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케언 제도 집단 성폭행 사건

 


1. 개요
2. 상세


1. 개요


핏케언 제도에서 2000년부터 세계인의 주목을 받게 되는 일이 발생한다. 섬의 도주(島主, Mayor)를 비롯한 남자 7명[1]이 확인된 것으로만 40년 동안[2] 섬의 모든 여성들(성인 여성 15명, 여자 어린이 10명)을 미성년자 성폭행강제추행 등으로 마음대로 유린해온 것. 당연히 이는 범죄였지만 작은 사회답게 묵인되다가 어느 경관(순회경찰로서 연수를 받고 있었음. 여경이었다고 한다)에게 발각되어 언론을 통해 널리 퍼졌고, 결국 본국의 지시로 섬 인구와 맞먹는 수의 경찰, 사법관, 기자들이 섬으로 몰려들게 된다.
그런데 섬 사람들의 반응이 예상 밖이어서 사건이 더 일파만파로 퍼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행위들이 없었다고 부인하지는 않았는데, 남자들은 '이것은 섬 생활에서 어쩔 수 없는 적응이다. 외부 사람들이 이래라 저래라 관여할 수 없는 일이다. 과민반응하지 마라'라고 주장하고, 여자들은 대개 남자들을 옹호하면서 '나는 그때 13살이었지만 마치 20살처럼 성숙해 있었다'고 말한 것.

2. 상세


사실 이 재판이 관심을 끌었던 것은 여러가지 배경이 있었다.
  • 핏케언 제도 자체가 바운티호 선상반란 사건으로 성립된 섬이다. 더구나 외부 노출이 늘어나니 19세기 말에는 상당수 주민들이 인근 노퍽 섬으로 이주해버려서 인구가 더 줄어들었다. 때문에 이들은 외부 인구 유입에 상당히 반발이 강했다. 이들을 성범죄자로 기소한 것은 영국 법정인데, 가해자들은 자신들이 이미 오래 전에 영국의 지원을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섬은 영국이나 영연방 소속이 아니며, 영국법의 적용을 받을 이유가 없다고도 주장했다.
  • 이들은 미성년자와 관계를 가진 것을 폴리네시아적 관습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폴리네시아에서는 12세 이상의 여성은 성인으로 간주되었다.
    • 영국미성년자 의제강간 규정이 16세였는데, 이것이 폴리네시아 주민들에게 적절하게 공표됐는지 등의 논란이 있었다. 물론 의제강간을 제외하더라도 이들 주범이 강간을 저지른 것은 분명했지만, 의제강간을 제외하면 어디까지 강간이고 어디까지 합의된 성행위인지 구분이 모호했다.
  • 독립된 지역이 아니라 명백한 영국 영토라는 걸 알 사람은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 정부에 요청을 하면 이민부터 시작해서 여러 가지로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완전히 면피를 할 수는 없었다. 다만 지배계급에 속한 남자들조차 장기간 격리 상태라 정상적인 가치관을 제대로 배울 기회가 없었다는 점이 참작됐을 뿐이다. 이 사건과 관련해서 영국 추밀원은 핏케언 제도가 영국령인 것이 합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 이 섬은 영국의 해외 영토이다. 때문에 이들에 대한 재판은 영국 법원에 의해서 이뤄져야 했다. 그런데 총인구 47명의 섬에서는 사법부는 커녕 상주 행정인원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재판은 일반적인 경우라면 영국 본토에서 이뤄져야 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해당 용의자들이 섬의 성인 남성 거의 전부였기 때문에, 이들이 모두 본토로 가버리면 섬의 경제활동이 붕괴될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영국 본토의 사법인원들이 이들만 상대하겠다고 수만 킬로미터를 날아와서 수 년간[3] 재판을 진행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영국 정부가 같은 영연방이지만 별개의 독립국인 뉴질랜드의 사법부 인원들을 임명해서, 이들이 섬으로 찾아가서 영국 형법을 적용해서 재판을 진행하는 세계 사법 역사상 초유의 일이 발생했다.[4]
  • 기소된 이들 외에는 섬에 일할 사람이 없기에 이 기소를 섬에 대한 침략 행위라고까지 주장했다. 이 주장은 해당 지역 여성들을 위주로 해서 나왔는데, 애초에 인구 구성이 이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용의자들은 대부분의 피해자들의 인척이었다. 검찰은 '섬에 만연한 권력의 위협과 강요된 침묵 때문에 거짓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인구가 극히 적고 외부에서 유입되는 인구도 거의 없는 특수 환경에서 계속해서 후손을 남기려면 가임기 여성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최대한 많이 출산해야 한다는 것이 섬 사람들의 주장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성에 대한 제대로 된 교육과 자기결정권 부여 이후 설득이라는 최소한의 납득 가능한 절차가 필요했음에도 무시한 것은 용서받을 수 없었다.
결국, 재판 끝에 2004년 10월 24일, 한 명을 제외한 피고인 모두가 유죄를 선고받고 징역형을 받아 본토의 교도소로 직행함은 물론 성폭력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특별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영국 정부의 지시에 의해 전기, 도로, 전화, 상주 경찰서, 공공 학교가 설치되어 본국과 교류하게 된다.
그 사이에 영국의 어떤 의원은 "이런 기회에 섬이란 섬은 다 없애야 한다"는 발언을 하다가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영국 본토도 섬이긴 한데 여기서 말하는 것은 본토를 제외한 섬들, 그것도 현존하는 식민지라고 불리는 속령들을 다 없애자는 것으로, 전부 독립시키거나 가까운 다른 국가에 반환 또는 양도를 하자거나, 아니면 남겨둔 채로 인구를 싹 다 이주시키자거나 그런 주장으로 보인다. 이 발언의 의도는 이런 사건을 막기 위해 닫힌 사회가 될 여지가 높은 섬을 없애자는 것인데, 외부에서의 개입 등으로 해결이 가능함에도 이를 배제했다고 까였다. 하지만 그냥 자기들이 싸질러놓은 흔적인 식민지들을 포기하기 싫어서 핑계 대는 거라고 비아냥 듣기도 했다. 다만 핏케언 제도는 발견 당시 무인도여서 해당 없다.
극도로 고립되고 폐쇄적인 섬이라는 닫힌 사회에서 벌어지는 막장 상황의 한 사례라고 하겠다. 이후 세계 각국은 이런 사태의 재발을 막기 위해 각지의 꾸준한 교류를 추진 중에 있다.

[1] 이 섬의 총 인구가 47명이고 그 중 남성은 22명이었다. 이 중 남자 어린이와 노인층, 일부 양심 있던 이들을 제외하고 가담한 것.[2] 실제로는 얼마나 오랜 기간에 걸쳐 이뤄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조사 결과 드러난 것만 40년이다.[3] 이 사건은 1999년에 발견되어서 최종 판결은 2004년에 내려졌다. 적어도 4년이 걸렸다.[4] 과거 대영제국 산하에 있던 영토들 중에 오세아니아에 속하는 많은 지역들은 호주와 뉴질랜드가 각각 자치령(dominion)이 된 이후 이 두 나라의 관할로 넘긴 경우가 많은데, 핏케언 제도는 영국이 직접 담당하는 식민지(현 영국 해외영토)로 남겨 놓았다(현재는 다른 오세아니아의 다른 영국령 지역들이 죄다 독립해 버려서 남은 데는 이 곳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