부 대형 양판점에서 선착순 예약을 받았으며, 11월 9일 전후로 각 매장에서도 예약 수량이 다 차서 예약을 종료한 상태이다.
한국의 경우 11월 2일부터 플레이스테이션 파트너샵 및 게임 전문 온라인 쇼핑몰에서 예약 주문이 가능하다. 게임물관리위원회에서 청소년 이용 불가[58] 등급을 매겼다. 미국 ESRB에서도 M(Mature)등급, 유럽 PEGI에서도 18등급, 일본 CERO에서도 D(17세 이상 대상)등급을 받았다. 한국, 미국, 유럽판은 GTA가 등급을 올리는데 가장 큰 공(...)을 세웠다.
레트로 리시버와 레트로 디자인 블루투스 컨트롤러로 유명한 8BitDo에서 플레이스테이션 클래식을 위한 USB 무선 어댑터를 출시했다. 듀얼쇼크 3,4 / 블루투스를 지원하는 엑스박스 원 S 컨트롤러/ 조이콘, 프로콘, Wii U 프로컨트롤러, Wii 리모컨과 자사의 블루투스 컨트롤러를 플레이스테이션 클래식에서 사용하는것이 가능하며 키보드를 연결하지않아도 에뮬레이션 설정에 접근할 수 있다.

7.5.1. 게임 라인업


일본판에만 수록한 게임과, 국제판에만 수록한 게임이 있다.
게임 라인업
북미/유럽/한국/동남아시아 지역
일본/홍콩/대만 지역
GTA
에이브 어 고고
G 다라이어스
Xi(사이)☆
디스트럭션 더비★☆
레이맨
그라디우스 외전
사가 프론티어
사이폰 필터
쿨 보더즈 2★☆
아머드 코어
패러사이트 이브
트위스티드 메탈
레인보우 식스★☆
아크 더 래드
아크 더 래드 2
공 통
I.Q 인텔리전트 큐브☆
릿지 레이서 타입 4
메탈기어 솔리드
미스터 드릴러
바이오하자드 디렉터즈 컷
슈퍼 퍼즐 파이터 2 X
여신이문록 페르소나
와일드 암즈
점핑 플래시★
철권 3★☆
투신전★☆
파이널 판타지 7
★: PAL 버전, ☆: 2인 플레이 가능

7.5.2. 특징


  • 플레이스테이션 클래식에 들어간 메인 프로세서로 미디어텍 MT8167A가 들어갔다.# 이는 ARM Cortex-A35 1.5 GHz 쿼드코어와 Imagination Technologies PowerVR GE8300으로 구성한 SoC로 하드웨어 성능은 플레이스테이션 에뮬레이션에 문제가 없다고 디지털 파운드리는 평가했다. 이외에도 메모리나 스토리지의 용량은 닌텐도 클래식이나 네오지오 미니를 한참 뛰어넘는 사양을 갖추고 있다.
  • 게임 패드는 듀얼쇼크가 아닌 오리지널 플레이스테이션 패드를 오마쥬한 패드를 두 개 동봉했다. 하드웨어를 약 10만 원 대 수준의 태블릿 사양으로 구성한 탓에, 비용 절감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 패드의 완성도는 오리지널 패드보다도 훌륭하며, PC에 연결해도 작동한다. 단 일반 USB 게임 패드를 플레이스테이션 클래식에 연결하면 방향키 이외에는 동작하지 않는다.
  • 전원을 연결하면 준비 등이 들어온다. OPEN 버튼은 CD를 교체하는데 쓰인다. 전원 요구 사양은 다소 높은 편으로, 닌텐도의 클래식 게임기들이 보통 모니터에 달린 USB 로도 동작하는 반면 플레이스테이션 클래식은 빨간 불이 잠깐 들어왔다가 꺼져 버린다. 이는 모니터에 달아 놓은 USB 허브가 데이터 스트리밍 기능만 지원하는, 원래부터 전원 기능을 제거한 무전원 허브이기 때문이다. 권장 사양에 적어 놓은 5 W(5 V-1 A) USB 전원 장치를 마련해 연결해야 한다.

7.5.3. 평가


발매를 전후하여 인터넷 스트리머, 언론 등지에서 플레이스테이션 클래식에 대한 리뷰를 공개했다. 그러나 '''욕이란 욕은 다 얻어먹고 있다.''' 특히, 기기의 부실한 완성도로 욕을 얻어먹고 있다. 때문에 플스 클래식을 살 돈으로 차라리 "라즈베리 파이, 오드로이드 등 SBC+각종 에뮬OS+엑박360 호환 패드 조합 구성품"을 구매[59]하던가 아니면 그냥 PC로 플레이스테이션 에뮬레이터를 돌리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롭다.
  • 플레이스테이션 클래식에 수록한 게임 리스트는 여전히 논란거리이다. 서구에서도 국제판보다 일본판에 대해 더 호의적인 평가를 보이고 있다. 라인업이 이렇게 부실한데 대해서 PSN 스토어에서 PSone 클래식 게임을 팔고 있는 게임 퍼블리셔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는 플레이스테이션 비타 전용이라 시장이 좁기 때문에 그리 신빙성 높은 주장으로 보이지 않는다. 또 하나, 1990년 대 중후반 이후에 발매한 각 게임들에 쓰인 노래의 곡, 가사, 가수의 목소리와 성우의 대사, 그란 투리스모의 경우에는 여기에 쓰인 자동차, 상표 등, 저작물의 권리자들 사이에 복잡하게 얽혀 있는 계약 문제가 걸림돌이라는 주장이 있다. 11만 8천원의 가격을 맞추기 위해 비용이 많이 드는 복잡한 저작권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단순하고 저렴한 게임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 슈팅 게임 등에서 입력 지연을 호소하는 유저들과 증거 동영상이 올라오고 있는데 디지털 TV의 화질 보정 기능을 끄지 않아서 발생하는 문제로 보인다. 이는 같은 조건인 경우 닌텐도 NES 클래식에서도 똑같이 발생하는 문제이므로 동작 전에 미리 확인해 게임 모드로 전환하거나, 화질 보정 기능을 꺼야 한다. 하지만, 디지털 TV의 화질 보정 기능으로 인한 입력 지연을 모를 리 없는 레트로게이머들의 리뷰에서도 심한 입력 지연을 지적하는 것을 보면 기기 자체에도 어느 정도의 입력 지연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 관련 카페에서도 입력 지연 때문에 정이 가지 않는다는 내용이 올라오고 있으며 같은 조건에서 테스트해 보면 확실히 이쪽이 더 심하다.[60] 실제로 입력지연이 지적된 슈퍼 패미컴 미니는, 80ms(LCD TV 게임모드 기준)로 원본기기보다 30ms 정도 입력지연이 있지만, 플레이스테이션 클래식은 400 ~ 500ms(LCD TV 게임모드 기준)의 입력지연이 있다
  • 일부 게임은 플레이스테이션 클래식에 동봉한 패드로 조작하기 불편하다. 어떤 플레이스테이션 게임들은 아날로그 컨트롤러로 조작하도록 만들어졌으나, 플레이스테이션 클래식에 동봉한 컨트롤러는 4개의 디지털 방향 버튼만 존재한다. 이 때문에 특히 레이싱 게임과 슈팅 게임에서 지나치게 불편하다는 것이다. 특히 레인보우 식스 같은 FPS 게임의 경우 지옥이다.
  • 일본판이 아닌 국제판의 경우 절반에 가까운 게임을 PAL 버전으로 집어넣었다. PAL 방식은 필드 주파수가 50 Hz인 관계로, PAL 버전의 게임은 전부 최대 25 또는 50 프레임으로 동작한다. 철권 3 같은 프레임율이 중요한 격투 게임에서는 치명적인 문제이다. 플레이스테이션 클래식이 60 Hz으로 화면을 출력하는 기기라서 5프레임마다 한 번씩 중복 화면을 출력(1, 2, 3, 4, 5, 5, 1, 2...) 하기 때문에 미세하게 끊기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 최대 720P의 해상도로만 출력이 가능하며, 업스케일링 품질이 형편없다. 게다가 내부에 동작하는 필터가 너무 강해 화면이 뭉개지며, 플레이스테이션 클래식에는 어떤 화면 설정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USB 키보드를 연결하고 ESC를 누르면 에뮬레이터의 다양한 설정 기능이 나온다고 한다(...) 로지텍과 커세어의 USB 키보드로만 동작 가능한 것이 확인되었다. 심지어 이 설정 메뉴를 사용해서 PAL 버전으로 수록한 게임들을 NTSC 버전과 거의 동일한 프레임으로 돌릴 수 있다.
  • 플레이스테이션 클래식의 UI는 오리지날 플레이스테이션 UI를 오마주한 디자인이다. 그런데 이런 디자인에 대해 무성의하다는 평가가 있다.
  • UI 언어를 한국어로 번역하지 않았다. SNK에서 공식 발매한 복각 미니 기기인 네오지오 미니의 UI를 한국어로 번역해 놓은 것과 비교가 된다.
  • 게임의 저장 공간은 예전의 메모리 카드처럼 15개의 저장 공간을 제공하지만, 빠른 저장(Quick Save State) 공간은 게임 하나 당 하나의 공간만 제공한다. 다시 저장하려면 기존에 저장했던 내용을 덮어쓸 수 밖에 없다. NES 미니나 SNES 미니의 경우 4개의 공간을 지원하는 것과 비교가 된다.[61]
  • 디지털 파운드리의 분석에 따르면 플레이스테이션 클래식은 플레이스테이션 2 이후의 거치식 또는 휴대용 게임기에 사용했던 SIE(SCE) 자체 솔루션이 아닌 PCSX-ReARMed 에뮬레이터로 구현했다. 그런데 이 에뮬레이터의 재현도가 전반적으로 문제가 있다. 30프레임으로 동작하는 게임도 힘겹게 돌아가며, 30프레임으로 출력하더라도 프레임 페이싱 문제가 있다. 그 미만 프레임으로 동작하는 PAL 버전 게임들 역시 스터터링을 겪고 있다.# 또한 프레임 저하 외에도 사운드 출력 오류, 그래픽 컬러 밴딩 등 플레이스테이션이나 이후 발매한 플레이스테이션 시리즈 게임기들에 구현한 하위 호환 기능에 비해 뒤떨어지는 에뮬레이션을 보여주어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있다. 디지털 파운드리에서 PSP 또는 플레이스테이션 비타를 구입하는 것을 권장하고 있을 정도이다. 심지어 위에서 서술한 키보드를 사용해서 불러낸 설정 메뉴를 확인해 본 결과, 소니가 에뮬레이터를 커스텀한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조작 계통 설정을 제외하면 사실상 수정 없이 그대로 가져다 쓴 것으로 보인다.

7.5.4. 이후


  • 호기심 많은 해커들에 의해 해킹이 진행 중이다. 플레이스테이션 클래식에 들어간 운영 체제는 임베디드나 IoT 시스템을 위해 맞춤형 리눅스를 쓸 수 있도록 돕는 프로젝트인 Yocto 프로젝트 리눅스 커널 기반#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리고 외장 스토리지를 연결하고 터미널을 통해 임의의 게임 이미지를 불러오는데까지 성공했다. 내장 스토리지 덤프 결과 채워진 용량은 15 GB 정도.
  • 해킹이 어느 정도 성공한 듯 하다. Bleemsync라는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플레이스테이션의 게임을 돌릴 수 있다. USB를 2P에 연결한 뒤에 사용할 수 있다. 단, USB 부팅을 통한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원래 내장 게임이 아닌 USB에 넣은 롬만 보인다. 해킹 방법 및 자세한 것은 이 영상을 참고.
  • 발매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40% 인하 판매가 등장했는데 연말 시즌 판매 결과가 처참했던 것으로 보이며 2019 연초에는 마침내 25달러 로 떨이 처분에 들어갔다. 그야말로 폭망했음을 알려주는 상황. 발매 후에는 게임기 기능도 있는 피규어 취급을 받고 있다.

  • 2019년 7월 중순 즈음 19.99달러로 풀렸다. 악성재고를 어떻게든 털어내려 하는 모양이다. 메가 드라이브 미니가 비교적 좋은 평가를 얻으면서 안 그래도 레트로 게임 매니아에게도 혹평을 받고 있는 플레이스테이션 클래식의 덤핑 행진은 점차 가속화 될 듯하다.

8. 기타


  • 에뮬레이터로 돌리면 닌텐도 64와 새턴보다 잘 돌아간다. 에뮬레이션의 특성상 게임마다 속도가 천차만별로, 비교적 요구 사양이 낮은 블러디 로어 시리즈, 철권부터 높은 요구 사양의 메탈기어 솔리드까지 다양하다. 댄스 댄스 레볼루션버스트 어 무브 같은 일부 리듬 게임은 에뮬레이팅의 약점인 입력 지연에 민감해 PS3/PSP의 공식 플레이스테이션 에뮬레이팅에서도 곡 박자가 어긋나기 때문에 해당 게임을 플레이할 때 플레이스테이션 실기가 필요하다. 아니면 에뮬레이팅이 아닌 하드웨어로 하위 호환을 지원하는 플레이스테이션 2로 돌리거나...
  • 역대 게임기 최초로 CD 플레이어에 시각화를 넣었다. CD 플레이어 화면에서 셀렉트 버튼을 누르면 된다.#
  • 뒷세대의 기기로 플레이스테이션 2, 플레이스테이션 3, 플레이스테이션 4가 나오면서 첫 번째 플레이스테이션인 이 기기는 종종 '플레이스테이션1', 약칭 'PS1'로 불린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플레이스테이션'이라고 하면 시리즈 전체를 부르는 것으로 알기도. 북미에서는 'PSX'로도 불린 적이 있으나 나중에 PS2 기반의 홈 엔터테인먼트 시스템인 PSX가 나와 버려서 혼동이 생겼을 수도 있다.
  • 영국의 채널 BBC의 프로그램인 닥터후에서 나오는 조연 미키가 비행선 조작을 플레이스테이션으로 배웠다고 한다(...).
  • 1999년에 나온 영국 광고가 너무 괴기하다. 보는 사람에 따라 불쾌감이 들 수 있으므로 링크로 대체. 어딘가 묘하게 뒤틀려 보이는 얼굴을 한 소녀가 나오는데, 배경에 이상한 잡음이 깔려서 더욱 섬뜩하게 느껴진다. CF 감독은 영국의 시각 예술가인 크리스 커닝햄으로, 에이펙스 트윈과도 긴밀히 작업한 경력이 있다. CF 모델은 배우인 피오나 맥클레인이 맡았는데, 실제 외모는 CF와 달리 괴이한 외모는 아니고 그냥 괜찮은 외모이다. 그녀의 실제 외모와 배우 이력. 이 사진이 여러 가지를 알려 준다.
원문
해석
Let me tell you what bugs me of the human endeavor
I’ve never been a human in question, have you?
Mankind went to the moon
I don’t even know where Grimsby is
Forget progress by proxy
Land on your own moon
It’s no longer about what they can achieve, out there on your behalf
But what we can experience
Up here and of our own time
And it’s called mental wealth
사람의 노력이 나를 어떻게 괴롭히는지 말해 줄게.
나는 이 질문에 의문이 드는 사람을 본 적이 없는데, 너는 어때?
인류는 달에 착륙했지만,
난 그림스비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라.[62]
그런 진보 따윈 대체품으로 망각해 버리고,
너만의 달로 착륙하러 떠나 봐.
더는 남들이 너 대신에 이뤄줄 일이 야니야.
그래도 우리는 바로 여기에서
우리만의 시간으로
정신적 부유함을 경험할 수 있어.
이 내용을 대충 요약하면, 스스로가 못하는 걸 남들이 대신 이뤄주거나 스스로가 뒤쳐지는 걸 신경 쓰지 말고 게임이나 하면서 자기만의 삶을 즐겨 보라는 뜻.
  • 참고로 모드칩 등으로 복사 방지 우회를 한 뒤 PS-EXE가 아니거나 손상이 된 실행 파일을 포함하는 700 MB 짜리 일반 CD를 넣으면[63] 부팅 후에 소름끼치는 BGM과 화면이 나오면서 사용자들이 공포를 떨게 했다. 사람들은 이를 Fearful Harmony(공포의 화음)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켜고 바로 나오는 것도 아니고 1분 정도 기다려야 나오며 BGM 수준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소름끼친다.영상 사실 이 소리는 의도적으로 넣은 이스터 에그가 아닌 플레이스테이션의 부팅이 오류로 느려지면서 부팅음의 특정 부분을 반복하면서 진행되는 소리라고 한다. 물론 데이터가 손상된 복사 CD를 넣을 경우에도 이 증상이 일어나서, 많은 복돌이들을 떨게 만들었다.[64] 잘 들어보면 플레이스테이션의 부팅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참조
  • 포장 박스는 절대 버리면 안 된다. 보증서를 박스 겉면에 적어놨고 거기다가 판매자 도장까지 찍어주는 특이한 시스템이다. 휴대폰, 노트북, 100달러 이상의 고급 헤드셋 등 다른 IT기기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플레이스테이션은 보증서가 있기 때문에 더더욱 신경써야 한다. 이 박스 보증서는 플레이스테이션 4에서도 유지되고 있으며, 닌텐도 스위치 역시 보증서가 박스에 있다.
  • 신규 게임은 2004년까지 발매했으며, 재발매판을 포함하면 2007년까지 계속 발매했다. SCEK의 출범으로 뒤늦게나마 한국에서도 정식으로 출시한 게임이 몇몇 있다.
  • 플레이스테이션 클래식과 동일한 날짜에 출시한 닛신의 컵라면 나조니쿠동이 20여년 전, 플레이스테이션 출시 CF를 패러디하여 광고를 내보냈다.


닛신의 패러디 '''나조니쿠동'''
PS의 '''1, 2, 3으로 게임이 바뀐다''' 편

8.1. 불법 복제칩


불법복제를 막으려는 소니의 노력도 있었다.
불법복제에 대해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못해도 최소 95년 여름경부터 불법 복제 시장은 존재하고 있었으며 복제 시장 활황의 트리거를 당긴 것은 용팔이들이 96년 3월 발매한 철권 2에 폭리를 취하면서 생긴 반발로 부터라고 보는 시각도 있으나 그보다는 가격인하로 인한 하드웨어 보급의 활성화와 철권2와 바이오 하자드 등 킬러 타이틀의 증가로 인한 시장의 차세대 게임기의 수요 확대로 인한 현상으로도 보여진다. 초기 플레이스테이션 1000번 모델은 별도의 불법 복제칩 없이도 불법 복제 CD를 돌리려면 '볼펜 스프링'이니 '황금축'이니 하는 것을 기기 사이에 끼우고 CD 인식 시간의 허점 사이를 노리는 스왑 스타일의 복돌 꼼수가 성행했다. 그러나 모델을 개량하면서 그 방법이 막혀 플레이스테이션에 불법 복제 CD를 돌릴 수 있도록 정품 인식을 우회하는 불법 복제칩(모드칩)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불법 복제칩에 대하여 소니도 가만히 있지 않았고, 1998년 경에 불법 복제 보호 기능을 만들어 유럽쪽부터 먼저 적용하였다. 후일 LibCrypt라 알려진 코드는 본체에 모드칩이 장착되었는지 판별하여 작동을 멈추는데 이때문에 정품으로라도 쓰기 위해 스위치를 달아 복사칩을 끄기도 하였다. 일본쪽에서는 I.Q.Final Test 와 포포로크로이스 이야기시리즈의 포포로그가 있는데 겨우 1주일도 안 지나서 용팔이 불법 복제업자가 뚫었다고 한다. 이듬해 나온 파이널 판타지 8은 조금 오래 버티긴 했는데, 액션 리플레이로도 보호 기능을 깨는 것이 가능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예 코드를 제거한 불법 복제 CD가 나왔다. 단 이렇게 수정한 게임은 정품과의 게임 데이터 구성이 다소 다르기도 했다. 이후 사일런트 힐, 사가 프론티어 2, DanceDanceRevolution 초창기 PS판, 비트매니아 고타믹스(혹은 그 이후의 5건반 비트매니아 CS판) 같은 작품들이 이 기능을 달고 나왔지만 파이널 판타지 8에서 한번 깨진 이후로는 그런게 있었던줄도 몰랐던 것 처럼 평범하게 불법 복제품을 유통했다. 결국 2000년도 초반에 mm(Multi-Mode)3칩의 등장으로 이 이야기는 옛말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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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예 소프트웨어 방식으로 동작하는 PS-X Change2도 나왔지만 한국에서는 불법 복제칩에 밀려 알려지진 않은 듯하다(...). Gameshark도 동일한 기능을 지원하면 액션 리플레이는 정품 디스크를 삽입하고 CD-ROM메뉴를 선택해 셀렉트 버튼을 눌러 CD 플레이어를 실행해 ODD를 멈추게 한 다음 수입, 서민CD를 삽입해 플레이어에서 나가서 Game Start를 선택하면 된다.
최근엔 전용 모드칩을 설치하여 병렬 포트에 SD 카드 리더를 장착하면 사용할 수 있는 PSIO가 나왔다. 병렬 포트가 없는 모델은 '''구멍을 뚫어야만''' 장착할 수 있다.

9. 관련 문서



[1] 카마엔터테인먼트에서 SCE의 정식 라이선스를 받진 못했지만 해외 유통상을 통해 수입해 판매했다. 프리볼트라는 특징이 있었지만 이미 1995년 여름경부터 밀수가 성행했기 때문에(기사), 큰 반향을 얻지 못했다. 놀랍게도 카마에서 기본적으로 불법 복제 해킹칩이었던 '''모드칩'''을 달아 팔았다.[2] SCEK에서 PSone을 플레이스테이션 2와 동시에 판매하였으나, 당시에 이미 플레이스테이션 2의 시대이기도 했거니와, 플레이스테이션 2로 플레이스테이션 게임 가동도 가능하기 때문에 극소량만 판매됐다.[3] 1996년 5월 16일 → 1997년 3월 3일 → 1998년 8월 30일 → 1999년 8월 23일 → 2002년 5월 15일에 인하했다. 2000년 9월 19일 PSone을 $99에 출시하기도 했다.[4] 세금제외가격. 1995년 7월 21일 → 1996년 3월 28일 → 1996년 6월 22일 → 1996년 11월 15일 → 1997년 11월 13일 → 1998년 12월 1일 → 1999년 5월 28일. 2000년 7월 7일 PSone을 ¥15,000에 출시하기도 했다.→01년 9월 12일 ¥9,800 → 02년 5월 16일 오픈프라이스[5] 출처[6] 화면의 기동음은 내장음원인 SPU의 24채널을 모두 사용해서 연주하는 것이다. 기기 펌웨어의 디버깅 도중에 기동화면과 음악이 필요하다는 요청에 후다닥 만들어 진 것이라고. #[7] 상층부에서는 프레스테라는 약칭을 버린다는 뜻의 捨て라는 단어가 들어있었기 때문에 좋아하지 않았고 실제로 '프레스테라고 부르지마!'라는 광고를 싣기도 하였다.[8] 개발 코드명은 PS-X 같은 이름의 플레이스테이션 2 기반의 비디오 레코더 PSX 가 따로 있는데, 이는 일본에만 발매했다.[9] 이 인터뷰는 마루야마가 쿠타라기를 깎아내린 것이 아니다. 어차피 쿠타라기가 인터뷰를 거의 하지 않기에 마루야마가 대신 나서서 하는 것 뿐이며, 기사를 챙겨 읽고 '또 괜한 소리는 하고 그러세요~' 라고 전화로 한소리 하는 게 늘 있는 일이라고 한다.[10] 참고로 세가의 게임기를 담당했던 사토 히데키와도 원만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쿠타라기 켄과 사토 히데키는 동갑이며, 사토 히데키는 처음에 쿠타라기상이라 불렀다가 쿠타라기 켄이 자신을 편하게 켄이라 불러달라고도 말했고, 이후 쿠타라기 켄은 사토 히데키에게 히데키쨩이라 불렀다. 또한 그는 사토 히데키에게는 듣기 고까운 말이었지만, 세가의 게임기 사업에 대해 일찍부터 그만두는 편이 좋다고 허심탄회하게 얘기한 적도 있다.[11] 이 시절의 프로토타입은 플레이 '''띄고''' 스테이션이다.[12] 닌텐도 오브 아메리카의 사장이면서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의 사위이기도 했다.[13] 소니 뮤직 엔터테인먼트는 이전까지도 패미컴, 메가 CD등에서 몇 종의 게임을 만들어 제법 재미를 보았고, 포르테자, 침묵의 함대, 영화 후크를 기반으로 한 슈퍼패미컴용 CD-ROM 소프트 몇 개를 제작하고 있었는데 이 건이 엎어지게 되면서 그대로 제작비를 날렸다.[14] 我々は本当にこのまま引き下がってもいいのですか。ソニーは一生笑いものですよ。[15] 출처: SONY의 선율(나의 이력서), 오가 노리오, 출처 2[16] 任天堂から顔に泥を塗られて、黙っておられるつもりですか。[17] そこまで言うなら独自路線でいけるかどうか証明してみろ。DO IT![18] 시대의 리더: 쿠타라기 켄 소니 컴퓨터 엔터테인먼트 사장, 일본경제신문, 2009년 5월 22일#대체[19] 세가의 게임으로 얻는 수익은 세가에서, 소니의 게임으로 얻는 수익은 소니에서 전부 갖는 것으로 제안했다. 당시 비디오 게임 관련 세가의 자산이 압도적으로 우수했으므로 세가가 더 유리한 조건으로 판단할 수 있었다.[20] That's a stupid idea, Sony doesn't know how to make hardware. They don't know how to make software either. Why would we want to do this?[21] 저 충고도 나름 호의적인 의도로 한 말이었고, 300만대설도 그정도로 시장이 커지면 반드시 참여한다는 의미였다고 한다.[22] Amusement Machine Show. 현재의 Japan Amusement Expo이다.[23] 이 데모에서 사용한 음악은 나중에 나온 포탈 스토리즈: 멜에서 리메이크되어 등장했다. [24] 정말 100만 대 팔린 이후 야마우치 사장이 물구나무 서서 걷는 건 무리였다고 들었다며 훗날 쿠타라기 켄이 말했다.[25] 소니가 1995년 E3 기조 연설에서 올라프 올라프슨의 25분 남짓 플레이스테이션 발표 도중, 당시 SCEA의 사장이었던 스티브 레이스가 등장해 299만 얘기하고 사라지는 장면은 유명하다.#[26] 이때 세가 오브 아메리카의 토머스 칼린스키는 1995년 3월의 한 언론 인터뷰에서 1995년 9월 2일 토요일(Saturday → Saturnday)에 발매할 계획이라고 인터뷰를 했지만, 세가 본사에서 플레이스테이션보다 먼저 시장 선점을 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베스트바이나 월마트 같은 대형 유통점에 미리 공지도 하지 않고 발매한 병크를 저지르는 바람에 미국 소매점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이유는 북미 시장의 세가 게임기는 1995년까지는 제네시스(메가 드라이브)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세가 새턴의 높은 개발 난이도에 따른 동시 발매작의 부족으로 시장 선점 효과도 누리지 못했다. 유럽 시장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27] 텍스처 필터링 같은 앞선 기능을 많이 포함하고 있었지만 정작 초당 연산 가능한 폴리곤 숫자는 오히려 낮아서 하드웨어 성능이 무조건 높다고 보기엔 조금 애매하다. 게다가 개발 환경 때문에 퍼스트 파티 이외엔 그 성능을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해서 실제 소비자들이 체감할 수 있는 압도적 성능의 차이는 거의 없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28] 스퀘어에서는 SGI 오닉스와 인디 워크스테이션을 구입해서 만든 'Final Fantasy VI : The Interactive CG Game'이라는 3D 데모 영상을 SIGGRAPH 1995에 출품한 적이 있다.[29] 롬 카트리지는 Mask ROM이 쓰였는데 가격 때문에 대용량화가 힘들어 현재까지도 거치형 게임기에서는 광 디스크를 저장 장치로 사용하고 있다. 이 문제는 슈퍼 패미컴 시대에 들어오면서 불거지기 시작했는데 이 때문에 게임 회사들에서 다양한 종류의 압축 해제 확장칩들을 롬 카트리지에 내장해 발매하기도 했다. 닌텐도에서도 S-DD1이라는 압축 해제 확장칩을 개발하기도 했고, 이 칩은 대표적으로 스타 오션스트리트 파이터 제로 2#s-4.2에 내장했다. 용량을 키울 수는 있으나 네오지오의 카트리지처럼 슈퍼 패미컴의 본체만큼 커지고, 두꺼워지고, 비싸진다. 실제로 네오지오 게임의 경우 하나에 수만 엔 이상이었다.[30] 이것으로 SCE의 투자금을 받아 스퀘어의 편의점 유통 자회사인 디지큐브라는 기업을 1996년 2월에 설립했다. 처음에는 게임을 유통했으나 책, 굿즈, 음악 등의 유통으로 넓혀갔다. 2003년 11월 6일에 파산해 스퀘어 에닉스는 이로 인해 7억 6천만 엔의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고 한다.[31] 첫 출시 형번인 1000번에만 존재함.[32] 1000번대, 3000번대, 5000번대.[33] 1000번대, 3000번대, 5000번대, 5500번대, 7000번대.[34] PSone 제외 모든 모델.[35] 0: 일본(NTSC-J), 1: 미국(NTSC-U), 2: 유럽(PAL), 3: 아시아(NTSC-J)[36] 텍스처 텍셀마다 물체의 어느 좌표에 매핑해야할지 결정하는 방식. 클리핑에 불리해 텍스처가 겹쳐지는 일이 많고, 그래서 프레임율에 비효율적이라 현대 3D 게임에서는 쓰지 않고 있다.[37] 물체에 매핑해야 할 좌표마다 텍스처의 어떤 텍셀이 해당하는지 결정하는 방식. 현대의 실시간 3D 렌더링 게임의 사실상 산업 표준이다.[38] 이 대표적으로 이 방식이었고, 단점을 잘 알고 있었던 존 카맥은 벽을 무조건 바닥과 직각으로 만들었고 시야를 제한했다. 둠 성공 이후로 쏟아져 나온 FPS 게임들은 다 같은 방식이었다. 1996년 퀘이크에 들어와서야 원근 보정 기능을 탑재했는데, 그 바람에 권장 사양이 펜티엄 이상으로 크게 높아졌다. 또 닌텐도 64가 원근 보정 기능을 지원한다.[39] 메인 2MB, 비디오 램 1MB. 세가 새턴은 메인 램 2MB, 비디오 램이 1.5MB인데다가 더해서 확장램팩으로 1~4MB를 더할 수 있다.[40] 캡콤의 VS. 시리즈 이식판은 플레이스테이션의 메모리로 캐릭터 네 명분의 데이터를 동시에 담는게 불가능하기 때문에 게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태그 시스템을 삭제했다.[41] 타격 효과를 3D 효과로 대체하거나 장기에프의 앞뒤 이동 모션을 공유해서 사용하는 등 갖은 꼼수를 사용했다.[42] 사실 이 게임은 도트와 몇몇 배경은 2D지만 대부분의 연출은 3D 기술을 접목시킨 게임이기에 단순 2D 횡스크롤 액션 RPG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래서 3D 연출 기능을 잘 활용하기 힘든 새턴에서 추가 요소를 제외하면 다운 이식으로 평가받은 것이다. 자세한 것은 악마성 드라큘라 X 월하의 야상곡세가 새턴 항목 참조.[43] 새턴 게임은 분명 반투명 표현이 가능함에도 플레이스테이션 수준으로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했던 이유는 배경 처리 프로세서인 VDP2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세한 것은 세가 새턴 문서를 참고하자.[44] 닌텐도는 한동안 SRAM과 전지 시스템으로 버티다가 플래시 메모리와 콘트롤러 팩을 도입했다.[45] '플레이스테이션을 만든 사람들' 만화에서는 쿠타라기는 끝내 납득하지 못하다가 고토의 자녀들이 재밌게 즐기는 모습을 보고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고.[46] 원래 CD-ROM은 650 MB 규격으로 나왔으나 이후 트랙을 좀더 촘촘하게 배치하여 기록 용량을 50 MB 더 올린 규격이 새로 나왔다. 이 두 규격은 드라이브 교체 없이 호환이 가능하므로 플레이스테이션에서도 무난하게 700 MB CD 인식이 가능했다.[47] 1990년대 중반 이후에 출시된 음악 CD 플레이어들은 CD-ROM을 감지해서 차단하거나 무음만 재생하기 때문에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지만, 1990년대 이후에 출시되었어도 1990년대 이전 음악 CD 플레이어의 남는 부품을 처리하기 위해 생산했거나, 저가형 부품을 썼기 때문에 감지 기능이 없이 출시된 제품도 있으므로 무조건 안전한 것은 아니다. 재밌는 점은 해당 영상에서 나온 CD-ROM만 그럴 수도 있지만, CD-ROM을 음악 CD 플레이어에서 재생할때 길이가 4분 4초(4:04)로 표시된다는 점이다.[48] 사실 이 요소의 원조는 PC 엔진 CD이다. 한글 3.0b CD도 음악 CD 플레이어에 넣으면 노래를 찾는 사람들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사계(민중가요)가 재생된다.[49] 아시아 지역 한정으로 출시했다. 비디오 CD를 재생하기 위해 MPEG1 디코더를 추가했으며, 일본 지역 코드에 프리볼트를 지원한다.[50] PS1이 DC보다 전 세대 기종이기는 하지만, 시기상으로 VMU보다 늦게 출시되었다.[51] 왼쪽에 살짝 보이는 게임은 철권.[국내] 2002년 2월 22일 PS2와 동시 발매. 여담으로 대한민국의 무분별한 불법복제 디스크때문에 프리 코드라는 유언비어가 돌았으나 후속 기종과 같은 NTSC-J였다.[52] PS2, PS3 본체에 연결해도 화면 출력이 가능하다.[53] 그나마도 가격이 그때 그때 라이선스에 따라 요동치던….[54] 컨트롤러 뒷면에 닌텐도 로고가 있긴 하지만, 양각으로 새겨진 로고라 없애기 어려웠기에 놔둔 것으로 보인다.[55] 타카라에서 만든 게임이지만 캡콤의 아케이드 기판을 썼다.[56] 어뮤즈월드에서 만든 게임이지만 EZ2DJ에 사용하던 자사의 기판이 아닌 캡콤의 아케이드 기판을 썼다.[57] 스페이스 인베이더 25주년 기념작.[58] 5관왕(폭력성, 범죄, 언어의 부적절성, 공포, 약물)이다(...). 이게 다 GTA 탓이다.[59] 다만 게임 롬 파일은 알아서 구할 것.[60] NES 클래식의 경우, 레트로 게이머들의 리뷰에서 입력 지연에 대해 그다지 지적하지 않았다.[61] 닌텐도 뿐만이 아니라 네오지오 미니C64 미니같이 NES 미니 이후에 출시한 대부분의 미니 게임기들은 전부 4개의 세이브 슬롯을 지원한다. 세가의 메가 드라이브 미니 또한 마찬가지다.[62] 잉글랜드 링컨셔 주에 있는 도시이다.[63] 밑 영상에는 우분투 CD를 삽입하였다.[64] 위 영상의 베스트 댓글 중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플레이스테이션은 특정 데이터를 찾지만 실패해서, 그 데이터를 절대 찾을 수 없더라도 그 상태를 유지합니다. 이는 지연을 발생시켜 PlayStation 로고가 매우 느리게 사라지고, 징글 멜로디가 느리게 재생됩니다.(단지 나의 짐작입니다. 그러나 틀리지는 않을 것입니다.)"라는 댓글이 있다. 원문: "Here's why it happens: The PS1 tries to look for specific data, but it fails to find it, so it keeps searching for that data, even though never can find that data. This causes a lot of lag, so the PlayStation logo fades in much slower, and the jingle plays much slower. (I'm just guessing, but it shouldn't be far off from corre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