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나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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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WWE 소속의 레슬러로 일본 출신. WWF에서 데뷔한 이래 10년 이상을 장기 근무한 베테랑이며 동시에 자칭 '스맥다운 넘버 원 아나운서'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나름 존재감을 드러낸 인물이기도 하다.
후나키는 후지와라 요시아키의 PWFG라는 단체에서 슛 스타일의 프로레슬러로써 활동했고, 후에 Battlarts라는 단체로 이적했다. 그러다 루차 리브레 스타일이 마음에 든 그는 그레이트 사스케의 MPE라는 단체로 이적해서 TAKA 미치노쿠, 딕 토고 등과 함께 카이엔타이라는 스테이블을 결성한다. 그리고 1996년 10월 10일에 딕 토고, Men's 테이오, 시류[8] , 후나키 쇼이치, TAKA 미치노쿠 vs 그란 하마다, 그란 나니와, 야쿠시지 마사토, 스펠 델핀, 타이거 마스크 IV세 경기에 참가했는데, 데이브 멜처에게서 5성 만점을 받은 한편 레슬링 옵저버 뉴스레터 선정 1996년 올해의 경기 3위에 이름을 올린다. UWA라는 단체에서 UWA 월드 미들웨이트 챔피언을 지낸 적도 있다.
WWF에서 활동하고 있던 TAKA 미치노쿠의 제안으로, 카이엔타이의 멤버들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WWF와 계약한다. 그 후로 TAKA 미치노쿠를 계속 공격하며 강제로 카이엔타이에 가입시키는 각본을 수행한다. TAKA 미치노쿠가 결국 카이엔타이에 가입한 후에 개그 악역 스테이블로 활동할 때 각본상으로 발 비너스의 성기를 자른다.
딕 토고와 Men's 테이오가 일본으로 돌아간 후, TAKA 미치노쿠와 후나키는 카이엔타이라는 이름의 태그팀으로써 활동하게 된다. 그때 아무리 일본어로 떠들어도 담당성우가 TAKA 미치노쿠의 EVIL!과 후나키의 INDEE~~D만 외치는 것이 컬트적인 인기를 끈다. 레슬매니아 2000에서 하드코어 배틀로얄에 참가해서 브래드쇼의 플라잉 숄더 블록을 맞고 쓰러진 비세라를 핀하며 하드코어 챔피언이 되었지만, 얼마 안 가 민 스트리트 파시의 로드니에게 핀을 당하며 타이틀을 뺐겼다. 그리고 언포기븐 2000에서도 하드코어 배틀로얄에 참가하지만 타이틀 획득에는 실패한다.
TAKA 미치노쿠가 WWF를 떠난 후, 후나키는 솔로로 전향한다. 2002년 드래프트에서 후나키는 스맥다운으로 이적해서, 스스로 자버인 것을 인정하며 백 스테이지에서 인터뷰를 하는 스맥다운 넘버 원 아나운서 기믹으로 활동한다. 크루저웨이트 디비젼에서 활동했지만, 주로 벨로시티에서 경기를 가졌다. 그 뒤 울티모 드래곤과 자버 태그팀으로 잠시 활동하기도 했으나 쥐도새도 모르는 사이에 팀이 조용히 해체된 후론 간혹 6인 태그매치에 참여하거나 경기에서 다른 선수들을 상대로 3분이상 버티면 오래버틴것일만큼 쉽게 깨져오면서 별 활약이 없다가 크루져웨이트 챔피언쉽 넘버 원 컨텐더를 정하는 7인 배틀로얄에서 우승을 한 데 이어 아마겟돈 2004에서 크루저웨이트 타이틀을 차지한다.
스파이크 더들리, 차보 게레로, 아키오, 눈지오 등을 상대로 자신의 크루저웨이트 타이틀을 지키다가 노 웨이 아웃 2005에서 차보 게레로에게 타이틀을 빼앗긴다. 그 뒤로 계속 크루저웨이트 챔피언쉽 경기에 참여하지만 타이틀을 되찾지는 못했다. 그 뒤로 스카티 투 하티와 자버 태그팀으로 다니면서 잡을 해주다가 뇌진탕으로 인해 잠시 회복 기간을 가졌다. 그 사이에 이벤트성으로, 인디 단체에서 카이엔타이 DX 멤버들과 일회성으로 재결합하여 경기를 치룬다. WWE에 복귀한 후에도 자버로 활동했는데, 스맥다운 녹화와 ECW 방송 사이에 있었던 다크 매치에서 블라디미르 코즐로프를 상대로 경기를 가지다가 코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고 다시 한 번 휴식기를 가지게 된다.
부상에서 복귀한 후나키는 링네임을 쿵 푸 나키로 바꾸고, 경기용 팬츠 대신 도복[9] 을 입고 나온다. 쿵 푸 나키를 처음 선보였을 때 알 트루스와 태그팀을 맺어 MVP&셸턴 벤자민을 상대했는데, MVP를 크레인 킥으로 쓰러뜨린 뒤 커버하여 승리한다. 2008년 12월 5일 스맥다운에서는 WWE 챔피언 에지를 상대해서 비록 졌지만 어느 정도 선전했다. 이후 다시금 자버의 길을 걷다가 2010년 4월 22일에 방출된다.
후나키는 WWE 내의 커리어간 대부분 별 볼일 없는 자버로 활동했지만 일본 시장에서의 상품성을 평가받아 오래도록 WWE에서 활동할 수 있었으며, WWE는 극동 에이전트라는 새로운 직함을 만들어 후나키를 임명하는 등 대우를 잘 받았다. 또 후나키가 WWE에 입성한 후부터 숀 마이클스와 친분이 두터웠던 덕도 있다. 텍사스 샌 안토니오에 자신의 이름을 딴 프로레슬링 스쿨인 푸나키 도조를 운영하면서 일본을 떠나 텍사스에 정착을 했는데, 푸나키가 우상으로 여기는 숀 마이클스의 거주지와 가까운 곳에서 지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WWE를 떠난 뒤 후나키는 ZERO-ONE과 계약하여 그의 제자인 히다카 이쿠토와 팀을 이뤄 활동했다. 또 TNA One Night Only: World Cup of Wrestling에서 팀 인터네셔널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2011년부터 2013년까지 일본에서 개최된 WWE 하우스 쇼의 특별 레프리를 맡았다. 이타미 히데오의 NXT 데뷔 후 첫 인터뷰 영상에서 통역 역할로 출연하였다. 레슬매니아 32부터 WWE의 일본어 해설로써 활동하는 한편 아스카, 나카무라 신스케, 이타미 히데오 등 일본인 프로레슬러들의 WWE 적응을 돕는 등 다양한 부분에서 활약하고 있다.
1. 프로필
'''INDEE~~D'''
'''SMACKDOWN #1 ANNOUNCER'''
2. 소개
전 WWE 소속의 레슬러로 일본 출신. WWF에서 데뷔한 이래 10년 이상을 장기 근무한 베테랑이며 동시에 자칭 '스맥다운 넘버 원 아나운서'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나름 존재감을 드러낸 인물이기도 하다.
3. 커리어
후나키는 후지와라 요시아키의 PWFG라는 단체에서 슛 스타일의 프로레슬러로써 활동했고, 후에 Battlarts라는 단체로 이적했다. 그러다 루차 리브레 스타일이 마음에 든 그는 그레이트 사스케의 MPE라는 단체로 이적해서 TAKA 미치노쿠, 딕 토고 등과 함께 카이엔타이라는 스테이블을 결성한다. 그리고 1996년 10월 10일에 딕 토고, Men's 테이오, 시류[8] , 후나키 쇼이치, TAKA 미치노쿠 vs 그란 하마다, 그란 나니와, 야쿠시지 마사토, 스펠 델핀, 타이거 마스크 IV세 경기에 참가했는데, 데이브 멜처에게서 5성 만점을 받은 한편 레슬링 옵저버 뉴스레터 선정 1996년 올해의 경기 3위에 이름을 올린다. UWA라는 단체에서 UWA 월드 미들웨이트 챔피언을 지낸 적도 있다.
WWF에서 활동하고 있던 TAKA 미치노쿠의 제안으로, 카이엔타이의 멤버들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WWF와 계약한다. 그 후로 TAKA 미치노쿠를 계속 공격하며 강제로 카이엔타이에 가입시키는 각본을 수행한다. TAKA 미치노쿠가 결국 카이엔타이에 가입한 후에 개그 악역 스테이블로 활동할 때 각본상으로 발 비너스의 성기를 자른다.
딕 토고와 Men's 테이오가 일본으로 돌아간 후, TAKA 미치노쿠와 후나키는 카이엔타이라는 이름의 태그팀으로써 활동하게 된다. 그때 아무리 일본어로 떠들어도 담당성우가 TAKA 미치노쿠의 EVIL!과 후나키의 INDEE~~D만 외치는 것이 컬트적인 인기를 끈다. 레슬매니아 2000에서 하드코어 배틀로얄에 참가해서 브래드쇼의 플라잉 숄더 블록을 맞고 쓰러진 비세라를 핀하며 하드코어 챔피언이 되었지만, 얼마 안 가 민 스트리트 파시의 로드니에게 핀을 당하며 타이틀을 뺐겼다. 그리고 언포기븐 2000에서도 하드코어 배틀로얄에 참가하지만 타이틀 획득에는 실패한다.
TAKA 미치노쿠가 WWF를 떠난 후, 후나키는 솔로로 전향한다. 2002년 드래프트에서 후나키는 스맥다운으로 이적해서, 스스로 자버인 것을 인정하며 백 스테이지에서 인터뷰를 하는 스맥다운 넘버 원 아나운서 기믹으로 활동한다. 크루저웨이트 디비젼에서 활동했지만, 주로 벨로시티에서 경기를 가졌다. 그 뒤 울티모 드래곤과 자버 태그팀으로 잠시 활동하기도 했으나 쥐도새도 모르는 사이에 팀이 조용히 해체된 후론 간혹 6인 태그매치에 참여하거나 경기에서 다른 선수들을 상대로 3분이상 버티면 오래버틴것일만큼 쉽게 깨져오면서 별 활약이 없다가 크루져웨이트 챔피언쉽 넘버 원 컨텐더를 정하는 7인 배틀로얄에서 우승을 한 데 이어 아마겟돈 2004에서 크루저웨이트 타이틀을 차지한다.
스파이크 더들리, 차보 게레로, 아키오, 눈지오 등을 상대로 자신의 크루저웨이트 타이틀을 지키다가 노 웨이 아웃 2005에서 차보 게레로에게 타이틀을 빼앗긴다. 그 뒤로 계속 크루저웨이트 챔피언쉽 경기에 참여하지만 타이틀을 되찾지는 못했다. 그 뒤로 스카티 투 하티와 자버 태그팀으로 다니면서 잡을 해주다가 뇌진탕으로 인해 잠시 회복 기간을 가졌다. 그 사이에 이벤트성으로, 인디 단체에서 카이엔타이 DX 멤버들과 일회성으로 재결합하여 경기를 치룬다. WWE에 복귀한 후에도 자버로 활동했는데, 스맥다운 녹화와 ECW 방송 사이에 있었던 다크 매치에서 블라디미르 코즐로프를 상대로 경기를 가지다가 코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고 다시 한 번 휴식기를 가지게 된다.
부상에서 복귀한 후나키는 링네임을 쿵 푸 나키로 바꾸고, 경기용 팬츠 대신 도복[9] 을 입고 나온다. 쿵 푸 나키를 처음 선보였을 때 알 트루스와 태그팀을 맺어 MVP&셸턴 벤자민을 상대했는데, MVP를 크레인 킥으로 쓰러뜨린 뒤 커버하여 승리한다. 2008년 12월 5일 스맥다운에서는 WWE 챔피언 에지를 상대해서 비록 졌지만 어느 정도 선전했다. 이후 다시금 자버의 길을 걷다가 2010년 4월 22일에 방출된다.
후나키는 WWE 내의 커리어간 대부분 별 볼일 없는 자버로 활동했지만 일본 시장에서의 상품성을 평가받아 오래도록 WWE에서 활동할 수 있었으며, WWE는 극동 에이전트라는 새로운 직함을 만들어 후나키를 임명하는 등 대우를 잘 받았다. 또 후나키가 WWE에 입성한 후부터 숀 마이클스와 친분이 두터웠던 덕도 있다. 텍사스 샌 안토니오에 자신의 이름을 딴 프로레슬링 스쿨인 푸나키 도조를 운영하면서 일본을 떠나 텍사스에 정착을 했는데, 푸나키가 우상으로 여기는 숀 마이클스의 거주지와 가까운 곳에서 지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WWE를 떠난 뒤 후나키는 ZERO-ONE과 계약하여 그의 제자인 히다카 이쿠토와 팀을 이뤄 활동했다. 또 TNA One Night Only: World Cup of Wrestling에서 팀 인터네셔널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2011년부터 2013년까지 일본에서 개최된 WWE 하우스 쇼의 특별 레프리를 맡았다. 이타미 히데오의 NXT 데뷔 후 첫 인터뷰 영상에서 통역 역할로 출연하였다. 레슬매니아 32부터 WWE의 일본어 해설로써 활동하는 한편 아스카, 나카무라 신스케, 이타미 히데오 등 일본인 프로레슬러들의 WWE 적응을 돕는 등 다양한 부분에서 활약하고 있다.
4. 여담
- 레슬매니아 35에 참여한 한국 중계진이 푸나키를 만나서 자신들을 소개했더니, 본인의 조부도 한국인이라면서 반가워했다고 한다. 즉 쿼터 혼혈인 셈.
5. 둘러보기
[1] 원래 성씨는 후나키이지만, 영문 표기상 발음은 '푸나키'에 가깝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도 '푸나키'로 더욱 잘 알려지게 되었다.[2] 현 거주지는 미국 텍사스 샌안토니오.[3] 롤업의 형태 중 하나인 카사도라로 상대를 링 바닥에 엎드리게 넘어뜨린 후에 리 무릎 십자 꺾기를 시전하는 기술로, WWE 외의 단체에서 주력기로 사용했다. 푸나키가 WWE를 나온 후에 제자인 히다카 이쿠토가 스승인 푸나키에게 허락을 받고 피니쉬 무브로 사용한다.[4] 쿵 푸 나키 때의 피니쉬 무브로, 쿵푸의 학다리 자세를 취하다가 기습적인 앞차기를 시전한다. 과거 유명한 영화인 '베스트 키드'의 패러디.[5] 탑로프 인버티드 토네이도 DDT, 탑로프 토네이도 DDT 두 가지 형태 모두 라이징 썬이란 이름으로 사용했다. WWE에선 푸나키의 위상이 낮았기 때문에 스카티 투 하티의 더 웜처럼 경기에서 보기 힘든 피니쉬 무브 중 하나였다.[6] 쿵 푸 나키 기믹의 테마곡이다.[7] 프로페셔널 레슬링 후지와라구미(藤原組)[8] 카즈 하야시[9] 도복의 등 부분에 반쯤 '''욱일기'''가 그려져 있으며, 타이탄트론에서도 욱일기가 나온다.[★] 밑줄이 승리자. 다자간 매치의 경우 이름 옆 (O)가 핀폴자, (X)가 피핀폴자.[10] 원문은 ~竹のごとく、日本の脇にひっそりと生きる我ら、だから・・・~竹脇-These Day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