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베트남 관계

 



[image]
[image]
'''프랑스'''
'''베트남'''
1. 개요
2. 역사적 관계
2.1. 19세기 이전
2.2. 19세기
2.3. 20세기
2.4. 21세기
3. 문화 교류
4. 관련 문서


1. 개요


베트남프랑스와 관계와 관련된 문서이다. 베트남은 19세기에 프랑스의 지배를 받으면서 노동 인력 강제 징발, 아편 재배 강요, 술 빚기 금지 등의 베트남 민중의 일상과 연관 된 가치관을 훼손하는 등 착취를 당했기 때문에 대불감정이 안 좋은 편이다.

2. 역사적 관계



2.1. 19세기 이전


19세기 이전에 베트남어를 로마자로 표기할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16세기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베트남어를 로마자로 적는 첫 시도를 했고 17세기 알렉상드르 드 로드에 의해 쯔꾸옥응으가 고안되었다.

2.2. 19세기


19세기에 베트남은 프랑스의 침략을 받았고 결국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리고 프랑스는 베트남을 식민지배하면서 베트남의 문화도 탄압하고 쯔놈의 사용을 금지하고 로마자의 사용을 강제하는 등 베트남에 대해서 탄압했다. 하지만 베트남에서는 독립운동이 활발해졌고 베트남의 독립운동가들은 로마자를 활발하게 사용하면서 베트남은 프랑스로부터의 독립운동을 적극 추진하게 되었다. 또한, 프랑스 공산당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로도 유학을 많이 오게 되었다.

2.3. 20세기


1940년대초에 일본의 침략을 받으면서 베트남은 프랑스의 지배외에도 일본의 침략과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1945년에 일본은 패배를 인정했고 베트남은 독립하게 되는 것 같았지만, 프랑스가 다시 베트남을 식민지배할려고 하자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일어났고 결국 프랑스는 베트남을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프랑스와 전쟁을 하면서 베트남군은 프랑스어로도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후 1956년 남베트남과 대사급 외교 관계를 맺어 단독 관계를 유지하였고 남베트남과 교류도 많이 했다. 1973년에는 북베트남을 국가로 인정하고 수교했다. 베트남 전쟁(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때 미국이 참전을 요청하지만 거절했다.[1] 프랑스는 남베트남이 패망하자 베트남인 난민들을 대거 받아주기도 했다.
1977년 완전통일한 베트남의 유엔 가입시 프랑스도 반대하지 않고 찬성하였다.

2.4. 21세기


현대에도 베트남과 프랑스는 역사적인 이유로 사이가 안 좋은 편이다. 하지만 베트남은 프랑스의 지배를 받으면서 프랑스 문화의 영향도 많이 받았고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을 당시에 지어졌던 건축물도 베트남에 많이 남아있다(예컨대, 호찌민 시에 남아있는 노트르담 성당 등). 또한, 의외이지만, 베트남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와 협력하는 경우도 있다.#
프랑스는 베트남이 개방하던 1996년, 처음으로 식민 지배를 사과하고 약탈했던 문화재를 모두 반환했다.
큰 틀로보면 베트남의 민족주의적 역사 인식에서 프랑스는 중국과 자리를 양분하는 원수이자 숙적 1호의 위치를 차지하지만, 불제 강점기가 남긴 문화적, 제도적 유산이 워낙 커서 베트남인들의 대불 감정은 혐오로만 정리하긴 힘들다. 당장 베트남을 식민지화하고 괴롭힌것도 프랑스지만, 독립 투쟁과정에 있어 세계어로서 프랑스어가 제공했던 기회와 프랑스 공산당과의 깊은 연대, 베트남 민족주의 자체에 있어서 프랑스 혁명을 비롯한 프랑스의 공화주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끼친 영향을 고려하면 식민지 현실이란 병 준것도 프랑스지만 그 약도 어느정도는 프랑스 당국은 아니지만 적어도 (반체제) 프랑스인, 프랑스어, 프랑스발 사상, 프랑스계 정치 조직에게서 받았다고 할수 있기 때문. 당장 베트남 전쟁 참전 세대들이 현역 정치인, 사회주도층으로 활약하던 80-90년대, 2000년대 초반에 나온 베트남전 관련 다큐멘터리만 봐도 대부분 월맹측 인사들은 상당히 능숙한 프랑스어로 인터뷰를 하는걸 볼 수 있고, 특히 불어권 중심으로 이루어진 월맹의 프로파간다 활동, 심리전은 당시 전세계를 휩쓴 반전, 반미운동의 무기화에도 큰 역할을 했다. 현대 들어와서 세월이 흐르며 반불감정은 희석되고, 오히려 당장의 중국과의 불편한 관계가 더 부각되면서 베트남 내부에서도 불제에 대한 역사적 분노와는 별개로 문화적 측면에서 받은건 받은거라고 인정하는 자세도 늘고 있는 추세이다.

3. 문화 교류


베트남은 프랑스의 지배를 받으면서 문화적으로 프랑스 문화의 영향도 받았다.
베트남이 근대 문물을 받아 들인 창구도 프랑스였고, 그 프랑스에 대항하여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민족주의, 사회주의 지식인, 군인 계층도 대부분 프랑스 공산당의 지원을 받아가며 프랑스에서 유학하는 등[2] 영향력이 깊었기 때문에 껄끄러운 감정과는 별개로 프랑스 문화의 영향력은 짙게 남아 있다. 신흥종교 까오다이교도 프랑스식 세계관을 많이 받아들였고 캐나다로 가는 베트남계 이민도 비슷한 문화를 가진 몬트리올에 많이 가는 추세다.
베트남의 바인미라는 빵은 프랑스의 바게트에 영향을 받은 빵이고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은 적도 있어서 프랑코포니의 회원국으로도 가입되어 있다.[3] 그리고 베트남인들중에도 프랑스에 거주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예전에 베트남도 피진 프랑스어가 쓰인 적도 있었다.
베트남에서 프랑스어가 널리 쓰이진 않지만, 프랑스의 지배당시에 프랑스어가 베트남어에도 영향을 주면서 프랑스어 차용어도 베트남어에 존재한다. 그리고 베트남에서 쓰이는 로마자 표기도 프랑스어의 영향을 받았다.
미국이나 다른 서방 측에서 제작한 베트남 전쟁 다큐멘터리 등을 보면 북베트남이나 베트콩 측 인사들과 인터뷰는 대부분 프랑스어로 진행 되는 것만 봐도. 식민지 시절 한국 지식인들의 대부분이 일본어에 유창했던 것처럼 그당시 교육받은 베트남인들은 대부분 프랑스어가 가능했다.
베트남 길거리를 가보면 프랑스풍 건물들을 볼 수 있다.[4]
프랑스는 유럽내 베트남의 우방국이고 프랑스 관광객들도 베트남으로 많이 오고 있다.#

4. 관련 문서


[1] 만약 참전했더라도 구 지배자던 프랑스군이 남베트남에 들어오면(설사 도와주러 왔더라도) 베트남인들이 어떻게 반응할까? 남베트남의 정통성이 바닥 아래로 추락할 것이고, 월불관계가 지금보다 더 안 좋아 질 것이다.[2] 당장에 베트남의 국부인 호찌민부터가 프랑스 공산당에서 정치 활동을 시작한 바 있다.[3] 과거에는 노인 가운데서도 불어를 구사하는 사람도 있었다지만 지금은 흔치 않다. 차라리 한국어 하는 사람 찾는 게 훨씬 쉽다.[4] 베트남의 상가나 단독주택가를 보면 폭이 극단적으로 좁고 뒷쪽으로 매우 긴 2~3층 짜리 건물들이 많은데, 이건 프랑스 총독부가 건물의 가로 길이에 근거해 세금을 매긴 것의 잔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