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역사
1. 갈리아
기원전 5세기 - 기원전 1세기 (갈리아), 기원전 52년 - 486년 (로마 정복 이후)
고대에는 로마인들이 갈리아족의 땅이라 하여 갈리아라고 불렀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9년 만에 갈리아 전쟁으로 갈리아를 정복했다.[1] 갈리아족은 로마에 동화되어 갔으나 제국 말기에 이르러서는 로마로 노예 신분으로 끌려가기도 했다. 갈리아족은 로마 귀족 이주민들과 로마에서 자유민 신분이 된 갈리아족 노예들의 영향을 받아서 갈로-로망 문화를 만든다.
2. 프랑크 왕국
481년 (왕국 성립)/486년 (갈리아 지방 정복) - 987년 (위그 카페 대관)
로마가 영향력을 잃으면서, 갈리아 지방 일대에 게르만족의 일파인 프랑크족이 들어와 프랑크 왕국을 세운다. 프랑크 왕들은 로마(동로마 제국)로부터 책봉받아 갈리아 지방을 다스렸다. 다른 게르만족 국가들은 제대로 된 체제를 갖추지 못하고 멸망하였지만, 프랑크 왕국은 히스파니아 지방으로 쳐들어 온 이슬람 제국을 무찌르고 교황청과 협조하여 안정적인 체제를 만들었다. 메로비우스 왕조에서 카롤루스 왕조로 넘어가면서, 카롤루스 대제는 교황 레오 3세로부터 제위를 받게 된다.
카롤루스 대제가 죽고 프랑크 왕국은 계속 분열된다. 바이킹, 마자르족, 동로마 제국이 계속 제국의 영역을 침입해 오면서, 각 지방은 방위를 위해 주종 관계를 맺고 농노제를 실시했다. 또 지중해에 준동하는 사라센 바르바르 해적 때문에 지중해 교역 형태가 변화했다. 프랑크 왕국의 공식 언어는 라틴어였는데, 지방간의 교류가 줄어들자 각각 프랑스 지방의 프랑스어, 이탈리아 지방의 이탈리아어로 분화되었고,[2] 게르만족의 전통이 강했던 독일에서는 독일어가 나온다.
3. 프랑스 왕국의 성립
987년 (위그 카페 대관) - 1453년 (백년 전쟁 종결)
일반적으로 카롤루스 왕조가 단절되고, 일드프랑스 지방의 지배자 파리 백작 위그 카페가 왕위에 오른 시점부터를 프랑스 왕국의 시작으로 본다. 독일이 오토 2세 때부터 샤를마뉴와 같이 교황으로부터 대관을 받아 황제로 즉위하는 관습을 확립했기 때문에, 프랑스는 클로비스 1세가 세례성사를 받고 랭스 대성당에서 즉위식을 가진 것으로 정통성을 대신하였다. 어쩔 수 없이 프랑스 왕들은 카롤루스 대제를 대신해서 스스로를 클로비스 1세의 후계로 자칭한 것이다. 이 관습은 상당히 중요하게 여겨져서 샤를 7세는 백년전쟁 때 잔 다르크의 도움으로 랭스를 되찾기 전까지 왕위에 오를 수 없었다.
카페 왕조의 통치 아래서 프랑스 왕국은 명분상으로는 존속하였지만 프랑스의 각 지방은 지방 영주들의 소국으로 나뉘어 있었고, 앙주 제국을 소유한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 왕보다도 강력하였다. 카페 왕조 왕들은 수도가 있는 일드프랑스 지역 이외에는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이 거의 없음에도, 귀족들은 공적인 대표자를 두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또 고대로부터 잔재한 혈통적 신비성과 계속 장자 상속이 가능하였던 것이 카페 왕조의 생존에 기여하였다.
이후 어느 시기부터 지중해 무역이 어떤 시기보다도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 농사 기술이 매우 발달하여 삼포제가 실시되었다. 카페 왕조는 지방 영주들의 땅을 하나씩 점령하면서 성장해갔다. 존엄왕 필리프 2세 시절에는 카페 왕조의 성장이 나타났다. 그와 잉글랜드의 사자심왕 리처드는 프랑스 영토를 두고 종종 다투었으며, 결국 잉글랜드가 존 왕 시기에 이르자 아키텐을 제외하고 프랑스 왕에게 프랑스 영토를 모조리 넘겨주게 되었다.
카페 왕조에서 발루아 왕조로 넘어가자 잉글랜드에서 백년전쟁을 일으켰다. 프랑스는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였고, 지속적인 전쟁이 일어났다. 전시 보급을 이유로 대규모 약탈(시보셰라 하는 행렬이 지속적인 약탈 행위를 하였다.)이 이루어졌고 영토가 황페화되었다. 프랑스가 잉글랜드에 비해 유리했던 점은 약탈이 상대보다 덜 심했다는 것이다. 잉글랜드의 군대는 용병으로 구성되어 더 심한 노략질을 하였다. 흑사병이 출몰해서 자크리의 난과 같은 대규모 농민 반란이 발발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잔 다르크의 등장으로 프랑스의 불리했던 전세는 역전이 되고 1453년이 되자 잉글랜드는 칼레만 남겨두고 쫓겨나게 된다.
4. 근세 프랑스 왕국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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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3년 (백년 전쟁 종결) - 1789년 (프랑스 혁명)
1500년에 이르면 인구 15,000,000명에 달하는 프랑스 지역의 거의 대부분의 토지가 프랑스 왕령이 되고, 국가 안에서 권력이 막강해졌다. 외부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해서 이탈리아를 두고 합스부르크 가문과 투쟁하였으나 이 무렵에는 카를 5세가 있던 합스부르크에게 계속 패배하였다. 이 와중에 종교 개혁으로 왕실에 위기가 닥친다.
프랑스에 거주하는 칼뱅 개혁 교회 신자들은 위그노라고 불리었는데 16세기 중반에 이들의 수는 약 5%로 전체 인구에 비해서는 아주 적었으나 왕실에 대항하는 대귀족들이 주로 신봉하였다. 그래서 당시 왕조였던 발루아 왕조, 위그노 측의 부르봉 가문, 가톨릭 측의 기즈 가문은 수십년간의 위그노 전쟁을 일으켰다. 위그노 전쟁의 결과로 발루아 왕조가 부르봉 왕조로 교체되고 낭트 칙령이 발표되자 내전을 종결하였다. 다만 다른 지역에서도 종교 개혁으로 많은 전쟁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내전이 종결하고 난 후 안정이 되자 프랑스는 외부에 다시 집중한다. 독일 지역에 비해 일찍 내전을 끝낼 수 있었던 것이 프랑스로서는 큰 기회가 되었다. 프랑스는 신교도들과 낭트 칙령으로 타협한 것을 바탕으로 리슐리외와 같은 관료의 주도 아래에서 실용적인 외교 정책을 도입한다. 프랑스의 수도였던 파리의 인구도 상당한 수준이어서 1600년에는 220,000명에 달했다.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면서도 30년 전쟁에서는 합스부르크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신교도들과 동맹하였고, 심지어 이교도인 오스만 제국과 동맹하기도 하였다. 프랑스는 30년 전쟁이 끝났을 무렵부터 유럽의 패권국 중 하나가 된다. 낭트 칙령이 폐지된 1685년 프랑스의 인구는 21,500,000명이나 되었고 여전히 프랑스의 실질적인 수도였던 파리도 인구가 510,000명으로 엄청나게 증가해 런던과 함께 서유럽에서 가장 많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프랑스는 루이 14세 시대에 주로 상공업에 종사하던 위그노들의 이탈로 재정에 큰 손실을 얻었다. 이후 루이 15세 시대에도 재정 확대는 잘 되지 않았고 7년 전쟁 등 큰 전쟁에서 계속 패배했다.
5. 근대 프랑스의 변화
1789년 (프랑스 혁명) - 1870년 (나폴레옹 3세의 폐위)
1789년 혁명 이전까지 프랑스 왕실은 부르주아지(제3신분)의 도움을 받았다. 프랑스 왕은 자신과 맞지 않는 일부 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그들을 채용하고, 자본을 이용하였다.[3] 당시 프랑스는 재정난에 시달렸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삼부회를 소집한다. 대다수였던 제 3신분이 다른 두 신분의 세금을 모두 부담해야하는 부당한 결정이 가결되자 당시 유행을 하였던 계몽사상과 맞물려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게 된다. 장기간의 관습법과 귀족, 부르주아지의 견제가 누적되어 만들어진 앙시앵 레짐(프랑스의 기존 체제)은 변화하게 되었다.
이후 프랑스 공화국은 나폴레옹이 득세하기 전까지 단지 공화국이란 이유로 주변 국가와 적대적이었다. 이 시기가 프랑스가 가장 위세가 있던 시절로, 1799년 나폴레옹이 제1통령에 취임했다. 이때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에게 전부 승리했으나 영국에게 해전에서 패배하고, 1812년 러시아 원정에 나섰다가 패배했다. 결국 나폴레옹이 몰락하면서 프랑스는 왕정복고가 이루어진다. 그래도 서로를 견제하던 국가들의 이권 다툼을 잘 활용하여 프랑스는 빈 회의에서 패전국임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왕정이 돌아온 프랑스는 1815년 31,200,000명에 달하는 인구를 보유했고 수도였던 파리의 인구도 580,000명으로 유지했다. 프랑스 혁명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사상은 7월 혁명, 2월 혁명 등으로 계속 나타났고, 몇 차례의 체제 변화 끝에 결국 나폴레옹 3세가 이것을 잘 이용하여 다시 황제를 칭하게 된다.
나폴레옹 3세는 당시의 제국주의적 시대상을 따라 적극적으로 아프리카, 인도차이나 등지에 식민지를 개척하는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유럽 본토에서는 각종 실수로 외교적으로 고립되고 있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때는 프로이센에게 패배해서 황제 나폴레옹 3세가 스당(Sedan) 전투에서 포로로 잡히고, 파리가 포위되어서 파리 시민들이 작은 야생 동물들을 잡아먹는 처절한 상황이 일어났다. 전쟁 패배의 결과로 빌헬름 1세가 베르사유 궁전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프랑스는 50억 프랑의 배상금을 내고 알사스-로렌 지방을 빼앗겼다. 프랑스는 1870년 38,400,000명이나 되는 인구를 보유했지만 제대로 전쟁을 하지 못했고 이것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은 결국 다시 혁명을 일으켰다. 파리 코뮌이 성립되기도 하지만 곧바로 수만명이 희생당하는 피의 1주일 사건으로 코뮌은 무너졌다.
6. 프랑스 제3공화국 시기
1870년 (제3공화국 성립)
이후 프랑스는 벨 에포크(La Belle Epoque, 좋은 시대)라고 불리는 시대를 거쳤다. 산업의 발전으로 공학과 과학이 발달하면서 풍족해지고 만국 박람회를 개최하면서 국가의 번영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주로 자본가, 지주 등만 이런 혜택을 누렸고 노동자들과 식민지 국민들은 계속 착취를 당해서 여전히 상황이 좋지만은 않았다. 드레퓌스 사건과 같은 심각한 갈등이 일어나기도 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프랑스 동북부가 큰 피해를 입었다. 파리를 향해 진격하던 독일군을 마른 전투로 막아세우는데 성공하지만, 그 자리에서 참호선을 파고 주둔하다 보니 그 일대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프랑스는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프랑스는 20대 남성 인구의 상당수가 전사하거나 부상과 실종을 당했다. 부상으로 불구가 된 남성들이 많아서 노동력 부족이 극심해졌고 사회적으로도 한 세대가 거의 없어지는 일을 겪어야 했다.
7. 비시 프랑스와 자유 프랑스
1940년 (비시 프랑스 성립) - 1944년 (프랑스 임시 정부의 성립)
제2차 세계 대전 때는 마지노 선을 파고 방어하는 전략을 썼지만 독일은 또 벨기에와 아르덴 숲을 건너 우회[4] 해서 프랑스를 빠르게 점령했다. 프랑스가 항복하고 나서는 비시 프랑스가 세워졌다. 남아서 국가를 보존한 자유 프랑스는 빠르게 군사력을 회복해 본토를 되찾고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렇지만 전쟁으로 얻은 피해와 전쟁으로 인해 강대국이 된 미국, 소련의 영향력 때문에 가지고 있던 대부분의 식민지를 모두 독립시키고 사실상 본토만 남게 된다.
8. 현대 프랑스의 성립
8.1. 냉전기
1945년 (2차 대전의 종결) - 1991년 (소련의 와해)
이후 알제리, 베트남 등의 식민지들을 놓지 않으려고 전쟁까지 벌였지만, 결국 패배하고 물러났다. 알제리, 베트남 등의 식민지 지배를 포기하지 않으려던 프랑스 제4공화국 정권은 자유 프랑스 망명 정부의 지도자로 명망을 얻은 샤를 드골이 정권을 장악하여 없어지고 프랑스 제5공화국을 수립했다.
냉전 기간에 프랑스는 NATO를 탈퇴하고 독자 노선을 선언해서 미국과 영국 중심의 유럽 질서에 정면으로 대립하면서 국민 감정도 꽤나 소원해졌던 적이 있다. 당시 프랑스가 NATO에서 탈퇴한 원인 중 하나는 프랑스의 핵무기 개발을 미국과 영국이 저지하려고 시도한 것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핵무기는 세계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강대국의 상징이었고, 미국의 관점에서는 프랑스 같은 나라까지 핵무기를 가지게 하여 핵을 확산시킬 의사가 없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이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1956년 일어났던 제2차 중동전쟁에서 영국-프랑스 동맹은 수에즈 운하를 점령했지만, 소련은 철수하라는 요구를 하면서 노골적인 핵공격 위협을 했고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의 이집트 점령을 지지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결국 영국과 프랑스는 철수할 수밖에 없었으며, 자신들이 받게 된 취급을 굴욕으로 느꼈다. 프랑스를 더욱 분노하게 만든 것은 영국이 미국과 함께 프랑스의 핵개발에 반대한 것이었다. 영국은 맨해튼 프로젝트에 자금, 기술, 인력을 지원한데다 전쟁이 끝나기 전에는 미국과 비밀 협정을 통해 전후 핵기술을 공유하기로 합의까지 해 놓은 상태에서 미국에게 배신당해놓고도, 자체적으로 1957년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자 곧바로 미국 편을 들면서 프랑스를 방해했다. 수에즈 운하 사건에서 함께 소련의 핵공격 위협과 미국의 냉대를 받았던 영국이 프랑스의 핵개발을 방해하는 것은 상당한 충격을 받게 했다. 프랑스는 국방비의 상당 부분을 핵개발에 쓰는 강경한 정책을 펼쳐 핵을 얻는다. 그러나 핵개발 성공 이후에도 미국과 영국은 프랑스를 냉대했고, 결국 프랑스는 NATO를 탈퇴하고 독자 노선을 강행하게 된다.
8.2. 현대사
1991년 (소련의 와해) - 현재
2003년 발발한 이라크 전쟁을 전후해서, 미국에서는 'Cheese-eating surrender monkeys'라고 프랑스를 비꼬아 부르곤 했는데 절대로 우방국으로 신용할 수 없는 인간들이라고 대중을 넘어서 뉴욕 포스트 같은 미디어조차도 surrender monkey라는 헤드라인을 내걸고 대놓고 까댄 바 있다. 이라크전쟁으로 틀어진 양국 관계가 버락 오바마 집권으로 프랑스 측에서는 개선될 거라고 기대하고 있지만, 양국 간의 관계가 틀어진 건 단순하게 정권 교체로 해결될 만한 사안이 아니다. 한마디로 관계 개선은 순전히 프랑스의 기대일 뿐이라는게 미국 쪽 시각이다. 물론 '''이라크 전쟁은 결국 미국과 영국이 손잡고 전세계를 상대로 친 구라였음이 밝혀졌고''', 전쟁을 반대한 프랑스와 독일의 행동이 결과적으로 옳은 것이었다고 하지만 말이다.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느냐 마느냐와는 상관없이 미국의 일부 계층에서 여전히 프랑스를 배신자라며 X같이 보는 건 사실이나''', 이미 미국 내에서도, 조지 W. 부시의 퇴임 이전부터 이라크 전쟁이 잘못이었음을 공화당 정치인들조차 인정한 지 오래이다. 심지어 버락 오바마와 대선에서 맞붙었던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 매케인마저도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에 관련된 조크를 하며 부시 행정부를 비판했던 바 있다.
오바마 행정부의 출범 이후 양국 정상은 이미 수차례 회동하였고, 중동 문제 등에서 뜻을 같이하는 공동발표 또는 회견을 함께 수행하고 있는 바, 이미 현재의 미-불 관계는 조지 워커 부시 시대의 대립에서 벗어나 다시 화합의 길로 들어설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어찌되든 아들 부시가 망쳐놓았던 것보단 낫다. 참고로, 비슷한 이유로 망가진 미-독 관계도 메르켈 집권 이후에야 회복되기 시작했다.
2019년 11월 7일에 프랑스 정부는 탈세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SNS를 관리감독하는 방안을 추진하자 인권단체들은 반발했다.# 11월 9일에 리옹2대학교에 다니던 대학생이 불평등에 항의해 분신자살을 시도한 사건이 발생되었다.#
2020년 6월 15일에 파리 법원은 에두아르 발라뒤르 전 총리의 보좌관, 프랑수아 레오타르 전 국방부 장관의 보좌관에게 각각 징역 3년형을 판결했다.#
2020년 10월 16일에 프랑스에서 체첸인에 의한 교사 참수 사건이 발생되면서 참수를 저지른 18세 체첸인이 체포됐다.# 마크롱 대통령은 이에 극단주의에 맞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1] 프랑스인들은 당시를 상징하는 제국인 로마의 영지가 된 걸 자랑스러워 하면서도, 로마에 대항한 베르생제토릭스를 영웅으로 생각하는 이중적인 기질이 있었다.[2] 프랑스어도 북부 랑그도일과 남부 랑그도크의 차이가 크게 존재하였다.[3] 부르주아지라고 해서 반드시 상업에 종사하지는 않았다. 혁명 당시 부르주아지의 90%는 토지 소유자였으며, 10%만이 상업 종사자였다.[4] 제1차 세계 대전 때도 같은 방식을 썼지만 당시에는 기술력의 한계와 독일군의 무리한 작전이 겹쳐서 파리 함락에 실패한 반면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전차의 등장으로 기동력이 올라간 데다 주변 환경이 양호했기 때문에(독일이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맺어서 공격받을 걱정도 없었고 이때 프랑스는 전차에 무전기를 하나도 달지 않은 반면 독일군은 무전기를 대부분 달고 있을 정도로 준비가 차이가 났다) 독일군은 연합군이 방어할 틈도 없이 바로 공격을 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