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제23대 대통령
니콜라 폴 스테판 사르코지 드너지보처
Nicolas Paul Stéphane Sarközy de Nagy-Bocsa
'''
'''출생'''
1955년 1월 28일 (69세)
프랑스 공화국 파리 17구
'''국적'''
프랑스 [image]
'''임기'''
프랑스 제23대 대통령
2007년 5월 16일2012년 5월 15일
안도라 공동 영주
2007년 5월 16일2012년 5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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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292c5b><colcolor=#fff> '''신체'''
166.4cm[14]
'''학력'''
샤프탈 고등학교
쿠르 생 루이 드 몽슈 (졸업) (-1972년)[15]
파리 제10대학교 (법학 / M.A.) (-1978년)
파리 제10대학교 (정치학 / DEA[16]) (-1979년)
시앙스포 (박사과정)
'''직업'''
정치인, 변호사
'''의원 선수'''
'''6'''
'''의원 대수'''
7, 8, 9, 10, 11, 12
'''지역구'''
오드센 6구
'''정당'''

'''가족'''
父: 폴 사르코지(1928년생)
母: 안드레 말라(1925년-2017년)
兄: 기욤 사르코지 (기업인)
弟: 올리비에 사르코지 (금융인)[17]
배우자
마리 도미니크 퀼리올리(1982년 결혼, 1996년 이혼)
세실리아 아티아스(1996년 결혼, 2007년 이혼)
카를라 브루니(2008년 결혼)
슬하: 3남 1녀
'''종교'''
가톨릭
'''SNS'''

}}}
1. 개요
2. 생애
3. 사생활
3.1. 키
4. 논란
4.1. 비리 혐의
4.2. 가족 문제
4.3. 무개념 발언
4.4. 부두인형 사건
5. 소속 정당
6. 선거 결과
7. 기타

[clearfix]

1. 개요


프랑스의 제23대 대통령. 파리에서 태어났으며, 종교가톨릭이다.

2. 생애


사실 사르코지(Sárközy de Nagy-Bócsa, 셔르쾨지 드너지보처) 가문은 프랑스가 아니라 헝가리의 귀족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소련군이 헝가리를 점령하면서 가문의 재산은 모두 몰수되었고, 사르코지의 아버지 이슈트반 에르뇌 셔르쾨지 드너지보처(István Ernő Sárközy de Nagy-Bócsa)[1]는 여러 나라를 거쳐 프랑스로 넘어와 프랑스 외인부대에서 5년간 근무하면서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다. 어머니는 프랑스인.
특이하게도 프랑스에서 출세하려면 꼭 나와야 하는 그랑제콜 학부 출신이 아니다. 공부를 지금의 위치에 비하면 그다지 잘하지는 못했던 모양인 것 같은데 정확히는 1973년 바칼로레아를 우리로 치면 재수한 끝에 취득하고 같은 해에 낭테르(Nanterre)에 입학하여, 1978년 낭테르 석사학위를 취득한 뒤 1980년 시앙스포(Sciences Po) 박사까지는 나왔는데 일반 그랑제콜은 못 나온 것이다. 다만 프랑스에서는 의사, 변호사가 되려면 무조건 일반대학을 졸업해야만 가능하다(그랑제콜엔 교육과정이 전혀 없다). 거기다 안 그래도 졸업 어렵기로 소문난 프랑스 대학에서도 의사, 변호사 과정은 엄청나게 빡세다. 그러니 사르코지 대통령도 충분히 수재였다 볼 수 있다.
1974년 프랑스의 정당인 공화국 민주동맹(UDR)[2]에 가입하고 1981년 변호사가 되었다. 그리고 1983년 뇌이 쉬르 센(Neuilly-sur-Seine) 시장에 당선되었다. 그 후 1993년 뇌이 쉬르 센에서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1997년 하원의원 선거에서는 낙선하였으나 1999년 유럽의회(EP) 의원으로 당선되어 2004년까지 유럽의회 의원으로 재직하였다.
2002년부터 시라크 정부의 내무장관, 재무장관을 지내면서 강력한 치안 정책과 과감한 경제개혁을 주장하며 주목받았다. 2005년 파리 교외 소요 사태 당시 강경한 발언을 쏟아내어 사태를 악화시켰다는 공격을 받았다. 자신도 이민 2세이면서 이민자들에 적대적인 정책을 펼쳐 비난받기도 했다.
2007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프랑스 사회당세골렌 루아얄 후보를 꺾고 5년 임기의 프랑스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008년 리만 브라더스의 파산으로 시작된 경기침체와 2010년부터 시작된 그리스, 포르투갈, 스페인, 아일랜드, 이탈리아 등 PIIGS 국가들에서부터 시작된 유로존 붕괴 위기에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하루가 멀다 하고''' 붙어다녀 '메르코지'라는 말을 유행시켰다.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에 도전하였으나, 사회당의 프랑수아 올랑드에게 1차 투표에서는 28.6% 대 27.1%로 졌으며, 2차 투표에서도 48.3%로 51.7%의 올랑드에게 3.4%, 110만표차로 졌다. 임기중 사망한 퐁피두(4년 10개월, 1969년~1974년)와 프랑수아 미테랑에게 진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7년 재임)에 이어 '''30년만의 단임 대통령'''이라는 오명을 쓰면서 퇴임했다.[3] 중도파인 프랑스 민주동맹의 바이루에, 전임 대통령인 시라크까지 올랑드 지지를 선언하면서 사르코지는 완전히 고립무원이 되었고, 여기에 카다피 사건에 대한 몇몇 불편한 진실까지 드러난 게 결정타가 됐다. 그래도 예상보다는 적은 표차로 졌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거리.
2013년 프랑스 검찰은 사르코지를 불법 정치자금 수수혐의로 기소했다. 대통령 선거 전에 화장품 업체인 로레알의 사주로부터 정치자금 명목으로 거액을 받았다는 것. 보통 대통령제 국가에서는 내란이나 외환 관련 범죄가 아니면 재임시절 형사소추가 안 되니 검찰이 상황을 대충 파악하고도 사르코지가 물러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달려들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영부인이었던 브루니는 가수 활동을 재개했다고 한다.
IMF 총재 크리스틴 라가르드가 사르코지에게 충성 맹세 편지를 보낸 것이 밝혀져 논란이 일었다. # 청탁성 편지를 권력자들에게 보내는 것 자체는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나 있어온 일이지만, 문제는 내용이 그야말로 절대군주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출세를 청원하는 신민급이었다는 것이다.[4]
대통령 퇴임 후 당연직 위원으로 재직하던 프랑스 헌법위원회 위원직을 2013년 사퇴함으로써 정계 복귀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헌법위원은 정치활동이 불가능하기에 이런 해석이 가능했다.
2014년 11월, 대중운동연합의 대표로 취임했다. 프랑스 대통령직은 재선까지 가능하기 때문에 단임으로 5년 더 할 수 있다는 걸 이용하려는 듯하다. 그리고 올랑드 정권의 지지율 폭락에 맞춰 대권 탈환을 준비중인데 먼저 이미지 쇄신을 위해 당 이름을 공화당으로 바꿨다. 정작 국민들은 사르코지가 '공화국'의 이념을 사유화하려한다는 이유로 부정적인 반응들을 보이고 있다.##
2015년 10월 29일에는 서방 국가들이 러시아에 대한 고립을 중단하고 미국 주도의 연합군은 러시아와 이란의 지원을 받는 시리아와 함께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밝혔다. #
2016년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에 뛰어들었으나, 1차 경선 결과 사르코지 밑에서 총리를 지냈던 프랑수아 피용이 1위, 보르도 시장인 알랭 쥐페가 2위를 차지하면서 3위에 그쳐, 깊은 내상을 입었다. #
그리고 대선불법자금으로 법정에 서게 되었다. # 2019년. 프랑스 최고법원인 파기법원(Cour de cassation) 재판부는 이날 사르코지 측이 기소 결정이 부당하다면서 제기한 기소 파기 신청을 기각하고 사건을 1심으로 돌려보냈다고 발표했다.#
리비아무아마르 카다피에게도 500만 유로를 받은 혐의로 조사 중이다.#

3. 사생활


여자관계가 매우 문란한 것으로 유명하다. 물론 프랑스는 대체로 공과 사의 영역을 엄격히 구분하여 정치인의 애정행각을 그리 문제삼지 않는다. 미테랑 전 대통령의 경우는 아예 대통령 재임 전에 사생아까지 낳았으나, 선거에서는 별 문제가 되지 않고 그대로 넘어갔다. 게다가 유럽 각국은 미국이나 한국처럼 대통령의 부인이 공개석상에 나서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이는 개인의 사생활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화가 정치인에게도 적용되어, 정치인의 사생활과 정치적 행보는 개별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 또한 현재 프랑스 뿐만 아니라 유럽 국가들 자체가 일반적인 형태의 가정이 붕괴되는 형편이라서[5] 이렇게 문란한 사생활도 프랑스 내에서는 "그런가? 그럴 수도 있지..."라는 반응이다.
1982년 마리 도미니크 퀼리올리(Marie-Dominique Culioli)와 결혼하여 피에르 사르코지와 장 사르코지 두 아들을 낳은 뒤 뇌이 쉬르 센 시장 시절 세실리아(Cécilia Ciganer-Albéniz)와 눈이 맞아서 각자 서로의 배우자와 이혼한 후 2번째 결혼을 했다. 그 뒤 루이 사르코지를 낳았다.
그런데... 이번엔 '''프랑스 대통령에 당선된 후''' 가수 겸 배우 카를라 브루니[6]와 눈이 맞아서(...) 세실리아와 '''또''' 이혼하고 브루니와 결혼(3번째 결혼)하였다.[7]

3.1. 키


키가 166cm로 단신이다. 유난히 작은 키로 놀림을 많이 받는 편이다. 오바마 부부 같이 키가 큰 사람을 만날 때의 그 엽기적인 키높이 구두에 까치발이라든지, 연설할 때 몰래 상자위에서 하다가 딱 걸린다거나, 심지어는 주변에 경호원이든 엘리제궁 청소부도 키가 큰 사람은 기피한다는 소문까지 나돌 정도이다. 사르코지가 연구소를 시찰하러 갔는데 공교롭게도 마중나온 연구원들이 모두 사르코지보다도 키가 작은 단신들이라 연구소에서마저 사르코지의 단신 콤플렉스를 염려한 것 아니냐는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작은 키를 굳이 연연하지 않고 강력한 카리스마로 키 따위는 고려 대상도 아니게 만들지도 못하고, 덩샤오핑 같이 작은 키를 오히려 자신을 어필하는 장점으로 이용하지도 못했다. 한동안 나폴레옹 신드롬, 치와와 신드롬으로 유머란을 장식하기도 했다. 오죽하면 프랑스 언론들도 '''꼬마 니콜라'''라고 부르면서 놀렸을 정도.
그리고 그보다 더 작은 프랑스 대통령은 나폴레옹 3세뿐이다...

4. 논란



4.1. 비리 혐의


여러가지 비리혐의로 구설에 올랐다. 그나마 프랑스가 대통령 중심의 이원집정부제 국가여서 그렇지 내각책임제 국가였으면 벌써 사임하고도 남았을 만한 일들을 많이 벌였다. 특히 사치스러운 행태가 가장 큰 문제였는데 복지예산을 축소하면서 정작 사르코지 자신은 개인적 비용을 국고로 뭉텅뭉텅 쓰는 짓을 해서 2012년 재선에 악영향을 미쳤다. 특히 드골이나 미테랑을 비롯한 프랑스의 역대 대통령들은 매우 검소한 생활로 유명했기 때문에 사르코지의 이런 행각은 민심을 악화시키는데 한몫했다.
야당인 사회당의 도지에르 의원의 폭로를 보도한 영국 선데이타임즈에 따르면 대통령 관저인 엘리제궁에 주차시켜놓은 사르코지의 차는 무려 121대. 여기에 매년 보험료만 10만 파운드(1억 7천만원), 연료비로 27만 5천파운드(4억 8400만원)을 쓰고 있었다고 한다. 식비만 해도 하루에 1만 파운드(1천 760만원)을 쓰며, 한 병에 160파운드(30만원)나 하는 고급 와인을 접대용으로 마구 썼다고 한다. 또한 우크라이나를 방문하고 있던 자신의 아들이 아프다고 하자 대통령 주치의를 태운 전용기를 급파하여 사적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언론장악 문제로도 시끄러웠는데, 일단 프랑스의 공영방송인 프랑스 텔레비지옹의 사장을 자신이 직접 임명한다고 해 논란이 일어났으며[8] 특히, 광고폐지는 많은 논란이 불거졌는데 공영방송의 돈줄을 막아서 자신의 휘하에 놓고자 한다는 논란과 일단 사르코지와 프랑스 최대의 민영 방송사 TF1의 회장과 매우 친하다는 점을 들어... 광고료를 TF1한테 몰빵해주는게 아니냐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또 도로를 이용하는 것이 더 손쉬운 경우[9]에도 전용기로 이동을 고집하며 방문 지역에 전용기를 세울만큼 큰 공항이 없다고 하자 전용기를 끌고 갈 견인차를 대령하라고 주문하기도 했다고 폭로했다. 처음에 대통령 전용 사냥터를 폐쇄하는 등의 쇼를 보여주다가 저런 본색이 드러나서 인기가 폭락했다. 한마디로 사치가 심해도 너무 심했던 것이다.
IMF 총재 재임 중 뉴욕의 한 호텔에서 강간혐의로 구속되었다가 풀려난 도미니크 스트로스칸의 몰락도 경쟁자를 낙마시키려던 사르코지의 쪽의 음모라는 설이 많다. 그 호텔의 경영자가 사르코지의 측근이라고 한다. 다만, 이것이 스트로스칸에 대한 동정으로 이어지지는 않고 있는데 스트로스칸은 평소에도 성중독으로 인해 답이 없는 인간으로 낙인찍혀 있었기 때문이다.

4.2. 가족 문제


여기에 자식 농사를 제대로 짓지 못한 것인지 아들들까지 상태가 안 좋아서 구설수에 올랐는데, 재선 실패의 한 원인이 되었다. 장남 피에르가 배탈났다고 대통령 전용기를 부른 건 위에서 언급했고, 차남 장은 2008년 교통사고 뺑소니 혐의로 재판에 섰다가 공권력 남용이라는 비판을 받았으며, 3남 루이는 엘리제 궁에서 친구와 놀다가 근처를 경비하던 여경의 얼굴에 토마토를 투척해 사르코지가 사과하는 일이 벌어졌다. #
부인인 카를라 브루니[10] 또한 미국발 경제 위기로 다수의 프랑스 국민들이 파산하여 거리로 내몰리거나 심지어 하루 먹을 게 없어 굶주리기까지 하는 상황에서도 온갖 명품을 휘감고 다니는 극히 사치스러운 모습을 보여줘 사르코지로부터 민심이 떠나는 데 한몫 더했다. 물론 자기 돈 갖고 자기 사생활 즐기는 것이라면 할 말 없지만 문제는 카를라가 대통령 영부인이고 프랑스에서 대통령 일가는 검소해야 한다는 철칙이 박혀있다는 데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유능하고 인간적인 지도자라도 자식은 엉망진창일 수 있고 프랑스 사회 특성상 아내의 사생활도 함부로 손대기 어려운 만큼 이 문제들은 재선 실패에 결정적인 원인은 아니었다는 평가도 많다. 그리고 카다피와의 관계 등도 사실 대놓고 반인륜 범죄를 도왔다던가 하는 경우가 아니면 대선에 결정적인 영향은 미치지 않는다. 결국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부정부패[11] 및 사르코지 본인의 사치와 더불어 프랑스인들의 경제정책에 대한 인식과 사르코지가 생각하는 경제정책간의 괴리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12]
유일하게 친형 기욤 사르코지만 사생활이 깨끗하다.

4.3. 무개념 발언


2009년에 열린 노르망디 상륙작전 65주년 기념식에서 니콜라 사르코지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초대하지 않아 엘리자베스 여왕이 격노하고 국민적인 분노가 일어나는 등 외교적으로 결례를 범해서 커다란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문서를 봐도 알 수 있지만, '''노르망디에서 전사했던 군인들은 미군과 영국군이었다.''' 당시 국가원수 중에서는 유일하게 참전용사였던 엘리자베스 2세를 초대하지 않는 행위는 그야말로 큰 결례나 다름없는 행동이다.
비난여론이 거세지는 가운데에도 사르코지는 정신을 못 차리고 '''"여왕이 오는 것은 우리와 상관 없는데 이건 미국과 우리 프랑스의 행사라는 것만 알아둬요."'''라는 발언을 하면서 더욱 어그로(...)를 끌었다. 물론, 엘리자베스 2세는 참전용사였기 때문에 참석 안 하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 결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중재를 해서 어쩌어찌 넘어가긴 했지만, 기분이 상할대로 상한 엘리자베스 여왕은 자신이 가는 대신 찰스 왕세자를 보냈다.
2011년에는 알자스 지방의 트루츠쉐임에서 프랑스 농민 대표들에게 연설을 하던 도중 단순 말실수로 알자스-로렌은 독일 영토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전설적인 일화도 있는데, 자기 나라의 국민에게 쌍욕을 했다. 물론, 그 시민이 일방적으로 먼저 시비를 털기야 했지만 ("더러워 손대지마!")... 이에 맞받아치면서 '''"그럼 꺼져, 이 씨발새끼야!"''' 라고 응수했다.

4.4. 부두인형 사건


[image]
2008년 10월, 프랑스의 한 출판사가 사르코지의 모습을 본뜬 부두인형과 몸통을 찌를 바늘 및 사용 설명서를 한 세트로 구성해 출시한 상품이 인터넷을 통해 전국적으로 2만개 넘게 팔려나갔다. 인형의 몸체에는 '더 벌기 위해 더 일하자', '사라져라, 패배자', '키높이 구두', '하이퍼 대통령' 등의 글귀가 적혀 사르코지의 정책을 풍자했으며, 어느 부분을 찔러야 사르코지의 악행을 막을 수 있는가를 나타냈다는 게 출판사의 설명이지만, 졸지에 저주의 대상이 된 사르코지는 변호사를 통해 판매 중단과 회수를 요구하며 법적 대응에 나섰다.# 대선 때 경쟁자였던 세골렌 루아얄의 부두 인형도 함께 출시되었지만 루아얄은 어떠한 법적 조치도 취하지 않겠다고 밝힌 것과 크게 대비되는 상황이다.#
결국 법정으로 넘어간 이 사건에서 1심 법원은 표현의 자유를 존중해 인형의 판매를 허용했으며, 여기에 불복한 사르코지측이 항소한 결과 2008년 11월 29일 항소 법원은 판매 자체는 허용하되 인형을 찌르는 행위가 사르코지의 인간적 존엄성에 대한 공격에 해당한다는 경고문을 부착하도록 판결했다. 한마디로 팔지 말라는 이야기다.#

5.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974 - 1976
정계 입문
1976 - 2002
입당
2002 - 2015
입당 (복수 당적)

2015 -
창당
정계 은퇴

6. 선거 결과


'''연도'''
'''선거'''
'''정당'''
'''1차 선거'''
'''2차 선거'''
'''당락'''
'''비고'''
1988
1988년 프랑스 총선 (오드센 6구)
'''26,522표 (67.35%)'''

'''당선(1위)'''
'''초선'''
1992
1992년 프랑스 총선 (오드센 6구)
'''26 594표 (64.90%)'''

'''당선(1위)'''
'''재선'''
1995
1995년 프랑스 총선 (오드센 6구)
''자료 미상''
''자료 미상'' '''(75.96%)'''
'''당선(1위)'''
'''3선'''
1997
1997년 프랑스 총선 (오드센 6구)
'''21,077표 (56.23%)'''


'''당선(1위)'''
'''4선'''
2002
2002년 프랑스 총선 (오드센 6구)
'''27,803표 (68.78%)'''

'''당선(1위)'''
'''5선'''
2005
2005년 프랑스 총선 (오드센 6구)
'''17,177표 (70.74%)'''

'''당선(1위)'''
'''6선'''
2007
2007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
'''11,448,663표 (31.18%)'''
'''18,983,138표 (53.06%)'''
'''당선(1위)'''
'''초선'''
2012
2012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
9,753,629표 (27.18%)
16,860,685표 (48.36%)
낙선(2위)

'''7연속 선거 승리'''로 선거 불패라고 불렸으나, 2012년 대선에서 프랑수아 올랑드에게 밀려 처음으로 낙선했고 그 뒤로는 당내 경선조차 뭐 하나 제대로 풀리는게 없는 불운한 정치 인생을 살았다(...)[13]. 그래서인지 얼마전에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7. 기타


2009년 그의 소속당인 대중운동연합이 MGMT의 히트곡 Kids를 무단 사용하다가 고소를 당한적이 있었다(…).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을 노리기 위해 트위터페이스북 모두를 가동시킨 것으로 확인되었다. 정말 노렸을 지도. 일단 결과적으로는 재선에 실패했다.

[1] 프랑스인으로 귀화한 이름은 폴 사르코지 드너지보처(Paul de Sarkozy de Nagy-Bocsa)[2] 현재 프랑스야당프랑스 공화당의 전신.[3] 프랑스에서 구조상 자력으로 14년 임기를 마친건 미테랑 정도고, 시라크 역시 동거정부를 운영했던 리오넬 조스팽 총리에게 이길 수 있던 이유는 1차 투표에서 좌파 후보 난립으로 사회당 조스팽이 간발의 차로 극우파 르 펜에게 지면서 좌파 표가 모조리 시라크에게 쏠렸다.[4] 프랑스 대통령이 과거의 왕이나 황제와 비견될 정도로 권력이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공식적인 지위는 국민의 대표자이다. 그런 대통령을 절대군주에 비유한 편지를 보내고 대통령이 그걸 보낸 사람을 지원해줬다는 것 자체가 사르코지의 권력에 대한 인식 및 리가르드 총재의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5] 전체 출산에서 혼외출산 비중이 대부분 절반을 넘는다. 한국이나 일본은 3%도 안 된다. OECD 평균은 30% 정도. 그러나 불륜에 대해서 관대하다는 것과는 좀 다르다. 혼외출생이 많다는 것은 그냥 사실혼관계가 많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남유럽, 동유럽은 서유럽, 북유럽보다 성적으로 보수적이라서 불륜을 좋게 보지 않는다.[6] 이 분의 남성편력은 사르코지의 여성편력보다 화려하면 화려했지 부족하지 않다. 에릭 클랩튼, 롤링스톤즈믹 재거, 도널드 트럼프, 뱅상 파레 등 엄청나게 많다. 특히 믹 재거와 사귈 때는 브루니는 에릭 클랩튼과의 관계가 이어지는 상황이었고, 믹 재거는 제리 홀과 사실혼을 거쳐서 결혼으로 넘어가는 단계였다.[7] 이후 역시 호색한으로 유명한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이탈리아 총리가 이 결혼에 대해 사르코지에게 '''당신 마누라는 내가 보냈다'''고 말했다. 브루니가 이태리인.[8] 일단 어떻게 해서 임명에 성공하긴 했으나 후임인 프랑수아 올랑드가 다시 법을 개정해서 지금은 직접임명은 못한다.[9] 파리에서 128km 떨어진 곳 방문. 한국으로 대입하자면 서울-청주 거리 쯤.[10] 20대까지는 탑급 모델(입생로랑, 지방시 등의 모델이었다.)이었고, 이후에는 현역 가수로도 활동하고 있으며(영부인으로 있으면서 앨범을 냈다.) 한국에도 앨범이 나온 적이 있다. 참고로 이탈리아계인데 그래서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우리가 님 나라에 영부인 보냈뜸!'이라는 개드립을 치기도... 언니인 발레리는 배우와 감독을 하고 있다.[11] 프랑스 국민들 대다수는 사르코지의 여자관계나 본인 돈으로 하는 사치에 대해서는 그럴 수도 있거니 했지만, 사르코지 일가가 벌이는 세금 낭비와 권력남용이라고 볼 수 밖에 없는 깽판은 용서 못한다는 반응이었다.[12] 사실 두 번째 부분은 억울할 수도 있는 게 프랑스의 경제 상황이 워낙 막장이라 긴축 외에 다른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올랑드 역시 처음에는 성장을 우선시한다고 했지만 프랑스 경제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고는 멘붕하며 사르코지 노선을 그대로 계승해야 했다.[13] 그나마 사르코지가 당내 입지가 탄탄해서 경선이라도 출마 할 수 있었던 것이지, 리오넬 조스팽, 세골렌 루아얄 등은 선거 패배 후 정치 인생이 완전히 끝장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