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 뒤발리에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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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티의 전 대통령이자 정치가, 의사, 문화인류학자 그리고 '''독재자'''. 통칭 "파파 독(Papa Doc)"으로 불렸다.
2. 생애
2.1. 의사양반으로 살던 시절
히스파니올라 섬의 가난한 흑인 하층민 출신으로, 1907년 아이티의 포르토프랭스에서 태어났다. 1934년 아이티 대학 의학부를 졸업한 뒤발리에는 지방에서 의료봉사에 종사하였고, 그는 미국의 미시간 대학에서 공공의료에 관한 공부를 하였다. 1938년 경부터 부두교 신앙과 관련 자료들을 연구하면서 수많은 민족학적 논문 및 서적을 발표하면서 소위 네그리튀드라고 알려진 아프리카 흑인 전통을 찬미하는 문화 운동의 큰 주축으로 거듭나게 된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뒤발리에는 1940년부터 50년까지 아이티의 보건부장관과 노동부장관을 역임하였다. 특히 보건부장관으로 재직하던 1943년 뒤발리에는 미국의 도움으로 열대성 전염병의 확산을 억제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빈곤층에 발진티푸스와 딸기종, 말라리아와 같은 전염병이 확산되는 것을 예방하는데 모든 힘을 쏟았고. 그의 이런 헌신적인 활동으로 사람들로부터 파파 독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Papa Doc은 Daddy Doctor, 즉 아버지 의사선생님이란 뜻이다.
당시 아이티 사회는 국민의 다수를 차지하는 흑인 서민계층과 소수파로서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혼혈(물라토) 엘리트층과의 비롯된 대립에서 혼란한 와중으로 군부 쿠데타에 의한 정부붕괴가 잇따랐다. 이에 프랑수아 뒤발리에는 1957년, 민정이양을 위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다. 자세한 내용은 아이티 문서를 참고. 그는 물라토 엘리트층에 대항하는 흑인주의를 주장하면서 인기를 끌었고 결국 흑인층의 지지를 얻어 아이티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대통령에 취임 이후 초기에는 억압되던 부두교의 전통성을 인정하고, 국민복지를 펼치는 정책을 펼치며, 혼혈 엘리트들이 독점하고 있던 공직 및 요직을 흑인에게 개방하는 개념찬 모습을 보였다.
2.2. 독재자로서 흑화
그러나 그는 권력의 맛에 점차 중독되면서 날이 갈수록 막장적인 독재정치를 펼쳤으며, 아이티 군의 지도자들을 실각시키면서 점차 군대를 분열시켰다. 여기에 '흑인을 위한 종교'라는 슬로건을 내걸며 아이티 내에서 일하던 가톨릭 사제들을 추방했고, 이로 인해 가톨릭 교회와 로마 교황청로부터 자동 파문당했다. 이에 뒤발리에는 맞불작전으로 공석이 된 성직자를 직접 임명하는 권한을 가짐으로써 사실상 아이티의 교회를 장악하게 됐다.
게다가 뒤발리에의 한 일들 중에서 가장 상식을 넘어선 행각 중 하나가 '''정규군을 아예 없애버린 일'''이다. 왜냐하면 워낙 군에 의한 쿠데타가 많아서 군을 그냥 없애버리고 후술할 통통 마쿠트라는 사설 비밀경찰에게 국방을 맡겨버린 것이다. 이런 비상식적인 사례는 거의 없지만 뒤발리에는 성공했는데 그 이유는 미국의 도움을 역으로 이용한 덕이였다. 그 시절은 냉전 시기였기 때문이 친미노선만 선언하고 있으면 미군이 알아서 지켜주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2.3. 친위대 통통 마쿠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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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모를 쓰고 있는 정규군 군인과 군모를 착용한 통통 마쿠트 단원의 모습. 좌측의 행상인 여성의 경멸과 공포를 내포한 표정이 통통마쿠트의 악명이 어느 정도인지를 말해준다.
1958년에는 자신에 대항하는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는데 그는 쿠데타를 무자비하게 진압했고, 아이티의 군대와 모든 사법단체를 해체시키고 고위급 장성들을 모조리 처형하였다. 그리고 뒤발리에가 새로 조직한 무장단체는 밀짚모자에 푸른 셔츠에 선글라스를 쓰고 마체테와 권총으로 무장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1959년 ‘통통 마쿠트’(Tonton Macoutes)[1] 라 불리는 비밀경찰 조직이 창설되는 것을 의미했다.
통통 마쿠트는 별난 이름과는 달리 '''서슬퍼런 아이티의 뒤발리에 독재 시기를 대표하는 공권력들이자 독재정부의 오른팔들'''이다. 이들은 파시즘권의 게슈타포와 친위대 또는 공산권의 비밀경찰들과 홍위병 포지션이며 또한 이들에 비견하고도 남을 정도로 잔인하고 냉혹했다.
통통마쿠트는 공식적으로 Milice de Volontaires de la Sécurité Nationale-Militia of National Security Volunteers- MVSN으로 불렸었는데 이 무장단체를 아이티 사람들은 통통 마쿠트라고 불렀다. 이 단어와 유사한 아이티의 신화에서 버릇없는 아이들을 잡아가서 응징하는 삼베자루 아저씨 통통마쿠우테(Tonton Macoute-Uncle Gunnysack)[2] 와 유사한 발음에서 통통 마쿠트로 부르게 되었다.
그렇게 비밀경찰인 ‘통통 마쿠트’를 만들어 사회를 감시하게 하면서 야당까지 모두 비합법정당으로 지정했고 그를 비판하는 국민을 체포하고 처형했다. 이런 행위 때문에 견디지 못한 많은 지식인이나 기술자들이 해외로 망명하게 된다. 그 비밀조직이 활동하면서 프랑수와 뒤발리에를 비난하거나 반대하는 사람들은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다. 또한 한낮에 대중들이 보는 앞에서 '통통 마쿠트'로부터 테러를 당한 반정부 세력도 있었으며, 통통 마쿠트 단원에게 종종 살아있는 사람들을 산채로 불태워서 죽이거나 돌로 무자비하게 던져대서 사람들을 사망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공포심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서 잔인하게 처형된 시체들을 공공장소에 대놓고 전시하기도 했다. 희생자들의 가족들조차 살해된 사람들의 시신을 옮기려 하다가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는 경우도 다반사였다고 한다. 이런 무자비한 테러에 아이티 국민들은 밀짚모자와 푸른 셔츠에 선글라스 차림으로 마체테와 권총으로 무장한 통통 마쿠트 대원을 무서워했고, 통통 마쿠트 대원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하여 갖은 행패를 부리고 국민들의 재산을 마음대로 빼앗았다. 그렇게 1960∼70년대에 아이티에서는 3만~6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학살 당했으며 수많은 야권 인사를 납치하거나 고문한 것으로 확인된다. 특히 프랑수와 뒤발리에는 직접 고문실로 찾아가 피해자들이 고문당하는 것을 직접 확인하고는 흐뭇해 했을 정도로 잔인했다. 통통 마쿠트의 중요 지도자들 가운데 일부는 프랑수아 뒤발리에가 심취한 부두교의 지도자들이 많았고, 이로 인해 통통 마쿠트라는 조직에는 부두교의 흔적이 깊게 남아있다. 이 부두교적 요소는 토착종교에 심취해 있던 대중들에게 깊은 공포를 심어 주었고 그들이 대중을 향해 사용한 공포의 대부분은 부두교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던 것이라고 한다.
이들이 자행한 감시와 무력 때문에 국민들이 얼마나 고통받아왔는지, 이들 중 일부는 뒤발리에 정권이 몰락하자 시민들에게 복수를 당해 살해되는 일이 흔했다. 심지어 길바닥에서 산 채로 불속에 넣어진 다음, 구워진 시신의 살점이 성난 시민들에게 먹힌(!) 사례도 있었다. 얼마나 국민들이 한이 맺혔으면 다른 나라도 안 하는 짓을 할까? 이 장면은 한국의 잡지 지오에서도 소개된 바 있다.그냥 고기를 먹는 듯한 모습이지만 혐짤가능성 있음
일례로 1960년대부터 70년대까지 통통 마쿠트를 지휘했던 '''루크네르 캉브론(Luckner Cambronne)'''은 가장 악명높은 통통 마쿠트의 책임자였는데 그는 뒤발리에의 충성스러운 부하이며 누구보다도 잔인한 대장이였다. 그가 저지른 악행과 잔인함으로 인해 캉브론은 '''카리브의 흡혈귀(Vampire of the Caribbean)'''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였다. 사실 캉브론이 이런 별명을 얻은 이유는 미국의 병원과 대학에 혈액과 시신을 정기적으로 공급하였기 때문이었는데, 그가 공급한 혈액과 시신은 아이티에서 실종된 사람들의 것임이 확실했다. 종신독재자인 파파독이 사망한 뒤에 캉브론은 파파 독의 미망인인 시몬느와 아들 베베 독에 의해 추방되긴 했으나, 캉브론은 1971년 아이티를 떠나 미국의 플로리다 주의 마이애미로 망명하여 미국인으로 귀화하여 아무런 법적 제재를 받지 않고 떵떵거리며 살다가 2006년 77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2.4. 우상화와 막장행각
이런 와중에 뒤발리에는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가톨릭 사제들을 쫒아낸 후 교회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자신에 대한 개인 숭배를 강화하고, 스스로를 부두교의 주술사이자 현인신이라고 했으며[3] 그 중에서도 죽음을 관장하는 신인 "바롱 삼디"(Baron Samdi)라고 선언하였다. 게다가 부두교의 사신인 바롱 삼디의 이미지를 자신에게 덧씌우기 위해 검은색 정장과 나비넥타이, 모자를 쓴 해골의 모습인 바롱 삼디의 모습을 본따 공석에서도 나비넥타이를 맨 양복차림을 하고 다녔다. 본문에 나와있는 사진이 그냥 페셔너블한 차림새가 아니다. 게다가 자신을 더욱 공포스럽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공석에서 연설시엔 항상 선글라스를 끼고 강한 비음을 내며 발언했다. 또한 부두교에 심취해서 정치적인 문제를 결정할 때 부두술사들을 데려와서 결정을 했으며, 심지어 케네디 암살도 자신이 저주를 내린 것 때문이라고 주장했다![4]
경제는 시원하게 망쳐먹었다. 아이티의 수입 대부분은 사탕수수였는데 사탕수수 농장을 국영화하여 쉽게 말해서 강탈한 다음 지지자들에게 분배했는데, 문제는 그 사람들이 농장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라서, 농장 경영을 못하다보니 농장 생산량은 그대로 바닥으로 곤두박질 쳤다.
1963년에는 그냥 막나가자는 건지 아이티의 헌법을 정지시키고 1964년부터 스스로 아이티의 종신 대통령이 되어 아이티를 지배하게 되었다, 미국의 경제원조도 모두 뒤발리에의 가족들과 뒤발리에의 측근들이 돈을 착복했으며, 국영기업이나 국가의 세금도 뒤발리에가 자신의 개인재산으로 취급하면서 아이티 사회에서는 뇌물로 인한 범죄가 엄청나게 많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아이티의 경제는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되었으며 수많은 아이티인들이 가난해지게 되었다. 특히 하도 국내의 지식인들을 탄압하고 서양식 교육을 금지하는 우민화 정책을 쓰다보니 견디다못한 아이티인들이 단체로 고국을 탈출해 두뇌유출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렇게 고향을 떠난 아이티인들이 주로 이민간 곳이 프랑스어를 쓰는 캐나다 퀘백. 그래서 퀘백에는 아이티계 이주민들이 많이 산다고 한다.
또한 워낙에 쇄국정책을 펴고 우민정책을 펼치는 바람에 아이티는 이웃나라 도미니카처럼 야구선수를 수출하는 것조차 못할 정도로 막장이며, 지금도 아이티의 문맹률과 부정부패는 세계 정상급이라고 한다.
유엔과 세계은행이 2007년 가동한 ‘은닉재산환수이니셔티브(StAR Initiative)’에 따르면 프랑수아 뒤발리에의 아들 장 클로드 뒤발리에는 재임 기간[5] 매년 국내총생산(GDP·약 12억 달러)의 1.7~4.5%를 빼돌렸으며, 그가 16년간 챙긴 돈은 3억~8억 달러가 넘는다고 한다, 또한 대형 허리케인이 아이티에 닥칠 때마다 수천 명의 아이티인이 목숨을 잃었는데 그 이유는 무차별적인 벌목 때문에 국토의 3% 정도에만 숲이 남아 있기 때문이였다.
이러한 정치를 국제 사회에서는 매우 비난하게 되었고, 결국은 1970년 6월, 아이티를 ‘반공의 요새’로 치켜 세우며 전폭적인 재정적, 군사적 지원을 해오던 미국이 모든 형태의 원조를 중지하면서 아이티 국민의 불만은 급속히 높아졌고 이로 인해 훗날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장 클로드 뒤발리의 몰락의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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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뒤발리에와 그의 아들 장 클로드 뒤발리에.
프랑수아 뒤발리에는 1971년 1월, 심장병을 이유로 자신의 아들 장 클로드 뒤발리에를 차기 대통령에 지명한 뒤 그해 4월에 64세로 사망한다. 그의 사후 그의 유지대로 아들인 뒤발리에(통칭 "베이비독")가 '''불과 19살'''의 나이에 대통령이 되었지만, 이후 민중 쿠데타로 1986년에 실각하면서, 뒤발리에 부자의 독재정치는 막을 내리게 된다. 여담으로, 이 민중봉기 와중에 프랑수와 뒤발리에의 시신은 민중들의 손에 갈갈이 찢겨 나가고 마는데, 아이티 민중들은 그의 영묘를 부수고 관을 꺼내 그의 두개골을 들고 환호했다고 한다. 출처.
3. 평가
본인의 아들과 더불어 이미 빈곤 국가였던 아이티를 막장 국가로 추락시킨 원흉 그 자체.
아이티는 뒤발리에 부자가 30년 동안이나 연달아서 독재를 하면서 이미 개판이던 국가는 더욱더 완전히 개판이 되어버렸다. 이들은 각각 파파 독(Papa doc), 베이비 독(Baby doc)으로 불렸으며, 권력 유지를 위해 '''3만명에서 6만명이 넘는''' 아이티인을 학살한 것으로 확인되며 수만명이 넘는 아이티인들이 심각한 인권침해를 겪은 것으로 추정된다.
4. 여담
- 자신의 경쟁자가 검은 개로 변신했다고 믿고 아이티에 있던 모든 검은 개를 잡아 죽이라고 명령했다. 웃지 못할 해프닝이지만, 그만큼 이 인간이 얼마나 막장인지를 보여주는 일화이다.
- 자신의 '임기'가 2년이나 넘게 남았는데도 조기선거를 시행해 모든 이들을 당황시켰다. 그 후 발표된 선거 결과는 그의 승리.
[1] 아저씨Tonton+ 민병대원들macoute로, 민병대원 아저씨라는 의미가 된다,불어 Tonton 에는 삼촌 이라는 뜻도 있으므로 민병대원 삼촌 이라고도 해석 가능하다.[2] 설화상으로만 보면 우리나라의 망태기 할아버지나 유럽의 크램푸스와 비스무리한 포지션이다.[3] 현재 아이티의 카톨릭이 민간에서는 부두교와 혼합되어 토착화된 경우가 많다. 이것은 아이티의 민간전승이 부두교에 많이 영향을 받아서이기도 했지만, 특히나 뒤발리에 이 인간이 교회를 자기 것으로 만들면서 아이티의 기존 카톨릭 교회에 부두교 이미지까지 혼합하면서 더 그렇게 되었다.[4] 케네디는 뒤발리에의 막장행각에 질려, 뒤발리에 정권에 대한 후원을 줄이려고 했다고 한다. 자신에 반대하면 여느 초강대국의 지도자도 무사하지 못한다는 의미로 이야기한 것.[5] 1971부터 198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