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운티호 선상반란 사건

 

'''Mutiny on the Bounty'''
1. 개요
2. 사건 경위
2.1. 바운티에 관해
2.2. 항해
2.3. 타히티
2.4. 출항
2.5. 반란 그 후
2.6. 원인
3. 영화화
4. 반란자의 후손들
5. 이야기거리
6. 관련 문서


1. 개요


1789년에 일어난, 해양사에서 가장 유명한 선상반란 사건. 대부분 실패로 끝나는 선상 반란사(?)에서 드물게 '''사실상 성공'''[1]이라 할 수 있는 경우이기도 하고 동기의 특이함, 그 전개의 드라마틱함, 최후의 비극성 때문에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고, 여러 문학작품과 영화의 소재가 되었다. 앗! 시리즈의 7권인 '식물이 시끌시끌'에서 이 선박에 같이 탄 식물학자 데이비드 넬슨[2]의 시점에서 기록한 편지의 내용이 수록되어있어 이 당시의 상황을 자세하게 묘사했다.

2. 사건 경위



2.1. 바운티에 관해


바운티는 원래 1784년 ‘베티아’라는 이름의 화물선으로 건조되었으며 1787년 영국해군이 매입하여 바운티(H.M.A.V. Bounty)로 개명하였다. 돛대는 3개, 길이 28m, 폭은 7.6m, 적재량은 230톤이었다. 무장으로는 4파운드 대포 4문, 0.5파운드 대포 10문 그리고 머스킷 같은 개인 화기를 장비했다. 해군 함정으로는 가장 작은 축에 속하였기 때문에 해군 규정상 장교는 1명만 배치되었고 그가 곧 함장이 되는 것이었다. 규모가 큰 군함에는 보통 상륙작전과 선내 규율 유지, 반란 진압의 목적으로 육전대(해병대)가 배치되었으나 바운티는 크기가 작았기 때문에 그렇지 않았다. 바운티는 왕립 학회(Royal Society)로부터 타히티로 가서 빵나무를 받아 서인도제도로 수송하라는 임무를 부여 받았다. 빵나무는 값이 싸고 잘 자랐기 때문에 노예들에게 먹일 음식으로 제격이었기 때문이었다. 빵나무(약 1000그루)를 실어 물을 주고 기를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객실이 개조될 수밖에 없었는데 이로 인해 선원들이 과밀화됨으로써 나중에 오랜 항해 기간동안 그들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원인이 되었다.
유명한 제임스 쿡 선장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항해에 수석항해사로 동행한 윌리엄 블라이(William Bligh,1754~1817)가 함장으로 임명되었다. 블라이는 플리머스 태생으로 대대로 해군 집안이었다. 1787년 8월 16일, 블라이는 바운티의 함장에 임명되었다.
바운티의 탑승자는 총 46명으로서 44명은 해군 소속, 2명은 민간인이었다. 블라이 휘하에는 여러 간부선원들이 있었는데 그 중 최선임자는 해군성에 의해서 임명된 존 프라이어(1753~1817)였다. 바운티의 선원들의 대부분은 블라이가 직접 뽑거나 추천 받은 자들이었다. 예를 들어 윌리엄 페코버, 조셉 콜먼은 쿡 선장 밑에서 블라이와 함께 HMS Resoulution에 동승했던 자들이었다. 다른 선원들도 블라이와 같은 배를 탄 사람들이 많았다. 그 중에서 23세의 플레처 크리스천(1764~1793?)은 젠트리 계급의 부유한 가문 출신이었다. 저명한 판사 겸 동인도회사대학의 법학 교수였던 그의 형 에드워드 크리스천을 비롯해 그의 집안 출신들은 법률가들이 많았으나 그는 스스로 해군을 택했다. 크리스천은 블라이와 함께 서인도제도로 두 번 함께 항해한 적이 있으며 블라이로부터 항해술을 배웠다. 크리스천은 보수도 받지 않고 바운티에 승선했다. 바운티의 선원들은 대부분 30살 미만이었고 블라이는 33세였다. 탑승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간부 선원
평선원
평선원
이름
직위
이름
직위
이름
직위
윌리엄 블라이
함장, 영국해군장교
피터 링클레터
보급장
마이클 번
선원(음악가)[3]
존 프라이어
준사관, 항해사
존 노튼
보급장
토머스 엘리슨
선원
윌리엄 콜
준사관, 갑판장
조지 심슨
보급계
윌리엄 맥코이
선원
윌리엄 페코버
준사관, 포술장
제임스 모리슨
갑판계
아이삭 마틴
선원
윌리엄 퍼셀
준사관, 목수장
존 밀스
포수
존 밀워드
선원
토머스 허건
외과의
찰스 노먼
목수
매튜 퀸틀
선원
플레처 크리스천
부항해사
토머스 맥킨토시
목수
리처드 스키너
선원
윌리엄 엘핀스톤
부항해사
로렌스 리보그
조타수
존 윌리엄스
선원
토머스 레드워드
외과 조수
찰스 처칠
전투원
존 애덤스
선원
존 홀릿
견습사관
조셉 콜먼
병기계
존 섬너
선원
토마스 헤이워드
견습사관
존 새뮤얼
선장 사무원
매튜 톰슨
선원
피터 헤이우드
사관후보생
존 스미스
선장 당번병
제임스 발렌타인
선원
조지 스튜어트
사관후보생
헨리 힐브런트
음료계
로버트 팅클러
사관후보생
토머스 홀
조리사
에드워드 '네드' 영
사관후보생
로버트 램
정육계
데이비드 넬슨
식물학자(민간인)
윌리엄 머스프랫
조리사 보조
윌리엄 브라운
정원사(민간인)
토머스 버킷
선원
해군성은 블라이에게 또다른 임무를 주었는데 그것은 남아메리카 최남단의 항로가 아직 미개척된 상태이므로 조사를 겸해서 케이프 혼으로 가서 타히티를 들러 남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돌아 세계일주를 하라는 것이었다. 다만, 여의치 않을 경우 함장 재량으로 남아프리카 희망봉으로 먼저 가는 항로를 택할 허가를 얻었다.

2.2. 항해


1787년 11월 28일 바운티는 영국에서 출발했다. 블라이는 선내 여러 규정, 특히 식사 배급과 청소에 있어 지독하리만큼 엄격하게 감독했다. 항해 초기에는 블라이와 크리스천의 사이는 좋았다. 1788년 3월 2일 블라이는 크리스천을 임시 장교(acting lieutenant)[4]로 임명했다. 서열 2위인 존 프라이어는 장교가 아니라 준사관이었으므로 순식간에 크리스천보다 서열이 낮아져버렸다. 프라이어는 이에 대해 겉으로는 불만을 크게 드러내지 않았지만 블라이와의 관계는 크게 악화되었다.[5] 그로부터 1주일 후, 프라이어의 건의로 최초의 체벌이 일어났는데 그 대상은 매튜 퀸틀이었다. 죄목은 불손한 태도와 반항적인 행동으로 12대의 채찍질을 받았다. 1788년 4월 2일, 바운티는 케이프 혼에 접근했지만 기상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블라이는 항해일지에 "내가 여지껏 겪은 폭풍우 중 최악이다. 우박과 진눈깨비가 엄청나게 쏟아진다." 고 썼다. 배는 남쪽으로 가야 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북쪽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4월 17일 결국 블라이는 케이프 혼 항로를 포기하고 남아프리카의 희망봉 항로를 선언했다.
1788년 5월 24일 바운티는 희망봉 동쪽의 폴스만(False bay)에 정박하여 5주동안 수리와 보급을 하였다. 체류하는 동안 블라이는 크리스천에게 돈을 빌려주었는데 혹자는 이게 나중에 관계 악화의 원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7월 1일, 바운티는 호주 남부의 태즈매니아를 목적지로 다시 항해를 시작했다. 여전히 날씨는 추웠고 시계가 나빠 앞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블라이는 노련한 함장이었기 때문에 8월 19일 태즈메니아의 어드벤처만(Adventure bay)에 성공적으로 정박하였다. 그곳에서 다시 휴식도 하고 물과 나무를 보급했는데, 블라이는 여기서 슬슬 본래의 까칠한 성격의 발동을 걸기 시작했다. 현지에서 나무를 베는 방법이 마음이 안 든다며 목수장 퍼셀을 질책하다가 당장 배로 돌아가라며 불같이 화를 낸 것이다. 게다가 퍼셀에게 배급을 끊어서 굶겨 버렸다. 18세기 영국에서는 신사(gentry)[6]가 상대를 대할 때 상대가 평민 계급이라면 아무 상관이 없지만 같은 신사 계급끼리는 아무리 상관-부하 관계라도 지켜야 할 예절이 있었다. 이를테면 함장이 15살의 사관후보생의 이름을 부를지라도 Mr.를 붙여서 불러야 했으며 완곡히 부탁하는 형식의 어법을 써야했다. "Mr.스미스! 부탁 하나 하지. 사관실에 가서 Mr.헤이우드에게 갑판으로 올라오기를 정중히 요청한다고 전해주겠나?" 이런 식이었다. 그런데 평선원도 아닌 신사계급의 간부를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질책하고 밥까지 굶겨버리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욕이었다.
10월 9일에는 블라이가 바운티의 회계 장부에 최종적인 책임을 진다는 것을 보증하지 않는 한 자신은 장부를 작성할 수 없다고 프라이어가 선언했다. 외과의 허건(Huggan)은 완전 알콜 중독자였는데 제임스 발렌타인의 천식을 치료하던 중 혈액 감염으로 사망하게 만드는 의료사고를 냈다. 그러고는 블라이에게는 발렌타인이 괴혈병으로 사망했다고 허위 보고를 했다. 블라이는 식단에 따라 괴혈병이 발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모두에게 똑같은 식단이 제공되는데 발렌타인만 괴혈병으로 죽었다는 그런 뻔한 구라에 속아넘어갈 짬밥이 아니었다. 허건은 즉시 술을 모두 압수 당했다. 타히티에 도착이 다가오자 블라이는 허건에게 명령에 선원들의 성병 검사를 실시했으나 모두 음성이었다.
1788년 10월 26일 바운티는 드디어 타히티에 정박했다. 항해 거리는 50,163km였다.

2.3. 타히티


타히티 원주민들은 바운티의 방문을 열렬히 환영했다.동영상 타히티인들은 쿡 선장의 방문 이래 대대로 유럽인들에게 친절히 대해왔다. 그들은 흰 피부를 가진 유럽인들을 신격화했고 특히 쿡 선장 같은 고위직은 불멸의 존재로 여겼다.
타히티 왕국은 여러 부족이 있었고 포마레 1세 왕이 통치하고 있었다. 타이나(Tynah) 추장은 15년 전 쿡 선장과 같이 타히티를 방문했던 블라이를 기억하고 반갑게 맞이했다. 블라이는 타이나에게 거울을 비롯한 유럽의 여러 신기한 물건들을 조지 3세 국왕 폐하의 선물이라며 주었다. 타이나는 답례로 무엇을 주면 좋겠냐 바나나, 야자, 빵나무 등등 뭐든지 주겠다고 하자 블라이는 "빵나무 그거 좋겠네요. 빵나무만 주시면 됩니다."고 답했다. 그러자 타이나는 어이가 털린 표정으로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더니 이내 크게 웃었고 주변의 원주민들도 따라 웃었다. "널린 게 빵나무니 마음대로 가져가시오."
블라이는 크리스천을 빵나무 묘목이 담길 화분의 흙을 만드는 책임자로 임명했다. 1788년 12월 10일, 외과의 허건이 사망했다. 바운티는 타히티에 5개월동안 머물 예정이었는데 선원들에게는 선상 생활에 비교할 수 없는 천국이었다. 원주민들은 성에 대해 매우 개방적이어서 선원들은 원주민 여성들과 매일 파트너를 바꿔가며 난잡한 관계를 가졌고 크리스천을 포함해 18명이 성병에 걸렸다. 크리스천은 마우아투아(Mauatua)라는 원주민 여성과 사귀었는데 자신의 옛 애인의 이름을 따 '이사벨라'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블라이는 원주민 여성과 관계를 가지지 않았음에도 부하들에게는 교제를 허락했는데 처음에는 일만 잘하면 그 정도야 눈 감아줄 수 있다는 생각이었지만 시간이 지나 부하들의 나태함이 도를 넘어서자 슬슬 인내심에 한계가 오기 시작했다. 결국 어느날 항해일지에 다음과 같이 썼다. "내 평생 이런 부하놈들은 처음이다" 그 분노의 타겟은 크리스천을 향해가고 있었다. 크리스천이 이사벨라에 빠지고 업무를 소홀히 하는 등 나태함을 보이자 블라이는 다른 부하들과 타히티인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그를 질책했다.동영상
선원들은 일하면서 삽, 곡괭이, 로프 등 장비를 잃어버렸는데 이것은 해군 규정 위반이었다. 블라이는 채찍질을 명령했다. 분위기는 점점 험악해져가고 있었고 1789년 1월 5일 견디다 못한 처칠, 밀워드, 머스프랏이 소형 보트와 화기와 탄약을 가지고 탈영했다. 블라이는 이 탈영을 간부인 크리스천과 헤이우드가 막아야 함에도 도리어 돕거나 묵인했다고 강하게 의심했다. 처칠, 밀워드, 머스프랏은 3주 후에 잡혔고 바운티 함상에서 엄청난 채찍질을 당했다.
1789년 2월에 빵나무가 다 자라 1,000개의 묘목이 선실을 가득 채웠다. 타히티에서 떠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껏 함장과 선원들 간의 갈등, 타히티에서의 꿈 같은 시간, 앞으로의 절망적인 선상생활 등을 고려하면 다가올 파국은 어느 정도 예정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1789년 4월 5일 바운티는 타이나 추장과 원주민들의 환송을 받으며 타히티를 출항했다.

2.4. 출항


블라이의 편집증적인 지휘와 분노는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그 분노의 표적은 주로 플래처 크리스천을 향했다. 블라이는 자신의 분노가 부하들에게 점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을 모르고 화를 낸 직후 또 정상적인 대화를 재개하려고 하는 태도를 반복했다.
1789년 4월 22일, 바운티는 통가 제도의 노무카에 당도했다. 거기서 엔데버 해협을 지나기 전 마지막으로 목재, 물 같은 보급품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블라이는 예전에 쿡 선장과 함께 노무카에 온 적이 있어서 그 곳의 원주민들이 예측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블라이는 크리스천을 보급품을 구해오는 책임자로 임명하고 원주민들이 위험하니 정박한 보트에 소총과 같은 무기를 가진 보초들을 세워두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크리스천은 그 지시를 어겼고 원주민들이 보트를 공격하려 하자 보급품 채취를 그만두고 서둘러 복귀해버렸다. 블라이는 크리스천에게 "이 빌어먹을 겁쟁이 같은 놈!"이라며 크게 분노하였다. 크리스천 일행이 보트를 비운 사이 원주민들이 보트에 있는 여러 도구들을 훔쳐 달아나 블라이는 원주민 족장을 잡아서 문초를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4월 27일, 크리스천은 그동안의 블라이의 갈굼에 지쳐 넋이 나가기 직전이었다. 크리스천이 일을 하다가 목이 말라 블라이의 코코넛을 훔쳐 먹었는데 블라이는 크리스천을 벌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전체 승조원의 럼 배급을 중단하고 식량 배급을 절반으로 줄여버렸다. 크리스천은 이제 탈영을 생각하며 근처 섬으로 가기 위한 보트를 만들기 위해 목수장 퍼셀에게 나무를 달라고 했다. 크리스천의 이상 행동을 눈치챈 사관후보생 조지 스튜어트와 에드우드 영이 크리스천에게 "배를 탈취하면 대부분의 선원들이 당신 편에 설 것이다"며 그를 부추겼다. 특히 스튜어트는 "선원들은 무엇이든지 할 준비가 되었다."고 크리스천에게 말했다.
결국 출발한지 20여일만인 1789년 4월 28일, 크리스천의 주도 하에 반란이 일어난다. 블라이 함장 편에 선 승조원들은 18명이었는데 이들 중에는 블라이함장과 사이가 안좋은 존 프라이어도 있었다. 이들을 구명 보트에 실어 망망대해로 떠나보내고 자신들은 바운티 호를 몰아 타히티로 도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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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반란 그 후


블라이 함장과 그의 부하들은 40여일간 태평양을 무려 3,800마일(6,000km)을 방황한 끝에 1789년 6월 14일, 티모르네덜란드령 항구인 쿠팡(Kupang)에 도착했다.[7] 그 즉시 함장은 네덜란드 관청에 반란에 대해 보고했고 이 소식은 영국 본국에 전해진다. 생존자들은 거의 아사 직전이었기 때문에 약 2개월은 쿠팡에 머무르면서 몸을 추스렀는데 여기서 몸이 너무 쇠약해져있던 식물학자 데이비드 넬슨(David Nelson)이 죽는다. 본국으로 돌아가는 배를 타기 위해 8월 20일 자카르타로 떠났으며 10월 16일 영국으로 가는 배를 탔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몸이 쇠약해져있던 4명이 추가로 사망한다. 1790년 3월 14일 블라이 함장은 영국에 도착한다. 1년여동안 군사재판을 받았는데 블라이 함장은 무죄를 선고 받았다. 영국은 해양 국가로서 국가의 근간이 해상 무역과 제해권에 있기 때문에 해적 행위, 선상 반란에 대하여 매우 엄하게 다스렸다. 때문에 반란자들은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잡아냈다. 영국 해군성은 에드워드 에드워즈(Edward Edwards) 함장이 지휘하는 프리깃 H.M.S. 판도라(Pandora)함을 파견해 반란자 색출에 나서게 된다. 반란자들의 말로는 뻔했다. 당시 지구상에서 유럽인들에게 발견되지 않은 곳에 들어가지 않는 한, 언젠가는 발각될 것이 뻔했다. '''하지만 일부가 발각되지 않았기에 이 반란 이야기가 유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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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을 전후한 이동 경로이다. 붉은 선은 처음 바운티 호가 빵나무를 채취하기 위해 타이티로 향하고, 이후 반란이 일어날 때 까지의 항로이다. 초록색 선은 보트로 쫒겨난 블라이 함장 일행이 쿠팡까지 표류한 항로이고, 노란색 선은 반란 이후 크리스천이 이끈 반란 선원들의 항로이다.
반란자들은 일단 타히티로 향했다. 그곳에서 한 무리는 타히티에 정착했고, 다른 무리는 영국 해군이 찾을 수 없도록 핏케언 제도무인도인 핏케언 섬[8]에 도착하여 바운티 호에 불을 질러 침몰시키고[9] 그 곳에 정착했다. 핏케언에 정착한 자들은 백인 남자 9명, 원주민 남자 6명, 원주민 여자 11명, 여자 아이 1명으로 총 27명이었다. 1791년 3월 21일, 판도라 함이 타히티에 도착했고 승조원들과 영국 해병대가 한 달여간에 걸쳐 섬을 토끼몰이하듯 포위하여 중심으로 수색해 들어간 결과 14명의 반란자들을 잡아들였다.
판도라 함은 나머지 반란자들을 찾으려고 했지만 어디로 갔는지 몰랐기 때문에 사모아, 통가 등 남서 태평양의 섬들을 무작정 뒤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핏케언 제도는 해도(Chart)에 아직 안 나타있었기 때문에 가지 않았다. 나머지 반란자 색출을 포기하고 본국으로 가기 위해 서쪽으로 뱃머리를 돌렸는데 1791년 8월 30일 아침, 암초가 많기로 유명한 오스트레일리아 북동부의 그레이트 베리어 리프에서 암초에 난파되고 만다. 여기서 31명의 승조원과 4명의 죄수가 익사하고, 89명의 승조원과 10명의 죄수는 살아남는다. 이들은 4대의 구명 보트에 나눠타고 2년 전에 블라이 함장이 죽을 고생을 하며 겨우 항해했던 길을 그대로 재연하여 쿠팡에 도착하게 된다.
배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이들은 쿠팡에서 남아프리카의 희망봉까지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배를, 희망봉부터 영국까지는 군함 HMS 고르곤(Gorgon) 함을 타고 귀향했다.
최종적으로 영국에 도착한 10명의 죄수는 군사재판을 받았는데 4명은 무죄, 6명은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최종적으로 교수형을 당한 건 3명뿐이었다. 사관후보생 피터 헤이우드는 사형 판결을 받았지만 유력가문의 자제였기 때문에 좋은 변호사를 사고 빽을 썼다. 재판부는 그가 어쩔 수 없이 반란에 가담했고 판도라 함이 도착했을 때 즉시 투항했기 때문에 이런 '여러 다양한 상황을 고려하여' 국왕 조지 3세에게 사면을 건의했다. 그는 결국 사면 받고 정규 장교로 임관까지 했으며, 몇십 년 후에 제독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당시 언론에서도 유전무죄 무전유죄라고 말이 많았다. 갑판 부사관 제임스 모리슨도 정상이 참작되어 사면 받았다. 수병 윌리엄 머스퍼랫도 결국 방면되었다. 1792년 10월 28일, 사형 판결을 받은 수병 3명(버킷, 엘리슨, 밀워드)이 군함 HMS 브런즈윅(Brunswick) 함의 돛대에 매달려 교수형 당했다.
핏케언 제도에 정착한 반란자들은 같이 간 원주민 남자들을 노예로 부려먹었기 때문에 몇 년 후 이들이 폭동을 일으켜 서로 싸우고 죽인 끝에 성인 남자 대부분은 사망했으며, 1808년 미국 포경선 토파즈 호가 이들을 발견했을 때는 성인 남자 1명(존 아담스)에 여자 8명, 어린이 19명만 있었다. 이 소식은 1810년, 영국에 전해졌는데 이때는 나폴레옹 전쟁 탓에 정신 없던 시기여서 군함을 보내 잡아들일 여력이 없었다. 1814년에 영국 군함 두 척이 다시 핏케언에 상륙, 조사하여 보고서를 올렸는데 해군성은 반란자들이 존 아담스를 제외하고는 다 죽었으므로 그냥 놔두기로 하고 아담스는 사면했다. 크리스천은 1793년에 죽었는데 존 아담스는 그도 살해당했다고 진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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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핏케언 섬을 방문한 영국 해군 함정에서 촬영된 핏케언 섬 정착자들의 후손들. 이 때 섬의 인구는 약 150여명으로 추정된다. 다시 100년이 지난 2010년대에는 6배인 1천 명이 됐다. 하지만 정작 지금도 핏케언 섬에 사는 인원들은 그 중에서도 소수다.
이후 이 반란이 누구의 책임인가가 여러 번 회자되었는데 재판을 통하여 공식적으로 블라이 함장은 군사재판에서 무죄로 인정받았고 태평양에 한 번 더 갔다와서 기어이 빵나무를 카리브해 제도에 운반하는데 성공한다. 그 후 나폴레옹 전쟁 당시의 공적으로 나중에는 오스트레일리아의 뉴 사우스웨일스 주 총독의 자리에 오르지만 또 반란에 연루되어 불명예 사임한다. 이 반란을 '럼 반란'(Rum Rebellion)이라고 부르는데 사건 자체가 럼주와 관련이 깊었기 때문이다. 당시 뉴 사우스웨일스 북부와 퀸즐랜드 주 지역에서 사탕수수 재배와 제조업이 꽤 번성했는데, 이를 노린 럼 밀수가 기승을 부리자 이를 단속하기 위해 블라이가 총독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블라이는 그 고집스러운 원칙주의를 또 발휘해서 강경책으로 일관하였고, 엄격한 대우에 불만을 품던 현지 출신 병사들이 럼의 공정한 배분을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블라이의 후임으로 총독 자리에 오른 래클런 매쿼리(Lachlan Macquarie)는 정책을 바꿔서 체포된 범죄자들을 사면하고 그 중 일부를 현지 관리로 임명하는 등의 유화책을 폈고, 이는 효과가 있어서 민심을 수습할 수 있었다.
2번이나 반란을 일으키게 한 블라이에 대하여 영국 언론은 비겁자, 폭군이라고 매도하고 시사 만화로 신나라 깠다. 상부에서도 이 골치아픈 자를 등용하다간 또 반란이 벌어져 골치아프다고 그를 한직으로 보냈기에 블라이는 결국 실질적인 해군 및 총독같은 권한이 없는 채로 살다가 1817년 영국 고향에서 가족들 앞에서 병으로 죽었다.

2.6. 원인


당시 민간 선박의 승조원들은 대부분 1회성 계약직이었고 군함도 대동소이하였다. 오히려 군함에 타게 되는 수병들이 더 막장인 때가 잦았다. 전투 중 죽을 것을 두려워해 기피했기 때문이다. 만취해 곯아떨어진 사람을 태워놓고 깨기 전에 출항한다든지 밤거리에서 두들겨 팬 다음 억지로 끌고가 태우는 방법이 꽤나 일반이었다. 물론 다른 배가 다 출항해 버려 어쩔 수 없이 타게 되는 때도 있었다. 조선군만 수병을 기피했던 것이 아니다. 조금 더 관심있는 사람들은 해양학회지나 관련 논문을 찾아보자. 간단히 언급하면, 상선에 탔던 사람이 항해를 끝내고 나면 해적선에 타고 그 다음엔 해군함에 탔다가 다음엔 상선에 타는 식이었다. 심지어 해군이 상선이나 사략선의 선원을 납치하려다가 역공받고 털리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선원은 항로를 보고 항해계약을 할지 안 할지 결정했다. 당시 배의 성능이 성능인지라 선원으로서 어느 정도 생활하다보면 대부분 거기서 거기만 다니게 되기 때문에 어느 항로로 가는지 알면 난도가 예상된다. 그런데도 이런 사태(대부분의 선원이 초행)가 일어난 이유는 앞의 주에서 언급했던 승선 절차 때문이었다. 정식 절차는 해변에서 계약자와 구직자가 출항 날짜와 항해 기간, 항로와 항해 목적, 임금이 명시된 계약서에 사인한 뒤 승선하는 것이었다. 계약 내용상의 항해 기간을 벗어나거나 명기된 것 이외의 목적으로 항해하거나 항로를 벗어날 경우 계약을 파기하고 중간에 내리거나 이럴 경우의 추가 임금까지 계약서에 명기하기도 했으나 선원 대부분이 문맹이고 어떻게든 배에 태우고 먼 바다까지 나온 뒤에 작성하(게끔 강요하)거나 그것조차 없이 구두로 계약(사실상 통보)을 끝내기도 했다. 게다가 초기에는 계약서조차 없었다. 더 심하면 아예 외국 선적의 상선이나 사략선을 붙잡은 뒤 선원들을 강제로 자신들의 선박에 태우기까지 했다. 한 예로 영국 해군은 독립한 미국 국적의 상선 선원들을 이런 식으로 납치해 수병으로 부려서 미영전쟁이 발발한 원인 중 하나를 만들었다.
영국 해군의 선상 반란에는 의외로 유구한 역사가 있다. 스핏헤드, 노어 군항에서 수병에서 장교들까지 가담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 처우가 개선되기도 했다. 스핏헤드의 봉기는 주로 요구 조건이 처우 개선(봉급 인상, 식단 개선 등)이라 결국 협상이 타결되고 주모자들도 처벌받지 않았다. 거기다 봉기기간 중에도 자체적으로 규율을 지키고 장교에게 해를 가하지 않았으며, 만약 프랑스 해군이 나타나면 즉각 봉기를 철회하고 맞서 싸우겠다고 천명했다. 반면 노어의 봉기는 의회 해산이나 프랑스와의 강화(당시는 프랑스 혁명 기간이었다.) 등을 주장하다가 스핏헤드의 봉기 결과(처우 개선)에 어느 정도 만족한 수병들이 떨어져 나감에 따라 봉기 지도부는 항구 봉쇄를 시도하다 호응하는 함정들이 없자 프랑스로 도주까지 시도했다가 결국 체포되어 사형당했다.
20세기에도 인버고든 항에서 수병들이 봉급 삭감을 반대하는 '''파업'''인 인버고든 항명을 일으켰다. 제1차 세계 대전 후 과도한 전비 부담으로 재정이 어려워진 행정부가 봉급을 삭감하면서 일어난 일. 군대라는 특수한 조직에서의 파업이란 게 '''반란'''과는 많이 다르다. 물론 바운티 호의 사건은 반란이 맞지만 스핏헤드, 노어, 인버고든 등의 사례는 반란이 아닌 파업이란 단어가 더 어울린다. 봉급 문제로 자기가 맡은 일을 안 하는 것이니... 다만 노어의 사례는 절대로 들어줄 수 없는, 정치에 관련된 요구를 내민 데다가 나중엔 적국으로의 도주까지 시도했기에 단순 가담자들은 처벌하지 않아도 주도한 자들은 모두 사형이나 유형(오스트레일리아 유배행) 등의 엄벌을 받았다. 이외에 호위함 HMS 허마이어니의 반란도 있는데 이것은 함장이 워낙 수병들을 잔혹하게 다뤄 결국 수병들이 함장과 일부 장교들을 살해하고 남은 장교들은 보트에 태워 버린 후 외국으로 도주한 사례로 영국 해군은 몇 년간 이들을 추적해 수십 명을 체포해 사형시키거나 유형을 보냈다.

3. 영화화


''' 역대 아카데미 시상식 '''
[image]
'''최우수 작품상'''
<color=#373a3c> '''제7회
(1935년)'''
<color=#373a3c>
<color=#373a3c> '''제8회
(1936년)'''
<color=#373a3c>
<color=#373a3c> '''제9회
(1937년)'''
어느 날 밤에 생긴 일

'''바운티호의 반란'''

위대한 지그펠트

창작물의 경우, 제작될 때마다 반란이 일어나게 된 계기가 함장의 폭정 때문인지, 수병들의 잘못인지에 대해 해석이 종종 뒤바뀐다.
가장 유명하고 고전으로 남은 작품은 1930년대 나온 버전으로서 함장(찰스 로턴)의 사이코스러운 연기와 표정이 당대의 유행으로 남은 작품, 단 이 작품에서는 함장은 비록 잘못이 있지만 반란은 더 안 좋다는 교훈적인 내용으로 구성된다. 사실 이 버전의 주인공이 된 모델은 반란에 가담했다가 기소된 후 무혐의로 나온 군의관이어서 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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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론 브란도가 출연한 1962년에 제작된 버전[10]에 나오는 함장(트레버 하워드)은 그야말로 사이코 그 자체. 선원들이 물놀이를 하는 걸 보고 아무 이유없이 그냥 기분이 나빠져 물놀이 한 선원들을 채찍질 하라고 하는 캐릭터다(...). 반란이 일어나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수병들을 몰아세우다가 결국 반란이 일어난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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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에 제작된 영화에선 함장은 함장 나름의 잘못이 있고, 선원들도 선원 나름대로 잘못이 있지만 결국 양쪽 다 나쁜 사람들은 아니고 각자의 사정이 있는 것으로 다뤄진다. 함장도 고지식한 원칙주의자이지만 자신들이 해야할 임무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사상을 가진 인물이고, 선원들 역시 험한 항해를 마치고 섬에 상륙하여 천국과 같은 태평양 섬에서 현지인들과 살면서 항해에 염증이 생긴다. 그러다가 함장의 재촉으로 섬을 떠나 항해를 하지만 선원들과의 갈등이 심해져 마침내 반란이 일어난다. 반란 후에 일부 선원들과 함께 작은 보트에 남겨 버려진 함장은 보트의 선원들을 수습하여 가까운 영국령까지 노를 저어가기로 하고, 배고픔과 목마름과 싸워가며 끝끝내 목적지에 간신히 도착하여 살아남는다. 선원들 역시 반란을 일으킨 후 섬으로 돌아가 같이 살려고 하지만 이들이 왜 돌아왔는지 눈치챈 섬 주민들의 반응이 싸늘하다. 결국 선원들은 같이 가기를 원하는 섬 사람들 일부 데리고 다시 정처없이 항해를 떠난다. 항해 와중에 선원들간의 갈등은 또 심해져 부함장이 나머지 선원들을 총으로 위협하는 단계까지 간다. 그러다가 항해도에 나와있지 않은 섬을 발견해 거기 상륙하고, 뒤늦게 마음을 돌린 선원들이 도망치지 못하게 바운티호를 불 태우며 영화가 끝난다. 양쪽 모두 결국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약간의 위안과 상처뿐인 결말을 맞이하는 셈.
1984년 버전은 초호화 캐스팅을 자랑한다. 안소니 홉킨스, 멜 깁슨[12], 리암 니슨, 로런스 올리비에, 다니엘 데이 루이스, 버나드 힐[13] 등이 출연했다. 영어 위키백과. KBS에서 더빙 방영한 바 있다.

4. 반란자의 후손들


현재 핏케언 제도에는 이들의 후손이 대대로 살고 있다. 영화를 통해 유명해져 외부의 동경을 한껏 받고 있지만 섬 사람들은 작은 사회 특유의 기질로 외부 사람들의 상륙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허락도 잘 하지 않았다. 섬의 소박한 생활을 방해받기 싫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외부인의 상륙을 막은 결정적 원인은 자신들의 치부를 감추려는 시도였음이 결국 밝혀졌다. 한편 섬의 인구증가 문제가 대두되자 상당수가 1856년에 노퍽 섬(Norfolk Island)으로 이주했다. 2010년대에 바운티 호의 반란자들의 후손은 1천 명 가까이 되지만, 지금은 노퍽 섬, 오스트레일리아 본토와 뉴질랜드에 95%가 살고 있고, 핏케언 제도에는 50명 정도만 남아있다. 영문 위키백과 참조

5. 이야기거리


심슨 가족》의 시즌 17 에피소드 18의 이야기 중 하나는 바운티호의 반란에서 소재를 따온 것이다.
미국 CBS 경쟁 리얼리티 서바이버(TV시리즈)/시즌13 쿡 아일랜드의 에피소드 9편을 보면 "가장 유명한 선상 폭동(Mutiny) 사건은 무엇인가?"라는 퀴즈가 나온다. 미국에서는 당연한 상식인지 다들 쉽게 맞춘다.

6. 관련 문서



[1] 후술되어 있지만 일부의 반란자들이 무인도였던 핏케언 제도에 들어가서 영국 해군의 추적을 피하는데에 성공했기 때문이다.[2] 하술하겠지만, 이 사람은 쿠팡 섬에서 쇠약해진 몸을 회복하지 못하고 죽었다.[3] 당시 범선에서는 바이올린을 연주할 줄 아는 선원을 두고 그 연주에 맞춰 간부의 감독 하에 운동 명목으로 강제로 춤을 추게 하는 것이 막 도입되고 있었는데 이를 블라이가 바운티에도 도입했다. 1984년작 영화에서는 춤을 추다가 처칠(리암 니슨 분)이 "빌어먹을 항해에 빌어먹을 춤이로군..."이라고 중얼거리자 프라이어(다이엘 데이 루이스 분)가 그걸 듣고 "크리스천! 영! 퀸틀에게 재갈을 물려."라고 한다. 퀸틀이 "내가 안 그랬어요!" 라고 대꾸하자 처칠이 자신이 그랬다고 자수했지만 프라이어는 퀸틀의 불손한 태도를 문제 삼아 둘 다에게 재갈을 물리라고 한다. 동영상 [4] 당시 영국 해군의 위관급 장교는 "lieutenant"라는 계급 단 하나뿐이었고, 함내에서 임관 일자가 빠른 순으로 서열이 정해지는 식이었다. 보통 최선임 위관급 장교인 1st Lieutenant가 부장에 가까운 직책이다.[5] 1984년작 영화에서는 블라이가 모든 선원들이 보는 앞에서 프라이어를 질책하고 해임하자 프라이어가 크게 반발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기록과 다른 영화적 각색으로 보인다. 동영상[6] 조선으로 치자면 양반, 일본으로 치자면 사족(사무라이)과 같은 지배계급이다. 신사 계급인 사람이 바로 gentleman [7] 그 동안에 여러 사람이 아사했으며 식료품을 구하러 상륙했던 토푸아에서 원주민의 습격을 받아 보급관 피터 링크레터 준위가 사망했다.[8] 핏케언 섬은 1767년 영국 군함 HMS Swallow 함의 15세의 사관후보생 Robert Pitcairn에 의해 발견되어 그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다.[9] 어차피 핏케언에 정착하기로 마음 먹었으니 필요도 없고, 만약 근처를 지나가던 배가 무인도 바로 앞에 둥둥 떠있는 바운티 호를 본다면 자신들의 생존에 큰 위협이 될테니 자침시킨 것이다.[10] 감독이 중간에 두 번 바뀌었고 최종적으로 선임된 루이스 마일스톤도 짤렸다. 그래서 그 부분을 연출한 사람이 다름 아닌 브란도...[11] 실제로도 항해술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뛰어나지만 고루한 원칙주의자였던 듯. 총독일 때도 본국의 훈령( 거래를 제한하라는 명령)을 그대로 강행하다 반란을 촉발하게 된다.[12] 도서전설에 따르면 실제 반란 주모자가 남긴 손자국 크기가 깁슨과 비슷하다고 한다.[13] 반지의 제왕에서 로한의 왕 세오덴 역, 타이타닉에서 에드워드 스미스 선장 역을 맡은 배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