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자 합의
Plaza Accord, Plaza Agreement
1985년 9월 22일에 프랑스, 서독, 영국, 미국, 일본의 재무장관들이 뉴욕 플라자 호텔에서 진행한 합의.
1970년대 당시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이었던 폴 볼커가 스태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살인적으로 금리를 끌어올려서 달러 가치가 엄청나게 올라갔다. 덕택에 1960~70년대 당시 서구권으로부터 돈을 끌어오던 페루, 아르헨티나, 브라질, 소말리아, 이집트 등 수많은 제3세계 국가들이 높아진 이자로 인해 외채가 불어나면서 국가 파산의 길로 접어들었고, 1980년대 중남미 외채파동의 원인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서구권에서 돈을 끌어다가 공장을 지었던 유고슬라비아, 헝가리, 동독, 루마니아, 불가리아, 폴란드도 경제적으로 엄청난 타격을 받아 1989년 동구권 붕괴에도 영향을 끼쳤을 정도였다. 한국도 이 당시에 세계 순위권에 들 정도로 외채가 엄청났기에 자칫 국가 파산의 길로 접어들 뻔했다.[1]
이때 제3세계 국가들이 가장 큰 타격을 입었지만 미국 내에서도 이자율 급등으로 중소기업들이 자금을 빌려서 쓰는데 애로사항이 꽃피게 되었고 대기업들도 사업투자를 하는데 써야 될 이자 부담이 늘어나는 통에 제조업에 대한 투자가 위축되어 한때 세계의 공장 소리를 듣던 미국의 제조업은 시망의 길을 걷고 말았다. 단적으로 무역수지만 봐도 역대급 호황을 누렸다던 클린턴 시기를 포함해서(!) 1980년 이후 미국은 무역적자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이로 인해 미국은 공산품에 대한 수입을 늘릴 수밖에 없었고 일본이 이 시기에 서독을 넘어서는 제조업 최강국의 위치에 오르게 된다. 이렇게 크게 늘어난 미국의 대일/대독 적자는 1982년 들어 금리가 이미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줄어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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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이론적으로 미국의 환율 약세를 뒷받침하는 이론이 대두되었다. 텍사스 대학의 스테플 메기 교수가 주장했던 J커브 효과(J-curve Effects)였다. 즉, 환율이 변해 한 나라의 통화 가치가 오를 경우 수출/수입의 수량변동이 변하는 속도가 실제적으로는 느리며, 수입품에 대한 기존 수요가 한동안 유지되기 때문에 초반에는 오히려 무역적자가 악화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결국 시간이 지나서는 유의미한 변동이 온다는 이론이었다. 이러한 움직임이 알파벳 J 모양과 유사하여 J커브 이론이라고 한 것이었다. 환율 수지가 수출입량 변화로 나타나는 이 시간은 대략 6~18개월(0.5~1.5년, 평균 1년(12개월)) 정도로 추정되었다.
반면 이 이론에 대한 비판적 견해도 많았다. 실제로 이 변화가 무역수지와는 별개로 엔화와 마르크화의 공세적인 형태로 나타났기 때문. 또 대한민국의 원화가 좋은 예로, 1980년대 초반 "원저"는 한국 수출에 큰 득이 되지 않았다.
당시 미국 내의 여론은 이런 악화된 무역수지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반일감정이 일어났으며, 자동차를 필두로 한 미국 제조기업들과 농민들은 강한 보호무역 정책을 펴든지 아니면 다른 대책을 내놓든지 하라고 정부를 강하게 압박했고, 이를 버틸 수 없었던 당시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은 1985년 9월 22일 뉴욕 플라자 호텔에서 열린 G5(프랑스, 독일, 영국, 미국, 일본) 재무 장관 회의에서 이 달러 강세 문제를 해결하자고 주문하였다. 이 재무 장관 회의에서 도출된 결과는 '''각국 정부 개입에 의한 환율 조정이었고''' 해결은 원만하게 이루어졌다.
당시 대장성대신이었던 다케시타 노보루는 여기에 서명하고 돌아온 뒤 "미국이 일본에 항복했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후에 이 발언은 일본 내의 정치적 반발을 잠재우기 위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후 다케시타 장관은 이 발언이 실수였다고 인정했다. 출처
이후 플라자 합의가 채택되자 독일 마르크화는 채택 1주 만에 약 7%, 엔화는 8.3%가 각각 상승했고[2] , 이후 2년 동안 달러는 30% 이상 급락하게 된다. 이 달러 약세로 인해 미국의 제조업체들은 가격 경쟁력을 회복하였고, 미국의 대유럽 무역적자도 줄어들게 되었다. 하지만 엔화 대비 달러의 가치가 50%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대일적자는 크게 해소되지 않았다. 무역수지가 개선되기 시작한 것은 J 커브 이론의 시한인 1년 반을 훌쩍 넘은 2년 뒤인 1987년 말이었다.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일본의 시장개방이 제한적이었고 일본인들의 성향도 폐쇄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특히 빌 클린턴 집권기를 보면 미국이 일본에 시장개방을 강압한 적이 많았다.
이후 효고현 남부 지진으로 인해 벌어진 엔고 상황에서 엔저를 유도하기 위해 1995년 4월 역 플라자 합의가 성사되었다.[3]
여담으로 플라자 합의로 1986년도부터 1989년도에 이르기까지 한국은 경상수지 흑자를 보는 등의 이익을 보았는데 일본과 수출 경쟁품목이 많은 상황에서 엔화의 가치가 상승하여 상대적으로 원화 가격이 싸졌기 때문이다. 시기적으로도 유가하락, 금리인하, 1988 서울 올림픽으로 인한 투자확대 등이 동시에 맞물렸고, 이때의 호황을 저유가, 저금리, 저환율이 맞물렸다고 해서 '''3저호황'''이라고 한다. 이 시기에 한국은 물건이 없어서 못판다고 할 정도로 수출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사상 최초로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하였다. 또한 한때 외채망국론이 나올 정도로 심각했던 외채가 불과 3~4년만에 절반으로 줄어들었다.[4] 이런 호황은 한국 뿐 아니라 신흥국 전체에 해당하는 것으로 중국도 개혁개방 정책과 맞물려서 상당한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또한 이 합의는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의 직간접적인 원인 중 하나가 된다. 플라자 합의로 일본의 수출이 감소하면서 성장률이 크게 떨어지자, 일본 정부는 경기 부양책을 위해 금리 인하와 부동산 대출 규제 완화책을 썼다. 이 결과 그렇지 않아도 이미 1980년대 초부터 팽창 분위기였던 일본의 부동산 시장과 주식시장에는 엄청난 거품이 생기게 되었고, 이것이 1980년대의 거품경제로 이어진 것. 아무튼 저 플라자 합의 때문에 독일과 더불어 경제적으로 거대한 타격을 입었다.
이 합의에 관한 대책으로 루브르 합의가 나왔으나, 각국의 이해관계의 불일치로 인해 별 소득은 없었다.
한편 플라자 합의 당시 대장성으로 불린 일본 경제부처는 90년대 후반에 여러 뇌물, 정경유착 스캔들로 신음하다, 2001년 일본 중앙 성청 개편을 통해 재무성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단, 플라자 합의 때문에 일본의 거품경제가 붕괴되었다든가, 플라자 합의로 인해 어쩔 수 없었다는 식의 변명은 통하지 않는데, 2019년 현재 이코노미스트 등 영미권의 시각은 '플라자 합의 이후 일본 정부의 대처가 바람직하지 못 했기 때문에 그러한 사태가 일어난 것으로, 플라자 합의만을 탓하는 건 옳지 않다.'는 것이다. 단적으로 똑같은 제조업 대국인 독일(당시 서독)은 플라자 합의에도 불구하고 일본식 버블이나, 장기침체에는 빠지지 않았기 때문이다.[5]
독일은 89년까지는 그런데로 선방하다가 갑작스런 통일 때문에 한동안 경제침체에 빠졌던 적이 있는 걸 두고 플라자합의 때문이라고 몰고가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동독과의 엄청난 격차 해소 및 인프라 건설 등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에 돈잔치 벌이다가 안드로메다로 간 일본과 비교하는 게 무리다. 결정적으로 일본은 플라자합의 후 근 '''10년'''을 버블 경제로 신나는 돈잔치를 벌였다는 사실을 간과하면 안된다. 합의 후 10년 뒤에 효과가 발생했다는 건 억지일 뿐이다.
정리하자면 독일과 일본은 합의 후 수년이 흐른 뒤에 경제침체에 빠졌는데 독일은 통일 때문이고 일본은 버블질 때문이다.
1년 만에 동경도의 지가가 2배 오르고 2주만에 주식이 2배씩 뛰는 미친 버블질을 하면 망하는 게 당연한 거다.
자세한 것은 잃어버린 10년항목을 참조.
외국계 자본은 일본의 버블을 이용해 일본 부동산 시장에서 일본 GDP의 10배에 달하는 이익을 챙겼으며,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규모로 자국민의 돈이 직접적으로 해외로 유출되는 사건이 된다.
경제, 문화적으로 미국의 지위를 위협하던 일본을 성공적으로 견제하였으며, 독일과 일본의 독주를 막음으로써 한국 등 신흥국들이 큰 수혜를 입었다. 일본은 이때 무분별하게 자산시장을 부양해서 경기를 띄우다가 결국 장기침체의 길로 걸었지만 엔고 효과 덕분에 해외자산들을 많이 매입했다. 미쓰비시 그룹이 록펠러 센터를 매입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그 때 거품이 낀 엔화로 마구잡이로 매입한 해외 자산이 벌어다주는 수익은 2019년 기준 원화로 연 229조에 이른다. #
1. 개요
1985년 9월 22일에 프랑스, 서독, 영국, 미국, 일본의 재무장관들이 뉴욕 플라자 호텔에서 진행한 합의.
2. 배경
1970년대 당시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이었던 폴 볼커가 스태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살인적으로 금리를 끌어올려서 달러 가치가 엄청나게 올라갔다. 덕택에 1960~70년대 당시 서구권으로부터 돈을 끌어오던 페루, 아르헨티나, 브라질, 소말리아, 이집트 등 수많은 제3세계 국가들이 높아진 이자로 인해 외채가 불어나면서 국가 파산의 길로 접어들었고, 1980년대 중남미 외채파동의 원인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서구권에서 돈을 끌어다가 공장을 지었던 유고슬라비아, 헝가리, 동독, 루마니아, 불가리아, 폴란드도 경제적으로 엄청난 타격을 받아 1989년 동구권 붕괴에도 영향을 끼쳤을 정도였다. 한국도 이 당시에 세계 순위권에 들 정도로 외채가 엄청났기에 자칫 국가 파산의 길로 접어들 뻔했다.[1]
이때 제3세계 국가들이 가장 큰 타격을 입었지만 미국 내에서도 이자율 급등으로 중소기업들이 자금을 빌려서 쓰는데 애로사항이 꽃피게 되었고 대기업들도 사업투자를 하는데 써야 될 이자 부담이 늘어나는 통에 제조업에 대한 투자가 위축되어 한때 세계의 공장 소리를 듣던 미국의 제조업은 시망의 길을 걷고 말았다. 단적으로 무역수지만 봐도 역대급 호황을 누렸다던 클린턴 시기를 포함해서(!) 1980년 이후 미국은 무역적자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이로 인해 미국은 공산품에 대한 수입을 늘릴 수밖에 없었고 일본이 이 시기에 서독을 넘어서는 제조업 최강국의 위치에 오르게 된다. 이렇게 크게 늘어난 미국의 대일/대독 적자는 1982년 들어 금리가 이미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줄어들지 않았다.
2.1. J 커브 효과
[image]
이때 이론적으로 미국의 환율 약세를 뒷받침하는 이론이 대두되었다. 텍사스 대학의 스테플 메기 교수가 주장했던 J커브 효과(J-curve Effects)였다. 즉, 환율이 변해 한 나라의 통화 가치가 오를 경우 수출/수입의 수량변동이 변하는 속도가 실제적으로는 느리며, 수입품에 대한 기존 수요가 한동안 유지되기 때문에 초반에는 오히려 무역적자가 악화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결국 시간이 지나서는 유의미한 변동이 온다는 이론이었다. 이러한 움직임이 알파벳 J 모양과 유사하여 J커브 이론이라고 한 것이었다. 환율 수지가 수출입량 변화로 나타나는 이 시간은 대략 6~18개월(0.5~1.5년, 평균 1년(12개월)) 정도로 추정되었다.
반면 이 이론에 대한 비판적 견해도 많았다. 실제로 이 변화가 무역수지와는 별개로 엔화와 마르크화의 공세적인 형태로 나타났기 때문. 또 대한민국의 원화가 좋은 예로, 1980년대 초반 "원저"는 한국 수출에 큰 득이 되지 않았다.
3. 합의
당시 미국 내의 여론은 이런 악화된 무역수지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반일감정이 일어났으며, 자동차를 필두로 한 미국 제조기업들과 농민들은 강한 보호무역 정책을 펴든지 아니면 다른 대책을 내놓든지 하라고 정부를 강하게 압박했고, 이를 버틸 수 없었던 당시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은 1985년 9월 22일 뉴욕 플라자 호텔에서 열린 G5(프랑스, 독일, 영국, 미국, 일본) 재무 장관 회의에서 이 달러 강세 문제를 해결하자고 주문하였다. 이 재무 장관 회의에서 도출된 결과는 '''각국 정부 개입에 의한 환율 조정이었고''' 해결은 원만하게 이루어졌다.
당시 대장성대신이었던 다케시타 노보루는 여기에 서명하고 돌아온 뒤 "미국이 일본에 항복했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후에 이 발언은 일본 내의 정치적 반발을 잠재우기 위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후 다케시타 장관은 이 발언이 실수였다고 인정했다. 출처
4. 합의의 영향
이후 플라자 합의가 채택되자 독일 마르크화는 채택 1주 만에 약 7%, 엔화는 8.3%가 각각 상승했고[2] , 이후 2년 동안 달러는 30% 이상 급락하게 된다. 이 달러 약세로 인해 미국의 제조업체들은 가격 경쟁력을 회복하였고, 미국의 대유럽 무역적자도 줄어들게 되었다. 하지만 엔화 대비 달러의 가치가 50%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대일적자는 크게 해소되지 않았다. 무역수지가 개선되기 시작한 것은 J 커브 이론의 시한인 1년 반을 훌쩍 넘은 2년 뒤인 1987년 말이었다.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일본의 시장개방이 제한적이었고 일본인들의 성향도 폐쇄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특히 빌 클린턴 집권기를 보면 미국이 일본에 시장개방을 강압한 적이 많았다.
이후 효고현 남부 지진으로 인해 벌어진 엔고 상황에서 엔저를 유도하기 위해 1995년 4월 역 플라자 합의가 성사되었다.[3]
여담으로 플라자 합의로 1986년도부터 1989년도에 이르기까지 한국은 경상수지 흑자를 보는 등의 이익을 보았는데 일본과 수출 경쟁품목이 많은 상황에서 엔화의 가치가 상승하여 상대적으로 원화 가격이 싸졌기 때문이다. 시기적으로도 유가하락, 금리인하, 1988 서울 올림픽으로 인한 투자확대 등이 동시에 맞물렸고, 이때의 호황을 저유가, 저금리, 저환율이 맞물렸다고 해서 '''3저호황'''이라고 한다. 이 시기에 한국은 물건이 없어서 못판다고 할 정도로 수출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사상 최초로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하였다. 또한 한때 외채망국론이 나올 정도로 심각했던 외채가 불과 3~4년만에 절반으로 줄어들었다.[4] 이런 호황은 한국 뿐 아니라 신흥국 전체에 해당하는 것으로 중국도 개혁개방 정책과 맞물려서 상당한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또한 이 합의는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의 직간접적인 원인 중 하나가 된다. 플라자 합의로 일본의 수출이 감소하면서 성장률이 크게 떨어지자, 일본 정부는 경기 부양책을 위해 금리 인하와 부동산 대출 규제 완화책을 썼다. 이 결과 그렇지 않아도 이미 1980년대 초부터 팽창 분위기였던 일본의 부동산 시장과 주식시장에는 엄청난 거품이 생기게 되었고, 이것이 1980년대의 거품경제로 이어진 것. 아무튼 저 플라자 합의 때문에 독일과 더불어 경제적으로 거대한 타격을 입었다.
이 합의에 관한 대책으로 루브르 합의가 나왔으나, 각국의 이해관계의 불일치로 인해 별 소득은 없었다.
한편 플라자 합의 당시 대장성으로 불린 일본 경제부처는 90년대 후반에 여러 뇌물, 정경유착 스캔들로 신음하다, 2001년 일본 중앙 성청 개편을 통해 재무성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단, 플라자 합의 때문에 일본의 거품경제가 붕괴되었다든가, 플라자 합의로 인해 어쩔 수 없었다는 식의 변명은 통하지 않는데, 2019년 현재 이코노미스트 등 영미권의 시각은 '플라자 합의 이후 일본 정부의 대처가 바람직하지 못 했기 때문에 그러한 사태가 일어난 것으로, 플라자 합의만을 탓하는 건 옳지 않다.'는 것이다. 단적으로 똑같은 제조업 대국인 독일(당시 서독)은 플라자 합의에도 불구하고 일본식 버블이나, 장기침체에는 빠지지 않았기 때문이다.[5]
독일은 89년까지는 그런데로 선방하다가 갑작스런 통일 때문에 한동안 경제침체에 빠졌던 적이 있는 걸 두고 플라자합의 때문이라고 몰고가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동독과의 엄청난 격차 해소 및 인프라 건설 등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에 돈잔치 벌이다가 안드로메다로 간 일본과 비교하는 게 무리다. 결정적으로 일본은 플라자합의 후 근 '''10년'''을 버블 경제로 신나는 돈잔치를 벌였다는 사실을 간과하면 안된다. 합의 후 10년 뒤에 효과가 발생했다는 건 억지일 뿐이다.
정리하자면 독일과 일본은 합의 후 수년이 흐른 뒤에 경제침체에 빠졌는데 독일은 통일 때문이고 일본은 버블질 때문이다.
1년 만에 동경도의 지가가 2배 오르고 2주만에 주식이 2배씩 뛰는 미친 버블질을 하면 망하는 게 당연한 거다.
자세한 것은 잃어버린 10년항목을 참조.
외국계 자본은 일본의 버블을 이용해 일본 부동산 시장에서 일본 GDP의 10배에 달하는 이익을 챙겼으며,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규모로 자국민의 돈이 직접적으로 해외로 유출되는 사건이 된다.
5. 의의
경제, 문화적으로 미국의 지위를 위협하던 일본을 성공적으로 견제하였으며, 독일과 일본의 독주를 막음으로써 한국 등 신흥국들이 큰 수혜를 입었다. 일본은 이때 무분별하게 자산시장을 부양해서 경기를 띄우다가 결국 장기침체의 길로 걸었지만 엔고 효과 덕분에 해외자산들을 많이 매입했다. 미쓰비시 그룹이 록펠러 센터를 매입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그 때 거품이 낀 엔화로 마구잡이로 매입한 해외 자산이 벌어다주는 수익은 2019년 기준 원화로 연 229조에 이른다. #
6. 관련 문서
[1] 예외로 북한은 1970년대 초반에 서구권 국가들로부터 상당한 돈을 끌어왔지만 일찌감치 디폴트를 선언했고, 소련으로부터 경제지원까지 강하게 받고 있던 탓에 경제 침체는 일어나도 루마니아처럼 경제파탄이 나는 현상은 벌어지지 않았다. 나중에는 망하기는 했지만.[2] 일본은 플라자 합의 전까지 연평균 엔달러 환율이 1달러에 200엔이 항상 넘었다. 그리고 플라자 합의 이후인 1985년에 엔달러환율은 200엔 이하로 내려가면서 엔화가 고평가되기 시작한다.[3] 이 당시 일본은 1994년의 환율이 평균 1달러에 99엔까지 떨어졌었다.[4] 하지만 1990년 3저가 끝나자마자 경상수지는 다시금 적자로 전환되어 꾸준히 증가했고, 외채도 1989년 270억 달러에서 1996년 1600억 달러로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결국 이런 빚잔치는 1997년 외환 위기로 끝이 난다.[5] 물론 독일도 여러 차레 경기침체에 빠졌었지만, 그때마다 과감한 경제개혁을 통해서 잘 빠져나와서 지금까지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