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거빈
1. 개요
전직 NBA 농구 선수. 데이비드 로빈슨과 팀 던컨의 시대가 오기 전 샌안토니오 스퍼스의 전설이었으며, 막강한 득점력과 아이스맨이라고 불릴 정도의 무표정한 얼굴이 트레이드 마크였던 선수다. 12년 연속 올스타 선정, 3년 연속 올스타 최다 팬 득표, 3년 연속 (총 4년) 득점왕, 커리어 평균 야투 성공률 52%, 2년 연속 MVP 득표 2위, 7번의 All-NBA (퍼스트 팀 5회) 선정, 명예의 전당 헌액, 위대한 50인 선정 등등 선수로서 누릴 수 있는 많은 영광을 누렸고 역대 슈팅 가드 순위에서도 항상 5위 안에 이름을 보이는 NBA 전설 중의 한 명이다.
별명은 '아이스 맨 (Ice man)'으로, 경기마다 항상 무표정으로 일관한 상태에서 경기를 임해서 붙여진 거다.
2. 어린 시절
거빈의 어린시절은 상당히 불우했는데, 디트로이트의 빈민가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거빈은 평생 아버지의 얼굴도 제대로 몰랐다. 거빈이 태어날 무렵에 아버지가 가족을 버리고 집을 나가버렸기 때문. 하지만 거빈의 어머니가 정말 열심히 막노동을 하면서 6남매를 키워, 그런 형편에서도 밥을 굶지는 않았다고 한다.
빈민가에서는 수많은 유혹과 위협들이 있었지만 거빈은 어머니에게 보답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농구선수로서 자신을 갈고 닦았다. 마침 173cm였던 키가 '''단 몇개월만에 193cm'''가 되는 행운도 있었고, 당초에 키가 작다는 이유로 농구부 감독에게는 퇴짜를 맞았지만 거빈을 불쌍하게 여긴 코치로부터 농구 수업을 받는 특권도 얻었다. 그리고 심성이 착했던 거빈이 마음에 들었던 중학교 경비 아저씨의 도움으로 야간에도 체육관을 써서 열심히 훈련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거빈은 매일같이 어둡고 텅빈 체육관에서 미친듯이 슛을 쏘고, 쏘고, 또 쏘면서 자신을 갈고 닦았다. '''몇년 동안이나.'''[5] 훗날 스스로 "오직 하느님만이 내가 노력한 그 나날들을 알아주셨다." 고 할만큼, 거빈은 묵묵히 달리고, 쏘고, 또 달렸다.
3. ABA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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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노력한 대가로 대학 시절의 거빈은 평균 20득점은 훌쩍 넘는 뛰어난 선수가 되었다. 그렇게 거빈은 선수인생로서 꽃을 피워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칼리지 디비전[6] 토너먼트에서 로아노케 칼리지와의 준결승 중에 상대 선수가 거빈이 너무나도 존경하고 사랑하는 어머니를 대상으로 트래쉬 토크를 시전하자, 격분한 거빈은 그 선수에게 '''주먹질을 날렸다.''' 경기 중 폭력사태라는 큰 일이 생기자 은사인 짐 더처[7] 감독이 책임을 지고 사임했으며, 거빈 역시 '''NCAA 선수 자격 박탈'''이라는 엄청난 중징계를 받았다. 그렇게 노력한 나날들이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NBA 선수로서의 꿈을 접을 수 밖에 없게 된 거빈은 마이너리그 EBA[8] 팀 '폰티악 채퍼럴스'에서 밥벌이를 위한 선수생활에 나섰다. 그런데, 거빈이 나섰던 경기장에는 ABA리그의 버지니아 스콰이어스 팀 소속 스카우터가 우연찮게 나와 있었던 참이었고, 스카우터는 거빈의 뛰어난 기량에 매력을 느껴 거빈을 스카우트 했다.[9]
그렇게 입단한 버지니아 스콰이어스에는 '''줄리어스 어빙'''이 있었다. 당시 어빙은 30득점 이상을 평균으로 기록하는 엄청난 선수였고, 거빈은 이를 묵묵히 뒷받침하는 백업으로 23분의 평균출장시간 동안 14.1득점이라는 괜찮은 기록을 남겼다.
이후 어빙이 뉴욕 네츠로 이적하자 거빈은 팀의 주전 스몰포워드로서 대단한 활약을 하며 ABA 최고의 스타 중 한명으로 자리매김했다. 결국 샌안토니오 스퍼스는 이런 거빈을 1973~74시즌 중반에 데려오게 되었다. 이후 ABA가 NBA에 합병되면서 NBA 팬들은 이제 ABA 슈퍼스타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4. NBA 무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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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안토니오에서 거빈은 평균 20득점 이상은 기본으로 기록하며 슈팅 가드로서는 최초로 3연속 득점왕에 올랐을 정도로 엄청난 활약을 하였지만 사실 전형적인 슈팅 가드는 아니었다고 한다. 당시 스퍼스의 시스템은 1가드-3포워드-1센터였고 거빈은 스코어링 스몰 포워드의 역할을 소화해 내었다.
거빈은 다재다능 해야 가능한 스몰 포워드의 역할을 골 밑, 미드레인지, 장거리슛 등등 모든 방면의 공격력으로 커버했다. 사이드에서 오프볼-무브 중에 패스를 받아 골 밑 득점을 하거나, 포스트업에서 양 손을 모두 사용하는 런닝 훅슛으로 득점을 했고 외곽에서 공을 잡으면 드라이브 인 해서 장신 인사이더들이 손도 못 댈 핑거롤 레이업으로 득점을 하기도 했으며, 컷인 능력도 뛰어났고, 아무리 수비가 2중 3중으로 타이트하게 붙어도 결국에는 슈팅루트와 각도를 찾아내어 골을 성공시켰다.
이렇게 가드와 포워드를 자유자재로 옮기는 거빈을 보고 사람들은 '''스윙맨'''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그야말로 최초의 스윙맨인 셈.[10]
거빈의 득점력은 대단했는데 특히 1978년 벌어진 데이비드 톰슨과의 득점왕 대결은 백미로 꼽힌다. 거빈의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데이비드 톰슨은 '''73점'''을 꽂아넣어 거빈으로부터 58점을 앞선 상태였는데, 거빈은 긴장 때문인지 첫 여섯번의 야투를 모두 날려버렸지만 이후 침착을 되찾고 1쿼터에만 20득점, 2쿼터에는 '''무려 33득점'''[11] 을 득점한 거빈은 그날 경기에서 63득점을 기록해서[12] 득점왕에 등극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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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팀전력 탓에 우승은 경험 할 수 없었다. 거빈은 자신의 팀을 세번이나 컨퍼런스 파이널로 올려놓았지만 워낙 상대팀들의 전력이 캐사기였던 탓에 이길 수가 없었다.[13] 하지만 까고 보는 사람들은 거빈이 팀을 우승권으로 이끌 수 없는 스코어러라고 까기도 했다.[14]
말년에 샌안토니오 스퍼스를 떠나서 시카고 불스에서 1년을 보낸 거빈은[15] 이탈리아 리그의 Banco Roma팀에서 한 시즌을 더 뛰었다. 이미 35세가 넘었지만, 평균 26.1점을 득점하며 맹활약했고, 나중에는 39세의 나이로 CBA의 Quad City Thunder 팀에서 한 시즌을 뛰며 평균 20.3점을 기록하기도 했다.
5. 플레이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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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했듯이 스몰 포워드와 슈팅 가드를 오고가는 만능적인 공격력이 그의 진면목으로, 가히 당대 최고의 스코어러 중에 한명이었다. 커리어 통산 25000득점을 넣는데, 야투율은 5할을 넘는다!
특히 이제는 농구의 기본처럼 여겨지는 '핑거롤'은 거빈의 주무기였는데, 윌트 체임벌린과 커니 호킨스의 핑거롤을 본 거빈은 줄리어스 어빙과 함께 핑거롤을 극한으로 수련했다. 특히 손목을 뒤로 꺾어도 손가락 끝이 팔목에 닿는 놀라운 유연성까지 보유하고 있던 거빈은 페인트존 안에만 있다면 어느 각도에서건 스핀 먹은 레이업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16] 보통 선수들이 한 두 걸음 더 치고 들어가야 할 지점에서 공이 이미 림을 향해 날아가고 있으니 상대 팀 입장에서는 미칠 노릇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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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빈은 레이업 뿐만 아니라 자신만이 갖고 있는 손목과 손가락의 터치를 이용해 응용된 훅슛이나 플로터 등도 자유자재로 시도했으며, 특히 양 손 모두로 이를 구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농구BQ도 좋아서 순간적으로 백보드를 이용해야 할 지, 아니면 그냥 림을 향해 던져야 할 지에 대한 슛 셀렉션과 판단력, 임기응변도 아주 좋았다. 매직 존슨은 트위터에서 "내가 본 선수 중에 일대일 본좌는 마이클 조던, 코비 브라이언트, 조지 거빈 순이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제리 웨스트의 경우는 한술 더떠 '''"돈내고 볼만한 유일한 농구 선수"''' 같은 발언도 했다.
수비수로서는 일대일 수비능력이 뛰어나지는 않았으나, 대신 패싱라인을 차단하는 능력이나 헬핑은 매우 뛰어났다고 한다. 역대 가드들 중 블록슛 1위에 랭크되어 있는 선수이기도 하다.
특이점으로 경기 중에 버저비터를 꽂아넣든 상대 선수가 도발을 하든 항상 똑같은 얼음장같은 얼굴 때문에 The Iceman이라는 별명을 얻었다.[17]
6. 그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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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도 초반까지 농구화 시장을 석권하고 있는건 나이키가 아니라 컨버스였는데, 나이키는 이에 도전장을 내밀면서 모제스 말론과 조지 거빈을 내세워 홍보에 나섰다. 이때 제작된, 거빈이 얼음 왕좌에서 백만불짜리 미소를 날리는 이 포스터는 대단한 인기를 끌어 '''포스터 판매량이 나이키 운동화 판매량을 앞서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으며 1982년 짜리 포스터는 지금도 경매에 나오면 상태가 꽤 안 좋더라도 꽤 가격이 나간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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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불스에서 선수 생활을 할때는 이제 정상급 선수로 자리매김하고 있던 마이클 조던도 있었다. 당시 조던은 부상을 당했었기에 두 사람이 같이 호흡을 맞춘 경기는 20게임이 채 되지 않지만, 둘은 항상 농구에 관한 대화를 나누고 매일같이 일대일 농구 시합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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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이 고생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낸지라, 은퇴 이후에도 샌안토니오의 가난한 아이들이나 미혼모들을 돕는데 돈과 시간을 쏟으며 멋진 인생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교육을 받을 재정적 여건이 안되는 아이들에게는 기술 양성을 위한 전문학교이자 비영리단체인 「the George Gervin Youth Center」에 무료로 입학시켜주는 특혜를 주고 있으며, 십대 미혼모들을 위해 무료 주거시설을 마련해주고 있다고. 경기장에서는 '아이스맨' 이었지만, 밖에서는 누구보다도 따뜻한 남자.
[1] ABA 팀[2] 이탈리아 팀.[3] CBA 팀으로, 2001년에 해체됨.[4] 당시 TDK 만레사였으며, 스페인 팀이다.[5] 덕분에 경비 아저씨는 일요일에도 나와서 체육관을 열어줘야 했다고 한다;;[6] 현재의 디비전 2~4에 해당.[7] 이후 미네소타 대학교 감독으로서 케빈 맥헤일을 길러냈다.[8] Eastern Basketball Association. 1977년부터 '콘티넨털 농구 리그(CBA)'로 변경했다가 2009년에 사라졌다.[9] 당시 ABA는 NBA에 비해 후발주자인데다가 규모도 훨씬 작았기에 공격적인 스카우팅을 포함해 여러 시도를 했다. (3점슛, 덩크 콘테스트 도입 등) 최초로 고졸선수를 뽑은 것도 ABA였으며 NBA 팀과 계약된 선수들에게도 여럿 러브콜을 보냈다.[10] 스타일만 따지면 이전의 보스턴 레전드인 존 하블리첵이 원조 스윙맨이지만 스윙맨이라는 표현이 나온것은 거빈이 시초였다고 한다.[11] 2015년 1월 23일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소속 클레이 톰슨이 이 기록을 37점으로 갱신하기 전까지 역대 한쿼터 최다 득점 기록이었다.[12] 이것도 경기가 거칠어져서 감독이 3쿼터 중반부터는 거빈을 벤치로 불러들인 기록이다.[13] 매직 존슨과 카림 압둘 자바의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도 있었다.[14] 거빈은 훌륭한 선수였지만 후배인 마이클 조던처럼 게임리딩도 하고, 수비도 사기적으로 잘하는 등 다재다능한 선수는 아니고 득점특화형 선수에 가까웠다. (다만 리바운드 능력은 훌륭한 편이었다.) 실제로 농구에선 좋은 PG와 확률높은 공격을 해주는 빅맨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거빈처럼 득점에만 특화된 선수들은 혼자서 우승의 주축이 되기 힘들다. 사실 조던이나 매직 존슨, 래리 버드, 르브론 제임스같이 빅맨이 아닌데도 리그를 씹어먹는 선수들은 단순히 자기 포지션에서 요구하는 역할 외에 여러 역할을 하는 사기캐릭터인 경우가 대부분이라 거빈이나 존 스탁턴처럼 자기 포지션의 역할에 완벽할 정도로 충실한 외곽선수들은 어느 정도 한계를 보이기 마련이다. 스탁턴은 다행히 칼 말론이란 파트너를 얻어 우승권에 근접이라도 했지만, 거빈은 불행히 그렇지 못한 것.[15] 그의 트레이드 상대가 진 뱅크스와 존 팩슨이며, 후배인 앨빈 로버트슨의 자리를 만들어주기 위해서 트레이드 요청을 했다고 한다.[16] 원래 핑거롤은 위에 언급된 두 선수나 나중에 등장하는 패트릭 유잉처럼 빅맨들이 주로 쓰는 기술이었다. 레이업의 변형으로 골대 근처에서 손끝 감각을 살려 부드럽게 올려 넣는 수준의 기술. 그런데 거빈의 경우 골대와 상당히 떨어진 거리나 높이에서도 극강의 손끝 감각을 살려 말 그대로 공을 쏘아 보내곤 했고, 공은 그 자리에서 솟구쳤다가 그대로 그물에 빨려들어가는 모습을 보였다. 후대의 마이클 조던이나 (코비 브라이언트 이전에 레이커스의 주전 슈팅가드였던) 에디 존스 역시 완성도가 높은 핑거롤을 선보였으나 거빈처럼 정확하고 아름답기까지 한 핑거롤 마스터는 없었다.[17] 본래는 동료인 테일러가 "Iceberg Slim" 이라고 부른게 시초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