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대통령 선거
1. 개요
'''L'élection présidentielle'''[1]
프랑스에서 치러지는 대통령 선거이다. 프랑스 대통령은 국민이 직접 대통령 선거를 시행하여 선출한다. 임기는 5년이며, 1회 연임이 가능하다.[2][3]
프랑스가 유럽의 대표적인 강대국이고 프랑스의 대통령은 유럽의 다른 공화정 국가들의 대통령에 비해 권한이 막강하기 때문에 프랑스 대선은 실시될 때마다 자국뿐 아니라 유럽내 전체에서 큰 관심을 받는다.
2. 세부 규정
프랑스 대통령은 국민의 직접선거로 선출된다.
2.1. 투표 방식
1차 투표: 유효표의 '''과반수''' 득표자가 있는 경우 그 후보가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2차 투표: 1차 투표 과반수 득표자가 없는 경우,[4] '''1차 투표 최다 득표자 2인''' 대상 결선투표를 실시한다.
2.2. 선거권 / 피선거권
'''선거권자''': 18세 이상의 프랑스 시민이며, 선거인명부에 등재되어 있는 경우 선거권을 가진다.
'''피선거권자''': 선거권을 가진 18세 이상의 프랑스 시민이며, 500명의 추천인(자치단체장, 유럽의회 의원, 프랑스 의회의원, 지방의회 의원 등 선출직 공직자)로부터 지지서명을 받을 수 있는 경우 입후보할 수 있다. #
3. 역대 선거결과
3.1. 제2공화국
3.1.1. 1848년
- 루이 나폴레옹 - 5,434,226(74.44%)
- 루이 외젠 카베냐크 - 1,448,107(19.65%)
- 알렉산드르 르드뤼-롤랭 - 371,431(5.08%)
당시에는 결선투표제가 없이 과반이 없으면 국민의회가 대통령을 선출했는데, 과반을 얻을 만한 후보가 없어 임시정부 수반으로 상당한 정치력을 가졌던 루이 외젠 카베냐크의 당선이 유력했지만, 정치 경력이 거의 없었던 루이 나폴레옹이 갑툭튀해 보나파르트주의를 부르짖었고, 이를 통해 보수적인 농민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노동자들 역시 1848년 6월 봉기 당시 자신들을 무참히 진압한 부르주아 세력들에게 치를 떨면서 나폴레옹에게 대거 표를 던졌다. 따라서 루이 나폴레옹이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되었다.
루이 나폴레옹은 이후 쿠데타를 일으켜 의례적인 국민투표를 통해 프랑스 황제가 되고 프랑스 제2제국을 열었다.
3.2. 제5공화국
3.2.1. 1958년
샤를 드골 VS 조르주 마란
- 샤를 드골: 62,394(78.51%)
- 조르주 마란: 10,355(13.03%)
3.2.2. 1965년
샤를 드골 VS 프랑수아 미테랑
- 샤를 드골: 13,083,699(55.2%)
- 프랑수아 미테랑: 10,619,735(44.8%)
3.2.3. 1969년
조르주 퐁피두 VS 알랭 포에르
- 조르주 퐁피두: 11,064,371(58.2%)
- 알랭 포에르: 7,943,118(41.8%)
3.2.4. 1974년
지스카르 데스탱 VS 프랑수아 미테랑
- 지스카르 데스탱: 13,396,203(50.8%)
- 프랑수아 미테랑: 12,971,604(49.2%)
이때 미테랑은 프랑스 본토에서는 이겼지만 외국령, 부재자 투표에서 밀렸는데(이게 결정적이었다) 여기서 부정선거의혹이 제기되는 등 자세한 내막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다지 깔끔하게 치뤄진 선거는 아니었다.
3.2.5. 1981년
지스카르 데스탱 VS 프랑수아 미테랑
- 프랑수아 미테랑: 15,708,262(51.8%)
- 지스카르 데스탱: 14,642,306(48.2%)
3.2.6. 1988년
프랑수아 미테랑 VS. 자크 시라크
- 프랑수아 미테랑: 16,704,279(54%)
- 자크 시라크: 14,218,970(46%)
3.2.7. 1995년
자크 시라크 VS. 리오넬 조스팽
- 자크 시라크: 15,763,027(52.6%)
- 리오넬 조스팽: 14,180,644(47.4%)
3.2.8. 2002년
자크 시라크 VS. 장마리 르펜
- 자크 시라크: 25,537,956(82.2%)
- 장마리 르펜: 5,525,032(17.8%)
3.2.9. 2007년
니콜라 사르코지 VS. 세골렌 루아얄
- 니콜라 사르코지: 18,983,138(53.1%)
- 세골렌 루아얄: 16,790,440(46.9%)
이때 선거가 끝나고 루아얄하고 올랑드하고 헤어졌고[11] 사르코지도 대통령이 된후 5달만에 '''두번째 부인이었던''' 세실리아와 이혼하고[12] [13] 이탈리아 이민자 출신이었던 인기모델이자 가수였던 카를리 브루니와 재혼을 하였다[14]
3.2.10. 2012년
니콜라 사르코지 VS. 프랑수아 올랑드
- 프랑수아 올랑드: 18,000,668(51.6%)
- 니콜라 사르코지: 16,860,685(48.4%)
3.2.11. 2017년
에마뉘엘 마크롱 VS. 마린 르펜
- 에마뉘엘 마크롱: 20,703,694(66.1%)
- 마린 르펜: 10,637,120(33.9%)
4. 관련 문서
[1] 한명을 투표로 뽑는 것이기 때문에 단수를 쓰는 것이 맞지만, 프랑스의 선거는 결선투표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현지에서도 단수인지 복수인지 헷갈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2] 원래는 7년이었고 '''연임에도 제한이 없었으나.''' 2000년도에 국민투표로 임기가 축소되었고. 2007년에 다시한번 개헌되어 1회만 연임이 가능하도록 바뀌었다.[3] 임기 축소 후 첫 대선이 2002년이었기 때문에, 그 이후의 선거부터는 우연히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와 치러지는 해가 같아졌다.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선거 이후부터는 양국 대통령의 취임 시기도 5월로 거의 같아졌다.[4] 5공화국 성립 이래 모든 선거에서 1차 과반 득표자가 없었음.[5] 자크 아탈리의 미테랑 평전에 의하면 당시 미테랑이 크게 방심했던것이 컸었는데 대중연설에만 익숙한 그였고 점심먹고 낮잠을 자지않나...토론방송에 대해 심지어는 제대로 연습도 안한 상태였다고 한다. 유튜브에서 방송을 찾아보면 확실히 미테랑의 상태가 별로 좋은편은 아니었다.[6] 참고로 같은 우파였지만은 둘이서 추구하던 방향은 많이 달랐는데 시라크가 정통 드골파(보수주의) 였다면 데스탱은 중도우파(자유주의)였기 때문에 한동안 프랑스 우파는 드골파의 RPR 과 데스탱의 UDF 로 나뉘어졌었다.[7] 그리고 시라크의 경우에는 우파가 선거에서 져도 본인이 우파의 1인자가 되는것이 더 유리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정치적 판단으로 미테랑을 도왔고 또 본인의 판단처럼 우파의 1인자가 되어 한동안 좌파의 1인자였던 미테랑과 대립하였다. [8] 정확히 말하자면 시라크 본인으로써는 내정을 담당한게 큰 실수였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시라크는 권한이 많은 총리로써 그만큼 정치적 책임도 많이 져야 했고 본인에게 유리한 정책만도 펼칠 수가 없었기에 욕을 잔뜩 먹었다. 그리고 본인도 결국 지도자 중 한명이었기에 미테랑에게 정치적으로 공격을 해도 먹혀들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 것도 안했던 1995년에서야 시라크는 대선에서 승리하였다.[9] 참고로 미테랑은 프랑스 대통령 중에서 최장기간 집권한 대통령이다.[10] 선거에서 패배했는데 무슨 선방한거냐라고 할수있겠지만 93년도 프랑스 하원선거 당시 총 의석수가 577석였는데 사회당+기타 좌파정당 합쳐서 80석...밖에 얻지 못했을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11] 결혼은 안했지만 4명의 자식이 있을정도로 사실상 부부였는데 올랑드가 대선을 치루기 2년 전쯤에 바람을 피운 상태여서... 둘의 사이가 이미 멀어질대로 멀어졌지만 대선에 영향을 줄까봐 대선이 끝날때 까지 서로 함구하기로 한거같다.[12] 심지어 세실리아와 사르코지는 서로가 '''유부남,유부녀'''(세실리아도 사르코지가 두번째 남편이었다)인 상태에서 바람을 피우고 이혼한 뒤 다시 서로가 재혼한 거다...[13] 다만 사르코지가 먼저 이혼을 통보한게 아닌 세실리아가 영부인으로써의 삶을 부담스러워 했기에 이혼을 요구했다는 설이 더 유력하다.[14] 이로서 사르코지는 역대 프랑스 대통령중에 최초로 임기중에 이혼하고 재혼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