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크 로빈슨
1. 개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역사상 '''유일한 양대리그 MVP 수상자'''[1] 이자 신인왕, 정규 시즌 MVP, 올스타전 MVP, 월드시리즈 MVP를 모두 수상해 본 유일한 선수이다.
선수로서는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신시내티 레즈에서 영구결번된 레전드이며, 1966년 트리플 크라운을 기록한 메이저 리그 역사상 가장 위대한 타자 중 한 명이다.
메이저 리그 최초의 흑인 감독으로 1989년 볼티모어 오리올스를 이끌고 올해의 감독 상을 수상했지만, 감독으로서는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최초의 흑인 감독이라는 상징성으로 인해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서도 영구결번되었다.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통산 성적은 21시즌 동안 타율 .294, 출루율 .389, 장타율 .537, 2943안타, 586홈런, 1829타점, BB/K 0.93, wRC+ 153을 기록했다.
2. 선수 시절
2.1. 신시내티 레즈 시절
1953년 신시내티 레즈에 입단한 로빈슨은 3년간 마이너 리그에서 머물다 1956년 만 20세의 나이로 스프링캠프에서 주전 좌익수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그 해 .290 .379 .558 38홈런 83타점[2] 의 뛰어난 성적으로 '''내셔널 리그 신인왕'''을 수상했다.
이후에도 신시내티의 중심 타자로 활약하면서 20대 중반에 접어든 로빈슨은 The Judge(판사)[3] 라는 위엄있는 별명을 얻게 되었고, 1961년 .323 .404 .611 37홈런 124타점이라는 뛰어난 성적으로 '''내셔널 리그 MVP'''를 수상한다. 하지만 1961년은 로저 매리스와 미키 맨틀이 홈런 레이스를 펼치던 때라 크게 주목받지 못했고, 신시내티 역시 월드시리즈에서 M&M포와 화이티 포드의 뉴욕 양키스에게 우승을 내주었다.
1962년에도 로빈슨은 .342 .421 .624 39홈런 136타점이라는 다시 한 번 MVP를 노릴 만한 성적을 기록했지만 104도루의 마우리 윌스, 총루타 1위의 윌리 메이스, 타격왕의 토미 데이비스에 밀려 MVP 투표 4위에 그치고 만다.
이후에도 로빈슨은 신시내티의 중심 타자로서 활약했지만, 1965년 시즌이 끝난 후 신시내티는 로빈슨을 볼티모어로 트레이드 해버린다. 구단에게 고분고분한 성격이 아니었던 로빈슨을 껄끄럽게 여긴 빌 드윗 단장이 서른 살이면 적은 나이가 아니라는 이유로 그를 팀에서 쫓아낸 것이다. 하지만 로빈슨을 내보낸 후 신시내티는 성적과 흥행 모두 추락했고, 클럽하우스의 분위기 역시 와해되어 자니 벤치가 등장하고 나서야 분위기를 수습할 수 있었다. 결국 로빈슨의 트레이드는 크리스티 매튜슨 트레이드와 함께 신시내티의 흑역사가 되어버렸고, 드윗은 해임됐다.
2.2. 볼티모어 오리올스 시절
1966년 볼티모어 오리올스로 트레이드 된 로빈슨은 분노의 맹타를 휘둘렀다. 그 결과 .316 .410 .637 49홈런 122타점으로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4] 했고, '''아메리칸 리그 MVP'''를 수상했다. 더불어 그 해 월드시리즈에서도 샌디 코팩스와 돈 드라이스데일이 버티고 있던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으며, 로빈슨은 '''월드시리즈 MVP'''를 수상했다.
1970년 로빈슨은 .306 .398 .520 25홈런 78타점을 기록하며 부그 파웰과 함께 볼티모어의 타선을 이끌어 나갔고, 볼티모어 역시 월드시리즈에서 브룩스 로빈슨의 활약으로 빅 레드 머신이 가동되기 시작하던 신시내티 레즈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1971년 .281 .384 .520 28홈런 99타점을 기록한 로빈슨은 타이거 스타디움에서 열린 올스타전에서 '''올스타전 MVP'''를 수상했고, 월드시리즈에서도 6차전 연장 10회에서 얕은 중견수 플라이 때 홈으로 전력질주해 끝내기 점수를 만들어내는 활약을 펼쳤지만, 로베르토 클레멘테와 스티브 블래스가 버틴 피츠버그 파이리츠에 끝내 우승을 내줘야 했다. 시즌 후 볼티모어는 로빈슨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로 트레이드 했다. 그리고 볼티모어는 은퇴하지도 않았던 로빈슨에게 영구결번을 줬다.
2.3. 선수 생활 말년
1972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에서 크게 부진했던 로빈슨은 이듬 해 캘리포니아 에인절스에서 .266 .372 .489 30홈런 97타점으로 마지막 불꽃을 불태웠다.
1974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로 트레이드 된 로빈슨은 1975년부터 선수 겸 감독[5] 으로 뛰면서 '''메이저 리그 최초의 흑인 감독'''이 되었다. 그러나 투수진의 원투펀치인 짐 페리, 게일로드 페리 형제와 다투면서 이들을 트레이드하게 되는 촌극을 빚기도 했고, 타격 성적이 부진할 때는 자신의 성적을 위해 직권 남용으로 출전한다는 억지스러운 욕을 듣기도 했다. 결국 로빈슨은 3000안타 - 600홈런이라는 대기록을 눈앞에 두고 2943안타 - 586홈런에서 선수로서 은퇴를 선언하고 감독 일에 집중했지만 1977년 클리블랜드로부터 해고 처분을 받게 된다.
3. 명예의 전당 헌액
1982년 로빈슨은 명예의 전당 첫 투표 대상자가 되어 89.16%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첫 턴에 입성한다. 선수 시절의 명성에 비하면 득표율이 좀 낮아보이는데, 하필이면 메이저 리그 통산 최다 홈런에 빛나는 행크 애런이 그 해에 같이 투표 대상자가 되는 바람에 관심을 좀 나눠가지긴 했다. 명예의 전당에는 신시내티로부터 버림받은 기억 때문인지 볼티모어의 모자를 쓰고 갔다.[6]
3.1.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 JAWS - Right Field (5th)
4. 플레이 스타일
프랭크 로빈슨이 선수로 뛰던 시기는 투고타저가 극에 달했던 시절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락세가 오기까지 매년 3-4-5에 가까운 스탯과 30홈런을 보장해줄 수 있는 완전체형 타자였다. 또한 로빈슨은 투수들의 빈볼에도 절대 물러나지 않아, 선수 생활 통틀어 무려 7번이나 몸에 맞는 공에서 리그 1위를 기록했다. 주루에서도 타이 콥에 비견될 정도로 거친 주자였고, 수비에서도 몸을 사리지 않는 모습을 보이면서 골드 글러브를 수상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부상이 끊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로빈슨은 웬만한 부상은 무시하고 경기에 임했고, 또 몸을 사리지 않는 플레이를 펼쳤다.
5. 감독 시절
클리블랜드에서 해임된 이후 캘리포니아 에인절스와 볼티모어 오리올스에서 코치를 지냈고,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감독을 지내다 해임된 후로는 밀워키 브루어스와 볼티모어 오리올스 코치로 일했다. 그러던 중 1988년 칼 립켄 시니어[7] 의 뒤를 이어 볼티모어의 감독 직을 맡게 되었고, 초반에는 감독 부임 전 6연패, 그리고 부임 뒤 15연패로 도합 21연패라는 영 좋지 않은 기록을 세우며 출발했지만 이듬 해에는 54승을 기록했던 팀을 잘 정비해 87승 팀으로 변모시킨 공로로 '''올해의 감독 상'''을 수상하게 된다.
하지만 지도자 경력을 이어질수록 평판은 계속 나빠졌다. 몬트리올 엑스포스 감독 시절에는 골프나 치러 다닌다고 까이기도 했고, 선수 기용에 있어 스탯에 대해 너무 무신경하다는 비판을 듣기도 했다. 그리고 국내 야구팬들에게는 '''김선우'''의 메이저 리그 성적을 망친 원흉이라는 원성의 대상이 되었다.
결국 2006년을 끝으로 워싱턴 내셔널스 감독에서 물러난 로빈슨은 다시 감독으로 복귀하지 못하고 은퇴했다.
6. 사망
2019년 2월 7일, 지병인 골수암으로 로스앤젤레스에서 향년 83세에 세상을 떠났다.
롭 맨프레드 메이저 리그 커미셔너는 “메이저 리그는 60년 이상 우리의 친구이자 동료이며 전설이었던 로빈슨 전 감독을 잃었다는 사실에 깊은 슬픔을 느낀다”면서 “메이저 리그를 대표해 로빈슨 전 감독의 가족과 그의 팬들에게 깊은 애도를 표한다”고 밝혔다. 피터 앙젤로스 볼티모어 오리올스 구단주는 “로빈슨은 볼티모어 오리올스 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한 명이었고, 야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였다”고 강조했다. #
7. 이모저모
- 1959년 에디 매튜스와 경기 중 주먹다툼을 했는데, 이 이후로 백인들에게 살해 협박을 받자 직접 권총을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하지만 이로 인해 경기장에서 체포될 뻔 하기도 했다.
- 프랭크 로빈슨에 대해 보다 자세한 이야기를 알고 싶으면 이 글을 참조하길 바란다. [레전드 스토리] 4-6. 고독한 싸움꾼 프랭크 로빈슨
[1] 알버트 푸홀스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 MVP를 3차례 수상했지만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로 이적한 후에는 노쇠화로 성적이 폭락했고, 마이크 트라웃, 크리스티안 옐리치처럼 MVP급 강타자들 대부분이 소속팀과 장기계약을 맺는 추세임을 고려하면 양대리그 MVP의 기록은 먼 미래에서나 볼 수 있을 듯 하다. 현 시점에서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선수는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MVP를 수상하고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와 장기계약을 맺은 무키 베츠가 있다.[2] 당시 메이저 리그 신인 최다 홈런 타이 기록이면서 내셔널 리그 신인 최다 홈런 기록이었다. 1930년 보스턴 브레이브스 소속의 월리 버거가 신인으로서 38홈런을 기록했으며 이후 1987년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마크 맥과이어가 49홈런을 기록하면서 이 기록을 뛰어 넘었다. 그리고 2017년 뉴욕 양키스의 애런 저지가 52홈런으로 기록을 경신했다. 내셔널 리그 신인 최다 홈런 기록은 2017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코디 벨린저가 39홈런으로 기록을 경신했고, 2019년 뉴욕 메츠의 피트 알론소가 53홈런을 기록하며 메이저 리그 신인 최다 홈런 기록과 내셔널 리그 신인 최다 홈런 기록을 모두 경신했다.[3] 그리고 이 별명은 60여년 뒤 애런 저지에게 붙여졌다.[4] 이듬 해인 1967년 칼 야스트렘스키가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뒤 45년이 지나서야 미겔 카브레라가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다.[5] 로빈슨은 1969년부터 푸에르토리코 윈터리그에 참가해 감독 수업을 받아왔다.[6] 신시내티는 1998년에야 로빈슨의 20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한다. [7] 칼 립켄 주니어의 아버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