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오넬 조스팽
1. 개요
프랑스의 정치인. 소속은 사회당으로, 프랑수아 미테랑의 뒤를 이은 사회당의 거물로서 1997년 ~ 2002년 총리를 지냈다.
1990년대 이래 두차례(1995년, 2002년)에 걸쳐 자크 시라크에 맞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프랑스 정계 좌파 진영의 대표주자였지만, 결국 대통령에는 끝내 오르지 못했다. 그래도 총리 재임 시절에는 이원집정부제인 프랑스의 정부 체제에서 실질적인 행정부 수반으로서 5년 간 내치를 주도하여 나름 프랑스 정치사에 발자취를 남겼다.
2. 생애
파리 인근의 뫼동(Meudon)이라는 동네에서 로베르 조스팽과 미레유 당디외의 아들로 태어났다. 집안이 개신교 집안이었는데, 천주교 중심의 프랑스에서는 특이한 부분이다. 장송 드 사이(Janson de Sailly) 고등학교에서 수학했으며, 파리정치대학과 국립행정학교에서 대학 교육을 마쳤다.
그러나 졸업 전후로 알제리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고, 조스팽은 프랑스 학생국민연합에 참여해 반전운동을 벌였다. 후에는 독일의 트리어에서 군복무를 마쳤다.
2.1. 정치 활동
1965년 외무부에 들어가 일하기 시작했으며, 이 때 훗날 프랑스 기업인운동의 대표가 되는 동갑내기 에르네앙투앙 세예레와 같이 일했다.
정치인이 된 조스팽은 본격적으로 좌파 색채를 드러내기 시작했는데, 온건한 중도좌파 색채를 드러내는 지금과는 달리 초기에는 극좌에 가까웠다. 당시 프랑스의 좌파는 분열되어 있었으나, 사실상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SFIO)[1] 가 프랑스의 좌파를 대변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스팽은 SFIO에 부정적이었고, 대신에 국제공산주의기구(OCI)에 가맹했다. 그런데 좌파의 분열로 1969년 대선에서 그 어떠한 좌파도 결선에 진출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고, 이에 따라 좌파대통합 논의가 진행된 끝에 신생 사회당이 탄생했다. 조스팽은 훗날 자신의 스승과도 같았던 프랑수아 미테랑과 함께 당초에는 입당을 보류하다가, 1971년에 입당한다.
이후에는 미테랑을 돕는 일을 하였고, 1974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 미테랑이 본격적으로 도전장을 내밀자 어김 없이 그를 지원했으나,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에 밀려 낙선하면서 또 다시 야당 정치인으로 살아야만 했다. 그러나 사회당은 낙선의 원인 등을 문제 삼으며 대대적인 쇄신에 들어갔고, 그 결과 1981년 대선에서 미테랑은 드디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프랑스 제5공화국 역사상 최초의 좌파 정권이 등장한 것. 이 무렵 조스팽은 사회당 제1서기가 되었다.
이제서야 여당 생활을 시작한 조스팽은 미테랑 정권의 총리 후보로 물망에 올랐지만, 다른 사람들에 밀려 낙마했다. 1984년 드디어 총리에 오르는 듯 싶었으나, 로랑 파비위스 에 밀려 또 낙마했다. 이는 당 내의 계파 갈등을 조장했고, 결국 1986년 총선에서 사회당은 원내 1당 자리는 유지했지만 의석수를 대폭으로 날려버려, 한마디로 '''참패'''했다. 파비위스는 이후 총리직을 사임한다.
하지만 사회당은 이후 다시 쇄신을 거쳤고, 미테랑은 1988년 대선에서도 어김 없이 재선했다. 이 무렵 조스팽은 당권을 내려 놓고, 대신 미테랑 정부 2기의 총리 후보로 다시 거론되었으나, 또 낙마했으며, 대신에 교육부 장관으로 등용되었다. 교육부 장관으로 있으면서, 당시 프랑스 교육계에 쌓여 있던 각종 문제점들을 해결했고, 이를 통해 프랑스 국민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겨 주었다.
그러나 파비위스와의 갈등이 또 다시 불거지면서 그동안 좀 잠잠했던 계파 갈등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고, 결국 1993년 총선에서 사회당은 제대로 참패했다. 이 때 자크 시라크가 이끌고 있던 공화국연합이 압승했고, 정작 사회당은 원내 3당으로 추락하는 굴욕을 피하지 못했다. 이 때 총선에서 주된 역할을 했던 파비위스 일대는 급격하게 약화되기 시작했고, 조스팽은 이에 반등을 얻어 다시 당권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망의 1995년이 다가왔다.
2.2. 첫 번째 대권 도전 (1995년)
이후 사회당의 실질적인 주도자로 떠오른 조스팽은 1995년 2월 3일, 사회당 경선에서 65.85%를 득표해 34.15%만을 득표한 앙리 에마뉘엘리를 크게 꺾고 사회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당시에는 연임 제한이 없었기 때문에 미테랑의 3선이 가능했으나, 79세로 너무 고령이고 병마와 싸우고 있던 중이었고 미테랑에 대한 지지율도 높지 않았기 때문에 3선을 포기하기로 한 것. 사실 사회당은 미테랑의 당이라고 봐도 무관할 정도로 마땅한 거물이 없었으나, 에두아르 발라뒤르를 추월하는데 성공했고 선거운동기간 동안 자크 시라크와 엎치락 뒤치락했으나 4월 23일 1차 투표에서 23.3%를 득표해 20.84%를 득표한 시라크를 누르고 1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좌파 표심을 단순 합계할 경우 우파에 비해 훨씬 낮았는데, 우파 성향의 전 총리였던 에두아르 발라뒤르가 18.58%로 3위를 기록했고 극우 국민전선의 장마리 르 펜이 15%를 얻어 4위로 돌풍을 일으켰고 7위 후보이지만 5%를 득표한 펠레페도 우파성향의 후보였기때문에 우파 후보를 다 합치면 득표율이 60%에 육박하는 상황이었다.
이후로 여론조사에서 부동층을 다수 흡수하며 지지율을 차근차근 끌여올렸고 토론회에서도 상당한 선전을 했지만 결국 결선투표에서 47.4%로 패배한다. 다만 1993년 총선에서 사회당이 참패한것이나 1차 투표에서 우파 지지율이 60% 이상 나왔다는것을 생각하면 대단한 선전이었기에 "비록 지금은 떨어졌어도 다음에는 꼭 될 것"이라는 말을 했고 1997년 총선으로 총리로 등극하면서 현실화되는듯 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조스팽이 영원히 대통령이 되지 못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못 했다.'''
2.3. 총리 생활
이후 사회당은 14년 만에 야당으로 추락했고, 조스팽은 다시 사회당의 제1서기가 되었다. 대선에서 패배했지만 나름대로 선전했기는 했는데 그와 별개로 국회의석수가 적어 힘 못쓰는 야당의 이미지가 강했다. 하지만 1997년 총선에서 예상을 뒤엎은 압승을 거두며 분위기를 다시 뒤집는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시라크 정권 하에서 실업률 급증 등 경제가 좋지 않았고 사회당이 이에 반등을 얻은 것이다. 덕분에 조스팽은 프랑스 총리로 올랐으며 5년 간 재직하게 된다. 행정부의 권한을 대통령과 총리가 양분하는 프랑스 정치 구조상 이때 시라크 대통령은 바지 사장으로 전락했고 총리인 조스팽이 실권을 장악했다.
실권은 장악한 조스팽은 오른 주 35시간 근무제를 도입했고, 아울러 차별금지법 등 사회에 있던 각종 폐단을 청산하면서 국민들의 지지를 다시 높이기 시작했다. 이 덕분에 우파는 지지율이 급락하기 시작했고 시라크 정권은 제대로 레임덕이 걸렸다. 분명한 것은, 조스팽이 총리라는 자리에 오르면서 그간 쉽게 보여주지 못했던 리더십을 확실하게 보여주기 시작했고, 덕분에 차기 대통령으로 확실시되었다. 애초에 조스팽은 학자 타입이라 대통령으로는 다소 부적합하다는 이미지가 강했다. 그러나 총리로 재직하면서 그러한 부정적 이미지는 사라졌으며 영국의 블레어, 독일의 슈뢰더와 함께 유럽을 이끄는 대표적인 좌파정치인으로 이름을 날렸다.
2.4. 두 번째 대권 도전 (2002년)
이러한 국민들의 인기에 힘업어 2002년, 대선에 다시 한번 도전할 것을 선언했다. 그리고 사회당의 대선후보로 무난히 선출되었고, 이제는 대통령으로 확실할 것으로 보였다. 당시 재선에 도전하는 시라크가 여론 조사에서 1위를 차지했지만, 1995년처럼 1차에서는 시라크가 1위를 하더라도 2차에서는 조스팽이 충분히 뒤집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이것은 크게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그런데 좌파 진영에서 유독 정권 교체에 대한 열망이 높았고, 이에 각종 군소 좌파 정당들이 후보를 독자적으로 내기 시작했다. 문제는 상당수가 순수히 자신들의 힘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사회당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었다. 당장 극좌 성향의 노동자 투쟁의 후보로 나간 아를레트 라귀에르, 시민운동의 장피에르 셰베네망, 녹색당의 노엘 마메르,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의 올리비에 브장스노,공산당의 로베르 위, 좌파급진당의 크리스티앙 토비라, 21세기 시민참여행동당의 코린 르파제, 노동당의 다니엘 글루크슈타인이 그 독자세력들이었다. 이 수만 무려 '''8명'''이었고 전체 후보 수가 무려 '''16명'''에 달하는 유례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
특히 이 독자세력들의 힘도 무시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 이들의 지지율이 보통 1 ~ 5%대였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각 군소 후보들 간의 지지율 차는 크지 않았고, 여론 조사마다 여기서는 누가, 저기서는 또 누가 앞서는 등 엎치락뒤치락의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해당 후보들에게 사퇴 압박이 가해지기도 했지만, '''어차피 결선 때 조스팽으로 저절로 단일화가 되는데 지금 왜 사퇴해야 하지?'''라며 전원이 사퇴를 거부했다. 비단 좌파뿐 아니라 우파도 마찬가지여서, 실제로 시라크와 조스팽은 큰 표를 얻을 것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뭐 이것 쯤이야는 그렇다 치더라도, 시라크와 조스팽 두 후보에게서 각종 의혹들이 터져 나오면서, 선거가 진행될 수록 두 후보의 지지율이 급락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표심은 대안 후보를 찾고 있었는데, 문제는 그들이 다름아닌 극우인 장마리 르 펜이었던 것. 높은 실업률의 원인을 프랑스가 지금까지 장려한 이민 정책으로 몰아 넣은 국민전선은 이를 바탕으로 세를 불려나가기 시작했고, 가뜩이나 중도적인 양강 후보에게 질려 있었던 일부 표심은 르 펜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거기다가 선거 막판에는 르 펜의 지지율이 급격하게 상승하면서 일부를 중심으로 "설마 시라크 대 르 펜이 되지는 않겠지?"하는 우려심이 있었다.
다만 소위 "찻잔 속의 태풍"이라는 말대로 르 펜은 그러한 정도로만 취급 받았고, 다들 이러한 유례 없는 고춧가루에도 불구하고 시라크 vs 조스팽이라는 구도를 유력하게 보면서 "만약에는 없다"는 식으로 일관했는데...
'''We Came, We Saw, He Lost!'''
'''전국이 발칵 뒤집혔다.''' 설마설마 하면서 그냥 방심했는데 '''결국 사람을 잡은 것'''.
여론 조사에서 으레 그랬듯이 시라크는 출구조사에서 20%를 기록하면서 무난하게 1위를 했다. 뭐 이거야 결선에서 뒤집히는 것이 가능했지만, 문제는 그 상대가 '''조스팽이 아닌 극우파 장마리 르 펜이 된 것'''. 르 펜이 17%를 기록했는 데 반해, 조스팽은 16%로 3위로 확실시되어 본선 탈락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야말로 모두가 놀라고 말았다. 심지어 출구조사를 보도하던 앵커들마저 당혹함을 감추지 못했다. 심지어 1위를 기록해서 본선 진출이 확실해진 공화국연합마저 상대가 조스팽이 아닌 르 펜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감출 수 없었다.
당초에 어쩌다 이렇게 되었냐는 논란은 꾸준히 제기되었지만, 가장 큰 원인은 빼도 박도 못 할 고춧가루. 좌파 진영에서 자신들끼리 어떻게든 정권 교체를 하겠다고, 안 될 것을 무리하게 도전했다가 저렇게 고춧가루만 뿌려놓고 이 꼴을 낳고 말았다. 지금은 거의 잊혀졌지만, 아직도 프랑스의 좌파에서는 종종 반면교사로 남아서, 이후로는 사전에 일부 연대를 통해 지지율이 일부 있으나 당선 가능성이 희박한 후보들은 양보하는 식으로 해서 이러한 일이 반복되는 것을 막기 시작했다. 그런데 역사는 반복되는 것인지, '''15년 후 또 터졌다'''.
2.5. 은퇴
예상치 못한 충격적인 출구조사에 놀란 조스팽은 "이게 사실이면 정계를 은퇴하겠다"고 초강수를 두었고, 그 결과가 고스란히 사실로 드러나자 정계 은퇴를 선언한다. 각 좌파 진영에서는 결선에 진출한 르 펜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지만, 이미 조스팽은 본선에서 탈락했으므로 결과를 뒤엎을 수 없었으므로,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우파인 시라크를 찍어야만 했다. 당연히 우파를 반대하는 좌파들로서 시라크를 찍는 것은 매우 힘든 결정이었으며 본인들도 시라크를 좋아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미 X됐으니 아무나 뽑자"고 했다가 르 펜이 되면 좌파들로서는 더더욱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각계를 중심으로 시라크 몰표 운동이 일어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파쇼말고 사기꾼을 뽑자"는 인상적인(?) 구호가 나오기 시작했고, TV에서도 극우세력의 위험성을 알리는 광고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러한 분위기를 감지한 조스팽도 시라크 지지를 선언했고, 결국 시라크는 '''82.2%'''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한다. 조스팽은 자신의 약속대로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하였으며, 각계에서 복귀 제안이 들어왔으나 끝까지 거절하며 개인 생활만을 해 왔다. 그러나 시라크 정권의 2기가 또다시 레임덕이 걸리기 시작하고, 마침 2007년 대선이 다가오면서 일각에서 조스팽의 3수설을 제기하기도 했다. 실제로도 각계에서 조스팽을 차기 대권주자로 보기도 하였고, 이에 의식해서인지 조스팽은 2005년 은퇴를 번복하고 복귀해 2006년 사회당 경선에 도전했다. 하지만 막 떠오른 여성 거물인 세골렌 루아얄이 압도적인 지지율을 보였고, 조스팽은 여기에 한참 밀리면서, 도중에 사퇴한다.
이후에는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살고 있으며, 2014년부터는 하원의장 클로드 바르톨론의 지명으로 프랑스 헌법위원회 위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2017년 팔순을 기록했다.
3. 가족
엘리자베스 다넨뮐러와 결혼했으나 이혼했다.
이후 1994년 폴란드계인 실비앵 아가친스키와 재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