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나급 헬기구축함
1. 제원
2. 개요
일본 해상자위대의 헬기 구축함.
하루나급은 1973~74년에 1척 씩 취역한 해상자위대 최초의 헬기 구축함으로, 헬기 3대를 탑재하는 것이 최대의 특징이다. 취역 당시 헬기는 HSS-2 시킹을 운용하였으나 SH-60로 교체되었다. 처음에 대잠 중심의 무장만 탑재하였지만, 1986년 근대화개장공사(FRAM)을 통해 함령을 8년 연장, 신형 전투지휘시스템을 탑재, 8연장 시스패로우 함대공 미사일 발사기, 팰렁스 CIWS 등을 새로 장비해 대공방어능력을 강화시켰다. 현재는 모두 퇴역하였으며, 13,500톤급 헬리콥터 모함인 휴우가급으로 대체되었다.
3. 상세
처음에 설계할 때 이 구축함의 선형을 검토하는데 있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이 있었는데 바로 함포와 비행갑판의 위치였다. 주포는 당시에 중요한 무장이었는데 헬기와 함께 2문의 함포를 배치하려다보니 위치의 결정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3가지 방안이 제시됐는데 이 방안들을 살펴보면 첫째는 비행갑판의 앞뒤로 함포를 배치하되 선체 내부에 격납고를 설치하는 방안, 둘째는 헬기 격납고를 선체 내부가 아닌 비행갑판에 설치하는 방안(주포는 헬기 격납고의 앞뒤에 설치), 셋째는 2문의 주포를 선수에 집중 배치하고 비행갑판과 격납고를 선미에 설치하는 방식이었다. 이후 헬기 이착함의 안전성을 고려하여 1안과 2안은 제외되었고 가장 적합한 3안으로 결정되었다. 물론 3안으로 추진할 경우 호위함 뒤쪽의 방어력이 약해지는 단점이 있었는데, 이를 보완하고자 RIM-7 시스패로우 함대공 미사일 발사기를 헬기 격납고의 위쪽에 설치함으로 해결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등장한 신형 헬기탑재 호위함은 1967년 7월에 기본설계를 마치고 1970년 3월부터 건조가 시작되었으며 선도함인 하루나(はるな, DDH-141)는 1973년 2월에 준공되었다. 하루나급 호위함은 2척이 건조되었으며 2개 호위대군의 기함으로 활동하였다.
참고로 하루나급이나 시라네급이나 모두 안드레아 도리아급이나 비토리오 베네토급 헬기순양함과 같은 이탈리아제 헬기 순양함의 운영 방식을 참조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이러한 하루나급이나 시라네급에 대해서 일본 내에서는 구 일본군이 운용한 항공순양함(그 중에서도 특히 토네급)의 컨셉을 계승했다고 평가하는 모양.[1] 말하자면 항공순양함을 축소한 항공구축함이라 할 수 있는 특성을 지녔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항공구축함이라는 특이한 컨셉의 함선들은 해상자위대가 본격적인 헬리콥터 모함인 휴우가급과 이즈모급을 획득하게 되면서 그 명맥이 끊어지게 되었다. 아무래도 어정쩡해서… 그리고 해상자위대 최초의 본격적인 헬리콥터 모함이었지만 아직 항공구축함으로부터 이어진 어정쩡함이 남아 있었던 휴우가급의 시점에서는 하루나급과 시라네급의 컨셉을 부분적으로 이어 받아 대잠전 능력을 중심으로 자체적인 전투능력을 갖추는 등 과도기적인 면모도 적지 않았으며, 그런 자체적인 전투능력 자체가 빠져 완전하게 헬리콥터 모함으로서 특화된 것은 이즈모급의 시점에서부터였다. 정리하자면 하루나급→시라네급→휴우가급→이즈모급 순으로 이어진 테크 트리를 거쳤다 할 수 있다.
1번함의 명칭은 하루나, 2번함은 히에이다. 이름의 유래인 공고급 순양전함에서는 하루나가 3번함이었고 히에이가 2번함이었지만 어째 바뀌었다.
4. 관련 루머
한국 밀덕계에서는 하루나급의 개발과정에서 해상자위대 내부의 암투에 관한 일화가 있었다고 이야기되어 오고 있었다.
해당 루머의 내용이 어떠하냐 하면, 본래 하루나급의 초기 설계에서는 함재기 격납고와 대잠미사일 발사기를 달기 위한 선미와 선수의 여유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주포를 1문만 싣는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함포·어뢰·미사일을 총괄하는 병과인 포뢰과에서 함포사격 능력의 부족을 문제 삼았기 때문에 주포를 2문으로 늘리게 되었고(이 과정에서 선수에 주포와 함께 탑재되는 대잠미사일 발사기의 수량도 감소) 그 결과 함재기 격납고가 크게 축소되고 그걸로도 모자라서 좁은 격납고 내에서는 함재기 정비가 불가능해져 정비를 위해서는 함재기를 비행갑판으로 꺼내야 되는 치명적인 결과가 나타나서 이후 항공기 운용을 총괄하는 병과인 항공과에서는 포뢰과에 대해 이를 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루머는 한국의 수많은 밀덕후들과 군사 전문가들이 사실인 것으로 오랫 동안 믿고 있었던 역사가 깊은 루머이다. 그러나 이 루머는 이후 카더라 통신임이 밝혀졌는데, 루머가 사실이 아님이 밝혀지기까지는 수십 년의 세월이 경과해야만 했다. 루머가 사실이 아님이 밝혀지기까지 오랜 세월을 필요로 했다는 점에서는 어떻게 보면 프랑스의 역대 사기 행각 전설과도 비슷한 사례일 지도 모른다.