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드로 페트로네

 

'''페드로 페트로네의 수상 이력'''

'''1924 코파 아메리카 MVP'''
'''페드로 페트로네'''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1930'''

'''우루과이의 前 축구선수'''
<color=#373a3c> ''' 이름 '''
'''페드로 페트로네
Pedro Petrone'''

<color=#373a3c> ''' 본명 '''
페드로 페트로네 스키아보네
Pedro Petrone Schiavone
<color=#373a3c> ''' 출생 '''
1905년 5월 11일/
몬테비데오
<color=#373a3c> ''' 사망 '''
1964년 12월 13일
<color=#373a3c> ''' 국적 '''
우루과이
<color=#373a3c> ''' 신체 '''
173cm | 체중 74kg
<color=#373a3c> ''' 포지션 '''
스트라이커
<color=#373a3c> ''' 소속팀'''
솔페리노 몬테비데오 (1920-1923)
차를레이 (1923-1924)
나시오날 (1924-1931)
ACF 피오렌티나 (1931-1933)
나시오날 (1933-1934)
<color=#373a3c> ''' 국가대표 '''
29경기 24골(우루과이 / 1923~1930)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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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373a3c> ''' 등번호 '''
-[1]


1. 생애
1.1. 선수 생활
1.1.1. 클럽
1.1.2. 국가대표
1.1.3. 이탈리아 생활. 그리고 그 이후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
3. 뒷 이야기
4. 수상
4.1. 클럽
4.2. 국가대표
4.3. 개인


1. 생애



1.1. 선수 생활



1.1.1. 클럽


처음 솔페리노 클럽에서 16살의 나이로 데뷔할 때의 페트로네의 포지션은 골키퍼였다. 하지만 공격수로서의 재능을 인정받고 포지션을 변경하게 된다. 1923년 차를레이로 옮긴 이후 첫 7경기에서 4골을 넣었다. 국가대표팀에도 뽑힌 페트로네는 기량을 더욱 키웠고 우루과이의 빅팀 중 하나인 나시오날에서 페트로네를 영입하였다.
이렇게 성공가도를 달리던 페트로네였지만, 1925년 4월 12일. 유럽 투어에서 무릎 부상#s-2.1으로 인해 그는 4개월을 쉬어야 했다.

우리는 바르셀로나와 어려운 경기를 했습니다. 예상과 같이 저는 별로 좋지 않았어요. 갑자기 엑토르가 제 앞으로 패스를 했고; 저는 달렸고, 멈췄을 때 최고의 상대를 만났죠. 오른쪽으로 드리블을 하려 생각했어요. 그런데 높은 힐과 부츠를 신고 있어서 땅에 발이 박혀버려서 움직이지 않았죠. 무릎 쪽에 끔찍한 통증이 느껴졌어요. 더는 경기를 뛸 수 없었죠. 과장할 것도 없이 그 고통은 누군가 손에 무기를 갖고 필사적으로 쏘는 느낌이었죠.

페드로 페트로네(올림픽 돌풍: 콜롱브와 암스테르담 중에서)

한 때 다리를 절단해야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기도 했지만 페트로네는 결국 8월 1일에 돌아왔고 복귀전에서 2골을 넣었다.

1.1.2. 국가대표


페트로네의 국가대표팀 데뷔는 1923년 자국에서 열린 코파 아메리카였다. 당시 그는 18살의 어린 공격수였고 페드로 세아에게 밀려 인사이드-레프트로 출전하였다. 하지만 그는 매 경기마다 골을 넣으며 축구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고, 아르헨티나의 비센테 아기레와 더불어 공동 득점왕의 자리에도 올랐다. 대회 우승팀 자격으로 참가한 이듬해에 열린 올림픽에서 페트로네는 5경기에 출전, 7골을 터뜨리며 우루과이를 올림픽 우승으로 이끌었다. 역시 득점왕이었다. 그리고 그 해에 다시 열린 코파 아메리카에서 페트로네는 다시 우루과이의 우승을 이끌었고 4골로 득점왕과 MVP를 싹쓸이했다.
하지만 무릎 부상으로 인해 국가대표팀에서 3년간 출전하지 못했다. 1927년 코파 아메리카에 복귀하여 해트 트릭을 작성했지만 팀은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다. 이듬해의 올림픽에 출전한 페트로네는 8강에서부터 출전했지만 팀 내 최다 득점을 올리며 올림픽 2연패의 금자탑을 쌓았다.
이렇게 우루과이 최고의 공격수로 명성을 쌓았던 페트로네였지만 최고의 대회였던 월드컵과는 큰 인연을 맺지 못했다. 조국에서 열린 초대 월드컵에 출전한 페트로네는 첫 경기 페루전을 끝으로 부상으로 인해 전열에서 이탈하였다. 그것이 페트로네의 마지막 A매치였고 팀 동료들이 월드컵에서 우승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1.1.3. 이탈리아 생활. 그리고 그 이후


1931년 여름, 페트로네는 피오렌티나로 이적하였다. 페트로네는 피오렌티나의 첫 외국인 선수였으며, 팬들은 그를 따뜻하게 환영해주었다. 리그 데뷔전의 상대는 AC 밀란이었고 첫 득점 상대는 브레시아 칼치오였다. 그곳에서도 득점력은 어디가지 않아서 안젤로 스키아비오와 함께 공동 득점왕에 올랐다.
두 번째 시즌에는 피오렌티나 역사상 최초로 유벤투스를 꺾는데 성공하였고, 그를 위해 피오렌티나의 회장 리돌피는 피아트 508 바릴라를 선물하였다. 하지만, 피오렌티나와의 관계는 이 시즌 말엽에 급격히 악화되었는데 페트로네를 아웃사이드-라이트로 보내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피오렌티나는 페트로네의 활약이 조금 떨어지던 차에 새로운 스트라이커 가스토네 프렌다토를 스트라이커로 세우려 했고 페트로네의 포지션 변경을 요구했다. 하지만 페트로네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피오렌티나는 그에 대한 대답으로 2천 파운드의 벌금과 함께 그를 내쫓았다. 페트로네는 그로 인해 피오렌티나에 실망하고 피렌체를 떠나 고국 우루과이로 돌아왔다.
그리고 원 소속팀에서 뛰던 페트로네는 1934년 3월 갑자기 우루과이를 떠나 이탈리아로 돌아갔다. 이것은 계약 위반. 그리고 페트로네의 선수 생활은 여기에서 마무리가 되었다.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


백 미터를 11초대에 주파하는 빠른 발, 강력하면서도 정확한 슈팅, 강한 몸싸움을 무기로 삼았다. 그 뿐만 아니라 오프사이드 라인에서 공격에만 신경 쓰던 여느 센터 포워드들과는 달리 종종 밑으로 내려와서 플레이메이커의 역할도 겸했다한다. 그래서 종종 축구 역사상 현대적인 스트라이커의 시초로 칭해진다.

페트로네는 그저 패스를 하고 코트의 중앙을 보아야 했다: 그러면 골이었다.
(A Petrone solamente hay que pasarle la pelota y mirar el centro de la cancha: es gol.)

엑토르 스카로네


3. 뒷 이야기


  • 1924년 올림픽에 출전할 당시 그의 나이는 19세였다. 이는 현재까지 축구 부문 최연소 금메달리스트 기록이다.
  • 나시오날의 1925년 유럽 투어 당시 우루과이에서 처음으로 부상으로 인해 수술을 받은 축구 선수가 되었다.
  • 페트로네가 처음 피렌체에 도착하였을 때, 축구화가 없어져서 피렌체의 가게들을 뒤지고 다녔다. 결국 축구화를 찾아낸 곳은 이전 기착지였던 볼로냐였다.

4. 수상



4.1. 클럽



4.2. 국가대표



4.3. 개인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