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역사
1. 개요
베트남의 역사를 다루는 문서. 동남아시아 국가들 중 가장 역사가 오래 되었다. 또 역사적으로 중국과 많이 엮이다 보니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의 역사와 비교하면 오히려 동북아시아사에 가까울 정도. [1]
2. 반랑, 어우락 (~ 기원전 2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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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역사적으로 어떤 시점이 먼저인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베트남 역사상 최초의 국가는 베트남 북부 델타 지역과 현재의 광시 좡족 자치구 인근에 있었던 락비엣(Lạc Việt, 雒越, 낙월)이라는 민족이 세운 봉건적 공동체인 반랑국(Văn Lang, 文郎, 문랑)은 기원전 2879년에 훙브엉(Hùng Vương, 雄王, 웅왕)에 의해 건국되어 18명의 훙브엉의 2621년을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염제 신농씨의 3세손인 제명이 아들 제의를 낳고 얼마 후에 남방[2]
으로 순행하여 오령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무선의 딸을 만나 데려왔는데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들 녹속이 태어났다. 제명은 녹속에게 제위를 잇게 하려 했지만 녹속이 고사하자 제의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북방[3] 을 다스리게 했다. 한편 녹속을 경양왕에 봉하여 남방을 다스리게 했는데 나라 이름을 적귀국이라 했다. 경양왕은 수부에 오갈 수 있었는데 동정군의 딸 용녀를 아내로 삼아 승람, 곧 낙룡군을 낳았다. 낙룡군은 부친을 대신해서 나라를 다스렸다. 그는 백성들에게 농경과 인륜을 가르쳤다. 때때로 수부로 돌아갔지만 백성들이 도움을 청하면 와서 도와주었다. -베트남 건국신화[4] -
한국의 고대 국가인 고조선 즉 단군조선과 비슷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베트남의 국경일 중에 훙왕기일(음력 3월 10일)이 있는데, 초대 국왕인 훙브엉을 기리는 날로, 한국의 개천절과 성격이 유사하다.(여차하면 (공식적으로는 서기를 쓰겠지만) 기원전 2879년을 원년으로 하는 월기(越紀)를 비공식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겠다.) 실제로 동썬(Đông Sơn, 東山, 동산) 문화가 발견되면서 문랑국이 실존했다는 것을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동썬 문화는 기원전 2350±100년으로 추정되며, 타인호아(Thanh Hóa, 淸化, 청화)성 동썬현에서 발견되었다. 이 동썬 문화는 청동기 말기와 철기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이다[5] . 전해져 내려오는 설화도 그리 많지 않고, 계보도도 자세히 전해져 내려오지 않은 단군조선과 다르게 반랑국은 전해져 내려오는 설화는 많고 계보도도 자세히 전해지지만, 구전되어서 내려져온다는 설화도 신화적인 성격이 강한데다가 각 왕들의 재위기간이 너무 길다는 점 때문에 베트남 학계에서는 반랑이 대체적으로 기원전 7세기경에 건국된 것으로 추측한다.
여하튼 반랑 왕국이 수백 년간 이어져 내려오다가 툭판(Thục Phán, 蜀泮, 촉반)이 반랑을 멸망시키고 어우락(Âu Lạc, 甌駱, 구락)(기원전 228년)을 건국한다. 어우락은 남하한 북쪽의 어우(Âu, 甌, 구)족과 남쪽의 토박이 락(Lac, 駱, 락)족이 결합한 이름이다.
안즈엉브엉(An Dương Vương ,安陽王, 안양왕, 재위 BC 257~207) 툭판은 진시황에게 잘보이려고 장사 이옹중(완옹중이라고도 전해짐)을 보내기도 했지만 자신의 대에 멸망하였다. # 이옹중 이야기 안즈엉브엉은 백 살까지 살았다고 한다.
반랑은 중국의 하(夏)나라 정도고, 어우락은 상(商)나라와 비슷한 위치이다. 반랑의 경우 동썬 문화의 존재로 국가의 존재까지는 몰라도, 독자적 문화권의 형성까지는 알 수 있고, 어우락은 대규모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꼬로아(Cổ Loa, 古螺, 고라) 성의 발굴로 좀 더 분명해진다.
간혹 베트남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지도에는 반랑(Văn Lang)의 영역이 과도하게 크게 만들어져 있는 것도 있는데, 정확한 근거 없이 만들어진 잘못된 지도이다. 사학자가 만든 지도로는 보이지 않고, 어떤 베트남 네티즌이 임의적으로 만들어 퍼뜨린 것으로 추정된다.
3. 남 비엣(Nam Viet)/남월(南越) 시대 (기원전 207년 - 기원전 111년)
- 남월 항목 참조.
4. 중국의 지배 (기원전 111년 - 서기 938년)
4.1. 한나라의 지배시대(한구군, 漢九郡)(기원전 111년 ~ 220년)
베트남판 한사군.
한문제 시기에는 화평도 맺어졌지만 한무제가 즉위한 뒤 천하질서를 재편하기 시작하자 남월 역시 공격대상이 되었는데, 조타가 살아있을 적에는 한의 군대를 막아내어 한동안은 화친관계가 지속되었으나 4대 국왕 애왕 조흥(趙興, Triệu Hưng, 찌에우흥)과 토착민 출신인 재상 여가(呂嘉, Lã Gia, 라지아)와의 대립이 불거져 쿠데타가 일어나 5대 국왕이자 마지막 국왕인 조건덕(趙建德, Triệu Kiến Đức, 찌에우끼엔둑)이 추대되자 이에 한은 노박덕을 위시한 원정군을 파견하였고, 기원전 111년 남월을 멸망시키고 9개 군을 건설했다.
그 소식을 들은 남월 남부의 쟈오 찌(Giao Chỉ, 交趾, 교지)와 끄우 쩐(Cửu Chân, 九眞, 구진)의 대표도 저항하지 않고 항복하여 9개군이 설치되었다. 이것이 약 1천 년에 이르는 중국의 베트남 지배의 시작이다.
한나라가 베트남을 공격한 이유는 자국 변방의 안정이라는 목적도 있었지만, 나중에는 경제적인 목적이 더 중시되었다. 이 지역은 화북지방을 중심으로 한에서는 구경할 수 없는 남방물자의 산지인 동시에 동남아시아와 인도, 동아시아를 연결하는 물자의 집산지였기 때문에 막대한 이권이 존재하였다. 이후 한은 기본적으로는 간접지배의 방식으로 이 지역을 다스리면서 경제적 이득을 취했는데 워낙에 원지라서 수시로 탐관오리들이 등장하는 문제가 생겼다. 결국 탐관오리로 인한 반란, 괜찮은 관리와 이 지역 출신들의 통치로 인한 선정을 반복하였다.
이때 후한의 개국공신이자 복파장군 마원이 쯩 자매의 반란을 진압하고 베트남의 통치를 간접지배에서 직접지배로 바꾸었다. 이 사람은 그 유명한 '''삼국지'''의 '''마등''', '''마초''' 부자의 '''조상'''이다. 마원은 또 행정제도를 조정함으로써 중국의 지배통치력을 높이고 동화정책을 실시하였다. 이 조치로 기존의 락장, 락후의 통치력은 약화되었고, 중국인 이주민의 힘이 늘어났다. 또한 이때부터 비엣족이 본격적으로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면서 비엣족이 가지고 있던 구비서사시의 전통이 끊어진다.[6]
한편 137년 베트남 중부의 원주민인 구련(區憐)이 중국령 베트남을 공격하였다. 구련은 베트남인이 아닌 참족으로 보인다. 남부 원주민의 공격은 계속되어 192년 중국령 베트남 최남부 녓남(Nhật Nam, 日南, 일남)군을 점령하고 나라를 세운다. 이 국가가 '''베트남의 숙적 참파의 전신인 임읍(林邑)이었다.''' 참족은 말레이-폴리네시아 인종에 인도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베트남인의 동 썬 문화와는 다른 싸 후인 문화의 민족이었다. 임읍 남쪽에는 부남(扶南) 왕조가 번성했다.
후한 시대에 결국은 베트남의 직접 통치가 흐지부지되었다.
삼국시대에는 이중지배 상태가 되었는데 사섭이 베트남을 지배하고 있었고 그 사섭을 손권이 지배하고 있었다. 사섭은 손권의 부하였으나 베트남에서는 절대권력을 휘둘렀다.
4.2. 위진남북조시대(220년 ~ 589년)와 수나라 시대
삼국시대에는 교지의 실질적 독립 세력이었던 사섭[7] 이 등장하여 안정이 되는가 싶더니 다시 사섭이 죽고 오나라에 편입되는 과정에서 다시 조씨정[8] 의 대규모 반란이 터지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를 이어간다.
베트남의 중앙이자 교주자사부의 최남단에 위치한 녓남군(일남군)은 기후가 아주 끝내줬는데, 여기는 덥기도 더운 곳인데다[9] , 온갖 풍토병이 창궐했던 곳이었다. 당시 후한에서는 수도인 낙양으로부터도 가장 먼 곳이 녓남인데 녓남군은 낙양으로부터 13,400리나 이격되어 있었다. 그래서 당대의 사족들이나 관리들은 유배를 당할 경우 유배지에 따라 자신들의 행보를 예상했는데 '''녓남으로 유배당하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실제로도 녓남으로 유배가 확정되면 '''고향에서 장례식을 먼저 치르고 녓남으로 출발했다.''' 교주자사였던 사섭조차 건드리지 않은 곳이 녓남군이다. 그래도 녓남군에는 현이 5개나 되었고 인구가 10만 명 정도 되었다.
중국의 혼란기 사이에는 잠시 찌에우비엣브엉(Triệu Việt Vương, 趙越王)이 일어나기도 하고, 전 리왕조(Nhà Tiền Lý, 전 이조, 544년–602년)가 세워지기도 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수나라는 남방의 정복과 튀르크족(돌궐)과의 효과적인 관계 구축에 성공함에 따라, 수의 군주들은 다른 방향으로 확장주의적 정책을 자유로이 펼칠 수 있게 되었다. 두 명의 수나라 황제(수문제, 수양제) 모두 주변국과 민족을 정벌함으로서, 옛 한 제국 시대의 영광을 되살리고자 했다. 602년 수의 군대는 오늘날 하노이 근방 지역을 가리키는 교주(交州)를 손쉽게 탈환했다.
605년 봄이 오자 제국군은 베트남 남쪽으로 더욱 깊숙히 밀고 들어갔는데, 오늘날 다낭 인근을 수도로 삼고 해안가를 따라 자리잡았던 참파 왕국을 침공했다.[10] 허나 정작 이 특별한 원정은 한 제국의 영광을 되살리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외려 남방에 전설적인 부(富)가 존재한다는 사실-그리고 상당부분 상상에 가까웠다-에 현혹된 수문제의 개인적인 욕심에 가까웠다.
유방(劉方)이 이끌던 수나라군이 도리강(闍梨江)을 건너자, 코끼리를 동원하여 참파군이 공격을 가해왔다. 첫 공세를 격퇴한 후, 유방은 여러 개의 구덩이를 파게 하고 그 위를 풀로 덮은 뒤 거짓 후퇴를 통해 코끼리병을 함정으로 유인했다. 또한 수나라군은 쇠뇌를 동원하여 코끼리를 쏘게 했고, 이에 놀란 코끼리들은 몸을 돌려 참파군을 거꾸로 짓밟아버렸다. 유방은 참파의 수도를 정복하고 약탈했지만, 중국으로 돌아오는 귀로길에 수나라군은 풍토병에 시달리며 막대한 손실을 냈고 유방 또한 병에 걸려 사망했다.
사실 이러한 결말은 거진 예상된 바에 가까웠다. 현대에 이르기 전까지, 기후가 다양한 지역 전부에서 기동하던 군대들은 항상 역병에 취약했다. 특히나 온화한 지역에 살던 병사들은 남방의 열대에 극도로 허약함을 보였고, 전혀 익숙치 않던 수많은 세균들에 노출되었다. 이후 베트남 땅에는 당에 의해 안남도호부가 세워진다.
4.3. 당나라의 기미지배 시대(602년 ~ 880년)
베트남판 안동도호부.
당나라가 건국되자 당시 이 지역을 다스리던 태수 구화가 곧 투항하면서 이 지역에 안남도호부가 설치되었으나, 리 뜨 띠엔(Lý Tự Tiên, 李嗣先, 이사선), 딘 끼엔(Đinh Kiến, 丁建, 정건), 풍흥(Phùng Hưng, 馮興, 풍흥) 등의 반란을 꾸준히 겪어야 했다.
당나라는 훗날에 대리국으로 성장하는 현재의 운남성 지역의 국가 남조(南詔)와 전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전선기지였던 이 지역에 정해군(靜海軍)을 설치하고 고병을 절도사에 임명하면서 완전히 통합정책에 나선다. 고병은 고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선정을 펼치기는 했지만 도교를 중심으로 한 통합정책은 좀 늦은 감이 있어서 결국 실패. 결국, 880년 황소의 난을 계기로 안남도호부를 철폐하는 수준에 이른다.
4.4. 정해군절도사 시대(880년 ~ 938년)
이후 906년 쿡 트아주(Khúc Thừa Dụ, 曲承裕, 곡승유)가 절도사를 자처하면서 쿡씨 절도사 시대가 개막하였다. 907년 중국도 오대십국시대에 접어드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여기 신경쓸 상황이 아니었다. 이 시기에도 역시 정해군절도사 유은이 세운 남한과 전쟁을 벌이면서 툭탁툭탁했다.
5. 안남(安南) 응오 왕조(938년 - 968년)
- 응오 왕조 항목 참조.
6. 다이비엣(大越, 대월)(968년 - 1802년)
- 대월 문서 참조.
7. 월남(越南) 응우옌 왕조(1802년 - 1945년)
- 응우옌 왕조 문서(1802~1885) 및 프랑스령 인도차이나(1885~1945) 문서 참조.
8. 현대 베트남사 (1946년 - 현재)
8.1. 베트남 독립 전쟁(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1946년 - 1954년)과 제네바 평화 협정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이 항복하여 철수했으나 베트남 지역은 무정부 상태였고, 프랑스인들은 아직 억류됐다. 며칠 후에 호치민의 베트민은 중북부 지방 대다수를 장악해 9월 2일 재통일과 독립을 선언하며 투쟁을 시작했다. 이들은 민족주의로 철저히 무장돼 있어 독립을 열망하는 주민들의 지지를 한몸에 받았다.
반면 남부는 중화민국군이 진주해 일본군 잔당 처리를 명분으로 프랑스인들을 억류한 채 주둔했으나, 당시 본국에선 국공내전으로 신경을 쓰는 어수선한 상황 탓에 호치민의 공산화 앞엔 마냥 손을 놓았다. 결국 중화민국 측은 프랑스인들을 석방시켜 프랑스에게 남부 지배권을 맡기게 됐는데, 미국은 베트남의 즉시독립을 주장하였으나 샤를 드골은 크고 아름다운 프랑스 식민제국의 유지를 원했다. 미국은 악화일로로 치닫는 소련과의 관계를 고려할 때 한나라 라도 우방국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결국 프랑스의 입장을 지지하게 된다. 처음에는 베트남을 '''자유국가'''로 인정했다. 이것은 프랑스 연방 내의 자치령으로 남는 것을 의미한다. 그대신 프랑스군이 1952년까지 단계적으로 철수하는 것을 골자로 협상이 맺어졌으나, 사실 프랑스는 베트남에 공산주의자들이 통치하는 것을 묵인할 생각이 없었다.[11] 마찬가지로 호찌민 역시 이 협상을 두고 같은 공산당 내부에서 매국노(...)라고 욕을 들어먹고 있던 상황이었고, 결국 양국간에 전면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1946년 11월 20일 베트민과 프랑스군 사이 세관업무를 가지고 충돌이 있자, 프랑스가 함포로 쏴제껴 베트민군을 공격하고 수많은 시민들을 학살하는 하이퐁 사건이 터지면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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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가 코친차이나 지역에 세운 '''코치차이나 자치공화국 임시정부 기.''' 베트남말로는 꽁호아 뜨찌 남끼(Cộng hòa tự trị Nam Kỳ, 남기(=코친차이나)자치 공화국 共和自治南圻)이라고 한다. 남기국(南圻國)으로 줄여부르기도 한다. 후에 의회와 프랑스의 동의로 남베트남(베트남국 - 왕정)에 자치를 전제로 흡수된다. 프랑스 시민권자였던 응우옌반틴(Nguyễn Văn Thinh, 阮文廳/완문청)이 대통령이었으나, 1946년 11월 10일, 응우옌반틴이 사망하였으나, 큰 의미는 없었다. 이 깃발은 1948년 6월 2일까지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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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는 1949년 바오다이 황제(1913~1997, 재위 1925~1955)가 이었다. # 바오다이는 즉위 직후 프랑스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와 1932년까지 머물렀으며, 보고 배운 것을 바탕으로 즉위 초에는 내정개혁과 자치독립에 힘썼으나, (당연히) 프랑스의 방해로 갈수록 성과 없는 이런 노력에 지쳐 이후엔 사냥과 자동차등 향락에 빠지게 된다.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독립으로 호치민에 의해서 고문으로 밀려났지만, 1946년에 홍콩으로 망명했다가 3년 만에 다시 돌아온 것.[12]
한편 같은 시기 남베트남은 온건한 독립 을 준비 중이었다. 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프랑스군은 응우옌조의 황제를 명분으로 친프랑스 정부를 세우려 한 것이다. 1948년 베트남의 여러 세력과 프랑스가 절충을 한 결과, 같은 해 5월 27일에 잠정 정부로서 베트남 임시 중앙 정부를 설립했다. 그 후, 1949년 3월 마지막 황제 바오다이는 프랑스-베트남 협정을 체결하여, 같은 해 6월 14일에 정식적 《베트남국》[13] 이 설립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이러한 전쟁지속 정책은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는 베트민군의 대반격과 2차 대전이 종결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오는 재정적인 문제에 국제여론마저 악화되면서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1954년 인도차이나 문제로 제네바에서 회의가 개최되었고, 결국 디엔비엔푸 전투(Điện Biên Phủ, 奠邊府)에서 지압 장군이 이끄는 베트민군에게 병력 대부분을 상실하고 대패하면서 베트남을 포기하고 철수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벌어진 것이 바로 제네바 협정이다.
프랑스와의 제네바 협정(1954년 4월 26일 ~ 7월 20일)의 결과 그해 8월 1일부로 전쟁은 끝났고, 10월에 프랑스 군이 철군하면서 한시적으로나마[14] 정전선 설정에 관해서 논란이 치열하게 벌어졌는데 프랑스는 18도선을 고집했고, 베트민은 13~14도선을 주장했다. 주은래가 16도선[15] 을, 몰로토프가 16~18도선 중간인 17도선을 중재하여 베트남은 '''북위 17도를 군사경계선으로 하여 월남에는 남북으로 2개의 정부가 들어섰다.'''
그리고 1955년 10월 26일 남베트남에 국민투표로 왕정이 축출되고 응오딘지엠 정부가 수립되었다. 베트남 공화국의 건국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달 1월을 기점으로 내전은 다시 시작되었다. 호치민 대통령은 17도선을 휴전선이라고 보며 남베트남이 1956년 남북통합 총선거를 받아들여 줄 것을 간절히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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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국(quoc gia Viet Nam, 꾸옥 기아 비엣남) 국기'''이자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비엣남 꽁호아) 국기'''
1948년 6월 2일부터 1975년 4월 30일 패망때까지 사용. '''꺼방바속도(Cờ vàng ba sọc đỏ''', 한역하면 황저삼선기黃底三線旗''')''' 노란색은 베트남과 베트남인, 빨간색은 베트남인의 피를 상징하며, 민유 민치 민향民有 民治 民享(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의 삼민기라고도 한다. 하지만 이런 의미는 뒤에 붙은 것으로 원래는 '''타인타이 황제'''(成泰帝/성태제)'''의 깃발'''로 카이딘 황제(啓定帝)가 고친 1920년까지 썼다. 카이딘 황제의 기도 롱띤이라고 부른다. 바오다이 황제 때까지, 즉 1920년부터 1945년까지 사용했다. 사실상 1890년부터 1975년까지 85년을 이어진 국기인 셈이고, 지금도 남베트남계 혹은 베트남 공산정권 반대 세력에선 이 국기를 쓴다.
8.2. 베트남 전쟁(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1955년 - 1975년)과 미국의 참전(1964년 - 1973년)
그러나 호찌민의 결의와는 달리 남베트남과 미국은 제네바 협정 결의안을 채택하지 않았고, 그에 따라서 1956년에 해야 할 남북통합 총선거도 없었다. 결국 이에 반대하는 남베트남 내 공산분자들은 테러 공격을 감행하였고, 1960년 12월, 남베트남에서 '남베트남 해방민족전선'이란 이른바 '비엣콩(베트콩)' 을 결성하였다. 이들은 또한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남 민주공화국(북베트남)'과 중국, 소련의 원조를 받아 더욱 세력을 확장하였고, 선거를 통해 베트남 전역을 장악할 수 없게 된 공산 측은 군사적인 수단을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제는 미국(1964년 8월 2일)이 중국 공산화와 연이은 한국전쟁 등으로 공산주의가 동남아로 퍼질까 봐 통킹만 사건을 핑계로 북베트남과의 전쟁에 돌입하지만(베트남 전쟁 혹은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미국 역사상 최초의 패전'''[* 이라고 하는데, 사실 이전에도 패전에 가까웠던 전쟁은 있었다. 1812년에 치렀던 미영전쟁이 그것으로, 당시만 해도 보잘 것없던 약소국이었던 미국이 당대의 초강대국인 영국을 맞아 싸운 전쟁이었다. 이때 미국은 백악관이 불타는 굴욕까지 겪는 등, 영국군의 압도적인 힘에 속절없이 발렸으나, 정작 영국 본국에서 반전여론이 들끓는 바람에 영미 양국이 [[벨기에의 [[헌트(벨기에)|헌트]]에서 종전 협정을 체결하고 모든 영국군이 [[미국]] 땅에서 철수했다. 다만, 이 전쟁은 미국이 약소국이었을 때 치른 전쟁이었음을 감안해야 하고, [[베트남 전쟁]]은 이미 미국이 초강대국으로 성장한 이후에 치른 것이어서 굴욕감이 [[영미전쟁]] 때보다 배로 컸다.]이라는 치욕을 남긴 채 1973년 파리에서 평화조약을 맺고 떠나야 했다. 자세한 것이나, 이 당시 베트남 전쟁이 벌어지기까지의 자세한 베트남 현대사는 베트남 전쟁 항목 참조.
1973년 1월 27일으로 파리 휴전협정이 체결되었지만, 이는 미국이 발을 뺄 핑계거리나 다름 없었다. 무엇보다 워터게이트과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사임으로 미국 정국이 혼란에 빠진것이 결정타였다. 1975년 3월 10일에 협정을 깬 북베트남의 침공으로 보름 만인 3월 26일에 다낭 함락, 1달 20일 만인 1975년 4월 30일 사이공 함락과 함께 전쟁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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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 공화국 임시혁명정부) 국기'''[16]
1975년, 북베트남은 기어이 남베트남을 드디어 멸망시켰고, 남베트남 공화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웠다. 다음 해의 총선거로 2400만명의 북베트남과 2000만 명의 남베트남이 합쳐져 4400만 명의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출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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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
이로서 독립국 '''베트남은 통일을 완성했다.''' 물론 통일이후 들어서 중국과의 관계로 인해 사실상 추방 당하여 난민이 되거나 공산주의 정권하에서 재교육 등으로 고생한 수많은 사람들이 생기기도 했다. 덧붙여 두는 이야기지만 베트남 공산정권이 호치민 같은 미담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 건 절대 아니고, 정치적 탄압이나 수용소같은것도 분명 존재했긴했다. 1950년대 중반에 토지개혁을 결정과정 같은 건 생략한 채 강제로 시행했다가 수만 명이 죽거나 다치고 수십만에 이르는 난민이 대거 월남 했고 또, 권력투쟁과정에서 트로츠키파를 숙청했던게 그 예다. 단지 소련이나 캄보디아 같은 나라들보다 막장성이 덜하다 보니 덜 알려졌을 뿐.
8.3. 통일 이후의 베트남사(중월전쟁 = 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 1979년 - 1988년)
미국과의 전투로 자신감을 얻은 베트남은 이후에는 캄보디아까지 침공하여 '''완조 이래의 대월남제국 그리고 동남아 전체의 패권'''을 쥐고자 했고 '''동남아시아를 아울러 인도차이나 공산연방을 세우려 하였다.'''[17] 이에 분개한 중국이 침공해 중국-베트남 전쟁(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 1979년 2월 17일 ~ 1988년 1월)이 벌어졌지만 한타를 맞고 물러난다. 뭐 여러 가지 상황이 겹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프랑스, 미국, 중국을 발라버린 셈. 여담이지만 어떤 영국,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의 패배를 듣고 쾌재를 불렀다. 그리고 자신들의 숙적을 꺾어 준 베트남에 호감을 가졌다.(다만,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와의 관계가 100% 나쁘지만은 않다는 게 함정.)
하지만 통일 이후에는 계획경제체제의 경직성과 막대한 통일 비용을 떠안은 데다가 동시기에 크메르 루주를 퇴격하겠다고 캄보디아를 점령했는데 캄보디아의 경제 상황은 베트남보다 훨신 안 좋은 데다가 크메르루주가 장기간에 걸쳐 저항했기 때문에 전비를 지속적으로 지출해야 했고, 덕택에 '''통일 비용을 감당하기에도 모자를 판에 캄보디아에 상당량의 예산을 투입해야 했다'''. 그런 데다가 전쟁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중국과의 전쟁도 터지는 바람에 '''전비가 추가로 지출된 건 덤이었고''', 소련과 동구권의 경제 침체로 인해 통일 베트남에 대해 충분한 지원이 이뤄지지 않았다.
이런 연유로 통일 이후 베트남은 경제 파탄 상태에 놓이게 되었고, 매년 수십만 명의 인민들이 먹고 살기 위해 보트피플이 되었다.[18] 이들 중 상당수는 엘리트였기 때문에 두뇌유출도 통일 베트남에 상당한 타격이 되었다.[19] 그러나 1985년부터 집권한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의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정책이 베트남에도 영향을 미쳐 1986년 말에 공산당은 6차 인민회의에서 도이모이 (Đổi mới; 𣌒𡤓; (易+對)(始+買)) 개방정책을 승인 후 실시했고, 1989년에 캄보디아 철수 후 공산주의 통제경제정책을 사실상 포기하면서 상당한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있다. 하지만 성장률에 비해 소득이 상당히 낮은 데다가 빈부격차가 심하고 물가 상승률도 높다는게 문제점으로 지적받는다.
도이모이 추진 후 한국 등 주변국들과 관계를 좋게 만드는 한편 1989년부터 ASEAN에도 1992년 옵저버가 되었고, 1995년 정식 가입했다. 1967년에 일종의 반공정권 5개국 간의 단결기구였던 ASEAN은 그렇게 동남아 전체를 포괄하는 기구가 되었고, 뒤따라 여러 공산국가가 가입하면서 실질적 경제-정치적 공동체가 구성될 힘을 얻게 되었다. 이 외에도 적국이던 미국과도 관계 개선에 주력해 1995년 통상금지가 풀려 외교 관계가 재개됐다.
9. 출처
- 먼나라 이웃나라 시즌2(지역/주제편): 동남아시아, 천년 문명의 신비에서 21세기 변화와 개혁의 주역으로 - 이원복 글/그림. 김영사. 2018. p92~109.
10. 관련 문서
[1] 실제로 고등학교 동아시아사 교과 과정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15차 교육과정 개편으로 인해 근현대사를 제외하면 비중이 대폭 줄었다.[2] 베트남을 의미한다. 베트남은 중국을 북방, 자신을 남방으로 칭하여 자주의식을 드러냈다.[3] 중국[4] 최귀묵,'베트남문학의 이해',창비,2010,p76[5] 송정남, 2001년.[6] Đinh, Gia Khánh. Văn hóa dân gian Việt Nam với sự phát triẻ̂n của xã hội Việt Nam. Chính trị quó̂c gia, 1995[7] 베트남식 독음은 '시 니엡(Sĩ Nhiếp)'이다.[8] 베트남식 독음은 '찌에우 티 찐(Triệu Thị Trinh)'이다.[9] 위키백과 동하의 기후 문단에서 볼 수 있듯이, 30도 이상의 폭염은 기본으로 깔고 들어가고, 한창 더울 때는 '''40도''' 정도는 예사 수준인 곳이다. 물론 이 시절이 지금과는 완전히 같지 않았을 것이다. 사족으로, 동하는 옛날의 일남군에 해당되는 지역이다.[10] 상술했듯 중국인은 임읍(林邑)이라 불렀다.[11] 프랑스에서 공산당이 원내 제1당을 차지하기는 했지만 4공화국 시기 공산당은 정권에서 배제당하는 야당 신세였다.[12] 바오다이는 공화국화 되면서 퇴위된 후 남베트남의 멸망과 베트남의 남북통일, 도이모이 개혁개방 정책까지 다 보고 1997년에 파리에서 노환으로 사망한다.(향년 84세)[13] 베트남준국가라고도 한다.[14] 1956년 7월에 남북총선거로 통일 베트남을 세우기로 했다.[15] 이 경계선대로라면 후에와 다낭은 베트민이 가질 수 있다.[16] 베트콩(남베트남 해방민족전선, 남베트민)임시 기와 같다. 적성홍기(赤星紅旗)라고도 한다.[17] 다만 캄보디아고 라오스고 대월감정이 좋기 힘들다.[18] 단순히 공산정권의 압제를 피하기 위해서라고 알려져있지만 상당수 보트피플은 공장이나 농장, 어선에서 일해도 봉급이 얼마 안나왔고 인플레이션 현상까지 겹치면서 안 그래도 적은 월급의 가치는 더더욱 떨어지는 현상 때문에 돈을 거하게 벌려고 베트남을 빠져나온 경우가 많았다. 1970년대의 보트피플은 대다수가 정치적인 원인 때문에 빠져나왔다면, 1980년대의 보트피플들은 대다수가 경제적인 원인 때문에 빠져나왔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19] 현재도 두뇌 유출은 베트남에서 심각한 문제로 지적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